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강) 항상 은혜 가운데 있으라! (행 13:42-52)
유대인들의 탈무드 교육은 대단합니다. 유대인 가정의 식탁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 날 영리한 여우 한 마리가 바닷가에 갔습니다. 그 여우는 물고기를 먹고 싶은 마음에 꾀를 내어 물고기를 불렀습니다. '물고기 여러분, 내 말 좀 들어보세요! 지금 어부들이 그물을 가지고 여러분들을 잡으러 오고 있습니다. 바다 속은 위험하니까 땅으로 올라오세요! 그리고 물 속에서는 큰 고기들이 여러분을 괴롭히니 차라리 이 땅에서 우리와 함께 사십시다. 육지에 올라오면 아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이 말을 들은 물고기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갑론을박 좀처럼 회의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여우는 영리하니까 여우 말에도 일리가 있다는 주장과 바다 속에 사는 것이 위험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잘 살아오지 않았느냐는 반론이 나옵니다. 결국 물고기들은 오랜 회의 끝에 여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물고기 대표는 얼굴을 밖으로 내밀고는 '여우님! 우리들을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마운 일이지만 우리는 물 속에 사는 것이 마음 편합니다.' 통첩을 하고는 물 속으로 깊이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우화는 유대인들 가정의 식탁에서 아버지가 자녀들에게 자주 들려주는 이야기인데 이 이야기를 다 들려준 아버지가 이런 질문을 합니다. '물고기가 땅으로 나오면 어떻게 되지?' 어린아이들은 근방 눈치 채고는 '그야 말라죽게 되지요!' 바로 그렇단다. 유대인은 유대인으로 살아야한단다. 아무리 유혹이 와도 유대인임을 저버린다면 물고기가 땅으로 올라와 죽는 것과 같은 것이란다.
무서운 교훈입니다. 이런 교훈을 통해서 어린 마음속에 유대인으로서의 신분과 정신을 떠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새겨주는 교훈입니다. 성도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 머물지 않는다면 땅으로 나온 물고기처럼 영적으로 말라죽고 말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는 순간 죽는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는 순간 영혼이 죽고 맙니다. 물고기는 물에서 살아야 하듯이 인간은 하나님 안에서 살 때 행복하고 평안합니다. /믿/
오늘 본문은 사도바울이 비시디아 안디옥 지방 유대인 회당에서 설교한 뒤의 반응입니다. 바울의 설교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것은 우연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으로 온 여자의 후손인 메시아'임을 가르쳤습니다. 그러니까 일찍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은혜의 약속이요, 구원의 약속으로서 이것을 이루시고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는데 이 사실만 믿기만 하면 놀라운 은혜에 동참할 수 있다고 설교했습니다.
그랬더니 두 가지의 반응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은혜 받고 구원의 반열에서는 사람들이 있는가하면 또 하나의 반응은 바울의 복음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핍박하는 사람들로 나누어 진 것입니다. 그런데 복음을 받아 드린 사람이 누군가하면 이방인들이 받았습니다. 정작 복음을 받아야 할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은 바울이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너무도 냉담했습니다.
오히려 사람들이 모이는 것까지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사실 복음은 유대인들의 것입니다. 메시아도 저들의 메시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저들의 혈통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은 유대인들이 얻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거부하면서 핍박까지 일삼았습니다.
자기들만 거부하고 만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 이방인들이 그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것을 보고 분노와 질투가 가득했습니다.
45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에 시비를 걸고 악의로 비난했다고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저들은 '똑같은 복음을,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장소'에서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그 복음의 생명수를 받아들였고, 어떤 사람들은 독을 품었습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행2장에 보면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어찌할꼬'하면서 가슴을 친자들이 있습니다. 37절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여기 '이 말을 듣고'에서 이 말은 베드로의 설교를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마음에 찔려 자신들도 모르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했다는 말입니다.
