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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회개설교 100편

죄와 죽기까지 싸우며 예수님 따르기 막9:42~50

by 【고동엽】 2024. 12. 29.

죄와 죽기까지 싸우며 예수님 따르기   막9:42~50     

※본문 막9장의 '너희 눈을 빼고, 손과 다리를 자르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구약의 희생제물'을 근거로 말씀하신 것이며,   

번제 드릴 때, 희생제물을 막 자르고 하잖아요.  

그리고 또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라' 하신 히12:1~4절과 연결해서 해석하고 있습니다. ◑2를 보세요.

 

.................................

 

◑도입 / '죄'에 대한 미국 일반 시민들의 인식 조사

 

자 오늘 설교 제목이 조금 셉니다. 
"죄와 죽기까지 싸우며 예수님 따르기" 제자도 시리즈 3강입니다. 

몇 해 전에 행해진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 중에 87%가 '죄가 존재한다'고 인정했어요. 
(현대 사조인 상대주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절대적인 죄가 존재한다고 믿지 않아요)

이것은 좋은 소식이에요. 미국인들의 87%가 '죄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인정했습니다. 

자 그렇다면 미국 대중들이 생각하는 나쁜 행동이라고 여겨지는,
즉 죄들은 무엇일까요? 

미국인들 중에 이러한 행동들이 죄라고 
50% 이상의 사람들이 대답한 내역들이 있어요. 

-간통.. 내가 결혼을 했는데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과 성관계를 갖는 거죠. 
81%가 그것이 죄다 라고 얘기했어요. 
반대로 말하면 19%는 그게 죄가 아니다 라고 얘기한 건데, 
어쨌든 많은 분들이 이것이 죄라고 인정했습니다. 

-인종차별.. 응답자 중 74%가 죄라고 인정했고요. 

-아주 나쁜 마약을 복용하는 것.. 65%가 죄라고 인정했어요.
마리화나 같은 것은 죄가 아니지만, 
코카인, 펜타닐 등 강력한 마약을 하는 것은 죄라는 거죠. 
35%는 마약이 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일반 시민들의 생각입니다)

-가게 점원이 실수로 잔돈을 더 많이 줬을 때, 그 잔돈을 돌려주지 않는 것..
63%의 사람들이 그것이 죄다, 훔치는 것이라고 인정했습니다. 

-낙태.. 오직 56%만이 죄라고 대답했어요. 
-동성간의 성행위.. 52%만이 죄라고 대답했고요. 
-허위로 세금 신고하는 거.. 그것도 52%가 죄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래도 어쨌든 일반적 미국인의 절반 이상은 이것들이 죄라고 인정을 한 거예요. 

▲지금부터 제가 말씀드리는 리스트는
미국인들의 50% 이하만이 죄라고 인정한 내역들입니다. 

-음란물(포르노) 시청.. 국민의 50%가 죄라고 얘기했어요. 
-가십, 뒷담화.. 하는 거는 47%, 
-욕설.. 46%가 죄라고 인정했고요. 
-혼전 순결을 버리는 것, 혼전 성관계를 갖는 것.. 45%가 죄라고 인정했고, 
-동성을 향한 성적 흥분을 갖는 것, 그것도 44%가 죄라고 인정했습니다. 

-자신의 배우자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한 성적 판타지를 갖는 것.. 43%가 죄라고 인정했어요. 

 

-술취함.. 41%
-도박.. 30%
-교회나 예배에 참석하지 않는 것.. 18%만이 그것이 죄다 라고 얘기했고요. 
-과식, 비만.. 17%만이 죄라고 인정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죄와, 일반적인 사람들이 바라보는 죄가 조금 달라 보여요. 

▲이러한 조사를 보고, 한 신학자가 4가지 결론을 내립니다. 
'일반 사람들이 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라는 관점에 대한 
4가지 결론을 내렸어요. 

1) 사람들은 한 행위의 죄악됨을 가늠할 때, 
'다른 사람들이 그 행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요. 

이게 죄가 되고, 죄가 되지 않는다의 기준이 뭐예요?
대중이, 남들이 생각하는 거라는 거죠. 

