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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한 자의 죄(야고보서 5:1-6)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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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한 자의 죄(야고보서 5:1-6)

 

들으란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야고보서는 공동서신입니다. 어느 한 사람이 읽으라는 편지라기보다 무릇 교회에서 읽으라는 것입니다. 지금 같았으면 '비디오선교회'처럼 녹음이나 녹화를 해서 보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옛날이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편지로 써서 보냈고 교회들에서는 그 편지를 낭독했습니다. 이 편지를 읽고, 그리고 해설을 하고 했습니다. 장로님들이나 목사님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예배를 대신하게 됩니다. 이 관습이 이어짐으로 오늘의 교회에서 예배 중에 성경을 봉독하고, 설교를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편지는 그대로가 성경입니다. 그대로가 봉독으로 이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온 교인이 모여서 이 성경, 곧 편지를 읽고 듣는 것입니다. 아마도 몇 차례 없이 두고두고 또 읽고 또 읽고, 그렇게 했을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에서 야고보는 물질로 인한 시험에 대하여 준열하게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그는 교인들이 물질로 인하여 시험받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일찌기 웨슬리(John Wesley)는 사람이란 그의 돈 씀씀이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 성숙도를 가늠할 수 있다고 말한 바 있습니다.

여러분은 돈을 어떻게 사용하십니까? 얼마나 쓰고 있습니까? 이것이 여러분의 신앙 성숙도가 되는 것입니다. 바로미터가 되는 것입니다. 돈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돈과 사람과의 관계로써 신앙의 문제에까지 도전을 받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두 주인이란 곧 하나님과 만물을 가리킴입니다. 하나님과 돈이 두 주인입니다. 돈이 여기까지 올라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엄청나게 위험한 일입니다. 돈이 하나님이냐?-여기까지 다다라 있는 것 그만큼 돈의 위치가 높아 보입니다. 소위 자본주의 체제에 삶으로 해서 더욱 돈에 미친 사람 많습니다. 돈에 미치고 보면 눈이 뒤집힙니다. 나라도 보이지 않습니다. 애국심이 다 뭡니까? 체면도 보이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미래도 보이지 않습니다. 하나님까지도 뵙기지 않아요.

어찌 문제가 아니겠습니까? 돈을 상전으로 삼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짐작조차 못합니다. 아니, 아예 생각조차 하기가 싫은 것입니다.

돈의 매력이 그토록 가당찮습니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해버립니다.

배알도 없이 빠져버립니다. 광적(狂的)이지요. 한마디로 말하여, 세상에 미치는 꼴도 가지가지지만 돈에 미친 꼴만큼 볼품없는 꼴도 없습니다.

천하기 짝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한다고 말씀하신 것은, 물질을 대표하는 이 돈이 하나님 보좌의 위치로까지 올라갈 수 있다는 위험성을 지적하심입니다. 돈을 섬기고 보면 하나님이 안중에 없어지고 마니까요.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분명히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 가난은 죄가 아닙니다. 잊지 말 것입니다. 못나서 가난하건 잘 나가지 못해서 가난해졌건, 내가 가난하건 남이 가난하건, 결코 '가난은 죄다'하고 정죄해서는 안 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물질에 대한 이해입니다. 가난 자체가 죄는 아니듯이 부()도 반드시 의는 아닙니다. 오늘의 우리네 한국교회들이 안고 있는 가장 크고도 중요한 문제가 여기에 있습니다. 기복(祈福) 사상이 전염병처럼 만연하고 있습니다. 복을 비는데, 돈이 곧 복입니다. 돈 많은 사람이 복 받은 사람입니다. 돈이 많으면 축복 받았다고들 인식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보면, "쯧쯧, 얼마나 저주를 받았으면 저 모양일꼬?" 합니다. 여러분, 남을 보나 나를 보나 물질을 보고 복 받았다 못 받았다 하고 생각하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일입니다. 물질은 절대로 축복과 저주의 가늠자가 될 수 없다고 하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물질을 경시(輕視)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부하면 복 받은 의인인 양 생각하려드는 것이 시험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가난이 죄가 아니듯 부()도 죄가 아닙니다. 부하다고 해서 그것이 큰 죄가 되는 것으로 생각할 것은 없는 것입니다. 돈 많이 버십시오. 선한 사업에 쓰십시오. 그러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부 자체가 죄라고, 부자면 다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기독교의 정신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복으로 주신 것입니다. 물질을 많이 가진 것-부끄럽지 않게 벌어서 남보다 많이 가진 것이라면 조금도 잘못된 것이 없습니다. 돈은 말하자면 중립적인 것입니다. 어떻게 쓰느냐가 문제입니다. 비유컨대 여기, 칼이 있습니다. 칼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좋은 것도 아닙니다. 나쁠 것도 좋을 것도 없는 물건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좋은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좋게 쓰이고 나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강도질하는 데 쓰입니다. 총도 그렇습니다.

