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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자 및 목회자가 본 청교도 사상

by 【고동엽】 2021. 11. 13.

한국 개혁주의 설교 연구원
11주년 기념 세미나

주제 : 신학자 및 목회자가 본 청교도 사상

2003.9.15(월) 오후 2시~ 9시
동인교회


제 1강

개혁파 전통에서 본 청교도 주의의 역동성과 변혁성

최은수 교수
웨스트 민트터신학대학원/역사신학

1. 시작하는 말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급변하는 정세 속에서 삶을 유지하고 있다. 변화시키지 못하면 변화 당할 수 밖에 없는 상황들이 빠르게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혁명적인 변혁의 시대를 살아가면서 개혁교회 크리스챤을 포함한 모든 기독교인들이 신앙적 정체성의 위기를 느끼고 있으며, 자신들이 견지하고 있는 판단 기준이 심각하게 도전받고 있다. 대중들의 분화적 트랜드가 되어버린 포스트모더니즘, 종교적 관용으로 미화된 종교 다원주의, 더군다나 여타의 위협적인 이데올로기 보다 광범위하고 치명적인 자본주의적 세속주의의 도전이 거세게 밀려들고 있다. 이 모든 이데올로기들은 절대적 신념을 상대화 시켜 놓으면서 역사성을 견지하며 신앙과 신학의 전통을 계승해 온 기성교회들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기독교 공동체 내에서조차도 상대화의 유혹이 위험 수위를 넘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은 세대간의 격차와 갈등으로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개혁과 신학의 정체성, 특히 한국 교회의 신앙 정서에 깊게 베어 있는 청교도주의의 정통성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그 여파는 청교도주의의 긍정적 가치와 효용성 제고의 측면보다는 이것의 부정적 측면의 극대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본다.
이런 견지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 제기 된다: 변화하는 사회속에서 청교도주의는 변혁의 추진축을 형성할 수 있는가? 과연 청교도주의가 절대적 신념의 도전속에서 사멸하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가? 청교도주의가 가해지는 다양한 비난들을 효과적으로 극복하고 그 핵심적인 가치들을 통해 변혁적인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가? 이 문제들을 풀기 위해 우리는 먼저 개혁파 신학의 형성 과정을 통해 청교도 주의의 발흥을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다음으로 개혁파 신학의 틀 속에서 청교도 주의의 역동성과 변혁성의 가능성을 상실하고, 마지막으로 청교도 주의가 변화의 소용돌이에 휩쓸리고 있는 한국교회의 미래에 대안적으로 소망이 될 수 있는가를 검토할 것이다.

2. 개혁파 전통의 틀 속에서 본 청교도주의의 형성과 발전

개혁파 교회와 신학의 전통, 그리고 청교도주의가 태동하게 된 것은 16세기 종교개혁을 전후해서 일어난 일련의 사건들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중세기 기독교 왕국을 형성하여 철옹성과 같은 입지를 다져왔던 로마 천주교가 내외적인 문제들에 봉착하면서 개혁을 염원하는 기대가 고조되기 시작하였다. 그런 와중에 16세기 종교개혁이 폭발적으로 전개되면서 새로운 구도 변경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로마 천주교의 하나됨과 통일성을 형성하고 있던 보편주의가 후퇴하면서, 각 지역을 중심으로 다양성을 상징하는 민족주의가 대두되었다. 이런 현상이 종교 개혁의 진행 과정에서 다양한 교파가 태동하게 되는 주된 요인으로 간주되기도 하였다. 16세기 종교개혁은 독일을 중심으로 루터파, 스위스 도시들을 중심으로 개혁파(깔뱅), 잉글랜드를 중심으로 앵글리칸 교회(성공회), 그리고 좌파 종교개혁 운동의 핵심에 있었던 재세례파 등의 주요 분파를 양산하였다. 여기서 성격상 재세례파를 제외한다면, 나머지 세 교파가 종교개혁의 삼대 기능으로 자리매김을 하였던 것이다. 향후, 이들을 정점으로 다양한 교파가 분가하는 사건들이 전개되었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개혁파 교회와 신학의 발전을 다양한 인물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스위스에서는 쮜리히의 개혁자 울리히 쯔위글리와 하인리히 불링거, 베른의 개혁자 베르트홀트 할러와 프란쯔 콜프, 바젤에서는 볼프강 카피토, 카스파르 헤디오, 빌헬름 루위플러, 오에콜람파디우스, 쥬네브의 경우 파렐, 장 깔뱅, 데오도르 베자 등이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하였다. 특히 이들 가운데서도 쥬네브의 쟝 깔뱅이 그 중심에 있었고, 그의 가르침과 사상을 중심으로 개혁파 신학 전통이 형성되어 갔다. 깔뱅의 신학 형성을 논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인물이 바로 스트라스부르그의 개혁자 마틴 부쳐이다. 그는 깔뱅에게 뿐 아니라 잉글랜드의 청교도 신학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인물로 간주되고 있다. 스위스 개혁가들의 활동을 통하여 개혁파 교회의 신앙이 공식화되어지는 결실을 맺기도 했다. 이를테면, 1523년에 드장한 쯔윙글리의 67개 조항이나 그가 신성로마 제국의 황제인 챨스 5세에게 보냈던 신앙고백서(1530), 1528년에 작성된 베른 신조, 1536년에 바젤의 개혁자들이 주체가 되어 만들어진 제 1스위스 신앙고백 또는 제1바젤 신앙고백, 깔뱅이 1536년에 작성한 쥬네브 신앙고백, 데오도르 베자와 비레가 작성한 불란서 신앙고백(1559), 하인리히 불링거가 작성한 제2스위스의 신앙고백(1566) 등이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존 낙스를 포함한 6명의 존(six Johns)들이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를 1560년에 작성하였다. 이후 낙스의 뒤를 이어 앤드류 멜빌이 지속적인 개혁을 주도해 나갔다. 1561년 에는 네덜란드의 종교개혁가로 불리는 기도 드 브레가 주축이 되어 벨직 신앙고백서를 탄생시켰고, 또한 1618~1619년 어간에 열린 돌트 총회에서 돌트신경(1619)을 창출하였다. 독일에서는 1563년 목회자인 카스파 올레비아누스와 신학자인 자카리우스 우르시우스가 주축이 되어 하이델베르그 요리문답을 만들어 냈다. 1647년 작성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당시 잉글랜드의청교도나 스코틀랜드 언약도들의 노력과 희생에 힘입은 바 크다고 할 수있다.
서론에서 제기한 대로, 청교도주의의 형성과 발전을 개혁파 신학의 틀 속에서 이해하려고 시도한 근본적인 이유가 시기적으로, 지정학적으로, 신학적으로 상호 영향을 주고 받는 가운데 조성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청교도주의와 불가불의 관계에 있는 잉글랜드의 개혁교회나, 보는 시각에 따라 차이가 있어도 상당한 연관성을 유지하고 있던 스코틀랜드의 개혁교회가 대륙의 종교개혁 보다 후대에 위치하고, 양국의 개혁교회 지도자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대륙으로 건너가 개혁의 내용들을 섭렵했다는 측면에서 영국 제도의 종교개혁이 망명자들의 종교개혁 차원에서 이해되기 때문에, 상호 직간접적인 영향 하에서 청교도주의의 범주가 형성되었던 것이다.
엄격하게 말해서, 청교도 주의의 본고장은 잉글랜드이다. 엘리자벳 1세의 치세부터 시작하여 제임스 1세, 그의 아들인 찰스 1세의 통치시기를 거치면서 청교도주의는 종교적 영역에서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등 전 분야에서 간과할 수 없는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런 과정에서 국왕과의 마찰을 피할 수 없었고, 청교도 혁명을 통해 국가의 전 영역에 청교도적 이상을 실현시키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총교도 내부에 존재하던 장로파, 회중파, 독립파의 갈등이 고조되면서 불완전한 청교도 정권을 유지하였다. 이윽고 독립파 청교도이자 정치적 실권자였던 올리버 크롬웰의 죽음 이후, 권력 공백을 극복하지 못하고 1660년에 왕정복고를 허용하고 말았다. 1649년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찰스 1세의 아들인 찰스 2세가 그를 지지했던 청교도와 언약도들과의 신의를 저버리면서 대대적인 종교적 박해가 발생하였다. 이 시기를 포함하여 청교도 운동의 과정에서 다수의 청교도들이 구대륙과 신대륙인 북아메리카로 이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계기로 청교도주의는 잉글랜드라는 지정학적 한계에서 벗어나 보다 넓은 지평을 확보하여 나갔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한국 등도 이 대열에 합류하였다.

