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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세상이 미워하는 자(요 15:11-17)

by 【고동엽】 2022.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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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이 미워하는 자(15:11-1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을 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이 본문은 제자들이 핍박받을 것을 염려하시어 예수께서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15:18) 너희들이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인데 그것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핍박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평안하게 믿음 생활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가 되어 그를 믿는다고 하면서 핍박 없이 잘 되기만 하고 평안하기만 바랄 수 있겠습니까? 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주께서 "내가 모든 고난을 당했으니 너희는 평안하기만 하라"고 말씀하신다 해도 우리는 고맙게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를 믿고 그의 제자됨을 자처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바에는 핍박을 각오하고 그렇게 운명지어졌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바르게 살고 진실하며 사랑이 넘치는데, 누가 싫어하며 그 법을 막겠습니까? 하나님의 법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잘 믿으면 이웃은 물론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고난과 핍박은 같은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핍박을 당하는 것이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란 무조건 매를 맞아야 하고, 무조건 억울하게 지내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고난 속에 핍박이 있는 것이지만 핍박과 고난을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2:18 이하에 베드로의 고난에 대한 분석이 있습니다. 사환들에게 준 교훈의 말씀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난의 성격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 죄로 인하여 자기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자기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이므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난이요, 형벌입니다. 자신이 게을러서 가난하게 되었고, 자신의 실수로 불의의 길을 선택했으므로 옥고를 치르게도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을 십자가를 진다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이것은 십자가에 대한 모독입니다. 십자가라는 말을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결혼해서 아이들을 키우고 살아가는 동안 자녀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남편이나 아내가 상대에게 고통을 줄 때 이것도 십자가라고 이야기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므로 핍박이 아닙니다. 자녀를 위해서나 가정 또는 나의 이익을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당한 것은 높은 차원에서 선이 되고 의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사랑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애매한 고난입니다. 누구의 잘못으로 오는 고난이 아니라 무지해서, 즉 지혜가 없어서 오는 고난입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물론 하나님 편에서는 이유가 있겠지만) 말려 들어가는 고난으로, 이것 역시 가치 없는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도 핍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셋째, 믿음으로, 사랑으로 자원적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핍박입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예수를 믿기에 당하는 고난으로, 죄 때문도 아니요 애매한 것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자원적이고 선택적인 신앙간증적인 고난으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차피 고난을 당하고 살아야 한다며 자원적인 고난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로 인하여 미움을 받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진정한 핍박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미움을 당했는데 너희들은 무사하기만 바라느냐? , 나의 제자가 되었으며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을 때가 있을 것임을 미리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내게 주어진 고난이 정말 그리스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냐, 아니면 일반적인 고난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면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혹이라도 나의 잘못이 개입되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내 잘못으로 인하여 온 고난이라면 돌이켜 회개하고 문제 해결을 해야지 고난 당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함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 때문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며 참자는 것입니다. 언젠가 필자의 방송 설교를 듣고 한 아주머니가 찾아오셨습니다. 내용인즉, 예수의 이름 때문에 핍박을 당한다고 하면서 눈물로 하소연을 했습니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합세해서 예수 믿으려면 이 집을 나가라고 매일 구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둘이나 있는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고 의논을 했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예수 믿은 지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3년 정도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대답에서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대화를 나눠보니, 처음 예수 믿을 때는 별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이라면 교회에 첫발을 놓을 때부터 핍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무사하다가 3년이나 된 요즈음에 와서 핍박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동안 교회 생활에 좀 익숙해지자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철야기도다, 심방이다, 전도회다 하며 시어머니 모시는 것을 소홀히 하고 살림이 엉망이니 누가 좋아합니까?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 내가 순수하게 예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냐, 아니면 나의 무지와 잘못으로 오는 것이냐를 구별해야 합니다.