바야흐로 세계가 한창으로 문제삼아 떠들고 있는 원자핵도 그렇습니다.

선한 사람의 손에 있으면 핵은 선하게 쓰임 받습니다. 나쁜 사람의 손에 들어가면 인류를 살상하고 마는 폭탄이 됩니다. 돈이 그런 것입니다. 돈 자체를 두고 좋다 나쁘다 할 것이 아니요, 선한 것이다 악한 것이다 할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돈과 내 인격과의 관계입니다. 돈을 대하는 자세가 문제입니다. 우리는 물질에 대한 청지기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취할 자세입니다.

청지기가 무엇입니까? 청지기는 내 것이 아닌 물질을 지키는 자입니다.

물질은 주인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나에게 맡기신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임시로 맡아 가지고 있을 따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내 것이 될 수가 없습니다. 임시로 맡아 관리하고 있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이 주인이신 물질의 청지기 곧 관리자라고 하는 것을 한시도 잊지 않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주인이 맡겼다면 주인에게 뜻이 있어서입니다. 그렇다면 주인이 목적하는 바대로 쓰이어야 합니다. 결코 내 것인 양 내 기분대로 써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주인이 원하시는 대로, 주인의 뜻에 따라서 사용할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여기서 생각해야 될 것은 이 물질과 인격, 물질과 신앙은 별개 문제라는 것입니다. 관련시켜서는 안됩니다. 관련이 되면서부터 시험에 빠지는 것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중국 연변에 갔을 때에 느낀 일입니다. 그쪽에는 남한에서 내보내는 설교방송을 듣는 사람이 많습니다. 이런저런 목사님들의 설교를 두루들 듣고 있습니다. 그런 설교들을 듣는 분의 하나가 제게 말합니다. "남조선의 목사님들이 하는 설교 가운데는 이상한 메시지가 있고, 이상한 교리가 있습니다." "그래요? 어떤 내용인데요?" "듣자하니, 돈 많이 벌면 복 받았다 하고 돈 없는 사람은 다 죄인이라고 하는 것만 같아요. 축복을 받으면 부자가 된다. 부자가 되는 것은 복이다, 이런 식으로 들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 잘 믿으면 복 받습니다, 예수 잘 믿어 복 받으면 물질도 넉넉해집니다. 부자 되려거든 예수 잘 믿으세요, 이렇게들 설교하는 것만 같더란 말입니다." 그리고 덧붙여 묻습니다. "그런 소리, 이단(異端) 아닙니까?" 듣고 있자니까 적잖이 마음이 괴롭습니다. 그냥 넘길 일이 아닌지라 다시 물어보았습니다. "누구의 어떤 설교를 들으셨는지 모르겠습니다마는 좀더 자세히 말해보십시오." 그랬더니 한다는 설명인즉 "남조선에서는 자기가 일하는 대로 벌기도 하고 못 벌기도 하고, 그러니까 부자가 될 수도 있고 못될 수도 있으니까 그런 말이 통할는지 모르나, 적어도 이 사회주의 체제에 사는 우리한테는 얘기가 안 되는 것입니다. 사는 집도 나라 것이요 입는 옷도 나라 것이요 먹는 음식도 나라에서 배급받은 것입니다. 복 받아보아야 배급입니다. 더 받을 것도 없는 것입니다. 나름으로 남보다 부지런을 더 피운다고 해서 빵 한 개 더 생기는 것도 아닙니다. 복을 많이 받아야 의식주가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그런 기복사상(祈福思想)은 우리한테 통하지 않는 이야기지요, 전혀 통하지 않는단 말입니다"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물질로써 신앙을 평가하고 축복을 평가하는 것은 지극히 잘못된 일입니다. 기독교에는 원칙이 있습니다. 특히 물질에 대해서는 네 가지의 윈칙이 있습니다. 비목적(非目的), 비죄악(非罪惡), 비중심(非中心), 비우상(非偶橡)이 그것입니다.

