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이 사함 받은 마음의 눈물」 (누가복음 7:41–50)
예수께서 들려주신 이 짧은 이야기는 계산서처럼 명확하면서도 바다처럼 깊다. 빚진 자 둘이 있었고,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다른 한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었다. 그때 채권자는 두 사람을 똑같이 탕감해 주었다. 예수께서는 질문하신다.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이 질문은 머리를 향한 것이 아니라, 심장을 향한 질문이다. 계산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다. 인간은 언제나 사랑을 말하지만, 주님은 사랑을 따지지 않으시고 사랑이 흘러나오는 근원을 보신다. 그 근원은 ‘얼마나 사함 받았는가’에 있다.
시몬의 집은 깨끗했을 것이다. 바리새인의 집은 질서 정연했고, 율법의 경계선은 분명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집 안에는 눈물이 없었다. 향유의 향기는 없었다. 발을 씻기는 손길도, 머리카락으로 닦는 겸손도 없었다. 대신 판단의 시선이 있었다. 예수께서 누구인지를 재단하는 눈, 이 여자가 어떤 여자인지를 규정하는 마음이 있었다. 시몬은 예수를 초대했지만, 예수의 마음까지 초대한 것은 아니었다. 그는 예수를 시험대 위에 올려놓았고, 자신은 여전히 심판석에 앉아 있었다.
그때 한 여자가 들어온다. 성경은 그녀의 이름을 말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과거를 말한다. 죄인. 그러나 예수 앞에서 그녀는 과거로 규정되지 않는다. 그녀는 기억으로 들어왔지만, 은혜로 머문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말보다 먼저 눈물이 흘러내린다. 눈물은 가장 솔직한 고백이다. 변명도, 포장도 없다. 그녀의 눈물은 발 위에 떨어지고, 그 발을 씻긴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자신의 영광이었을지 모르나, 이제 그것은 수건이 된다. 향유는 숨겨둔 재산이었을지 모르나, 이제 그것은 사랑의 언어가 된다.
사람들은 속으로 말한다. ‘이 사람이 선지자라면, 이 여자가 누구인지 알 텐데.’ 그러나 예수께서는 이미 알고 계신다. 그 여자가 누구인지도, 시몬이 누구인지도. 예수의 눈은 과거를 넘어서 현재의 마음을 보시고, 현재를 넘어서 장차 피어날 사랑을 보신다. 시몬은 죄의 무게를 가볍게 여겼고, 그래서 사랑도 가볍다. 그러나 이 여자는 죄의 무게를 뼈저리게 알았고, 그래서 사랑이 깊다. 사랑의 크기는 감정의 강도가 아니라, 은혜 인식의 깊이다.
예수께서 시몬을 향해 말씀하실 때, 그 음성은 부드럽지만 날카롭다. “내가 네 집에 들어올 때, 너는 물로 내 발을 씻기지 아니하였으되.” 이 말씀은 단순한 예절의 지적이 아니다. 마음의 거리, 영혼의 냉기를 드러내는 말씀이다. “너는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존중의 결핍, 환대의 공허함이 드러난다. “너는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기쁨의 부재, 은혜의 무감각이 드러난다. 반면 이 여자는 멈추지 않았다. 눈물도, 입맞춤도, 향유도 멈추지 않았다. 사랑은 멈추지 않는 법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선언하신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 선언은 결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원인을 드러낸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랑이 죄 사함을 만든 것이 아니라, 죄 사함이 사랑을 낳았다. 은혜는 언제나 먼저다. 인간의 사랑은 응답이지, 조건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가 충분히 사랑한 후에 용서하시는 분이 아니라, 용서하심으로 사랑하게 하시는 분이다.
이 여자의 귀에 들린 마지막 말씀은 심판이 아니라 평안이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평안은 죄책이 사라진 자리에서만 태어난다. 평안은 과거가 지워졌다는 선언이 아니라, 미래가 열렸다는 약속이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숨어 살지 않는다. 눈물을 흘리되 절망으로 흘리지 않고, 사랑하되 두려움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사함 받은 사람의 삶은 가벼움이 아니라 자유다.
이 이야기는 우리를 두 자리에 세운다. 하나는 시몬의 자리, 다른 하나는 그 여인의 자리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얼마나 사함 받았다고 느끼는가. 죄를 적게 여기는 사람은 은혜를 작게 여기고, 은혜를 작게 여기는 사람은 사랑을 계산한다. 그러나 죄를 깊이 아는 사람은 은혜에 잠기고, 은혜에 잠긴 사람은 사랑으로 넘친다. 예수의 발치에는 언제나 공간이 있다. 눈물을 흘릴 자리, 사랑을 쏟을 자리, 다시 일어날 자리.
