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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생명의 약속(요 14:1-6)

by 【고동엽】 2022.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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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약속(14:1-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3장에 이어서 14, 15장 역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들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말했지만, 유언과도 같은 중요한 말씀들입니다. 이 말씀을 끝내신 후에 곧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어 기도하셨고, 기도를 끝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시다 저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이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앞에서 공부한 13장의 배경을 간략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이번 유월절에 예수께서 유대나라 왕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기대를 하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을 것인가 하고 자기들의 서열 문제로 자리다툼까지 하며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소위 세속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서 눈이 어두워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예고하십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일을 말씀하시자, 그들은 몹시 당황하며 근심에 쌓이게 됩니다. 이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씀이 14장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13장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가슴 부풀어 들떠 있다가 14장에 와서는 또 모르면서 근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르고 기뻐했다가 모르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것조차 모르며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아시고 예고하시며 또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그러면, 제자들이 근심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는, 무지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를 져야 하며, 또한 어디로 가시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3년씩이나 따라다녔지만, 지금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전혀 몰랐습니다. 이 무지가 저들을 근심하게 한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을 하나하나 잘 깨달았다면 지금 이 순간은 걱정할 시간이 아닙니다. 오직 몰랐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에서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세속적인 욕망 때문입니다. 3년 동안 정치적인 욕망으로 예수님을 따랐는데, 십자가를 진다, 어디론가 간다는 말씀을 하시니 자기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근심의 절반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 없는 사람은 그만큼 근심도 없습니다. 아픈 것과 근심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대개 아픔으로 오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욕망 때문입니다. 특히, 세속적인 욕망, 자기 중심적인 욕망은 사람 마음에 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들에게 걱정거리가 많습니까? 걱정하며 소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나님께 구하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의 근심이 어디 있는지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세째는, 십자가 때문에 걱정을 합니다. 십자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딘가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고 무서운 고난이 앞에 있음을 어렴풋이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 많은 여자들은 울면서 따라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 십자가는 걱정거리가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앞에 있는 어떤 고통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의로운 죽음, 의로운 희생으로 걱정거리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앞장에서 본 것처럼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는 말씀과 같이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대한 해석입니다.

네째로, 걱정을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어디론가 가신다고 하니 저희들만 남는다는 외로움, 즉 고아와 같이 버림받는 고독감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 : 8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겠다"고 저들의 심정을 아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낯선 거리에서 어머니 손목을 놓았을 때 불안해 하는 그런 종류의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4, 15, 16장에서 계속 너희들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보혜사를 보낼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오히려 너희에게 이익이다. 성령이 보혜사로서 너희를 위로할 것이다라고 걱정하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걱정이란 하나같이 불신앙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귀중한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근심에 대해 해답을 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믿음이란 근심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소원 성취가 해결의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가령, 돈 버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 원하는 만큼 벌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근심이 사라집니까? 오히려 이 돈을 어떻게 잘 지킬까 하고 더욱 걱정이 커지며 오히려 불안까지 겹치는 것입니다. 출세가 소원입니까? 출세하지 못하면 불만이지만 출세하고 나면 불안합니다. 원래 톱(top)이란 떨어질까 하여 불안 초조하기 그지없는 위치입니다. 결국, 소원이란 이루어지기 전에는 불만이고 이루어지고 나면 불안으로써, 근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심의 종류가 바뀔 뿐입니다. 근심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뿐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즉 하나님을 믿는 그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나를 믿으라",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장담하고 보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듯이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자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이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은 하나님이요,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이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시는 하나님이며,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사랑의 하나님이요, 십자가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면 두려운 하나님이지만, 예수를 통하여 바라보면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 없이는 오늘 내가 여기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유일한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세째로, 그 진실한 약속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를 믿으라고 하신 말씀은 약속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배우고 예수님을 배우면서 깨닫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믿어야 합니다. 물론,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 알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깨닫고 믿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러나 다 깨닫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서는 알지 못하면서 믿어야 하고, 납득할 수 없지만 믿어야 한단 말입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내게 말씀하신 그 분을 믿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분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가끔 필자에게 이단 종파에 대해서 왜 이단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설명을 하고 나서 "분명히 이단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그들도 성경 읽고 예수 믿는데 왜 야단이냐?"고 계속 질문을 합니다. 설명해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분께는 할 수 없이 "내 말을 믿으려면 믿고 믿지 않으려면 그만 두시오"라고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그가 목사만큼 이해하려면 목사만큼은 공부해야 하니 어찌합니까? 그러므로, 이해를 하든지, 아니면 목사를 믿고 따라와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믿으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을 다 그런 줄 알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내용을 믿으려고 하지 말고 인격을 믿으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 분을 믿으면 그가 하는 모든 말씀은 다 옳은 것입니다.

