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강) 공회의 결의! (행15:13-29)
바울사도가 목회하고 있는 안디옥교회에 최초로 기독교 안에 이단시비(구원문제에 대한)가 있었습니다. 문제는 안디옥교회가 이방인들로 인하여 크게 부흥되자 '유대로부터 내려온 어떤 사람'들이 공적으로 교회의 보냄을 받아 내려온 것도 아니라 스스로 사사로이 내려와서는 '너희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는 그 믿음으로만 구원받는 줄 아는 모양인데 그렇지 않다. 할례를 받아야 되고 구약의 율법도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고 한 것입니다.
이 소리를 들은 안디옥의 성도들은 '참 이상하다. 사도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줄 때는 그렇게 가르치지 않았는데 사도바울이 가르쳐 준 것과 완전히 다르니 어찌 된 일인가?' 성도들 간에 믿음의 혼돈이 왔습니다.
이 사실을 안 사도바울이 그들에게 기독교의 십자가와 부활 구원교리를 잘 알아듣게 가르쳐 주었지만 그 구원교리가 너무도 중요한 사건이기 때문에 안디옥 교회 단독으로 해결할 수 없음을 깨달은 바울이 바나바와 교회 몇 사람을 대표로 뽑아 모 교회인 예루살렘교회에 파송을 한 것입니다.
예루살렘교회에 도착한 바울 일행이 그곳 사도들과 장로들 앞에서 안디옥교회에서 일어난 이단 시비문제를 의논했더니 그곳에서도 율법주의 성도가 듣다가 '그렇다면 이방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하고 또 율법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 맞다'고 하자, 그 말을 들은 베드로가 일어나 행11장의 사건인 고넬료의 경우를 예로 들어 그의 의견을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의 설교 요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⑴이방인에게 복음 전파하는 것을 주저하고 있는 베드로를 하나님이 강권적으로 역사하여 복음을 전하게 하신 사건과,
⑵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을 살피시는 분이심을 말하면서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그들에게도 성령주심을 보고 알았다는 것과,
⑶하나님께서 이방인들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하셔서 유대인들과 차이가 없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세 가지를 잘 설명한 후에 베드로는 이방인들에게 우리도 못 지키는 율법의 멍에를 매게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꾸짖고 11절에서 구원에 관한 교리의 결론을 내렸는데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줄을 믿노라!' 이신득의 신앙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모두 다 구원의 방법은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되어 짐을 선포했습니다.
▶여기서 '이교도들의 신전'과 하나님의 '성전'에 대하여 알아보자!
먼저 그 당시 이방인의 신전에 대하여 이해를 해야 합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말할 것 없이 모든 인간들은 자기들의 신에게 제사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이방신전을 보면 문화인류학적으로 공통적인 것이 발견되는데, 그것은 '그 신을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장소를 선택해서 그 신의 위대성을 강조하기 위하여 어마어마한 신전을 지었다'는 점입니다.
그 신전들은 하나같이 사람들이 사는 장소와는 격리된 외딴 곳에 위협적으로 서있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신과 인간간의 차별성을 극대화하고, 그 앞에 인간이 아주 작은 존재로 나타나게 만들어서 경배하도록 한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그들의 신앙이요, 그 신전에서 그들은 제사를 드립니다. 그 제사의 목적은 신의 노여움을 달래서 자기에게 복을 주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와는 정반대 의미의 예배장소가 있는데 이스라엘의 성전이라고 하는 곳입니다. 이 성전의 특성은 이방신전과 아주 다릅니다. 이교도의 신전은 외딴 곳에 엄청나게 크게 서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성전은 '마을 한복판에 지으라'고 하나님은 명령하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중심지역에 하나님의 집을 짓게 됩니다. 광야 40년 동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전을 중심으로 해서 열 두 지파가 사방에 세 지파씩 거주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하는 강력한 상징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은 성전을 사람이 사는 집과 똑같은 모습으로 지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내가 너희들과 같이 낮아져서 거하겠다'고 하는 상징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처음 성전이 생길 때 이곳을 장막이라 불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 자신이 텐트에 살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전도 텐트로 지어졌던 것입니다.
