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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반석 위에 지은 집(마 7:24~29)

by 【고동엽】 2022. 10. 28.
목차

 

반석 위에 지은 집(7:2429)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이제 산상보훈의 마지막으로 비유법을 들어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예수님의 긴 교훈에 대해서 집짓는 자를 들어 비유하시며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로 나누어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를 실제적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잠언 10:25에 보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집의 기초에 대해 잠깐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 회오리 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흔들리지 않는 기초이므로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의인이냐 악인이냐는 상관없이 다만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는 영원하다라고 대단히 비약적이고 초월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의 도덕률을 초월한 것으로 그가 얼마나 불의하냐 의로우냐가 아니라 반석 위에 집을 짓기만 하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해 혹자는 너무 독선적이다 라고 몰아붙이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는 의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외에는 다른 가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 : 10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좀더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 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이라"(고전 4:10-13) 이 내용과 예수님의 말씀은 서로 중점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다른 것을 관계없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는 지혜롭다고 기초에 중점을 두었고 바울은 기초 위에 무엇을 세우느냐, 즉 건축 재료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각 사람의 공력을 불로 시험할 때 풀이나 짚이나 나무는 타버릴 것이고 금과 은과 보석은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어찌 보면 바울의 말씀이 보다 발전적인 듯한 인상을 줍니다만 사실은 예수님 말씀이 더 근본적이고 완벽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오직 기초만 바로 되어 있으면 그 위에 세우는 집은 터가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혹 나무로 집을 지었다 해도 터가 반석이기만 하면 비바람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돌로 지은 집이면 더욱 좋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터가 그 집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집을 지을 때는 나무나 돌이나 콘크리트 등 여러 가지로 지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집은 집 나름대로 각각 쓸모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일 문제는 기초가 잘 되어야 합니다. 기초가 잘못 되면 그 위에 제아무리 좋은 재료를 사용해도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만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은 기초가 불실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기초가 흔들리면 그 위에 것은 무효입니다. 아니 좀더 확실하게 이야기하면 흔들리는 기초 위에서는 높은 집일수록 문제는 더 커지는 것입니다. 만약 와우 아파트의 기초 위에 단층집을 지었다면 피해는 훨씬 적었을 것이지만 고층 아파트였기 때문에 더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사람의 인격에도 고층이 있고 단층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별로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무너져도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하나 망하거나 자기 집안 정도에서 손해가 끝납니다. 그러나 돈 많고 출세한 사람중에 인격의 기초가 잘못되어 와르르 무너지면 수백명 아니 수천명에게 피해가 갑니다. 가령 한 나라의 지도자가 잘못되면 그 바람은 국가뿐 아니라 전 세계까지 파급되지 않습니까? 한 사람의 문제가 온 세계를 흔들리게 한단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 없는 교육은 약삭빠른 악마를 생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지혜는 기초가 잘못 되어 있으므로 무너지기 시작하면 크게 무너져서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은 기초 위에 높은 집이냐 낮은 집이냐를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돌집이냐 나무 집이냐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기초만이 반석 위에 있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팔레스타인 부근은 원래 사막입니다. 그러니까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커다란 바위와 모래 속에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바위를 깍아서 기초를 하자니 장비도 없는 그 당시 상황에서는 대단히 힘이 들어 쉬운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바위와 바위 사이는 모래가 메워져서 바위처럼 된 골짜기가 있는데 여기에는 집을 쉽게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겨울이 우기이므로 비가 오고 창수가 나면 이 집은 떠내려간다고 합니다. 목수이신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시므로 집은 어떤 기초 위에 있어야 하는가를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기초인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기초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예수 그리스도다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본문의 문맥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즉 그 분의 말씀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말씀 위에 세우는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집 짓는 자가 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자이고 또 하나는 듣지 않는 자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세상 사람들을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두 가지로만 나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의 인격의 기초를 어디에다 세울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 위에 인격을 세워 집을 지으면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좋은 집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집을 짓는다는 뜻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반석 위에 짓는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함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듣는다'는 것과 '행한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들음으로써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잠언에서 "교만은 멸망의 앞잡이"라고 했듯이 교만한 마음은 귀를 멀게 합니다. 벙어리의 대부분이 듣지 못해서 말을 배우지 못한 것처럼 교만은 마음의 귀를 닫아 버립니다. 말할 수 있는 입이 있어 그 기능에 아무 이상이 없어도 듣지 못하면 배울 수 없게 되고, 입은 있으나마나 합니다. 그러고 보면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듣지 못하면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듣고 기억하고 소화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리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교만한 자는 결코 들려지지 않습니다.

