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자료 18,185편 ◑/자료 16,731편

(제45강)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행 15:30-41)

by 【고동엽】 2022. 3. 11.

(제45강) 바울의 제2차 전도여행! (행 15:30-41)

 

예루살렘 총회는 이방인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이 적용된다고 결의를 하여 그 결의 사항을 안디옥으로 보내기로 했습니다. 유대교의 율법의식과는 아무 관계없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복음의 핵심을 전했습니다.
사도들의 편지는 세 부분으로 되어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율법주의자들의 미혹으로 고통을 겪는 성도들의 마음을 위로하는 내용이었고, 둘째 부분은 충성스러운 주님의 사역자들을 보냄으로 성도들을 진심으로 돕기 원한다는 내용이고, 마지막 부분은 예루살렘 교회의 결정을 알리는 내용입니다. 즉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는 권면입니다.
예루살렘 총회에서 결의된 편지를 보내는 과정을 보면 매우 지혜롭습니다. 이 편지는 전달자를 총회의 결의로 전하여 파송한 것입니다. 만약 바울과 바나바 편에 보내었다면 이방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은 그 결의 사항을 별로 신통치 않게 여겼을 것입니다.
그런데 총회는 결의에 의하여 유다와 실라를 동행하여 보낸 것입니다. 유다는 행1:23절에 사도의 후보로 추천된 바사바 요셉과 동일한 사람으로 추측하는 학자들도 있는데 확실치는 않습니다. 실라는 사도바울과 선교 팀을 이룬 사람입니다.
26절을 보면 예루살렘교회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뭐라고 호칭했습니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는 자'라고 표현했습니다. 보통 호칭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 호칭을 우리 모두 다 받아야 할 호칭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인정해 주었습니까? 생각해 보니 저를 너무나 큰 부끄러움이 일어남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 내가 정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걸었는가? 주님은 우리에게 충성을 요구하실 때 분명히 목숨까지도 주를 위하여 바치는 충성을 요구하셨습니다. 계2:10절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문제는 참으로 우리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본문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집니다. 30-35까지는 '예루살렘총회의 결의사항을 편지로 보낸 것'과 36-41까지는 '사도바울이 제2차 전도여행을 기록한 것'입니다. ◀재목소개!▶

 

▶30절 "저희가 작별하고 안디옥에 내려가 무리를 모은 후에 편지를 전하니"
'저희가 작별하고'란 말은 바울과 바나바, 유다와 실라에게 그들의 임무에 대하여 잘 설명하고 또 격려도 하고 기도와 축복을 하고 즉시 그들이 예루살렘을 떠난 것을 암시하는 말입니다.
이들 일행은 안디옥교회에 오자마자 성도들을 모은 후에 편지를 전달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무리는 원어적인 뜻은 일반적으로 '공적, 정치적, 종교적, 모임을 나타내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모임은 예배를 위해 모인 단순한 집회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즉 이 모임은 정치적인 성격을 띤 모교회로부터 전달된 공식문서를 다시 안디옥교회에서 받아들이고 그것을 온 회중에게 선포하기 위해 모인 무리입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예루살렘 공회의 결정에 대단히 만족해하고 기뻐했습니다.
자신들이 올려보낸 문제를 깊이 검토한 후, 사도들이 내린 결정을 읽고 좋은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기뻐하고 있습니다.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한사람도 아닌 공동체가 제3의 기관에 순복했다는 사실은 성령의 역사임을 깨달아야 됩니다.
내가 내리지 않은 다른 사람들의 결정에 순복하는 데는 큰 믿음이 요구됩니다. 이 사건의 결정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 인격과 믿음이 요구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한 사람이 아닌 온 교회가 사도의 권위를 인정하고 상회가 결정한 바를 기쁜 마음으로 수납하여 화평해질 수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31절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읽고 그 위로한 말을 기뻐하더라' 여기 '위로'라는 말은 영어로 'encourage'인데 이는 '용기를 준다'는 의미도 됩니다. 왜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이방 성도들이 유대인의 의식 법에서 자유 함을 주었고 할례를 받았다고 한 자들은 꼼짝 못하게 했으며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믿는데 큰 장애물을 없애주었기 때문에 교회 안에 평화가 온 것입니다.
그래서 이 편지를 학자들은 '자유의 헌장'이라고 불렀습니다. 적어도 이 편지를 받고 안디옥교회는 '세 가지 현상'이 일어났습니다.
①기쁨이 넘쳤습니다. 먼 곳에서 온 사랑하는 사람들의 사랑과 정성이 담긴 편지를 받고 읽는다는 것은 사실 삶의 큰 기쁨이 될 것입니다.
특별히 영혼구원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편지를 쓰는 자도 즐겁지만 받아 읽는 자에게는 생명이 되기에 기쁨이 넘칩니다. 솔로몬은 잠25:25절에서 '먼 땅에서 오는 좋은 기별은 목마른 사람에게 냉수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이 잠언에 얽힌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한 젊은이가 한국전에 참전해서 군대 생활을 하는데 사랑하는 아내에게서는 아무리 기다려도 편지가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신앙이 좋은 옆의 친구와 의논을 했더니 잠25:25절을 꼭 읽어보라는 말에 편지를 쓰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병사는 편지 끝에 꼭 잠25:25절을 읽어보라고 아내에게 특별히 부탁을 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효과가 만점이었습니다. 영락없이 아내에게서 두둑한 편지가 그것도 속달 등기로 날아왔습니다.