사람의 마음에는 언제나 저울이 하나 놓여 있다. 이 저울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끊임없이 무게를 단다. 누구의 죄가 더 무거운지, 누구의 공로가 더 큰지, 누가 더 의로운지, 누가 더 가까운지. 시몬의 마음에도 그 저울이 있었다. 그는 예수를 초대했으나, 동시에 예수를 평가했다. 그는 여인을 보았으나, 여인을 품지 않았다. 그의 저울은 정확해 보였으나, 은혜를 달 수 없는 저울이었다. 은혜는 계산을 거부한다. 은혜는 무게가 아니라 깊이로 임한다.
예수 앞에 선 여인은 자신을 변호하지 않는다. 설명하지 않는다. “제가 이런 사정이 있었습니다”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존재를 드린다. 눈물로, 머리카락으로, 향유로. 이것은 연출이 아니라 폭로다. 숨겨왔던 인생이 한순간에 쏟아져 나온다. 사람들 앞에서는 감추어야 했던 삶이, 예수 앞에서는 쏟아내도 되는 삶이 된다. 예수는 죄를 들추어내어 망신주시는 분이 아니라, 죄를 받아내어 새 삶을 주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눈물은 이 여인의 설교였다. 그 눈물은 “나는 끝났습니다”라는 고백이 아니라, “주님 앞에서는 더 숨기지 않겠습니다”라는 항복이었다. 항복은 패배가 아니라 구원의 문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지키려 할수록 갇히고, 주님께 무너질수록 자유로워진다. 그녀의 눈물은 발을 적셨고, 그 발은 길이 되었다. 예수의 발은 언제나 길이다. 그 발치에 엎드린 사람은 길을 잃지 않는다.
시몬은 속으로 판단한다. 겉으로는 침묵하지만, 속으로는 단정한다. “이 여자는 죄인이다.” 그러나 예수는 그 생각을 꿰뚫어 보신다. 주님 앞에서 침묵은 중립이 아니다. 판단 없는 침묵은 없고, 마음 없는 환대도 없다. 예수는 시몬의 생각을 드러내시되, 공개적으로 망신주지 않으신다. 비유로 말씀하신다. 은혜는 언제나 품위를 잃지 않는다. 진리는 사람을 베되, 회복의 방향으로 벤다.
두 빚진 자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그러나 단순함 속에 인간 구원의 구조가 담겨 있다. 빚의 액수는 다르다. 그러나 공통점이 있다. “갚을 것이 없었다.” 이것이 복음의 출발점이다. 인간은 노력으로 갚을 수 없는 빚 앞에 서 있다. 도덕으로도, 종교로도, 열심으로도 갚을 수 없다. 문제는 빚의 크기가 아니라, 갚을 능력의 부재다. 그때 채권자의 결정이 모든 것을 바꾼다. “둘 다 탕감해 주었다.” 탕감은 협상이 아니라 선언이다. 조건 없는 은혜는 인간의 계산을 무너뜨린다.
예수는 질문하신다. “누가 그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은 머뭇거리며 대답한다. “더 많이 탕감 받은 자니이다.” 그는 정답을 말했지만, 자신에게 적용하지는 않는다. 진리를 말하면서 진리에 서지 않는 것이 바리새인의 비극이다. 신앙은 정답 맞히기가 아니라, 자리 이동이다. 우리는 언제나 시몬의 자리에서 여인의 자리로 옮겨가야 한다. 판단석에서 발치로, 계산대에서 눈물로, 자격에서 은혜로.
예수께서는 여인을 가리켜 시몬에게 말씀하신다. “이 여자를 보느냐.” 이 질문은 단순한 시선의 문제가 아니다. ‘너는 무엇을 보느냐’는 질문이다. 시몬은 죄를 보았고, 예수는 사랑을 보셨다. 시몬은 과거를 보았고, 예수는 변화의 현재를 보셨다. 시몬은 규정을 보았고, 예수는 회복을 보셨다. 무엇을 보느냐가 곧 누구를 따르느냐를 결정한다. 보는 대로 살고, 보는 만큼 사랑한다.