또한 듣는 데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듣기는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꼬여서 듣고, 필요한 대로 감하기도 하고 보태어서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미 들려진 소리가 있다면 그 위에 새 진리가 그대로 들려지기란 어렵습니다. 음식을 담을 때 이미 그 그릇에 더러운 것이 가득 담겨 있으면 새 음식은 담겨지지도 않을 뿐더러, 설사 들어간다 해도 변질되어 버립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지려면 우선 순결한 믿음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듣는다고 해서 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들을려고 하면 졸음이 오고 다른 생각들이 몰려와 애를 써도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올 때는 각오도 하고 마음도 고쳐먹지만 정작 앉아서는 이런저런 생각이 가득해서 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말씀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져서 나의 힘이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또한 들려져도 마음속에서 변명과 저항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설교를 들은 후에 어떤 분은 "목사님, 어떻게 제 이야기만 하십니까?" 하며 자기에게 꼭 맞는 이야기라고 감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 모두가 내게 향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자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귀없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들을 귀가 없는 자는 분명히 있습니다.

산상보훈의 결론에서 첫째가 들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들은 것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고 행해야만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모래 위에 지은 자입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듣고 행하여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지었다는 것은 튼튼하고 확고하다는 말입니다. 즉 그 진리성이 확고해진다는 뜻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면, 듣고 행함으로 그 진리가 확실해진다는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듣고도 행하지 않으면 그 들은 바 지식이 잊혀집니다. 건망증이란 듣기만 하는 데서 오는 것으로, 즉각 행동하고 나면 잊혀지지 않습니다. 가끔 성도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격하여 누군가에게 전하려고 할 때, 생각이 나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듣기만 하면 한쪽 귀로 들었다가 또 한쪽 귀로 흘려 버립니다. 그러나 들은 말씀을 즉각 실행하면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필자의 경우, 건망증에 대해서 이미 소문이 났습니다. 요즈음은 책을 읽어도 잘 남아있지 않고 들은 이야기는 더욱 더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번 가르친 것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하루에 평균 3시간 내지 7시간까지 가르치는 일을 하는데 가르친 내용은 남아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두 번 배우는 것과 같다는 말이 이래서 나온 것인가 봅니다. 아무튼 내가 배운 진리를 실천하면, 실천하는 그 순간에 진리를 완전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 진리는 내 것이 됩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론적으로 생각하고 따지면 복잡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받아들여 한번 사랑해 보면 원수 사랑의 진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된다 안 된다고 논리적으로 풀지 말고, 단순하게 그대로 실천해 보자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하신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즉각 실천하라고 호통을 치셨답니다. 지난날에 실천하지 못했다고 후회하지 말고, 앞으로 행하겠다고 미루지도 말고, 들은 대로 지금 바로 각자가 가진 것으로 실천하라고 설교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한 할머니는 바로 안구은행으로 갔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 봉사하라 하셨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있던 돈은 다 낭비했고 앞으로 살날은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아 한 쪽 눈을 기증하리라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의아해 하는 의사에게, "이 나이에 멀쩡한 눈, 두 개 가지고 뭘 하겠소. 필요한 젊은이에게 주고 싶구만" 하며 조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일이 잘된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목사님의 설교는 성공이었다는 생각입니다. 확고한 진리에 들어가고 싶습니까? 반석 위에 영원한 집을 세우고 싶습니까? 너무 많이 배우려고 이리저리 방황하지 말고, 깨달은 것 한 가지씩만 실천하십시다. 주신 말씀대로 즉각 실천하면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자가 될 것이며, 영원한 진리를 소유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집이 완성된 후로는 그 반석이 집을 책임지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순종하게 한 자가 책임을 진다는 말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위탁입니다. 나는 지혜롭지 못하므로 지혜로운 자에게 순종하고, 전적으로 위탁하면 그의 지혜가 곧 나의 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자의 역사를 순종하고 따라가면 내가 능력 있는 자가 됩니다. 그 분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면 그 말씀이 곧 내 것이 됩니다. 즉 그 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다는 뜻입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합쳐질 때 놀랍게도 그의 말씀이 내 능력이 되고 그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는 역사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정리하면, 예수님은 집의 재료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높이 짓거나 낮게 짓는 것도 상관치 않으셨습니다. 단 기초만은 반석 위에 즉 말씀 위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나무 집은 나무 집대로 유효할 것이고 돌집은 돌집대로 유효할 것입니다.