옛날 미국 남북 전쟁시에는 어느 장군을 죽이기 위해서 그 장군이 딸에게 한 간첩이 아주 좋은 보석 상자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물론, 보석 상자 안에는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너무 예쁜 상자라 아버지께 자랑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가 주더냐고 물었더니, 지나가던 좋은 아저씨가 주고 갔다고 어린 딸은 대단히 기뻐합니다. 이때, 아버지는 딸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 아느냐?" ", 압니다." "그러면, 그 상자를 갖다 버려라." 영문을 모르는 아이는 이 좋은 것을 왜 버리라고 하시는지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좋은 것을 사 주시지도 않으면서 버리라고 하시니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엄하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아느냐?" ", 압니다." "그러면, 네 손으로 저 멀리 갖다 버려라." 아니는 정말 하고싶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멀리 내다버리고 돌아서는데, 그 상자는 "!" 하고 터졌습니다. 장군의 딸은 아버지를 믿고 인격을 믿었기에 버렸습니다. 내가 다 알고, 다 경험하고, 그리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천당을 가보고 믿겠다고 말합니까? 가보고 알 때는 이미 끝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단 한번의 경험으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내가 알아야 하고 경험해야만 믿겠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아는 것은 알고 납득이 되는 것은 납득하며 깨닫는 것은 깨닫되, 알 수 없어도 믿고 깨닫지 못해도 수락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질 때만이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고 평안해집니다. 특별히 미래적인 것은 내 경험에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만 근심을 몰아내고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미래란 어차피 직면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참 좋은 말씀을 하십니다.(14 : 2) "내 아버지 집"이란 특히 우리 동양 사람들에게는 "하늘나라"보다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 말입니다. 필자는 "천국"이라는 말보다 "천당"이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나라보다 집이란 말의 어감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주로 "하늘나라"라고 표현하는 데, 마태복음에서는 34번이나 "하늘나라"라고 기록했고,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30, 마가복음에서도 "하나님의 나라"16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요한복음에서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한 곳은 두 곳밖에 없습니다.(3) 그 대신 영생 혹은 생명이라는 말이 여러 번 있는데, 용어가 다를 뿐 하늘나라와 같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주권적인 의미가 강하게 표현되고, "영생"이라고 하면 개인적인 혹은 생명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 됩니다.

영생이란 시간을 초월한 것으로 오늘도 예수 안에 사는 것이 영생이요, 죽어서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도 영생으로, 현재를 포함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말합니다. 공간적이거나 영토적인 의미보다 좀더 현재적이요 내적이요 영적이요 개인적이며, 그리고 실존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학설들은 현재를 무시하고 저 앞에 있는 하늘나라만을 중요하게 여기려고 합니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은 현재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오늘 잘 사고 평등하고 번영을 누리며 자유롭게 사는 사회에만 치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도 현재에만 치중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먼 미래만 치중하여 생각하는 부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현재의 하늘나라와 미래의 하늘나라를 동시에 말합니다. , 구체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성경을 대략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공관복음은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고, 요한복음은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주로 강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용어에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같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논리나 변증없이 맑은 거울을 보듯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생생한 진리로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아버지의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예수께서 나이 열 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몰랐습니까?"라고, 찾아 헤매던 부모님들께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때의 아버지의 집은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이며, 오늘 본문에서의 아버지의 집은 미래적이고도 종말적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같은 글자이지만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까? 신학적인 해석이 열쇠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의 아버지의 집은 처소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 공간적인 의미와 시간적인 의미를 동시에 말하며 나아가서는 질적인 의미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서" 예비하겠다고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다라는 말은 십자가를 지고, 부활 승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전제하고 내 아버지의 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이요, 구속사적이요, 십자가 중심적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요, 그리스도가 계신 곳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복잡하게 형이상학적인 용어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간단하게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3하반절)고 간단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천당이 어디냐고 묻지 마십시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당입니다. 그 곳에 우리가 갈 것입니다. 이 이상 이론적으로 경험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믿을 수 없어도 예수님은 믿을 수 있으므로, 그가 하신 말씀이면 무엇이든 믿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평안이 있고 위로가 있습니다.

다음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14:4), 하나님을 믿기에 그 길을 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믿음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알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이때, 도마가 묻습니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도마는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아니, 의심 많은 사람들을 대표해서 질문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예수님 자신이 하나밖에 없는 그 길이요, 그 진리며, 그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어로 표기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I am the way, the truth, the life." , 길과 진리와 생명에 정관사 "the"가 붙어, 하나밖에 없음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영생을 말합니다. , 그리스도가 영생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영생이요,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가는 것이 영생으로, 현재도 미래도 종말론적인 의미로도 그리스도가 영생입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길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곧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다."  

