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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2강) 돌에 맞은 바울! (행14:13-28)

by 【고동엽】 2022. 3. 10.

(제42강) 돌에 맞은 바울! (행14:13-28)

 

사도행전을 크게 두 부분으로 구별됩니다. 1-12장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유대인 상대의 전도로 지도자는 베드로이고, 13-28장은 안디옥교회를 중심으로 한 이방인 전도로 지도자는 바울이었습니다.
사도행전에 나타난 양대 산맥은 베드로와 바울이었습니다. 본문은 세계선교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실시한 사도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 중에 있었던 일입니다. 바울의 전도는 가는 곳마다 극단적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환영하고, 영접하고, 결신하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반대하고 대적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 덤비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어떤 경우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직 전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환영한다고 쉽게 흥분하지도 않았고, 죽이려든다고 절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세상 인기라는 것은 물거품과 같습니다. 연예인, 운동선수 등 인기에 승부를 걸고 사는 사람들이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두 가지 힘이 있다고 합니다. 하나는 신앙의 힘이고, 다른 하나는 마약, 환각의 힘입니다.
언제 물거품처럼 사라질지 모르는 인기를 유지하려면 불안, 초조, 긴장이 떠나지 않습니다. 그래서 미국의 경우 유명 인기인들 대부분은 신경성 불면증, 위계양, 소화불량 등에 걸려서 불안 심리를 약물로 달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독실한 신앙인인 경우 그런 증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힘들면 기도하고, 기쁘면 찬송하기 때문에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래 바울은 당시 명문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던 가말리엘 선생 밑에서 율법을 공부했고, 유대인으로서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모든 세상적인 것들을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배설물로 버리고 그 안에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습니다.
그날 이후 바울은 웃어도 예수님 때문에, 울어도 예수님 때문에 그리고 죽어도 예수님 때문에 죽기로 결심하고 전도자의 길을 걸었습니다.
바울의 선교 첫 도착지는 구브로 성, 거기서 마술사 바예수를 만나 그가 소경이 되게 함으로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믿게 했습니다.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에서도 큰 역사가 일어났으며 이고니온에서도 루스드라에서도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특히 루스드라에서는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고 뛰게 하는 역사가 일어나자 그 성의 사람들이 난리가 났습니다. 왜? 앉은뱅이를 일으킬 수 있는 것은 신밖에 할 수 없는데 바울과 바나바가 신으로 인간의 몸을 입고 내려왔다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그래서 바나바를 보고는 쓰스(제우스)라 했고, 바울에게는 허메(헤르메스)라고 했습니다. 쓰스는 그리스의 최고의 신이고, 허메는 최고의 신을 수호하는 웅변가였습니다. 바나바는 미남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에게 쓰스라고 했고,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것을 보고 허메라고 한 것입니다.
문제는 그 성의 사람들이 두 사람을 신격화하여 제사를 드리려고 난리가 난 것입니다. 이때 두 사도가 그들을 만류하면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제목소개!▶

 

▶13절 "성밖 쓰스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들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무리와 함께 제사하고자 하니"
이교도들은 신당을 지어 놓고 제사장을 세워 그들의 종교행위를 가진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와 화관을 가지고 대문 앞에 와서 바울과 바나바를 신으로 섬기려는 제사를 드리려고 하고 있습니다.
여기 소는 암소가 아니라 황소를 의미합니다. 이 소는 꽃으로 만든 화관을 장식하고 희생 제물로 끌려온 것입니다. 이러한 제사 풍속은 희랍의 풍속으로 이교도들의 제사 법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씨름 대회 때 승리한 장사들에게 화관으로 장식한 황소를 주는 것을 보았습니다.
여기 '대문 앞'을 놓고 학자들의 의견이 다양합니다. 이 대문이 성 밖에 있는 신당의 대문인지, 아니면 성문인지 바울이 거하는 집 대문인지 여러 가지 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문 앞으로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대중들이 쉽게 모일 수 있는 곳은 성안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구걸도 하며 많은 사람이 모여 거래가 이루어졌던 곳이기도 합니다. 바울이 이 성안에서 앉은뱅이를 일으켰기 때문에 그 성문 앞에서 쓰스 신당의 제사장이 소의 머리에 꽃다발을 씌우고 제사 드릴 만방의 준비를 한 것입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두 사람, 즉 사도들을 통해 임한 날 때부터 앉은뱅이 된 자가 일어난 사건을 보고 그들에게 제사함으로 어떤 '구원'에 이르기를 원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사건을 보면서 참 어리석은 원시인들(?)이라고 단정해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 그 당시 루스드라는 학식이 높은 곳으로 유명했답니다. 다만 그들이 그 높은 학식으로도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일본이 세계 최고의 과학문명과 학식을 누리고 있지만, 우상숭배가 가장 심하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어느 불상이 땀을 흘린다!'는 기사를 신문에서 보았습니다. 그 불상은 국가가 위험한 때마다 땀을 그렇게 뻘뻘 흘린다 해서 영험하다는 것입니다.
돌부처에 물이 흘러내려도 수많은 신문이 보도를 하고 정말 큰 일이 나는가 하여 조마조마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더 많은 시주를 했을 것입니다. 하물며 평생 앉은뱅이로 살아온 자가 뛰어 걷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돌부처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주인 되시는 창조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능력입니다. /믿/아멘!/.