너무 기뻐서 편지를 뜯어본 이 병사는 그만 어안이 벙벙해지고 말았습니다. 그 내용은 그렇게도 기다리던 아내의 사랑의 편지가 아니라 이혼 소송 장이었기 때문입니다. 알고 보니 잠25:25절을 읽어보라고 한다는 것이 급한 마음에 잠25:24절로 쓰고 말았습니다. 그 앞 절 24절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습니다.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편지도 잘 써야 합니다.
②마음에 평안이 왔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율법의 멍에를 짊어지라는 유대 율법주의자들의 가르침을 받고 다소 흔들리고 혼잡스러운 마음이었는데 그 문제가 해결되니 마음이 평안해진 것입니다.
③교회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모든 잡음이 사라지니까 교인들이 한마음 한 뜻이 되어 교회를 섬겼습니다.

 

▶32절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여러 말로 형제를 권면하여 굳게 하고"
유다와 실라가 안디옥교회에서 얼마동안 있었는데 그냥 놀고 먹은 것이 아니라 안디옥교회 성도들을 신앙으로 잘 양육을 했습니다. 그들은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가르친 줄 믿습니다.
'유다와 실라도 선지자라' 이 사람들도 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잘 권면하고 믿음으로 굳게 서게 했습니다.

 

▶33절 "얼마 있다가 평안히 가라는 전송을 형제들에게 받고 자기를 보내던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되"
유다와 실라가 안디옥교회에 목회자로 파송 받은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은 임무를 다 마치고 본 교회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안디옥교회의 성도들이 따뜻하게 전송해주었습니다.
안디옥교회 성도들이 그들을 따뜻하게 전송한 것은 그들의 가르침에 바르게 섰다는 증거입니다. 그러니까 복음으로 잘 소화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돌아가는 그들에게도 큰 기쁨과 힘이 되었습니다.

 

▶34절 (없 음)
'없음'이라고 했는데 성경 및 주해를 보면 '실라는 거기에 머무르기로 작정'했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유다는 떠나고 실라는 남기로 작정하였다'고 기록합니다.
성경은 몇 개의 사본이 있는데 '시내 사본, 변화산 사본, 알렉산드리아 사본'같은 권위 있는 사본에는 34절이 없음으로 되어있고 다만 보정된 베자 사본에는 몇몇 역본에만 첨가되어 있다고 기록합니다.
실라가 안디옥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첨가시킨 것은 40절에서 바울이 제2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실라와 함께 동행했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 같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적극적으로 바울이 실라를 권면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35절 "바울과 바나바는 안디옥에서 유하여 다수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니라"
바울과 바나바는 계속해서 안디옥교회에 머물면서 복음을 증거 했습니다. 여기서 안디옥교회는 이단 시비가 완전히 끝났고, 다시 정상적으로 교회가 화목을 이룬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곳에 있는 여러 교사들과 함께 연합을 이루어 교회를 부흥시켰습니다.
여기 '다른 여러 사람들'이란 13:1절에서 언급한 '여러 교사'들을 가리킵니다.