3. 개혁파 전통의 틀속에서 본 청교도주의의 역동성과 변혁성

16세기 종교개혁의 정황에서 개혁파 교회는 변화와 변혁의 상징과도 같았다. 이런 경향은 신학적, 교회정치적, 예전적 부분에서 그대로 표출되었고, 개혁파 전통의 외양을 형성하는 요소들이 되었다.
먼저 변화와 변혁을 가능케 한 개혁파 전통과 청교도주의는 철저한 하나님 중심의 신본주의에 입각한 것이다. 중세 로마 천주교는 과다한 인위적 제도와 형식들을 통하여 인간적인 권위와 전통을 고착화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인본주의적 신학의 전통은 그 자체만으로 왜곡된 것이었기 때문에 이 신학에 근거하여 파생한 제도적 전통들이 온전하지 못하다고 하는 사실은 당연하다. 종교개혁의 독특한 상황에 직면한 개혁파 신학의 형성자들은 인본주의적 신학의 오류와 폐해에 대하여 체감적인 지식이 있었으므로 성경적인 정론을 주장하는데 혼신의 다하였던 것이다. 특히 쥬네브의 쟝 깔뱅은 보다 더 철저한 신본주의적 입장을 고수하며 그 입지를 바르게 하는데 기여한 인물이다. 깔뱅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우리는 인간이 하나님의 임재를 모를 때는 굳건히 그리고 꿋꿋하게 서 있지만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면 죽음의 공포에 의해 전율하고 경악하며 비참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실 하나님의 영광에 압도되어 혼비백산이 된다. 결국 인간들은 하나님의 위엄과 자신들을 비교해 보기 전에는 결코 자신의 비천함을 자각하고 깊이 감동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하나님께 경배를 드리지 않고는 우리의 마음이 그를 감지할 수 없지만 그 가 모든 자비의 원인이며, 우리가 오직 그에게서만 모든 것을 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면 모든 사람이 경배와 찬양을 드려야 할 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의미하고자 하는 바는 이것이다. …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을 그에게서 바라고 구하여 일단 받은 것에 대해서는 그에게 감사하는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권능이라는 이러한 의미는 우리에게 적절한 경건의 교사가 되며 종교를 낳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깨달음으로써 생기는 하나님에 대한 사랑에 존경이 결합된 것이 경건이라고 본다.

이런 신학적 입장은 1560년 작성된 스코틀랜드 신앙고백서도 ‘한 하나님만 고백하고 인정’한다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영원성, 무한성, 전능성 등 신적 속성에 대한 진술을 통하여 하나님의 권위와 그 분의 주권을 분명히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벨직 신앙고백서는 보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이 문서는 ‘유일한 절대자’ ‘영적인 존재자’ ‘인간의 이해를 초월한 분’ ‘불가시적’ ‘불변’ ‘무한’ ‘전능’ ‘지혜는 완전’ ‘의롭고’ ‘선하신 분’ 등의 용어들을 사용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 중심적 신학의 출발은 개혁파 신학의 발전 과정에서 변하지 않는 요소로 자리를 잡으며 안정적이고 중심 잡힌 변화와 변혁을 이끌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중심적 신학을 전개하면서 개혁파 신앙고백서들은 그 하나님을 인간이 알 수 있도록 피조세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하신다고 증거한다. 특히 후자의 경우는 개혁파 신학의 진수라 할 nt ld는 오직 성경 사상을 말하고 있다. 정경화된 성경이 있다는 사실은 개혁파 교회가 일정한 원칙과 방향성을 가질 수 있다는 측면에서 상당한 의의를 가진다. 사실, 개혁파 교회와 신학의 형성자들은 중세 로마 천주교의 비성경적이며 인위적인 전통에 저항하며 오직 성경에 기초한 가르침에 목숨을 걸었다. 이 점에 대하여 청교도주의의 공식적 결정체인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한다.

