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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와 나사로(누가복음 16:19-31)
"한 부자가 있어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는데, 나사로라 이름한 한 거지가 헌 데를 앓으며 그 부자의 대문에 누워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불리려 하매, 심지어 개들이 와 서 그 헌 대를 핥더라.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저가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멀리 아브라함과 그의 품에 있는 나사로를 보고 불러 가로되,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나사로를 보내어 그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서늘하게 하소서! 내가 이 불꽃 가운데서 고민하나이다.' 아브라함이 가로되,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통을 받느니라. 이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 가로되, '그러면 구하노니, 아버지여!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저희에게 증거하게 하여 저희로 이 고통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가로되, '저희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가로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들에게서 저희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본 비유는 읽어서 아시는 바와 같이 그리 쉽게 이해되지 않는 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그 첫째는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나 사실적이고 실제적인 것을 예로 드셨는데, 오늘 여기 본문은 그렇지가 않다는 점입니다. 2천여년 전 예수님 당시에는 가르치는 교훈의 대부분의 내용이 신화적이고 설화적이었습니다. 그러한 시대 속에서도 예수님의 교훈하시는 방법의 특징은 언제나 실제적인 사건과 사물을 소재로 말씀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어떤 이들은 당시의 사람들과 비교하여 예수님의 교훈은 가장 과학적인 것이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 이 말씀은 그 많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단 하나 사실성을 벗어난 예외로 나타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면서도 대단히 계시 문학적인 내용입니다. 하늘나라에서 되는 이야기, 아브라함의 이야기, 죽은 다음의 사람들 이야기를 하십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이 익숙히 잘 아는 계시 문학의 한 토막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모든 비유가 다 실제적인 것을 소재로 하고있는 것에 비해, 오늘 이 비유만은 저들이 잘 알고있는 전승적인 계시 문학을 그 소재로 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는 오늘 본문에 의하면 부자는 지옥에 가고 가난한 사람은 천당을 갔다는 이야기인데, 그렇다면 이 부자의 죄가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이 거지가 부자의 밥상에서 떨어지는 것을 먹었다고 하였습니다. 한 상에서 먹지는 못했어도 내어쫓지는 않은 것 같으니 그만하면 그래도 괜찮은 것 같습니다. 사실 거지를 끌어들여서 같이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구제한다는 것도 그렇습니다. 가서 하거나 지나가다가 하는 것이지 집안에 데려와서 같이 자면서 하지는 않습니다. 만약에 그러한 구제를 논한다면 이 세상에 구제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우리가 거지를 도와주는 것까지는 좋지만, 한 상에서 먹으라는 그것은 어쩌다 한 번이지 그렇게 해야 구제가 되는 것으로 한다면 모르긴 해도 아무도 구제하지 못했고, 또 못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헌데를 앓으며 냄새나는 거지를 내어쫓지 않은 것을 보면 제법 괜찮은 부자입니다.
그런가하면 나사로의 의는 무엇이냐는 것입니다. 부자는 무슨 죄를 지었기에 이렇게 지옥에 있어야하고 나사로는 무슨 의로 아브라함의 품에 있느냐는 말입니다. 이 거지가 예수를 믿은 것도 아니고 그 동안 신실하게 살아왔는지는 모르지만 남달리 특별한 의가 있는 것인지 아니면 가난 자체가 의라도 되느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또한 부 자체가 죄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 앞에서는, 가난하면 자동적으로 천당 가고 부하면 지옥 간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부자도 의인이 있고 가난해도 죄인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와 가난에 의와 불의를 직결시키는 것은 잘못된 교리입니다.
요즈음도 그런 경향이 없지는 않은데 그것은 비성서적인 것으로 전혀 잘못된 생각입니다. 바로 그런 입장에서 오늘 본문이 주는 인상은 문제점이 있다라는 것입니다. 얼핏 보면 이 본문의 내용이 가난한 사람은 자동적으로 천당 가고 부자는 자동적으로 지옥 가는 것처럼 꼭 그렇게 나타난다는 말입니다. 그 때문에 가난한 자의 의가 무엇이며 부자의 죄는 무엇인가 하는 의문을 낳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는 간단하게 쉬 넘어갈 수 있는 대목이 아닙니다.