설교를 들으면서 우리의 심령이 찔림이 온다는 것은 복 받을 조짐이요 우리 신앙의 인격이 변화되는 즉, 물이 포도주 되는 과정인줄 믿습니다. /아멘!/
베드로가 어떤 설교를 했습니까? '주 예수를 믿어라'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설교의 가장 기본적인 것은 예수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 이것이 모든 설교의 주제요 핵심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가 전한 예수님은 어떤 예수님입니까? 우선 나사렛 예수님이십니다. 22절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이름, 나사렛 예수를 강조하므로 기독교의 역사성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인 것을 증거 했습니다. 예수님은 나사렛 예수님만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이기 때문에 권능, 기사, 표적을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또 어떤 예수님을 전했습니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역시 유대인들이 본 바요, 들은 바요, 그대로 골고다산상에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기독교의 실패가 아니고 이제부터 시작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비밀이요, 계획이다'라고 역설했습니다.
▶또한 어떤 예수님이십니까? 베드로가 전한 예수님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외쳤습니다.
32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 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인지라" 우리 모두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증인들입니다. 그들이 어느 대목에서 이 찔림이 왔습니까? 베드로의 설교 속에 '너희가 예수를 죽었다'고 외쳤습니다. 행2:36절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한마디로 너희들이 메시야를 죽였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기다리던 메시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데, 그 예수를 너희들이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입니다.
이 설교를 통해서 이구동성으로 감동을 받고 가슴을 치면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했다는 것입니다. ▶이 탄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한 가장 놀라운 인간의 자아 각성에서 나오는 부르짖음입니다.
그 가운데는 분명히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소리쳤던 무리들도 있었습니다. 예수를 죽이고 바라바를 살려달라고 외쳤던 무리들이 거기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너희가 바로 예수를 죽인 자다' 이렇게 큰소리로 외칩니다.
저들은 이 말을 듣고 회개하면서 통곡을 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 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라"고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정말 '어찌할꼬?' 탄식할 일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질병 때문에 '어찌할꼬?' '가정문제 때문에, 자녀들 문제, 사업문제, 물질문제, 고난문제' 때문에 '어찌할꼬?' 탄식할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러나 더 높은 차원의 탄식은 '하나님과의 관계' 때문에 탄식해야 합니다. 바로 믿지 못한 것 때문에, 충성하지 못한 것 때문에 '어찌할꼬?' 탄식해야 합니다. 말씀대로 믿지 못하고 살지 못한 것 때문에 이 탄식이 나와야 합니다.
부정적인 입술, 용서하지 못한 것, 인간의 수단과 방법대로 산 것을 회개해야 합니다. 깨어 기도하지 못한 것 때문에 '어찌할꼬?' 탄식해야 합니다. 전도하지 못한 것도, 주일 성수 못한 것도, 감사하지 못한 것도 '어찌할꼬?' 탄식해야 합니다.
같은 유대인들인데도 행2장의 유대인들은 '어찌할꼬' 가슴을 쳤는데 본문의 유대인들은 '시기가 가득'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가실 때도 그랬습니다. 우편 강도에게도 주님의 십자가가 죄를 깨닫게 하고 회개하고 생명을 얻을 기회를 얻었는가 하면 좌편 강도는 입에 거품을 품고 헐뜯었습니다. 결과는 한 사람은 낙원에 갔고 한 사람은 지옥으로 갔습니다. 바울은 은혜 받은 사람들에게 당부하기를 '항상 은혜가운데 살라'고 당부했습니다. ◀제목소개!▶
▶42절 "저희가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하더라"
'저희가 나갈 새' 이 말은 바울이 설교를 마치고 회당에서 퇴장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입니다. 문맥상 바울과 바나바가 설교한 후 곧 바로 퇴장하는 것으로 묘사된 것 같으나 예배 도중에 퇴장한 것이 아니라 예배를 마치고 친교를 마치고 다른 사람들과 함께 퇴장하는 장면을 묘사한 것입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사람들이 다음 안식일에 또 말씀을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여기 '청했다'는 말은 '간청하기 시작했다'는 뜻으로 복음에 대한 저들의 열정적인 구도 심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파동, 복음의 파동, 생명의 파동'이라고 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참으로 대단한 영적 파동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은혜 받은 증거입니다. 은혜를 받아 그 말씀을 믿는 자는 더욱 더 그 말씀을 사모하여 또 듣고자 합니다.
