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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3강) 할례에 대한 변론! (행15:1-12)

by 【고동엽】 2022. 3. 10.

(제43강) 할례에 대한 변론! (행15:1-12)

 

바울과 바나바는 제1차 전도여행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안디옥교회로 돌아와 선교보고를 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때 많은 이방인들이 회개하고 주께로 돌아왔다고 보고했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함께 하신 사건이라고 보고했습니다.
그리고 제2차 전도여행을 기도로 준비하기 위해 안디옥 교회에서 약 1-2년 사이를 준비하고 있을 때, 안디옥교회에 이단 시비가 일어났습니다.
문제는 '유대로부터 내려 온 어떤 사람들'이 기독교로 개종한 뒤에도 모세의 의식법인 '할례'문제인데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서도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하는데 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할례는 전혀 문제가 될 수 없지만 당시 상황에서는 유대인들에게는 할례 받지 않는 것은 곧 언약 백성에서 제외되는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원래 할례란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으로(창17:10-14)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의 표증으로서 처음 시행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모세의 율법으로 규정이 되어 유대인들은 할례 받는 것을 굉장히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할례는 의식보다는 마음속의 할례가 더 중요합니다. 신10:16절에 보면, 모세는 하나님을 거역하는 악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마음에 할례를 행하는 것'을 책망 조로 가르쳤습니다.
렘4:4절에서도 보면 예레미야 선지자도 유대백성에게 '마음의 가죽을 베고 여호와께 속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할례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까지의 구원의 증표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뒤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습니다. 바울의 복음의 핵심이 바로 '주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면 능히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과 바나바와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 논쟁은 안디옥교회 단독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것을 발견한 바울은 자신과 함께 바나바와 몇 사람을 대표로 예루살렘교회에 파송하여 공식적으로 총회를 열어 해결하도록 한 것입니다.
본문에서 최초로 기독교 총회가 열린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제목소개!▶

 

▶본문을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는데 1-5절은 할례에 대한 변론입니다. 6절은 공회를 소집한 사건을 다루고 있으며, 7-12절에서는 '공회에서 발언한 내용'입니다. 그러니까 본문은 기독교 교회사의 최초의 이단 시비를 다룬 사건입니다.

 

▶1절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형제들을 가르치되 너희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 하니라"
우리는 아름답게 잘 성장한 안디옥 교회의 대표적인 지도자 바나바와 바울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이 하나님 말씀을 잘 가르쳐 주고 있는데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는 말을 하여 문제가 생깁니다. 지금까지 안디옥 교회 교인들은 바울과 바나바가 가르치는 바를 하나님께서 주시는 말씀으로 여기며 '아멘' 하고 배웠는데 예루살렘에서 온 사람들이 다른 말을 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전한 원 복음을 제쳐놓고 다른 말을 하면 그것이 이단입니다.
기독교 초기에 일어났던 이단들은 대부분 유대교와 관련해서 생겨났습니다. 많은 유대인 기독교인들은 기독교가 유대교의 뒤를 잇는 것으로, 연속적인 것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즉 유대교적인 시각을 가지고서 기독교와 신자들의 생활에 대해서 해석을 함으로서 문제가 발생한 것입니다.
물론 어떤 면에서는 기독교는 유대교와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연관이라는 것은 여호와 하나님, 구약성경,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으로 이어지는 관계이지, 종교적인 관계는 결코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기독교는 유대교의 후신이나 혹은 유대교와 같은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를 유대교적인 시각에서 바라보았고, 종교적으로 서로 관련을 지었습니다. 이처럼 기독교를 유대교의 연장선으로 보거나, 혹은 그것과 같은 것으로 보았던 사람들은 기독교인들에게 유대교 식의 신앙과 생활을 요구했고, 이것이 복음의 가르침보다 더 강조될 때에 이단시비로 발전했습니다.
이들이 어디에서 왔습니까? '유대지역'이라고 되어있습니다만, 15:24절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 장로들 중 일부'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분들이 안디옥으로 내려와서는 지금까지 바울과 바나바로부터 들었던 복음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복음, 새로운 교리를 전했습니다.
그들은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당신은 구원을 받았습니까?' '예, 받았습니다.' '그래요? 구원에 대해서 뭐라고 배웠습니까?'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배웠습니다.'라고 말하니까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신자들이 하는 말이 '믿는 것 하나만으로 어떻게 구원을 얻습니까? 예수를 믿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지켜서 할례를 받아야 구원을 온전히 이룰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것입니다.