그러나 죄와, 죄가 아닌 것을 나누는 기준은, 사람이 아닙니다. 
죄와 죄가 아닌 것을 나누 는 기준은, 바로 하나님이고, 성경말씀이죠.

2) 사람들은 죄에 대해 생각할 때, 죄를 짓는 사람들의 '행위'에만 초점을 맞출뿐, 
그 행위를 하는 사람의 '죄성'에는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 죄악된 행위를 하는 사람의 타락한 본성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죄를 짓는 이유는, 
우리가 죄성을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우리가 죄를 지어서 죄인이 되는게 아니고,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짓는 겁니다. 
그래서 성선설보다 성악설이 더 성경적입니다. 

3) 사람들은 죄를,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에게 위해를 가하는 행위라고만 생각한다.

사람들은 말하죠. '내가 이렇게 하는 행동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 피해도 안 주는데, 
왜 이걸 죄라고 부릅니까?'

그러나 성경은, 죄를, 단순히 사람을 향한 위해로 볼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반항과 불순종이라고 분명히 가르쳐요. 

그러니까 죄의 근본적인 문제는,
다른 사람한테 피해를 주는게 아니에요. 

죄의 근본적인 문제는, 우리의 행위와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키고요, 
하나님께 대항하는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우리의 죄는, 하나님을 대적해서 저지르는 거예요. 
그것이 성경이 죄에 대해서 아주 심각하게 여기는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합니다.

4) 사람들이 죄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는 현상은 
그들이 스스로의 죄로부터 구원을 받을 필요를 느끼고 있지 않음이 분명해 보인다.
라고 그 신학자가 결론을 내렸어요. 

이 사실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들의 스스로가 죄로 인해 하나님의 진노 아래에 놓여 있음을 
먼저 인정해야 함을 시사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구원하기를 원합니다'라고 선포를 하는데 
죄에 대해서는 얘기를 많이 안 하는 경향들이 있어요. 

그러나 여러분 아십니까? 우리가 구원받는다는 것은, 죄로부터 구원받는 거예요. 
나의 존재 자체가 죄인임을 알지 못하면, 구원을 받을 여지도 없는 거예요. 

▲그렇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죄에 대해 일반적인 사람들과 
얼마나 다르게 생각하고 살아가고 있을까요? 
자 오늘 설교는, 그 점을 우리가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나의 죄를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요? 
그 고민을 같이 해보고자 합니다. 

자 오늘 설교 제목이 뭐였죠?
'죄와 죽기까지 싸우며 예수님 알아야 된다' 이게 이 설교의 결론입니다. 

오늘 우리가 배울 건 뭐냐 
우리의 죄성, 우리의 죄인됨 관해서 
우리가 제자로서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를 저희가 배우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로서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신의 십자가를지고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은, 
즉 예수님의 제자는 
죄를 어떻게 알아야 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죄를 극도로 심각하게 여기고,
죄와 죽기까지 싸워야 합니다."  *주제

오늘 제가 좀 극단적인 가르침을 드립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저희에게 아주 극단적인 가르침을 주셨기 때문이에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 짓는 죄에 대해 
심각하게 여겨야 한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1. 다른 성도들을 실족하게 하는 것보다,
차라리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것이 훨씬 낫다.. 라고 예수님께서 가르치십니다. 

직전 본문에서 요한은 예수님께 와서 이렇게 말합니다.

막9:38~41 '요한이 예수께 여짜오되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금하지 말라 내 이름을 의탁하여 능한 일을 행하고 
즉시로 나를 비방할 자가 없느니라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니라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자신들을 따르지 않는 예수님의 또 다른 제자를 막으려던
이 제자들의 교만한 모습을 보신 예수님께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으시고 
자신의 제자들이, 다른 제자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리 작고 어리석어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그를 실족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강한 어조로 가르치셨어요.  

