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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새 계명(요 13:31-38)

by 【고동엽】 2022. 10.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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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계명(13:31-38)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지막 성만찬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나누어 본다면, 첫째,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둘째, 성찬 예식을 행하셨으며, 세째, 긴 설교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가 다 중요하지만 마지막으로 하신 이 때의 말씀은 마치 유언과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에 하신 마지막 말씀이므로 생애의 결론이요, 모든 교훈의 결론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지난 3년 동안 일하셨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 동안 역사하신 것을 종합하고, 말씀하신 것을 결론짓는 대단히 소중한 내용인 것입니다.

앞에서도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이 마지막 성만찬에서 가룟 유다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계속 그를 지적하시며 민망히 여기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은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놓아버리셨고, 가룟 유다는 끝내 회개치 않고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가룟 유다의 이 행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가 나간 후에 이제부터는 악의 세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그 시간까지는 완전히 어두움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가룟 유다가 나갔다는 것은 십자가가 곧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십자가 사건이 확정됐고 몇 시간 후면 십자가를 지도록 결정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사랑의 승리입니다.

만일에 예수께서, 태연하게 행동하는 가룟 유다가 어느 순간에라도 눈밖에 나서 참기가 어려워 "이 나쁜놈아" 하고 한 마디 하셨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대단히 죄송한 상상입니다만, 예수님께서 그 때에 혈기를 부리셨거나, 엄하게 책망하셨거나, 스스로 절망하셨다면 사건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가 나갔다는 것은 예수께서 사랑으로 승리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가룟 유다를 불쌍히 여기셨고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한편으로는 십자가가 결정되는 순간이며, 한편으로는 예수께서 승리하시는 순간입니다. 어느 순간이라도 미워했으면 패배한 것입니다. 마치 모세처럼 "이 패역한 놈들아" 하고 소리를 지르면, 그것은 진 것이며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 가룟 유다가 마음에 걸렸지만, 끝까지 절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으시고 사랑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승리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에도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 저들이 모르기 때문입니다"하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승리는 사랑에 있습니다. 끝까지 믿고 끝까지 참으며 소망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다 짐작할 수는 없지만,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간 뒤에는 아마도 마음이 편안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도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면 하나님도 저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13 : 31-32), 가룟 유다가 나간 후에, 지금 영광을 얻었다, 즉 이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십자가는 결정되었고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자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승리로 영광을 얻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미하는 영광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함께 있어지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광을 십자가를 회피하거나 십자가가 없는 가운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눈앞에 있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본인에게는 물론, 하나님께도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나에게 이롭게 한 일로서는 영광이 없습니다. 영광이란 말을 바꾸어서 칭찬이라고 표현하면, 더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칭찬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은 어떤 분입니까?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산 사람들에게는 칭찬이 돌아가는 법이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산 사람에게 누가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다소라도 자기 희생이 있고서야 칭찬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자기 희생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가 문을 차고 나간 뒤에,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끝까지 사랑함으로, 즉 사랑으로 승리했을 때 영광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만이 아는 신비로운 영광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를 인하여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영광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영광에 대해 흔히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성공하고 잘 살아야만 하나님께 영광 돌아간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단 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참 영광은 십자가가 있는 자기 희생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적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2 : 23에서도 이미 보았듯이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할 때에 만나지 않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십자가를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생각하시며 영광을 말씀했고, 십자가를 통해서만 영광이 돌아간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 생활은 어떠합니까? 내 앞에 십자가가 나타나면 팔자타령부터 합니다. 내게 희생이 오면 마치 저주받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내게 있어지는 희생 속에서 영광을 깨닫고 나아가서는 하나님께로 영광이 돌아감을 알아야겠습니다.