없는 자는 없는 대로 있는 자는 있는 대로 각자의 분수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지식이 많습니까? 그가 가진 지식 위에 신앙이 보태지면 그 지식은 극대화 될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 자체가 지혜는 아닙니다. 그가 가진 지혜를 가장 효과 있게 능률적으로 발휘되도록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기초되어야만 지혜가 지혜 되고 돈이 돈 되며 능력이 능력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반석 위에 세우지 않는 자는 무엇을 가졌든지 무효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는 8장에서 여기에 대한 두 가지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문둥병 환자의 이야기입니다. (8:1-4)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 즉 주님 앞에 나아와서 병이 깨끗함을 받습니다. 또 하나는 유명한 백부장의 이야기입니다.(8:5-13)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서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간구하니 예수님은 직접 가시어 고쳐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 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대단한 믿음을 보입니다. 이것은 준비된 순종입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겠으니 말씀만 하시라고 즉각적으로 순종할 태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높이 칭찬하셨습니다.

지금 나의 믿음은 어느 정도입니까? 이롭다고 생각될 때만 순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슬그머니 빠져 나오는 기회주의자는 아닙니까? 누군가가 말하기를 신앙이란 백지에다 도장을 찍으라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백지에다 먼저 인감도장을 찍어주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뭐라고 쓰시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적인 위탁이 있을 때 비로소 그의 말씀이 내 것이 되고 그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만이 지혜로운 자임을 거듭 명심하기 바랍니다.  

반석 위에 지은 집(7:2429)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예수께서 이 말씀을 마치시매 무리들이 그 가르치심에 놀래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

 

이제 산상보훈의 마지막으로 비유법을 들어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말씀하신 예수님의 긴 교훈에 대해서 집짓는 자를 들어 비유하시며 지혜로운 자와 어리석은 자로 나누어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인가를 실제적으로 설명하신 것입니다.

구약성경의 잠언 10:25에 보면 오늘 본문에서 말하는 집의 기초에 대해 잠깐 언급한 바가 있습니다. "회오리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영원한 기초 같으니라" , 회오리 바람이 지나가면 악인은 없어져도 의인은 흔들리지 않는 기초이므로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예수님의 말씀은 의인이냐 악인이냐는 상관없이 다만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는 영원하다라고 대단히 비약적이고 초월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은 곧 우리 인간의 도덕률을 초월한 것으로 그가 얼마나 불의하냐 의로우냐가 아니라 반석 위에 집을 짓기만 하면 지혜로운 사람으로 영원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대해 혹자는 너무 독선적이다 라고 몰아붙이기도 합니다만, 아무튼 예수님은 이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하는 자는 의인이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 외에는 다른 가치를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4 : 10 이하에서 사도 바울은 이 문제를 좀더 다른 측면에서 이야기한 것이 있습니다. "내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내가 지혜로운 건축자와 같이 터를 닦아 두매 다른 이가 그 위에 세우나 그러나 각각 어떻게 그 위에 세우기를 조심할찌니라. 이 닦아둔 것 외에 능히 다른 터를 닦아둘 자가 없으니 이 터는 곧 예수 그리스도라 만일 누구든지 금이나 은이나 보석이나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이 터 위에 세우면 각각 공력이 나타날 터인데 그 날이 공력을 밝히리니 이는 불로 나타내고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이라"(고전 4:10-13) 이 내용과 예수님의 말씀은 서로 중점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다른 것을 관계없이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는 지혜롭다고 기초에 중점을 두었고 바울은 기초 위에 무엇을 세우느냐, 즉 건축 재료에 중점을 두었습니다.