자연의 빛과 또 창조의 섭리가 하나님의 선과 지혜와 권능을 나타내어 사람이 핑계할 수 없게 하나 그것들이 구원에 필요한 하나님과 그의 뜻에 관한 지식을 충분히 나타내지는 못한다. .. 진리를 더 잘 보존하시고 전파하시며 또 육체의 부패와 사단과 세상의 악에 대항하여 교회를 더 견고하게 설립하시고 위안하시기 위하여 그 동일한 진리를 전부 기록에 맡기시기를 기뻐하셨다. 이것이 성경을 가장 필요로 하는 원인이다.

동일하게, 벨직 신앙고백서도 이러한 입장을 견지하면서 유일한 신앙의 규범으로서의 성경임을 강조하고 그 충족성도 아울러 피력한다. 개혁파 교회는 성경을 떠나서 말하지 않고 오직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의지하여 성경이 주시는 지혜로 말하고 행동한다. 쥬네브 깔뱅이 개혁활동을 전개하고 있을 당시 그를 난처하게 만든 분파주의자들이 있었는데 바로 자유신령파들이다. 이들은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을 호도하여, 기록된 말씀은 등한히 하고 오히려 성령만을 왜곡시켜 지속적인 계시를 주장하였다. 기록되어진 말씀의 범주를 이탈한다면 기독교인의 삶과 신앙에 있어 일관성과 통일성이 사라지고 즉흥적이고 비규범적인 행동들이 난무하게 될 것이다. 깔뱅도 이러한 사실을 주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유신령파에 대하여 단호하게 대처하였던 것이다. 개혁파 교회의 신학이 하나님에 대하여 계시한 성경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종교개혁 당시 뿐 아니라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반대로 개혁파 전통과 청교도주의가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선포하며 성경 중심적인 신앙과 삶을 영위함으로 그 역동성과 변혁성의 근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무게를 둘 필요가 있다.
이런 흐름 속에서 개혁파 은총론은 자연스러운 귀결이다. 루터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그 성채 교회에 95개조 격문을 게시한 이후 그의 신학적 외침가운데 ‘이신칭의’와 ‘오직 믿음’이 중심축을 형성하였다. 루터도 이해하고 있었듯이, 그 근저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이 자리잡고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철저한 신본주의자 깔뱅이 이 점을 간과했을리 만무하다. 오히려 루터보다 깔뱅과 향후 개혁파 신학에 있어 하나님의 은혜의 신학은 이론적으로 실제적으로 무게를 더하게 된다. 돌트 신경은 이 점을 분명히 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 모든 일이 신자로 하여금 구세주를 믿고 사랑하도록 하기에는 충분하다… 뜻이나 행위에 있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 속에서 모든 사역을 이루시듯이 믿을 의지도 주시고 믿게 되는 행위 역시 주신다는 것이다. …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인간에게 주실 때에 그 어떤 책임이 있으신 것은 아니다. … 이 은혜를 받은 사람은 영원한 감사를 하나님께 드림이 마땅한 것이다.

인간과 피조세계를 향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시는 성육신 사건으로 정점에 이른다. 변화와 변혁을 지향하는 개혁파 교회가 세상속에서 역동적인 활동을 하게 된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 점을 간과한 중세 로마 천주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통치권 위임을 빙자한 교황의 권력 남용과 교회의 월권으로 성육신의 진정한 의미를 퇴색시켰다. 급기야 로마 교회는 교회의 머리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기만하여 그리스도의 대리자라는 교황에게 절대 권한을 부여함으로 신본주의적 정통성, 성경의 절대 권위, 교회와 성직자의 역할과 위치, 교회의 각종 제도들을 본 궤도에서 이탈시키는 잘못을 저지르게 되었다. 특히 진정한 하나님으로, 진정한 사람으로 이 땅에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역할을 극히 초월적으로 승화시킴으로 그 분의 인성적인 측면이 약화되는 결과를 야기 시켰다. 이것은 즉시 예수 그리스도의 중보사역과 교회의 중보적 역할에 위기를 초래하였던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벨직 신앙고백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다른 중보자를 구한다거나 그를 발견할 수 없다 하여 다른 중보자를 찾음으로 참 중보자되신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결코 안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을 우리에게 내주실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음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명하심을 따라서 마치 주께서 기도를 가르쳐주실 때에 그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면 다 이루어주신다고 약속하신 것과 같이 오직 한분의 중보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늘 아버지께 간구하는 것이다.

중보사역적 구조의 회복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 그의 자녀들과의 의사소통이 신속하게 이루어짐으로 삶과 신앙의 역동적인 변화를 가능케 한다. 중세 로마 교회는 각종 성자들과 그들의 유물들을 중보적 위치에 놓음으로 복잡하고 경직된 구조를 만들었던 것이다. 개혁파 전통과 청교도주의는 이런 로마 교회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상속에 있는 교회의 본질을 제시함으로 참 교회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개혁파는 보편교회인 무형교회와 유형교회의 존재를 고백한다. 16세기 종교 개혁 당시 거짓 교회의 표상이었던 로마 교회와의 극렬한 투쟁의 와중에서 개혁파들은 교회의 전투적인 이미지를 그리게 되었고, 항상 참되지 못한 교회의 존재를 경계하며, 순결한 교회라고 할지라도, 혼란과 과오에 빠질수 있기 때문에 항상 주의를 살폈던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도 단순하게 참관자가 아니라 ‘참 종교를 고백’ 하는 자들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더 나아가 벨직 신앙고백서는 교회의 성도를 매우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세주로 받아들인 후에 죄를 멀리하며, 의를 따라 살고 참 하나님과 그 이웃을 사랑하며 모든 것을 참으면서 육체의 정욕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삶을 살아갈 때에 그리스도인의 흔적을 갖게 되는 것이다. ..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생활에 있어서 성령을 힘입어 모든 죄악과 싸워나가면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죄를 사해주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과 돌아가심, 그리고 고난당하심과 순종하심에 힘입어 살아가는 것이다.