 

(9:38~41절과 42절을 연결해 해석합니다. 접속사 kai, and로 연결)

막9:42 '또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연자맷돌이 그 목에 매여 바다에 던져지는 것이 나으리라'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사람은, 
혹은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사람, 혹은 하나라도 넘어지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더 낫다' 무슨 말이에요?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하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죄 짓고 그를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라고 말씀하신 거예요.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제자들에게 참된 제자도를 가르치시면서 
다른 제자들에게 짓는 우리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여기서 '실족케 하다(죄짓게 하다 라는 의미)'는 헬라어는 스칸달리죠 이죠. 
영어로 스캔들 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죠. 
나의 죄악된 행동으로 인해, 다른 성도들이 하나님을 향해 죄를 짓게 만들거나, 
혹은 믿음에서 떠나게 할 때, 그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굉장히 심각한 문제가 됨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눈에는, 그가 아무리 작아 보이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그가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제자라면, 
우리는 그를 겸손과 예의를 갖추어 다루어야 하고요. 
그가 실족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면서 예를 갖춰 섬겨야 된다는 거죠. 

그렇지만 오늘날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다른 성도들을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교육을 덜 받았다는 이유로
-돈을 덜 번다는 이유로 
-혹은 정치색이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심지어 다른 교단 혹은 다른 교회의 속해 있다는 이유만으로 
그들을 무시하며, 그들을 실족하게 하고 있는 일이 일어나고 있어요. 

그런 실족케 하는 사람들을 향해, 
예수님께서는 그런 사람들이 
'큰 맷돌의 목을 달고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편이 낫다'라고 강하게 말씀하고 계세요. 

 

42절을 새번역으로 보면 '또 나를 믿는 이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는 사람은, 차라리 그 목에 큰 맷돌을 달고 바다에 빠지는 편이 낫다' 
즉 '수치스런 죽음으로 죽는 게 차라리 더 낫다'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큰 맷돌은, 
당나귀가 끌어야만 돌아갈 수 있는 아주 큰 바위를 닦아내 만든 맷돌로써, 
사람의 힘으로 움직일 수조차 없는 아주 큰 (연자)맷돌이었습니다.

이 맷돌을 자기 목에 매고, 정말 깊은 바다에 빠져 죽는 편이 
차라리 다른 사람을 넘어지게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 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이게 왜 수치스런 죽음인가 하면, 시신을 건져올릴 수가 없으니까 (수습이 안 되니까)
제대로 장례를 치르지 못하게 돼죠.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사실 한국 사람들도 이거 잘 알거든요. 
시신을 수습 못 해서 장례를 못 치르면, 한이 된다는 민간 신앙이 있어요. 
가족들도 너무 한스럽게 여기고요. (물론 성경은 아니고요)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도, 사람이 불에 타서 죽거나, 혹은 물에 빠져 죽어서 
그 몸을 건져내지 못하고, 장례가 바르게 치러지지 못하면 
그 죽음이, 죽음 중에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라고 생각했던 문화였다는 것이죠.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모든 사람이 가장 두려워하는 이 수치스런 죽음(연자맷돌 매고 물에 빠져 죽는 죽음)이 
차라리 다른 성도를 실족하게 하는 죄를 짓는 것보다 더 나은 것이다'
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과장법이죠. 실제로 물에 빠져 죽으라는 뜻은 아니고, 그 정도로 큰 죄라는 거죠.

이 사실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성도를 실족하게 하는 우리의 죄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시는지를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자 물론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가 남들을 실족하게 했으면 
우리가 목에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로 진짜 문자적으로 뛰어들어야 된다고 말씀하신 것은 아니죠.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죄를 지어서, 그 사람이 넘어지면, 
그 사람이 믿음에서 넘어지고, 믿음에서 떠난 일이 있으면, 
'하나님 보실 때, 그거보다 끔찍한 일은 없다' 라는 겁니다. 

우리의 직분이 어떠하든지, 우리의 나이가 어떠하든지, 
우리가 사회에서 어떤 위치에 놓여 있든지, 
우리가 다른 성도들을 극진히 여기며 
예의와 겸손으로 대해야 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어요. 