 

▶14절 "두 사도 바나바와 바울이 듣고 옷을 찢고 무리 가운데 뛰어 들어가서 소리질러"
오직 예배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지금 두 사도에게 제사를 드리려고 합니다. 제사는 오늘날의 예배입니다.
너무도 안타까워서 옷을 짝 찢으면서 뛰어 들어가 '이런 짓을 하면 안 됩니다. 우리는 결코 신이 아리나 사람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이상근 목사님은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의 방언으로 신이 내려왔다고 외쳤던 소리를 알아듣지 못했으므로 그들의 행동을 미리 막지 못했다가 이제야 그 일을 깨달은 것'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여기 '옷을 찢고'는 '실망, 혐오, 증오, 공포' 등을 나타내는 유대인들의 습관으로 바울과 바나바가 그들의 행동에 크게 놀라서 행한 행동이었습니다. 즉 그들이 하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큰 죄가 되기 때문에 증오심의 표시로 공포심의 표시로, 협오감의 표시로 옷을 찢었던 것입니다.
당시 수많은 이방 세계의 왕들은 스스로 신이라고 청하면서 신적인 영예를 누리는 짓을 자랑으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두 사도는 자신들에게 영광을 돌리려는 그들을 극구 말리고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고 있습니다.
그들이 무슨 '소리를 질렀습니까?' 복음의 소리를 질렀습니다. 15절에서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는 것입니다.

 

▶15절 "가로되 여러분이여 어찌하여 이러한 일을 하느냐 우리도 너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 헛된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시고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 오라 함이라"
행3장에서 베드로가 앉은뱅이를 예수의 이름으로 세울 때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신처럼 생각하고 쳐다보자 '이스라엘 사람들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능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우리가 한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에 죽인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된 것이니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너희와 똑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사람'이라고 소리쳤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신앙의 인격을 몇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⑴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 ⑵사도의 겸손, ⑶하나님과 복음만 높이는 주의 종의 태도입니다. 사실 이 태도가 자기도 살고 남도 살리는 태도였습니다. /믿/ 드디어 바울이 바른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⑴'헛된 일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헛된 일은 문자 적으로는 제우스신에게 제사하는 행위, 또는 사람을 신으로 알고 경배하는 행위를 말합니다. 그러나 현대감각으로 풀어보면 '우상을 버리라'는 경고입니다.
우상은 어떤 형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창세기에 보면 야곱의 부인 중 라헬이 우상을 끝까지 버리지 않고 지니고 다녔습니다. 그의 아버지 집에서 드라빔을 훔쳐 가지고 지니고 다닌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그를 일찍 불러갔습니다. 우상에 빠지면 하나님이 징계하십니다.
⑵너희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한 마디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 지금 바울은 그들에게 창조주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산다고 설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네 종류의 사람들을 볼 수 있습니다. ⑴하나님이 없다고 말하는 무신론자 ⑵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는 회의론자 ⑶신은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사람, 이들은 이론적으론 유신론자이지만 실제적으론 무신론자입니다. ⑷하나님이 있다고 믿는 성도들입니다.
바울이 그렇고, 저와 여러분이 확실히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심을 믿는 자들입니다. 이 사실을 믿는 자들이 복을 받은 자입니다. /할/
본문에서 바울은 두 가지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헛된 일을 버리라, 하나님께로 돌아오라'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헛된 일에 빠져 있는 한 참으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수는 없습니다. 왜 인간숭배는 헛된 일입니까? 그것은 있지도 않은 것을 있는 것으로 믿기 때문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는 것이 우상입니다.
그런 우상에 빠지면 시간도 물질도 손해 볼 뿐이지 아무런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거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상을 섬겼던 그 일 때문에 주님 앞에 심판을 받게 됩니다.

