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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목적과 형제관(롬14:1~12)
오늘의 본문에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과 형제관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을 자세히 눈여겨보시면 "위하여"라고 하는 말씀이 여러 번 반복되고 있습니다. 결국 이것은 목적의 문제를 가르치는 것입니다. 모든 가치는 목적이 결정을 합니다. 방법도 목적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가장 잘못된 일은 방법이 목적을 배신하는 것입니다.
목적이 좋다면 방법도 좋아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 목적은 좋으나 방법이 악합니다. 이럴 때에 우리는 방법이 목적을 배신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니까 목적과 방법이 직선상에 있어야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방법은 다양한 것입니다. 복잡한 것이다. 아주 다양하고 다원적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 목적이 방법을 정당화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혹 방법이 조금 미흡해도 목적이 선할 때에는 그 방법도 옳게 인정을 받게 됩니다.
한번 생각해봅시다. 자, 칼이 있습니다. 칼이라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것입니까? 죄송하지만 우리 남자들은 하루종일 칼을 한번도 만지지 않을 때가 많아요. 칼을 항상 들고 있는 것은 여자들이에요. 무서운 사람들이에요. 칼을 들고 있잖아요? 하루종일 칼을 들고 있어요. 더구나 생선 같은 것의 목을 탁 자르는 것을 보면 '아이고, 저걸 어떻게……'하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보세요. 이 칼이 좋은 목적으로 쓰여지면 그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얼마나 유익합니까? 더구나 의사의 손에 들려진 칼은 사람을 살리잖아요? 수술할 때에 사람의 배를 칼로 쭉 쨉니다. 칼이 없으면 안돼요. 또 칼이 잘들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칼이 나쁜 사람의 손에 들리어지면 사람을 살리는 게 아니라 사람을 죽이게 됩니다. 문제는 목적이에요. 어떤 목적을 위해서 쓰여지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적이 그 값어치, 그 가치를 결정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목적은 그 자체로 있지 않습니다. 목적은 언제나 관계성으로 있는 것입니다.
어떻게 쓰여지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목적은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소유주에 있고, 그를 사용하는 자에게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목적은 객관적인 것이다, 그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 자체가 목적을 가지고 못합니다. 목적은 언제나 객관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고립된 존재는 없습니다. "Isolation is impossible"-상당히 유명한 말입니다. 어떤 것도 독립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뚝 떼어진 일은 하나도 없습니다. 사람의 생명도, 어떤 물질도, 모든 것이 서로 연관되어 있습니다. 연관된 바로 그 관계성 속에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칼이라고 하는 것은 칼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칼을 쓰는 자에게 목적이 있고, 쓰는 사람의 손에 들리어질 때에 목적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 본래성이 그렇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그렇고, 또 어떤 물건이 존재할 때부터 그렇습니다. 과거가 그렇고, 현재가 그렇고, 미래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은 우리에게 대단히 명쾌한, 중요한 명제를 줍니다.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7절)"-자기 자신은 위하여 살지도 못하고, 자기를 위해서 죽지도 못한다 함입니다. 놀라운 말씀입니다. 살고 죽는 것보다 목적이 더 우선한다는 말입니다. 얼핏보면 살고 죽는 문제가 대단한 것 같지요? 세상에 사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어요? 우선 살고 볼 것이지요. 안그렇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목적 없는 삶은 사나마나입니다. 그것은 사는 것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가끔 보면 나이많은 어른들이 좀 언짢은 말을 들으면 마음이 상해서 "그래, 나는 죽어야 돼"-이렇게 말하지 않습니까? 왜요? 쓸모가 없다, 이 말입니다. 목적이 없다, 도대체 내가 왜 살아야 되느냐, 이 말입니다. 결국은 목적 만큼의 의미 있는 생을 사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목적이 커야 합니다. 목적이 크고 위대하면 그만큼 값있는, 값진 생을 사는 것입니다. 목적이 없다든가, 적다든가, 혹은 낮다든가 하면 그만큼 변변치 않은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성경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지도 못하고, 자기 자신을 위해 죽지도 못한다고 전제합니다. 이는 그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원리입니다. 이 생의 원리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도대체 사람은 자기를 위해 살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를 위해 살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돈을 벌겠다 하고, 출세를 하겠다 하고, 공부를 하겠다 하다가 마지막에서야 '내가 이것을 왜 했나?'합니다. 목적을 잃었어요. 그것을 저만큼 가서야 깨닫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해서 살았던가?'-허무하게 되고 뉘우치게 됩니다. 절망하게 됩니다. 그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자기를 위해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 그 사람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워요. 그리고 바로 그 사람이 불행한 것입니다. 존재의 문제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자기자신을 위해 살 수 없습니다.