때로는 순교에 있어서도 정치적인 이유인지, 신앙적인 이유인지 엇갈릴 때가 있습니다. 공산당은 신앙인들을 핍박할 때 반드시 다른 이유를 들어서 핍박을 하므로 정말 복음을 위한 순교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경우가 있었습니다. 필자 생각에는 순교적 이유가 아니고서는 고난 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순교할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추호라도 내가 게을러서 욕을 먹었다든지, 내가 불성실하여, 신용을 지키지 못하여 고난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이 정말 순수하게 예수의 이름으로 당하는 것인가를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고난은 외롭지 않은 고통임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예수의 이름으로 핍박을 당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함께 하시고, 보장하시고, 더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먼저 당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롭지 않은 핍박입니다. 내가 처음 당하는 고난이 아니고 예수께서 당하셨고, 또한 믿음의 조상들이 당하셨고, 그리고 내가 당하는 것임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고난에 고독이 합쳐지면 그 고난이 더 무거워진다고 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 고독이라는 문제를 뺄 수만 있다면 고난의 50%는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이 고통을 나만 당하는 것이라 생각할 때 외롭고 어려운 것이지만, 모두가 당하는 중에 나도 끼어 있다라고 생각하면 훨씬 견디기가 쉬운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을 그대로 당한다면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고난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령,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나타나시어 "내가 일찌기 당한 고난을 너희도 당하는구나" 하는 말씀을 듣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주여 감사합니다"라는 말의 외에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예수께서 당한 고난과 비슷한 고난을 당할 수 있다면 그것은 큰 영광입니다.

필자가 미국에서 가서 공부할 때 기숙사에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제가 있던 방이, 옛날 이승만 박사께서 유숙하셨던 방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때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먼저 당하신 고난을 뒤이어 당하게 될 때 주께서 "너는 나와 고난의 동지다"라는 의미로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직도 이 고난이 무겁다고 하겠습니까? 주께서 확증만 주신다면 그것은 고난이 아니라 영광이요 면류관입니다. 주께서 먼저 고난 당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그런 의미에서 이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24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노라"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얼마를 바울 자신이 당하는 것을 즐겁게 생각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도행전 5 : 41에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매를 맞고 나오면서 고난 당하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은 것을 기뻐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매맞는 것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고난 당하고 싶고 순교 당하고 싶다고 해서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야 하는 특권입니다. 대단히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필자에게도 순교할 뻔한 기회가 한 번 있었습니다. 공산군이 총을 쏘려고 "손들어"까지 했는데 웬일인지 쏘지 않아 지금까지 살아있습니다. 순교하고 싶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선물입니다.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면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영광으로 받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옥에서 죽어 순교하게 되니 감격과 기쁨으로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바울이 가졌던 이 감격과 기쁨이 유독 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고난에서 시달릴 때가 있습니까? 사실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이 아니고 나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의 높은 차원의 의미를 내가 미처 모르기 때문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것만 깨닫고 나면,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 귀한 고난을 사양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사양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도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만일 그를 위하여 희생할 마음이 없고 희생 자체가 굴욕을 느끼거나 아까운 생각이 든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어떠한 희생이라도 좋다고 하는 여기에 참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소속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15:19 상반절) 너희가 세상에 있으면서 그리스도께 속했으므로 핍박을 받는다는 소속의 관계입니다. 결국 어디에 있었느냐, 어떤 상황에 있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속이 어디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를 둘러 나누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의 소속이 어디인지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 나라에 속한 자로 이 세상에 살기 때문에 핍박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속은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다섯째로 세상은 교회를 질투합니다.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9 하반절) 빛과 어두움으로 설명하면, 어두움은 빛을 질시합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은 빛 앞에서 말없이 심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여기에 거짓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진실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말이 없어도 거짓된 사람이 모두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많은 게으른 사람 중에 부지런한 사람이 그 속에 끼어 있으면, 부지런한 사람 때문에 게으른 자들이 표시가 납니다. 모두가 게으르면 게으름이 정당화될 수 있지만 부지런한 사람이 있는 한은 게으름은 게으름으로 판정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는 자를 질투하고, 게으른 자는 부지런한 자를 질투하며, 거짓된 자는 진실한 자를 미워합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유는 심판 때문입니다. 소리 없이 조용한 심판이 그 속에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3:9-13, 누가복음 12:2-9에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을 받으리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언제나 죄인은 죄인을 반가워합니다. 좋은 측면에서 보다 부정적인 측면일수록 자기 분류를 더욱 반기는 것입니다. 흔히 모임이나 예배 시간에 참석할 때 시간이 늦으면 미안한 마음으로 뒷자리에 앉아 고개 숙이고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보다 더 늦은 사람이 들어오면 왠지 반갑습니다. 거기다가 늦은 사람이 장로님이면 더 반가운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어쨌든 어두움은 빛을 질시합니다. 그러므로, 밝게 살고 진실하게 살려고 할 때에 이유 없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미움을 받게 됩니다. 특히 선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이질적 존재로서 이방인으로, 별다른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이 있으리라고 예고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할 때나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에 핍박은 당연히 있게 마련입니다. 적당히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핍박이 없습니다.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를 할 때에도 그랬습니다. 신사참배란, 국민의례로서 그 앞에 가서 적당히 고개 숙이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곳도 계신다고 정당화하여 넘어가는 사람에게는 핍박이 없었습니다. 고집스럽게도 죽으면 죽었지 고개를 절대 숙일 수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만 핍박이 있었습니다. 타협적으로 적당히 사는 사람에게 왜 핍박을 하겠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갈 데 없을 경우만 교회에 나오고, 비오는 날이면 놀러 가기 마땅찮으니 교회에 나오는 사람에게 무슨 핍박이 있겠습니까? 핍박은 언제나 곧게 살고 비타협적인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은 계속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로마 정부가 핍박을 할 때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로마 정부에게 충성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로마의 왕, 가이사의 사진을 붙여놓고서는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꼭 김일성 숭배같이 왕을 신이라고 하며 거기에다가 충성을 맹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진에 절을 하면서 적당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핍박을 받지 않았습니다. 랍비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그들을 핍박할 때는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합니다. 어느 한 랍비가 고집스럽게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거부하여 죽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이 하도 딱해서 아무도 몰래 소고기로 바꿔 놓고 조용히 이야기합니다. "이 고기는 소고기이니 저들이 먹으라 할 때에 잡수시오." 이 때 랍비가 대답하기를, "당신의 성의는 대단히 고맙습니다만 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소고기인줄 나는 믿지만 다른 사람들이 돼지고기로 알고 있기 때문에 안 됩니다." 이렇게 깨끗한 충성과 곧은 자세에 핍박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고 그리스도만 왕으로 모시는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충성할 수 있습니까?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많은 분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신사참배라고 해야 나무조각이고 열어 보면 종이장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들이 신으로 섬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한 이유는 비도덕적인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노예제도가 있어 당연히 주인이 있고 노예가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형제요 친구로서 평등하게 지내므로, 그들이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한 것이 죄가 되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상놈과 양반이 어떻게 나누어집니까?