사실,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 대한 개념이 극히 수동적이고 소극적이었던 반면, 개혁파 교회는 능동적이고 역동적인 것이었다. 개혁파 교회는 참 교회를 구분하는 표지로 1) 진실된 말씀의 선포 2) 올바른 성례의 집행 3)올바른 권징을 강조한다. 특히, 교회의 헤드십을 확립코자 혈투를 벌였던 상황을 고려할 때, 개혁파는 예수 그리스도의 헤드쉽을 회복하고 그 분의 유일성을 재확인하는데 사활을 걸었던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개혁파 전통과 청교도 주의는 종말론적 공동체로서의 교회라는 긴장과 책임을 통감하며 모든 영역에서 신적 거룩함을 실현하려고 노력하였다. 천년기적 입장에서 무천년설 또는 후천년설을 주장했는데, 이는 수구적 지상교회에 대한 비판과 반성이 역동적인 교회의 모습을 꿈꾸던 인사들을 통해 표출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문서 중 하나인 대요리 문답의 후천년기적 문답 내용을 보도록 하자

문 191. 둘째 기원에서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는가?

‘나라이 임하옵시며’라는 두번째 기원에서, 우리 자신과 모든 인류가 본질상 죄와 사탄의 지배하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우리는 죄와 사탄의 왕국이 파멸되고,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유대인들이 ㅜ르심을 받고, 이방 사람들의 충만한 수가 돌아오도록 기도한다. 교회가 복음적인 사역자들과 규례들로 온전케 되고, 부패로부터 정화되고, 세상 위정자들에게 칭찬과 지지를 받도록 기도한다. 그리스도의규례가 순수하게 집행되고, 아직 죄중에 있는 자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고, 이미 회심한 자들에게 확신, 위로, 성장토록 기도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 마음을 통치하시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통치할 재림의 날을 위해 기도한다. 그리스도께서 목적하셨던 바 모든 세계에서 권능의 나라를 기쁨으로 통치하시도록 기도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문장이 1. 유대인의 부르심, 2. 이방 사람들의 충족한 수가 회심하고, 3. 죄와 사탄의 왕국이 파멸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개인의 마음도 하나님의 나라의 이상적인 환경이 되도록 그리스도의 통치를 받아야 하고, 이 땅의 교회도 참된 모습으로 온전하게 자리를 잡고 그 역할을 충분히 감당해야 하며, 그리스도의 재림과 더불어 전개될 완성된 그의 나라를 위해 이 땅의 성도와 교회들이 경간과 실천으로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소요리 문답도 대요리 분답과 동일한 기조를 유지하면서 ‘사탄 왕국의 패망’ ‘은혜의 왕국이 강성해 지는 것’ ;영광의 왕국이 도래할 것’ 등의 내용을 간략하게 표현한다. 여기서도 유대인과 이방인들의 고려가 함축적으로 담겨져 있다. 또 다른 문서인 예배 모범에서 설교 전에 드려지는 공적 기도순서를 통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도하도록 예배 인도자인 목사들에게 요청한다”’열방중에 그리스도의 복음과 그 왕국이 전파되고, 유대인들이 회심하며, 이방의 충분한 숫자가 회심하고, 적 그리스도가 몰락하고, 적 그리스도의 세력들과 이교도인 투르크 족들의 억압과 탄압에서 고통하는 교회를 구원하시기 위해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그리스도의 재림이 속히 임하도록 기도한다.’
이외의 다른 신학적 주제들은 차치하고라도, 개혁파 신학의 진정한 정체성은 개인들의 경건한 삶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루터에게 있어 율법은 인간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정죄하는데 치우친 감이 없지 않으나, 개혁파는 복음의 시각에서 율법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경향이 적지않았음을 알 수 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율법의 용도가 복음의 은혜와 상반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인들이 자유롭고 기쁘게 그것을 행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고백서가 잉글랜드 청교도주의의 영향을 통하여 창출된 문서임을 고려할 때, 개혁파 교회의 성도들이 자의적으로 율법적 가르침을 따라 행동하였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다만, 시간이 흐르면서 경직된 율법에 따라 엄격한 신앙 생활을 강조한 청교도적 경간과 종교 개혁적 자유가 충돌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개혁파 신학은 구원받은 성도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성화의 노정을 거쳐야 하며, 이 과정을 통하여 전인격적인 변화의 삶을 산다고 증거한다. 그러므로 개혁 신학은 성도의 전인적인 부분에 영향을 주어 삶의 모든 부분에서 거룩하고 아름다운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만든다. 실제로 개혁파 신학은 삶이고, 생활이 곧 신학이다. 특히 청교도들의 엄격한 삶의 규범은 이러한 사실을 구체적으로 증명한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는 이 점에 대하여 ‘모든 죄의 지배세력이 파괴되고 여러 정욕이 점점 더 약화되고 억제됨으로 모든 구원은 은총가운데 점점 되살아 강건하여져서 참된 경건을 실천’ 하게 된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음으로, 개혁파 교회는 예전적인 측면에서 변화와 변혁의 개방성을 제시한다. 개혁파 교회는 올바른 신학적 토대 위에서 예배의 갱신을 추구하였다. 그 내용을 볼 것 같으면, 첫째로, 개혁파 신학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인하여 전능자 앞에 설 수 있고 모든 허물과 죄악의 사함을 받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로마 교회의 선행과 대립되었기 때문에 성만찬 중심의 미사를 중심으로 하는 로마 교회식 예배를 수용할 수 벗었다. 당시 로마 천주교는 성례전에 신비적인 요소들을 가미하여 병고침을 비롯한 마술적인 행위들을 무비판적으로 시행하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개혁파 교회는 이런 성례전 중심의 미사가 말씀의 예전을 약화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갱신을 단행하였다. 말씀 중심의 예전을 회복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으나, 다락방 예전 즉 성만찬 예전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한 점은 향후 또 다른 갱신의 실마리를 제공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 중심의 예전은 상당기간에 걸쳐 개혁파 교회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이 되었다.