 

▶16절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게 묵인하셨으나"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에는 인생들이 자기의 길을 가도록 묵인하여 주었다고 합니다. 여기 '지나간 세대'란 복음이 들어가지 전 세대를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길이란 우상 섬기는 것과 헛된 것들을 하는 일을 의미하고 묵인하셨다는 말씀은 내버려두고 방치하였다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어 구속을 이루어 주시고 복음을 전하여 주신 것은 하나님이 내버려두었던 자기 백성을 찾으시려고 착수하신 증거입니다.
마1:21절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17절 "그러나 자기를 증거하지 아니하신 것이 아니니 곧 너희에게 하늘로서 비를 내리시며 결실기를 주시는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너희 마음에 만족케 하셨느니라 하고"
바울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하나님을 알만한 증거를 주셨다고 했습니다.
⑴'비를 내리는 일'입니다. 농사에 비는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비는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것입니다.
⑵결실기 즉 열매를 맺게 합니다. 필요에 따라 바람을 주시고, 공기도 주시고, 태양빛은 주십니다.
⑶음식을 주십니다. 사실 인간의 의식주는 누가 주시는 것입니까?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⑷마음에 기쁨과 만족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4계절의 만물의 변화를 보고 사람들은 감격합니다. 자연 우주만물을 보면 그 속에서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와 사랑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 옳다고 바울이 힘써 권면하고 있습니다.

 

▶18절 "이렇게 말하여 겨우 무리를 말려 자기들에게 제사를 못하게 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신이 아닌 것을 겨우 설득시켜 제사를 못하게 했습니다. 다시 15-18절까지를 정리한다면 다섯 가지 진리를 되새겨 볼 수 있습니다.
⑴지나간 세대에 모든 족속들이 섬겼던 우상숭배는 다 헛된 일이라고 합니다.
⑵보람되고 영원히 사는 길은 살아 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는 진리이며,
⑶하나님은 세상의 창조주시오, 모든 존재와 힘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과,
⑷세상이 지금까지 존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신 가운데 용납해 주셨기 때문이며,
⑸복음이 있기 전에도 계속해서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자연의 계시를 통하여 인도하셨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할/

 