이럴 경우에 성경을 해석하는 우리의 태도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성경 말씀의 해석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지혜의 범위 내에서 해석할 수 있는 데까지만 할 것이며, 해석상 무리가 있고 잘 되지 않는 것은 그냥 두는 것이 좋은 것이요, 옳은 것입니다. 풀리지 않는 것을 억지로 풀 필요가 없습니다. 이해가 잘되면 고맙고 안되더라도 구원을 받기에는 아는 말씀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그것을 알고 어느 대목 하나 해석하지 못했다하여 안달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지혜를 다하여 해석할 수 있는 데까지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여기서 우리가 먼저 한 가지 알아야할 사항이 있습니다. 그것은 도대체 이 비유는 누구를 대상으로 말씀한 것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어떤 장소에서, 어떤 계기에, 누구에게 하시는 말씀인가를 생각해보면 이 비유를 푸는데 많은 도움이 됩니다. 오늘 말씀은 본문 전후의 문맥상으로 보아 아무래도 바리새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 같습니다. 이에 16 : 14절 보면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했고 그리고 비웃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돈을 좋아하고, 그러면서도 거룩한체 위선적이며 외식적인 바리새인들을 상대로 이 말씀을 하시고 있는 것 같습니다. 끝까지 회개하지 않는 위선과 교만의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네가 이 부자와 같다", "네가 지금 이 부자와 같은 운명에 들어가고 있지 않느냐?"는 뜻에서 하신 말씀으로 보아집니다.
그렇다면 이제 이 부자와 거지 나사로를 비교해보겠습니다. 여기 본문에 의하면 부자는 자색 옷을 입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대단한 귀족의 신분임을 말해줍니다. 옛날에는 신분에 따라 옷의 모양도, 옷의 색깔도 가려 입었습니다. 요즈음도 특별히 서양에서는 로열 칼라(royal colour) 라 하여 몇 가지의 색깔을 구별하여 말하고 있는데, 이 자색 옷은 왕실의 옷이요 귀족의 옷입니다. 따라서 옛날 서민들은 이러한 색깔의 옷을 입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그러한 자색 옷과 게다가 고운 베옷을 입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는 사치스러운 것을 말하며, 그 다음에 한 가지 크게 강조되는 것은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10계명의 제 4계명을 기억할 때에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는 부분만을 생각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 전에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하고 지키라는 것입니다. 엿새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리고 또 안식일은 쉬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엿새 동안 힘써 일하라는 그것도 계명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계명을 어기며 날마다 놀고먹는 사람입니다. 놀고먹되 단순히 놀고먹는 것이 아니라 호화로이 연락을 즐겼으니 이는 사치요, 방종이며, 낭비입니다.
여기에 비해 거지 나사로의 지금 형편은 처절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런 가운데서 약간의 의미를 발견하게 하는 것은 나사로라는 그의 이름입니다. 나사로라는 이름의 헬라말 뜻은 "하나님은 나의 도움이십니다"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조금 다르게 의역을 하면 "하나님 외에는 나를 도울 자가 아무도 없습니다"라는 말이 되기도 하는데, 이것이 이 거지 나사로의 이름이 지닌 의미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사람에게는 괜찮았던 신앙의 그 무엇이 흐르고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그 이름 자체로 보아 자신이 믿지 않았다면 그 부모라도 믿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기에 아들에게 그런 이름을 지어주지 않았겠습니까?