기독교 윤리상 흔히 쓰는 말입니다. 돈은 절대로 목적이 아닙니다. 돈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수단인 것입니다. 물질은 우리에게 살아가는 데 필요한 것이지, 결코 그것을 목적으로 우리가 사는 것은 아닙니다. 밥을 먹는 것도, 먹고 건강해서 일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먹는 것 자체도 즐깁니다. 그러나 먹기 위하여 사는 것은 아닙니다. 먹기 위하여 세상에 태어난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이 다 그렇습니다. 보아하니 결혼을 목적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저 사람과 결혼 한번 해보고 죽었으면 좋겠다 합니다. 그런데 해보니 어떻습니까? 목적이 못되는 것입니다. 공부도 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공부하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닙니다. 공부도 어떤 의미에서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일 수는 없습니다.

물질이 절대로 목적이 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물질을 죄악시할 것도 아닙니다. 이원론적(二元論的) 사상에서 정식적인 것은 선하고 물질적인 것은 악하다고 보는 사상은 그릇된 사상입니다. 물질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것입니다. 보금자리 삼으라고 주신 것이요, 입으라고 주신 것이요, 먹으라고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다 선한 것입니다. 우리가 음식을 대할 때에는 그때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좋은 음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맛있는 음식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즐길 수 있게 해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건강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고 하나님께 진정으로 감사하고 찬양드려야 합니다. 아름다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물질이라고 어찌 죄악시할 수 있습니까?

물질은 중심이 되어서도 안됩니다. 어디까지나 주변적인 것이지 중심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심은 하나님나라와 그 의()입니다. 그리고, 물질은 우상이 될 수 없습니다. 절대로 그것을 주인으로 섬기는 자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만물이라고 하는 우상을 섬기는 것이 됩니다.

오직 지배를 할 뿐, 섬기는 대상으로 삼아서는 못씁니다. 돈을 섬기면 돈의 노예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모름지기 우리는 물질의 제한성을 깨달아야 합니다. 물질의 능력은 제한적입니다. 물질은 능력은 결코 무제한한 것이 아닙니다. 혹자들은 물질이 만능인 줄 압니다. 오늘의 우리 사회의 윤리 가운데 가장 타락한 윤리가 물질만능주의입니다. 공공연히 황금만능을 법으로 압니다. 돈이면 다 되는 줄 압니다. 돈이면 정치도 되고 나라도 된다고 믿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정치자금만 마련하면 정치가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너도나도 분수없이 설칩니다. 우리는 앞으로 선거가 있다고 하면 무조건 돈 쓰는 사람은 안 찍어주기 운동을 해야 하겠습니다.

돈으로는 안될 일입니다. 이것을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정치가들을 그 꼴로 만든 것도 실은 국민들입니다. 먹고 찍어주니 먹이려고 돈 많이 챙기다가 사고가 나지 않습니까? 정치자금이라는 것이 그렇게도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제라도 우리는 눈뜨고 깨어나야 합니다. 나라 일을 꾸려나갈 사람들을 뽑는 일입니다. 어찌 돈만 아는 사람을 그 자리에 내보낼 것입니까? 이것이 바로 국민이 취해야 할 자세인 줄 압니다. 돈은 절대로 만능이 아닙니다. 돈 가지고는 절대로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오늘의 우리 국민이 취해야 할 자세입니다. 따끔하게 본때를 보여주어야만 합니다.