세월이 흘러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정착하게되고 본격적인 건물을 지으면서 하나님의 성전도 그들의 집과 같이 제대로 된 건축물로 형성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낮아지심'과 '함께 계심'이라고 하는 중요한 신학적 의미가 내재되어 있습니다.
▶왜 성전이 그렇게 중요한가는 그 안에서 제사를 드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방신전에서 드린 제사와는 그 의미가 아주 다릅니다. 이교도의 제사란 복을 받기 위한 자기사랑과 희생의 표현이지만, 성전에서의 제사는 사죄를 위한 제사입니다. 즉 인간의 죄를 용서받기 위해 드린 제사란 말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때에 인간은 하나님을 마주 볼 수 없습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인간의 죄를 용서하고 깨끗하게 설 수 있는 길을 제시해 주신 것이 구약의 제사제도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의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죄 짓고 용서받는 길을 제시해 주시고, 나의 죄 대신에 짐승을 드림으로 사죄의 은총을 받도록 하셨습니다.
그래서 죄 지은 사람이 짐승을 가지고 와서 '내가 이러이러한 죄를 지었는데 하나님께서 제 대신 이 짐승의 생명을 받으시고 나를 용서해 주옵소서' 이렇게 자기의 죄를 짐승에게 전가하고 이 짐승을 잡아 희생 제물로 바치게 됩니다.
그럼 그 짐승의 고기가 타고 피 냄새가 번지면서 지글지글 타는 동안에, 죄인은 무릎을 꿇고 '내 대신 저 짐승의 제물을 받아 주시옵소서' 간절하게 기도합니다. 그리고 제물이 다 탄 다음에 제사장이 '하나님께서 네 제물을 받으셨다. 평안히 가라'고 선언하면 감사한 마음으로 성전을 떠났습니다. 그러니까 성전은 제물을 통하여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 즉 내 '의'가 회복되는 곳이 성전입니다.
▶이제 교회가 등장합니다. 한마디로 교회는 구약 성전의 완성입니다. 어떻게 '짐승이 인간의 죄를 사해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이스라엘의 가장 큰 신학적 주제가 됩니다.
그러나 성경 적으로 보면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을 믿고 그렇게 하면 용서해 주겠다'고 하셨기에 그렇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복잡한 제사제도는 하나의 그림자입니다. 진정한 의미의 제사는 예배를 통하여 드려집니다. '진정한 의미의 거룩한 제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내 죄를 고백함으로써, 영적인 의미에서 그 피를, 그리스도의 보혈을 내 영혼에 뿌림으로써 사죄의 은총을 입고, 그 은혜를 찬송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는 것이 완전한 제사'가 됩니다.
이 말을 다른 말로 예배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란 완전한 의미의 제사요, 이 제사가 드려지는 곳이 교회요, 그러므로 교회란 완전한 의미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안디옥교회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됩니다. 과거에 유대교인이었던 사람들도 예수를 믿게 됩니다. 이들을 가리켜 '유대기독교인'이라고 불렀고, 또한 이방사람들도 주의 복음을 듣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들을 가리켜 '이방기독교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다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은 한 백성이 되었기에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다같이 예수의 피로 한 형제 자매가 되어야 하는데 유대인들이 고집을 부립니다. 왜냐하면 유대인은 율법을 알고 성결을 알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하여 이미 많은 말씀을 배워왔습니다. 생활이 정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기에 이방인들은 야만인이요 잔인하고 무식하고 부도덕하게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양자간에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 갈등을 먼저 제기한 사람이 누구인가 하면 당연히 유대기독교인들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는다고는 하지만 어떻게 너희들과 우리가 같은 그리스도인이라 말 할 수 있느냐? 적어도 비슷이라도 해야지' 그런 얘깁니다. 그러한 마음이 유대기독교인들에게 꽉 차 있었습니다. 그래서 할례정도는 받아야 된다고 주장하는 자들 때문에 예루살렘 교회가 공회로 모인 것입니다.