둘째로, 개혁파 교회는 로마 교회의 7가지 성례를 두가지, 즉 세례와 성만찬 으로 정리하고, 성례와 관련된 각종 미신적인 요소들을 재정비하고, 로마 교회의 성만찬 이론인 화체설을 상징설 또는 영적 임재설로 정립하였다.
셋째로, 개혁파 교회는 모든 예배가 모국어로 집례되어야 한다는데 뜻을 같이하여 자국의 언어로 예배에 참여하게 함으로 예배자들로 하여금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태도를 견지하도록 만들었다. 이것은 개혁교회가 이미 예배의 커뮤니케이션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가를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의의를 가진다.
넷째로, 개혁파 교회는 초대 교회 말기 예배와 성만찬의 구약적 이해가 급부상하면서 제사상적 기능을 하는 성직자를 가르켜 사제라고 칭함으로 야기된 중세 성직 계급의 월권과 권력 남용을 비판하면서 만인 사제론에 근거한 목회자상을 제시하였다. 개혁파 교회는 예배의 집례자를 구약의 제사장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하나님 앞에서 성도들을 섬기며 공예배를 인도하는 목회자로 생각한다. 더 이상 그들은 군림하는 자들이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섬기고 봉사하는 사역을 감당한다. 16세기 당시 이런 모습의 목회자상은 혁명적인 변화 그 자체였다. 벨직 신앙고백서의 내용처럼, 공교회의 성도들이 목회자를 존경하고 순종하는 자세를 가져야 하며, 영적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고 상호 합력하여 공동체의 건덕에 기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다.
개혁파 교회가 위와 같은 내용들을 중심으로 예전적인 변화를 선도하면서 도시별 국가별 교회의 전통을 중시하고 각 상황에 맞게 다양성을 인정하였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물론 로마 교회가 간과하였던 말씀 예전을 중심으로 예배의 전체적인 윤곽이 설정된 점에 대해서는 개혁파 교회들이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으나, 예배의 세부적인 항목이나 순서 배열에 있어서는 각기 독창적인 전통을 발전시켰다. 즉 개혁파 교회는 동일한 신학적 색채를 바탕으로 예전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동시에 추구하였던 것이다. 스위스 쮜리히의 쯔윙글리 계여의 예식이 다소 간략하였다면, 스트라스부르그 계열의 예전은 보다 정교한 예배로 자리매김을 하였다. 이 두 개혁파 예전 전통은 다락방 예전, 즉 성만찬 예전에 있어서도 동일한 양상을 보였다. 더욱이 후자의 전통은 말씀의 예전시 사죄의 기도와 성만찬 예전시 중보의 기도를 포함시켰던 반면, 후자의 전통은 이러한 요소들을 생략하였다. 스위스 쥬네브의 깔뱅의 예식은 스트라스부르그 전통과 많은 부분에서 유사한 점이 많으나, 성만찬 예전시 깔뱅은 순서배열, 구별되는 순서, ‘성만찬을 위한 말씀 증거’의 첨가 등에서 차이를 보였다. 스코틀랜드의 개혁자인 존 낫스의 예식은 또 다른 차별성을 내포하였다. 이를테면, 말씀의 예전시 성경 봉독을 신양과 구약에서 각각 한 장씩 읽은 점, 다른 개혁파 예전 전통에서는 성만찬 예전에 포함되었던 중보의 기도가 말씀의 예전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 등이다. 장로교회의 표준 예식서로 간주되는 ‘웨스트민스터 예배 모범’도 개혁파 예전의 통일성 속에서 독특한 전통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다양성의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끝으로, 개혁파 교회는 정치 제도적 측면에서 변화와 변혁의 개방성을 제시한다.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개혁파 교회는 교황 정치의 폐단을 정확하게 간파하고 있었다. 로마 천주교의 정치 제도는 교황을 그리스도의 대리자로 옹립하면서 추기경, 대주교, 주교, 사제로 이어지는 계서제적인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로마 천주교는 이 직제들에 신적인 권위까지 부여하여 교권을 남용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고, 성직자 계급과 평신도 계급을 양극화시킴으로 교회 내에서 계층간 차별과 갈등을 야기시켰다. 초대교회 당시 교회의 직제는 감독, 장로, 집사 등이 있었고, 시간이 지나면서 감독을 중심으로 나머지 직제들이 종속적인 위치로 전락하면서, 급기야는 장로직 자체가 로마 천주교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대신 감독 직제를 발전시켜 위에서 언급한 또 다른 직제들을 만들었고, 집사직도 대집사와 부집사 등으로 직급을 나누어 상하구별을 하였다. 이런 계급적인 발전에 제동을 걸면서 만인사제론에 근거한 정치제도를 지향했던 개혁파 교회는 철저하게 직제의 평등성(parity)을 강조하였다. 이것은 직제간 계급적인 구별이나 차등이 없다는 선언과도 같았다. 개혁파 교회는 기능상 직제의 역할은 인정하지만 이들 사이에 수직적인 체제에 대하여는 단호한 입장을 견지하였다.
개혁파 교회가 중세 로마 천주교와 구별하기 위해 감독이라는 용어 자체를 배제하고 그 대신 목사라는 명칭을 채택한 점을 볼 때, 비록 성경으로부터 덜 지지를 얻는 용어라고 할지라도 거짓교회와 철저하게 차별을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개혁파 교회가 변화하는 사회속에서 성경의 문자적인 측면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의미에 무게를 두어 역동적인 변혁을 이루어낼 수 있다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사실, 초대 교회 당시 감독, 장로, 집사 이모든 직제는 성직자에 해당하였다. 그런 측면에서, 개혁파 교회가 목사, 장로, 집사 등의 세가지 직제를 제정하면서 직제간 평등성의 원칙에 충실하면서 목회자와 일반 성도(장로, 집사)의 기능상 차이를 두었다는 사실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사실은 개혁파 교회들이 예전적인 통일성과 다양성을 포용한 것과 마찬가지로 교회 직제와 정치제도적 측면에서 다양성을 인정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실 유럽 대륙과 영국 제도에 산재한 개혁파 교회들은 각기 지역 특성에 맞게 효과적인 제도를 발전시켰다. 목사 선출과 관련하여, 스코틀랜드 교회와 람버트의 세센 교회 규정은 성도들이 뽑은 후보자들을 목사와 장로로 구성된 심사위원회에서 1인을 선출하고 최종 후보자에 대하여 회중들이 재투표를 실시하는 순서를 명시하였다. 반면 알라스코의 런던 외국인 교회와 풀랭의 프랑스 망명자교회는 회중의 재투표를 실시하지 않았다. 또한 심사위원회도 풀랭의 교회는 목사들만으로 구성하였다. 치리회의 경우도 어느 지역이든 지교회치리회를 두어 개교회의 제반 문제를 처리하도록 규정한 것은 공통된 사항이나 세부적인 사항들에서 각기 차이를 드러냈고 프랑스 개혁교회와 같이 노회, 대회, 총회등과 유사한 치리회를 언급하기도 했으나 여전히 불완전한 제도였다. 그런 와중에 스코틀랜드 개혁교회는 근대적인 형태의 치리회, 즉 당회, 노회, 대회, 총회의 체제를 구축하였다. 광의의 개혁과 전통을 유념하면서, 교회 정치 제도적 측면에서 좁은 의미의 개혁파(화란 개혁파 교회와 같이)와 장로파가 구분된다는 사실을 주지할 필요가 있다. 그러므로 개혁파 교회는 정치 제도적 입장에서도 다양성과 개방성을 표방하는 것이다.