그러니까 여러분 바다에 빠져서 목에 연자맷돌 매달아 죽는 거 싫으시죠? 예, 진짜 싫죠. 
저도 그렇게 죽기 싫거든요. 자 그거보다 더 싫어해야 될게 있어요. 뭐예요? 
다른 성도들한테 죄짓고, 그 성도가 넘어지게 하는 일을
저와 여러분이 더 하기 싫어하셔야 됩니다. 

▲교회생활하다 보면 우리는 때때로 자신의 직분이나 나이나 사회적 지위를 내세워서 
다른 성도들을 경멸하고 무시하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그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연자맷돌'을 떠올려요. 

교회에서 교만하게 행동하시는 분들이 있죠. 
남들에 대해서 아무렇지 않게 뒷담화 하시고, 내리깎고,
파당 만들고, 사람들을 몰아내려고 하고, 넘어지게 하고 하는 분들 보면요,
저는 항상 연자맷돌을 생각합니다. 
'차라리 연자맷돌을 목에 매달고 바다에 빠져 돌아가시는게 훨씬 낫다고 하셨는데..'

그리고 제 스스로도, 목사로서, 성도님 한 분 한 분을 대할 때마다
제가 연자맷돌을 목에 매고 바다 속에 던져져야 할 모습이 
하나님께 보여지지는 않을까 항상 고민을 하면서, 여러분을 대하려고 노력을 해요. 

저도 지금 이 경고로부터 안전하지 않습니다. 
제가 만약에 여러분을 실족하게 하면, 차라리 저는 제 목에 연자맷돌 매고 
저기 태평양 바다에 빠져 죽는 게 훨씬 나은 거예요. 

저는 젊은 목사로서 성도님 한 분 한 분 대할 때, 
바울사도가 젊은 목사였던 디모데에게 준 명령을 곱씹습니다. 

딤전5:1~3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버지에게 하듯 하며 젊은이에게는 형제에게 하듯 하고
늙은 여자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 하며 젊은 여자에게는 온전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 하라
참 과부인 과부를 존대하라' 

여러분 제가 여러분과 일대일로 이렇게 대화할 때 있잖아요. 
제가 항상 이 구절을 기억해요. 

저보다 나이가 좀 있으신 분은, 제가 어머니처럼 예의를 갖춰서 대하려고 하고요. 
저는 나이가 동년배이신 분들은 제 형제나 자매처럼 대하고,
제가 그분들을 무시하거나, 또는 다른 어떤 감정적 대상으로 바라보려는 그런 유혹들이 생길 수 있죠. 
그런 것을 느끼지 않게 하려고 부단히 저도 노력합니다. 

왜죠? 제가 그런 식으로 성도들을 대하기 시작하면 
결국은 그 성도들을 실족하게 만들기 때문이죠.

자 그런데 이 일이 목사인 저만 해야 되는 일인가요?
모든 성도들이 서로를 이렇게 예의를 갖춰서 겸손히 대해야만 합니다. 왜죠?
그렇지 않으면 결국 서로를 실족하게 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죠. 

▲바울사도는 스스로도 예수님의 제자로서 다른 성도들을 실족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살았어요. 

남의 믿음을 실족케 하는 일을 하지 않기 위해서, 굉장히 힘들게 살았던 분이에요. 
바울은,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사 먹는 일에 관한 질문을 받았을 때 이렇게 대답합니다. 

고전8:4~13절을 보십시오.

12절 '이렇게 여러분이 형제자매들에게 죄를 짓고, 
그들의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은 그리스도께 죄를 짓는 것입니다.
13절 그러므로 음식이 내 형제를 걸어서 넘어지게 하는 것이라면, 
그가 걸려서 넘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 나는 평생 고기를 먹지 않겠습니다.'

'혹시 내가 고기를 먹는 모습을 누군가 보고 
내 형제 자매 중에 보고, 그로 인해 실족하는 일이 있다면 
차라리 나는 평생 베지테리안으로, 채식주의자로 살겠다'고 지금 말씀하는 겁니다. 

자 바울은 왜 그렇게 했을까요? 내가 하는 행동이 죄는 아니에요. 
그런데 내 생각 없는 행동이, 다른 형제를 넘어지게 하면, 
차라리 내 목에 연자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져 죽는게 더 나으니까요.