알고 보면 돈처럼 무능한 것이 없습니다. 병원에 가보십시오. 몸져누운 사람들, 입원을 해야 되는데도 돈이 없어서 입원을 못하는 사람, 수술을 해야 사는데 수술비가 없어서 죽어 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돈이 많아서 "돈은 얼마든지 줄 테니 내 목숨 좀 살려주시오" 하는데도 의사인들 속수무책이어서 돈 두고도 죽어가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보십시오.

어떻게 돈이 만능입니까?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입니다. 돈의 이러한 제한성을 사람들은 곧잘 망각하고 삽니다. 우리 학생들, 공부하느라고 안타깝게 애들을 씁니다. 돈만 있으면 공부가 잘된다, 이렇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돈은 얼마든지 있는데도 자녀가 공부를 못해서 속을 끓이는 부모님들이 참 많습니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식은 죽 먹기지만 돈 가지고는 그게 안되거든요. 돈 가지고는 머리 속에 마음대로 지식을 집어넣을 수 없습니다. 잘 가르치는 가정교사는 몇 억이 들더라도 둘 수 있지만 자녀의 실력 향은 마음먹는 대로되지 않습니다. 돈의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도시 당자가 공부를 해먹어야 되는 것이지요. 안 하는 데야 어떡합니까? 하기 싫은 데야 어떡합니까?

그렇습니다. 돈이 참 귀한 것 같지만 실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모든 가치 중에서 가장 시시하고 가장 무능하고 가장 보잘것없는 것이 돈입니다. 이 사실을 빨리 알아야 합니다. 물질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요 만능이 아니라고 하는 이 제한성을 깨닫지 못하면 우리는 두 가지의 오류에 빠집니다. 그 하나는 돈의 우상화입니다. 돈이라는 것을 붙잡으려고 애써서 붙잡아놓았습니다. 잡아 놓고 보니 무상합니다. 많이 버는 것은 좋습니다. 버는 데도 힘이 들지만 지키는 것은 더욱 힘듭니다. 바로 쓰기는 그보다도 더 힘듭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에 자세히 나타납니다. "너희 재물은 썩었고(2)"--옛날에는 재물이라는 것이 곧 식량이었습니다. 식량이 가장 큰 재물이었습니다. 부자는 쌀을 많이 쌓아놓습니다. 오래오래 먹을 것을 쌓아놓으면 그것으로 해서 살맛을 느낍니다. 어리석은 부자가 창고를 늘리고 가득 쌓아놓은 다음에, 내 영혼아 오랫동안 먹고 마실 것이 있으니 실컷 즐기자고 잔뜩 자족합니다. 이를 보신 하나님께서 나무라십니다. "이놈아, 너는 오늘밤에라도 죽게 될지 모르는데, 그렇게 된다면 쌓아둔 그것들이 네 것이 되겠느냐?" 우리네의 경우도, 옛날에는 재산이라는 것이 쌀이었습니다. 양식이었습니다. 양식을 쌓아놓으면 썩게 마련입니다. 요새는 우리 나라도 바야흐로 식량이 남아나서 골칫거리가 되고 잇지 않습니까? 내버릴 수도 없어 지키자니, 이것 지키는 데 연간 몇 천억이나 든다면서요? 보관하는 데 드는 비용이 그렇게 굉장한 것입니다. 자꾸 썩으니 그렇습니다. 재물의 대표격인 양식은 이렇게 쌓아두면 썩게 마련입니다.

