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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세리(누가복음 18:9-14)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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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리새인과 세리(누가복음 18:9-14)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

 

오늘 주신 말씀은 앞서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와 연결하여 생각하면 그 후편이라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에서는 항상 기도하며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주제로 말씀하셨습니다. 거기에 비해 오늘 본문의 내용은 진실하게 기도하라는 말씀입니다. 항상 기도한다고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되겠는가? 진실하게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항상 기도하라는 말씀이 양적인 의미의 말씀이라면 오늘 본문의 말씀은 질적인 의미의 말씀입니다. 양적인 기도도 중요하지만 질적인 기도가 더욱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들으실 만한 바른 자세에서 나온 농도 짙은 진실된 기도, 질적으로 수준이 높은 그러한 기도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기도는 무조건, 오래, 열심히, 끈질기게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기도할 바에는 좀 진실하게 좀더 바른 자세로 해야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먼저 한 가지 생각하고 지나갈 것은 이 비유는 비유인 동시에 사실이라는 점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창작도, 설화도 아닙니다. 언제나 사실을 들어 상징적 비유로 설명하시고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비유의 내용은 사실인 것입니다. 그러지 않고 만약 사실이 아닌 가운데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 같은 것을 이야기했다면 이는 이미 공부한 바대로 돌을 던져도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 일이 사실이요, 모두가 다 아는 사건이었기 때문에 아무 말도 못합니다. 그리고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에 보면 두 사람, 곧 바리새인과 세리가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도를 이런 저런 내용과 모습으로 하였는데, 문제는 그 마지막 말씀에 있습니다. 본문 14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갔느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께서 바리새인의 기도는 안 들어주시고 세리의 기도는 들어주셨다는 말씀이 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큰일날 소리요, 문제의 발언이 됩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에 대해 이런 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는 크나큰 모독이며 명예훼손입니다. 그런데 이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아마도 이런 일이 많았고 예수님께서는 환히 보신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이 이야기를 듣는 모든 사람들이 "그래, 맞아", "옳은 말씀이야" 하며 그대로 긍정해 버리고 맙니다. 속으로는 못마땅해하며 오히려 분해하는 사람도 그 자리에 있지만 그러나 사실이 사실이니만큼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은 비유이면서 동시에 그 소재 자체가 사실이었다는 점을 알아야할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생각해보면 여기에 나타난 바리새인은 유대 사람을 뜻합니다. 그런가하면 세리라고 하는 것은 유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만 이방인 취급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이는 복 받지 못할 사람, 저주받은 족속으로 저들이 멸시하는 사람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알아야할 것은 사람의 세계에서는 이스라엘이다, 이방이다, 택함 받은 자와 버림받은 자, 의인과 죄인, 부자와 가난한 자 등 이런 저런 모양으로 구분을 합니다만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큰 착각을 일으키고 있었습니다. 저들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나면 자동적으로 선민 이스라엘이 되는 것으로 알고 그렇게 행세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구원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입니다. 기도도 개인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리도 진실하게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시고, 비록 바리새인이라 하더라도 진실치 못한 기도는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무슨 지위의 높고 낮음이나 신앙 생활의 길고 짧음이 문제되지 않습니다. 어느 때, 그 누구의 기도라도, 문제는 진실된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 점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는 진실만이 통하고, 기도는 개인적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오늘 본문에는 극단적인 두 인물을 비교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여기에는 모든 사람이 다 포함됩니다. 당시 이스라엘에는 바리새파를 비롯하여 에세네파, 헤롯당에 이르기까지 갖가지의 당파들이 있었습니다만, 그 중에서도 바리새인이라고 하면 그런 대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구별한다는 뜻의 그 이름이 말하듯이 종교생활에 권위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저들은 먹는 것, 입는 것, 움직이는 생활 전부를 거룩한 방향으로 구별하여 삽니다. 그렇다고 산으로, 광야로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속에 살면서 거룩하고 깨끗하게 살겠다며 모여진 단체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종교적인 단체로 권위와 힘을 가지게되었고 뿐만 아니라 정치적인 성격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르게 말하면 이들 바리새인들은 전문적인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입니다. 무엇보다도 종교가 최우선이기 때문에 보통 사람들은 바리새인이 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다 지키자면 직업을 가지고는 살아남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이 바리새인들은 당시의 복잡하고 까다로운 크고 작은 종교적 규례를 철저히 다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이래서 바리새인이요, 전문적인 종교인이라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 시작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흐르는 동안 형식만 남고 내용은 없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 때문에 바리새주의라고 하면 형식주의, 외식주의라는 뜻으로 해석이 되고 맙니다. 그러니까 종교적인 거창한 의식은 있는데 그 내용은 다르단 말입니다. 겉과 속이 아주 달라요.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크게 책망하시고는 했습니다. 율법을 지켜도 형식적으로만 지킬 뿐 내용적으로는 지키는 것이 없단 말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그 본뜻은 잊어버리고 제도적인 형식만 열심히 지키라고 애를 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렇게 하다 보니 하나 더 덧붙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다름 아닌 교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다 지키고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것입니다. 나는 바리새인이라는 구별된 생각! 그 때문에 종교적 교만의 대표자가 바리새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비하여 세리라는 것은 말할 수 없이 천대받는 죄인들입니다. 이들은 유대 나라를 점령하고 있는 로마나라를 위하여 세금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이 세금 제도 자체가 잘못되었다기보다는 악한 것이어서 로마에 보낼 세금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덧붙여 수세관이나 세리들이 착취할 몫까지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세금을 강제로 받아들이기 위한 한 수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이 세리들은 포악하게 해서라도 빼앗듯이 세금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세리들은 반민족주의자요, 착복자며 포악한 자요, 그리고 율법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저희들끼리 모여 타락했던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들은 로마의 정권을 등에 업고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히는 사람들입니다. 이거야말로 마땅히 천대받아야 할 대상들입니다. 이에 저들은 정신적으로, 종교적으로, 물질적으로 그리고 민족적으로 대단한 천대를 받습니다. 그래서 세리는 죄인의 대명사가 되어, "세리와 죄인"이라는 말은 항상 같이 따라다니는 말이 되기까지 한 것입니다. 어쨌든 이 세리라는 것은 이렇게 멸시받고 천대받는 죄인 세리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 이 두 사람, 바리새인과 세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기도를 했다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의 기도를 비교하시며 잘못된 기도와 바른 자세의 기도를 말씀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아무리 오래, 길게 기도하여도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첫째로, 자기를 의롭게 여기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십니다. 이는 왜냐하면 사람은 의롭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죄인이면서도 자기의 의를 내세우고 자기의 자랑, 자기의 공로, 자기의 선행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생각하며 그 의로써 하나님 앞에 나아가려 할 때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듣지 아니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왜냐하면 우리가 약간의 선한 일을 한다고 하여도 죄인이 하는 선한 일은 선한 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하나님과 등졌고 원수 되었기 때문에 우리의 선행 또한 근본적으로 우리의 것이 될 수 없음을 알아야합니다.

