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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단 에드워즈 신학과 청교도 신앙

by 【고동엽】 2021. 11. 13.
조나단 에드워즈 신학과 청교도 신앙


이상현 교수(美프린스턴대학)



청교도 신앙과 신학을 여러 가지로 학자들이 분석하였지만,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은 체험적 신앙과 성도의 실천이 가장 기본적인 청교도의 성격이라는 것이다. 체험과 실천이 구원의 필수적 증거이고 결과이기 때문에 청교도의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 그리고 예정론과 연결된다. 그리고 실천은 역사 종말에 확실히 이루어질 하나님의 나라에서의 삶을 지금 현실화한다는 각도에서 종말론과 연결된다. 성서의 권위는 바로 성도들의 권위였던 "신앙과 실천의 지침"(Rules of Faith and Life)이라는 데 있다는 것으로 청교도는 이해한다.


에드워즈는 하나의 청교도 신학자이며, 동시에 청교도의 테두리를 넘어서는 기독교 서구 신학의 중심적 흐름에 창조적 공헌을 한 신학자다. 여기서는 에드워즈가 하나의 청교도 신학자라는 관점에서 그의 신학의 중요성을 지적하려고 한다.


1.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앙 경험에 대한 새로운 이해


에두워즈는 신앙 경험을 "하나님의 사랑과 아름다우심에 대한 심미적 감각"(A Sense of the Heart)이라고 규정하고, 그 감각은 다른 심미적 감각과 연관성이 있으면서도 그 감각을 완전히 초월하는 것으로 분석하면서 자연과 은혜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을 동시에 주장하였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에 대한 이 새로운 인식은 사람의 감정과 의지의 인식을 포함하는 사람 전체의 경험이다. 그는 이렇게 봄으로써 신앙에 대하여 포괄성 있는 이해를 전개하였다. 그리고 이 신앙의 감각은 성령의 임재 없이는 불가능한 것으로 주장하여 개혁주의 전통의 '오직 은혜로'(Sola Gratia) 원칙을 준수하였다. 이 점에서 에드워즈는 청교도운동이 중요시하는 '구원의 체험'의 본질을 창조적으로 표현하고 정립하였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에드워즈의 이 신앙 경험 분석에서 이성적인 것과 감정적인 것을 분리하지 않고 포괄적인 견해를 제시한 것은 하나의 중요한 공헌이었다. "감정이 신앙 체험에서 어떻게 중요한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에드워즈는 Passion과 Affection을 구별한다.


즉 Passion은 마음의 이성, 지성을 완전히 무시하고 고립적으로 일어나는 하나의 감정인 반면, Affection은 마음의 모든 이성적 활동을 동반하고 포함한 감정이라고 규정하고, 기독교 신앙 체험에서 Affection으로서의 감정은 필수적인 데 반해, Passion으로서의 감정은 바람직하지 못한 것으로 '신앙과 정서'(Religious Affection)라는 책에서 말하고 있다.


2. 신앙 체험과 실천의 진실성 문제


청교도 운동의 가장 큰 관심사 중 하나가 바로 신앙 경험의 신빙성, 즉 진실된 신앙 체험과 참된 토대가 없는 신앙 체험을 어떻게 구별하는가 하는 문제다. 이는 신앙 체험과 실천을 강조하는 청교도들에게는 중대한 질문이 아닐 수 없었다.


에드워즈는 '신앙과 정서'에서 신앙 체험의 징표(sign)를 열거하면서 '의존할 수 없는 징표들'과 '의존할 수 있는 징표들'을 구별하고,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대한 새로운 심리적 감각'과 기독교인의 실천을 포함한 12개의 믿을 만한 징표들을 논하고 있다. 그는 균형된 그리고 말씀과 성령이 동시에 역사하시는 신앙 체험을 강조하여 청교도 신앙의 신앙 체험을 분석하고 이를 개혁주의 신학 테두리 안에서 재정리하였다.


에드워즈는 두 가지의 회심의 징표들을 다음과 같이 열거하였다.


의존할 수 없는 징표들(회심의 신실성을 증명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는 점들)
. 회심했다는 사람들이 아주 강한 감정을 느끼고 표현하는 것
. 그들의 회심이 그들의 몸에 육체적으로 무슨 영향을 주었다는 것
. 신앙에 대해서 많은 말을 열심히 하는 것
. 회심 체험이 자기 자신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
. 회심체험이 어떤 성서구절이 생각나는 것과 동반하였다는 것
. 회심했다는 사람이 이웃 사랑을 행하는 것이 보이는 것
. 여러 가지의 감정을 경험한다는 것
. 회심 체험이 어떤 특정한 단계를 거쳤다는 것
. 교회에 시간을 많이 드리고, 교회의 여러 가지 봉사를 열심히 한다는 것
. 그들이 입으로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것
. 자기 회심의 진실성에 대하여 깊은 자신감을 가졌다는 것
. 그들의 간증이 다른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는 것


의존할 수 있는 징표들
. 성령의 직접적인 임재에 근거하여 경험하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새로운 마음의 각각
. 신앙 체험의 객관적 토대가 모든 것을 초월하는 하나님 자신(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난)의 아름다움 그 자체를 우리의 유익과 관계없이 기뻐하고 사랑하는 것
. 모든 신앙의 감정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에 토대를 두었을 때
. 하나님에 대한 모든 것을 참으로 이해하고 인식하는 마음의 앎이 믿음의 감정과 동반할 때
. 하나님에 대한 모든 진리가 참된 진리라고 마음이 신실하게 판단할 수 있을 때
. 믿음의 감정들이 복음에서 오는 겸손을 동반할 때
. 회심한 사람의 성격, 인격 자체에 변화가 있을 때
. 회심한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하신 태도를 닮았을 때
. 믿음의 감정이 부드럽고 관용성 있는 마음과 동반할 때
. 믿음의 감정에 아름다운 균형이 있을 때
. 현재의 영적 상태에 만족하지 않고 더 높은 영적 발전을 추구하는 노력이 있을 때
. 신앙 감정이 실천의 열매를 맺을 때