▶19절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성밖에 끌어 내치니라"
하나님의 큰 역사가 있어 앉은뱅이가 벌떡 일어나고 많은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존경하고 우러러 보니까 마귀의 역사도 크게 일어났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크게 일어날 때에는 반드시 마귀의 역사가 뒤따릅니다.
바울 일행이 가는 곳마다 기적이 일어나고 기독교로 개종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니까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유대인들과 이고니온에 있는 유대인들이 루스드라에게까지 좇아와서 바울을 돌로 쳐죽이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유대인들의 간교하고 끈질긴 면을 보여주는 것은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라는 구절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일을 버려 두고 먼 곳까지 와서 복음전파를 방해하고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루스드라까지는 약 70Km나 된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이렇게 먼 곳까지 바울을 죽이려고 좇아 온 것입니다. 사탄은 간교합니다. 사탄은 방해의 앞잡이입니다.
'무리들이 초인'했다는 말은 '선동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들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니까 이방인들을 출동시킨 것입니다. 얼마나 사정없이 돌팔매질은 했는지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내다 버렸습니다.
참 이상한 일입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바울과 바나바를 ‘쓰스와 허메’라고 하면서 신처럼 떠받들더니 어떻게 금방 변하여 그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이것은 예수님 때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할 때만해도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하면서 찬송했으나 그 다음날 돌변하여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칩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마음입니다. 근방 은혜 충만하다가도 금방 시험에 빠지고 비방하고 떠들고 난리가 납니다.
바울은 뒤에 회고하기를 자신의 선교일지 중에서 잊지 못할 사건 몇 가지를 회고하면서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은 것을 회고했습니다. 고후11:24-25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창으로 맞고 한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 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또 바울은 고후12:1-4절에서 '셋째 하늘에 올라갔었다'고 했는데 학자들은 그것이 바로 바울이 돌에 맞아 죽었을 때에 그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와 삼층 천에 갔다 온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전에는 바울이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돌을 던지라고 명령했는데 지금은 자신이 똑같이 돌에 맞아 죽게 되었습니다. 딤후3:12절에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고난! 그것은 복음이 전파되는 일에 있어서 피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그러기에 '복음은 피를 먹고 자란다'는 말이 아무렇게나 파생된 단어가 아닙니다.
일본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 엄청난 핍박이 있었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십자가를 사랑한다고 해서 바다에 십자가를 세우고 기독교인들을 그곳에 묶어놓았습니다. 밀물이 오면서 기독교인들은 익사하게 됩니다.
한 신부가 그 모습을 멀리서 보면서 울부짖습니다. '하나님 어찌하여 침묵만 하고 계십니까?' 그 때 하나님께서 이런 음성을 주셨답니다. '나는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고난에 동참하고 있느니라.'
무슨 말씀인지 아시지요? 우리의 고난 길에도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셔서 그 고난을 넉넉히 이길 수 있는 믿음과 능력을 주십니다. 고전10: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할/
그렇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겐 환난의 길이 천국 가는 지름길입니다. 천국으로 가는 길은 비포장도로입니다. 세상 적으로 넓고 반들반들한 길을 너무 좋아하면 안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잘 닦아놓은 길을 너무 사랑하지 마십시오. 그 길은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이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좁고 협착한 길이지만, 주님께서 가신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그곳에 바로 천국이 있습니다. /믿습니까?/
우리의 고난이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영광을 위하여 일 할 때는 보람이 있습니다. 그 수고에는 보상이 있습니다. 그러한 고난을 통하여 연단을 받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말하기를 '모든 훈련이 그 당시에는 즐겁지 않고 도리어 쓰라린 것으로 생각되지만 나중에는 이것으로 연단 받은 사람들에게 의의 화평한 열매를 맺게 해 준다'고 했습니다(히12:11). 고난으로 연단 받고 그에 따른 보상을 받는다면 그 고생은 고생이 아닙니다.
야고보 장로도 말하기를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할 때에 그것을 다시없는 기쁨으로 여기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연단이 인내를 가져오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인내력을 온전히 발휘할 때 조금도 결함이 없는 성숙하고 원만한 성도가 된다'고 했습니다(약1:2-4).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을 다 알고 계시며 관심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죽도록 충성하라'는 그 말씀을 붙잡고 달려가야 합니다. 충성하는 자에게는 정녕 '생명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계2:10). /아멘!/

 

▶20절 "제자들이 둘러 섰을 때에 바울이 일어나 성에 들어갔다가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가서"
폭도들은 바울이 죽은 줄 알고 끌어다가 성 밖에 내어버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죽은 줄로 알았던 바울이 다시 일어난 것입니다. 사명이 남은 자는 절대로 죽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명 있는 자를 지키시고 붙드십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아직은 하나님의 일을 더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사명을 절대로 놓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이 벌떡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하나님이 힘 주셔서 일어난 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힘을 주시면 우리 모두 일어날 수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아멘!/
'제자들이 둘러섰을 때에' 이 제자들이야 말로 참으로 귀한 자들입니다. 이 제자들이 바로 루스드라에서 바울에게 전도 받아 예수님 믿고 구원받은 자들입니다.
자신들을 전도해 준 사람이 돌에 맞아 죽게 되었다하면 보통 사람들은 다 도망가 버립니다. 그런데 여기 남아 있는 제자들을 보니까 확실히 복음을 받은 자들입니다. 구원에 확신이 있는 자는 어떠한 일에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우리 선생님이 돌아가셨는가? 장례는 어떻게 치러야 할 것인가?' 하고 있을 때 바울이 일어나 성으로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것은 기적입니다. 그 뿐입니까?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갔습니다. 이것이 흔들리지 않은 믿음의 사람 바울의 모습입니다. 죽기까지 충성하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보통사람 같으면 아마 이런 경우 의기소침해서 자리에 눕거나 전도사역을 포기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상처 난 육신과 아픈 다리를 절뚝거리며 더베로 향해 전도하러 떠났습니다. 이런 바울의 모습은 루스드라 성도들에게 희망과 용기와 믿음을 주었고, 후에 디모데와 같은 동역자를 얻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바울의 모습에서 전도자의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어떤 일을 당해도 결코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사명을 감당하는 자세, 하나님이 보고 기뻐하십니다.
'더베'는 루스드라에서 30Km 떨어진 곳으로 로마의 영토였습니다. 바울은 이곳에서 1차 전도여행을 마무리짓고 안디옥으로 돌아가지만 그 후 제2차 전도여행 때에 다시 이곳을 방문하게 됩니다(행16:1).