여기에서 우리가 미루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부모가 믿은 것이 틀림없다면 그 아들인 본인도 믿었다고 생각해야 옳을 것입니다. 그가 얼마나 잘 믿었는지, 얼마나 기도를 하고, 얼마나 봉사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 이름 자체는 신앙의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임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거지요 게다가 헌데를 앓고있습니다. 피부병이란 참으로 괴로운 병입니다. 겉으로 나타나는 병이기 때문에 불쾌하고 나쁜 인상을 주며 그 때문에 사람을 가까이에서 만나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피부병을 가지고는 사랑 받는 사람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이 불쌍한 나사로라는 사람은 헌데를 앓으며, 그 헌데를 개가 핥는 가운데 부자의 대문간에서 개와 더불어 지내면서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얻어먹으며 언명을 하는 처절한 사람이었다는 것입니다.
한 사람은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을 하고 한 사람은 이렇게 비참하게 살았다는 것인데, 문제는 이 두 사람이 모두 죽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죽은 다음에는 그 처지가 바뀌게된 것입니다. 그래서는 이 부자는 지옥에서 고통스러워하며 이 혀에 물 한 방울만 적셔달라며 애원을 하고, 거지 나사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서 기쁨을 누리며 지내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바뀌어진 처지에서 고통스러워진 부자는 살았을 때 생각을 하며 아브라함에게 부탁하기를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내 혀를 좀 시원하게 해달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할 때에 아브라함이 하는 대답이 아주 위트(wit)가 있습니다. 25절 이하를 보면 "얘, 너는 살았을 때에 네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저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고민을 받느니라." 너는 세상에 있을 때에 실컷 향락을 했으니 이렇게 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 이것을 기억하라!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서로 교통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있다는 것 역시 계시 문학에 있는 내용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의 사후에 대한 생각은 사람이 죽으면 그 영혼이 천사에 옹위되어 하늘로 가서는 먼저 간 믿음의 조상들과 같이 지낸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여기서도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오늘 본문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내세관이 잘 반영되어 있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중요한 문제는 본문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첫째는 가치관의 문제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근본 의도가 거기에 있다고 봅니다. 그러니까 누가 복되고 누가 행복한 사람이냐는 것입니다.
로마서 8 : 18에 보면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하였습니다. 문제는 최종 승리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서는 그 날 어떻게 되느냐는 것이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세상살이를 두고 보더라도 젊어서 하는 고생은 문제가 아니고 늙어서 하는 고생을 불행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면 무엇하겠습니까? 그것은 잠깐의 꿈과 같이 지나가고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하늘나라에서 길이 영광을 누릴 수 있는 자가 복되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원한 것에 근거한 가치관, 천국에 기준을 둔 그러한 가치관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야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오늘이 좀 고통스럽고 가난하며 병신이 되어 멸시를 당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매를 맞고 순교를 해도 문제될 것이 아닙니다. 이는 오직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은 영원한 하늘나라에 있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도입니다. 다른 예로서 예수님께서 친히 여덟 가지 복을 말씀하실 때에도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핍박당하는 것은 매를 맞는 것 아닙니까? 재산을 빼앗기는 것 아니겠습니까? 능욕을 당하는 것 아닙니까? 그럼에도 핍박당하는 자가 복이 있는 것은 천국이 저희 것이기 때문입니다. 천국에 기준할 때 그가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 너무나도 엄격하게 말씀하신 적이 있습니다. 만일 네 손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만일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버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버리라. 이것들을 가지고 지옥에 던지우는 것보다는 불구의 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하셨습니다(막 9 : 43~47). 이를 바꾸어 표현하면 손 하나 없는, 발 하나 없는, 눈 하나 없는 병신으로 살다가 하나님 앞에 가는 것이 온전한 몸으로 죄짓다가 지옥으로 가는 것보다 낫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온전한 하늘나라에 기준을 둔 그러한 가치관입니다. 따라서 순간 순간 잘 살고 못살며, 행복하고 불행한 것에 대해서 너무 신경쓸 것이 아니라 영원한 미래, 영원한 가치의 것에 기준을 두고 오늘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한다는 말씀의 의도입니다.