그래서 우리가 굉장히 조심해야 되는 거예요. 
교회 생활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실족거리를 주지 않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된다고 
지금 바울사도와 예수님이 공통적으로 가르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성도들과의 관계 속에서 죄를 짓지 말아야함을 강조하시고 난 뒤에, 
우리가 우리의 개인적인 죄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또 분명하게 보여주십니다. ↙

◑2. 내가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보다
내 삶에서 눈, 손, 발 없이 살아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막9:43~48  

남들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 우리가 앞서 다 배웠죠. 막9:38~41
그 뒤에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가르치시기를
'스스로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경고 하십니다. 

9:43 '네 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곧 그 꺼지지 않는 불 속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손을 잃은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5 '네 발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찍어 버려라. 네가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발은 잃었으나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7 '또 네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버려라. 네가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 차라리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지금 예수님께서 '너희 손과 발과 눈을 다 자르고 뽑아내는 것이 더 낫다'는 말씀도 
지금 문자적인 명령은 아니에요.  42절처럼요.

예수님께서는 지금 우리에게, 물리적인 절단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절단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사지를 전달하고 눈을 뽑았어요. 
그래서 꼭 장애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고요. 

우리는, 나를 계속해서 죄를 짓게 하는 요소들을 철저하게 절단해 나가면서 
우리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겁니다. 

자 손과 발과 눈은, 우리가 하는 행위와, 우리가 가는 장소와, 우리가 바라보는 것들을 상징해요. 
무슨 말이냐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의 형태죠.
우리의 삶의 모든 면면을 다 포함해서 말씀하시는 거예요. 

우리가 특정 행위를 하고, 우리가 특정 장소에 가고, 
또한 우리가 특정한 것을 바라보는 근본적인 동기는, 
사실은 우리의 마음에서 나옵니다. 

그렇죠. 예수님께서는 오늘의 본문을 통해 강조하고자 하시는 바가 이겁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로서, 우리의 마음속 깊이 심겨진 죄성이라는 나무를, 
가지치기만 할 것이 아니라, 이 나무의 뿌리를 잘라(절단)야 되는 거예요. 

뿌리에 도끼를 대고, 그 뿌리까지 찍어내야만 
너희가 나의 제자로서, 신실하고 거룩하게 살아갈 수 있다..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자 우리가 우리의 죄성에 깊게 뿌리 내려진 이 마음을 
바르게 간수하지 못하면 
우리는 문자적으로 손과 발과 눈을 빼버리고 잘라서 없애더라도 
여전히 죄를 짓고 즐기며 살아갈 것입니다. 

여러분 아세요? 손발 없어도요. 죄지을 수 있습니다. 눈 없어도 죄 지을 수 있어요. 
우리의 마음이 죄악되기 때문에,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는 것이죠. 

다시 강조하지만, 오늘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문자적 가르침이 아니라 
비유법과 과장법이 사용된 가르침이에요. 

그러나 이 비유법과 가장법의 가르침이 
우리의 삶 안에 있는 죄의 심각성을 조금도 가볍게 여기지 않음을 또한 기억해 주세요. 
그만큼 우리의 죄성, 이 죄의 문제가, 하나님께 심각한 문제라는 겁니다. 

 

이 예수님의 비유법과 과장법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과 발과 눈과 같이, 
삶을 살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것들보다 더 중요한 분이셔야 함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죄를 짓는 것이 
너희가 지금 너희 손과 발과 눈을 잃는 것보다 더 심각하고 끔찍한 일이라는 거죠.

죄는 우리로 하여금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인, 생명에 들어가지 못하게 만듭니다. 
43절을 다시 보세요. '차라리 한 손을 잃은 채로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했죠. 

죄가 있으면, 그 죄로 인해, 우리는 생명에 들어가지 못해요. 

45절에 또 나오죠. '차라리 발이 죄를 지으면 발을 잘라버리고 
생명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라고 또 말씀하고 계세요.