4. 개혁파 전통과 청교도 주의의 대안적 미래

개혁파 전통과 청교도 주의가 신학적으로 예전적으로 정치 제도적으로 변화와 변혁을 지향하는 개방성을 내포하고 있음을 살펴보았다. 이런 신학적 실천적지지를 근거로 변화에 직면한 한국의 개혁파 교회를 생각하며 세부적인 대안을 제시코자 한다.
먼저, 한국 개혁파 교회가 안고 있는 신학적인 딜레마가 무엇인지 점검하고 이것을 해결하기 위한 대안 제시가 있어야 한다. 한국 개혁파 교회는 대부분이 장로교 신학과 그 정치 원리에 입각하여 자리를 잡았다. 한국의 개혁파 교회 또는 장로교회의 뿌리는 크게 유럽의 대륙적인 요소, 영국적인 요소, 그리고 이 둘이 적당히 혼합된 미국적인 요소에서 찾을 수 있다. 역사적으로 이들이 모두 상호 영향을 주고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보편적인 요소를 찾으라면 청교도주의를 들 수 있겠다. 왜냐하면 청교도주의는 잉글랜드 개혁 교회를 중심으로 발전된 전통임에도 불구하고 종교적으로 박해를 피해 청교도들이 유럽의 대륙과 신대륙으로 피신하면서 기존의 전통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화란 개혁파 교회 내에서 안식을 논쟁의 와중에 청교도주의에 영향을 받은 보에티우스와 종교개혁적 자유를 주장한 코케이우스의 치열한 신학격론이 벌어졌다. 이것은 청교도주의가 복음과 율법의 관계를 설정하면서 신앙과 삶의 행동 모델을 구약에서 원용함으로 빚어진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논의의 중심에 안식일 문제가 놓여 있었고, 이 문제는 모든 개혁파 교회 내에서 지속적인 논쟁을 야기시켰다.
복합적인 전통을 소개받은 한국의 개혁파 교회는 청교도 전통, 개혁파 전통, 장로교 전통, 보수주의 또는 근본주의 전통을 토착적으로 정착시키는데 많은 시행착오를 겪어왔다. 유럽이나 미국에서와 같이, 한국 개혁파 교회도 안식일 문제에 있어 다양한 논의에 직면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구약적 안식일 규례에 근거한 주일 성수를 할 것인지, 아니면 종교개혁적 자유에 근거하여 개인의 양심에 따라 보다 자율적인 행동에 맡길 것인지 분명한 태도가 필요한 시점이다. 세속화의 물결 속에서 무대책으로 시류의 흐름에 따라 관망하는 것이 바른 자세는 분명 아니다. 한국적인 상황에서 안식일 개념의 주일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다. 이것이 무너진다면 한국교회는 무게 중심을 잃어 버리고 세속화의 급류에 휘말려 버릴 확률이 높다. 원칙적으로, 한국의 개혁파 교회들이 전통적인 안식일 개념을 확고하게 정립하되, 이 기준에 도달할 수 있도록 신앙적 가르침과 양육을 베푸는 것이 자연스럽다고 사료된다. 특히, 미성년의 경우 원칙적인 안식일 규정을 교육하고 삶에 체득되도록 하되, 성년이 된 이후 종교개혁적 자유에 맞게 각자가 소유한 가치관에 따라 신앙생활을 하도록 배려하는 것이다. 또한 성년 이후 개혁파 교회에 합류한 새신자의 경우 시간이 소요되더라도 지속적인 훈련과 양육을 통하여 원칙적인 삶을 살도록 인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만일 초신자 단계에서 처음부터 규율에 얽매이게 한다면 진정 중요한 부분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현재 일부 교회에서 주일 근무자들을 배려하는 이른 아침 예배와 늦은 저녁 예배를 도입하여 시행하고 있다. 이 모두가 청교도적 경건에 기초한 인식을 준수와 종교 개혁적 자유에 근거한 안식일 지킴에 대한 적절한 조화요, 시의 적절한 변화를 추구하는 태도하고 할 수 있다.