생명의 약속(14:1-6)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한복음 13장에 이어서 14, 15장 역시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들입니다. 그러므로, 앞에서도 말했지만, 유언과도 같은 중요한 말씀들입니다. 이 말씀을 끝내신 후에 곧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시어 기도하셨고, 기도를 끝마치고 산에서 내려오시다 저들에게 체포되어 십자가에 돌아가시게 된 것입니다.

이 본문의 이해를 돕기 위해 앞에서 공부한 13장의 배경을 간략하게 다시 한 번 생각하겠습니다. 제자들은 이번 유월절에 예수께서 유대나라 왕이 될 것이라고 그렇게 기대를 하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예수님의 우편과 좌편에 앉을 것인가 하고 자기들의 서열 문제로 자리다툼까지 하며 시기하고 질투했습니다. 소위 세속적인 욕망으로 가득 차서 눈이 어두워져가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예고하십니다. 십자가에 돌아가실 일을 말씀하시자, 그들은 몹시 당황하며 근심에 쌓이게 됩니다. 이 근심하는 제자들을 위로하는 말씀이 14장에서 시작되는 것입니다. 13장에서는 아무 것도 모르고 가슴 부풀어 들떠 있다가 14장에 와서는 또 모르면서 근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르고 기뻐했다가 모르고 근심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 것조차 모르며 걱정하는 것입니다.

이와 반대로 예수님은 십자가를 아시고 예고하시며 또 그들을 위로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14:1) 그러면, 제자들이 근심하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는, 무지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왜 십자가를 져야 하며, 또한 어디로 가시는지조차 모르고 있었습니다. 3년씩이나 따라다녔지만, 지금 마지막으로 하시는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전혀 몰랐습니다. 이 무지가 저들을 근심하게 한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의 뜻을 하나하나 잘 깨달았다면 지금 이 순간은 걱정할 시간이 아닙니다. 오직 몰랐기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말씀들에서 근심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둘째는, 세속적인 욕망 때문입니다. 3년 동안 정치적인 욕망으로 예수님을 따랐는데, 십자가를 진다, 어디론가 간다는 말씀을 하시니 자기들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감을 느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근심의 절반은 욕심 때문입니다. 욕심 없는 사람은 그만큼 근심도 없습니다. 아픈 것과 근심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고통은 대개 아픔으로 오지만, 정신적인 고통은 욕망 때문입니다. 특히, 세속적인 욕망, 자기 중심적인 욕망은 사람 마음에 심한 정신적인 고통을 가져다줍니다. 우리들에게 걱정거리가 많습니까? 걱정하며 소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나님께 구하기 전에, 먼저 내 마음의 근심이 어디 있는지 무엇 때문에 걱정하는지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세째는, 십자가 때문에 걱정을 합니다. 십자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어딘가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고 무서운 고난이 앞에 있음을 어렴풋이 내다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가실 때, 많은 여자들은 울면서 따라갔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의 자녀를 위하여 울라", 십자가는 걱정거리가 아님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만약, 앞에 있는 어떤 고통에 대해 걱정하고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가 아닙니다.

십자가의 고난은 의로운 죽음, 의로운 희생으로 걱정거리가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앞장에서 본 것처럼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는 말씀과 같이 십자가는 영광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에 대한 해석입니다.

네째로, 걱정을 하는 이유는 예수께서 어디론가 가신다고 하니 저희들만 남는다는 외로움, 즉 고아와 같이 버림받는 고독감 때문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4 : 8에 보면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 두지 아니하겠다"고 저들의 심정을 아시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치 어린 아이가 낯선 거리에서 어머니 손목을 놓았을 때 불안해 하는 그런 종류의 걱정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14, 15, 16장에서 계속 너희들은 결코 외롭지 않을 것이다. 보혜사를 보낼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오히려 너희에게 이익이다. 성령이 보혜사로서 너희를 위로할 것이다라고 걱정하는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걱정이란 하나같이 불신앙적이고 세속적인 것으로, 귀중한 십자가의 길을 이해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이 근심에 대해 해답을 하십니다.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믿음이란 근심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소원 성취가 해결의 길이라고 생각한다면 잘못입니다. 가령, 돈 버는 것이 소원인 사람이 원하는 만큼 벌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근심이 사라집니까? 오히려 이 돈을 어떻게 잘 지킬까 하고 더욱 걱정이 커지며 오히려 불안까지 겹치는 것입니다. 출세가 소원입니까? 출세하지 못하면 불만이지만 출세하고 나면 불안합니다. 원래 톱(top)이란 떨어질까 하여 불안 초조하기 그지없는 위치입니다. 결국, 소원이란 이루어지기 전에는 불만이고 이루어지고 나면 불안으로써, 근심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근심의 종류가 바뀔 뿐입니다. 근심을 제거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믿음뿐입니다.

