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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목적(요 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이 본문을 읽으면, 사실상 요한복음이 여기서 끝난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어찌 생각하면 이 본문의 두 구절은 요한복음 마지막에 기록하는 것이 좋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 말씀 후에 다시 21장을 왜 기록했는지 그 의도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습니다만, 여기서는 생략하겠습니다. 이 본문은 삽입적인 성격으로, 성경이 무엇이며, 기록된 목적이 무엇인가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장에서는 성경이 무엇인가를 간접적으로 생각하면서 어떤 목적으로 성경을 보아야 하며, 성경 전반에 대한 객관적인 의미를 공부하고자 합니다.
성경에 대해 공부하기 전에 먼저 알고 지나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다"하는 명제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시되,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말씀의 관계로 이루셨습니다. 아시는 대로 동물은 잡아끌면 되지만, 사람에게만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창세기를 읽다 보면, 사람들이 제일 많이 갖는 질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왜 선악과를 만드셔서 먹지 말라고 금하셨느냐 하는 것입니다. 처음부터 선악과를 만들지 말든지, 만들었으면 먹지 못하도록 분명히 어떤 대책을 세우셔야 했는데, 무방비 상태에서 먹지 못하도록 하신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오묘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는 인격적인 관계라는 것입니다.「인격적인 관계」라고만 말하기에는 사실 말의 부족함이 있습니다. 인격자라는 말의 인(人) 자에 사람 인 자가 있다고 해서 사람을 생각하지 말고, 자유 의지를 가진 존재와의 관계로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자유를 주시면서 동시에 자유에 따르는 책임도 주셨습니다. 선택은 자유이며, 운명은 심판입니다. 그러므로,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내게 있으되, 선택 다음에 되어지는 일은 심판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존재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높은 가치의 것입니다.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란 이러한 의미에서 대화적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순종할 수도 있고 불순종할 수도 있습니다. 순종함으로 사랑과 믿음과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서 하는 일은 불행합니다. 과연 나는 지금 할 수밖에 없어서 하는 일이 얼마나 되나 생각해봅시다. 잘못하면 내가 사는 삶의 전체가 할 수밖에 없어서 하는 삶이 되어가고 있지나 않은지 자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을 낳았으니 할 수 없어서 돌봐주고, 결혼을 했으니 할 수밖에 없어서 함께 산다면 그것은 모두가 비인간화되는 순간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의 인간적 가치를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 됩니다. 필자는 늘 웃는 말로 "사람은 일생동안 자기가 하고 싶은 일만 하라. 그래야 건강하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러면, 하고 싶지 않은 일은 어찌하느냐고 물어옵니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왕, 내가 해야 할 일이라면 억지로 한다고 하면서 할 필요가 없습니다. 여기에 덧붙여서 한 마디만 더 한다면 "사랑은 항상 현재적으로 고백해야만 사랑이다"라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어제 이러이러했으니 부득이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할 수 없어서 사랑하고 신세타령하면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란 말입니다. 오늘 현재적으로 사랑해야 그 사랑이 참 사랑입니다. 사랑은 현재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현재에 자유합니다. 과거에도 매이지 않고 앞으로도 어떻게 하겠다는 조건이 없습니다. 현재 이대로 자유합니다. 내가 지금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고, 순종할 수도 있고 거역할 수도 있고, 먹을 수도 있고 먹지 않을 수도 있는데, 나는 순종합니다. 그것이 사랑이고 그 순간만이 내가 인간이며, 인격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창조하신 인간입니다. 항상 스스로 선택하도록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고귀한 가치를 스스로 빼앗기고 부정한다는 것은 대단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오늘 본문이 바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이러한 인격적 관계로 이루어졌다 하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섭리하시며, 말씀하시고, 그리고 우리를 감동 감화케 하시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 때부터 성부, 성자, 성령은 함께 역사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빛이 있으라 말씀하시고, 성령은 물위에 운행하셨습니다. 즉, 성령이 역사 하셨습니다. 오늘도 한 사람을 구원하시는데 있어서 똑같은 성부, 성자, 성령의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말씀의 대상으로서의 인간, 그 속에 인간의 존재 가치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말씀」이라고 생각할 때에 우리는 입으로 주고받는 말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말씀이란 범위가 아주 넓고 깊습니다. 말씀의 원체는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지금 주고받는 말은 그 말씀의 몇 백만분의 일의 아주 조그마한 그림자입니다. 사람은 인격적 존재이기 때문에 말을 합니다. 말에는 입으로 하는 것 외에, 눈으로도 하고, 몸으로도 하고, 인격으로도 하고, 침묵으로도 말을 합니다. 그래서, 필자는 교회에 나와서 예배드릴 때, 팔짱끼고 앉은 사람을 제일 싫어합니다. "무슨 소리하나 두고보자" 하는 바디랭귀지(몸의 언어)로 들리니까요. 말씀을 듣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앞에서 이야기한대로 말씀은 단순히 공기를 진동시키는 언어로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전체가 다 말씀입니다. 공기를 진동시켜 소리를 통해서 전할 때, 여기에 의미가 전달됩니다. 그러므로, 소리는 한국말이나 영국 말이나 독일 말 등 여러 나라 말로 전할 수 있지만, 문제는 그 소리 속에 담겨 있는 내용이 중요합니다. 말의 의미는 마음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마음을 보여 주는 것은, 실지로 보이는 것이 아니므로 이것을 보이게 말해 주고 때로는 들리게 말해 주고, 때로는 사랑한다고 몸짓으로 마음을 전합니다. 쓰다듬는 것도 사랑이요 쥐어박는 것도 사랑의 표현이 됩니다. 이것이 다 말씀이요 신호입니다. 말만이 상징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상징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내가 눈으로 본 바요, 귀로들은 바요, 손으로 만진 바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하나 더 덧붙여서 "내 느꼈다"고 말했으면 더욱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은 아무 말이 없어도 좋습니다. 예수님 옆에 앉아 있기만 했어도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가끔 필자 사무실에 일이 있어 왔다가 돌아갈 적에 "목사님, 손 한 번 만져 보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반갑게 서로 악수를 합니다.
