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강) 오직 복음만 전하는 바울! (행 14:1-12)
지금은 고인이 된 고 정주영 현대그룹의 창업자는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그의 자서전을 남겼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는 1915년 11월 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 가난한 농가에 6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1930년 송전보통학교 졸업이 그의 최종학력입니다. 1934년 서울 왕십리에서 이경성씨가 경영하는 '복흥상회' 쌀 소매업 배달원으로 취업한 것이 기업인의 시작이었습니다. 1946년 4월에 서울 중구 초동 106번지 적산대지를 불하받아 '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간판을 단것이 현대그룹의 전신이었습니다. 그는 반세기만에 국내 대재벌이 되었으며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그가 쌓은 업적은 헤아릴 수 없습니다. 역대 대통령뿐 아니라 외국 국가 원수들에게도 수많은 훈장과 표창을 받았습니다. 국내외 유명한 대학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수없이 받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막힌 휴전선도 뚫고 북으로 길을 내어 금강산도 구경도할 수 있게 했습니다.
'현대'라고 붙여 놓은 간판 아래 수많은 기업인과 근로자들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국내뿐 아니라 해외 시장을 개척하여 국위를 신장시키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부모에게서 배운 '근면 정신'과 '하면 된다'라는 확실한 신념 하나로 현대왕국을 이루었고, 무지하고 가난한 서민들에게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강한 자신감과 용기를 심어주어 사회와 국가에 크게 공헌했습니다.
믿음이 없는 정주영씨는 오직 '근면정신' 하나가지고 현대 왕국을 이루었다면 우리들은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 안에 있는 자들입니다. 무엇이 두렵습니까? 새로운 비전을 가지고 우리 모두 일어납시다. /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바울과 바나바는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선교지를 '이고니온' 쪽으로 옮기게 됩니다. 사실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의 놀라운 역사들이 많이 일어남과 동시에 유대인들이 핍박이 심함으로 그곳에서는 도저히 복음을 전할 수 없게 되자, 이고니온으로 옮겨간 것입니다.
복음에는 반드시 반대자가 있기 마련입니다. 마귀는 언제나 알곡 사이에 가라지를 뿌려 놓는 놈입니다. 복음이 가만히 있으면 마귀도 가만히 있지만 복음이 극성을 부리면 마귀도 극성을 부리게 됩니다.
13:50절을 보면 유대인들이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내 유력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여 쫓아냈습니다. 그리하여 13장에서 비시디아 안디옥 선교를 마감하고 오늘 본문의 14장에서 '이고니온과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복음을 전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의 생애에서 가장 어려웠던 곳이 바로 이 지역의 선교였습니다. 뒤에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만 돌에 맞아 돌무더기에 묻혀 죽은 줄로 알고 내버려두었으나 하나님께서 살려주셨습니다.
사실 사도바울이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전도할 환경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환난 중에도, 고난 중에도 복음을 증거 했는데 많은 열매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목은 ◀오직 복음만 전하는 바울!▶입니다.
먼저 1-7절은 이고니온 전도가 나오고, 8-18절은 루스드라의 전도가 나옵니다. 오늘은 12절까지만 보겠습니다.
▶1절 "이에 이고니온에서 두 사도가 함께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말하니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이에 이고니온에서'라고 했는데 13:51절을 보면 '두 사람이 저희를 향하여 발에 티끌을 떨어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가거늘'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들이 귀부인들을 내세워 선동하므로 그곳에서 쫓겨나면서 발에 먼지를 떨었다고 했습니다. 이 행위는 바로 주님이 제자들에게 가르쳐 행하게 하신 행동이었습니다.
마10:14절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도 아니하고 너희 말을 듣지도 아니하거든 그 집이나 성에서 나가 너희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라" 발에 먼지를 떨어버리는 것은 핍박 자들의 멸망에 대하여 책임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 일행이 그곳을 떠나 이고니온으로 갈 때,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복음을 영접한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했습니다.