또 어떤 이는 전도하는 말을 듣고 의아한 마음이 생겨서 다음에 더 확실한 것을 듣고자 하는 자도 있습니다. 본문의 상황으로 보아 유대교인들 중에서 기독교도의 개종이 일어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3절 "폐회한 후에 유대인과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이 많이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 두 사도가 더불어 말하고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권하니라"
'폐회한 후에'란 말은 42절의 '저희가 나가서' 배웅까지 다 끝나고 남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은혜 받고 바울을 떠나지 않고 있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여기 '유대인'은 '디아스포라', 흩어진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유대교에 입교한 경건한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도 있었고, 이방인도 가지 않고 바울로부터 복음을 듣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의 변화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①바나바와 바울의 서열이 정식으로 바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전까지는 즉, 11:30절, 12:35절, 13:2, 7절을 보면 바나바의 이름이 먼저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부터 시작하여 50절 이하에는 바울과 바나바로 이름 서열이 바꿔서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실 주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인간적인 서열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 안에서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것 때문에 상처받고 시험 들고 교회를 떠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실 서열이 올라간다는 것은 기쁘고 즐거운 일입니다.
교회뿐만이 아니라 직장이나 어떤 단체에서도 서열이 올라간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특히 정치 권력자들은 목숨을 걸고 올라가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본문에 바나바는 참으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그러한 서열에 전혀 개의치 않고 주를 위해 충성스럽게 일한 사람이었습니다.
②더 중요한 변화입니다. 이때부터 실제적으로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증거 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사실 바울과 바나바가 최초의 선교사로 파송 받아 땅 끝까지 복음을 전하는 선교의 걸음을 내딛기는 했지만 여전히 저들은 선민 이스라엘의 담장을 넘어서지를 못했습니다.
저들이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회당을 찾고 그 회당에 모이는 소아시아 지역에 흩어져 사는 소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 유대인들의 선민의 담장이 무너지고 복음의 물줄기가 드디어 이방인들에게 흘러 들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 것입니다. 이 물줄기가 넘고 넘어 이 천년을 통하여 우리나라까지 흘러오게 된 것입니다. /아멘!/
여기 '바울과 바나바를 좇으니'라는 말은, 바울의 설교는 다음 안식일에 듣기로 했으나 바울은 그 날 즉시 이방지역의 구석, 구석을 다니며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 '좇았다'는 말은 '저들의 눈과 마음과 뜻과 온갖 관심의 방향을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향하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그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고 했습니다. 신앙인의 살길은 바로 이 길입니다. 능력 받고, 축복 받는 비결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서는 것'입니다. /믿/ 사랑하는 성림의 성도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삽시다. 언제까지? '항상'입니다. 항상은 지금, 현재형입니다. /할/ ▶44-52절까지는 핍박 중에서도 복음을 전하는 바울의 모습입니다.
▶44절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다음 안식일에 온 성에 있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위하여 회당으로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온 성이 거의 다 모였다'고 한 것은 당시 바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에게 나타난 '반응이 어떠했는가'를 단적으로 표현해 주는 말입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지방에 복음의 핵폭탄이 떨어지자 그 성 전체가 난리가 났습니다. 그 성은 95%가 이방인들이 살고 있었고, 5%만이 디아스포라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성의 사람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몰려왔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그 한 주 동안에 동네 구석구석에 다니며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주의 말씀을 더 깊이 깨닫고자 하는 무리가 많이 찾아온 것입니다.
문제는 이렇게 많이 몰려온 것 때문에 도리어 바울에게 핍박이 다가왔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그를 시기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가 있는 곳에서는 언제나 마귀의 역사가 있기 마련입니다.