가령 음식을 먹는다 하더라도 자신을 위해 먹는다고 해보세요. 얼핏 생각하면 내가 입맛도 있고 하니까 이만큼 나를 위한 것인가보다 하지마는 조금만 더 먹어보세요. 어떻게 돼요? 먹는다는 것도 어떤 의미에서는 먹기 위해 먹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을 위해서 먹는 것입니다. 또 건강은 무엇을 위한 것입니까? 일하기 위한 거예요. 건강하기는 하나 할 일이 없습니다. 이러면 무슨 쓸모가 있겠습니까? 여기서 허무에 빠지고 절망하는 그런 사람들을 우리가 많이 보지 않습니까? 이렇듯 목적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래서 응겔스마라고 하는 유명한 심리학자의 대명제가 있습니다. "To know self is to be known by another." To be known self, 자기 자신을 안다는 말입니다. 자기 자신의 값어치가 어떻게 해서 평가되느냐?-To be known by another,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음으로써, 인정받는 만큼 자기 존재를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올 때에 그래도 거울 한 번 보고 오셨지요? 누구를 위해서입니까? 얼굴이라도 한 번 매만지고 옷이라도 한번 바로 입겠다고 하는 것도 사실 봉사입니다. 한번 찍어 바르는 것도 봉사입니다. 그게 누구를 위한 것인데요? 다른 사람 분위기 좋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고보면, 생각해보면 전부가 남을 위하는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남을 위한 것입니다. 그것을 모르고 이기적으로 생각하고, 자기를 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를 위해 먹고, 자기를 위해 일하고, 자기를 위해 벌고…… 바로 이런 사람들이 결국은 저만큼 가서 절망하게 됩니다. 그것을 깨닫게 될 때에 절망하게 됩니다. 인간의 존재는 자기를 위해 살 수 없도록 되어 있습니다.
또한 삶의 의미도 그렇거니와 삶의 행복도 그렇습니다. 내가 먹고, 내가 씁니다. 그러나 진짜 행복은 그게 아닙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대로 내가 먹기보다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먹이고, 그 사람이 잘 먹는 것을 볼 때에 내가 기쁘지 않습니까? 이 기쁨과 내가 먹어서 얻는 기쁨과는 전혀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사람은 더불어 살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을 위해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애당초 인간은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이것을 잊어버리고 있을 때에 그 사람은 인생의 삶을 역행하게 되는 것이요, 그래서 불행해지는 것입니다. 삶의 뜻도, 삶의 기쁨도, 삶의 존재도, 삶의 의미도 전부가 다른 사람을 섬기면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가장 바로 사는 사람이 누구냐 하면, 내가 남을 위해 사는 데에 내 행복이 있는 줄 알고, 남을 섬기는 데에 내 기쁨이 있는 줄 알고, 심지어 살고 죽는 것보다 오히려 내가 해야 될 일을 하는, 바로 거기에 나의 나됨의 의미가 있는 것을 아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이 생을 바로 사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기적인 사람처럼 불행한 사람이 없습니다. 이기적인 사람은 고독해요. 이기적인 사람은 마지막에 목적을 잃어버려요. 그래서 허무주의에 빠지게 되고, 정말로 인생무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기를 위한답시고 일껏 많이 벌어놓았는데 이것을 마지막에 가지고 갈 수가 있습니까? 심지어는 내가 병들었을 때, 이것하나 고쳐낼 수가 없습니다.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고쳐주세요'해봐도 의사가 그 돈 받고 고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에요. 결국은 나를 위해 번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잠언은 '악인이 재산을 모아놓은 것은 선한 사람을 위한 것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엉뚱한 사람, 다른 사람이 쓰게 된다는 말입니다. 곧 나를 위해서는 살 수 없게 되어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렇습니다. 본래가 그랬던 것입니다. 이것을 일찌감치 깨달아야 했던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목적을 과거에서 생각해봅시다. 그러나 과거는 지나간 일입니다. 우리는 늘 '무엇을 위해서 살았던가?'-이렇게 생각을 해요. 또 현재에도 '내가 무엇을 위해서 오늘을 살고 있느냐?'하고 생각합니다. 때때로 좀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오늘하고 있는 일이 내 맘에 안드니까, 흡족치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금 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목적은 보다 더 미래에 있다는 것입니다.