사실, 서로 만진다는 것 대단히 중요합니다. 사랑한다는 말이니까요.
이런 것들이 다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반드시 귀로 들려야만 말이라고 논리적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말씀이라 논리적인 것만은 아니라, 직감적인 것도 있고 몸에 부딪쳐서 깨닫는 것도 있습니다. 천지에는 말씀으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 중에 제일 귀중한 말씀이 인격입니다. 말씀은 대자연을 통해서 보여 주는 것도 좋고, 귀로 들리는 소리도 좋고, 바람소리도 좋고, 공중에 나는 새를 보는 것도 좋지만 예수님을 보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을 보고, 음성을 듣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의 관계를 가지는 것 이상으로 더 좋은 것이 있겠습니까? 말씀의 결정적인 상징, 즉 가장 중요한 상징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오셨다고 사도 요한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인격으로 말하면 침묵도 말씀입니다. 때에 따라 예수님은 참 어려운 말씀을 하셨습니다.
마가복음 7:24 이하에 보면, 수로보니게 여자가 예수님을 따라오면서 자기 딸에게 흉악한 귀신이 들렸으니 고쳐달라고 소리소리 질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말씀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도 여인은 계속해서 고쳐달라고 소리치며 따라옵니다. 침묵도 대답입니다. 똑똑한 사람은 침묵 속에서도 음성을 듣습니다. 어린 아이들이 부모들에게 무엇인가 요구할 때, 부모들은 침묵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대답이 아닙니까? 침묵을 말씀으로 들을 줄 모르는 자는 미련한 자입니다. 때로는 침묵이 웅변보다 더 나은 말씀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인격으로부터의 언어를 바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친히 말씀하신 것만 말씀이 아니라, 병 고치신 것도 말씀이요, 어루만지신 것도 말씀이요, 걸어가신 것도 말씀이요, 침묵하신 것도 말씀으로, 33년 동안 행동하신 그 모두가 우리에게 향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졌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제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이렇게 말씀으로 오셨고, 인격으로 오셔서 우리 인간과의 관계를 대화의 관계로 맺어 주심에 감사합니다만, 반대로 많은 장벽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그것은 언어의 장벽이요, 문화의 장벽이며, 시간의 장벽이요, 공간의 장벽입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게 되어, 여기에 계시면 저기에는 안 계십니다. 오늘 계시면 내일은 안 계시며, 동시에 많은 사람을 만날 수가 없습니다. 또한, 히브리말로 말씀하시니 애굽 사람이 알아듣지 못합니다. 만약, 한국 사람인 우리가 거기 있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이런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역사할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여기에 증거라는 길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이 예수를 만나 보았고, 그것을 다음 사람에게 증거 합니다. "우리가 만나보니 예수는 이런 사람이다. 물위를 걷기도 하고 죽은 나사로를 살리기도 했다"라고 자기들이 눈으로 본대로 열심히 증거 합니다. 그러면, 이 증거를 듣고 다음 사람에게 또 전합니다.
