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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군주제의 회복과 청교도의 쇠퇴

by 【고동엽】 2021. 11. 11.

1658년에 크롬웰이 사망하였다. 리처드 크롬웰(Richard Cromwell)이 자기 부친의 자리를 채울 수 있는 리더십이 없다는 것은 금방 드러났다. 그래서 또 다른 시민전쟁을 피하기 위해서 군주제를 회복하기로 하였다. 찰스 2세는 네덜란드의 브레다(Breda)에서 신앙의 자유를 존중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는 세력을 잡고 있는 성공회 쪽에서 보복을 강력하게 밀고 나옴으로써 좌절되었다. 1643년에서 1654년 사이에 8,600명의 교구 목사들 가운데서 약 34퍼센트가 무능력 혹은 왕정파나 교황을지지했다는 이유로 퇴출되거나 다른 형태의 고통을 당하였다.

1661년 1월에 토마스 베너(Thomas Venner)는 5차 군주제 운동의 지도자로서 득세하게 되었다. 그는 과거에 크롬웰에 대항하는 반란을 일으키려다가 체포된 자였는데 처형은 면했었다. 베너는 약 50명의 추종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런던을 공포에 질리게 하였다. 22명이 이들의 손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이와같은 종류의 폭력과 무질서는 세력을 잡은 성공회가 강력한 대응책을 적용시킬 수 있는 구실을 제공하였다. 그들은 무차별 제재를 가하였다. 난폭한 무질서는 당국이 모든 종류의 비국교도들을 탄압하는 핑계가 되었다.

침례교도들은 베너와 절연했지만 소용없었다. 1661년 1월 10일 왕명으로 재침례파, 퀘이커교도, 5차 군주제 회원들의 집회를 모두 금지하는 선언이 통과되엇다. 짧은 시간에 4천 명 이상의 퀘이커교도들이 투옥되었다. 무장 군인들이 침례교도들을 밤에 침대에서 끌어내려 감옥으로 밀어넣었다. 번연이 바로 이때 잡혀서 12년의 옥고를 치루었다. 그는 살아남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감옥에서 죽었다.

다음에 클라렌돈 백작의 이름을 딴 클라렌돈 법령(Clarendon Code)이 발표되었는데, 이것은 모든 형태의 비국교도들을 해롭게 하는 법안이었다.

1662년에 잉글랜드 국교회(The Church of England)를 엄격하게 따르게 하는 법령이 통과되었다. 만약 목회자가 감독 체제하에서 안수를 받지 않았으면 국교회의 의식에 따라서 다시 안수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공동 기도서(The Book of Common Prayer)의 모든 부분에 동의해야 했다. 목사는 누구나 국교회법에 순종할 것을 서약하고 엄숙 동맹 언약서(The Solemn League and Covenant)를 부인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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