 

▶이단 운동의 정체를 알아보겠습니다.
⑴'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은 이름을 밝히거나 교회를 대표한 직명이 전혀 없이 어떤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저들이 예루살렘교회로부터 정식으로 파송을 받고 오지 않은 사사로이 움직이는 집단임을 보여줍니다.
'유대로부터'란 말은 예루살렘을 의미합니다. 갈2:12절에서는 바울은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당시 예루살렘교회의 총회장은 베드로가 아니고 야고보였습니다.
이들은 기독교 안에서 유대교적 전통을 사수하려는 한 분파에 속한 사람들로서 구원을 얻는데 할례를 필수조건으로 전제하고 이방인들도 할례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안디옥교회가 크게 부흥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이방인들이 많이 모인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와서 하는 말이 '너희들이 믿음이 좋다고 떠들어대지만 할례를 안 받고 어떻게 구원을 받았다고 하느냐?'고 의문을 제시합니다.
그들은 기독교로 개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민의식에 사로잡혀 예수님을 믿어도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 사상은 곧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음이 아니고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이행득구'의 사상입니다.
⑵이단들은 안디옥교회에 가만히 들어온 자들입니다. 이단들의 특징 중 하나가 가만히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합법적으로 교회의 공인을 받아 공개적으로 가르친 자들이 아니라 암암리에 몰래 가르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자들을 가리켜 유다서 4절에서는 '가만히 들어온 자 몇이 있음이라'고 말합니다.
⑶이들을 가리켜 '거짓 형제'라고 했습니다. 갈2:4절 "이는 가만히 들어온 거짓 형제 까닭이라 저희가 가만히 들어온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가진 자유를 엿보고 우리를 종으로 삼고자 함이로되" 이단들은 우리의 참 형제가 아니라 거짓형제입니다. 영혼사냥꾼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요10장에서 이러한 자들을 가리켜 '절도요, 강도요, 삯군이요, 도적'이라고 경고했습니다.
⑷계2:9절에서는 '자칭 유대인'이라고 했으나 실상은 '사단의 회'입니다. 그들은 안디옥교회 성도들에게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한다.'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이 복음은 사도바울의 복음과는 정반대입니다.
사도바울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고 영접하면 구원이 있다. 즉 이신득의'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할/ 그런데 이들은 할례를 행해야 된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은 무엇을 행해야 구원을 받는다는 이행득구의 신앙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가 다 이루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님이십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 은혜요 선물입니다.
엡2:8절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또 롬1:16-17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할/

 

▶2절 "바울과 바나바와 저희 사이에 적지 아니한 다툼과 변론이 일어난지라 형제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및 그 중에 몇 사람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에게 보내기로 작정하니"
바울과 바나바는 참으로 원만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신앙의 인격이 제대로 갖춰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단에게는 예외입니다. 진리문제는 절대로 양보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의 변론과 다툼은 굉장히 격렬했던 것입니다.
아마 바울이 큰 소리로 '되지도 않는 말을 하지 말라. 할례 받는다고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율법을 다 지켰느냐?' 아마도 이런 식으로 변론하지 않았겠습니까?
사실 바울과 바나바를 통해서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교회가 세워졌는데 이런 이단들이 내려옴으로 이방 기독교회의 뿌리는 흔들린 것이요, 사도바울의 사도 권에 대한 도전이기도하며 예루살렘교회의 선교원칙에도 문제가 되기 때문에 바울은 이번 이단 문제를 분명하게 정리해야 할 교리문제이기 때문에 자신을 포함한 바나바와 몇 사람들을 모 교회에 파송해서 총회에서 결판을 내기로 작정했습니다.
바울은 안디옥교회를 대표할 사람들을 뽑아 예루살렘교회에 갔습니다. 왜 예루살렘교회에 갔는가 하면 이단 교리를 가르친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왔고, 그들은 이곳에서 이방인 개종자들에게 할례를 받도록 사도들로부터 지시를 받은 것처럼 가장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루살렘교회의 사도들로부터 그러한 지시가 있었는지 알기 위해서 간 것입니다. 특히 기독교총회가 예루살렘에 있었기 때문에 간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처음으로 신앙과 율법, 할례와 구원의 문제는 초대교회에 있어 처음으로 대두된 중요한 교리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교리에 확고히 서 있었으나 율법주의자들은 앞으로도 계속 미혹시킬 염려가 있고 성도들 중에 미혹 받을 자들이 나올 가능성이 있으므로 사명을 가지고 간 것입니다. 갈2장을 보면 이때 디도도 함께 간 것 같습니다.