그래서 각 사람의 공력을 불로 시험할 때 풀이나 짚이나 나무는 타버릴 것이고 금과 은과 보석은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어찌 보면 바울의 말씀이 보다 발전적인 듯한 인상을 줍니다만 사실은 예수님 말씀이 더 근본적이고 완벽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오직 기초만 바로 되어 있으면 그 위에 세우는 집은 터가 보호한다는 것입니다. 혹 나무로 집을 지었다 해도 터가 반석이기만 하면 비바람도 상관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돌로 지은 집이면 더욱 좋습니다만 중요한 것은 터가 그 집의 가치를 결정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집을 지을 때는 나무나 돌이나 콘크리트 등 여러 가지로 지을 수 있습니다. 또한 그 집은 집 나름대로 각각 쓸모가 있습니다. 그러나, 공통적일 문제는 기초가 잘 되어야 합니다. 기초가 잘못 되면 그 위에 제아무리 좋은 재료를 사용해도 소용이 없지 않습니까? 오래 전 이야기입니다만 와우 아파트 붕괴 사건은 기초가 불실한 대표적인 예입니다. 기초가 흔들리면 그 위에 것은 무효입니다. 아니 좀더 확실하게 이야기하면 흔들리는 기초 위에서는 높은 집일수록 문제는 더 커지는 것입니다. 만약 와우 아파트의 기초 위에 단층집을 지었다면 피해는 훨씬 적었을 것이지만 고층 아파트였기 때문에 더 많은 문제가 있었던 것 아닙니까? 사람의 인격에도 고층이 있고 단층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저 별로 나타나지 않는 사람은 무너져도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자기 하나 망하거나 자기 집안 정도에서 손해가 끝납니다. 그러나 돈 많고 출세한 사람중에 인격의 기초가 잘못되어 와르르 무너지면 수백명 아니 수천명에게 피해가 갑니다. 가령 한 나라의 지도자가 잘못되면 그 바람은 국가뿐 아니라 전 세계까지 파급되지 않습니까? 한 사람의 문제가 온 세계를 흔들리게 한단 말입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 없는 교육은 약삭빠른 악마를 생산하는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정말 하나님을 모르는 자의 지혜는 기초가 잘못 되어 있으므로 무너지기 시작하면 크게 무너져서 여러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예수님은 기초 위에 높은 집이냐 낮은 집이냐를 상관하지 않으셨습니다. 돌집이냐 나무 집이냐도 묻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기초만이 반석 위에 있어야 함을 말씀하십니다.

팔레스타인 부근은 원래 사막입니다. 그러니까 군데군데 흩어져 있는 커다란 바위와 모래 속에서 집을 짓는다는 것은 어려운 작업이었습니다.

바위를 깍아서 기초를 하자니 장비도 없는 그 당시 상황에서는 대단히 힘이 들어 쉬운 방법을 찾아냈습니다. 바위와 바위 사이는 모래가 메워져서 바위처럼 된 골짜기가 있는데 여기에는 집을 쉽게 짓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겨울이 우기이므로 비가 오고 창수가 나면 이 집은 떠내려간다고 합니다. 목수이신 예수님은 이 문제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아시므로 집은 어떤 기초 위에 있어야 하는가를 말씀하시게 된 것입니다. 문제는 기초인 것입니다. 물론 여기서 기초는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반석 위에 지은 집은 예수 그리스도다 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만 본문의 문맥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 즉 그 분의 말씀에 초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 말씀 위에 세우는 인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집 짓는 자가 둘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는 그리스도의 말을 듣는 자이고 또 하나는 듣지 않는 자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세상 사람들을 예수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로 두 가지로만 나눌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나의 인격의 기초를 어디에다 세울 것입니까? 예수님의 말씀 위에 인격을 세워 집을 지으면 어떤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좋은 집이 될 수 있음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집을 짓는다는 뜻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반석 위에 짓는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함을 의미합니다. 본문은 '듣는다'는 것과 '행한다'는 것을 매우 중요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은 들음으로써 역사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잠언에서 "교만은 멸망의 앞잡이"라고 했듯이 교만한 마음은 귀를 멀게 합니다. 벙어리의 대부분이 듣지 못해서 말을 배우지 못한 것처럼 교만은 마음의 귀를 닫아 버립니다. 말할 수 있는 입이 있어 그 기능에 아무 이상이 없어도 듣지 못하면 배울 수 없게 되고, 입은 있으나마나 합니다. 그러고 보면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듣지 못하면 도대체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대부분이 듣고 기억하고 소화해서 성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생리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영혼의 문제입니다. 교만한 자는 결코 들려지지 않습니다.