▶45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말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거늘"
여기 유대인들은 '불 신앙의 유대인들을 의미'합니다. 유대인 중에도 이미 개종하여 바울을 좇는 무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모여드는 수많은 이방인들의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설교를 변박하고 비방했습니다.
여기 '시기'는 자기 종교에 대한 열심을 의미합니다. 즉 율법주의 할례주의자들의 열심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기로 저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목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은 바울의 말끝마다 반대하고 저주했습니다.
여기 '변박'은 '반대하여 말함'을 의미하는 것이고, '비방'은 '저주하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본문의 시기하고 변박하고 비방하는 유대인들은 바리새파 유대인으로 회당의 핵심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바울의 설교가 자기 공동체에 심각한 도전이 된다고 느꼈기 때문에 바울의 설교에 무조건 비방하는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사실 당시 유대교에서는 예수교 때문에 굉장한 위기감에 쌓여 있었다고 학자들은 말합니다.
바울이 당하는 고난은 복음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었습니다. 사실 복음이 가는 곳마다 박해가 없었던 때는 없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님의 일을 한다는 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다 잘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고난을 없애주시는 분이 아니라 필요할 때에는 고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시는 분이십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 유대인들의 핍박이 있을 때, 주춤거리거나 용기를 잃어버린 것이 아닙니다. 46절을 보면 오히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했다고 했습니다. 46절을 읽어봅시다.
▶46절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여 가로되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왜 이들이 담대해졌습니까?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만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허약한 신앙인들은 교회에 무슨 어려운 일이 생긴 것 같은 낌새만 있어도 지체 없이 겁을 먹고 도망칠 길이나 찾는 그런 사람들과는 얼마나 다릅니까?
바울이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을 향하여 뭐라고 말합니까? 다시 46절을 읽어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우리는 여기서 아주 중요한 한가지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배척으로 인하여 복음의 방향이 유대인에게서 이방인에게로 옮겨졌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복음의 은혜가 다른 사람에게 옮겨졌다는 것입니다.
본 구절은 유대인들이 복음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음을 의미합니다. 즉 그들이 하나님께서 주신 기득권을 스스로 포기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는 자로 자처하였기 때문에, 그 영생의 축복이 이방인에게로 이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먼저 자기 자녀로 배불리 먹게 하시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먼저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자녀들이 복음을 거절했습니다.
예수님은 마22:1-14에서 왕의 잔치를 비유해서 유대인들을 책망하고 있습니다. 한 왕이 아들의 결혼을 위하여 잔치를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미리 초청장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초청 받은 사람들이 한 사람도 안 왔습니다.
마22:6절 '그 남은 자들은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니' 저들은 잔치에 오라는 왕의 사신들을 도리어 잡아 능욕하고 죽였습니다. 임금이 노하여 군대를 보내어 그 살인한 자들을 잔멸하고 그 동네를 불사르고 종들에게 이르기를 '혼인잔치는 예비 되었으나 청한 사람들은 합당치 아니하니 사거리 길에 나가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 데리고 채우라'고 해서 왕의 잔치는 여전히 계획대로 진행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 택함 받은 하나님의 백성이 복음을 거부한다고 하나님은 하늘나라의 구원의 잔치를 포기하거나 중단하지 않으십니다. 유대인들이 복음을 거부할 때 하나님은 자기의 일꾼들을 이방으로 내보내어 추수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어떤 이유라도 중단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핍박하는 유대인들에게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는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했다'고 고백합니다.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는 복을 받습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복음이 영접되는 곳에서는 항상 변화가 일어납니다. 약한 자가 강한 자로 변합니다. 소극적인 자가 적극적인 자로 변합니다. 낙심하던 자가 소망으로 변합니다. 복음은 생명을 살리는 역사가 있습니다. /믿/
이런 귀한 축복을 유대인들은 거절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피 값의 보응으로 나라 없이 방황했으며 유대인들이 수도 없이 학살당하고 체포당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선교전략의 대원칙이 있습니다. 그는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 에게로다.' 항상 먼저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그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방선교로 눈을 돌린 것입니다.