18C에 몽골피에(Montgolfier, J. M)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하늘에 새들이 날아가는 것을 보고 '사람도 저렇게 날아갈 수 없을까? 하늘을 한 번 날 수 없을까?'하고 생각했어요. 그래, 열심히 연구해서 커다란 기구(氣球)를 만들었어요. 제가 얼마전에 케냐를 갔을 때에 그런 기구를 한 번 타봤습니다. 불을 때어서 뜨거워진 공기로 기구를 뜨게 하고, 거기에 연결된 바구니 속에 사람이 한 10명 올라탔는데, 둥둥 떠올라 가는 기분이 자못 괜찮아요. 아무튼 몽골피에는 기구를 만들어서 사람을 날 수 있게 하겠다고 여러모로 준비하고, 애쓰고, 또 선전을 했어요. 그런데 '그것을 해서 뭘 하겠다는 거야? 한 번 뜨면, 날아보면 어떻다는 거야? so what, 무엇 때문에 그 짓을 하느냐 말이야? 무슨 목적으로?' - 이렇게 비웃는 사람들이 있어요.
어떤 과학자는 원로이며 선배인 벤자민 플랭클린이라는 사람을 찾아가서 이 이야기를 했어요. "저 사람이 기구를 만들어서 하늘을 날아보겠다는데 쓸데없는 짓 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목적으로 그 일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프랭클린은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당신은 막 태어나 어린아이를 보고 이 아이는 왜 태어났느냐, 무엇에 쓸모가 있느냐고 말합니까? 적어도 어린아이의 목적은 그가 크고 자란 저 미래에 있는 것 아니오? 지금 당장은 부모들에게 재롱감만 될는지 모르나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지 않소?"-이렇듯 사람이 기구를 만들어 가지고 그래도 하늘을 날아보겠다는 것이 오늘은 미미한 일일지 모르나, 장차는 그것이 큰 역사를 이루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헬라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소위 현실태라는 말과 가능태라는 말을 했습니다. 오늘 현재라는 것은 현실태고, 앞으로 이루어질 것은 가능태입니다. 우리는 이 가치를 분명히 해야 됩니다. 조각품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태입니다. 앞으로 조각을 하게 될 대리석 돌덩어리는 어디까지나 가능태입니다. 이것을 잘 조각하면 이제 작품이 될 것이에요. 또 꽃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태입니다. 그 씨앗은 가능태입니다. 그런고로 현재 목적이 있느냐 없느냐, 의미가 있느냐 없느냐, 이렇게만 말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에요. 적어도 인간의 바른 판단이란 가능태에서부터 보는 것이에요. 미래 지향적으로 보는 것이에요. 오늘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아요. 그러나 내가 모르는 의미가 저 앞에 있어요. 저 멀리 있다는 말이에요. 이것을 믿어야 됩니다. 내가 나를 볼 때에는 아무 소용도 없어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실 때에는 그런 것이 아니에요. 소중하게 쓰여질 목적이 있어요. 그런고로 O. 헨리의 말처럼 길가에 놓여 있는 돌 하나라도 목적 없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목적 없이 존재하지 않아요. 나이 많았으니, 배운 게 없으니, 돈도 없으니, 나는 무능하기…… 그럴 것 없어요. 무능하면 하나님께서 그냥 두지 않으셨을 것이에요. 반드시 목적이 있어요. 그 목적이 내가 살고 죽는다고 하는 사건보다도 더 크게 존재한다는 말입니다. 본질적으로, 깊은 세계에서 볼 때에 그렇습니다. 특별히 종말론적으로 우리는 저 앞에 있는 마지막을 생각하고 주님께서 예비하신 목적이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제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 나를 위해 살 수 없다고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또 나를 위해 살아서는 사람답게 살 수도 없고 사람된 행복을 누릴 수도 없어요. '자기를 위해 사는 자가 없다. 