그 비근한 예로서, 어떤 사람이 누구하고 마음이 틀렸다고 생각해보십시다. 그런데 마음을 아프게 한 상대가 찾아와서 돈을 준다고 하여서 마음이 풀어지겠습니까? 아니면 칭찬을 해준다고 화해가 되겠습니까? 여기에는 아무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일단 그 마음의 중심에서 화해가 되는 것이지 물질 공세로 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런 선심은 상대방에 대한 모독이 될 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죄인의 선행이 공로가 되지는 못합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식의 생각을 합니다. 내가 그 동안 도둑질을 했으니 이제는 구제해야지! 하는, 그러나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인간들이 자기 의를 하나님 앞에 내세우는 것처럼 잘못된 자세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바른 자세의 기도는 자기의 의를 포기하는 데 있습니다. 다 내어버리고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우리의 기도 마지막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로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의를 포기하고 예수님의 의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의 기도는 우리의 의를 완전히 버리고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서 나가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그 다음 오늘 본문을 보면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라고 하였습니다. 사람을 멸시하며 기도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전서 3장에 보면 아내를 업수이 보고 귀히 여기지 않으면 기도가 막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기도가 막히지 않기 위해서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알아야합니다. 누구든지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있는 한 기도는 절대로 하나님 앞에 상달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아주 극단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5 : 2324)고 하였습니다. 불화하고 미워하며 원수시하는 가운데 밤새껏 "주여"하며 떠들어보았자 소용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기도의 윤리성입니다. 누구를 멸시한다면 이는 그를 지으신 자를 멸시하는 것이 됩니다(14 : 31). 그러므로 누구든 사람을 멸시하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여기 어느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제 큰아들이 집을 나가버리고 없는 가운데 회갑을 맞아 둘째 아들이 회갑잔치를 잘 마련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아버지는 아무래도 마음이 괴로워서 울적해합니다. 그러니까 이 둘째 아들이 형 때문에 그러시는 것을 알고는 "그까짓 집나간 형은 잊어버리십시오. 아버지의 회갑에도 돌아오지 않는 형을 무엇 하러 생각하십니까? 제가 형님 몫까지 다 해드릴께요" 하며 아무리 위로를 해도 아버지는 여전히 눈물만 흘리고 있더랍니다. 보세요. 어떻게 하여야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 수가 있겠습니까? 누구 누구를 멸시한다면 하나님의 마음이 괴로우심은 물론 바로 그를 지으신 이인 하나님을 또한 멸시하는 것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사람을 멸시하고는 기도의 응답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언제, 어디서, 누구든지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존경할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됩니다.