 

▶21절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바울이 생명을 내어놓고 복음을 전할 때에 더베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꼭 하나 깨달아야 할 진리는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할 때마다 많은 사람을 제자로 세우게 된 것입니다.
여기 제자란 바울의 제자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의미합니다. 사도행전의 특징은 바로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제자가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제자란 그들도 바울과 같이 복음을 전하는 자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깨닫고 믿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이란 예수 믿으라고 하는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님을 믿었더니 이런 역사가 일어나더라!'하고 설명해주는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더베에서 많은 제자를 세우고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 안디옥으로 돌아갔습니다. 그 곳이 다 바울을 죽이려고 했던 핍박의 장소였습니다. 루스드라에서는 돌에 맞아 기절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그곳으로 갔습니다. 바울은 핍박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정말 강한 십자가의 군병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은 그곳으로 가서 그 곳 성도들에게 강한 십자가의 군병이 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22-23절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고"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만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끝나지 아니하고 우리 믿는 형제들을 향하여 권면하기를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합니다. 후에 바울은 딤후3:11-12절에서 말하기를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힌 일과 어떠한 핍박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앞에 닥치는 무섭고 어려운 일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그러한 환경에 굴하여 주저 앉아있어서는 안됩니다. 분연히 일어나야 합니다. 엘리야가 죽기를 작정하고 로뎀나무 아래 앉아 있을 때 '일어나 먹어라'고 하셨던 하나님의 사랑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주의 종들을 일으켜 세워주시고 다시금 일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 앞에 어떤 일이 있더라도 복음을 증거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힘있게 증거해야 합니다. 이보다 자랑스러운 일은 없기 때문입니다. 이 보다 보람된 일은 없습니다. 이 일은 하나님께 인정받는 일입니다.

 

▶본 절에서 몇 가지의 신앙의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⑴마음을 굳게 하라! 인간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잠4:23절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할/ 우리가 먼저 예수를 내 마음에 영접해야 합니다. 롬10:10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사람의 마음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당시에 '핍박이 심할 때이기 때문에 먼저 마음의 무장이 중요'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⑵믿음에 거하라! 여기에 세 가지 뜻이 있습니다. '흔들리지 않는다. 진리를 잡다. 믿음으로 살라' 그렇습니다. 믿음만이 세상을 이길 수가 있습니다.
요일5:4절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⑶환란을 이겨라! 여기 환란은 예수님 때문에 당하는 핍박을 말합니다. 주님도 엄청난 핍박을 받았습니다. 사도들도 초대교회 성도들도 다 핍박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롬5:3-4절에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할/ 환난을 통해서 인내를 배우고, 인내함으로 우리의 연약함을 연단하여 소망하는 목적을 성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⑷금식기도에 매달려라! 특히 각 교회는 섬기는 장로들에게 금식기도를 시켰습니다. 당시 장로는 교회를 다스리고 가르치는 사역자입니다. 그러니까 장로는 교회를 지도하는 사람이요, 앞장 선 사람이기 때문에 기도로 무장하라고 한 것입니다.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나고 기도하면 응답이 옵니다. 요14:14절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왜 기도 응답이 없습니까? 안 하기 때문입니다. 믿지 않고 건성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인간적인 욕심으로 기도하기 때문에 응답이 없습니다.
⑸바울은 모든 교회와 제자들을 주님께 부탁했습니다. 지금 바울은 교회 공동체의 지도자들을 세우면서 금식기도하고 지도자들을 주께 부탁한 것은 선출된 직분자들에게 권위와 직분의 거룩성을 부각시켜준 것입니다.