'생명에 들어간다'는 표현은 무엇을 의미하죠?
생명에 들어간다는 것은, 47절에도 설명이 나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 

 

바로 하나님의 나라 안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을 사랑하며 경배하고 섬기며 
그분의 영광과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영원히 참된 행복을 누리는 삶이 
그게 바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고요.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을 의미하죠. 

우리가 이러한 궁극의 행복과 영원한 삶에 미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죄고.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 우리의 죄의 문제를 
예수님을 통해 분별 받아야만 합니다. 

또한 예수님께 죄를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죄를 미워하고 멀리하면서 살아갈 때에만 
우리가 예수님의 제자 임을.. 증명해 나가는 길이 된다는 것이죠. 

▲죄로 인해 하나님을 얻지 못한 결과는 무엇이죠? 
그것은 지옥 게헨나에 던져지는 것입니다. 

게헨나는 '힌놈의 골짜기'라는 말인데,   *게(땅, 골짜기) +헨나 (힌놈)
예루살렘의 남서쪽에 위치한 쓰레기터 입니다.
그래서 거기에 항상 불이 꺼지지 않고 타올랐고요, 
또 죽은 동물의 사체도 거기에 버렸기 때문에, 구더기도 늘 꿈틀거렸던 곳이죠. :48

사람들이 지옥이 뭔지 잘 모르니까, 예수님은 이 이미지를 빌려와서 설명하신 거죠.

'너희가 눈과, 손과, 발로, 하나님께 죄를 지으면 
그것에 대한 죄값은, 영원히 게헨나, 정말 끔찍한 죽음의 장소에서 
영원히 고통받는 것이 그 결과가 될 것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경고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하나님의 진노의 형벌을 받는 장소인 게헨나에서는 
구더기들도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고 계세요. :48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들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 :48
이 표현은 이사야66:24절을 인용하신 거예요.
이것은 하나님을 거역한 자가 맞이하게 될 고통스럽고 비참한 결과를 보여주는 구절이에요. 

그게 누구의 결말이라고요? 
하나님께 죄를 짓고, 지금 사지 멀쩡하게 살교 있지만, 
그 사지로, 눈으로, 자기 몸으로 하나님께 죄를 지은 사람의 그 끔찍한 결말이 
이런 게헨나에 던져지는 것이다.. 라고 예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강하게 경고하신 거예요.

▲본문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손을 잘라라, 발을 잘라라, 눈을 뽑아라고 하셨죠. 
지금 주어가 누구예요? 
예수님이 대신 잘라 주시는 거예요? 예수님이 대신 뽑아 주시는 거예요?

아니에요. 너희가 너희 스스로의 손을 자르고, 스스로의 발을 자르고, 
스스로의 눈을 뽑아야 된다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능동태 동사를 계속 사용하십니다. 

 

이게 무슨 말이냐?
내가 내 자신을 부인하는 거예요. 내가 내 십자가를 지는 거예요. 
내가 능동적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거예요. 

우리는 스스로 우리 자신의 살아있는 <희생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림으로 
끊임없이 죄와 싸워 나가야 됩니다. 

'희생제물'이라는 말을 쓴 이유는, 
본문에 '불과 소금'이라는 말이 나오죠.

49절 '모든 사람이 다 소금에 절이듯 불에 절여질 것이다.'

구약시대 때 소금과 불에 절여지는 대상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려지던 번제의 희생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앞서 '뽑고, 자르고, 뽑아라'는 표현도,  :43~48
49절과 연결하면, '번제물로 드려라'는 것이죠.

예수님께서 지금 무슨 말씀하신 거냐면, 
우리가 죄와 싸움에 있어서 기억해야 될 이미지가 뭐냐면
바로 구약 시대 때, 제사제물들이 소금과 함께 절여지고, 불에 다 타서 
전체가 번제로 다 하나님께 드려졌던 것처럼,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가, 그런 희생제물의 모습이 되듯이,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모습이 되어야 한다는 거죠.

십자가에서 자기 죽음을 받아들이는 거예요. 
그게 나 자신을 부인하는 거죠. 
자기 십자가를 져야 돼요. 지금 그 말씀을 계속해서 우리에게 반복하시는 거예요. 