참으로 구원을 확신한 사람들은 핍박 중에서도 기뻐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고니온은 루스드라에서 가까운 곳으로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동남쪽 140Km지점에 있는 성으로써 로마의 통치아래 있는 번창한 도시였습니다.
이 성에는 유대인 헬라인, 로마인 등이 골고루 섞여 살고 있었습니다. 두 사도가 먼저 찾아 간 곳은 유대인들의 회당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사는 곳에는 어디나 회당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곳에서도 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유대와 헬라의 허다한 무리가 믿더라!' 이것은 한마디로 바울과 바나바가 합력하여 복음을 전한 결과 이루어진 아름다운 결과였습니다. '두 사도가 함께' 일했다고 본문은 밝히고 있습니다. 한 사람보다 두 사람이 연합하면 더 큰 일을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천을 쫓고 두 사람이 만을 쫓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전4:9절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저희가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여기 '함께'란 말은 '같은 방법'을 의미하는 말로 바울과 바나바가 의견의 일치가 이루어지고 잘 협력하는 관계를 말합니다. 바울의 선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랬더니 '유대인들과 헬라인의 허다한 무리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입니다.
여기서도 비시디아 안디옥에서처럼 유대인과 헬라인 구별 없이 기독교로 개종하는 현상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런데 이곳에서도 유대인들의 선동이 일어났습니다.
▶2절 "그러나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형제들에게 악감을 품게 하거늘"
외국 땅에서 동족을 만나면 그야말로 반가운 일입니다. 타향에서 고향의 까마귀만 봐도 반갑다고 합니다. 또 복된 생명의 소식을 전해주니 더욱 좋아해야 되겠는데 이 유대인들은 악감을 품고는 사람들의 마음을 선동합니다.
사실 복음이 들어가는 곳마다 소란이 일어났습니다. 사실 복음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구원받은 자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기쁜 감격의 소식이지만 그것을 반대하는 자들에게는 참으로 걸림돌입니다. 박해의 대상이 됩니다.
일찍이 예수님은 '하늘나라는 가루 서 말속에 넣는 누룩'과 같다고 했습니다. 누룩이 반죽 속에 들어가면 반죽이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소란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반죽이 참으로 사람에게 맛을 주기 위해서는 누룩이 들어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면 세상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세상이 소란이 일어납니다. 변화가 일어납니다. 이고니온 땅에서도 복음이 들어가니까 유대인들이 소란이 또 일어난 것입니다.
핍박자 유대인들은 사도들이 전하는 복음에 대하여 악선전을 하고 악감을 같습니다. 한번 악감을 품게 되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줘도 잘 받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엡2:2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바울과 바나바는 악감을 품고 선동하는 유대인들에게 더욱 담대하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합니다.
▶3절 "두 사도가 오래 있어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하게 하여 주사 자기 은혜의 말씀을 증거하시니"
본문에서 두 사도는 바울과 바나바를 말합니다. 두 사도는 박해와 죽음을 두려워 아니하고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했는데 누구 힘으로 전했습니까?
'주를 힘입어 담대히 말하니' 오직 주님만을 의지하고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오직 주님만 의지하면 믿음의 능력이 나타납니다. /믿/
3절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가 일어나는데 오직 ⑴주님만 의지하고 담대히 선포했고, ⑵오직 은혜의 말씀만을 증거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담대히 선포하고 오직 은혜의 말씀만 증거 했더니 '표적과 기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병든 자가 치료받고, 문제 있는 자가 해결 받는 하나님의 살아 계신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께서 저희 손으로 표적과 기사'를 행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친히 역사 하신 것입니다. /믿/ 여러분, 지금도 하나님의 표적과 기사는 일어납니다. 어느 때? 오직 주님만 의지하고 담대한 믿음을 가지고 선포하면 역사는 일어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십니다.' /아멘!/
여기 '자기 은혜의 말씀'이란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원의 복음'을 말합니다. 구원의 복음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대속의 십자가의 진리를 의미합니다. 바로 이것이 복음의 핵심입니다.