'버나드 쇼'라는 유명한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가장 큰 죄는 상대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고 그와 나를 구별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너와 네가 어디 같을 수가 있냐?' 이 마음이 무서운 죄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교회란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시기 위하여 선택하신 장소요, 택함 받은 자녀들이 성령 안에서 말씀을 통하여 만나고 구원받는 곳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인간이 만나는 현장이 바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생활을 잘 해야 합니다. /할/아멘!/
▶오늘 본문에 보면 베드로의 연설이 끝난 후 바울과 바나바의 이방 선교에 대한 보고가 있었고, 계속해서 야고보의 연설이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야고보의 연설의 시작이요, 그 연설이 끝난 다음 공회의 결의가 있었습니다. 13-18절까지는 야고보의 설교이고, 19-29 공회의 결의입니다. ◀제목소개!▶
▶13절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가로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말을 마치매'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⑴베드로의 설교가 끝났음을 의미한다는 설과 ⑵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선교 때 일어난 표적과 기사 사건을 이야기하고 난 다음을 의미하는 견해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야고보가 대답하여' 일어났음을 볼 때, 베드로의 설교가 끝났음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야고보는 당시 예루살렘교회 감독으로 그 공회의 회의를 진행하는 의장 직분으로 베드로의 연설에 곧 이어 응답한 것은 의장으로서의 베드로의 의견을 전적으로 수용하면서 회의의 결론을 이끌어 내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본문을 보면 야고보는 사회를 보면서 베드로나 바울이나 그 누구의 말도 중간에 중단시키지 않고 끝까지 들은 후에 결론을 내린 것입니다.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여기서 형제란 주안에 있는 형제를 의미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 예수 안에 한 피 받은 형제들입니다. 야고보는 다정하게 형제들을 부른 다음 시선을 모읍니다.
'내 말을 들으라!' 말씀을 잘 듣는 것이 복입니다. 들을 귀 있는 성도들은 복 받은 자들입니다. 무엇을 듣습니까? 하나님이 이방인 중에서 행하신 표적과 기사를 듣습니다. 초대교회는 하나님께서 바울과 바나바를 통하여 소아시아 지역에 엄청난 사랑을 쏟으신 것을 들었습니다.
구브로 지역을 찾아가셔서 총독 서기오 바울을 박수 알로마에게서 구원하는 일부터 시작하여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걸어본 적이 없는 사람을 구원하기까지 '이방인들을 하나님께서 얼마나 사랑하시는가'를 들었습니다.
본문의 '내 말을 들으라'는 야고보의 첫 번째 논증은 베드로의 말한 것을 시인해 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드로 사도의 권위를 공회에서 친히 인정해 준 것입니다.
야고보의 첫 번째 논증은 ⑴하나님께서 '베드로를 처음으로 이방인에게 보내셨다'는 것과, ⑵하나님은 '이방인 중에서 택하신 자기 백성을 취하셨다'는 것과, ⑶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권고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14절에 나옵니다.
▶14절 "하나님이 처음으로 이방인 중에서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시려고 저희를 권고하신 것을 시므온이 고하였으니"
야고보는 베드로가 고넬료 집에 가서 행한 모든 것을 다시 한 번 깨우쳐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들었다시피 시몬이(베드로를 말합니다.) 처음으로 이방사람, 로마의 백부장 고넬료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그때 할례를 행한 것도 없고 율법을 지키라고 하지도 않았습니다.
순수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전했는데 고넬료와 그의 친인척들 모두가 베드로의 복음을 받고 그대로 믿었으며 또 세례를 주었는데 그 때 그들이 성령이 충만하여 방언이 터지고 크게 은혜를 받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당시 분위기를 보면 야고보 장로님이 아주 지혜롭게 결론을 지었습니다. '우리가 베드로의 말을 들었고, 바울과 바나바의 말을 들어보았다. 그들 말을 가만히 들어보니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것이 성취된 것임을 알 수 있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그러면서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구체적으로 들어서 결론을 짓습니다. 15-18까지가 아모스 9:11-12절을 인용한 말씀인데 그 말씀이 다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15절 "선지자들의 말씀이 이와 합하도다. 기록된바"
여기서 선지자는 아모스 선지자를 말하는 것이고, '이와 합하도다.'라는 말씀은 그 말씀대로 이루어졌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먼저 이방인들의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모세를 통해서도 예언하셨고(신32장) 이사야 선지자도(사65:1) 예언했습니다.