이제 두 번째로는 지옥의 고통입니다. 그 곳은 대단히 뜨거운 곳이요, 참을 수 없이 고통스러운 곳이며 후회스러운 곳입니다. 고통의 절정은 후회입니다. "왜 내가 예수를 믿지 않았던가!" 하며 불꽃 가운데서 고통하며 후회하는 그것이 지옥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럼 세 번째로 생각할 것은 이 부자의 죄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본문을 중심으로 깊이 생각해보면 먼저는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다는 것입니다. 이는 사치하고 방종하며 낭비하는 나날을 보냈다는 말입니다.
시간적인 낭비요, 물질적인 낭비이며, 정욕적인 낭비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치와 방종, 낭비, 이 모두가 죄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알아야합니다. 내가 필요 이상으로 먹으면 다른 한 사람에게는 먹을 수 없는 현상이 생깁니다.
그러기 때문에 연락과 사치스러운 생활은 도둑질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이 부자의 죄는 부의 의미를 모르고있다는 것입니다. 부란 곧 사명에 있는 것입니다. 결코 나 혼자만을 위해서 주어진 것이 부가 아니란 말입니다. 이 주어진 부를 가지고 무엇인가 중요한 일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부에 따르는 그 사명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돈이든, 지식이든 묻어두어서는 안되고 잘못 사용해서도 안됩니다. 주신 은사는 받은 바대로 쓰여져야 합니다. 그렇지 못할 때 이는 죄가 되는 것입니다. 여기 이 사람은 부를 가지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오히려 사치와 연락으로 낭비했습니다. 이것이 죄가 됩니다.
이제 또 하나는 그의 긍휼이 문제가 됩니다. 잠언 17:5에 기록하기를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라고 하였습니다.
긍휼이 없는 것, 도와야할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살인이나 도둑이 죄인 것만은 아닙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서처럼 레위 사람이나 제사장은 지나갔을 뿐 살인을 하거나 도둑질을 하여 해를 끼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돕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이 죄가 됩니다. 보다 높은 차원에서 말씀드린다면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외면하며 지나간 행위 자체 그대로가 곧 살인죄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의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이 얼마나 거지 나사로를 도왔는지 모르나, 그는 진정한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이웃으로 그를 돕지 못했고 긍휼을 베풀지도 않았으니 그것이 죄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죄가 있습니다. 부와 의를 혼돈하는 것입니다. 부와 의는 별개의 것입니다. 부자가 곧 의로운 사람은 아닙니다. 부자가 되었다고 하여 어떤 선행이나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 때문에 축복 받은 결과로 착각할 것이 아닙니다. 부와 의는 별개의 것으로 죄인도 얼마든지 부자가 될 수 있고 또한 사실이 그렇습니다. 흔히들 무엇이 좀 잘되면 "하나님 내게 복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오히려 회개할 일이 많습니다. 사실은 그 돈을 벌기 위해 지은 죄가 얼마입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업 잘되고 돈 많이 벌게되면 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가하면 돈 다 잃어버리면 그때에는 죄 생각을 하며 내 죄 때문이라고 하는데 그러나 그럴 것도 아닙니다. 내가 가난하고 실패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죄인인 것은 아닙니다. 조심할 것은 가난을 곧 죄의 결과와 저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나사로가 비록 거지는 되었을지언정 그가 죄인은 아니며 저주받은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또한 부자는 부자였지만 의인이 아니라 그가 오히려 죄인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와 의를 혼돈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이제 가난하다고 죄인 취급할 것이 아닙니다. 자신에 대해서도 가난으로 인해 비굴해질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든 부하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의롭게 사느냐 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사업에 실패했다고 해서 스스로 죄인으로 취급하며 자신을 학대할 것도 아니고 또 돈이 좀 벌렸다고 하여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신 결과라며 "오,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고 끝내려하지 말 것입니다. 바로 그 때에 진실한 회개를 할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부자는 그런 의미에서 불신앙의 사람입니다.