또 자기를 위해 죽을 수도 없다'-여기서 우리가 깊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은 자기를 위해 죽을 수 없다고 하는 이 진리에서 죽음의 바른 의미를 찾아야 합니다. 이것이 종말론적인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죽음 역시 자연현상만은 아니에요. 죽고 사는 문제보다도 목적은 더 큰 데 있습니다. 그것은 죽는 것보다도 더 커요. 적어도 죽는다고 하는 사건 자체만 생각하지 말고 죽음도 내가 선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보다 더 큰 목적을 위해서 살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죽어가야 되는 것이에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 한 사람이 파키스탄에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더운 데서 고생하는 바람에 그만 간이 나빠졌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권했어요. 여기에 있지 말라고, 여기 있으면 죽으니까 나가라고요. 의사도 분명히 그렇게 얘기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집스럽게도 "아닙니다. 이대로 넉넉합니다. 여기에 있는 이 사람들보다는 내가 훨씬 건강합니다." 그리고 이런 마지막 말을 했어요.
"나는 가능한 여기서 죽고 싶습니다. 선교사로 있다가 여기서 죽고 싶습니다." 그래서 제가 말조심하라고 그랬어요. 결국에 그는 정말로 파키스탄에서 죽었어요. 보세요. 그는 자기의 죽음을 자기가 선택한 것이에요. 죽는 것보다 자기가 하는 이 선교사의 일이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알고 있었어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그저 살아야 한다는 것만 가지고 살아야 하는 그런 생은 의미가 없는 것이에요.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 삶의 목적이 분명하고, 좀더 나아가서는 죽을 수 있는 이유까지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충분한 이유가 있어요. 이것을 위해서는 죽어도 좋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 오늘 저녁에 죽어도 좋다-그런 마음으로 일하는 것이에요. 그렇게 일해가면서 죽는 거예요.
자, 보세요.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제사장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이번에는 내가 핍박을 받아서 죽을 것이다'-이렇게 분명히 말씀하셨어요.
여러 차례 말씀하셨어요. 그러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십니다. 또한 성경을 자세히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성전에 도전해 들어가십니다. 성전에서 팔고 사는 사람들을 다 내어 몰았습니다. 채찍을 들고 '만민의 기도하는 집을 어찌하여 강도의 소굴로 만드느냐?'하시면서 저들을 막 내어 몰았어요. 제사장들이 눈을 부릅뜨고 살기 등등하게 지켜보는데 어찌 그런 이야기를 하신다는 말입니까? 뿐만 아니라 저들에게 무서운 폭탄선언을 하셨습니다. '세리와 창기가 너희들보다 하늘나라에 먼저 가리라.' 어떤 신학자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이 말 한마디 하고 맞아 죽어도 할말없다.' 정말 그렇지 않아요? 저들이 어떤 사람들인데, 으리으리한 옷을 입고 거룩하게 서 있는 그 제사장과 바리세인들을 놓고 '너희들보다 세리와 창기가 하늘 나라에 먼저 가리라'고 소리를 질렀으니 어찌 살아남기를 바라겠어요? 그래서들 말하는 젊은 신학자들 가운데 radical term-극단적인 소리를 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런 재주있는 말을 합니다. '예수의 죽음이 자살이냐 타살이냐? 이것은 '나 죽여라'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냐? 이렇게 하고도 어떻게 살아남기를 바라느냐?' 순교자들도 마찬가지예요.