 

▶24절 "비시디아 가운데로 지나가서 밤빌리아에 이르러"
왔던 길을 되돌아가고 있음을 간략하게 언급함으로서 누가는 빠르게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습니다. '비시디아 안디옥'을 지나서 '밤빌리아'까지 갔습니다.

 

▶25절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가서"
또 버가에 가서도 복음을 전하고 앗달리아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버가는 밤빌리아에 속한 도시로서 지난번에 선교의 동역자인 마가가 집으로 돌아간 곳입니다. 굉장히 선교여행이 어려워서 마가가 참지 못하고 떠난 곳입니다. 앗달리아는 버가에서 27Km 떨어져 있는 항구도시입니다.
'도를 버가에서 전하고' 바울 사도가 가는 곳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능력입니다.
'요한 위슬레'가 광산촌을 돌아다니며 전도여행을 했습니다. 그가 가는 곳마다 설교했습니다. 그 후 어떤 유명한 목회자가 그 지역을 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깜짝 놀랄 일을 발견하였습니다. 탄광에 사는 그들의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이었습니다. 집들은 아담하고 깨끗했습니다. 사람들은 말쑥하고 친절과 웃음이 넘쳤습니다. 어떻게 하여 이곳이 이렇게 변했느냐고 물었을 때 그들의 대답은 '여러 해 전에 요한 웨슬레가 이곳에 와서 설교를 했다'고 하면서 그 때부터 이곳에 변화가 일어났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에게 희망을 줍니다. /아멘!/

 

▶26절 "거기서 배 타고 안디옥에 이르니 이곳은 두 사도의 이룬 그 일을 위하여 전에 하나님의 은혜에 부탁하던 곳이라"
항구 앗달리아에서 배를 타고 안디옥으로 돌아왔습니다. 이곳은 수리아 안디옥으로 바울과 바나바가 선교사로 처움으로 파송을 받은 곳입니다. 안디옥교회는 두 선교사를 보내면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모든 것을 뒷받침해서 파송한 것입니다.
'두 사도가 이룬 그 일'은 선교(복음)사역을 의미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부탁했다'는 말은 두 선교사들의 사역을 위해 하나님께 '안수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27절 "이르러 교회를 모아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고하고"
두 사도가 안디옥교회에 돌아와 선교보고를 하고 있습니다. 1차 전도여행이 끝났기 때문에 성도들 앞에서 보고한 것입니다.
보고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했더니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역사가 일어났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함께 하신 사건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 이런저런 일들이 일어났다고 보고했습니다. 우리도 불원간에 하나님 앞에 서게되고 우리의 사역을 보고할 때가 있음을 기억하고 맡겨진 일에 신실하게 임해야 할 것입니다.
그들의 보고 중에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여신 것'을 보고했습니다. 행11:18절에서도 베드로가 예루살렘 교회에서 보고하기를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바울이 복음을 증거하여 이방인들이 주께로 돌아오는 회개의 놀라운 기적이 나타난 것입니다.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나 바울이 전한 복음의 본질은 예수는 그리스도라는 것으로 동일합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동일합니다. 우리가 구원 얻는 것은 다름 아닌 예수님을 믿음으로 되어진 일입니다.
이와 같은 아름다운 보고를 드릴 수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입니다. 성도들이 주를 위하여 봉사하고 헌신하며 충성하는 모습을 하나님이 보고 계십니다. 때로는 성도들의 눈물까지도 주의 병에 담아두신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주를 위하여 당하는 수고를 감사함으로 받아야 할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할/

 

▶28절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제자들과 함께 오래 있으니라' 이 표현은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교회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음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또 오래 머물렀다는 말은 선교활동이 얼마나 힘들었는지에 대한 간접적인 표현이기도 하고 또한 바울과 바나바가 제2차 전도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고, 죽을 고비를 넘긴 위대한 전도자에게 쉴 때가 온 것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새로운 충전의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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