여인의 행동 하나하나는 예수의 말씀 속에서 다시 해석된다. 눈물은 회개가 되고, 입맞춤은 헌신이 되며, 향유는 예배가 된다. 예수는 그녀의 행동을 단순한 감정의 분출로 축소하지 않으신다. 사랑은 언제나 해석될 때 깊어진다. 주님은 우리의 작은 헌신도 의미로 바꾸시는 분이다. 그분의 말씀 안에 들어갈 때, 우리의 삶은 설명 없는 희생이 아니라 복음의 증거가 된다.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이 말씀은 비난이 아니라 진단이다. 사랑의 빈곤은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은혜 인식의 결핍이다. 우리는 사랑하라고 다그침을 받을수록 지치지만, 사함을 깨달을수록 자연스럽게 사랑하게 된다. 사랑은 명령으로 자라지 않고, 기억으로 자란다. 내가 어디서 건짐을 받았는지, 어떤 빚이 탕감되었는지를 기억할 때 사랑은 샘처럼 솟는다.
예수께서는 여인에게 직접 말씀하신다. “네 죄들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이 선언은 집 안에 있던 모든 사람을 흔든다. 속으로 수군거림이 일어난다. “이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도 사하는가.” 그러나 예수는 그 수군거림에 답하지 않으신다. 구원은 항상 논쟁을 낳지만, 그 논쟁이 구원을 취소하지는 못한다. 은혜는 사람들의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권위는 회의에서 나오지 않는다.
여인은 이제 사람들의 시선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미 가장 깊은 수치의 자리를 지나왔기 때문이다. 예수 앞에서 무너진 사람은 세상 앞에서 다시 일어선다. 마지막으로 주님은 말씀하신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믿음은 눈물과 사랑으로 드러났고, 그 믿음은 구원으로 응답받는다. 그리고 평안. 이 평안은 상황의 평탄함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에서 오는 평안이다. 하나님과 화목한 자의 심장에는 더 이상 도망갈 필요가 없다.
이 이야기는 끝났지만, 우리의 삶에서는 계속된다. 우리는 여전히 예수의 발치로 초대받는다. 아직 흘리지 못한 눈물이 있다면, 아직 내려놓지 못한 향유가 있다면, 아직 판단의 자리에 앉아 있다면, 주님은 오늘도 묻고 계신다. “이 여자를 보느냐.” 그리고 동시에 우리에게 말씀하신다. “나를 보느냐.”
예수의 발치에는 언제나 두 종류의 사람이 서 있다. 하나는 조심스럽게 거리를 재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모든 거리를 무너뜨리는 사람이다. 시몬은 예수와 자신 사이의 간격을 유지하려 했고, 여인은 그 간격을 눈물로 허물었다. 신앙은 종종 적당한 거리에서 안전하게 유지하려는 태도로 변질되지만, 복음은 언제나 가까움을 요구한다. 가까움은 위험해 보이지만, 그 위험 속에만 구원이 있다. 예수의 발에 가까이 간 사람은 체면을 잃지만, 생명을 얻는다.
여인의 행동은 당시 사회의 모든 규범을 넘어선 것이었다. 여자가 공개된 자리에서 남자의 발을 만지는 것은 수치였고, 머리카락을 풀어 닦는 것은 자기 포기의 상징이었으며, 값비싼 향유를 붓는 것은 미래를 쏟는 행위였다. 그러나 그녀는 계산하지 않았다. 사랑은 언제나 계산을 멈춘 자리에서 시작된다. 이 여인은 이미 계산을 끝낸 사람이다.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비싼 것은 향유가 아니라, 용서받지 못한 채 살아가는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여전히 속으로 말한다.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그러나 은혜를 경험한 사람에게 ‘저 정도’라는 말은 의미가 없다. 은혜는 언제나 과하다. 은혜는 상식의 선을 넘고, 품위의 경계를 넘어 흐른다. 그래서 은혜는 종종 오해를 받는다. 눈물은 감정 과잉으로, 헌신은 과시로, 사랑은 집착으로 오해된다. 그러나 예수는 아신다. 무엇이 연기이고 무엇이 진심인지를. 주님은 마음의 무게를 아신다.
시몬의 신앙은 흠잡을 데 없이 정돈되어 있었지만, 그의 마음에는 빈 의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의자는 은혜가 앉아야 할 자리였다. 그는 죄를 관리했고, 자신을 통제했고, 종교적 평판을 지켜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 자리한 빚을 보지 못했다. 작은 빚이라고 여겼기에, 탕감의 기쁨도 작았다. 그래서 사랑도 작았다. 사랑의 부족은 도덕성의 부족이 아니라, 자기 인식의 부족이다.