옷은 또 어떻습니까? 좀먹어버립니다. 못쓰게 됩니다. 우리네 여자 분들 가운데에는 옷을 그렇게도 사들여두었다가는 유행에 뒤떨어졌다고 못 입고 마는 사람이 많습니다. 걱정거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끔 바자회를 합니다마는 몇 년 동안 안 입은 옷, 특별히 삼 년 동안 한 번도 손대지 않은 옷들이 많습니다. 그런 것 모두 내어다 팔아서 어디 다른데다 쓰든지 하지 않고 그냥 가지고 있다가 죽으면 하나님 앞에 죄송하지 않습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즐겨 입을 사람이 많은데 내가 입지도 않으면서 움켜쥐고 있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입을 임자가 있는 옷을 내가 차지하고 있는 셈입니다. 나도 안 입고 남도 못 입게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가지고 있다보니 썩어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도 됩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가 되는 일입니다. 어떤 집들 보면 옷이 대단히도 많습니다. 세어볼 수조차 없을 지경입니다. 옷장 가지고도 모자라서 아예 큰 방 하나가 통째로 옷 방입니다. '안되겠는데, 이거!' 이런 염려가 됩니다. 어차피 집밖으로 나올 때에는 한 벌밖에 못 입지 않습니까? 한번에 열 벌씩이라도 입었으면 좋으련만 그럴 수가 없으니 어떡하면 좋습니까? 옷은 좀먹게 마련입니다. 내버려두면 못쓰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부자의 죄입니다. 옷은 좀먹고 쇠는 녹습니다. 세상 것 무엇이건 보관될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3)"-무상한 것입니다. 아무리 가지고 있으려 해도 길이 가지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은 다 헛것입니다. 시한부(時限附)입니다. 집도 시한부요, 옷도 시한부요, 돈도 시한부입니다. 무엇이든지 다 시한이 있습니다. 때맞게 쓰지 못하면 쓸데없는 것이 되고 맙니다. 무상(無常)한 것입니다.

우리가 돈(물질)의 제한성을 깨닫지 못함으로 범하는 또 하나의 오류는 사용자의 무상함입니다. 내가 가졌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손에 쥐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까? 내 이름을 써붙이면 되는 것입니까? 도대체 내 것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얼마동안이나 가지고 쓸 수 있는 것입니까? 기껏해야 은행에다 넣어놓고 통장 하나 쥐고 있는 것입니다. 이게 과연 가진 것입니까? 여러분, 땅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 땅문서 꽉 움켜쥐고는 '내것이다'하고 앉아 있는데, 그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입니까? 소유라고 하는 것 자체에 제한성이 있고, 무상함이 있는 것입니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다 사용하지를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길이 누리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써야 되는데 쓸 줄을 모릅니다. 좋은 일에 쓰지를 못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쓴 것만이 내 것입니다. 음식도 내 입으로 넘긴 것만이 내 것입니다. 먹어버렸으면 그것은 틀림없이 내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먹지 않은 것은 내 것이 아닙니다.

서양에는 고급 양로원이 있습니다. 초고급(超高級)입니다. 마치 일류 호텔과도 같이 시설이 잘 되어 있습니다. 그 안에 병원도 있고 친절한 간호원들도 있습니다. 나이가 찰 대로 찬 돈 많은 노인들이 일정한 거액을 내고 들어갑니다. 일단 들어가면 양로원에서는 죽을 때까지 모든 것을 다 맡아줍니다. 용돈까지 줍니다. 그러니까 빨리 죽으면 그 양로원에서 득을 보는 셈이 되고 오래 살면 손해를 보는 셈이 됩니다. 양로원이 하나의 특수 기업체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도 그런 양로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 한 분이 그런 사업하겠다고 하기에 할 테면 아주 하이클라스(high class)로 한 번해보라고 권한 적이 있습니다. 돈이 많은 분들은 거기에 돈을 들여놓아 자격을 얻은 다음에 나머지는 다 써버리고 맙니다. 깨끗하게 써버립니다. 그리고는 남은 시간 평안하게 지내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일 딱한 것은 많은 돈 챙기고 앉아 먹지도 못하고 쓰지도 못하고 발발 떨다가 죽는 꼴입니다. 살았을 대 잘 써야지 죽어 가지고 쓰는 것은 쓰는 것이 아닙니다. 내버린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내가 못쓰게 되어서 내버린 것이 아닙니까? 내가 쓸 수 있을 때에 좋은 일에 써야 제대로 쓴 것이 됩니다. 이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오늘 주신 말씀을 깊이 상고해야 하겠습니다.