사실 주님은 바울을 부르시면서 행9:15절에 보면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바울은 사실 하나님께서 문을 열어주시는 대로 선교를 했습니다.
▶47절 "주께서 이같이 우리를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을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 하셨느니라 하니"
바울은 이방 선교의 정당성을 구약 성경을 인용하여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임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선포하는 복음의 내용도 인간의 어떤 지혜에서 온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토록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나왔음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함으로 유대인들의 비방하는 그 비방이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있음을 그들에게 분명히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구약 이사야 42:6절과 49:6절을 인용한 말씀인데 '이같이 우리를 명했다'는 말은 우리를 '이방의 빛'을 삼기 위해서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이방의 빛'이란 '이방 사람들도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그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은 모든 열방에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을 전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이 일을 위하여 사도 바울 자신도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사도 바울처럼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도록 복음을 전하는 역할을 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것입니다. 나 혼자 은혜 받고 복 받을 뿐 아니라, 다음 세대를 위해서 복음을 증거하는 부름 받은 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분명한 이해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갈2:8절 '베드로에게 역사하사 그를 할례자의 사도로 삼으신 이가 또한 내게 역사하사 나를 이방인에게 사도로 삼으셨느니라'
사도 바울의 마음 속에는 늘 하나님의 복음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었고, 빚진 심령으로 복음을 부끄러워 아니하고 복음 전파에 전심 전력하였습니다(롬1:14). 바울의 이러한 수고와 노력은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명의 복음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만약에 먼저 믿은 우리가 복음의 은혜의 그늘 속에서 축복만 누리며, 이스라엘처럼 영적 자만에 머물러 있으면 그 축복 권이 다른 곳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가 됩니다. '천국은 침노를 당한다'고 하였으니, 우리는 '이방의 빛'을 삼으신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뒤지지 않고 힘써 이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우리의 영광이나, 우리 자녀들의 축복만을 위함이 아니며, 우리의 원수들의 불행을 위한 것도 아닙니다. 이 복이 다른 사람에게까지 미치도록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통하여 인간 역사의 새 장을 시작하고 구속의 도구로 사용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통하여 우리 가족과 이웃 그리고 모든 백성과 민족들에게 은혜의 축복이 미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족속을 주님께로 인도해야 할 막중한 사명(선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정, 우리 교회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복음이 증거 되기를 원하십니다. 즉 우리를 구원하여 '이방의 빛'을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증거하기 위함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는 말씀을 믿음으로 고백하시며 복음 증거하는 데 힘쓰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준비된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는 구약의 말씀을 인용하여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성경대로 되는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들 즉 '바울과 바나바'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땅 끝까지 이르러 이방인을 구원하게 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사실 당시 바울은 동족들에게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다.'고 굉장한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우리를 명하시되'라고 한 것은 바울이 이방 선교의 정당성을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주장하면서 자신들의 사역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임을 선포하여 그 사역이 신적 행위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자신이 선포하는 내용도 인간의 지혜나 마귀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유대인들이 그토록 섬기던 바로 그 하나님으로부터 나왔으므로 자신을 비방하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자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48절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얼마나 멋있는 말씀입니까? 유대인들이 거절한 그 복음을 이방인들이 얼마나 기꺼이 받아들였습니까?
⑴'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믿음은 들어야 생깁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10: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했는데 여기 '듣고'라는 단어가 중요합니다. 이방인들이 바울의 설교를 듣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기뻐했다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역사가 일어납니다. 살전2:13절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할/
본문은 바울이 47절에서 이사야서를 이용하여 '유대인들이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하니 나는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러 가겠다. 왜냐하면 이사야 선지가가 말한 대로 이방의 빛이 되겠다고 하신 그대로 내가 가서 이방의 빛이 되고자 가노라'하니까 그곳에 같이 있었던 이방인들이 바울의 말을 듣고 환호를 울리며 '아! 하나님이 그런 하나님이시구나! 우리 같은 부족한 이방인에게도 복음을 주시기로 벌써 구약에 다 작정해 주셨구나!' 깨닫고는 이방인들이 기뻐하고 감격하여 바울이 권하는 복음을 잘 받아들였다는 것이 48절의 내용입니다.