또한 듣는 데에도 여러 종류가 있습니다. 듣기는 하지만 자기 마음대로 꼬여서 듣고, 필요한 대로 감하기도 하고 보태어서 듣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미 들려진 소리가 있다면 그 위에 새 진리가 그대로 들려지기란 어렵습니다. 음식을 담을 때 이미 그 그릇에 더러운 것이 가득 담겨 있으면 새 음식은 담겨지지도 않을 뿐더러, 설사 들어간다 해도 변질되어 버립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려지려면 우선 순결한 믿음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듣는다고 해서 다 듣는 것이 아닙니다. 들을려고 하면 졸음이 오고 다른 생각들이 몰려와 애를 써도 들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교회에 올 때는 각오도 하고 마음도 고쳐먹지만 정작 앉아서는 이런저런 생각이 가득해서 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말씀이 이해되고 받아들여져서 나의 힘이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면 얼마나 좋습니까? 또한 들려져도 마음속에서 변명과 저항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설교를 들은 후에 어떤 분은 "목사님, 어떻게 제 이야기만 하십니까?" 하며 자기에게 꼭 맞는 이야기라고 감격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씀 모두가 내게 향한 것이라고 받아들이는 자는 들을 귀가 있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귀없는 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들을 귀가 없는 자는 분명히 있습니다.

산상보훈의 결론에서 첫째가 들으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들은 것을 행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듣고 행해야만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자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모래 위에 지은 자입니다. 듣는 것만으로는 되지 않습니다. 듣고 행하여야 반석 위에 집을 짓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반석 위에 지었다는 것은 튼튼하고 확고하다는 말입니다. 즉 그 진리성이 확고해진다는 뜻입니다. 심리학적으로 설명하면, 듣고 행함으로 그 진리가 확실해진다는 말입니다. 사실입니다. 듣고도 행하지 않으면 그 들은 바 지식이 잊혀집니다. 건망증이란 듣기만 하는 데서 오는 것으로, 즉각 행동하고 나면 잊혀지지 않습니다. 가끔 성도들 중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감격하여 누군가에게 전하려고 할 때, 생각이 나지 않아 안타까워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듣기만 하면 한쪽 귀로 들었다가 또 한쪽 귀로 흘려 버립니다. 그러나 들은 말씀을 즉각 실행하면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필자의 경우, 건망증에 대해서 이미 소문이 났습니다. 요즈음은 책을 읽어도 잘 남아있지 않고 들은 이야기는 더욱 더 잊어버립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한번 가르친 것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하루에 평균 3시간 내지 7시간까지 가르치는 일을 하는데 가르친 내용은 남아있으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가르친다는 것은 두 번 배우는 것과 같다는 말이 이래서 나온 것인가 봅니다. 아무튼 내가 배운 진리를 실천하면, 실천하는 그 순간에 진리를 완전히 깨닫게 됩니다. 그러면 그 진리는 내 것이 됩니다. 성경은 원수를 사랑하라 하셨습니다. 어떻게 원수를 사랑할 수 있습니까? 이론적으로 생각하고 따지면 복잡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그대로 받아들여 한번 사랑해 보면 원수 사랑의 진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책상에 앉아서 된다 안 된다고 논리적으로 풀지 말고, 단순하게 그대로 실천해 보자는 것입니다.