롬1:16절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여기서 잠깐 '전도가 무엇인가?'를 알아보겠습니다.
⑴전도는 '논과 밭에 씨를 뿌리는 것'과 같습니다. 농사의 제일 첫 번째 단계는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예전에는 논에 벼를 심을 때 전부 손으로 했지만 지금은 거의 기계로 합니다. 손으로 심던, 기계로 심던 씨를 뿌려야 추수를 거둘 수 있습니다. 그래서 시126:5-6절에서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자는 기쁨으로 거두리로다 울며 씨를 뿌리러 나가는 자는 정녕 기쁨으로 그 단을 가지고 돌아오리로다"라고 교훈을 주십니다. 찬송가 260장 3절에도 '씨를 뿌릴 때에 나지 아니할까 슬퍼하며 심히 애탈지라도 나중 예수께서 칭찬하시리니 기쁨으로 단을 거두리로다'. /할/
전도는 인간을 구원하는 신령한 추수입니다. 많이 거두기 위해서는 많은 씨를 뿌려야 많이 거두게 됩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복음의 씨를 뿌립시다. 쉬지 말고 뿌립시다. 계속해서 뿌립시다. 낙심말고 뿌립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감동주실 때 영적으로 좋은 수확을 얻을 수 있습니다. /믿/
⑵전도는 '자녀를 낳는 것'과 같습니다. 왜? 영적인 자녀를 생산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사도는 복음을 위하여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전도해서 열매 맺은 많은 일꾼들을 믿음의 아들로서 양육하여 하나님의 일에 동참토록 했습니다. 바울이 양성한 디모데가 그렇고 디도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바울사도의 '믿음의 아들'들이었습니다.
전도한 사람은 새 신자를 한번 데리고 와서 등록시키는 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등록시키는 그 시간은 출생의 시간입니다. 아기를 낳았으면 젖을 먹이고 밥을 먹여 키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그에게도 말씀의 젖과 밥을 먹이며 신앙적으로 양육해야 합니다. 아기를 낳아놓고 먹여 키우지 않으면 기아(飢兒)가 됩니다. 돌보지 않으면 고아(孤兒)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자녀로 양육하는 일을 바르게 감당해야 하겠습니다. 전도를 했으면 그 사람이 세례를 받을 수 있을 때까지, 믿음 생활을 혼자서도 잘 할 수 있을 때까지 도와주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그렇게 양육 하다보면 나의 믿음도 자란다는 것입니다. 올해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우리 모두 올해가 가기 전에 믿음의 자녀를 반드시 1명 이상씩 낳을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할/
⑶전도는 '이익을 남기는 장사'와 같습니다. 예수님이 마25장 '달란트 비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열심히 복음의 씨를 뿌리면 반드시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 손해 볼까 겁이 나서 장사를 하지 않으면 한 달란트 받았던 자와 같은 결과를 얻습니다. 그는 장사를 하여 손해를 볼까 겁이 나서 땅에 묻어두었다고 변명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겁이 난 것보다 게으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게으른 자에게는 복을 주시지 않습니다. 땀 흘린 만큼 하나님은 복을 주십니다.
⑷전도는 '익은 곡식을 거두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 익은 곡식입니까? 본문 3-4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사도가 복음을 전할 때 성내의 무리가 나뉘어 '두 사도를 핍박하는 유대인들을 좇는 자도 있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두 사도들을 좇던 자들이 바로 익은 곡식입니다. 같은 말씀을 듣고도 마음 문이 열리지 않아 유대인을 좇던 자들은 익은 곡식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계속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때 익은 곡식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행13:48절에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익은 곡식이 내 주위에 많이 있는데 내가 입을 열지 않아서 찾지 못한다면 나는 게으른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복음을 전하십시오!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익은 곡식을 많이 붙여주실 것입니다. /아멘!/
⑸전도자는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행13:52절에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고 했습니다. 전도자의 기본입니다. /아멘!/
▶4절 "그 성내 무리가 나뉘어 유대인을 좇는 자도 있고 두 사도를 좇는 자도 있는지라"
복음에는 옥토가 있고, 돌 짝 밭이 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지역이 있고, 니느웨와 같은 땅도 있습니다. 태양이 비취는 곳에는 언제나 밝은 곳과 어두운 그늘진 면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십자가의 바른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언제나 밝은 곳과 어두운 그늘진 면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십자가의 바른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는 언제나 신앙과 불 신앙, 영생과 영 벌, 영과 육, 천국과 지옥,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마련입니다.