마지막 그 순간에 거짓말 한마디 하면 죽지 않잖아요? 폴리캅은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한마디만 한다면 놓아줄 것이니 다른 나라든 다른 마을이든 어디든 가서 마음대로 믿어라"---그러나 그는 거부합니다.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팔십 평생 내게 거짓말을 안하셨습니다. 어찌 내가 한 목숨 살기 위해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그리고 화형에 처해져서 순교합니다. 이것이 자살입니까, 타살입니까? 적어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은 자기 죽음은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에요.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이렇듯 드라마틱한 기회가 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저는 이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시간에 우리가 죽음이 임박했다고 합시다. 그럴 때에 마지막까지 살려달라고 애걸복걸하다가 가지 마시고 죽기 단 오분 전에라도 '이제는 갑니다. 그만합시다. 더 주사 놓지 마세요. 산서 호흡도 그만합시다. 다 끝났으니 그만합시다'하고 다 물린 다음에 '조용히 다시 한 번 기도합시다'--이렇게 하고 가면 좋잖아요? 그만큼이라도.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해요. 자기를 위해 사는 자도 없고 자기를 위해 죽는 자도 없어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죽어지는 죽음이 아니라 선택적 죽음, 자원적 죽음, 긍정적 죽음, 창조적 죽음, 목적적 죽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목적이 있는 죽음-이게 중요한 것이에요. 목적 없는 그런 죽음이야말로 정말 유감스러운 것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가장 아름답게, 그야말로 작품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것은 큰 기도 제목입니다. 우리가 죽음을 기피할 것도 아닙니다. 생사의 문제를 넘어서서 더 크고 놀라운 목적을 생각하고 전적으로 목적을 극대화하고 목적 안에 내가 흡수되는 그런 생을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본문은 유명한 말씀을 하지 않습니까?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8절)"--사나 죽으나 상관없어요.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라고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유명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이라는 것은 목적 있는 죽음이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것은 바로 목적을 전환키 위함이요, 목적 있는 삶을 위함이요, 목적 있는 죽음을 위함입니다. 성경말씀 한 절 더 보겠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5절에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왜 예수께서 죽으셨느냐? 다시는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가 다시 사신 바로 그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게 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게 하기 위해 우리를 위하여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위하여'-생의 목적을 바꾸어놓았다는 말입니다. 빌립보서 1장 21절에서 사도 바울은 유명한 말씀을 합니다. "To live is christ and die is gain"--"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이 말씀이 무슨 뜻입니까? 살고 죽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에요. 그리스도가 중요해요.
그리스도 안에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그리스도를 위해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이것이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는 말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은 이러한 생을 놓고 그 사람이 가는 생의 길을 다시 설명을 하는데, 여기서 형제관을 말씀합니다. 형제--그리스도인의 이웃관계는 형제관계입니다. 인도주의가 아닙니다. 이웃관계가 아닙니다. humanism이 아닙니다. 이것은 brotherhood, 형제관계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유명한 하르낙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냐? 하나님을 아버지로,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 이웃을 그리스도 안의 형제로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이렇게 간단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옳은 이야기입니다. 역시 humanism가지고는 모자랍니다. 사람을 사람 대접하는 것이 humanism입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안됩니다. 또 nationalism, 민족주의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대로, 간호원 나이팅게일을 보세요. 그녀는 크림 전쟁 때에 간첩으로 몰려 가지고 재판을 받고 죽습니다. 죽기 전에 이런 유명한 말을 했어요. 그 말이 지금 나이팅게일의 무덤의 묘비에 씌어 있습니다. '애국심만으로는 모자랍니다.' 그렇습니다. 애국심만 가지고는 안돼요. 그 위에 인도주의가 있어야 해요. 다시 할말이 있어요.
humanism 가지고는 모자랍니다. 형제애가 있어야 해요. 이 말은 피로 맺어졌다는 거예요. 우리는 한 하나님의 자녀거든요. 한 아버지의 자녀예요.