 

▶이제 36절에서 사도 바울의 제2차 선교여행이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은 선교여행을 할 때 혼자서 가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협조할 동행인을 구했고 이번에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본문에 보면 이번에는 마가와 동행할 것이냐에 대하여 바나바와 의견충돌이 일어났습니다. 어째든 제2차 선교여행을 시작하면서 두 선교사 사이에는 심한 갈등이 폭발하여 서로 심히 다투는 일이 벌어지고 팀이 나누어지게 되었습니다.
바울을 실라를 택했고,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그의 고향인 구브로로 갔습니다. 여기서부터 바나바는 사도행전의 뒤편으로 사라지게 되었고 바울이 선교의 기둥이 되어 부상하게 됩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바울과 바나바가 하나의 팀을 이루어서 함께 사역하다가 돌연히 어느 날 그것이 깨어지는 사건이 기록되고 있는 것이 본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기록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성경의 솔직성을 보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 같이 존경스러운 하나님의 사람들이 다투고 갈라서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성경이 인간의 약점을 덮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이러한 성경의 기록을 통해서 인간의 한계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울과 바나바도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믿음의 형제들이 서로 다투고 갈라 설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배울 수 있으며, 나아가서 우리의 관심이 '일 중심이냐? 아니면 사람 중심이냐?'를 깨닫게 되는 배경이 됩니다.
우리 가운데도 일 중심의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을 중요시하는 사람 중심의 사람이 있습니다. 일 중심의 사람은 모든 일을 처리할 때 결과를 중요시합니다. 그러나 사람 중심의 사람은 과정을 매우 중요시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의 역할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일 중심의 사람은 진실과 사실을 중요시하고, 사람 중심의 사람은 사람과 관계에 관심이 많습니다. 그리고 일 중심의 사람은 원리와 원칙에 입각하여 판단한다면, 사람 중심의 사람은 상황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고, 그래서 정상(情狀)을 참작해 가며 설명을 합니다. 그러나 일 중심의 사람은 간단 명료하게 칼로 두부 자르듯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고 항상 '옳다, 그러다'를 선호합니다. 하지만 사람 중심의 사람은 '옳았느냐, 틀렸느냐'가 기준이 아니라, '좋으냐, 나쁘냐'가 기준이 됩니다.
그래서 사람 중심의 사람은 원리 원칙에 매우 약하지만, 일 중심의 사람은 원리 원칙에 매우 강합니다. 일 중심의 사람은 표정도 얼굴에 잘 나타내지 않고 감정도 잘 처리해 버립니다. 하지만 사람 중심의 사람은 감정을 숨기지 못합니다.
이렇게 일 중심의 사람과 사람 중심의 사람들이 서로의 차이 때문에 좋아하기도 하고, 단점을 서로 보완하기도 하지만 자칫 잘못하면 바울과 바나바처럼 충돌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이 두 사도 사이에 있었던 바람직하지 못한 분열에도 불구하고, 본문의 이야기는 결코 비극적인 파탄의 이야기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중요한 세 가지 교훈을 배울 수 있습니다.
①그들은 아무리 싸우고 서로 갈라섰지만, 인간관계의 완전한 단절만은 피했습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과 싸우고 나면 '당신 같은 인간과 다시는 상대하지 않겠다'며 돌아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그리고 비난하고 몹시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의 경우를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 후에 바울은 여전히 바나바를 '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바울은 바나바를 여전히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자기와 함께 일해야 할 자신의 동역자로 생각했습니다. 우리도 이 점을 배워야 합니다.
②그들은 다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공동의 목표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즉 사명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공동의 목표가 무엇인가? 복음을 전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같으면 '치워라, 복음이고 뭐가 다 필요 없다'고 하면서 각기 집으로 돌아갔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갈라섬으로써 오히려 선교지가 더욱 넓어졌고 교회는 이들의 사역을 통해서 더욱 견고해질 수 있었습니다. 적어도 바울과 바나바에게는 이런 원칙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아무리 서로의 다른 점 때문에 싸우고 다투었지만, 그래서 서로 갈라서기까지 했지만, 교회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복음과 또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에는 조금도 흠이 없어야 한다는 이 원칙은 끝까지 고수했던 것을 볼 수 있습니다.
③중요한 것은 이 두 사람이 궁극적으로 화해를 추구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화해하는 장면은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마가는 바울을 돕는 아주 귀한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딤후4장에 보면 바울이 로마 감옥에서 그 사랑하는 제자,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마지막 편지인데 그는 이 서신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호소하면서 디모데에게 마가를 데리고 오라고 간절히 부탁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자신의 태도를 바꾼 것에 대해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가 자신이 변화되고 성숙하였기 때문에 바울에게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학설과, 두 번째는 바울이 나이 들어 그의 '융통성'이 넓어졌다는 설이 있습니다.