▶16절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퇴락한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여기서부터 암9:11-12절을 인용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하나님 앞에 죄를 범했습니다. ⑴하나님께 제사를 멀리하고, ⑵우상에 깊이 빠졌습니다. 그래서 솔로몬이 죽고 그 아들 때 나라가 둘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계속해서 범죄 함으로 하나님의 진노를 받아 북 이스라엘은 앗수르에게, 남 유다는 바벨론의 포로로 잡혀가서 나라가 처참하게 짓밟혀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하나님께서 다시 이스라엘백성들을 불러모으심으로 타락하여 무너진 다윗의 장막(왕국)인 이스라엘을 다시 일으키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이 예언은 다름 아닌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완전한 회복한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영적인 이스라엘의 재현을 약속하신 것입니다.
여기 '내가 돌아와서'는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은 다윗의 왕통이 무너진 것을 말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다윗의 왕통을 영적으로 다시 세우는 일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야고보의 두 번째 논증은 다윗의 무너진 왕국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다시 세울 것인데 거기에는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7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유대인이라고 해서 다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남은 자, 즉 그루터기만 구원을 받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그루터기가 있고 이방인들도 그루터기가 있습니다.
사6:13절 "그 중에 십분의 일이 오히려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바 될 것이나 밤나무,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남아 있는 그루터기는 거룩한 씨라고 하였는데 그들이 누구입니까? '거룩한 씨'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속죄함을 받고 성령으로 중생한 사람들을 가리키는데,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로 도장을 찍어 놓은 백성을 하나님이 보호하시므로 망하는 법이 없습니다.
온 세상이 홍수 심판에 죽어도 노아의 10식구는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신 것처럼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보호해 주시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루터기가 바로 그런 신앙입니다. 그루터기 신앙을 가진 자는 망한 것 같은데도 망하지 않습니다. 왜 다시 싹을 틔우고 잎을 피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때문입니다. /할/
'내 이름으로'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란 말로써 '이방인들이 또한 예수를 믿어 다윗의 무너진 장벽을 일으켜 세우는 일을 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유대인 중에는 남은 자가 참여를 하고 이방인 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을 때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 야고보는 아모스 선지자가 예언한 '그 말이 맞다.'는 것입니다.
▶18절 "즉 예로부터 이것을 알게 하시는 주의 말씀이라 함과 같으니라"
계속 예언되어온 구약의 말씀이 성취된 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이 하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교회가 된다는 것은 구약이 선지자들이 예언해 놓은 데로 되어 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는 아모스의 예언 인용을 끝맺음으로서 이방인들의 구원이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속한 것임을 분명하게 밝혔습니다. 야고보는 유대민족만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방 민족도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확증한 것입니다.
▶19절 "그러므로 내 의견에는 이방인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고"
야고보는 이제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서 믿음으로 돌아온 이방인들에게 할례와 모세율법을 강조하는 것은 그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므로 그러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자유 함을 얻은 자입니다. 주님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 안에는 율법도 할례도 다 필요 없습니다. 율법을 지켜서 천국에 가겠다는 사람은 십자가에서 다 끊어집니다.
바울은 갈5:1-4절에서 강조합니다. '만약에 할례를 하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을 받고자 한다면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지고 은혜에서 떨어지니 완전 멸망할 것'이라고 합니다.
야고보는 '이방인 중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자들을 괴롭게 말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여기 '괴롭게 한다'는 것은 '율법을 강요하거나 할례의식을 강요하는 것'들을 의미합니다.
여기까지 야고보는 할례문제와 율법문제를 결론 짖고 있습니다.
▶20절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 하라고 편지하는 것이 가하니"
야고보는 계속해서 말하기를 이방인들에게 '우상의 더러운 것과 음행과 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윤리 면에서 강조한 것입니다.
⑴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우상은 하나님께서 제일 싫어하시는 것입니다.
⑵음행을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성령이 우리 몸에 거하기 때문에 음행을 피해야 합니다.
⑶목매어 죽인 것과 피를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레17:10-11절의 말씀인데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으니 피를 먹지 말라고 하였고, 목매어 죽인 고기는 피를 빼지 않고 죽였기 때문에 피를 먹지 말라는 말씀에 위반되므로 목매어 죽인 고기는 먹지 말라고 했습니다.
과학적으로도 짐승들의 병이 대개 피에 있기 때문에 피를 다 뽑아 버리는 것이 위생적으로도 깨끗하다고 했습니다. 종교적인 의식 뿐 아니라 위생적으로도 피를 먹는 것은 좋지 않기 때문에 금한 것입니다.
