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 목차로 돌아가기 |
비판하지 말라(롬14:1~6)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
예수님께서 교훈하실 때에는 구약성경을 많이 인용하셨습니다만 특히 유대사람들의 교훈이나 랍비들의 교훈을 많이 인용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이 본문의 내용인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도 랍비들의 교훈 속에 많이 나타나는 교훈으로 예수님은 좀더 신앙적인 차원에서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유대사람들의 전설 가운데에는 여섯 가지의 덕이 있습니다. 첫째가 공부하는 것으로 많이 배우고 많이 가르치는 것이 큰 덕행입니다. 둘째는 환자를 방문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앓는 사람을 방문하고 같이 위로하며 기도하는 것을 중요한 덕행으로 여겼습니다. 셋째는 손님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잘 살면서 자기 가족끼리만 잘 먹는 집은 참 불행한 사람들입니다. 집을 활짝 열어놓고 소찬이라도 이웃과 더불어 나누며 즐거이 손님을 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넷째는 기도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이 얼마나 귀한 일입니까? 다섯째는 자녀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들 중에는 부모 자신들은 열심히 신앙 생활하면서 자녀들의 신앙 생활은 소홀히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학교에는 한 번 결석하면 큰일나는 줄 알면서 교회에 결석하는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단 말입니다. 아이들에게도 말씀이 깊이 박힐 수 있도록 신앙 교육에 힘써야 하겠습니다. 여섯째, 다른 사람의 장점을 생각하는 덕행입니다. 남의 단점부터 보기 시작하면 그의 좋은 점을 발견하기란 어렵게 됩니다. 그 대신 장점부터 보면 그의 허물은 가리워지는 것입니다. 상담학에 보면,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들에게 일정한 기간을 두고 그 동안만은 상대방의 단점을 절대로 지적하지 않도록 훈련하는 것이 있습니다. 단 한 주일만이라도 상대의 허물을 말하지 말고 장점만 말하는 것입니다. 필자가 실제로 어느 부부에게 적용을 해 보았더니 결과가 아주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서로가 "그 사람에게는 장점이 별로 없다"고 부정적이었지만 한 주일만 해보자는 권유에, 서로의 장점만 보기로 했던 것입니다. 일 주일 후에 그 부인이 말하기를 "제 남편에게 이렇게 장점이 많은 줄은 몰랐습니다" 하며 아주 기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상대방의 좋지 않은 면만 보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좋은 면으로만 보게 되면 이상할 정도로 좋은 것이 자꾸만 나타납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장점만 보는 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덕행 중에 하나로 꼽히게 된 것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비판하지 말라는 말씀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왜 비판하지 말아야 합니까? 첫째는, 누구를 비판하든지 간에 전체를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도 전체를 보고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비판이란 언제나 부분적입니다. 그러므로, 부분을 보고 전체를 비판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까? 사람은 보는 대로 비판합니다. 본다는 것이 얼마나 부정확한 것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부분적인 것을 보고, 평가는 전체적으로 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 대로 평한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것입니다. 또한 들은 대로 평가합니다. 이것은 보았다는 사람에게서 들은 것으로, 한 다리 더 건넜기에 더욱 잘못된 평가입니다.
또는 보는 각도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습니다. 앞에서 본 것과 뒤에서 본 것은 아주 다릅니다. 그리고 지금 본 것과 몇 시간 후에 본 것이 달라집니다. 가령, 지금 비판하고 싶은 것을 한 시간만 참아보고 나서 생각하면 생각이 달라집니다. 그러므로, 비판은 일단 삼가하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비평을 해놓고 나면 후회되고 비평을 하기 시작하면 장점을 보기가 힘이 듭니다. 비평을 쉽게 하는 사람은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자신이 부분적으로 평가받을 때 얼마나 섭섭합니까? 나에게도 좋은 점이 많은데 하필이면 그것만 보고 평가를 하느냐고 대단히 마음이 아플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자기의 단점은 가려놓고 좋은 점만 보이고 싶습니다. 그런데 좋은 점은 보지 않고 나쁜 점만 골라서 평한다면 얼마나 섭섭합니까? 인도 사람들의 기도문에 보면 "그 사람의 신을 두 주일 동안 신어보기 전에는 그 사람을 평가하지 않게 하소서"라는 내용이 있습니다. 남의 신이 나에게 맞습니까? 설사 맞는다 해도 두 주일을 신어 보기 전에는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무슨 말입니까? 두 주일동안 상대방과 꼭 같은 경험을 하기 전에는 그를 평가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
둘째로 비판을 하지 말아야 하는 이유로는, 정확한 비판을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정확성이란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내 자신에 대해서도 정확한 판단이 힘든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무슨 말을 하든 내가 한 말에 대해서는 책임을 져야 합니다. 특히 과거에 일어났던 이야기를 할 때에는 기억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합니다.