 

▶36절 "수일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니"
'수일 후'는 유다와 실라가 떠난 이후의 날 수를 가리키는 말로 그들이 떠난 후 며칠이 지난 후를 의미합니다. '바울이 바나바 더러 말하되' 1차 여행 당시는 성령의 지시에 따라 안디옥교회에서 안수하여 파송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바울 자신이 직접 제2차 선교여행을 계획했음이 분명합니다.
바울은 바나바에게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고 했는데 여기 '각 성'은 저들이 제1차 선교 시에 갔던 구브로 섬의 바보, 앗달리아, 비시디아 안디옥, 이고니온, 루스드라, 더베 등입니다.
'형제들이 어떠한가?'함은 그들의 신앙상태가 어떠한가를 체크해 보자는 것입니다. 바르게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를 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방문하자'는 것은 그것을 살펴보자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사도바울의 마음이 전 목회자의 마음입니다. 복음으로 저희를 해산했던 어머니의 마음입니다.
마치 밭에 파송한 농부가 그 씨가 어떻게 움이 터서 자라고 있는가를 보고 싶은 마음입니다. 아가서7:12절에 '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고 한 마음입니다.
또한 그 마음은 중환자를 치료한 의사가 후에 환자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를 알고 싶어하는 마음과 같은 것입니다. 수술 후에 병이 완치되었는지 아니면 다른 후유증이 없는지 재발을 막기 위한 조언을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바울은 제1차 선교여행 중 복음을 준 여러 지역에 성도들의 신앙 성장을 보고, 듣고, 살피고, 가꾸고 싶었던 것이 제2차 선교여행의 첫 번째 목적이었습니다.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사도바울의 마음은 확실히 주님사랑, 교회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입니다. 형제를 살펴보고 어떠한가 알아보고 위로하고, 격려하고, 책망하고 권면해 주는 일이 주의 종들의 본분입니다.
당시는 신앙생활 한다는 것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환난이 심했고, 핍박이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 성도들을 찾아가 위로한다는 것은 큰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런데 위로해도 인간의 말로 하는 것은 아무 효과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위로해 줘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권면한 일이 있습니다.
고후1:5절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의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 도다' /할/ 고난이 없는 사람은 위로도 없습니다. 위로라는 말은 '가까이서 부르다. 초청하다'는 말입니다. 고난 때문에 실의에 빠져 있을 때, 고난 때문에 넘어져 있을 때, 가까이 곁으로 오셔서 다정한 목소리로 불러주시는 것이 위로입니다.
바울은 롬8:31절에서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그리고 37절에서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고 했고, 또 35절에서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면 그 어떤 것도 나를 대적할 수 없으며 나를 넘어뜨릴 수 없다고 단언합니다. 우리는 절대로 망하지 않습니다. 이 말씀 속에 위로가 되시기 바랍니다.
바울과 바나바는 제2차 선교여행의 출발 목적은 의견 없이 일치했습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한 성읍들로 가서 그들의 신앙생활을 점검해 보고 고난 받는 자에게는 위로해 주고 잘 한자에게는 칭찬해 주고 바로 서지 못한 자에게는 권면해 주고 그래서 예수 생명! 예수 능력 안에 살도록 하자'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었습니다. 그러나 동행자 때문에 의견이 대립되는 모습이 나옵니다.

