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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회개

죄가 율법을 이용한다 롬7:7~13

by 【고동엽】 2025. 1. 2.

죄가 율법을 이용한다                    롬7:7~13                 

    

제가 로마서를 읽으면서도 항상 이해가 명쾌하게 되지 않았던 부분이,

아래 설교문에서 상세히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자세히 몇 번 읽어보고, 로마서 본문을 나의 버전으로 써 보려고 합니다.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 입니다./편

 

 

▲소파 밑 벌레 이야기

제가 사는 아파트는, 건물이 낡다 보니 온갖 벌레들이 삽니다.

그 중에 제일 심한 것이 바퀴벌레입니다.

침대 밑이나 싱크대 밑까지 다 점령했습니다.

 

작년 가을에 집이 좁아서 소파를 베란다에 놔둔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소파를 들추어보니, 백 여 마리 정도 되는 바퀴벌레들이

그 안에 우글우글하고 있었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순간적으로 다시 소파를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고민을 했습니다.

다시 소파를 들추고 벌레들을 잡기에는 마음이 너무 떨렸습니다.

그래서 그냥 놔둘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소파 안에 벌레가 우글우글 하고 있다는 생각에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소파를 들어내고 그 안에 있는 벌레들을 모두 잡았습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은 ‘복음은 내면의 죄를 보게 합니다’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 마음 깊숙한 곳에 꼭꼭 숨겨져 있는, 죄를 보게 하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죄를 보는 것은 끔찍한 경험이 될 수 있습니다.

마치 소파를 들었을 때 그 안에 우글거리는 수 백 마리의 벌레들을 보는

충격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충격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두 가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는 끔찍하기에 그냥 덮어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끔찍하지만 그 죄를 대면하고, 그 죄를 인정하며,

그 죄와 싸우는 것입니다.

 

 

◑율법은 죄가 아니다.

 

▶7절,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헬라어로 ‘메 게노마이’라는 단어입니다. 이것은 강한 부정입니다.

우리말로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결코 그럴 수 없다’,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다’

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율법의 선한 기능을 이야기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7b

 

율법은 죄를 알게 해 주고, 그 죄의 근원에 있는 탐심을 알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또 다른 의문이 생깁니다.

율법이 죄도 아니고, 오히려 죄를 알게 해 주는 것인데

왜 그 율법을 지키면서 오히려 악을 행하느냐는 것입니다.

 

여기서 오늘 말씀의 핵심 구절이자, 복음의 아주 중요한 진리가 선포됩니다.

그것은 죄의 권능입니다.

바울은 율법의 아이러니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말로 대답을 합니다.

 

 

죄가 율법을 이용한다.

 

▶8절,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악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그런 선한 율법을 행하는데, 오히려 악의 결과를 가져 오는 것은

'죄가 기회를 타서 율법을 이용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롬7:8절 말씀은, 우리의 내면을 보게 하는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요지는, 율법은 선한 것인데,

그 율법이 우리 안에 들어오면, 우리 안의 죄성에 의해서, 율법이 이용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하는 깊은 뜻은, 율법이 비록 선한 것이지만,

우리 안의 죄는, 그 율법을 삼켜 버릴 만큼 강력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우리 안의 죄성은 얼마나 강하고 교묘한지,

하나님이 주신 율법까지도, 죄의 수단으로 바꾸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이 본문을 어떻게 대하십니까?

저는 제가 처음 이 본문의 의미를 깨달았을 때의 충격을 지금도 가지고 있습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마치 소파 속의 수많은 벌레를 보았을 때처럼

저는 이 말씀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죄가 율법을 이용한다’는 개념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제 경험을 나눕니다.

당시 제가 신대원을 준비하던 청년시절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신앙생활을 했고, 목회자의 자녀로 자랐기에

나름대로 제 자신에 신앙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또한 신대원을 준비하며 하나님의 일에 대한 열정이 넘쳤습니다.

내 안에 ‘내가 신대원(신학대학원)에 가면 이렇게 해야지!’,

‘내가 목회자가 되면 이런 저런 일을 해야지!’ 라는 생각들이 넘쳤습니다.

 

그리고 내 안에 이런 열정이 넘치다 보니

내가 속한 청년부나, 그 안에 일하는 지체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정죄하고, 지체들 간에 충돌이 생겼습니다.

 

그로 인해 제 마음은 더 강퍅해지고 교만해 지고 있었습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몰랐습니다.

