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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와 개(마태복음 15 : 21 - 28)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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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러기와 개(마태복음 15 : 21 - 28)

 

예수님께서 거기서 나가서 두로와 사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니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소릴 질러 가로되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들렸나이다 하되 예수는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 하신대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자가 가로되 주요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이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여자야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시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오늘 본문 말씀은 비유와 이적이 함께 나타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시는 중에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흉악하게 귀신 들린 여자아이를 고쳐 주시게 되는 과정에서 본 비유를 말씀하시게 됩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먼저 마태 복음 105절 이하의 말씀에 기록되어 있는 제자들의 첫 파송 장면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열 둘을 내어 보내시며 가라사대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차라리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도 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는 물론 일시적인 말씀인 줄 압니다만 우선 경험 없는 첫 출발을 하는 제자들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방인들과 사마리아인에게는 가지 말고 잃어버린 양, 다시 말하여 유대인에게 먼저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뒷날 부활 신앙을 체험하고 성숙해진 다음에는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을 하시게 됩니다.

그러고 보면 아마도 그 당시의 제자들은 미숙한 상태여서 처음부터 이방인의 지역으로 가는 것을 허락치 않으신 것 같습니다. 아무튼 제자들을 향하여 이방인의 땅으로는 가지 말라고 당부하시던 예수님께서 오늘 본문에 의하면 이것은 가나안 땅이요 완전히 이방인의 땅인 시돈 지방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같은 내용의 기록인 마가 복음 724절을 보면 "예수께서 일어나사 거기를 떠나 두로 지경으로 가서 한 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더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미루어 볼 때 오늘 본문에는 그저 길가에서나 되어진 일로 표현되고 있습니다만 마가 복음에는 예수님께서 이방 사람의 집에 들어가시어 적어도 필요한 휴식을 취하시며 유숙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은 사마리아 땅은 더러운 땅이라 하여 밟는 것조차 싫어했으며 이방 사람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이방 사람의 집에 가서 유숙을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이방 사람도 사랑하였으며, 저들과 함께 거하시면서 저들에게 긍휼을 베푸시고 여러 가지 어려운 병들을 고쳐 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사랑이 거기에서도 계시되었음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내용은 가나안의 한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와 흉악한 귀신이 들린 자기 딸을 고쳐 달라고 하는 간절한 애원으로 시작이 됩니다. 고고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당시의 이 가나안 사람들은 주로 아스도렛(Ashtoreth)이라고 하는 풍요의 여신을 섬긴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하긴 어디 이 여신 하나뿐이었겠습니까? 잡다한 많은 우상을 섬기던 사람들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 여인이 자기의 불쌍한 딸을 위해 이 우상, 저 우상 앞에서 얼마나 열심히, 그리고 많이 빌었겠습니까? 그러나 종내 고침을 받지 못한 채 지내오다가 이제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는, 예수님께로 달려와 많은 어려움과 방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마침내는 예수님으로부터 "네 믿음이 크도다"하시는 말씀과 함께 딸이 나을 것을 허락 받게 됩니다. 여기에서 "믿음이 크도다"하실 때의 크다는 뜻의 헬라 원어는 메가스라는 말로 이는 "대단히 큰, 위대한"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즈음 흔히 쓰는 말 가운데 보면 아주 큰 규모의 어떤 것들을 메가톤급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큰 것 중에서도 가장 큰 것! 그러니까 마치 부자들 중에서도 큰 부자들 거부라고 하고 그 거부들 중에서도 제일 부자를 갑부라 하는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여자야, 네 믿음이 참으로 크고 위대 하도다! 하시는 칭찬에 이어 우리 모두가 듣고 싶어하는 귀한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그것이 무슨 말씀이냐 하면 "네 소원대로 되리라"는 참으로 귀한 말씀입니다. 믿음은 분명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그릇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을 떠나서 이야기할 것이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믿음으로 쫓아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14:23)며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믿음으로 생각하고 믿음으로 말하며, 믿음으로 행함으로 그 믿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그릇이 되게 해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은혜의 축복은 믿음을 통하여서만 받는다고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신앙이요, 고백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믿음이라고 할 때에는 두 가지의 구분된 개념을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는 구원받을 만한 믿음으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때 주 예수를 그리스도로 받아들이는 그러한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대하시면서 믿음의 성격을 두 가지로 나누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어떤 때의 믿음을 보시고는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9:5)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9 : 22고 말씀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말함입니다.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죄 사함을 받으면 동시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또한 십자가 위에 달리신 고통의 순간에 일생 동안 죄를 짓고 살아 왔으나 그 마지막 순간에 예수님께 참된 회개와 신앙을 고백하는 한편 강도의 믿음을 보시고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하시는 귀한 허락을 하시게 되는 이 또한 구원 얻는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엄격히 따져 구원과는 관계가 없는 은사에 속한 것들이 있습니다. 가령 병 고침을 받는다고 하였을 때 그것을 곧 구원받은 것으로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병을 고침 받은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소원 성취한다는 이야기가 되겠지요. 그러니까 우리가 죄 사함 받고 하늘 나라에 간다고 하는 그런 궁극적 의미에서의 구원이 아니라 현실 여기에서 병 고침을 받는 것을 비롯하여 내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 즉 말하자면 은혜보다는 은사를 받게 되는 그러한 그릇으로서의 믿음이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있는 이야기입니까? 네 소원대로 될 것이다!