 

▶3절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베니게와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의 주께 돌아온 일을 말하여 형제들을 다 크게 기쁘게 하더라"
'저희가 교회의 전송을 받고'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 일행이 안디옥교회의 공식 대표임을 보여준 것'입니다. 또 하나는 안디옥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의 가르침을 받고 따르며 이단들의 교리에 동요되지 않았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한마디로 교역자에게 힘을 싫어준 것입니다. 바울일행은 바로 예루살렘으로 올라간 것이 아니라 '베니게와 사마리아'를 들려서 갔습니다. 왜 돌아갔습니까?
이 지역들이 비록 팔레스틴에 속해 있으나 유대인들에게 이방족속으로 멸시받는 곳이지만 큰 성읍들이며 많은 인구가 살고 있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돌아간 것이고 또 '이신득의'의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 돌아간 것입니다.
'베니게'는 사마리아 위쪽에 있는 수리아 지방에 속한 도성으로서 행11에 따르면 스데반의 순교로 예루살렘에서 피신해 간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전해서 교회가 세워진 곳이고, 사마리아 지방은 이스라엘 땅이지만 혼혈 족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방 취급을 받는 지역입니다.
사마리아 지방에는 이미 빌립집사가 행8장에 복음을 전하므로 교회가 세워진 곳입니다. 두 곳을 지나가면서 바울일행이 복음을 전했더니 그들의 신앙이 '이신득의'의 신앙임을 확인하고 다 기뻐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4절 "예루살렘에 이르러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계셔 행하신 모든 일을 말하매"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교회는 모 교회입니다. 베드로, 요한, 야고보 쟁쟁한 사도들이 있는 교회입니다. 행11:22절 이하에 보면 바나바도 본래 예루살렘교회에서 파송을 받은 사역자입니다. 바울일행이 그곳에 도착해서 열렬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교회와 사도와 장로들에게 영접을 받고' 이 모습은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나 회심한 뒤 처음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와는 아주 대조적입니다. 그가 처음에 방문 때는 의심과 냉대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1차 선교여행을 마치고 지금 올라가서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바울과 바나바는 주의 복음을 전하고 많은 교회를 개척했기 때문에 모 교회에서 그들을 사도로 인정해 준 것입니다. /할/
영접을 받은 바울 일행은 이방 선교보고를 다시 사도들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맨 먼저 바나바의 고향인 구브로에서 복음을 전했더니 많은 결신자가 나왔으며, 또 바보성에서 거짓 선지자 박수를 회개시키고 또 그 성의 총독 서기오 바울을 영접시키자 그 땅에 복음이 폭발했고, 그리고 비시디아 안디옥 지방에서 안식일 날 회당에서 처음으로 복음을 전했는데 그 다음 안식일 날에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13:44)하여 모였는데, 이것이 발단이 되어 유대인들이 시기가 가득하여 변박하고 비방하며 그 성내의 경건한 귀부인들과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그 지경에서 쫓겨 나와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했을 때 엄청난 기적이 일어났는데 루스드라에서는 날 때부터 앉은뱅이를 일으켜 세웠더니 자기들을 신으로 받들어 제사 드리려고 해서 겨우 말렸다는 보고와 함께 그 모든 것이 '주님이 함께 하였기 때문에 이루어진 사건'이라는 보고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본문에서는 이 말이 생략되어 있는데 안디옥 교회 이단들의 실태를 보고하게 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몇 사람이 안디옥까지 와서 율법을 지켜야 천국에 간다고 가르쳤기 때문에 안디옥 성도들이 많은 갈등을 겪고 있으므로 이 갈등을 풀고 올바른 복음적 신앙을 위해 확실하게 하고자 우리가 예루살렘교회에 왔다'고 말합니다.
그 보고를 듣고 바리새파 사람이 일어나서 한 소리가 5절입니다.