 

그러다가 이 말씀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 내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있는 벌레를 보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죄성을 보게 되었습니다.

 

내 안에 있는 죄는.. 하나님에게 헌신하려는 열정까지도 바꾸어서

상대방을 정죄하고, 판단하며, 나를 교만하게 만드는 죄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율법으로 인한 열심 때문에.. 다른 열심 없는 사람을 판단하고 정죄한 것입니다.)

 

이것은 나의 마음 안에 있는 신앙의 자부심이라는 소파를 들춰내고

내 안에 숨어 있는 끔찍한 벌레 같은 죄를 보게 하는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깨어지고, 회개 기도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경험은 저의 경험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모든 신앙인이 겪는 경험입니다.

복음은 우리 안의 죄를 보게 하고, 그 죄를 들춰내며, 하나님 앞에 깨어지게 합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오늘 말씀을 기록한 바울이라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바리새인이었고,

율법으로 흠이 없으며, 당대의 최고의 랍비인 가말리엘의 밑에서 배웠습니다.

젊은 시절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그 말씀으로 이스라엘을 바로 세우고자 하는 열정이 넘쳤습니다.

 

그러나 바울 안에 있는 는,

그 바울이 가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열정을 이용했습니다.

그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과 열정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잡아 죽이도록. 바울을 (역)이용했습니다.

 

그러던 바울이 어느날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그는 강한 빛에 꼬꾸라졌고, 하늘에서 이런 음성이 들렸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9:4)”

 

여기서 ‘박해하다’는 말은 헬라어의 ‘디오코’라는 동사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한 번 상대방을 못살게 구는 것이 아니라

계속해서 쫓아다니면서 그 사람을 몰아붙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의 빛 아래 자신이 드러났을 때

자신 안의 죄가 율법을 이용해, 예수님을 박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과 열정이 넘치던 그가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박해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후에 바울은 복음을 깊게 묵상하면서

죄가 우리 내면에서 어떻게 역사하고 있는지를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 롬7:7~13절을 썼던 것입니다.)

 

 

 

죄가 율법을 이용하는 과정

 

그렇다면 죄가 어떻게 율법을 이용합니까?

본문 말씀에서 바울은, 죄가 어떻게 율법을 통해 우리 안에 들어와서

우리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지를 세세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부분은 바울이, 인간의 내면을 아주 예리하게 통찰하고 있으므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래 3개의 단어로(8, 9, 10절에서) 이 과정을 설명하겠습니다.

 

8절, 기회를 타서 : ‘아포르메’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8

 

이 문구의 핵심 단어는 ‘아포르메’라는 단어입니다.

이 단어는 군사적인 용어로 많이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우리말로 번역하면 ‘교두보’라는 단어입니다.

 

적과 전쟁에서 적을 제압하려고 하면

먼저 적의 땅에 어느 정도 자신의 영역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영역에서 물자도 수송 받고, 군대도 진을 치면서 계속해서 싸워야 합니다.

 

쉽게 이야기 하면 인천 상륙작전이나 노르망디 상륙 작전처럼

적이 점령하고 있는 지역에 일단 군대가 주둔할 위치를 만드는 것입니다.

 

또는 산행을 할 때, 베이스캠프와 같은 것입니다.

어떤 산을 오르기 위해서 산 밑에 텐트를 치고 있다가

기회를 봐서, 날씨가 좋을 때 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죄가 우리 안에 들어올 때도 이와 같다는 것입니다.

죄는 일단 내 안에 어떤 거점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죄가 처음 내 안에 들어올 때 무언가 수단이 필요합니다.

그 수단을 ‘율법’이라는 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어떤 것을 하지 말라!’라는 계명이 내 안에 들어올 때

그와 함께 그것을 하고 싶은 욕망,

오늘 말씀에는 '탐심'이라고 번역된 ‘에피뒤미아’라는 것이 들어옵니다.  :8

즉 율법과 함께 탐심의 죄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음식을 먹을 때, 그 음식에 세균이 묻어 있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음식물은 선하지만 그 음식물에 묻어 있는 세균은 악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세균은 음식물을 통해서, 내 안에 들어와 거점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거점을 통해 활동하게 됩니다.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8절b에 나옵니다.)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  8b

'죽는다'는 ‘네크라’인데 생명력이나 기운이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죄가 우리 안에 들어와도, 율법이 없으면 생명력이 없습니다.