 

▶37절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바나바는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자고 제안했습니다. 우리는 마가 요한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가는 로마식 이름이고, 유대식 이름은 요한입니다.
그는 바나바의 생질입니다. 그의 집은 마가 다락방으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잡수시던 집이며 또한 하나님의 약속인 보혜사 성령님을 받은 기도의 처소와 오순절 예루살렘 교회가 탄생한 장소이기도 합니다.
그는 1차 선교여행 때 바나바와 바울을 동행하여 여행의 잡무를 맡았으며 또한 선교지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밤빌리아 지방에 들어서자 홀연히 선교 지를 떠나 버리고 말았습니다.
도와주는 사람이 없으면 하나님의 복음 운동에 지장이 많습니다. 모세의 손을 붙들어 주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모세의 손이 피곤하여 내려왔습니다. 그때에 아론과 훌이 모세의 손을 받들어 주므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대승을 하게 된 것입니다.
사도바울이 위대하고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한 사도이지만 받들어 주는 사람이 있을 때에 하나님의 일이 더 잘되어 갑니다. 바울은 그 어려운 시기에 떠나 버린 마가가 영 신통치 않게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다릅니다. 바나바는 마가를 어렸을 때부터 돌봐 준 그의 삼촌입니다. 혈육의 입장에서 볼 때 마가를 이해하고도 남습니다. 그는 누구보다 마가의 또 다른 장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한 바나바는 '권위자'라는 그의 이름에서 보듯이 '위로'의 은사를 가진 사람입니다. 마가의 연약함이 이해됩니다. 그러므로 그는 선교여행을 다시 가겠다고 나서는 마가를 선뜻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오뚝이처럼 다시 일어나는 마가를 볼 때, 대견스럽기까지 합니다. 바나바는 누구에게나 결정적인 데서 힘이 되어주는 사람입니다.
바나바는 권위자란 이름답게 바울을 설득합니다. '우리 생질이 저번에 어려움을 참지 못하고 집에 갔지만 내가 잘 다독거릴 테니 이번에도 데리고 갑시다' 바울에게 권했습니다. 그러나 바울 역시 강경합니다. 38절에 보자!

 