그러면, 이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첫째, 말씀 그대로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즉 하나님을 믿는 그 마음으로 예수님을 믿으라는 말입니다. "나를 믿으라", 이와 같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 외에는 장담하고 보장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믿듯이 나를 믿으라고 말씀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뿐입니다. 예수를 하나님으로 믿는 자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둘째는,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을 믿으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하나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를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입니까? 아버지 하나님이요, 독생자를 십자가에 못박은 하나님이요, 우리를 용서하신 하나님이요,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헤매시는 하나님이며, 오늘도 계속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으로, 사랑의 하나님이요, 십자가의 하나님입니다. 하나님만 바라보면 두려운 하나님이지만, 예수를 통하여 바라보면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을 바라보면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십자가 없이는 오늘 내가 여기 있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통해서 계시하신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기에 유일한 위로가 있는 것입니다.

세째로, 그 진실한 약속을 믿으라는 것입니다. 나를 믿으라고 하신 말씀은 약속을 믿으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배우고 예수님을 배우면서 깨닫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에 가서는 믿어야 합니다. 물론,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러나 다 알고 믿을 수는 없습니다. 모든 것을 깨닫고 믿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러나 다 깨닫고 믿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순간에서는 알지 못하면서 믿어야 하고, 납득할 수 없지만 믿어야 한단 말입니다.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내게 말씀하신 그 분을 믿기 때문에 믿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분의 인격을 믿는 것입니다. 가끔 필자에게 이단 종파에 대해서 왜 이단이냐고 묻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저는 설명을 하고 나서 "분명히 이단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면, 잘 이해되지 않는 사람은 "그들도 성경 읽고 예수 믿는데 왜 야단이냐?"고 계속 질문을 합니다. 설명해도 이해가 잘 안 되는 분께는 할 수 없이 "내 말을 믿으려면 믿고 믿지 않으려면 그만 두시오"라고 결론을 내려버립니다. 그가 목사만큼 이해하려면 목사만큼은 공부해야 하니 어찌합니까? 그러므로, 이해를 하든지, 아니면 목사를 믿고 따라와야 한단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나를 믿으라"고 하셨으니 우리는 주님이 하시는 모든 말씀을 다 그런 줄 알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내용을 믿으려고 하지 말고 인격을 믿으면 문제는 간단합니다. 그 분을 믿으면 그가 하는 모든 말씀은 다 옳은 것입니다.

옛날 미국 남북 전쟁시에는 어느 장군을 죽이기 위해서 그 장군이 딸에게 한 간첩이 아주 좋은 보석 상자를 선물로 주었습니다. 물론, 보석 상자 안에는 시한폭탄이 들어 있었습니다. 어린 딸은 너무 예쁜 상자라 아버지께 자랑을 했습니다. 아버지는 누가 주더냐고 물었더니, 지나가던 좋은 아저씨가 주고 갔다고 어린 딸은 대단히 기뻐합니다. 이때, 아버지는 딸에게 조용히 말합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 아느냐?" ", 압니다." "그러면, 그 상자를 갖다 버려라." 영문을 모르는 아이는 이 좋은 것을 왜 버리라고 하시는지 엉엉 울었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좋은 것을 사 주시지도 않으면서 버리라고 하시니 원망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다시 엄하게 "내가 너를 사랑하는 것을 아느냐?" ", 압니다." "그러면, 네 손으로 저 멀리 갖다 버려라." 아니는 정말 하고싶지 않았지만, 아버지를 믿기 때문에 멀리 내다버리고 돌아서는데, 그 상자는 "!" 하고 터졌습니다. 장군의 딸은 아버지를 믿고 인격을 믿었기에 버렸습니다. 내가 다 알고, 다 경험하고, 그리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천당을 가보고 믿겠다고 말합니까? 가보고 알 때는 이미 끝난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단 한번의 경험으로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내가 알아야 하고 경험해야만 믿겠다고 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아는 것은 알고 납득이 되는 것은 납득하며 깨닫는 것은 깨닫되, 알 수 없어도 믿고 깨닫지 못해도 수락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그러한 믿음을 가질 때만이 근심에서 벗어날 수 있고 평안해집니다. 특별히 미래적인 것은 내 경험에 들어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만 근심을 몰아내고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미래란 어차피 직면할 수 있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음, 예수님은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참 좋은 말씀을 하십니다.(14 : 2) "내 아버지 집"이란 특히 우리 동양 사람들에게는 "하늘나라"보다 더 친밀하게 느껴지는 말입니다. 필자는 "천국"이라는 말보다 "천당"이라는 말을 더 좋아합니다. 나라보다 집이란 말의 어감이 더 좋기 때문입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주로 "하늘나라"라고 표현하는 데, 마태복음에서는 34번이나 "하늘나라"라고 기록했고, 누가복음에서는 "하나님의 나라"30, 마가복음에서도 "하나님의 나라"16번이나 나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요한복음에서는 정확하게 "하나님의 나라"라고 표현한 곳은 두 곳밖에 없습니다.(3) 그 대신 영생 혹은 생명이라는 말이 여러 번 있는데, 용어가 다를 뿐 하늘나라와 같은 의미로 쓰여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라고 하면 주권적인 의미가 강하게 표현되고, "영생"이라고 하면 개인적인 혹은 생명적인 의미를 표현하는 것이 됩니다.