3. 신앙 실천의 궁극적 의미 : 조나단 에드워즈의 신관과 기독교인의 실천


에드워즈는 청교도가 강조하는 실천을 신관과 창조의 목적의 큰 궤도 안에서 보았다. 기독교인의 실천은 하나님 자신이 추구하시는 작업에 참여한다는 실천의 궁극적 의미를 정리하였다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에드워즌 로크의 경험주의와 뉴턴의 자연과학의 영향력이 막대한 시대에 살았다. 그런데 두 사상 조류가 모두 전통적인 '실체'에 관한 이해에 도전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실재는 '실체'라는 관념으로 이해되어 왔었다. 그러나 경험주의는 그 '실체'는 경험의 대상이 아님을 지적하였고, 자연과학은 '실체'보다 '에너지' 그리고 '움직임'의 관념으로 실재를 생각하려고 하였다. 실체라는 전통적 관념의 정당성이 치명적인 비판을 받는 것을 에드워즈는 잘 의식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에드워즈는 대담하고 획기적인 새로운 철학적 방향을 제시하였다. 실재의 본질을 '경향성'이라는 동적인 관념으로 생각하자는 것이다. 그리하여 세상은 하나의 '경향성'들의 조직이며 한 개의 물체의 본질도 '경향성'들의 밀접이라는 것이다. 실체의 존재론을 에드워즈는 '경향성'의 존재론으로 재정리한 것이다.


에드워즈는 자신의 동적인 존재론을 신에 대한 관념에도 유용하였다.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경향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무한히 완전하시기 때문에 모든 실재를 다 가지신 분이다. 완전히 현실화되신 분이란 말이다. 그는 하나님의 완전성에 대하여서는 타협하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의 관계를 통하여 무한하게 완전히 현실화되신, 더 이상 그 무엇이 더 필요 없으신 분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본질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경향성이라는 것이다. 즉 실제와 경향성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영원히 경향성이신 하나님은 사랑과 아름다움의 힘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완전성을 고수하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동적이고 창조적인 분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리하여 하나님은 내적으로 완전히 현실화되었으나 하나님의 본질인 경향성은 하나님 밖으로 역사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이유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A Dissertation on the End of Which God Created the World)이라는 그의 중요한 논문에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은 바로 그 하나님의 경향성의 발휘의 결과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경향성의 발휘는 하나님 자신이 내적 완전하심, 즉 하나님의 완전하신 그 사랑과 아름다움을 재현(Repetition)하신 것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영원히 완전하신 하나님은 자신의 내적으로 완전히 현실화된 아름다우심을 외적으로 시간과 공간에 재현시키기 위하여 천지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기에 인간과 자연도 그 목적을 달성하는 작업에 동참하게 되는데, 인간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과 아름다우심을 알고 기뻐할 때 바로 그 체험을 통하여 하나님의 내적 사랑과 아름다우심이 시간과 공간에 재현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내적 영광은 무한하시기 때문에 그 재현의 작업은 무한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그 재현이 다 끝나는 순간은 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면 신학에서 말하는 종말은 무엇인가? 에드워즈에 의하면 종말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진행하신 구원의 작업이 끝나는 날이라고 한다. 인간은 죄를 짓고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을 달성하는 작업에 참여하지 않고 반항하였다. 그렇게 빗나가 버린 인류를 옳은 궤도에 다시 올려놓고 하나님의 작업에 동조할 수 있도록 해 놓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인 것이다.


그 작업이 끝나는 날 예수께서 신랑으로 오셔서 완성된 교회, 즉 신부와 만나 연합하게 되는데 그 날을 '끝이 없는 결혼의 날'이라고 그는 표현한다. 그 이유는 종말에 구원의 작업을 끝나고, 죄로 가득한 인간의 역사는 끝나지만, 역사 자체는 끝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끝나지만, 역사 자체는 끝나지 않는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끝나지만 변화되어 새 하늘 새 땅에서 연속되어 계속된다는 것이다. 새 하늘 새 땅은 우리가 아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동시에 그것을 포함하는 영역이다. 그러므로 새 하늘 새 땅에서 역사는 계속되며,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을 달성하는 작업은 그곳에서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영원히 전진되는 것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을 알고 기뻐하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원한 아름다우심이 재현되는 것이 무한한 시간 동안 진전된다.


에드워즈의 이러한 창조의 목적과 역사의 의미에 대한 이해는 성도들의 실천 행동을 참으로 거대한 신학적 틀 안에서 볼 수 있게 한다. 즉 성도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을 실천할 때마다 그 실천의 행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실현된다는 말이다. 성도의 실천은 하나님께서 직접하시는 작업에 참여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성도의 실천은 하나님 자신의 목적 달성에 이바지한다. 그 이상 더 깊은 의미는 주어질 수 없다. 에드워즈에 의하여 청교도의 실천 강조의 참된 기반과 궁극적 의미가 정립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글은 2002년 10월 28일에 한국 기독교학술원 주최로 열린 '청교도 신앙과 한국교회'라는 주제의 공개 세미나와 2003년 3월 15일 한국교회갱신연구원 주최로 서울교회에서 열린 '청교도 신앙' 세미나에서 시행한 강연의 개요이다)
출처 : 양무리마을
글쓴이 : grace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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