한국개혁파 교회들이 청교도적 안식일관을 원칙으로 삼고 종교 개혁적 자유에 근거한 안식일관에 개방적인 태도를 견지한다면 교회의 변혁적 이미지는 크게 제고될 것이다. 원칙적 보수와 실천적 개방성이 안식일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 논리는 건물로서의 교회에 대한 선입견과 전통적인 통념을 넘어서게 하는 디딤돌이 된다. 한국의 청교도적 경건에 근거한 교회 건물은 통상 성전이라는 개념으로 인식되어 왔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개혁파 교회는 구약적 성전 개념을 분명하고 단호하게 배격하며,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한 두 사람이 모여 공예배의 요건만 갖추면 예배 처소 또는 예배당으로 간주하였던 것이다. 서구의 개혁파 교회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의 장소를 철저하게 구별한 것은 사실이지만, 교회의 사명과 본질에 맞게 다양한 용도로 개방하여 왔다. 다행스럽게도 한국의 많은 교회들이 구약적인 성전 개념을 뛰어 넘어 신약적이며 개혁적인 예배당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며, 더 나아가 다용도의 기능을 갖춘 공간 확보에 교회들이 솔선수범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구의 개혁파 교회들을 볼 것 같으면, 지역사회의 문화적 중심지로써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하면서 다양한 클럽 활동과 각 단체의 지부 활동의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이와 더불어 교육기관과 예배당의 기능을 통합한 유형도 등장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러므로 건물로써의 교회당 기능이 통합적으로 다변화됨과 동시에 가정 교회의 급속한 확산으로 역할과 기능의 다변화도 이루어질 것으로 사료된다.
한국 개혁파 교회의 일관된 개방성은 예배 부분에 있어서도 동일한 것이다. 16세기 종교 개혁당시와 마찬가지로 개혁파 교회는 예배의 통일성 안에 다양성을 인정하여 각 교회 전통을 존중하고 그 차이와 독특성을 고유한 것으로 간주하여 왔다. 대다수 한국의 개혁파 교회들이 웨스트 민스터 예배 모범에 근거하여 예전을 접전하고 있다. 한편으로, 교회의 통일성을 유지함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다른 한편으로, 웨스트민트터 예배 모범에 상당한 무게를 둠으로 하나의 모델이 아니라 원칙으로 오해를 사기에 충분한 형편이다. 비록 장로교의 본산인 스코틀랜드 장로교회가 웨스트민스터 신앙 문서들(신앙고백, 대소요리문답, 예배 모범)을 공인하여 통일된 규정으로 삼았다고 할지라도, 이것이 절대적인 원칙이 되지는 못한다. 그 한 예로 아메리카 대륙으로 건너간 개혁파 교회들이 18세기에 벌인 서명 논쟁은 전형적인 것이다. 물론 이 논쟁이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에 공식적인 서명을 할 것인가 아니면 하지 말 것인가에 한정되어 있었다고는 하지만, 다른 문서들도 재고되는 계기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앞에서 살펴본 대로, 개혁파 교회는 다양성에 기초한 자율적이고 독창적인 성격이 강점이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교회가 교권에 휘둘려 권위주의적으로 변질되고 게다가 세속화의 흐름까지 혼합되면서 폐쇄된 형태의 예배로 인식되기도 했다. 일부의 교회들이 다양한 형태의 예배를 추구하고 미국식 열린 예배를 토착화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대안은 예배의 개혁 신학적 이해에 근거하여 초대 교회의 예배와 같이 예배의 개방성을 추구함으로 개 교회에서 독특하고 창조적인 예배들이 드려지도록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비본질적인 예배를 드리는 교회들이 많아질 것이라는 우려는 기우에 불과하다. 이와 더불어 종교개혁 당시 개혁파 교회들이 예배 순서에 포함시켰으나, 역사속으로 함몰되었던 요소들을 회복시켜야 한다. 특히 회중들이 함께 고백하는 사죄의 기도와 중보사역적 기도가 대표적이다. 개혁교회가 사적인 예배를 금지시키고, 로마 천주교의 사적인 고해성사를 배제하면서 모든 예배의 공식화, 즉 공 예배에 가장 큰 무게를 두었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개혁교회는 사적인 것을 공적으로 변혁시킨 주체이다. 사적인 예배들이 난무한 곳에 교권의 남용과 부정부패가 발생하였던 것이 사실이다. 개혁교회의 공예배는 모든 사람들이 공평하고 평등하게 나아와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이런 예배에 계층의 구별이나 신분의 차이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로마 천주교에서 주장하는 사적인 예배는 경계하되, 개혁파 전통과 청교도주의의 근본인 가족교회는 더욱 강조되어야 한다. 현재 한국사회 속에서 가족의 위기와 해체는 위험수위를 넘고 있음이다. 가족 단위의 와해는 사회 전반에 걸친 지각변동의 원인이 된다. 그러므로 공교회는 가족 교회 사역의 활성화에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한국의 개혁파 교회는 대부분이 장로교 정치 원리에 입각하여 운용되고 있다. 주지하는 대로, 장로교 정치는 교황정치, 감독정치, 회중정치, 자유정치와 구별되는 성경적 역사적 차별성을 지닌다. 16세기 장로교 정치제도의 출범에 있어 성경적인 근거보다는 당시 로마 천주교의 폐단을 지적하고 개혁하는 부분에 더 관심을 기울였던 것이 사실이다. 장로교 4대 치리회도 역사적 산물인 것이다. 직분자들의 명칭도 성경적 근거는 가지고 있으되 그 내용에 있어 역사적 상황 속에서 구체화된 흔적이 역력하다. 불행하게도, 역사적으로 개혁파 교회는 ‘오직 성경’이라는 신앙고백적 확신에 의하여 직분의 역사성과 성경적 근거를 구별하지 못하고 모든 것을 성경에 귀결시키려는 무리한 행동을 보여왔다. 이 결과 개혁파 교회들은 두 반의 장로, 즉 가르치며 치리하는 장로인 목사와 치리만 담당하는 장로 사이에 유무형의 알력과 갈등이 야기되는 것을 목도해야만 했다. 한국의 개혁파 교회들도 예외일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극단적인 양상마저 보이고 있다. 이것은 교회들이 ‘은혜’라는 미명하에 교회 헌법을 준수하지 않은 결과이다. 대부분의 개혁파 교회 헌법은 치리만 담당하는 평신도 장로의 재신임 투표를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거의 모든 교회에서 이 부분이 철저하게 무시되고 있으며, 오히려 기득권을 가진 세력들에 의해 그 본래의 취지를 원천적으로 무력화시키려는 시도가 행해지고 있는 실정이다.
이런 현상에 문제의식을 가지고 개혁파 교회의 전토에 입각한 장로 임기제를 바르게 정립해야 한다는 입장을 피력하고 싶다. 앞에서 지적한대로, 하국 개혁파 교회도 형식상 하자는 없지만, 규정만 있을 뿐 사문화 된지 이미 오래다. 장로교 본산지인 스코틀랜드 교회에서 장로 임기제를 골자로 하는 의견들이 일어나고 있고, 그 중심에는 장로의 종신제가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입장이 자리잡고 있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논의는 장로직에 있는 당사자들의 완강한 반대에 부딪혀 진통을 겪고 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미국 장로교회는 전형적인 3년 장로 임기제를 준수하고 있으며, 임기 3년을 마친 장로가 3년 더 재임할 수는 있으나 도합 6년을 채운 후 반드시 1년은 안식을 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화란 개혁파 교회도 4년 시무 후 대부분 자원해서 직무를 사직하며, 스위스 개혁파 교회도 4년 임기를 중심으로 재임가지만 허락된다. 물론 장로 임기제를 시행함에 있어서 실제적인 위험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지속적으로 시행하면서 관례화 시켜 나갈 경우 장기적으로 유익이 된다고 생각한다. 일부 개혁파 교회들과 같이 장로 직분은 종신직으로 하고 시무만 임기제로 하는 방안도 검토해 볼 만한 일이다. 개혁파 교회가 장로 임기제 정착으로 제도적 유연성을 통례화 시킨다면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그 진가를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교회의 대 사회적인 기여와 영향력 확대, 그리고 차세대를 준비하는 역할을 효과적으로 감당하기 위해서는 법인 설립을 통한 인적 물적 자원을 극대화 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철강왕 카네기가 자신의 재산을 정리하여 재단을 설립한 이후, 약 4만 여 개의 재단이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공익을 추구하고 있다. 유럽의 경우, 약 10만 여 개의 재단들이 각기 설립 목적에 부합한 사업을 왕성하게 전개하고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한국 사회에서도 이러한 분위기가 성숙되고 있는 흐름이다.
한국 교회의 문제점인 개 교회주의가 이 측면에서는 강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각 교단별로 유지 재단을 비롯하여 목적에 따른 다양한 재단들이 있겠지만, 하급 치리회, 즉 노회와 당회 단위의 법인 설립이 더욱 활성화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특히, 개 교회 단위로 교인들에게 재산의 공익 환원에 대한 교육을 통하여 유산 남기기 운동을 펼쳐 나간다면 좋은 결과를 볼 수 있을 것이다. 개 교회는 사회 복지 법인, 교육 문화 법인, 선교 법인 등과 같은 재단을 선택하거나, 아니면 이 모든 항목을 포괄적으로 함축하는 법인을 만들어 운용할 필요가 있다. 법인 설립 이후에는 동산과 부동산을 포함한 재산 관리를 효과적으로 하기 위한 제도적 장치를 안정적으로 구축하여 그 본래의 목적에 부합한 활동을 전개해야 한다. 혹자는 교회가 가난해야 한다고 말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매우 소극적인 태도가 아닐 수 없다. 필자는 영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유럽의 교회들이 겪고 있는 현실을 생생하게 목격했다. 교회가 부흥하고 역동성을 유지할 때는 인적으로 물질적으로 풍요와 번영을 누렸지만, 현재는 과거의 영화만을 짐작케하는 건축물들만 남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아직도 신앙적 생명력을 유지하며 재기의 안간힘을 쓰고 있다. 물론 신적인 은혜가 그들 위에 아직도 머물러 있다는 반증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들의 조상들이 남겨놓은 유산의 힘이 그 근저에 폭넓게 깔려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재단이 건재하고, 교단이 투자회사를 설립하여 동산과 증권을 통해 자금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고, 부동산을 매각하여 재 투자하는 등 세부적인 사항에서 저력을 보이고 있다. 미국 교회도 유럽의 교회들과 비교하여 손색이 없다. 미국은 특히 기부 문화가 발전하여 유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이 당연시 되고 있기 때문에,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재단의 규모가 크다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어 교회를 중심으로 형성된 재단의 규모가 크다는 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제 한국개혁과 교회도 훌륭한 신학적 신앙적 유산과 함께 사회 통합적, 사회 공익적 개념의 재단을 차세대에 전달해야 할 시점이다. 이것은 유무형의 에너지를 다음 세대에 공급하는 역할이라 할 수 있다.