다음,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 : 34) 이 말씀은 새 계명인 동시에 낡은 계명이기도 합니다. .구약을 막론하고 이 계명은 아주 중요한 계명입니다. 계명이란 하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이유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명령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에게로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계명은 약속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축복을 받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라는 말씀은 대단히 적극적인 말씀입니다. 구약으로 돌아가서 십계명을 한 번 생각하겠습니다. 십계명에는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 계명과 오늘 사랑하라는 계명은 똑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의 근본을 살펴보면, 사랑하라는 말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살인하려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살인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내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법을 지키면 내 생명은 보존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간음하지 말라는 법을 모든 사람들이 지킨다면, 우리의 딸들이 얼마나 편안하게 보호되겠습니까? 순결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의 사유 재산을 지켜 주시기 위해서이며,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의 인격을 지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 구약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고 부정적으로 사랑을 말씀하고 있고, 신약은 긍정적으로 사랑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계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계명은 같은 계명인데, 사랑 자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 그리스도적 사랑인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바로 여기에라는 말이 붙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리스도가 왕국으로 계시는 그 하늘과 그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라는 말의 의미는 시간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적 사랑, 그리스도적 계명이 새롭다는 뜻입니다. 새롭다고 할 때, 흔히 우리는 시간적으로나 형태적으로만 생각을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현상적인 또는 제도적인 의미가 아니라 질적인 의미에서의 새로움입니다. , 그리스도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며, 이것은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사랑을 넷으로 나누는데,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와 이성 간의 사랑인 에로스, 또는 친구간의 사랑인 필리아,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 즉 혈족의 사랑인 스톨게입니다. 이 중에 아가페의 사랑은 독특한 의미로 성서에서만 사용됩니다. 아가페의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리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외에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을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우리도 서로서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만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개념이 구원을 받았고 사랑의 질이 중생한 것입니다. 이 사랑은 창의적이요 독창적인 성경의 용어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은 바로 그 사랑을 너희가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을 사랑하신 사랑이요, 배반자를 사랑하신 사랑이며, 의로운 사랑이며, 공의로운 사랑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사랑을 너희가 하라는 것은 굉장한 말씀입니다. 이 사랑은 낙심이 있을 수 없고, 중단이 없으며, 실패가 없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사랑은 항상 십자가적인 구속함을 받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이 사랑을 하면 세상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대단히 뜻깊은 말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을 닮은 사랑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랑과 미움에는 동화성이 있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사랑할 마음이 생기고, 미움을 받으면 미워할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고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움받고 미워하기는 쉬운데, 사랑 받고 사랑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이 말은 사랑은 능력을 동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 자체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에는 반드시 사랑의 응답이 있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닮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닮으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적 자세로서, 우리는 그 사랑을 피차 나누어야 합니다. 그 응답이 없다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표시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을 보면,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방언을 하고, 은혜에 넘칠 때에 내 것과 네 것을 가리지 않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닙니까? 아직도 미워하고, 정욕에 매어 있다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알아볼 때, 장식으로 달고 있는 십자가로 구별하겠습니까? 얼마나 사랑을 베푸느냐에 구별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 말 없어도 내가 가진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인 됨의 표식입니다. 필자가 잘 아는 어느 성도가 조그마한 개척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녁예배에 참석했다가 목사님으로부터 그 교회 교인들의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 이야기를 듣고 감동이 되어서,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돈을 털어서 목사님께 드렸답니다. 목사님은, 곧 제일 가난한 사람에게 전했는데, 마침 그 집에는 그 날의 끼니조차 없었던 터였습니다. 구차한 살림에 찌들린 남편은 아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핍박을 했었는데, 그 도움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교회에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별 생각 없이 베푼 일이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한 심령을 구원한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리스도적인 사랑이 사람을 구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식으로 사랑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표시할 것이 없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6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을 때, 예수님은 이상한 대답을 하십니다.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지금은 따를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안타까운 베드로는 다시 여쭙기를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라고 생명까지 걸며 주를 따르겠다고 장담을 합니다. 이 정도면 장하다고 예수님께서 칭찬을 하실 만도 한데, 지금은 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예수께서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베드로입니다. 바로 내일 십자가를 지시겠는데, 그 사건조차 모르고 있는 그가 어찌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 고난의 메시야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무식한 용기는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며, 고집입니다. 알고, 그리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아무 것도 모르면서 죽어도 따르겠다는 베드로에게, 지금은 따라올 수가 없음을 예수님은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십자가와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는 뜻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둘째 이유는, 자기 부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 가정도 일터도 버렸습니다. 그러나, 목숨은 버리지 못했고 자기 명예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 자기 부정,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에 부족했습니다.