그런데 율법이라는 것이 계속해서 죄를 자극합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죄의 욕망을 부추깁니다.

 

무언가를 하지 말라고 나를 억압하면 할수록

그것을 하고 싶은 욕망이 끊임없이 우리를 옥죄입니다.

그리고 내 안의 욕망은 불타고, 죄는 점점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9절, 나는 죽었도다 : ‘아포네스코’

 

“전에 율법을 깨닫지 못했을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9

 

율법을 통해 내 안에 교두보를 확보한 죄는

이제는 율법을 통해 내 마음에서 영역을 확장해 나갑니다.

이 과정을 바울은 ‘아포네스코’라는 단어로 설명합니다.

이 단어는 죽음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그런데 죽음 중에서도, 죽음으로 인해 감각이 없어진 상태를 강조하는 단어입니다.

바울은 율법으로 죄는 살아나고, 반대로 나는 죽었다고 말합니다.

율법을 통해 죄는 힘을 얻고, 나는 그 죄에 대해 무기력하고, 무감각한 상태가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우리 안에 탐심을 이룬 죄는

이제 율법을 앞세워서 우리 마음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계명은 외적인 행위를 통해서, 내 안의 내면의 죄를 가려버립니다.

그러기에 죄가 내 마음을 점령해 가면서도, 그것에 위기감을 느끼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외적인 계명을 지키면서, 죄가 없다고 생각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외적인 율법을 잘 지키면 지킬수록,

그들의 내면에서는 죄가 그들의 마음을 점령해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은 ‘죄가 살아나고 나는 죽었다’라고 설명합니다.

이 과정을 쉽게 설명하기 위해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한국 역사에 보면 후삼국 시대가 있습니다. 후백제의 왕은 견훤이었습니다.

그는 노년에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고려로 넘어 갑니다.

그리고 고려군의 맨 앞에서 백제를 공격합니다.

그러자 백제의 군사들은 자신의 왕이 자신을 공격하기에

싸움도 하지 않고, 모두 항복을 하게 됩니다

 

죄가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 마음을 점령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율법을 앞세우고 죄에 대한 경계심을 없애고,

우리를 죄에 대해서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10절, 사망에 이르게 함 : ‘사나토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 :10

 

바울은 율법을 통해 우리가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죄로 인한 비참한 죽음의 상태, 죄에 지배를 받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우리 안에 들어오고, 우리를 점령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우리 안에 사망의 통치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죄는 율법을 통해 우리 마음 안에 들어오고,

율법을 통해 우리 마음을 무방비 상태로 만든 후,

율법으로 우리 마음을 점령하는 것입니다.

 

죄에 점령당한 인간이 아무리 선한 율법을 행해도

그것은 죄의 도구로밖에 쓰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그 율법으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까지 십자가에 못 박게 하는 것입니다.

이 전 과정을 설명하는 구절이 바로 11절입니다.

 

▶11절,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 :11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이유

 

여기까지 설명을 듣다보면, 우리는 처음에 가졌던 의문이 풀립니다.

 

12절,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처음에 말씀을 시작하면서 제기했던 ‘율법이 죄냐?’라는 의문입니다.

율법은 선한 것이지만, 우리 안의 죄가 율법을 이용해서 자신을 숨기고,

우리 마음을 점령해 가기 때문에

율법을 통해서 사망의 열매가 맺힌 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의문이 풀린 후에도 우리는 한 가지 의문을 더 가지게 됩니다.

 

▶13절,

그렇다면 전지전능 하나님이

율법이 오히려 죄의 도구로 사용될 것을 아시면서

왜 우리에게 율법을 주셨느냐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선한 율법을 악의 도구로 사용되게 만드셨느냐는 것입니다.

그 질문이 13절입니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13a

 

바울은 비록 율법이 죄의 도구로 사용되었지만

그 율법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바로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해서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  :13b

 

바울의 말의 핵심은

비록 죄가 율법을 이용해서 우리를 점령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조차도 죄를 드러나게 하고,

죄를 심히 죄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사탄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 자신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조차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던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그렇다면 ‘죄를 드러내고, 죄를 심히 죄 되게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입니까?

율법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아무리 율법을 행하여도

자신 안의 죄가 점점 더 자신을 점령해 가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율법이나 종교적 의식이 엄격해 질수록

그 안에서는 더욱 더 부패하고 악한 죄들이 넘쳐 나게 됩니다.