▶38절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본문은 바로 13:13절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이 마가가 선교여행을 하는 중 어려움을 견디지 못해 집으로 돌아가 버렸습니다. 행13:13절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저희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이 요한이 바로 마가 요한입니다.
마가 요한은 잘 사는 사람입니다. 120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다락방을 가진 건물을 가졌다고 하니 잘 사는 사람입니다. 그가 호기심에서 따라갔는지 사명감으로 따라갔는지는 모르지만 바울과 바나바를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선교 여행지마다 분위기가 살벌합니다. 돌로 쳐죽이려는 사람, 악담을 퍼붓는 사람들, 도무지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그냥 뒤돌아 고향 앞으로 갔던 사람입니다.
바울은 '자기들을 떠나 한가지로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마가와 함께 자란 것도 아닙니다. 그는 어릴 때부터 매사를 철두철미하게 일을 해낸 사람입니다. 마가와는 자란 곳도 다릅니다.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도 다릅니다.
영적 싸움터인 선교 지에서 몸이나 마음이 좀 불편하다고 해서 팽개치고 돌아가 버리는 마가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냥 '집에 있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봉사나 잘하고 지내라는 것입니다. 구태여 고생스러운 선교 지에서 '자신도 힘들고 남까지도 힘 빠지게 하는 일을 왜 구태여 하려느냐?'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두 사람 모두 다 이해가 됩니다. 두 사람의 의견에 모두 타당성이 있습니다. 다만 서로가 보고 이해하는 관점이 다른 것뿐입니다. 그러나 교회로 볼 때는 심각한 위기가 왔습니다. 선교정책에 있어 일대 혼선이 온 것입니다. 더구나 두 사람이 교회에서 갖는 영향력을 생각해볼 때, 이 문제는 반드시 지혜로운 답을 얻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선교 지도자는 모름지기 바나바와 같은 덕장이어야 합니다. 훗날 마가의 눈부신 활약을 보더라도 바나바가 마가를 덕으로 이해하고 함께 데리고 간 것은 잘한 일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강한 제동 또한 옳습니다. 선교 지는 영적 전쟁터와 같습니다. 마가는 전쟁터에서 힘들다고 탈영해버린 탈영병과 같습니다. 세 사람이 싸워 나가는데, 한 사람이 탈영해버렸으니 얼마나 힘 빠진 일이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분명 점검해야할 부분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런 경우에 어떻게 해야 합니까? 누구의 의견을 따라야 하는 것입니까? 그래서 바울은 마가 요한을 데리고 가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합니다. 바울은 마가 요한이 전도여행에 별로 도움이 안 되는 줄 알았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두 사도가 심히 다투고 서로 결별했다고 39절을 기록합니다.

 

▶39절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타고 구브로로 가고"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교회의 위기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두 지도자의 다툼으로 교회가 위기가 온 것만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또 다른 섭리가 그 속에 있음을 우리는 발견해야 합니다. 신앙의 인물들을 보세요! ▶요셉에게도 위기는 있었습니다. 형들의 미움을 받아 종으로 팔려갈 때, 보디발의 아내의 모함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을 때가 최대의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다가온 위기는 국무총리로 가는 지름길이었습니다. 위대한 기회였습니다.
▶에스더에게도 위기는 있었습니다. 하만의 모함을 받아 유대민족이 몰살당할 위기였습니다. 그러나 온 민족과 함께 금식하며 기도하고 '죽으면 죽으리이다!' 왕 앞에 나아갔을 때, 위대한 기회가 왔습니다. 동족이 구원받고, 자신도 더 사랑 받는 왕비가 된 것입니다. ▶다니엘에게도 위기는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에 세 번씩 하는 기도와 하나님께 대한 전폭적인 믿음으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다윗에게도 위기는 있었습니다. 사울에게 당한 위기뿐만 아닙니다. 아들 압살롬의 배반은 참으로 치명적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신앙으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다윗은 그에게 다가온 위기를 잘 관리함으로 역사에 빛나는 신앙 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떠한 위기에 놓여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실 기회를 생각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권위를 받아들이십시오. 그리고 좋은 점들을 서로 살리십시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라는 찬송 가사처럼 저와 여러분들에게 다가온 위기는 위대한 기회가 될 것입니다.
▶수많은 'Holyday In'을 건축한 '위리스 존슨'이란 분의 이야기를 들어보셨습니까? 그는 40세가 되도록 제재소에서 일한 사람입니다. 그 당시 불황기가 닥쳤을 때, 그의 소장은 그를 즉각 해고시켰습니다. 그는 위기 속에 내동댕이쳐졌습니다.
이때 그는 살던 집을 저당 잡히고 건축업에 발을 디뎠는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후에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그때 나를 해고한 사람을 만나면 감사하고 싶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해 계획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셨습니다.' /할/