 

▶5절 "바리새파 중에 믿는 어떤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바리새인 중에 믿는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 안에 있었습니다. 바리새파는 원래 율법주의입니다. 그런 사람이 예루살렘교회 안에 있었다는 것은 당시 기독교 세력이 상당히 확장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은 바리새파 중에 기독교 신자가 된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기를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합니다.
그렇다면 이들이 주장하는 할례란 도대체 무엇입니까? 할례라는 것은 유대사회에서는 아주 익숙한 것입니다. 마치 우리 민족이 속한 몽골인종의 어린 아기들에게 몽골반점이 있듯이, 할례는 유대인들의 특별한 표시였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할례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요즘에는 젊은이들이 연인관계를 나타낼 때 똑 같은 반지를 끼고 다니기도 하고, 소위 '커플링'이라는 것을 끼고 다닙니다. 좀 심한 경우에는 몸에다 똑 같은 문신을 새겨서 서로의 소유라는 것, 서로 언약을 맺은 관계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할례란 바로 이런 의미였습니다. 할례란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된 표시였습니다.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의 몸에 새겨진 사랑의 징표입니다. 하나님 편에서 이스라엘을 향하여 그들의 하나님으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시겠다는 약속의 표시이고, 유대인들 편으로서는 자신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리라고 하는 약속의 표시였습니다.
상징이나 표시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상징물에 의미를 실었다는 것뿐입니다. 반지가 사랑 그 자체입니까? 반지를 잃으면 사랑도 잃고 사랑도 끝입니까?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그것 자체가 구원의 조건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할례를 통하여 자신들이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에 있다는 것,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이라는 것을 깨닫고 확인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할례가 시간이 지나면서 의미는 사라져버리고 형식만 남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고 하는 신앙은 사라져버리고, '할례만 받으면 반드시 구원받는다', '할례는 하나님의 영원한 백성이라는 표시이다'하는 것만 남게 된 것입니다. '할례는 곧 구원의 티켓'이라고 생각만 남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없어도 할례만 있으면 하나님의 백성이다라는 사고가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유대에서 내려온 신자들이 주장한 내용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백성된 표시가 할례였던 것처럼, 이방인으로서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은 사람들도, 그 최종적인 구원의 마침으로서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백성이 아닌 이방인인 당신이 이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최종적인 낙인인 할례이다', '나사렛 예수를 구주로 믿는 것도 좋고, 성령을 받는 것도 좋지만, 그 마침, 그 종점은 할례를 받는 것이다'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외적인 표시가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할례이다'는 주장입니다. 이것은 구약적이고 율법적인 교리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당시 예루살렘 교회 안에 유대주의자들이 기독교로 개종해 왔으나 유대교적 전통과 기독교가 갈등 관계에 놓이게 된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5절에서 이 바리새파 출신 기독교인들이 공회에서 이방선교에 대한 문제를 공식적으로 제기한 것으로 보면 이 사람들이 유대교적 기독교 운동의 핵심 인물이었을 것이며 1절에서의 '어떤 사람들'도 이들이 파송한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이들은 기독교의 탈을 쓴 유대교로서 교회를 어지럽히는 이단자들입니다.
신앙의 물을 처음부터 잘못 먹으면 이렇게 버리기가 힘듭니다. 이 바리새파는 '율법을 잘 지키는 구별된 자'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의시대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으면서도 그 정신은 쉽게 못 버리고 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도를 무너뜨리는 일입니다. 예루살렘교회는 이러한 자들이 적지 않게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신득구'의 교리를 확립한 필요성을 깨닫고 또 공회에서 이 문제로 인한 혼란을 막기 위하여 갈2:2절에 보면 총회 소집 전에 베드로, 요한, 야고보 사도들을 만나 의논했습니다.

 

▶6절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드디어 예루살렘 '성' 공회가 정식으로 열렸습니다. 할례문제를 의논하기 위하여 공회가 열린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최초의 공회였습니다. 여기서 사도는 예수님의 12제자들을 의미하는 것이고 '장로'는 교회의 원로급 중견들입니다.
그때 장로를 감독이라고 했습니다. 장로는 사도를 도와 교회를 다스리며 성경을 가르치며 양을 먹이고 치는 일을 했습니다(행20:28-29). 이 중에는 예루살렘교회 감독인 예수님의 친동생 야고보도 있었습니다. 본문의 '공회'는 하나님의 기관입니다. 사도신경 마지막에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공회는 당회, 노회, 총회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공회를 통하여 일하십니다.
본문에 나오는 공회는 큰 의미가 부여되었는데 바로 종교회의의 모태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 기독교가 이방인들에게 전파되자 유대인들이 그동안 매우 자랑스럽게 지켜왔던 선민의식에 큰 상처를 받게 되면서 나타난 민족적 감정에 처음으로 교회가 공식적으로 대응했다는 점과 종교적으로 중요한 구원에 관한 교리를 취급했다는 점에서 종교회의의 모태가 된 것입니다.
▶7-11절까지는 베드로의 변론입니다.