사용자에게는 또 하나의 제한성이 있습니다. 물질이 많으면 고민이 많은 법입니다. 번민이 많습니다. 시험도 많습니다. 물질로 인하 시험인 것입니다. 심지어는 오늘 같은 날, 교회에 나오려고 해도 집에 가진 것이 많아서 도둑맞을까봐 겁이 나 못나온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물질이 많음으로 해서 이래저래 많은 시험이 따릅니다. 게다가 생전에 욕심껏 모아놓고, 그것을 제대로 한번 써보지도 못한 채 무덤 속에 들어간다면 그 보다 한심한 노릇은 없습니다. 공동묘지에 가면 큰 무덤 작은 무덤이 있습니다. 큰 무덤 앞에 서면 늘 생각하게 됩니다. 그 큰 무덤의 주인공은 남보다 한이 더 많겠다고요, 다 못쓰고 왔으니까요. 가난해서 초라한 무덤의 주인공은 하루에도 백 번씩은 죽고 싶다 죽고 싶다 하다가 죽었으니 한이 없겠지요. 그러나 큰 무덤의 주인공은 많은 것을 벌어놓고 그냥 두고 왔거든요. 얼마나 아깝고 분하겠습니까? 사용자에 이러한 제한성이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세 종류의 부자가 있습니다. 많이 벌어들이는 부자가 그 하나요, 끝끝내 붙잡고 지키는 부자가 그 둘이요, 쓰는 부자가 그 셋입니다. 세 번째 부자는 많건 적건 간에 쓰는 데는 부자입니다. 재벌만큼 쓰고 살면 재벌이 아니더라도 그 사람은 재벌입니다.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쓰는 것만큼은 부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재벌이라도 쓰지 못하면 재벌이 아닙니다. 아무리 돈이 많다 해도 쓰는 것만큼만 부자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씀씀이가 크면 큰 만큼 부자입니다. 이기적이고 인색하다면 제아무리 많은 돈을 깔고 앉아 있다 해도 그는 가난한 자입니다. 철인(哲人)도 말했습니다. "가난뱅이 중에서도 가장 가난뱅이는 부하면서 인색한 사람이다." 없어서 못쓰는 사람이 아니라 있으면서도 못쓰는 이런 사람이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나라를 위하여 쓰는 씀씀이에서 부자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 앞에 부자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부자이어야 합니다. 그래서 주신 말씀이 오늘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3)"-말세란 곧 환난의 때를 말함입니다. 마태복음 24장 이하에는 말세에 큰 환난이 있겠다, 큰 재난이 있겠다고 말씀합니다. 말세의 그 엄청난 재난 속에서는 부한 자에게 화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는 자유롭습니다. 부한 자는 어려움을 많이 당해야 합니다. 부하지만 이제는 돌이키고 쓸 시간이 없습니다. 이미 많이 쌓아놓았으나 좀더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이제라도 바로 쓸 시간을 가질 수가 있겠는데 때는 늦어 어느덧 심판의 때가 다가오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준다고 해야 받을 사람도 없습니다. 끝나고 말았으니까요. 이대로 끝나 버리고 보니, 이대로 딱 멈추고 보니, 너무 많이 남겼습니다. 너무 많이 벌어 들여놓았습니다. 쓸 시간이 없습니다. 그 많은 재물이 무용지물입니다. 남은 것은 심판일 뿐입니다. '너는 청지기 노릇을 잘못했다'-이런 꾸중이 귀청을 때립니다. 네가 남긴 돈이 너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다, 할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게을렀기 때문이다,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말세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이제는 다 쓸 시간이 없습니다. 선한 일 할 시간이 없습니다. 끝이 나고 있습니다. 끝 시간인데 가진 돈이 너무 많습니다. 적어도 말세에는 이런 일이 없어야 합니다. 다 털어야 됩니다. 개인적으로 보아도, 죽을 때에는 소유가 없어야 자유롭습니다. 죽은 다음에 장부 가득히 잔고(殘高)가 남으면 뭣합니까? 잊지 말 것입니다. 내 손에 남은 것이 많아서는 안됩니다. 어느 목사님 사모가 세상 떠난 다음에 뒤져보니 꼬기 꼬기 뭉쳐놓은 돈이 삼 백만 원 있더랍니다. 목사님, 이걸 꺼내 가지고 고아원에 갖다 주었습니다. 삼 백만 원쯤인 것이 그나마도 다행이지 만약에 그것이 삼 억 원쯤이라도 됐었다면 큰일날 뻔했습니다. 여러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말세에, 즉 끝에 이르러서 아직도 쓰지 아니한 물건, 갚지 아니한 임금, 해결해야 될 문제가 물질로 인해서 그대로 남아 있다면 그에게는 화가 있습니다. 축재(蓄財)는 돈의 능력을 과시해서 비롯됩니다. 돈이 만능인줄 알고 벌고 더 벌고, 걸신들린 듯이 벌어들이는 것입니다. 제한성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어느 사이에 재물의 노예가 되어버렸고, 그 무서운 우상을 내가 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필요 이상으로 쌓았으나 결국은 쓰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말세에 직면합니다. 심판대 앞에 서게 됩니다.