▶21절 "이는 예로부터 각 성에서 모세를 전하는 자가 있어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그 글을 읽음이니라 하더라"
야고보는 이제 기독교인이 되고서도 '모세의 율법을 읽고 강론하는 유대인들에게 그것을 금하라'고 단호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 당시 각 성에서 안식일마다 모세의 오경을 유대인 기독신자들이 전하는 고로 이방기독교인들과 심한 마찰이 있을 경우 교회 발전에 덕이 되지 않기 때문에 금하라고 했습니다.
주로 모세율법에 먹는 문제가 많이 논란이 된 것 같습니다. 이 먹는 문제는 초대교회에서 계속 논란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롬14:1절 이하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는 너희가 받되 그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만 먹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사실 당시 이방인출신의 기독교신자들이 자기들의 믿음을 내세워 '자기들은 우상 제물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다'고 유대인 신자들에게 자랑해 왔습니다. 그래서 마찰이 생겼는데 바울은 롬14-15장에서, 고전10:14절 이하에서, 또 고후6:14절 이하에서 말씀을 정리했습니다.
▶이제 예루살렘 공회에서 이방인 성도들에게 부과시킨 '의식 법'을 결정한 후에 그 내용을 전달하기 위하여 몇 사람을 선정하여 바울과 바나바 일행과 동행하여 안디옥교회에 보냅니다.
▶22절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가결하니 곧 형제 중에 인도자인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더라"
'이제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을 택하여' 예루살렘교회의 구성원과 또 다른 교회의 대표자들이 그 공회에 참석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고보 총회장의 결정에 온 교회가 찬성하겠다고 가결을 한 것입니다. 이 결의된 사실을 알리기 위해 안디옥교회는 사람들을 파송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와 그의 일행은 물론 예루살렘교회에서 두 사람을 파송을 하는데 '바사바라 하는 유다와 실라'를 뽑아 보냈습니다. 이 둘은 예루살렘 교회에서 지도자적인 위치에 있었음을 암시해 줍니다.
바사바라 하는 유다는 성경에 자료가 별로 없고, 실라에 대해서는 많이 언급하고 있습니다. 실라는 히브리식 이름이고, 살전1장에서 바울은 그의 로마식 이름을 '실루아노'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실라도 바울과 같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헬라파 유대인임을 알 수 있습니다.
실라는 바울의 2차 선교여행에 동참했는데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같이 갇혔으며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다가 감옥 문이 열리고 쇠고랑이 풀어지는 찬양의 위력을 경험했습니다.
본문에서 왜 유대파 실라를 파송했습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가서 전해도 될 것인데 왜 구태여 사람들을 보내었을까요?
⑴바울과 바나바가 그 결의를 전하면 의심하는 자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고, ⑵두 사람을 보낸 것은 총회의 권위로 보낸 것입니다.
▶23절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사도와 장로된 형제들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에 있는 이방인 형제들에게 문안하노라"
'그 편에 편지를 부쳐 이르되' 유다와 실라 편에 구두로 전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야고보감독이 친히 글을 써서 목회서신을 띄운 것입니다. 구두로 전하다보면 총회 결의를 변질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공회의 권위가 약해질 수도 있습니다. 총회장이 직접 서신을 띄운 것은 공회의 권위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보면 안디옥교회만 보낸 것이 아니라 당시 이방인 지역에 세워진 모든 교회에서 보낸 것입니다. 여기 보면 '사도와 장로 된 자들도 다 같은 형제'라고 했습니다. 사도가 위대한 직분이고, 장로가 높은 직분이지만 하나님 앞에서 볼 때는 서로 사랑하는 형제라는 것입니다.
▶24절 "들은즉 우리 가운데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 하기로"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란 1절의 '어떤 사람들이 유대로부터 내려와서' 이 사람들을 가리킨 말로서 예루살렘교회에서 그런 사람들을 파송한 바가 없음을 재확인하며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단들은 꼭 이렇습니다. 시킨 바도 없는데 제 마음대로 와서 전하여 말로 괴롭게 하고 혹하게 합니다.