 

▶7절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 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당시 회의 진행을 압축적으로 전해주는 말로써 당시 회의가 상당히 진지하고 열띤 분위기 속에서 장시간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변론'은 논쟁이나 어떤 토론을 뜻하는 말인데 일반적인 변론이 아니라 상호간의 주장을 내 놓고 토의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유대인들은 조상 적부터 할례를 행하여 왔고 오랫동안 율법을 지켜왔는데 이제 할례를 행하지 않아도 된다는 문제는 바로 자신들의 정체성의 문제이기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많은 변론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회의 중에는 누구나 자기의 의견을 기탄 없이 모두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변론의 목적은 오직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두어야 합니다. 무조건 자기의 의견이 옳다고 우기거나 관철시키려는 것은 무지입니다.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을 합니다. 베드로가 일어나 발언을 하고 13절을 보면 야고보가 발언을 합니다. 그것을 보면 당시 예루살렘교회는 베드로와 야고보가 주축이 되어 이끌고 간 것이 분명합니다.
'너희도 알거니와' 이 말은 행10장의 사건입니다. 즉 가이사랴의 고넬료가 베드로에 의해서 기독교인이 된 사실과 하나님이 보여준 환상을 뜻합니다.
사실 베드로는 율법주의에 빠지기 쉬운 사람입니다. 그 베드로를 하나님께서 복음주의자로 바꾸시기 위하여 행10장에서 고넬료를 전도하도록 한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때 자기 딴엔 율법을 잘 지킨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기도하는 중에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데 그 안에 정한 것과 부정한 것들이 함께 들어있는데 하늘에서 소리가 나거늘 '베드로야 잡아 먹으라!' '지금까지 부정한 것을 먹지 않았는데 어떻게 이런 것을 먹을 수 있습니까?' 반문합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부정하다고 할 수 있느냐?' 책망하십니다. 베드로가 그 환상을 하나님께서 왜 보여주셨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밖에서 '우리 주인님이 선생님을 모시고 와서 집회를 해 달라'고 하십니다.
그때야 성령님이 깨닫게 해 주면서 '아! 주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전도하라고 하셨구나! 부정한 것들이 이방인을 말하는 것이구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내가 더럽다고 할 수 없구나 가야 되겠구나'하고 고넬료 집으로 갔습니다. 그러나 고넬료 집에 가서도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불법인 줄 알지만 하나님께서 가라고 해서 왔으니 복음을 받으라'고해서 그 날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가 자신이 이방인인 고넬료을 구원시킨 일은 하나님의 뜻에 따른 것임을 밝힘으로 이방인 선교에 대한 정당성을 인정해 주었고 바울사도를 높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는 이런 논란이 있을 줄 아시고 베드로를 통해 미리 준비시킨 것이라고 말합니다.

 

▶8절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또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하나님은 외모를 보시지 않으십니다. 할례를 받았는가? 안 받았는가를 보시지 않습니다. 그 마음에 중심을 보십니다. 고넬료를 보십시다. 얼마나 주님의 은혜를 사모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을 아십니다.
행10:44절에 보면 베드로가 고넬료 가정에서 복음을 전할 때 '성령이 말씀 드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셨습니다.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예수를 믿을 때에 성령을 주셨습니다.
'저희에게도 성령을 주어'란 말은 베드로가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등하게 하나님의 은총 안에 있음을 확인시켜 준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은총이 자기나라 전유물인줄 착각을 합니다.

