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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메소디즘", 로이드 존스, "청교도 신앙 그 기원과 계승자들"에서 발췌

by 【고동엽】 2021. 11. 11.
1968년 윌리엄 윌리엄스와 웨일즈 칼빈주의 메소디즘


메소디즘의 잉글랜드에서의 진정한 기원과 시작은 찰스 웨슬리가 주창하여 옥스퍼드대학에서 설립한 홀리 클럽에서 찾아야 한다. 메소디즘의 진정한 시작은, 1736년 휘트필드가 겪은 강력한 체험과 1738년에 웨슬리 형제가 겪었던 체험 속에서 찾아야 한다. 웨일즈에서는 메소디즘이 아주 독립적이고 자생적이었다. 잉글랜드보다 앞선 1735년에 하웰 해리스와 다니엘 로랜드의 회심으로 출발하였다. 처음에 그들은 하나였다. 그러나 후에 그들은 칼빈주의 메소디즘과 알미니안주의 메소디즘으로 갈라졌다.


메소디즘이란 본질적으로 체험적인 실천적 신앙이요 생활방식이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대한 열망이 대단했다. 구원의 확신과 사죄의 확신은 그들의 공통점이었다. 새생명에 대한 간절한 열망도 공통점이었다. 휘트필드는 부단히 중생에 대해서 설교했고 다른 사람들도 그러했다. 그들 모두 감정을 강조했다. 그들은 정통 교리, 바른 믿음만으로 만족하지 않았고 그리스도를 느끼기 원했다. 윌리암스의 찬송시를 보면 위대한 시성과 완벽한 신학이 놀랍게 어우려져 있다.


윌리암스는 <간증 집회에 이르는 길>이라는 책에서 가르쳤다. “그들의 증거의 명확성을 시험해야 합니다. 또 어떻게 그들이 처음 증거를 받았는지, 그 증거를 지금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상실했는지도 물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는 당신 자신의 영이 가진 이 증거가 성령의 증거로 인해 두 배가 되었습니까?” 그것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8:16) 말씀에 대한 윌리엄스의 관점이다. 이것이 그들의 가르침이었고 그들 자신의 체험이었다. 다니엘 로랜드의 경우에도 예배 중에 기도문을 읽는데 갑자기 성령께서 임하여 두 배의 확신을 주었다. 그때부터 그의 놀라운 방법과 놀라운 능력으로 설교하기 시작했다. 하웰 해리스에게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이것을 가르쳤고 이것을 기대하라고 가르쳤다.


그들은 소그룹이나 작은 단위로 모였는데 그들이 행한 주요한 일은 서로 자기들의 체험을 이야기하고 시험하며, 체험들을 서로 논의하는 것이었다. 메소디즘을 특징짓는 것은 이 영적인 요소였다. 그들은 믿는 것을 넘어서 그들의 삶 속에서 성령의 권능을 느끼고 체험하기를 열망했다. 또한 전도에 열심인 것이 메소디스트들의 공통점이었다.


* 웨일즈 칼빈주의 메소디즘의 특징


무엇보다 위대한 설교가 있었다. 칼빈주의는 언제나 위대한 설교를 유발한다. 삶뿐만 아니라 위대한 설교의 특징은 뜨거운 열정과 기쁨이었다. 또 다른 특징은 찬송이었다. 설교를 들으면서 어떤 이들은 아멘” “할렐루야라고 외치기도 했고, 흥분한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기도 했다 기쁨과 즐거움과 찬송과 확신이 웨일즈 칼빈주의 메소디즘의 큰 특징이었다.


그들은 연속적인 부흥을 경험했다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전도집회처럼 부흥과 거리가 먼 것은 없다. 그것은 인간이 만들고 조직한 모임에 불과하다. 부흥은 지존하신 분이 찾아오시는 것이요 성령의 부으심이다. 18세기에 있었던 그 위대한 부흥 가운데 하나는 1763년에 윌리엄 윌리암스가 새로운 찬송시를 출판한 결과 발생했다. 사람들이 그 찬송가를 부르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새로운 부흥의 폭발을 가져왔다. 사람들이 그 위대한 신학의 표현을 노래로 부르기 시작했을 때 부흥이 터져 나왔다. 윌리암스의 찬송은 신학과 체험을 함께 묶은 것이다. 그는 찬송시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신학을 가르쳤다. 사람들은 찬송을 부르면서 구원과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신약의 여러 교리들을 익히게 되었다. 이러한 부흥의 요소는 내가 강조하고 싶어하는 바이다. 이것이 칼빈주의 메소디즘의 독특한 특징이었기 때문이다.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들은 청교도들의 서적을 대단히 많이 읽었다. 그것들을 섭렵했다. 성경 다음 가는 양식이었다. 그들은 책에서 대단히 많은 것을 배웠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청교도들의 계승은 아니다. 새로운 요소가 도입되었다. 감정, 부흥, 확신에 관한 것과 특징으로 묘사했던 것들이다. 조나단 에드워즈도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라고 불러야 한다고 감히 나는 제안한다.