▶본문에서 마가 한 사람 때문에 위기가 왔습니다.
①심히 다투었습니다. 이 말은 심한 감정의 폭발을 의미합니다. '날카롭게 함'이란 말에서 유래된 감정의 격정을 뜻합니다.
②서로 갈라졌습니다. 결별이요, 등을 돌렸다는 말입니다. 바나바는 바울에게 있어서 신앙의 선배요, 은인입니다.
바나바는 처음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왔을 때 다른 사도들이 바울을 배타했을 때, 먼저 이해하고 다른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소개해주고 변호해 주었고, 또 안디옥교회에 목회지도 알선해 준 사람입니다.
그런데 저들은 주의 일 때문에 다툼이 있었고, 심지어 갈라지기까지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들의 목적은 나누어지지 않았습니다. 학자들은 이 사건을 바울의 입지가 강해지고 그의 권위가 인정됨으로 자기주장을 좁히지 않았다고 보았습니다. 한편 바나바는 그의 소외된 감정이 폭발했을 것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관대한 바나바는 인정에 치우쳤고, 깐깐한 바울은 선교에 치중한 의견입니다. 어째든 우리가 보기에도 모양세가 좋지 않습니다. 아마 타락한 인간의 잔재가 남아 있는 인간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바울 자신이 이러한 속성에서 벗어날 수 없었음을 한탄하면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나를 이 사망에서 건져내랴!'고 탄식했습니다.
▶후에 학자들은 바울이 취한 태도를 보고 두 가지 측면에서 평가를 했습니다.
⑴바울은 공적정신에 준엄했다는 것입니다. 선교에 방해가 되고 지장이 되는 것은 가감하게 정리하는 바울의 정신을 높이 샀습니다.
⑵인정이 메마른 냉혹한 사람이라고 꾸짖기도 했습니다. 사실 바울이 바나바에게 이렇게 막 갈 수는 없었는데 겨우 전도 수행원 문제로 이렇게 상처를 주고 헤어지는 것은 가슴이 아픈 일입니다.
▶이 결별 이후 바나바의 소식은 '마가를 데리고 자기 고향 구브로'에 간 것으로 성경에서는 끝이 납니다. 마가란 믿음의 거장이 탄생하는 순간입니다.
전설에 의하면 바나바는 말년에 이태리 밀라노 교회의 감독이 되었다는 설과, 일생을 고향인 구브로 성에서 전도하다가 순교했다는 설이 있습니다.
그러나 마가의 소식은 다릅니다. 연대 상으로 약 15년이 흐른 뒤에 바울이 노년에 로마 감옥에 갇혀 지낼 때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마가를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딤후4:9-11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골4:10절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바울이 감옥에서 보낸 편지에서도 이런 배경을 보면 마가가 다시 바울과 함께 손을 잡은 것이 분명합니다.
우리 같으면 언제는 쓸데없다고 버리더니 이제 와서 도와 달라고 그래,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리고 난리가 날 텐데 마가는 기꺼이 응답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의 용서인 줄 압니다.
마가는 바울만 감옥에서 돌본 것이 아니라 로마 감옥에서 베드로의 시중도 들어 베드로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야기를 듣고 마가복음을 기록한 위대한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베드로는 이 마가를 자기 아들이라고 벧전5:13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할/
여러분 마가는 한 번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를 딛고 새롭게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40-41절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니라"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제2차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실라는 유다와 함께 예루살렘교회에서 결의 사항을 전한 사람입니다.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바나바는 39절을 보면 매우 화난 사람처럼 훌쩍 떠나버린 것같이 표현했는데 바울은 전 안디옥교회 성도의 환송과 축복을 받으며 떠나는 모습을 봅니다.
이것은 저자 누가가 바울에게 초점을 맞춘 것입니다. 바울은 제2차 선교 지를 '수리아의 길리기아'를 택했습니다. 바나바는 해로를 택했지만 바울은 실라와 함께 육로를 택했습니다.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인 다소 지방입니다. 바울은 제2차 선교지의 첫 번째를 자기 고향으로 정한 것은 바나바와 똑 같습니다. 먼저 고향 일가친척의 영혼을 살린 것입니다. /할/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