셋째로, 기독교인은 식인종이라고 오해를 했습니다. 성찬식을 할 때 이것은 내 살이요, 피라는 말을 그들이 잘못 이해하여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이라고 핍박을 한 것입니다. 바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비도덕적이요 사람을 잡는 종교라고 해석을 내린 무서운 오해였습니다.

넷째로, 주의 재림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핍박이었습니다. 특히 불로써 이 세상의 마지막을 심판한다고 믿는 것을 이용하여 네로왕이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서는, 기독교인들이 불을 질렀다고 국민들을 선동해서 교인들을 박해하며 네로왕은 그것을 구경한 끔찍한 핍박이었습니다.

세상의 끝을 믿고 주님의 재림을 믿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기독교인들은 가정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가정 파괴자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한 가정에서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남편에게 혹은 부모에게 배반을 해도 예수를 믿어야 했으므로,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들로 오해를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0:34에 보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어머니와 딸, 아비와 아들이 서로 원수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여러 가지 이유로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우리들은 이 고난들이 정말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하는 것인지 일반적인 고난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면 어떠한 고통이나 고난이라도 문제가 아닙니다. 기쁨으로, 영광으로, 특권으로 생각하며 감사하게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예수 앞에 성실할 때 우리의 모든 고난이 승화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조그마한 손해가 있을 때, 우리는 얼마든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 때문에 참으면 이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당하는 핍박입니다. 얼마든지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이론적으로 따질 수 있지만 예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은혜가 됩니다. 애매한 고난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은혜라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남들이 바보라고 어리석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그들이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은혜가 내게 기쁨과 위로가 될 것입니다. 로마서 8 : 17"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세상이 미워하는 자(15:11-1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 내가 너희더러 종이 주인보다 더 크지 못하다 한 말을 기억하라. 사람들이 나를 핍박하였은즉 너희도 핍박할 터이요, 내 말을 지켰을 즉 너희 말도 지킬 터이라. 그러나, 사람들이 내 이름을 인하여 이 모든 일을 너희에게 하리니, 이는 나 보내신 이를 알지 못함이니라."