영생이란 시간을 초월한 것으로 오늘도 예수 안에 사는 것이 영생이요, 죽어서 그리스도 안에 사는 것도 영생으로, 현재를 포함하여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을 말합니다. 공간적이거나 영토적인 의미보다 좀더 현재적이요 내적이요 영적이요 개인적이며, 그리고 실존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학설들은 현재를 무시하고 저 앞에 있는 하늘나라만을 중요하게 여기려고 합니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은 현재만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오늘 잘 사고 평등하고 번영을 누리며 자유롭게 사는 사회에만 치중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를 생각할 때도 현재에만 치중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먼 미래만 치중하여 생각하는 부류가 있단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현재의 하늘나라와 미래의 하늘나라를 동시에 말합니다. , 구체적인 하나님의 나라와 영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동시에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흔히 성경을 대략적으로 보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공관복음은 미래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강조하고, 요한복음은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를 주로 강조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용어에 차이가 있을 뿐, 내용은 같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논리나 변증없이 맑은 거울을 보듯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 생생한 진리로 설명을 합니다. 그래서, 이 본문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아버지의 집"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언젠가 예수께서 나이 열 두 살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내가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몰랐습니까?"라고, 찾아 헤매던 부모님들께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이 때의 아버지의 집은 현재적인 하나님의 나라이며, 오늘 본문에서의 아버지의 집은 미래적이고도 종말적인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같은 글자이지만 의미는 다르지 않습니까? 신학적인 해석이 열쇠가 되고 있습니다.

특히, 이 본문에서의 아버지의 집은 처소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 공간적인 의미와 시간적인 의미를 동시에 말하며 나아가서는 질적인 의미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내가 가서" 예비하겠다고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간다라는 말은 십자가를 지고, 부활 승천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전제하고 내 아버지의 집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중심적이요, 구속사적이요, 십자가 중심적임을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이 다스리는 곳이요, 그리스도가 계신 곳입니다. 본문에서 예수님은 복잡하게 형이상학적인 용어를 쓰지 않으셨습니다. 간단하게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14:3하반절)고 간단명료하게 말씀하십니다. 이제, 천당이 어디냐고 묻지 마십시다. 예수님이 계신 곳이 천당입니다. 그 곳에 우리가 갈 것입니다. 이 이상 이론적으로 경험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나는 믿을 수 없어도 예수님은 믿을 수 있으므로, 그가 하신 말씀이면 무엇이든 믿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평안이 있고 위로가 있습니다.

다음 "내가 가는 곳에 그 길을 너희가 알리라"(14:4), 하나님을 믿기에 그 길을 알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대단히 중요한 구절입니다.

어디로 가시는지 믿음으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만이 알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것입니다.

이때, 도마가 묻습니다. "도마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삽나이까?" 도마는 원래 의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아니, 의심 많은 사람들을 대표해서 질문한 것이라고 보면 되겠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14:6)고 예수님 자신이 하나밖에 없는 그 길이요, 그 진리며, 그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영어로 표기해 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I am the way, the truth, the life." , 길과 진리와 생명에 정관사 "the"가 붙어, 하나밖에 없음을 정확히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 생명은 영생을 말합니다. , 그리스도가 영생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에 영생이요,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가는 것이 영생으로, 현재도 미래도 종말론적인 의미로도 그리스도가 영생입니다. 예수님만이 진리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 길에 들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곧 그 길이요, 그 진리요, 그 생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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