예수께서 여인을 향해 “네 죄들이 사함을 받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우주의 질서를 새로 배열하는 선언이었다. 죄는 더 이상 그녀의 이름이 아니었다. 과거는 더 이상 그녀의 주소가 아니었다. 그녀는 새로운 신분을 입는다. 사함 받은 자. 이것이 복음의 이름이다. 복음은 사람을 개선하지 않고, 재정의한다. ‘죄인’이라는 호칭을 벗기고, ‘구원받은 자’라는 이름을 입힌다.
집 안의 다른 사람들은 여전히 불편해한다. 은혜는 언제나 주변을 불편하게 만든다. 왜냐하면 은혜는 숨겨진 비교를 드러내고, 은밀한 우월감을 무너뜨리기 때문이다. 은혜 앞에서는 모두가 동일한 빚진 자가 된다. 이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사람에게 은혜는 위협이다. 그러나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은혜는 쉼이다. 은혜는 경쟁을 끝내고, 자랑을 침묵시키며, 감사만 남긴다.
예수의 마지막 말씀은 여인을 미래로 보내는 축복이다. “평안히 가라.” 이 말은 단순한 인사가 아니다. 이제 너는 더 이상 두려움에 의해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는 선언이다. 사람들의 시선에 붙잡히지 않아도 되고, 과거의 그림자에 쫓기지 않아도 된다. 평안은 문제의 부재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화해에서 오는 안정이다. 이 평안은 세상이 줄 수 없고, 세상이 빼앗을 수도 없다.
여인은 그 집을 나선다. 그녀의 발걸음은 이전과 다르다. 여전히 같은 골목을 지나겠지만, 같은 사람이 아니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의 걸음에는 방향이 생긴다.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숨지 않으며,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다. 그녀는 사랑받았고, 용서받았고, 받아들여졌다. 그 사실 하나로 인생은 다시 걸을 수 있는 길이 된다.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지금 어디에 서 있는가. 판단의 자리인가, 발치의 자리인가. 계산의 자리인가, 눈물의 자리인가. 우리는 종종 시몬의 자리를 안전하다고 느끼지만, 그 자리는 사랑이 자라지 않는 자리다. 반대로 여인의 자리는 위험해 보이지만, 생명이 피어나는 자리다. 예수의 발치에는 늘 공간이 있고, 그 공간은 오늘도 우리를 기다린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이야기는 결론으로 닫히지 않고, 부르심으로 열린다. 예수는 여인을 보내셨고, 동시에 우리를 부르신다. 사함 받은 자로 살라고, 사랑하는 자로 살아내라고, 평안 속으로 걸어가라고.
이 여인이 집을 떠날 때, 아무도 그녀를 배웅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늘은 이미 그녀를 환송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침묵과 시선 속에서도, 그녀의 심장은 이전과 전혀 다른 리듬으로 뛰고 있었다. 은혜를 만난 심장은 더 이상 두려움에 맞춰 뛰지 않는다. 사랑받았다는 확신은 인간을 조용히, 그러나 단단하게 만든다. 그녀는 더 크게 말하지도, 더 눈에 띄게 행동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존재 자체가 증언이 된다. 사함 받은 사람의 삶은 소리 없는 설교가 된다.
예수께서 하신 말씀은 이 이야기의 가장 깊은 중심에 놓여 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여기서 믿음은 머리의 동의가 아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몸으로 드러난 믿음이었다. 그녀는 예수께 나아왔고, 물러서지 않았고, 끝까지 머물렀다. 믿음은 설명보다 가까움으로 증명된다. 믿음은 주님 앞에 오래 머무를수록 분명해진다. 그녀는 믿음으로 울었고, 믿음으로 입맞추었고, 믿음으로 향유를 부었다. 그리고 그 믿음은 구원이 되었다.
구원은 순간이지만, 그 여파는 평생이다. 예수는 여인을 즉시 다른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대신 새로운 방향을 주셨다. “평안히 가라.” 이 말은 앞으로의 삶 전체에 덮이는 축복이다. 이제 그녀의 삶은 질문으로 시작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대신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이미 받아들여졌다.” 이 확신은 인간을 조급하게 만들지 않고, 부드럽게 만든다. 경쟁하지 않아도 되고,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 이미 충분하기 때문이다.
이 장면을 바라보는 우리는 불편해질 수도 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여인보다 시몬에 더 가까울 때가 많기 때문이다. 우리는 눈물보다 설명에 익숙하고, 헌신보다 판단에 능숙하며, 사랑보다 기준에 빠르다. 그러나 예수는 오늘도 같은 질문을 던지신다. “이 여자를 보느냐.” 그 질문은 동시에 우리 자신을 향한 질문이다. 너는 너 자신을 어떻게 보고 있느냐. 여전히 과거로 정의하고 있느냐, 아니면 은혜로 다시 부르고 있느냐.