 

이 본문은 제자들이 핍박받을 것을 염려하시어 예수께서 경고하시는 말씀입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15:18) 너희들이 핍박을 당하게 될 것인데 그것을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핍박이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평안하게 믿음 생활하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처음부터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의 제자가 되어 그를 믿는다고 하면서 핍박 없이 잘 되기만 하고 평안하기만 바랄 수 있겠습니까? 좀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주께서 "내가 모든 고난을 당했으니 너희는 평안하기만 하라"고 말씀하신다 해도 우리는 고맙게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를 믿고 그의 제자됨을 자처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바에는 핍박을 각오하고 그렇게 운명지어졌음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를 잘 믿으면 세상 사람들로부터도 칭찬을 받고 존경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바르게 살고 진실하며 사랑이 넘치는데, 누가 싫어하며 그 법을 막겠습니까? 하나님의 법을 막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잘 믿으면 이웃은 물론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존경을 받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다 그런 것은 아닙니다.

여기서 한 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고난과 핍박은 같은 것이 아니란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핍박을 당하는 것이지 고난을 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란 무조건 매를 맞아야 하고, 무조건 억울하게 지내야만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고난 속에 핍박이 있는 것이지만 핍박과 고난을 같이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베드로전서 2:18 이하에 베드로의 고난에 대한 분석이 있습니다. 사환들에게 준 교훈의 말씀이지만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고난의 성격을 세 가지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첫째, 자기 죄로 인하여 자기가 당하는 고난입니다. 자기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이므로 이것은 어디까지나 고난이요, 형벌입니다. 자신이 게을러서 가난하게 되었고, 자신의 실수로 불의의 길을 선택했으므로 옥고를 치르게도 됩니다. 이렇게 자신의 잘못으로 당하는 고난을 십자가를 진다고 말하면 되겠습니까? 이것은 십자가에 대한 모독입니다. 십자가라는 말을 함부로 남용해서는 안 됩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면, 결혼해서 아이들을 키우고 살아가는 동안 자녀들이 문제를 일으키고 남편이나 아내가 상대에게 고통을 줄 때 이것도 십자가라고 이야기하겠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니므로 핍박이 아닙니다. 자녀를 위해서나 가정 또는 나의 이익을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당한 것은 높은 차원에서 선이 되고 의가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자기 사랑의 일부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애매한 고난입니다. 누구의 잘못으로 오는 고난이 아니라 무지해서, 즉 지혜가 없어서 오는 고난입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물론 하나님 편에서는 이유가 있겠지만) 말려 들어가는 고난으로, 이것 역시 가치 없는 고난입니다. 이런 고난도 핍박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셋째, 믿음으로, 사랑으로 자원적으로 당하는 고난입니다. 이 고난은 핍박입니다. 얼마든지 피할 수 있지만 예수를 믿기에 당하는 고난으로, 죄 때문도 아니요 애매한 것도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자원적이고 선택적인 신앙간증적인 고난으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어차피 고난을 당하고 살아야 한다며 자원적인 고난이 얼마나 가치 있는 것입니까? 그리스도로 인하여 미움을 받고, 그리스도로 인하여 고난을 당하는 것은 진정한 핍박입니다.

본문에서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미움을 당했는데 너희들은 무사하기만 바라느냐? , 나의 제자가 되었으며 당연히 세상으로부터 미움받을 때가 있을 것임을 미리 예고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몇 가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첫째로 내게 주어진 고난이 정말 그리스도로 인하여 당하는 고난이냐, 아니면 일반적인 고난이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면 감사함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조심할 것은 혹이라도 나의 잘못이 개입되지 않았나 하는 점입니다. 내 잘못으로 인하여 온 고난이라면 돌이켜 회개하고 문제 해결을 해야지 고난 당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함의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 때문이라면 즐거운 마음으로 감사하며 참자는 것입니다. 언젠가 필자의 방송 설교를 듣고 한 아주머니가 찾아오셨습니다. 내용인즉, 예수의 이름 때문에 핍박을 당한다고 하면서 눈물로 하소연을 했습니다. 시어머니와 남편이 합세해서 예수 믿으려면 이 집을 나가라고 매일 구박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린아이가 둘이나 있는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으냐고 의논을 했습니다. 저는 그 분에게 예수 믿은 지가 얼마나 되었느냐고 물었더니 3년 정도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대답에서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대화를 나눠보니, 처음 예수 믿을 때는 별로 반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예수 때문이라면 교회에 첫발을 놓을 때부터 핍박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까지 무사하다가 3년이나 된 요즈음에 와서 핍박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동안 교회 생활에 좀 익숙해지자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철야기도다, 심방이다, 전도회다 하며 시어머니 모시는 것을 소홀히 하고 살림이 엉망이니 누가 좋아합니까? 이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정말 내가 순수하게 예수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이냐, 아니면 나의 무지와 잘못으로 오는 것이냐를 구별해야 합니다.