문제는,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보지 못했지만, 본 사람의 이야기를 내가 믿으면 본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가령, 필자는 달나라에 가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마침 기회가 있어, 달나라에 다녀온 어윙 대령으로부터 약 1신 가량 이야기를 듣고나니, 나도 다녀온 것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돈도 들지 않고 구경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특히, 요즈음은 사진술이 발달되어 내가 가보지 않았어도 그 사진을 보면 구경한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 요즘 여행가는 것을 간다고 하지 않고 확인하러 간다고 해서, 재미있는 표현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실입니다. 사전에 그림책 다 보고, 설명 다 듣고 가니, 가기 전에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을 가서 확인하는 것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직접 달나라에 간다 해도 어윙 대령이 설명해 주는 것 그 이상 무엇을 더 보고 오겠습니까? 어윙 대령은 세계 기록을 가진 고공 비행사인데도 불구하고 달나라에 가기 위해 5년 동안을 특수 훈련을 받았답니다. 그런 사람이 다녀와서 이야기하는데, 믿지 못할 일이 뭐가 있습니까? 갔다온 자의 모든 증거와 감격을 내가 받을 수 있다면, 나도 갔다온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믿음이란 이렇게 중요합니다. 별로 좋은 예는 아닙니다만, 흔히 술을 많이 마셔서 패가망신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술 먹으면 이렇게 망신하고 후회스럽다고 아들에게 가르치면, 그동안 충분히 보았고 아버지의 후회스런 말씀으로 미루어 알아들어야지, 반드시 자기가 마셔보고 패가망신한 다음에야 알겠다고 한다면 되겠습니까? '술은 이런 것이구나' 하고 아버지로부터 보았으면, 이제 알아야 합니다. 증거를 받아들이는 믿음, 그것으로 인해서 경험에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가 정말 경험했더라도 잊어버리면 그만입니다. 또한 경험하고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그 경험은 무효입니다. 그러므로, 증거를 받아들이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증거는 어떻게 전해집니까? 증거는 두 가지로 전해지는데, 하나는 전승이요 또 하나는 기록입니다. 전승은 말로 전하는 것으로, 사도 요한이 다음 사람에게 전하고, 그 사람이 또 다음 사람에게 말하고, 또 다음다음 이렇게 전해지는 것입니다. 전승이란 무섭도록 크게 효과가 있습니다. 물론, 그 말을 믿는 자에게만 효과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승은 실감이 나지 않는 단점이 있습니다. 처음 직접 본 사람이 전할 때는 실감이 나고 좋은데, 몇 사람 건너가다 보면 어디까지가 참말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말이란 시간이 갈수록 보태지기도 하고 감해지기도 해서 나중에는 아주 다른 말이 되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승의 결정적인 약점입니다. 처음에는 인격을 통해서 전해지고 설명된다는 입장에서 대단히 좋습니다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주 처음 초대교회 시절에는 기록을 필요로 하지 않았습니다. 기록이 있어도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마가복음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실지로 베드로가 살아 있었으므로 마가복음을 보겠습니까? 베드로의 말씀을 듣겠습니까? 베드로와 예수님이 함께 일을 그 당시의 이야기를 베드로로부터 들으면 더욱 실감이 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말씀 그대로가 성경이었으므로 그 시대에는 기록이 있어도 별 의미가 없었습니다. 만일, 저자는 싫어하고 편지만 좋아하면 되겠습니까? 기록한 사람이 살아 있을 때는 아무래도 그에게 직접 듣는 것이 생생하고 좋습니다. 물론 그가 죽고 나면 그 편지는 값어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필자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제가 처음으로 미국에 갔을 때, 아내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아내도 내게 편지를 했는데, 2년 동안 주고받은 것을 모두 모아 책으로 묶어 놓았습니다. 그 당시는 후에라도 한 번 보리라 생각했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몇 번 이사 다니느라고 지금 보관되어 있는지조차 잘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부부가 죽고 나면 적어도 아이들에게 있어서는 그 편지가 보입니다. 후에 아들들이나 손자들이 우리 아버지 어머니, 또는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로 편지한 것이다라고 소중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저의 부부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의 제자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전승으로만 충분했기에 기록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사도들이 하나씩 둘씩 죽어가니 급해졌습니다. 드디어 사도 요한만 남게 되자, 그의 제자들이 찾아가서 부탁을 합니다. "이제 선생님마저 가신다면 예수님의 제자는 없습니다. 제발 기록으로 남겨 주십시오" 하고 부탁을 해서 쓴 것이 요한복음입니다. 처음 서론에서 밝혔듯이 요한복음은 마태, 마가, 누가복음이 다 기록된 후 마지막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을 다 읽어보고 그 의미를 해석하려는 의도에서 썼으며, 보충적인 의미가 있고, 변증적인 의미도 있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들어가겠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 31) 이 책에 기록한 것 외에도 표적이 많다고 사도 요한이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행적은 사실 많을 것입니다. 불과 며칠 동안에만 되어진 일도 많을텐데, 3년 동안에 행하신 이적을 일일이 다 쓴다면 정말 많은 분량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이 아닙니다. 