이제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간 이들의 모습을 한 번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여기에 보면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교만한 태도입니까? 아무렇게나 여러 사람들 속에 끼이는 것이 괴롭고 싫어서 좀 따로 섰다는 말입니다. 나는 특별하니까 따로 서서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언제든지 이 특별하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 특별이라는 것은 좋은면으로도 특별이고, 나쁜 면으로도 특별입니다.

사람은 그저 보통 사람이 좋은 것입니다. 자기를 이렇게 별개시하는 것처럼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누구나 많은 사람 중에 하나일 뿐입니다. 이는 교육적으로도 그렇고 목회적으로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면 자기는 항상 특별하다고 생각하며 또 특별한 사랑을 받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심방을 요청하면서도 다른 집은 몰라도 우리 집에는 꼭 와야된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까? 많은 사람 중에 하나이지 결코 특별한 내가 아닙니다.

여러분! 바리새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이 바리새주의요, 그가 바로 바리새인입니다. 그저 감사한 마음에서 생각하기를 "나는 남들보다 은혜를 많이 받은 사람인가보다"하는 것은 좋겠지요. 그런데 여기에 보면 같이 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아예 따로 서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아무 옆에나 같이 섞이면 어떻단 말입니까? 그 누구든 하나님 앞에서는 특별도, 차별도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교회에서는 모두가 다 하나님 앞에서의 죄인이요, 동시에 똑같이 구원받은 의인입니다.

그러므로 스스로 별도로 취급할 생각은 버려야합니다. 그런 사람의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렇게 따로 서서 하는 이 바리새인의 기도가 사람 앞에서의 기도라는 점입니다. 본문을 살펴보면 그 기도의 내용이 하나님께서 들으시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듣기를 바래서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신경을 쓰고있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간간이 보면 하나님과 나와 만난 그러한 기도가 아니라 사람 듣기에 좋게 하려는 기도가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기도로 온갖 저주와 욕을 다하고 있는 경우도 보게됩니다.