불행한 사람입니다.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합니다.

본문은 다시 사치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5)"-이기적으로 사용한다 함입니다. 육체적인 향락에 사용한다 함입니다. 현세적으로 사용한다 함입니다.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4)"합니다. 다른 사람의 필요는 아랑곳없이 외면하고 나 중심으로만 살았습니다. 재물로 인하여 마음이 교만해졌습니다.

그리고,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지게 하였도다(5)"-스스로 의인인 척하고, 스스로 잘 믿는 척하고, 스스로 복받은 척하고, 스스로 자기만이 하나님께 선택받은 자인 양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 속에는 지금 엄청난 것이 잘못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옳은 자를 정죄하였습니다.

돈 벌기 위해서 옳은 자를 죄인 만들었습니다. 내 부를 지키기 위하여 선한 자를 악한 자로 몰았습니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6)." 이제, 그 모든 것들이 심판 앞에 다 나타납니다. 주지 아니한 것이 드러납니다. 갚지 아니한 것이 나타납니다. 돈벌자고 못할 짓 많이 한 것이 다 그대로 노출됩니다. 그러니 말세에 부한 자에게는 참으로 화가 있는 것입니다. 가난한 자를 학대한 것으로 화가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멸시한 것으로 화가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에서 하신 말씀을 보면, 그 부자가 이렇다하게 큰 죄를 지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그를 지옥으로 떨어뜨린 죄는 바로 가난한 자를 멸시한 죄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이 말세에 부한 자가 되지 않는, 비록 물질은 부해도 마음은 부해지지 않도록, 비록 물질은 부해도 재물을 끌어안고 지키는 부자가 아니라 쓰는 데 부한 자가 될 것입니다. 세상에 대하여 부한 자가 아니라, 하나님나라에 대하여 부한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믿음에 부한자가 되고, 신령한 면에서 부한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실제적인 문제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고 애쓰면서도 이 물질에 대한 문제가 신앙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한 신앙생활은 끊임없이 시험에 허덕이고, 거기서 헤어날 길이 없을 것입니다. 신앙에 향상이 없을 것입니다. 성숙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한시바삐 돌이켜서 마땅히 물질과의 관계에 바른 해석이 있는 신앙생활, 바른 해결이 있는 신앙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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