무슨 병을 어디서 어떻게 고쳤다고 하는 것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복음서에서는 기적이 40회 이상이나 있지만, 요한복음에서는 특히 7가지 기적만 선발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보더라도 예수님 생애 전부를 기록하려고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복음은 예수님의 행적의 의미를 중시해서 몇 가지만 선발해서 기록했고, 또한 분명한 목적이 있어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목적에 도달하도록 표적으로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면, 요한복음을 기록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본문에 나타난 대로 두 가지의 목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믿게 하고, 또 하나는 생명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첫째, 예수를 믿게 하는 책으로써 예수님이 주인입니다. 신구약 어디를 보나 그리스도가 중심적입니다. 그러므로, 이단의 특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만, 그 중에 제일 표가 나는 것은 예수 중심이 아닙니다. 깊이 들어가 보면, 예수 대신에 자기가 들어가 있습니다. 이단은 성경에서 예수를 보지 못합니다. 성경은 어디까지나 중심이 예수이므로 창세기에서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어디서나 예수를 보아야 합니다. 구약에서는 피비린내 나는 제사 이야기가 많습니다. 특히, 레위기에 있는 피의 제사는 십자가를 설명하는 것인데, 십자가 없이 이 제사를 보면 도살장 이상의 의미를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레위기는 십자가를 설명하는 책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을 중심으로 보되, 어떤 예수님으로 보아야 합니까? 본문에 기록된 대로, 첫째는, 하나님의 아들로 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오신 역사적인 인물인데, 그 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임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가 그리스도임을 믿어야 하는 것입니다. 유대 사람들은 옛부터 목마르게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고 지금도 계속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구약을 보면서 예수님이 오셨다고 믿습니다. 2천년 전에 오신 메시야를 믿는 것입니다. 필자가 쥬스와라는 예수 잘 믿는 유대인을 만났는데, 그 분은 아주 안타까와했습니다. 2천년 전에 분명히 자기 나라에 예수가 오셨는데, 자기 민족들은 아직도 믿지 못하고 죄만 짓는다고 답답해 했습니다. 예수는 그리스도요 메시야임을 설명하는 것이 성경의 주제입니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복음 모두가 예수를 메시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또한, 메시야를 알려면 구약을 읽어야 합니다. 구약에 조명해서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임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가 메시야임을 아는 데 있어서 가장 극적인 장면과 결정적인 인물은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예수님 살아 생전에 직접적으로 말씀을 들어본 일이 없는 사람입니다. 또한, 예수님이 병 고치는 것을 본 일도 없는 사람입니다. 유대 사람으로서 그는 전형적인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다가 다메섹에서 갑자기 주님을 만나 "주여, 뉘시옵니까?"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라는 말씀에서 "네, 알았습니다." 하고 굴복합니다. 저 분이 메시야구나 하고 깨달았을 때, 그의 모든 것은 완전히 뒤바뀌고 말았습니다. 바로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 바울 서신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고, 이방 사람들은 주라고 하며, 헬라 사람들은 로고스라 하며, 히브리 사람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데, 이 모두가 예수가 하나님 됨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다음, 믿게 하려 한다는 말은, 역사적 사건을 신앙 사건으로 바꾸어 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아무리 실제로 있는 사건이라도 믿지 않으면 무효입니다. 가령, 지금 밖에서 홍수가 나서 모두가 대피해야 하는데, 이 사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면 홍수는 나지 않는 것이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에게는 사건이 사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믿을 때만이 사건이 됩니다. 이와 같이 믿는 자만이 그리스도적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구원의 적극적인 표현입니다. 구원이란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하며 생명은 영생에 이르는 것입니다.
영생이라는 말에는 또 한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한 온전한 생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종합적인 의미가 있습니다. 과거만의 구원이나 앞으로 천당가는 미래적인 이야기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도 그리스도 안에서의 온전한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는 것이 영생이다"라고 요한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와 사망에서 옮겼다고 과거사로 말할 때도 있습니다. 영생은 과거적인 의미도 있고 미래적인 의미도 있고, 그리고 현재적인 의미도 있는 것으로 종합적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기 위해서 성경을 봅니다. 그리고, 이것은 생명의 문제입니다. 성경 문제는 곧 내 문제요, 성경이 기록된 것은 곧 내 생명을 위해서 기록된 것입니다. 내 생명을 위해서 기록된 것이므로, 믿어도 되고 믿지 않아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적 생명을 얻지 못하면 이제 동물적 생명만 남습니다. 얼마나 비참합니까? 하나님 형상의 그리스도적 생명은 말씀과 함께 얻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창세기로 돌아가서, 제일 처음 말씀드린 대로 하나님과 우리 인간과의 관계는 말씀을 듣고 받는 대화적 관계로서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의 응답자로 살아야 참 인간입니다. 오늘도 성령과 성경을 통해서 주시는 말씀의 응답자로 살아갈 때에, 비로소 인간이 인간되는 것입니다. 거기에 참 생명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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