좀더 낮아져야 했고, 좀더 겸손해야 했습니다. 세째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했습니다. 아직 여기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후에 따를 것이다라고 의미 깊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 잠깐 동안은 따를 수 없지만, 후에 십자가를 알게 되고, 자기 부정과 겸손이 있고, 그리고 성령 충만해지면 나를 따를 것이다라고, 즉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나를 위해 죽을 것임을 시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지금 결심을 하고 헌신도 합니다. 이만하면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나이다 라고 우리가 말했을 때, 주님께서 "너라면 이제 충분하다"라고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멀었다고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신앙 수준이 어디까지 온 것입니까? 베드로는 아무 의미도 모르면서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꾸짖지 않으시고 지금은 안 되지만 언젠가는 따를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제자를 믿어 주셨으면, 얼마나 사랑하신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랑이 무엇이며, 새 계명이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보았습니다. 이제 참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새 계명(13:31-38)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으면 하나님도 자기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 곧 주시리라. 소자들아, 내가 아직 잠시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을 터이나, 그러나 일찍 내가 유대인들에게 너희는 나의 가는 곳에 올 수 없다고 말한 것과 같이 지금 너희에게도 이르노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네가 나를 위하여 네 목숨을 버리겠느냐?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마지막 성만찬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일을 나누어 본다면, 첫째,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고, 둘째, 성찬 예식을 행하셨으며, 세째, 긴 설교를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모두가 다 중요하지만 마지막으로 하신 이 때의 말씀은 마치 유언과도 같은 성격을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에 하신 마지막 말씀이므로 생애의 결론이요, 모든 교훈의 결론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바로 이 시간을 위해서 지난 3년 동안 일하셨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그 동안 역사하신 것을 종합하고, 말씀하신 것을 결론짓는 대단히 소중한 내용인 것입니다.

앞에서도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이 마지막 성만찬에서 가룟 유다가 마음에 걸렸습니다. 그래서, 계속 그를 지적하시며 민망히 여기시고, 회개할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결론은 "네가 하고자 하는 일을 속히 하라"고 놓아버리셨고, 가룟 유다는 끝내 회개치 않고 문을 박차고 나갔습니다.

가룟 유다의 이 행위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다른 복음서에서는 그가 나간 후에 이제부터는 악의 세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부활하시는 그 시간까지는 완전히 어두움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가룟 유다가 나갔다는 것은 십자가가 곧 다가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 십자가 사건이 확정됐고 몇 시간 후면 십자가를 지도록 결정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그를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다르게 표현하면, 사랑의 승리입니다.

만일에 예수께서, 태연하게 행동하는 가룟 유다가 어느 순간에라도 눈밖에 나서 참기가 어려워 "이 나쁜놈아" 하고 한 마디 하셨다면 어찌되었겠습니까? 대단히 죄송한 상상입니다만, 예수님께서 그 때에 혈기를 부리셨거나, 엄하게 책망하셨거나, 스스로 절망하셨다면 사건은 달라졌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가 나갔다는 것은 예수께서 사랑으로 승리하셨음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끝까지 가룟 유다를 불쌍히 여기셨고 사랑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한편으로는 십자가가 결정되는 순간이며, 한편으로는 예수께서 승리하시는 순간입니다. 어느 순간이라도 미워했으면 패배한 것입니다. 마치 모세처럼 "이 패역한 놈들아" 하고 소리를 지르면, 그것은 진 것이며 실패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계속 가룟 유다가 마음에 걸렸지만, 끝까지 절망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으시고 사랑하심으로 승리하셨습니다. 승리란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시는 순간에도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소서. 저들이 모르기 때문입니다"하고 기도를 하셨습니다. 이것이 승리입니다. 승리는 사랑에 있습니다. 끝까지 믿고 끝까지 참으며 소망을 두셨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다 짐작할 수는 없지만, 가룟 유다가 밖으로 나간 뒤에는 아마도 마음이 편안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도 "저가 나간 후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지금 인자가 영광을 얻었고 하나님도 인자를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도다. 만일 하나님이 저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다면 하나님도 저로 인하여 저에게 영광을 주시리니"(13 : 31-32), 가룟 유다가 나간 후에, 지금 영광을 얻었다, 즉 이겼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제 십자가는 결정되었고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자로 인하여 영광을 얻으셨습니다. 승리로 영광을 얻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의미하는 영광의 개념은 무엇입니까? 십자가와 함께 있어지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영광을 십자가를 회피하거나 십자가가 없는 가운데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눈앞에 있는 십자가를 지심으로써 본인에게는 물론, 하나님께도 영광이 돌아가는 것입니다. 언제나 나에게 이롭게 한 일로서는 영광이 없습니다. 영광이란 말을 바꾸어서 칭찬이라고 표현하면, 더 쉽게 이해되리라 생각합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칭찬하고 존경하는 사람들은 어떤 분입니까? 자기 이익을 위해서 산 사람들에게는 칭찬이 돌아가는 법이 없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산 사람에게 누가 영광을 돌리겠습니까? 다소라도 자기 희생이 있고서야 칭찬이 얻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도 자기 희생을 택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가룟 유다가 문을 차고 나간 뒤에, 인자가 영광을 얻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끝까지 사랑함으로, 즉 사랑으로 승리했을 때 영광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만이 아는 신비로운 영광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인자를 인하여 하나님도 영광을 받으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영광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잘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영광에 대해 흔히 오해를 하고 있습니다. 내가 성공하고 잘 살아야만 하나님께 영광 돌아간다고 잘못 생각하고 있단 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참 영광은 십자가가 있는 자기 희생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적 영광입니다.