여러분! 기도는 오직 하나님께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직선적 관계에서 진행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옆의 사람의 기도를 들을 필요도 없고 내 기도를 들어주리라 생각할 것도 아닙니다. 그러기에 제가 생각하는 것은 소리를 너무 크게 내어 하는 기도는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생각해도 그렇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귀머거리도 아닌데 말입니다. 도대체 그렇게 악을 써 가지고 어떻게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니 조금은 문제가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간절히"라고 하는 말, "간절히" 기도한다 했을 때 이 "간절하다"는 말은 음성이 낮아야 간절한 것이지 고함을 지르는 간절함은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협박이지 간절함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 앞에 보이기 위한 기도를 하지 않기 위해서 금식을 하더라도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얼굴을 씻어 초췌한 모습이 없게 하라고 하셨습니다(6 : 17). 그러지 않고 사람 앞에 들어난 기도는 이미 그 상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이 상 이라는 헬라 원문은 "지불 완료"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사람 앞에서 인정받고 칭찬 받았으면 그것으로 끝난 것이지 하나님 앞에서 계산할 것은 없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듣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이 바리새인이 자기의 공로를 내세웁니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보면 이 금식은 1년에 한 번, 온 백성이 하나님 앞에 죄를 자복하는 속죄일에 하게되어 있습니다. 그 외에 특별히 하나님께서 금식을 요구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이것을 보태고 더하여 일 주일에 두 번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정도로 나는 금식을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누가 하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명령이 아닙니다. 자기들 마음대로 정했을 뿐입니다. 금식만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요즈음 우리 주위에 40일 금식기도하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 고의로 이렇게 40일씩이나 금식 기도를 하다가 죽는 사람이 많다는 것입니다. 특별히 금식 끝난 다음 뒷처리를 잘못해서 그렇다는 것인데, 아무튼 이렇게 되면 이것은 자살입니까? 타살입니까? 참으로 문제가 많습니다. 누가 하라는 것을 하면서 그러는 것이겠습니까? 그러고도 나는 40일을 금식했다면서 보통 사람이 아닌 행세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십일조 이야기를 합니다. 창세기 28 : 22를 비롯한 여러 곳에서 십일조 이야기를 하고있는데 이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십일조를 바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 어떤 공로가 될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는 매우 기초적인 것이요, 신앙인의 상식에 불과합니다. 내 수입의 10분의 1, 이것도 못하는 사람이 많아서 문제이지 십일조는 공로가 아닙니다.

그럼에도 무슨 큰 일이나 하는 것처럼 십일조 하는 것을 떠벌이려하는데 그럴 것이 아닙니다. 미국의 럭키 사장은 109조를 바친다고 합니다. 수입의 9할을 하나님께 드리는 사람도 있는데 당연한 101조를 가지고 그럴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바리새인은 나는 금식을 하고 십일조를 한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더욱 무서운 이야기는 "나는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라는 말입니다. 이 사람이 지금 누구를 보고 기도하는 말입니까? 이것은 보통 교만한 기도가 아닙니다. 지금 이 사람은 저 세리와 같지 아니한 자기 자신을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하나님 앞에 드리는 기도가 아니라 사람 앞에서 자기를 내세워 자랑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지 아니하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세리의 모습은 너무나도 대조적입니다. 이제 이 세리는 멀리 서서,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기 때문에 가까이 갈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참으로 흉악한 죄인이요, 무자격한 인간이기 때문에 이렇게 멀리 서서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사람들의 기도는 눈을 뜨고 하늘을 우러러 쳐다보며 하는 것이 보통인데, 이 세리는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가슴을 치며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며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죄인이라고 할뿐 다른 사람 이야기는 하지 않습니다. 누구 때문이라는 말도, 세상 탓도 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죄를 지었습니다. 내가 죄인입니다" 하는 이것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회개한다고 하면서도 하나님 앞에서까지 "나는 원통합니다. 억울합니다" 하며 그 원수풀이를 하나님께 부탁하려고 합니다.

진정한 회개는 "다 나 때문입니다. 내가 죄인이로소이다!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는 회개의 기도와 더불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계속 회개하며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하는 이것보다 더 중요한 기도는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의 기도가 구구하지만 그 내용을 보면 별말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이 한 마디면 족합니다. 그 이상 다른 말이 있을 것이 없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 마지막을 보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이 세리가 저 바리새인보다 의롭다하심을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것은 기도의 마지막 응답은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처지에 있든지 간에 하나님께서 나를 의롭다 여기시면 나머지 문제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이제는 건강도, 사업도 문제될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께서 의롭다 인정하시는 그 의가 우리 기도의 마지막 목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은 기도를 들으시기에 오늘 이 세리는 의롭다함을 얻었고, 사랑을 확증 받아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기도가 이렇게 되어서 하나님 앞에서 항상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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