집안에서도 갈라집니다. 마10:34-36절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고 하셨습니다. 전도 행위는 갈라놓는 행위입니다. 결코 다 믿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사망의 길에서 떠나 주께로 나오지만, 불택자들은 핍박하고 악감을 품습니다.
두 선교사는 고요하던 이고니온 성을 둘로 갈라놓았습니다. 유대인을 좇는 자는 율법주의 즉 이행득구를 좇는 자와 두 사도를 좇는 자는 이신득구(믿으면 의에 이르는) 길을 택한 자입니다.
줄을 잘 서야 합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이 줄을 잘 서야 출세하듯이 본문의 유대인들을 따르는 자는 지옥행이요, 두 사도를 따르는 자는 천국행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느 줄에 서야 합니까?
▶5절 "이방인과 유대인과 그 관원들이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고 달려드니"
여기서 두 사도를 핍박하는 무리들이 이방인, 유대인, 그리고 관원들입니다. 그러니까 바울과 바나바에 대한 박해가 단순히 회당지도자들의 시기와 질투로 인한 박해만으로 끝나지 않고 정치 지도자들까지 가담하여 조직적으로 강력하게 공격하고 있습니다.
여기 '능욕'은 무례하고 모욕적인 언사로 상대방을 경멸하는 말투이고, '돌로 치려고 달려'든 것은 능욕행위가 돌로 치는 폭력행위로 발전한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본래 돌로 사람을 쳐죽이는 처형 법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사형 집행의 한 방법입니다. 이는 처형당하는 죄인에 대한 저주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행7장에서 스데반이 이런 사형을 당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스데반을 향한 유대인들이 돌을 던질 때 그 일에 가담했던 바울이 스데반과 똑같은 폭력을 당하게 된 위기에 직면한 것은 9:16절의 예언이 그에게 성취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님이 바울에게 대하여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은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고 한 말씀입니다. 그런데 돌을 던지려는 행위가 실제로 발생한 것은 아닙니다. 이 묘사는 박해자들이 돌을 던진 만큼 험악한 분위기였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공중 번역에는 '돌을 쳐죽이려는 움직임을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6-7절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두 성 루스드라와 더베와 및 그 근방으로 가서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여기 '저희가 알고 도망하여'는 바울이 그들의 핍박의 기미를 알고 피하여 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10:23절에서 전도인들에게 '이 동네에서 너희를 핍박하거든 저 동네로 피하라'고 하셨습니다.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서 박해가 일어나자 그곳에서 피하여 루스드라와 더베 지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두 지역 모두 소아시아의 중남부 지방에 속해있는 '루가오니아'에 속한 도시로서 루스드라는 무역도시로서 디모데의 고향이고 더베는 바울의 제1차 전도여행의 마무리지역입니다.