때로는 순교에 있어서도 정치적인 이유인지, 신앙적인 이유인지 엇갈릴 때가 있습니다. 공산당은 신앙인들을 핍박할 때 반드시 다른 이유를 들어서 핍박을 하므로 정말 복음을 위한 순교인지 아닌지, 구별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경우가 있었습니다. 필자 생각에는 순교적 이유가 아니고서는 고난 당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순교할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합니다. 추호라도 내가 게을러서 욕을 먹었다든지, 내가 불성실하여, 신용을 지키지 못하여 고난을 당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내가 당하는 이 고난이 정말 순수하게 예수의 이름으로 당하는 것인가를 자문해 보아야 합니다.

둘째로 제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이 고난은 외롭지 않은 고통임을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면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한 줄을 알라", 예수의 이름으로 핍박을 당한다는 것은 예수께서 함께 하시고, 보장하시고, 더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먼저 당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외롭지 않은 핍박입니다. 내가 처음 당하는 고난이 아니고 예수께서 당하셨고, 또한 믿음의 조상들이 당하셨고, 그리고 내가 당하는 것임을 기억하라는 말입니다. 심리학자들에 의하면 고난에 고독이 합쳐지면 그 고난이 더 무거워진다고 합니다. 고난을 당할 때, 고독이라는 문제를 뺄 수만 있다면 고난의 50%는 제거된다는 것입니다.

사실입니다. 이 고통을 나만 당하는 것이라 생각할 때 외롭고 어려운 것이지만, 모두가 당하는 중에 나도 끼어 있다라고 생각하면 훨씬 견디기가 쉬운 것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예수께서 당하신 고난을 그대로 당한다면 얼마나 멋있는 일입니까? 예수님께서 인정해 주시는 고난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가령,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예수께서 나타나시어 "내가 일찌기 당한 고난을 너희도 당하는구나" 하는 말씀을 듣게 된다면 우리는 무엇이라 대답하겠습니까? "주여 감사합니다"라는 말의 외에 무슨 말을 더 하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예수께서 당한 고난과 비슷한 고난을 당할 수 있다면 그것은 큰 영광입니다.