나는 비록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지만 기억력이 문제되어 열 사람이 다섯 사람으로 변할 수가 있습니다. 분명히 본 대로 들은 대로 말한다고 하지만 남을 평가하는 일에 대해서는 기억력과 정확성에 책임을 져야 합니다.
어느 장교가 자기 친구들을 불러서 생일잔치를 했습니다. 재미있게 노는 중에 그는 미군 고문관으로부터 받은 귀한 라이타 하나를 꺼내들고 자랑을 했습니다. "이것은 최일선에서 전쟁할 때, 미군 고문관이 준 것인데 비싼 것보다는 귀한 것이다"라고 소개하자 친구들이 모두 한번씩 만져보자고 해서 돌아가며 구경을 했습니다. 그런데, 잔치가 끝날 즈음에 라이타를 찾으니 라이타가 없어졌습니다. 장교는 친구들을 세워놓고 모두 주머니를 뒤졌지만 라이타는 나오지 않아서, 장교도 속상했고 친구들도 기분이 상해서 모두 돌아갔습니다. 그 다음 날 장교의 아내가 남편 옷을 빨려고 주머니를 뒤지다가 라이타를 발견했습니다. 조금만 참았으면 될 일을 너무 서둘러서 평가하여 친구들에게 큰 잘못을 했다고 후회했지만 늦었습니다. 좀더 기다리거나, 아니면 비판은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내가 비판하는 것만큼의 비판이 바로 내게로 돌아옴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네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마 7:2)고 말씀하십니다. 억울하게 남을 비판하면 나도 그만큼 억울하게 비판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비판할 수 없는 이유는, 누구도 남을 비판할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다. 간음하다 붙들려 온 여인을 놓고 예수님은 군중들에게 무엇이라 말씀하셨습니까? "죄 없는 자가 먼저 돌을 던지라"는 말씀에, 기세 등등했던 무리들은 하나씩 둘씩 물러났습니다. 누가 누구에게 돌을 던질 수 있습니까? 어느 누구도 비판할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 본문은 그 당시의 격언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좀 과장된 표현으로 나타나 있습니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마 7:3) 티는 눈 속에 들어가지만 들보가 눈 속에 들어갔다는 것은 지나친 표현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의 랍비의 교훈을 그대로 인용한 것으로, 누구도 남을 탓할 만한 자격을 가진 자가 없음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자신을 먼저 살피는 자는 다른 사람에게 관용을 베풉니다. 적어도 남의 눈의 티를 지적하기 전에 자기 눈의 티를 먼저 살피는 조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기독교인을 비판하기를 "남의 일은 바늘 끝처럼 예민하면서 자신들에 대해서는 바다처럼 관용을 베푼다"고 지적했습니다. 사실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자기변명으로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인고로……" 하면서 곧잘 자기합리화를 합니다. 아주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제부터라도 자신을 비판할 때는 바늘 끝처럼 예리하고 남에게는 바다처럼 관용을 베푸는 자세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남을 비판하고 괴로움을 주면 그 비판, 그 괴로움을 그대로 내가 당함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반대로 내가 남에게 바다처럼 너그럽게 대하고 사랑하면, 그 너그러움과 사랑이 내게 돌아와서 참 자유롭고 편안하게 살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판단하는 사람의 마음속에는 몇 가지의 심리적 동기가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 일에 등한히 하는 사람이 남의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어느 처세학 책을 보니, "남의 집에 가서 다른 사람 험담하는 사람들아, 너희 집에 돌아가서 바늘 쌈지를 보라"는 말이 있었습니다. 남의 일에 참견하는 사람은 자기 집 바늘 쌈지가 분명히 있을 자리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자기 일에 바쁜 사람은 남에 일에 대해 참견할 여지가 없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자기 허물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남의 말을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모두가 함께 죄인이면 내 죄도 정당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죄인이면 다른 사람도 다 죄인이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죄인은 죄인이 반갑습니다. 나만 죄인이고 허물이 많다고 생각되면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래서 나의 허물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남의 이야기를 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치 남의 허물이 내 성공처럼, 남의 잘못 됨이 나의 잘됨처럼 착각하며 은근히 남의 실수에 고소해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옛말에 "가랑잎이 솔잎보고 바스락거린다고 책망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가랑잎과 솔잎 중 어느 쪽이 요란합니까? 자기 허물이 많은 사람이 남의 허물을 탓한다는 비유입니다. 