주님은 이 이야기에서 누구도 밀어내지 않으신다. 시몬도 내쫓지 않으셨고, 여인을 숨기지도 않으셨다. 다만 각각의 자리에 진리를 비추셨다. 시몬에게는 자기 의의 그림자를, 여인에게는 은혜의 빛을. 복음은 언제나 각 사람에게 다른 방식으로 임하지만, 목적은 하나다. 모두를 발치로 부르시는 것. 판단의 자리에서 내려와, 사랑의 자리로 오게 하시는 것.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이것이다. 여인의 눈물은 지나간 장면이지만, 예수의 발치는 지금도 열려 있다. 오늘도 누군가는 조용히 울고, 누군가는 계산하고, 누군가는 머뭇거린다. 그러나 주님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갚을 수 없는 빚 앞에 선 자를 향해, 여전히 탕감을 선언하신다. 그리고 그 탕감 위에 사랑을 피워 올리신다.
이 이야기는 이렇게 끝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언제나 새로운 이야기의 시작이 되기 때문이다. 여인은 집을 나섰고, 우리는 지금 그 자리에 서 있다. 이제 질문은 하나다. 우리는 어떤 사람으로 그 자리를 떠날 것인가. 판단을 쥔 사람으로 남을 것인가, 아니면 사함을 입은 사람으로 걸어갈 것인가. 예수는 오늘도 같은 음성으로 우리를 보내신다. 평안히 가라. 사함 받은 자로, 사랑하는 자로, 은혜를 기억하는 자로.
1. 설교 요약
누가복음 7:41–50은 두 빚진 자의 비유를 통해 사랑의 크기가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은혜 인식의 깊이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바리새인 시몬은 적게 사함 받았다고 여겼기에 적게 사랑했고, 죄인 여인은 많은 사함을 받았기에 사랑이 넘쳤다. 예수는 여인의 눈물과 헌신을 믿음의 표현으로 받아들이시고, 죄 사함과 평안을 선언하신다. 본문은 판단의 자리에서 발치의 자리로 이동하라는 복음의 초대를 담고 있다.
2. 묵상 포인트
- 나는 나 자신을 ‘얼마나 사함 받은 자’로 인식하고 있는가
- 내 사랑의 메마름은 성품의 문제인가, 은혜 기억의 문제인가
- 나는 예수를 초대했는가, 아니면 평가하고 있는가
- 지금 내 삶에서 내려놓아야 할 시몬의 자리는 무엇인가
3. 강해
본문의 핵심은 죄 사함과 사랑의 인과관계이다. 예수는 사랑이 죄 사함의 조건이 아니라 결과임을 분명히 하신다. 여인의 행동은 회개와 믿음의 외적 표현이며, 예수의 선언은 하나님의 권위에 근거한 구원의 선포다. 바리새인의 자기 의와 죄인의 겸손한 믿음이 극명하게 대비되며, 구원의 본질이 은혜임을 드러낸다.
4. 주석
- 두 빚진 자의 비유는 인간 모두가 갚을 수 없는 죄의 빚 아래 있음을 전제한다
-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실제 죄의 양이 아니라 인식의 문제를 가리킨다
- “평안히 가라”는 히브리적 샬롬 개념으로,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한다
5. 원어 주석
- ἀφίημι(아피에미, 사하다): 단순한 용서가 아니라 ‘풀어 놓다, 놓아주다’의 의미
- πίστις(피스티스, 믿음): 지적 동의가 아닌 신뢰와 헌신을 포함하는 전인적 반응
- εἰρήνη(에이레네, 평안): 외적 상황을 초월한 관계적 안정
6. 금언
- 은혜를 크게 아는 자만이 사랑을 깊이 흘려보낸다
- 사랑은 노력의 산물이 아니라 기억의 열매다
- 판단의 자리는 안전하지만, 생명이 자라지 않는다
7. 신학적 / 주제별 / 목회적 정리
- 신학적: 구원은 전적으로 은혜에 근거하며 인간의 공로는 배제된다
- 주제별: 죄 사함, 사랑, 믿음, 평안의 상호 관계
- 목회적: 성도들이 스스로를 은혜의 기준으로 재정의하도록 돕는 본문
8. 성도들의 결단과 적용
- 나는 오늘도 은혜를 기억하며 살기로 결단한다
- 판단보다 긍휼을 선택하며, 발치의 자리로 내려간다
- 사함 받은 자답게 사랑으로 반응하는 삶을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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