요한복음 12 : 23에서도 이미 보았듯이 헬라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나려고 할 때에 만나지 않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고 십자가를 말씀하십니다. 언제나 예수님은 십자가를 생각하시며 영광을 말씀했고, 십자가를 통해서만 영광이 돌아간다고 생각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 생활은 어떠합니까? 내 앞에 십자가가 나타나면 팔자타령부터 합니다. 내게 희생이 오면 마치 저주받은 것처럼 생각합니다. 이제부터는 내게 있어지는 희생 속에서 영광을 깨닫고 나아가서는 하나님께로 영광이 돌아감을 알아야겠습니다.

다음, 예수님께서는 대단히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13 : 34) 이 말씀은 새 계명인 동시에 낡은 계명이기도 합니다. .구약을 막론하고 이 계명은 아주 중요한 계명입니다. 계명이란 하나의 명령입니다. 그러므로, 이유 없이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므로 명령을 주셨습니다. 우리들에게로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계명은 약속을 동반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지 못하면 축복을 받을 수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새 계명을 너희에게 준다"라는 말씀은 대단히 적극적인 말씀입니다. 구약으로 돌아가서 십계명을 한 번 생각하겠습니다. 십계명에는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 하지 말라"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이 계명과 오늘 사랑하라는 계명은 똑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말의 근본을 살펴보면, 사랑하라는 말과 같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말씀에서, 우리가 살인하려고 하는 입장에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살인당하는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내 생명을 보호하기 위한 것입니다.