근데 이 진리를 바울사도 또한 동일하게 가르쳤습니다.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번)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자 우리가 살아갈 때 조심해야 돼요. 세상의 관점으로 살아가면 안 돼요. 
우리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희생제물이에요. 

우리의 '몸을' 하나님께 살아있는 희생물로서 드릴 때만  롬12:1
우리가 죄와 싸울 수 있다는 겁니다. 

더 나아가서, 성경은 죄와의 싸움을 굉장히 극단적으로 표현합니다. 
왜 그러냐?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해결하시기 위해 
극단적인 모습을 취하셨기 때문이에요. 

히12:1절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죄는 항상 나를 얽어 맵니다. 그것을 벗어버리고, 찍어내 버리고(막8:45)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참음으로써(인내로써) 달려갑시다.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눈을 뽑고, 팔을 찍어내 버리고, 다리를 자르면서
이 믿음의 경주를 달릴 때, 그것을 억지로, 괴로움 가운데 경주하는 게 아니라,
'기쁨을 위하여, 기쁨으로' 달리라는 것입니다. :2
왜냐면 상주시는 이를 바라보기 때문이죠. 결국 예수님은 보좌 우편에 앉으셨죠. :2

여러분, 죄와의 싸움이 힘들 때 예수님 생각하세요. 
예수님이 참으신 고난과 수치가 무엇이었는지 생각해야 됩니다. 
그리하면 여러분은 낙심하여 지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4절 '너희가 죄와 싸우되 아직 피흘리기까지는 대항하지 아니하고'

저와 여러분은 죄와 맞서 싸우지만, 아직 피를 흘리기까지는 아니죠. 
그런데 피를 흘리기까지 싸우며 대항하신 분이 있어요. 바로 예수님이시죠. 

피를 흘린다는게 무슨 뜻이에요. 죽는 거죠. 
예수님이 우리의 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죠. 
그 정도로 우리 죄를 심각하게 여기셨고요. 
죽음을 각오하고 죄와 싸우며 나가신 거죠.

자 지금 본문 막8장의 예수님의 가르침과 일맥상통하죠. 
손이 죄를 지으면 손을 잘라버리고, 
발이 죄를 지으면 발을 잘라버리고, 
눈이 죄를 지으면 눈을 뽑아버리고... 
그렇게 너를 죄짓게 하는 삶의 요소들을 하나하나 쳐내가면서 
그것들을 불쌍히 여기지 말고, 아주 끔찍하더라도, 아프더라도, 수치스럽더라도, 
'다 잘라내고 내 뒤를 따르라' 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덧붙이는 말
자 오늘 같은 설교를 들으면, 오해하실 수 있어요. 
'아 그러면 거룩하게 살기 위한 노력,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살아가는 삶이 
나에게 구원을 주는 건가요?' 라고 오해하실 수도 있어요. 

여러분 아닙니다. 도덕적으로 사는 것, 거룩하게 사는 것이 
우리를 구원하는게 아니에요. 오직 복음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복음의 은혜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그런데 그 복음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이렇게 죄와 싸우며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거예요. 

우리가 죄와 싸워서 이겨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게 아니고요. 
예수님의 제자가 됐기 때문에, 이 복음을 믿기 때문에, 
이렇게 싸울 수 있게 되는 겁니다. 

또 여러분들이 이렇게 오해하시면 안 돼요. 
'근데 나 그리스도인인데, 내가 이런 죄를 짓고 살아가고 있는데, 
그러면 나 지옥 가나요? 내가 구원 잃어버리나요?'

참된 그리스도인은, 한 번 구원받고 계속 구원이 이어져 나가는 거예요. 
한 번 구원 받은 사람은, 한 번 진정으로 회개하고, 진정 거듭나고 회심한 사람은, 
절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아요.  

그런데 만약 자기가, 정말 죄와 싸우지 못하고, 죄에서 자유하지 못하고,
계속 반복해서 넘어지고, 실패하고, 죄에 지는 사람은
자기의 구원과 중생과 회개를, 한 번 자세히 점검해 볼 필요가 있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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