필자가 미국에서 가서 공부할 때 기숙사에 있었는데 공교롭게도 제가 있던 방이, 옛날 이승만 박사께서 유숙하셨던 방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는 그 때 기분이 무척 좋았습니다. 우리도 주님이 먼저 당하신 고난을 뒤이어 당하게 될 때 주께서 "너는 나와 고난의 동지다"라는 의미로 지금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아직도 이 고난이 무겁다고 하겠습니까? 주께서 확증만 주신다면 그것은 고난이 아니라 영광이요 면류관입니다. 주께서 먼저 고난 당하셨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셋째로, 그런 의미에서 이 고난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지는 특권입니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24에서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에 채우노라"고 그리스도의 고난의 얼마를 바울 자신이 당하는 것을 즐겁게 생각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도 사도행전 5 : 41에 보면, 예수의 이름으로 매를 맞고 나오면서 고난 당하기에 합당한 자로 여김을 받은 것을 기뻐했습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매맞는 것 자체가 큰 축복입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고난 당하고 싶고 순교 당하고 싶다고 해서 기회가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회를 주셔야 하는 특권입니다. 대단히 죄송한 이야기입니다만 필자에게도 순교할 뻔한 기회가 한 번 있었습니다. 공산군이 총을 쏘려고 "손들어"까지 했는데 웬일인지 쏘지 않아 지금까지 살아있습니다. 순교하고 싶다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셔야 하는 선물입니다. 예수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면 적어도 그리스도인의 영광으로 받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빌립보 감옥에서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감옥에서 죽어 순교하게 되니 감격과 기쁨으로 찬송을 부른 것입니다. 바울이 가졌던 이 감격과 기쁨이 유독 그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에 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고난에서 시달릴 때가 있습니까? 사실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이 아니고 나의 잘못으로 인한 고난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당하는 고난의 높은 차원의 의미를 내가 미처 모르기 때문에 시달리는 것입니다. 그것만 깨닫고 나면,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 귀한 고난을 사양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만약, 사양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부족하지만,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도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을 기쁨으로 알고 영광으로 생각하지 않습니까? 만일 그를 위하여 희생할 마음이 없고 희생 자체가 굴욕을 느끼거나 아까운 생각이 든다면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 어떠한 희생이라도 좋다고 하는 여기에 참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넷째로 소속관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세상에 속하였으면 세상이 자기의 것을 사랑할 터이나 너희는 세상에 속한 자가 아니요."(15:19 상반절) 너희가 세상에 있으면서 그리스도께 속했으므로 핍박을 받는다는 소속의 관계입니다. 결국 어디에 있었느냐, 어떤 상황에 있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속이 어디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세상과 교회를 둘러 나누어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의 소속이 어디인지 소속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늘 나라에 속한 자로 이 세상에 살기 때문에 핍박이 있습니다. 우리의 소속은 이 세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겠습니다.

다섯째로 세상은 교회를 질투합니다. "도리어 세상에서 나의 택함을 입은 자인 고로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느니라."(15:19 하반절) 빛과 어두움으로 설명하면, 어두움은 빛을 질시합니다. 왜냐하면, 어두움은 빛 앞에서 말없이 심판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여기에 거짓된 사람들이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진실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말이 없어도 거짓된 사람이 모두 심판을 받게 됩니다. 많은 게으른 사람 중에 부지런한 사람이 그 속에 끼어 있으면, 부지런한 사람 때문에 게으른 자들이 표시가 납니다. 모두가 게으르면 게으름이 정당화될 수 있지만 부지런한 사람이 있는 한은 게으름은 게으름으로 판정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미워하는 자는 사랑하는 자를 질투하고, 게으른 자는 부지런한 자를 질투하며, 거짓된 자는 진실한 자를 미워합니다. 원리가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너희는 이 세상에서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유는 심판 때문입니다. 소리 없이 조용한 심판이 그 속에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가복음 13:9-13, 누가복음 12:2-9에도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에서 미움과 핍박을 받으리라고 예고하셨습니다.

언제나 죄인은 죄인을 반가워합니다. 좋은 측면에서 보다 부정적인 측면일수록 자기 분류를 더욱 반기는 것입니다. 흔히 모임이나 예배 시간에 참석할 때 시간이 늦으면 미안한 마음으로 뒷자리에 앉아 고개 숙이고 가만히 있습니다. 그러다가 자기보다 더 늦은 사람이 들어오면 왠지 반갑습니다. 거기다가 늦은 사람이 장로님이면 더 반가운 것이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어쨌든 어두움은 빛을 질시합니다. 그러므로, 밝게 살고 진실하게 살려고 할 때에 이유 없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미움을 받게 됩니다. 특히 선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이 세상에 사는 동안은 이질적 존재로서 이방인으로, 별다른 사람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핍박이 있으리라고 예고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하여 보냄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깨끗한 그리스도인으로 살고자 할 때나 경건하게 살고자 할 때에 핍박은 당연히 있게 마련입니다. 적당히 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핍박이 없습니다. 일제 시대에 신사참배를 할 때에도 그랬습니다. 신사참배란, 국민의례로서 그 앞에 가서 적당히 고개 숙이고 기도하면 하나님은 그 곳도 계신다고 정당화하여 넘어가는 사람에게는 핍박이 없었습니다. 고집스럽게도 죽으면 죽었지 고개를 절대 숙일 수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만 핍박이 있었습니다. 타협적으로 적당히 사는 사람에게 왜 핍박을 하겠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달에 두 번 정도 갈 데 없을 경우만 교회에 나오고, 비오는 날이면 놀러 가기 마땅찮으니 교회에 나오는 사람에게 무슨 핍박이 있겠습니까? 핍박은 언제나 곧게 살고 비타협적인 사람에게 있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은 계속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로마 정부가 핍박을 할 때에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습니다. 첫째로 로마 정부에게 충성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였습니다. 로마의 왕, 가이사의 사진을 붙여놓고서는 절을 하라는 것입니다. 꼭 김일성 숭배같이 왕을 신이라고 하며 거기에다가 충성을 맹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진에 절을 하면서 적당히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핍박을 받지 않았습니다. 랍비의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으므로 그들을 핍박할 때는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합니다. 어느 한 랍비가 고집스럽게 돼지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거부하여 죽도록 매를 맞았습니다.