7절 '거기서 복음을 전하니라' 이 말은 6절에서 도망했다는 진술이 반대자들을 두려워해서 숨어버린 것이 아니라 반대자들과의 충돌을 피해 활동무대를 옮겨간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전도할 때 반대자가 있다면 조용히 다른 곳으로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여기까지는 이고니온 전도입니다. 8절에서부터 루스드라 전도가 나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주를 힘입어' 유대 회당을 장악했고, '주를 힘입어' 핍박을 감수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다가 표적과 기사를 행했으며 '주를 힘입어' 이고니온에서 구원받은 백성들을 갈라놓는데 성공했으며 '주를 힘입어' 드디어 루스드라와 더베를 향하여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8절 "루스드라에 발을 쓰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어 앉았는데 나면서 앉은뱅이 되어 걸어 본 적이 없는 자라"
루스드라는 이고니온으로부터 약29Km 떨어진 동남방에 위치한 로마의 식민지요 군사적인 요충지입니다. 여기 루스드라 전도에서 잊지 못할 추억의 에피소드가 이루어진 곳입니다. 그 하나는 도착하자마자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고친 기적의 일로 바울과 바나바가 우상을 대상으로 신격화 되는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루스드라에 나면서부터 걸어보지 못한 앉은뱅이가 있었습니다. 행3장의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와 똑같습니다. 세상 말로하면 팔자와 운명에 매인 인생입니다. 여기 '앉은뱅이'란 말은 전혀 희망이 없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였으니 그가 받은 인생의 상처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본인도 본인이지만 그의 부모 또한 고통이 컸을 것입니다. 그 인생은 한마디로 저주받은 인생입니다. 그는 인생의 모든 소망을 포기하고 털썩 주저앉은 상태에서 그것을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 그 사람도 미문의 앉은뱅이처럼 손을 벌려 구걸하는 것이 그의 생의 전부였습니다. 사실 하나님은 서서 사는 존재로 처음부터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사탄은 인간의 죄와 죽음과 심판의 공포를 얽어매어 놓았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일어서지 못하도록 두 다리에 힘을 빼 버렸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인간을 가만히 앉아있게 하지 않았습니다. 복음은 인간을 앉은 상태로 얽어매고 있는 사슬들을 끊어버렸습니다. 한 인간에게 자유로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해방을 줍니다. 복음은 한 영혼을 일깨우는 능력이고 하나님을 향하여 눈을 들게 합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뛰어 일어나도록 발목에 힘을 주고 무릎에 힘을 줍니다. 우리는 바로 그 놀라운 현상을 오늘 본문에서 본 것입니다.
▶9절 "바울의 말하는 것을 듣거늘 바울이 주목하여 구원받을만한 믿음이 그에게 있는 것을 보고"
'바울이 말하는 것을 듣거든' 우리는 롬10:17절의 말씀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신앙은 듣는 자세가 엄청 귀합니다. 바로 들어야 믿음이 들어갑니다. 들을 때 깨달음이 있어야 합니다. 목청이 터지도록 큰 소리로 외쳐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제대로 듣고, 깨닫고, 순종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믿/ 그래서 주님은 '들을 귀 있는 자들을 들을지어다.' 계시록에서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라고 하셨습니다.
▶초대교회 때 말씀을 듣고 사람들이 취하는 태도가 두 가지가 있었습니다.
⑴아멘 하는 태도입니다. 행2장을 보면 베드로의 오순절 설교가 끝나자 그 설교를 듣고 있던 사람들이 취한 반응이 나옵니다. 특히 2:37절을 보면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저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양심에 찔림이 오자 회계하고 주께로 돌아오는 무리가 되었습니다.
⑵이를 가는 무리들이 있습니다. 행7:54절의 말씀을 보면 스데반의 긴 설교를 듣고 난 사람들이 취한 태도가 나옵니다.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에 찔림이 왔고,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도 마음에 찔림이 왔습니다. 그러나 전자는 '어찌할꼬' 하면서 회개했고, 후자는 '이를 갈며'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말씀을 들을 때에 '아멘!'하고 받아들이면 축복을 받지만 이를 가는 사람은 저주를 받습니다.