이와 같이 믿음에는 구원을 얻기에 필요한 그릇으로서의 믿음과 은사, 곧 축복의 소원을 성취하는 그릇으로서의 믿음이라는 두 개념이 있으며 이는 다 같이 필요한 믿음입니다.

그런데 이 믿음이 문제입니다. 이제 믿음을 은혜와 축복을 받는 그릇이라고 할 때에 우리는 간단하게 세 가지로 정리하여 말할 수가 있습니다.

그 하나가 겸손한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정으로 겸손한 믿음을 원하시며 그 믿음을 기쁘게 받으시고 그 믿음 위에 소원을 허락하시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여 주실 줄로 믿습니다"하는 그런 차원의 믿음을 두고 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하나는 지혜로운 믿음입니다. 흔히들 하는 대로 다른데 가서 구할 수도 있고 거기에 마음을 쏟을 수도 있겠지만 꼭 예수님께로 나와야 되겠다고 생각하며 그 일이 가장 귀한 일인 줄로 아는 이것이 지혜로운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고 주님께 나오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지혜! 예를 들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는 혈루증 앓는 여인의 그 믿음입니다. 물론 그 믿음은 나같이 추한 여인이 어찌 감히 예수님 앞에 나아가 말로 부탁을 드릴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겸손한 마음이기도 합니다마는 반면이 기어이 예수님께로부터 은혜를 입어야겠다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지혜로운 마음이요, 지혜로운 믿음입니다.