형제 관계에 있어서 제일 대표적인 예가 탕자입니다. 탕자가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즐거워서 잔치를 하면서 영접하는데, 형은 그를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왜요? 저 동생을 영접하면 내 유산이 적어지거든요. 그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돈을 창기와 함께 먹어버린 저 동생을, 사람같지도 않은 것을 왜 영접합니까?'라고 말합니다. 그 때에 아버지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는 내 아들이요, 네 동생이 아니냐? 죽었다 살았고, 잃었다 얻었는데 함께 즐거워하는 것이 마땅치 않겠느냐?'-이것은 형제관입니다. 아버지를 보고 사랑해야 합니다. 동생을 보고 동생을 사랑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저는 부부관계도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보고 남편을 사랑하고, 하나님보고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에요. 아내보고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편보고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언제나 그 점을 잊지 말아야 해요. 평소에 동생이 잘하고 못하고, 내게 이롭고 해롭고, 잘났고 못났고…… 형제는 그런 게 아니에요. 내가 저 동생에게 잘못하면 아버지 마음이 아픈 법입니다. 저희들끼리 다툴 때에 아버지가 나타나서 '싸우지 말아라'합니다. 그러면 서로가 잘했느니 못했느니, 변명을 합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것을 상관하지 않아요. 그저 '왜들 싸우느냐'합니다. 그 마음뿐이에요.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아버지한테 아들 둘이 있었는데 그 형이 아주 타락해가지고 많은 돈을 없애고 집을 나가버렸어요. 반면에 동생은 아주 효자였어요. 열심히 아버지를 위해서 일하고, 돈을 벌고,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어요. 어느덧 아버지의 회갑날이 되었습니다. 동생은 아버지를 위하여 회갑잔치를 굉장하게 벌었어요. 아버지의 친구들을 많이 모셔다놓고, 음식도 많이 차려놓고, 기생들을 불러다가 춤도 추게 하고, 술도 따르게 하고…… 그런데 아버지는 하루종일 말이 없어요. 웃음이 없어요. 그냥 가만히 있어요. 이 모습을 보고 아들이 물었습니다. "아버지, 왜 이러십니까?" "네 형이 오늘쯤은 올 줄 알았는데……" 어디를 갔더라도 그래도 오늘은 아버지 회갑날이니까 올 줄 알고 기다렸는데 안온다는 것이지요. 그 때에 이 아들은 말했습니다. "제가 형님 몫까지 다 하겠습니다. 그러니까 걱정하시지 마시고 이 잔치를 마음껏 즐기세요. 음식도 잡수시고 기뻐하세요." 아버지는 "그래, 고맙다, 고맙다"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면서도 계속 눈물을 흘리는 거예요. 보세요. 동생은 형을 용서하지 못하고 있어요. 그러나 아버지는 이미 용서했어요. 아버지의 마음에는 두 아들이 똑같은 거예요. 바로 이것이 형제애의 기본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은 형제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말씀합니다. 가난하다고 업신여기지 말고, 못났다고 업신여기지 말라, 다 아버지의 자녀요, 아버지의 아들이요 딸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고로 형제를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판단이 옳은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심판주가 아니에요. 나는 누구도 심판할 권리가 없어요. 그런고로 형제를 판단하지 말라는 것이지요. 때로는 우리가 기준을 잘못 세울 때가 있어요. 아버지를 보고 형제를 대하고, 하나님을 보고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고 우리는 물질을 보고 대하고, 소유를 보고 대하고, 지식을 보고 대하고, 지위를 보고 대할 때가 많아요. 사람을 외모로 취하기가 쉬워요. 그런고로 형제를 절대로 판단하지 말라고, 업신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더욱 중요한 오늘의 결정적인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10절)"-어떻게 대했는지 저 심판대 앞에서 판단을 받을 것이라 함입니다. 면양과 신앙의 비유를 우리가 성경에서 보지 않습니까? 형제를 어떻게 대했는가?-이에 대해 우리가 심판대 앞에 거서 판단을 받을 것입니다. 그 때에는 물질, 지식, 세상, 소유, 명예…… 아무 소용이 없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이웃을 어떻게 대했는가,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대했는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으로 영접했는가?-바로 이것이 심판의 바로미터가 되는 거예요. 그런고로 형제를 업신여기지 말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형제관입니다. 종말론적인 공동체관입니다.
여러분, 살고 죽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살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죽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목적이 너무 큽니다. 따라서 내 마음대로 뭐가 안 된다고 해서 죽고 싶다고 하지도 말고, 더 살고 싶다고도 하지 마세요. 다만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고 그 뜻에서 이런 종말론적인 의식을 가지고 이웃을 조금도 업신여기지 말고 내 형제로 대하고, 내 몸과 같이 대하고, 내 마음과 같이 대할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이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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