사실 베드로로 행11장을 보면 이방인 고넬료를 방문한 사건을 두고 할례자들이 공격해 왔을 때도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의 친지들이 성령 받은 사건을 언급함으로 그들의 공격을 잠재운바 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아무도 베드로의 말에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9절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이 유대인이나 이방인을 차별하지 않는 이유가 믿음 때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은 오직 믿음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어떤 정통이나 민족에 대한 차별을 통해 있는 것이 아님을 강조한 것입니다.
지금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배타적인 선민의식이나 우월감을 버려야 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할례가 구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직 믿음만이 구원의 방편임을 베드로가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하나님께서는 분간하시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담이 무너졌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차별하시지 않고 민족도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다 같이 믿음으로 깨끗케 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을 때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다 죄 사함을 받고 깨끗해진 것입니다. 그런데 무슨 딴 소리하느냐는 베드로의 책망입니다. 이 순수한 복음을 전하고 믿어야 합니다. /아멘!/

 

▶10절 "그런데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무슨 말입니까? 우리 유대인들이라고 해서 율법을 온전히 지켰느냐는 것입니다. 유대인들도 지키지 못하는 율법을 이방인들을 보고 지키라고 하면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은 멍에요 고통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멍에는 율법을 의미합니다.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구원 얻을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모든 허물과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신 것입니다.

 

▶11절 "우리가 저희와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을 믿노라 하니라"
본문이 베드로의 설교의 핵심입니다.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가 동일하게 '주 예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줄을 믿으라' 이 사상이 사도들의 사상이요, 바울의 사상이요, 오늘날 우리 기독교의 정통 교리입니다. /믿/
롬3:28절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그러면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율법'에 대하여 한 번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어떤 역할을 하는가?' 한마디로 우리가 죄인인 것을 진단해주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를 의롭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 우리를 천국으로 인도할 능력도 없습니다.
김동호 목사님은 '율법은 X-Ray로 비유'하면서 '뼈가 부서진 것, 암세포가 있는지 없는지'를 밝혀주는 것과 같다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러나 X-Ray를 가지고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X-Ray와 같아서 우리의 죄를 진단할 뿐, 우리를 의롭게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아니하면 능히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는 말은 주님의 십자가의 공로를 무시하는 불 신앙을 범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직 '주의 십자가의 보혈의 공로'만이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케 하실 수 있고, 구원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아멘!/
이제 우리는 율법 대신 믿음 아래 있는 자에게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새로운 '생명의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법'입니다. 롬13:9-10절에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했습니다. 갈5장에서 그리스도 안에서는 '사랑으로 역사 하는 믿음'뿐이라고 했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율법의 준수도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할례도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우리의 세례도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세례는 단지 구원받은 자가 죄 씻음 받는다는 표식일 뿐입니다. 만일 할례가 구원의 조건이라면 할례가 없는 이방인들은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12절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바나바와 바울이 하나님이 자기들로 말미암아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 고하는 것을 듣더니"
'온 무리가 가만히 있어' 신앙적으로 권위 있는 베드로가 말할 때 회중이 그것을 받아들여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공회가 정돈이 되고 조용해 졌을 때, 바울과 바나바는 자신들이 이방의 나라 복음을 전파할 때 하나님이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 주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아까도 말씀드렸습니다만 이방인들이 성령 받고 치유 받았습니다. 이 말을 듣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깨닫지 못하여 할례를 주장하였으나 베드로를 통하여 고넬료 사건을 들고 또 바울 사도의 선교보고를 듣고 그들이 새롭게 깨달은 것입니다.
초대교회 공회에서 보여준 모습은 굉장히 인상적입니다. 모두 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찾으려고 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바른 신앙인의 모습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고 원해야 합니다. /아멘!/
우리는 이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안디옥교회가 한 일을 주시해 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의 모(母) 교회에 있는 사도들에게 파송을 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사도의 복음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배우게 됩니다.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 사명을 감당했습니다. 안디옥에서 예루살렘까지는 500Km가 넘는 거리입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 길 보다 더 먼 거리입니다.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않아서 모든 곳을 걸어서 다닐 때입니다. 도보로 수일을 걸어가야 할 거리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그 사명을 감당하러 떠났습니다. 그뿐 아닙니다. 베니게로 사마리아로 다녀가며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사실을 보고하며 전도하였습니다. 그들의 뜨거운 복음의 열정은 가는 곳곳마다 전도하게 하였습니다.
우리도 바울과 바나바 이 두 사도의 복음의 열정을 배워야 합니다. 오늘 우리는 예배드린 후에 가정으로, 직장으로, 삶의 현장으로 돌아갑니다. 어디를 가든 예수가 그리스도이신 것을 증거 하는 신앙 인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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