 

그 결과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리고 그제야 우리의 죄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선한 율법까지도 나를 위한 도구로 사용하게 하는

죄의 무서운 권능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해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의 종교행위에 대해서 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전적인 무능함을 인정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첫 단계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절망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복음을 받아들일 수 없을뿐더러

복음의 의미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었다고 말을 해도

나는 사회에서 착하게 살고, 종교적인 행위도 완벽하게 하는데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우리 내면의 죄를 보게 하고,

그동안 내가 얼마나 죄에게 이용을 당했는지를 보게 하며,

십자가 앞에서 나의 죄와 연약함을 통회하며 자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는 말 : 그리스도인의 내면의 싸움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죄가 율법이라는 것을 통해 어떻게 우리를 속이고,

우리 마음을 점령해 가고 있는지를 보게 되었습니다.

 

제가 말씀을 맺으며 조금은 예민한 말씀을 하나 드리려고 합니다.

저는 신대원에 입학하고 목회자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에 조금도 의심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시 태어나도 목회자가 되겠다는 확신이 내 안에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깨달은 것은

죄가 나의 신학공부의 경력이나 목회자의 직분 등을 통해

나를 공격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선하게 쓰임 받아야 할 경력과 사회적 지위를

죄가 이용한다는 것입니다.

 

저뿐만이 아닙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죄는 우리의 신앙의 경력과 교회에서의 직분, 위치 등을 이용합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일한다고 위장막을 쓰고

나도 눈치 채지 못하고, 남도 눈치 채지 못하게

내 마음을 점령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이 처했던 끔찍한 절망이었고,

저와 여러분들이 처하는 끔찍한 절망입니다.

 

여러분은 찰흙으로 공작물을 만들어 본 적이 있습니까?

처음 물기를 머금은 찰흙은 부드럽고, 주인이 만들고 싶은 모양대로 잘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일단 어떤 외형으로 만들어지면, 그 안에서 물기가 빠져나가고 단단한 틀로 바뀝니다.

그래서 이제는 딱딱하게 말라서 갈라지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마음이 이와 같지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처음 아무런 직분이나 신앙의 경력이 없었을 때에는

하나님 앞에 순수하고 진실한 마음으로 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신앙의 경력과 직분이라는 외형의 틀이 갖추어진 후에는

내 안에 은혜가 사라지고 점점 외형적이고 외식적으로 변해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방법은 한 가지 뿐입니다.

복음을 통해서 내 죄를 덮고 있는 모든 것을 걷어내고

그 안에 끔찍한 죄를 보는 것입니다.

 

처음 말씀의 예화를 통해서 말씀을 드렸듯이

소파를 걷어 내고 그 안에 살고 있는 벌레들을 대면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벌레들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으며, 어떻게 번식하고 있는지를 깨닫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복음을 통해서 그 벌레와 같은 죄들을 깨끗이 청소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싸워야 할 싸움입니다.

이 싸움은 한 번으로 되지 않습니다.

벌레가 계속해서 집 안으로 들어오듯이, 죄도 끊임없이 내 마음으로 들어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평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복음으로

나의 내면의 죄를 바라보고, 그 죄와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이란 무엇입니까? 바로 우리 내면을 보게 하고,

그 내면의 죄와 싸우는 능력이 바로 복음의 능력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란 바로 이 복음의 능력을 의지해서

내 내면을 바라보고, 죄와 싸우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은혜가 여기서 말씀을 전하는 저와 여러분들 가운데 충만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이 시간 말씀을 통하여 나의 내면을 보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내가 가진 경력과 위치를 이용해 내 안에서 나를 점령해 가고 있는

죄의 간계를 깨닫게 해 주심을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발견하고, 이길 복음의 능력을 우리에게 주심을 감사합니다.

 

이 복음의 능력을 의지해 죄와 싸워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피 흘리며 죄와 싸우셨는데,

나도 내 내면의 죄를 바라보고 십자가를 의지하여 싸우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의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 주시고,

죄를 보고, 죄와 싸울 수 있는 담대한 능력을 주시옵소서!

 

죄가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를 속이고 점령해 가더라도

나는 복음의 능력을 의지해서 그 죄와 싸워 승리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이 은혜가 사랑하는 우리 성도들 심령 가운데 항상 차고 넘치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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