여기 '괴롭게 한다'는 말은 어떤 폭력적 박해가 아닙니다. 유대의 율법적 규정들을 강요하는 잘못된 가르침이라는 점에서 종교적 갈등과 혼동을 촉발시키는 거짓 진리를 뜻하고, '혹하게' 한다는 말은 '영혼을 파괴한다'는 표현으로 각 사람의 마음에 심각한 신앙의 갈등을 일으키게 하여 결국 믿음의 길에서 떠나 사망의 길로 가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25-26절 "사람을 택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인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과 함께 너희에게 보내기를 일치 가결하였노라"
무슨 말입니까? 바나바와 바울이야 말로 귀한 일꾼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생명을 잃을 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에 목숨을 건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생명을 건 자들은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너희들이 지금까지 이분들을 존중히 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왔는데 이들이야말로 주님의 충성된 종입니다. 그러니 더욱 그를 따르라는 의미입니다.
또 본문의 배경은 이단들은 공회의 권위로 파송된 자들이 아니지만 바울과 바나바 그리고 유다와 실라 이 사람들은 예루살렘교회에서 보낸 대표자임을 증명한 것이고 예루살렘교회에서 직접 보낸 특사로서의 권위로 내세워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의 사랑하는 바나바와 바울'이라는 표현은 잘못된 이단들과 싸워 진리를 사수해준 그들의 노고와 공적을 이방 그리스도인들 앞에 찬사하며 그들의 가르침에 대해 공적인 보증을 해주는 대목입니다.
여기서 바울보다 바나바는 먼저 언급한 것은 아직까지 예루살렘교회에서는 바나바를 더 친숙하게 여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예루살렘교회에서 초창기부터 헌신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일치 가결'한 마음이 되어 뜻을 모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공회 회의가 아주 잘 끝났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지금 한국의 각 교단의 총회 뒤에는 여러 가지 불화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총회고, 노회고, 당회고 모두다 하나님의 뜻이라면 무조건 굴복하고 따라야 합니다. 예루살렘의 총회처럼 '일치 가결'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아멘!/
▶27절 "그리하여 유다와 실라를 보내니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
바나바와 바울 뿐 아니라 유다와 실라도 보낸다는 말은 모 교회에서 보낸 자로써의 권위를 보증해 준 셈입니다.
'이 일'은 결의된 것으로 아마 배운 네 가지 금기 사항을 말하는 것입니다.
⑴우상에게 바친 제물을 먹지말고, ⑵음행을 멀리하고, ⑶목매어 죽은 자들과 ⑷피를 먹지 말라고 결의 사항을 말한 것입니다.
▶28절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줄 알았노니"
이 말씀은 곧 성령이 인도하는 대로 움직이는 도구로서의 교회의 역할을 강조한 것입니다. 공회의 모든 순서와 절차를 성령의 인도였으며 베드로와 야고보의 모든 결의도 성령의 인도였음을 강조한 것입니다.
또 그들이 모였을 때에 성령께서 그 자리에 함께 계신 것을 인정했습니다. 우리는 '구원의 확신과 성령의 인도의 확신, 기도 응답의 확신, 사죄의 확신, 승리의 확신' 이 다섯 가지의 확신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아멘!/
여기 '성령과 우리'는 그들을 파송한 것도 공회의 결의도 곧 성령의 인도에 따른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요긴한 것들'은 '마땅히 해야 할 의무'로서 야고보가 제정한 4가지 금기사항입니다.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않는다는 말은 4가지 금기 조항 외에 예루살렘교회가 이방 교회에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없음을 천명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단들이 말하는 '할례와 모세의 율법'은 공식적으로 무시된 것입니다.
▶29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지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다시 한 번 네 가지 금기사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앙교육은 제 교육이고, 강조교육입니다.
'스스로 삼가면 잘되리라' 강조하는 말로 '죄를 피하면 잘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자유는 죄에서 자유입니다. 그래야 '우리 심령에 평안'이 옵니다. 그러므로 요셉이 죄를 피하듯이 우리도 피해야 합니다.
이 말은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성도들이 실천해야 하는 것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결론은 '구원은 어떤 행위로 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는 은총'입니다. 율법은 '이행득구', 그러나 우리 기독사상은 '이신득의' 믿음이 제일로 귀중합니다. /믿/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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