5. 끝내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개혁파 전토의 시각에서 청교도주의의 역동성과 변혁성을 살펴보았다. 청교도 주의의 역동적 에너지는 하나님의 주권 사상, 성경 중심, 그리스도 복음의 실현과 성도의 중보사역적 위치와 역할, 행위 언약의 강조를 통한 전 영역에서 윤리적 책임, 성령의 사역 강조, 책임감 있는 종말론적 입장, 가족 교회를 기초로 하는 가족 종교의 강조, 안식일을 중심으로 하는 모든 날들의 거룩함 추구등에서 기인한다는 사실에 주목하였다. 이러한 요소들은 개혁파 전통과 정확히 일치함은 물론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개혁파 전통의 입장에서 청교도주의는 구시대적이며 무용지물인 이데올로기가 아니며, 특정 대상에게 위협적인 인상을 주지도 않는다는 점이다. 이런 오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청교도주의의 ‘경건의 모양’을 극복하고 ‘경건의 능력’을 회복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 능력이란 뜨거운 영성과 냉철한 지성의 조화를 통해 현장에서 드러나는 참된 삶이다. 이런 경건한 삶이 모든 영역에서 열매를 맺게 될 때 청교도주의의 역동성과 변혁성은 우리 시대의 정신으로 역사하게 될 것이다.


<출처 - 한국 개혁주의 설교 연구원 11주년 기념 세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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