그를 지켜보던 사람이 하도 딱해서 아무도 몰래 소고기로 바꿔 놓고 조용히 이야기합니다. "이 고기는 소고기이니 저들이 먹으라 할 때에 잡수시오." 이 때 랍비가 대답하기를, "당신의 성의는 대단히 고맙습니다만 전 먹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소고기인줄 나는 믿지만 다른 사람들이 돼지고기로 알고 있기 때문에 안 됩니다." 이렇게 깨끗한 충성과 곧은 자세에 핍박이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께만 충성하고 그리스도만 왕으로 모시는데, 어찌 다른 사람에게 충성할 수 있습니까?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많은 분들이 희생당했습니다. 신사참배라고 해야 나무조각이고 열어 보면 종이장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면 아무 것도 아닐 수 있지만 그들이 신으로 섬기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둘째, 로마가 기독교를 박해한 이유는 비도덕적인 종교라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노예제도가 있어 당연히 주인이 있고 노예가 있는데, 기독교인들은 모두가 형제요 친구로서 평등하게 지내므로, 그들이 볼 때는 말도 안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랑한 것이 죄가 되어 핍박을 받았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상놈과 양반이 어떻게 나누어집니까?

셋째로, 기독교인은 식인종이라고 오해를 했습니다. 성찬식을 할 때 이것은 내 살이요, 피라는 말을 그들이 잘못 이해하여 사람을 잡아먹는 식인종이라고 핍박을 한 것입니다. 바로 이해하려 하지 않고 자기들 마음대로 비도덕적이요 사람을 잡는 종교라고 해석을 내린 무서운 오해였습니다.

넷째로, 주의 재림을 믿는다는 것에 대한 핍박이었습니다. 특히 불로써 이 세상의 마지막을 심판한다고 믿는 것을 이용하여 네로왕이 불을 질렀습니다. 그리고서는, 기독교인들이 불을 질렀다고 국민들을 선동해서 교인들을 박해하며 네로왕은 그것을 구경한 끔찍한 핍박이었습니다.

세상의 끝을 믿고 주님의 재림을 믿는 것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끝으로, 기독교인들은 가정을 존중히 여기지 않는 가정 파괴자로 핍박을 받았습니다. 한 가정에서 한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면 남편에게 혹은 부모에게 배반을 해도 예수를 믿어야 했으므로, 가정을 파괴하는 사람들로 오해를 한 것입니다. 마태복음 10:34에 보면, 시어머니와 며느리, 어머니와 딸, 아비와 아들이 서로 원수가 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아무튼 그리스도인들은 이렇게 여러 가지 이유로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우리들은 이 고난들이 정말 예수님의 이름으로 당하는 것인지 일반적인 고난인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예수의 이름 때문에 당하는 고난이라면 어떠한 고통이나 고난이라도 문제가 아닙니다. 기쁨으로, 영광으로, 특권으로 생각하며 감사하게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예수 앞에 성실할 때 우리의 모든 고난이 승화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사실 조그마한 손해가 있을 때, 우리는 얼마든지 권리를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의 이름 때문에 참으면 이것은 예수의 이름으로 당하는 핍박입니다. 얼마든지 권리를 주장할 수 있고 이론적으로 따질 수 있지만 예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은혜가 됩니다. 애매한 고난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참으면 은혜라고 베드로가 말했습니다. 남들이 바보라고 어리석다고 말해도 좋습니다. 그들이 알 수 없는 신비로운 은혜가 내게 기쁨과 위로가 될 것입니다. 로마서 8 : 17"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다"고 사도 바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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