⑵'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바울을 찬송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찬송했습니다. 마20:16절에서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되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이방인들의 신앙이 너무도 예쁘게 자라고 있습니다.
⑶'영생을 주시기로 작정한 자는 다 믿더라!' 여기서 작정되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예정과 택하심을 말합니다.
여러분! 예수님을 자기가 믿고 싶다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 자체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롬8:30절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자들을 부르신 것입니다.
전도는 바로 이 작업입니다.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자들을 찾아내는 것, 장로교 교리 중에 '예지 예정론'에 대하여, 다른 교파에서는 전도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그러나 고전1:21절에 보면 '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고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여기 48절에서 말하는 영생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은 영생을 영원한 생명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런데 요17:3절에서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아는 것'이란 어떤 지식 적인 앎이 아니라 깊은 영적인 체험을 의미합니다. /믿/
▶49절 "주의 말씀이 그 지방에 두루 퍼지니라"
말씀을 받은 자가 또 다른 사람에게 그 사람은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하니 지방에 두루 퍼진 것입니다. '주의 말씀이, 두루 퍼지니라'는 말은 미 완료형으로 '계속하여 퍼지고 있었다'를 의미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복음은 큰 힘을 얻어 계속적으로 뻗어나가고 있음을 보여 줍니다. 아마 여기에는 유대인들 뿐 아니라 상당한 이방인들이 포함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한편 유대인들은 이들의 복음 전도가 세력을 얻게되자 시기하게 되었고, 당시에 헬라에 사회적으로 영향력이 있고 지위가 높은 귀부인들이 회당에 나오고 있었는데 그들을 통하여 바울 사도의 일행에게 핍박을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지만 말씀을 듣고 복음의 능력을 경험한 그 기쁨을 어느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퍼지니라'는 미 완료형으로서 '계속 퍼지고 있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50절 "이에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여 그 지경에서 쫓아내니"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고 영광의 복음의 능력이 나타날 때 또한 사탄의 역사도 나타납니다. 비시디아 안디옥 지방의 유대교인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복음을 막고 있습니다.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동원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케 하고 그 지방에서 쫓아냅니다.
'귀부인'들이란 사회적 지위가 높거나 영향력 있는 사람들인데 아마도 남편들이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부인들을 통해 고위직에 있는 남편들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유대인들은 귀부인들을 충동해서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고 그 지경에서 쫓아내 버렸습니다.
▶51절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발에 티끌을 떨어버린'것은 바울이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지만 유대인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경멸하고 절교함'을 표시한 것입니다.
원래는 유대인들이 외국에 갔다 돌아올 때 국경선을 넘는 순간에 발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 버린다고 합니다. 이방 땅에서 묻은 먼지는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묻혀오면 안 된다 하여 털어 버리고 들어온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의 선교를 마치고 '이고니온 지방'으로 갑니다. 이고니온 지방은 안디옥에서 동쪽으로 약120Km정도의 거리인데 이곳도 로마 영향권 안에 있는 땅입니다. 마10:14절을 보면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전도하러 보내면서 누구든지 영접하지 않고 믿지 않을 때는 그 집이나 성에서 발의 먼저를 떨어버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심판 날에 증거가 되기 위해서이고, 또 그곳에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라는 뜻입니다.
▶52절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
그 땅에 환란과 핍박 중에서도 믿음으로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증거는 바로 '기쁨과 성령 충만'입니다. 성령의 충만하면 기쁨이 충만해집니다. 기도하는 것이 기쁘고, 찬송하는 것이 기쁘고, 말씀 듣는 것이 기쁘고, 전도하는 것이 기쁘고, 봉사하는 것이 기쁩니다. /할/ 우리 모두 기쁨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예수 믿는 것이 기쁘고 신앙 생활이 기쁜 성림의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소원합니다. /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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