, 나를 죽이려고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가 살인하지 말라고 하는 법을 지키면 내 생명은 보존되는 것입니다. 생명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간음하지 말라는 법을 모든 사람들이 지킨다면, 우리의 딸들이 얼마나 편안하게 보호되겠습니까? 순결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도적질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의 사유 재산을 지켜 주시기 위해서이며, 거짓 증거 하지 말라는 계명은 우리의 인격을 지켜 주시기 위함입니다. , 구약은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고 부정적으로 사랑을 말씀하고 있고, 신약은 긍정적으로 사랑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새 계명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계명은 같은 계명인데, 사랑 자체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 그리스도적 사랑인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바로 여기에라는 말이 붙는 것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그리스도가 왕국으로 계시는 그 하늘과 그 땅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기서라는 말의 의미는 시간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적 사랑, 그리스도적 계명이 새롭다는 뜻입니다. 새롭다고 할 때, 흔히 우리는 시간적으로나 형태적으로만 생각을 하는데, 여기서는 그런 현상적인 또는 제도적인 의미가 아니라 질적인 의미에서의 새로움입니다. , 그리스도적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시며, 이것은 새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헬라 사람들은 사랑을 넷으로 나누는데, 하나님의 사랑인 아가페와 이성 간의 사랑인 에로스, 또는 친구간의 사랑인 필리아, 그리고 부모와 자식 간, 즉 혈족의 사랑인 스톨게입니다. 이 중에 아가페의 사랑은 독특한 의미로 성서에서만 사용됩니다. 아가페의 사랑에 대해 정의를 내리라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그 사랑 외에는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랑을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신 것입니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랑을 우리도 서로서로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 사랑으로만이 구원을 받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랑의 개념이 구원을 받았고 사랑의 질이 중생한 것입니다. 이 사랑은 창의적이요 독창적인 성경의 용어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은 바로 그 사랑을 너희가 나누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죄인을 사랑하신 사랑이요, 배반자를 사랑하신 사랑이며, 의로운 사랑이며, 공의로운 사랑으로, 십자가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이 사랑을 너희가 하라는 것은 굉장한 말씀입니다. 이 사랑은 낙심이 있을 수 없고, 중단이 없으며, 실패가 없는 사랑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사랑은 항상 십자가적인 구속함을 받은 사랑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이 사랑을 하면 세상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대단히 뜻깊은 말씀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하지 아니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란 예수님을 닮은 사랑을 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사랑과 미움에는 동화성이 있습니다. 사랑을 받으면 사랑할 마음이 생기고, 미움을 받으면 미워할 마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고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미움받고 미워하기는 쉬운데, 사랑 받고 사랑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이 말은 사랑은 능력을 동반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랑 자체가 능력입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사랑에는 반드시 사랑의 응답이 있는 것입니다. 제자는 스승을 닮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당신을 닮으시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사랑에 대한 응답적 자세로서, 우리는 그 사랑을 피차 나누어야 합니다. 그 응답이 없다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다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표시입니다. 초대교회 사람들을 보면, 성령이 충만한 가운데 방언을 하고, 은혜에 넘칠 때에 내 것과 네 것을 가리지 않고,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이 아닙니까? 아직도 미워하고, 정욕에 매어 있다면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제자가 아닙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알아볼 때, 장식으로 달고 있는 십자가로 구별하겠습니까? 얼마나 사랑을 베푸느냐에 구별이 있는 것입니다. 아무 말 없어도 내가 가진 사랑이, 바로 그리스도인 됨의 표식입니다. 필자가 잘 아는 어느 성도가 조그마한 개척교회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저녁예배에 참석했다가 목사님으로부터 그 교회 교인들의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 이야기를 듣고 감동이 되어서,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돈을 털어서 목사님께 드렸답니다. 목사님은, 곧 제일 가난한 사람에게 전했는데, 마침 그 집에는 그 날의 끼니조차 없었던 터였습니다. 구차한 살림에 찌들린 남편은 아내가 교회에 다닌다고 핍박을 했었는데, 그 도움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교회에 나왔다는 이야기입니다. 별 생각 없이 베푼 일이었지만, 성령의 감동으로 한 심령을 구원한 것입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리스도적인 사랑이 사람을 구원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표식으로 사랑 이외에는 그 어떤 것도 표시할 것이 없습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36절에 보면,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하고 물을 때, 예수님은 이상한 대답을 하십니다. "나의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으나 후에는 따라오리라." 지금은 따를 수가 없다고 하십니다. 안타까운 베드로는 다시 여쭙기를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를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라고 생명까지 걸며 주를 따르겠다고 장담을 합니다. 이 정도면 장하다고 예수님께서 칭찬을 하실 만도 한데, 지금은 할 수 없음을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따른다고 말하면서도 지금 예수께서 어디로 가는지조차 모르는 베드로입니다. 바로 내일 십자가를 지시겠는데, 그 사건조차 모르고 있는 그가 어찌 예수님을 따르겠습니까? , 고난의 메시야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무식한 용기는 용기가 아니라 만용이며, 고집입니다. 알고, 그리고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지금 아무 것도 모르면서 죽어도 따르겠다는 베드로에게, 지금은 따라올 수가 없음을 예수님은 알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십자가와 고난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게 될 것이고, 그러면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자는 뜻인 것 같습니다. 예수님을 따를 수 없는 둘째 이유는, 자기 부정이 없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위해 가정도 일터도 버렸습니다. 그러나, 목숨은 버리지 못했고 자기 명예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 자기 부정, 자기 십자가를 지는 것에 부족했습니다.

좀더 낮아져야 했고, 좀더 겸손해야 했습니다. 세째는,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했습니다. 아직 여기까지 미치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후에 따를 것이다라고 의미 깊은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지금 잠깐 동안은 따를 수 없지만, 후에 십자가를 알게 되고, 자기 부정과 겸손이 있고, 그리고 성령 충만해지면 나를 따를 것이다라고, 즉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나를 위해 죽을 것임을 시사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들도 지금 결심을 하고 헌신도 합니다. 이만하면 예수님을 따를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의 뒤를 따르겠나이다 라고 우리가 말했을 때, 주님께서 "너라면 이제 충분하다"라고 대답해 주시겠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멀었다고 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신앙 수준이 어디까지 온 것입니까? 베드로는 아무 의미도 모르면서 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꾸짖지 않으시고 지금은 안 되지만 언젠가는 따를 것임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제자를 믿어 주셨으면, 얼마나 사랑하신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믿음입니다. 지금 우리는 사랑이 무엇이며, 새 계명이 무엇인가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따른 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보았습니다. 이제 참 주님의 제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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