오늘 본문의 앉은뱅이는 말씀 듣는 태도가 귀합니다. 그래서 바울이 그를 '주목하여 보았다'고 했습니다. 바울이 주목하여 보았다는 것은 깊은 관심과 사랑의 태도입니다. 바울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 앉은뱅이를 보았더니 그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구원받을 만한'이라는 말은 '치료될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는 병을 치료받을 수 있는 믿음이 그 속에 있었음을 보았습니다. 여기서 육신만 치료한 것이 아니라 영혼의 치료까지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병 고침의 기적이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큰 조건이 믿음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고 하셨습니다.
'구원받을만한 믿음'이라고 했는데 '구원'이 무엇인가?
▶성경이 말하는 구원은 다음과 같이 열 두 가지로 정리될 수 있습니다.
⑴모든 환난을 이기고 승리하는 것이 구원입니다. 요셉이 그랬습니다. 그는 형제들에게 버림을 받아 노예가 되었지만 '신전의식' 믿음 하나가지고 극심한 고통과 환난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⑵물에 빠졌다가 건짐 받는 것도 구원입니다. 물위를 걷는 예수님을 바라 본 베드로는 자기도 물위를 걷고 싶었습니다. 그때 예수께서 '오라'명하시니 베드로는 주님을 보고 물위를 걸었습니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베드로는 문득 바다의 깊이가 느껴지면서 그만 물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물에 빠진 베드로를 건져주었습니다. 이것도 구원입니다.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던 요나선지자가 물고기의 토함을 받아 육지에 오르게 된 것도 구원입니다.
⑶한나는 아기를 낳지 못했습니다. 그는 통회 자복하며 부르짖어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서원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은 한나의 태에 문을 열어주셨습니다.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이름을 사무엘이라 했습니다. 이것도 구원입니다.
⑷원수들로부터 구출 받는 것도 구원입니다. 이스라엘은 블레셋의 침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물리쳤습니다. 애굽과 아말렉의 침입을 물리쳤습니다. 이것도 구원입니다.
⑸위험으로부터 구출되는 것도 구원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모시고 갈릴리 바다를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물을 베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그때 갑자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뒤집힐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어부 출신인 제자들이 옛날 경험을 살려 노력해보았지만 배는 금방 뒤집힐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그들은 겁에 질려 주무시고 계시는 주님을 깨웠습니다. '주여 구원하소서 우리가 죽겠나이다'고백하자, 주님이 일어나 풍랑을 향하여 '풍랑아 잔잔하라'고 하자 바다는 잔잔해졌고 제자들은 그 위험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⑹죄악 세상에 빠지지 않는 것도 구원입니다. 진실하게, 성실하게, 정직하게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구원받은 자의 삶의 모습입니다. 행2:40절에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⑺잃어버린 자를 찾은 것도 구원입니다. 양 일 백 마리 가운데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찾는 것도 구원입니다. 탕자가 아버지 품을 떠나 허랑 방탕하다가 아버지 품으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돌아온 아들을 품에 안고 금가락지를 끼어주며 아들의 위치를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이것도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삭개오가 회개하고 돌아왔을 때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함이니라'(눅19:10)고 하셨습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는 것도 구원입니다.
⑻배고픈 사람의 허기를 채우는 것도 구원입니다. 디베랴 들판에서 예수님 말씀을 들은 군중들에게 주님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그들을 배불리 먹이시고 남은 조각이 12광주리였습니다. 그 먹은 사람이 남자만 오천 명이었다고 했습니다. 배고픈 사람이 음식을 먹고 배부른 것도 구원입니다.
⑼죽은 자가 살아난 것도 구원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중에 세 명의 생명을 살렸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 나인성 과부의 아들, 무덤에 장사지냈던 나사로를 죽음'에서 일으켰습니다. 이것은 생명의 주님의 능력입니다. 죽은 자가 다시 사는 것도 구원입니다.