그 다음에 보면 이 부자는 지옥에 떨어져서는 이제 후회를 합니다. 분명 후회와 회개는 다릅니다. 지금 이 사람은 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후회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예수믿을 것을!" 이제 와서 아무리 후회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기회는 이미 지나갔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가룟 유다도 후회는 했습니다. 예수를 판 것은 후회했으나 돌이킬 수가 없었습니다. 기회는 지나갔습니다. 그러기에 회개는 역시 회개의 기회가 있습니다. 살았을 때에, 회개할 수 있었을 그 때에 회개했어야 합니다. 그 기회를 놓치면 이제는 회개할 수 없게됩니다. 어떤 경우에 보면 정말 회개하여야 할 사람이 회개하지 않고 있다가 그만 정신이 몽롱해지고 마는데, 이는 옆에서 보기에도 참으로 답답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상에서 회개할 수 있는 바로 지금, 오늘이라 하는 때에 회개할 바를 깨끗이 회개하여 남겨둔 회개가 없는 준비된 생을 살아야할 것입니다.
이제 다시 본문을 보면 이 부자가 그의 형제들을 염려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자기는 비록 이런 처지에 놓이게 되었지만 아직 살아있는 그 다섯 형제들은 이런 곳에 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사로를 자기 집으로 좀 보내어 이 곳의 형편을 알리고 저들은 이 곳에 오지 않도록 해달라는 것입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대답하는 말이 모세와 선지자, 즉 복음과 전도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서 들을 것이고 또 이미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는 그럴 필요도 없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때에 이 부자가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의 말이 대단히 걸작입니다. 그의 말인 즉 "죽은 자 중에서 누가 다시 살아가서 말하면 믿을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은 나사로를 어떻게 좀 보내주십시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때의 대답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온 사람이 있어도 믿지 않을 사람은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흔히 무엇인가 기적을 보여주면 믿겠다는 이야기를 듣습니다. 그래서는 병이다, 사업이다, 입시다 하며 이런 저런 조건을 내어 걸고 기적을 요구합니다. 거기에 비하여 이제 죽은 자가 살아났다면 이는 기적 중의 더 큰 기적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모두가 믿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그렇지 않습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이것도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죽은 자, 산 자의 이야기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얼마나 많은 기적이 있었습니까? 그 많은 기적을 예수님께서 친히 행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 기적에 따라 믿었던 것은 아닙니다.
어디까지나 믿을 사람만 믿었고 믿지 않을 사람은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밤낮으로 따라다니며 하늘로부터의 표적을 요구했습니다. 보여주고 보여주어도 또 다른 것을 원하며 따라다녔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결론적으로 말씀하시기를 "악하고 음란한 세대가 표적을 구하나 선지자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느니라"(마 12 : 39)고 하셨습니다. 이는 내가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표적밖에는 보일 것이 없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와 같이 기적은 어떤 사람으로 하여 믿음을 가지게 하는 결정적인 영향을 주지는 못합니다.
사실 알고 보면 기적을 경험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죽을 뻔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으며, 하나님이 살아 계신 증거를 맛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 때의 그 감격을 쉬 잊어버리고, 며칠 있다가 보니 아예 그것이 아닌 것 같더란 말입니다. 그러기에 기적은 믿음을 주는 결정적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믿음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능력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그 많은 기적을 보고도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는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을 보고있습니다. 그런데 또 무슨 죽은 자가 살아나기를 바라며 믿겠다는 것입니까? 그야말로 이 말은 착각입니다.
기적이란 사실 믿는 자에게만 기적일 뿐이요, 또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자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능력을 비방하는 또 한 번의 죄를 짓게하는 결과만을 만들어주고 맙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전도하는 일입니다. 오늘 본문 중 지옥에 가있는 이 사람의 애원입니다. 자기는 비록 이렇게 지옥에 와있지만 자기의 형제들은 오지 않도록 해달라는 간절한 소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결국 전도입니다. 만약 우리가 저들에게 전도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믿지 못하고 말았다면 그 책임도, 그 원망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전도할 것입니다. 이제는 더욱 종말론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언제나 저 영원한 세계에서 되어질 일을 마음에 깊이 새기면서, 오늘을 믿음으로 진실하게 살아야할 것입니다. 그리고 열심히 전도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되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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