* 메소디즘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메소디즘이란 용어에서 경직화의 위험을 피해야 한다. 오늘날 메소디스트라 하면 알미니안 또는 존 웨슬리와 그 추종자들을 가리킨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칼빈주의 메소디즘은 참된 메소디즘이다. 알미니안주의 메소디즘은 여러 면에서 일관성을 상실했다. 그들은 은혜를 크게 강조했다가 다시 자유 의지와 인간이 감당하는 역할과 행위를 끌어들였다. 중생을 강조하고서는 그 중생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을 부정해 나간다.


칼빈주의 메소디즘은 메소디즘이 신비주의로 변질되는 것을 막아주었다. 그들은 교리에 강조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감정에 강조점을 두어 느껴진 측면을 강조하면 신비주의로 빠질 위험이 있으며, 잘못된 환각주의나 일종의 몽환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역사의 무대에 나타났다. 칼빈주의 메소디즘은 교리와 느껴진 요소 두 가지가 완전히 조화된 형태이다. 그것은 교리적으로 바른 자리를 지키게 보증해 줄 뿐 아니라 체험의 영역 자체 속에서도 많은 오류를 막아주어 일종의 신령주의로 빠지는 것을 막아준다. 그러므로 칼빈주의 메소디즘이야말로 진정한 메소디즘이다.


칼빈주의 메소디즘은 참된 칼빈주의라고 나는 주장한다. 메소디스트가 아닌 칼빈주의는 세심히 시험해 볼 필요가 있다. 메소디즘이 아닌 칼빈주의는 지적이고 스콜라적인 데로 나아가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우리를 붙잡아 주는 진리에 대해서보다 우리가 주장하는 진리에 대해서 더 많은 말을 하게 된다. 메소디즘이 아닌 칼빈주의가 빠지기 쉬운 또 다른 위험은 신앙고백을 부수적인 표준으로 삼지 않고 최상 최고의 표준으로 삼아 신앙고백을 성경의 위치에 놓은 위험이다. 칼빈주의자들은 이 순서를 거꾸로 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칼빈주의가 메소디즘으로 교정되지 않으면 생길 수 있는 경향의 위험은 기도할 마음을 막는 성향이다. 칼빈주의 메소디스트들은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교회들은 기도가 특징이었다. 그 기도회는 뜨겁고 감동적인 기도 모임으로 때로는 몇 시간씩 계속되었고 그곳에서 큰 체험을 하게 되었다. 결국 메소디즘이 없는 칼빈주의는, 거칠고 냉랭한 신앙은 말할 것도 없고 기쁨이 없고 딱딱한 신앙이 되는 경향이 있다. 이 모든 것은 주지주의에서 나오는 것이다.


옛 칼빈주의자들은 부단히 하나님의 찾아오심에 대해 말했다. 어떻게 주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셨는지, 주께서 어떻게 그들에게 말씀하셨는지를 언제나 말하였다.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물러가심에 대해서도 말했다. 필연적으로 칼빈주의는 하나님의 성령의 역사와 활동을 강조하게 된다. 모든 강조점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하시는 일에 주어진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그의 강한 손이 우리를 붙잡는 것을 강조한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칼빈주의는 체험으로 유도되고 체험을 크게 강조하게 된다. 그런데 현대 칼빈주의자들에게는 이런 것들이 사라지고 말았다. 성령이 찾아오심과 물러가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칼빈주의는 칼빈주의의 모조품에 불과하다. 이런 것을 칼빈주의라 하는 것을 나는 반대한다. 참된 칼빈주의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가까이 가도록 자극하는 것은 없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발전되어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참된 칼빈주의는 부흥과 하나님의 역사가 주어진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강조하게 되어 있다. 칼빈주의가 강력해질수록 영적인 부흥과 재각성의 가능성이 더 높아진다. 이것은 교리로부터 필연적으로 나오는 결과이다. 그리고 칼빈주의처럼 기도하게 하는 것은 없다. 기도하지 않는 칼빈주의는 칼빈주의가 아니다. 진정한 칼빈주의는 부흥에 관심이 있다. 하나님의 영광에 관심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이 최고의 관심거리이다. 세상 자체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하나님이 계신데 세상이 어째서 이처럼 행동하는가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다.


하나님의 영광! 칼빈주의자들의 모든 사고 체계를 지배하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을 기다리고 갈망하며 영광을 보여달라고 하나님께 졸라대고, 하나님의 능력을 베풀어주시고 일어나셔서 주님의 원수들을 흩으시고, 원수들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며, 주님의 전능하신 팔의 힘을 보여 달라고 간청한다. 이것이 바로 칼빈주의이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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