⑽죄로부터 용서함 받은 것도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이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빌려 세상에 오셨습니다. 천사가 주님이 오신 목적을 마1:21절에서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⑾육체적인 질병으로부터의 구원이 있습니다. 인간들은 많은 병마로 인해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난 자들은 모두 깨끗이 고침을 받았습니다. 혈루증 앓던 여인은 예수님 뒤로 와서 옷 가를 만졌더니 고침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중풍병자도 고치셨습니다. 문둥병 자도 고치셨습니다. 나면서 소경 된 자도 고치셨습니다. 혈기 마른 자도 고치셨습니다. 예수님께 오면 어떤 병도 고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병에서 놓여 건강을 얻는 것 구원입니다.
⑿천국 가는 것이 구원의 완성입니다. 예수 믿으면 천국을 얻습니다. 영생을 얻습니다. 구원의 종류가 이렇게 다양하지만 결국 구원의 완성은 천국입니다. /할/
▶10절 "큰 소리로 가로되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 하니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바울이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외쳤습니다. 왜 바울이 큰 소리로 외쳤을까요? 그것은 영육간에 치료받아야 할 인간에 대한 뜨거운 사랑의 자세를 보여준 것입니다. 아마도 가만가만히는 도저히 속이 타서 말할 수 없었을 것 같습니다. 또한 큰 소리로 말한 것은 그 앉은뱅이로 하여금 불안과 불순종을 순식간에 떨쳐버리고 결단하게 하는 좋은 방법이었습니다. 바울은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명했습니다.
그냥 일어나라고 한 것이 아니라 일어서되 똑바로 일어서라고 소리친 것입니다. 일어나라고 한 것은 명령입니다. 큰 소리의 명령은 단호한 믿음의 의지를 말합니다. 아무리 큰 믿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믿음을 실행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큰 소리로 '네 발로 바로 일어서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행3장에서 베드로가 성전 미문에 앉아 있는 앉은뱅이에게 한 말과 차이점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즉 베드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예수님처럼 자신이 직접 명령을 했습니다. 이에 대해 학자들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했지만 대부분의 사본들이 그 구절을 첨가하지 않았을 뿐이라고 했습니다.
본문의 앉은뱅이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그 사람이 뛰어 걷는지라' /할/ 행3장의 미문의 앉은뱅이가 구원받은 때와 비슷합니다. 즉 걸을 뿐만 아니라 뛰기도 했다는 표현은 치유가 곧 바울의 소리와 거의 동시에 이루어졌음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이 앉은뱅이가 차츰 걷게 된 것이 아니라 단번에 완쾌되어 뛰고 걸었음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바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신 분입니다. /믿/ 행3장의 앉은뱅이는 유대인이었고 본문의 앉은뱅이는 이방인이었습니다.
▶11-12절 "무리가 바울의 행한 일을 보고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질러 가로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 하여 바나바는 쓰스라 하고 바울은 그 중에 말하는 자이므로 허메라 하더라"
무리 중에 앉아 있던 앉은뱅이가 바울의 말 한마디에 일어서자 사람들은 바울을 보통 사람이 아닌 신으로 생각했습니다. 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온 줄 알았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의 지혜나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을 바울이 행했기 때문입니다.
신이 아니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를 말 한마디로 벌떡 일어나게 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신으로 불렀습니다.
'쓰스와 허메' 루스드라 사람들은 신당을 세우고 '쓰스와 허메'라는 두 신을 섬겼습니다. '쓰스'라는 신은 '올림푸스의 최고의 신인 제우스신'을 말합니다. 로마신화로는 주피터신입니다. 이 신은 헬라 모든 신중에 제일 높은 신입니다.
그런데 이 신은 말을 하지 않는 신이고 '허메'신은 제우스신의 대변자로 말하는 신입니다. 바나바를 쓰스로 보았고, 바울은 말을 잘 하므로 신의 사자 신의 웅변가로 보았습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은 바울과 바나바에게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한 번 한껏 높임과 대접을 받을 만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13-14절을 보면 바울과 바나바는 옷을 찢고 그 일을 막았습니다.
저들은 자신의 영광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신으로 대접받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본성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교만의 의지에서 선악과를 따먹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 바울과 바나바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자들이었습니다.
고전10:31절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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