어느 목사님이 설교를 하신 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면 즉각 실천하라고 호통을 치셨답니다. 지난날에 실천하지 못했다고 후회하지 말고, 앞으로 행하겠다고 미루지도 말고, 들은 대로 지금 바로 각자가 가진 것으로 실천하라고 설교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들은 한 할머니는 바로 안구은행으로 갔다고 합니다. 지금 내가 가진 것으로 봉사하라 하셨는데, 가만히 생각하니 있던 돈은 다 낭비했고 앞으로 살날은 얼마 되지 않을 것 같아 한 쪽 눈을 기증하리라고 결심했던 것입니다. 의아해 하는 의사에게, "이 나이에 멀쩡한 눈, 두 개 가지고 뭘 하겠소. 필요한 젊은이에게 주고 싶구만" 하며 조르셨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일이 잘된 것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지만 목사님의 설교는 성공이었다는 생각입니다. 확고한 진리에 들어가고 싶습니까? 반석 위에 영원한 집을 세우고 싶습니까? 너무 많이 배우려고 이리저리 방황하지 말고, 깨달은 것 한 가지씩만 실천하십시다. 주신 말씀대로 즉각 실천하면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자가 될 것이며, 영원한 진리를 소유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반석 위에 집을 지으면 집이 완성된 후로는 그 반석이 집을 책임지게 됩니다. 바꾸어 말하면 순종하게 한 자가 책임을 진다는 말입니다. 우리 입장에서 보면 위탁입니다. 나는 지혜롭지 못하므로 지혜로운 자에게 순종하고, 전적으로 위탁하면 그의 지혜가 곧 나의 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나는 능력이 없습니다. 그러나 능력 있는 자의 역사를 순종하고 따라가면 내가 능력 있는 자가 됩니다. 그 분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면 그 말씀이 곧 내 것이 됩니다. 즉 그 위에 집을 지은 자와 같다는 뜻입니다. 듣는 것과 행하는 것이 합쳐질 때 놀랍게도 그의 말씀이 내 능력이 되고 그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되는 역사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정리하면, 예수님은 집의 재료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또한 높이 짓거나 낮게 짓는 것도 상관치 않으셨습니다. 단 기초만은 반석 위에 즉 말씀 위에 세우라는 것입니다. 나무 집은 나무 집대로 유효할 것이고 돌집은 돌집대로 유효할 것입니다.

없는 자는 없는 대로 있는 자는 있는 대로 각자의 분수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입니다. 지식이 많습니까? 그가 가진 지식 위에 신앙이 보태지면 그 지식은 극대화 될 것입니다. 신앙이란 그 자체가 지혜는 아닙니다. 그가 가진 지혜를 가장 효과 있게 능률적으로 발휘되도록 뒷받침하는 것입니다. 신앙이 기초되어야만 지혜가 지혜 되고 돈이 돈 되며 능력이 능력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반석 위에 세우지 않는 자는 무엇을 가졌든지 무효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어서 마태복음의 저자인 마태는 8장에서 여기에 대한 두 가지 실례를 들고 있습니다. 하나는 문둥병 환자의 이야기입니다. (8:1-4)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 진지라", 즉 주님 앞에 나아와서 병이 깨끗함을 받습니다. 또 하나는 유명한 백부장의 이야기입니다.(8:5-13) 예수께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한 백부장이 나아와서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하며 간구하니 예수님은 직접 가시어 고쳐 주겠다고 하십니다. 이 때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치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이요 내 아래도 군사가 있으니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저더러 오라 하면 오고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하나이다"라고 대단한 믿음을 보입니다. 이것은 준비된 순종입니다.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겠으니 말씀만 하시라고 즉각적으로 순종할 태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 때에 예수님은 "내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했다"고 높이 칭찬하셨습니다.

지금 나의 믿음은 어느 정도입니까? 이롭다고 생각될 때만 순종하고 그렇지 않으면 슬그머니 빠져 나오는 기회주의자는 아닙니까? 누군가가 말하기를 신앙이란 백지에다 도장을 찍으라는 것과 같다고 했습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입니다. 백지에다 먼저 인감도장을 찍어주고 그 다음에는 예수님께서 뭐라고 쓰시든지 그대로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런 전적인 위탁이 있을 때 비로소 그의 말씀이 내 것이 되고 그의 능력이 내 능력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오직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만이 지혜로운 자임을 거듭 명심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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