이렇게 남의 허물을 말하는 사람의 심리적 동기는 마치 남의 허물을 말하는 것이 나의 허물을 없애는 것 같은 착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내게 같은 경험이 있을 때 다른 사람의 허물을 볼 수 있습니다. 내게 그와 같은 동질의 실수가 전혀 없다면 그의 실수가 내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가령 골목 깊숙히 이상한 술집이 있다고 합시다. 어떤 사람이 그 곳에 들어가는 것을 지나가는 몇 사람이 보았습니다. 몇 사람이 보았지만 그 곳이 무엇 하는 곳인지 가보지 않은 사람은 모릅니다. 그러나, 이미 다녀온 사람은 그가 왜 그 집에 들어가는지 잘 알 것 아닙니까? 마찬가지로 내가 그런 실수를 하지 않은 사람은 다른 사람이 저지른 그 실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즉 남의 허물이 잘 보인다는 사람은 곧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고려말기에 무학대사가 이 성계를 찾아갔다고 합니다. 이 성계가 무학대사를 보니 참 못생겨서 보자마자 "자네는 돼지상이네"라고 말했답니다. 그러니까 무학대사는 이 성계에게 "부처님 상이시군요"라고 응수를 했더니, 이 성계는 "내가 자네더러 돼지 같다고 했는데 자네는 왜 나에게 부처 같다고 말하느냐"고 이상해서 물었습니다. 이 때 무학대사가 한 말은 유명합니다. "누구나 자기 얼굴 생긴 대로 남의 얼굴을 봅니다", 즉 당신 얼굴이 돼지 같으니 나를 돼지 같다고 했지만 내 얼굴은 부처 같으니까 누구든지 부처로 보인다는 중요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남의 허물이 자꾸 보이면 우선 나에게 문제점이 있음을 깨닫고 한번 자신을 뒤돌아보아야 하겠습니다. 또한 남의 실수를 내가 자주 듣게 됩니까? 이것 역시 나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나를 어떻게 보았기에 남의 허물을 나와 이야기하기를 좋아하는 것입니까? 경건한 사람에게는 감히 남의 허물을 이야기하지 못합니다. 흔히 "우리끼리만 알고 지내자"고 하며 남의 실수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두 사람 다 실수에 빠진 것입니다. 남의 허물을 자주 듣게 되는 것도 자신에게 문제가 있음을 깨닫기 바랍니다.
넷째, 자기 허물을 고치려고 해 본 사람은 남의 허물을 쉽게 평가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실 진실 하려고 애쓴 사람은 진실이 얼마나 어렵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진실하지도 않고 진실 하려고 생각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쉽게 남의 진실하지 못함을 책망합니다. 바로 살려고 애써 본 사람은 바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남의 실수에 대해서 함부로 말하지 않습니다. 정말 진실한 사람은 진실하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알기 때문에 침묵합니다. 감히 비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본문은 비판에 대해 심리학적 이유보다는 믿음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즉, 내가 비판을 하면 그 비판으로 내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내가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헤아림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앙적으로 보면, 원수갚는 일은 나의 일이 아닙니다. 비판이란 나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과 그와의 관계이므로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여기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또한 남을 판단하다가는 결국 내가 죄에 빠집니다. 남을 잘못 비판하는 죄, 혹은 내 죄를 못 보는 죄에 빠지기 쉽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할 일만 열심히 하십시다. 즉, 비판하고 미워하고 원수 갚는 일은 나의 일이 아니며, 사랑하고 긍휼히 여기고 덮어주고 용서하는 것만이 내가 할 일입니다. 예수님은 보다 실리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즉 비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비판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얼마나 실리적인 이야기입니까? 예수님은 때로는 실재적이고도 이기적인 말씀을 곧잘 하셨습니다. "네가 관대한 대접을 받고자 한다면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고, 네가 용서받고 싶으면 남을 용서하라"는 말씀도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남을 비판하는 순간 나도 하나님 앞에서 심판 받고 있음을 생각해야 하겠습니다.
별 생각 없이 말하는 우리의 이야기 속에 남의 허물이 있지 않는가를 살펴야 합니다. 남을 비판하면 내 입이 더러워질 뿐 아니라 또 듣는 사람의 귀도 더러워집니다. 남의 허물을 이야기하는 동안은 내 마음이 좁아지고 어지러워집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나의 일만 하면, 후에 판단하지 않은 것이 잘했다고 할 때가 올 것입니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지 않는 동안 하나님도 우리를 판단하지 아니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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