다음 또 하나는 감당할 수 있는 큰 믿음, 곧 인내하는 믿음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타나고 있는 이 여인은 큰 믿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어떤 것이었느냐 하면, 이 여인이 예수님께로 나아가 바른 관계를 맺는 데에는 많은 장애가 있었으나 그 장애들을 다 넘어설 수 있는 그러한 믿음, 한 마디로 말하여 시험을 이기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로 나아가는 데에는 이 모양 저 모양의 많은 시련을 당하게 되지만 이 시련을 극복하면서 끝까지 쓰러지지 않고 이겨냄으로 마침내 예수님으로부터의 허락을 받아내는 이러한 믿음이 인내하는 믿음이요, 위대한 믿음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우리가 드리는 기도의 응답을 두고 생각해 볼 때 여기에 대한 매우 재미있는 표현을 빌릴 수가 있습니다. 그것은 기도의 응답을 세 가지로 본다는 것으로 첫째는 기도 드리는 사람의 믿음의 정도가 수준급에 올라 있으면 "주님 주십시오"하면 곧장 "그래라, 그래라"로 하시는 응답이 있고 다음 두번째 응답은 "기다리라"는 것으로 이는 아직 그 정도나 여러 가지 여건에 있어서 모자람이 있으니 그것이 채워질 때까지 조금 더 기다리라는 응답입니다. 그리고 세번째 응답은 "버리라"는 것으로 이는 네가 원하는 바의 소원이 잘못 되었으니 그것은 "안된다"고 하는 응답입니다. 잘못된 소원을 버리라! 이것도 응답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응답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하나님 앞에서 열심히 구하는 바가 있어야 하겠습니다만 어느 시간에는 내 기도의 제목을 버릴 수도 있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분명히 자신의 뜻을 밝히고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며 자신의 소원을 버리는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그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여인의 믿음이 어떤 믿음이었는가를 살펴보면 이 여인의 믿음은 겸손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선택하고 끝까지 그 예수님으로부터의 응답을 받아내겠다고 하는 지혜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내가 대단히 큰 믿음을 가지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은 믿음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전통적인 믿음은 아닙니다.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사람들의 믿음이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해 놓고는 "네가 계명을 아니니"하시는 예수님 앞에서 그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18:18-21)라고 하는 것과 같은 그런 상태의 믿음입니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 아무 생각도 없이 습관적으로 지켜오며 형성되어버린 믿음! 이것이 문제입니다. 거기에는 아무런 의식도 없어요. 단순히 어렸을 때부터 교회에 다녔으니 몸에 배인 대로 오늘도 나와 앉아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와 같이 문화화 되고 습관화되어 있는 믿음은 또 하나의 고질적인 큰 병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여인의 믿음은 성경적 지식을 많이 안다는 의미에서의 믿음도 아니며, 저들 이스라엘 사람들의 규례를 따라서 그 의식을 다 준행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의 믿음도 아닙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적 믿음도 아니요, 제사장적인 믿음도 아닙니다. 이 여인의 믿음은 그저 이방 사람들이 가질 수 있는 단순한 믿음 그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이 믿음의 특징을 좀 더 세분하여 살펴보자면 첫째는 더는 다른 것을 생각지 않는 단순함이요, 두 번째는 적극성입니다. 누가 뭐라고 하여도, 어떠한 시험이 있어도 끄떡하지 않고 끝까지 밀고 나아가는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믿음입니다. 그리고 나머지 세 번째는 겸손하여 자기를 낮추는 믿음입니다. 그리하여 자기 존재를 아주 형편없이 평가하고 있는 이러한 특징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의 이 여인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를 무엇이라고 하든 상관없이 예수님 앞에 나와 자기의 소원을 기어이 이루고자 하는 단순한 마음으로 주님 앞에 부르짖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아오는 데에는 몇 가지의 시험이 있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먼저 예수님께서 아무런 대답을 하시지 않았다고 하는 점입니다. 이 여인이 예수님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맨 먼저 하는 말이 나를 불쌍히 여기고서, 내 딸이 흉악히 귀신이 들렸나이다"라고 하지만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23절에 기록된 대로 단 한 말씀도 대답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대답이 없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이지요. 그래서 어떤 이들은 "나는 10년 동안이나 기도를 하였는데도 아직 응답을 못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며 답답해하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아무런 대답이 없어요. 가슴에 화끈하게 뜨겁게 와 닿는 것도 없고 그렇다고 어떤 사람들처럼 신비스러운 꿈을 꾸거나 환상을 보며 예수님을 대하는 등 무엇인가 이렇다 할 것이 없단 말입니다. 게다가 늘 건강하고 보니 어려운 질병에서 죽을 뻔하다가 살아난 경험도 없고 하여 도대체가 무미건조한 가운데 믿음의 증거를 얻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여기 이 여인이 예수님께 나와 내 딸이 흉악한 귀신이 들렸사오니 불쌍히 여겨 달라며 큰 소리로 애원을 하지만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어요. 여러분! 이렇게 대답이 없으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겠습니까? 이것은 하나의 타이밍(timing)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믿음의 그릇의 문제가 되기도 하고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조금 더 생각하라" "조금 더 기다려라!"고 하는 그런 의미가 있는 것으로도 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대답이 없는 것으로 보아지고 느껴지는 그러한 상태를 극복할 수가 있었으니 이것이 실로 위대한 믿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시험은 제자들의 방해입니다. "제자들이 와서 청하여 말하되 그 여자가 우리 뒤에서 소리를 지르오니 보내소서"라는 것입니다.

이 장면을 두고 성경에는 없는 말씀이지만 짐작이 가는 이야기를 해본다면 이제 제자들은 아무리 말려도 말릴 수가 없게 되자 예수님께서 좀 말려 주십시오 하는 그런 이야기가 아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그 상황에서 제자들이 먼저 말리지 않았을 리가 없어요. 무엇이라고 자꾸 시끄럽게 소리를 지르며 다가오자 예수님이 어떤 분인데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이러느냐고, 제발 좀 조용히 해 달라며 이 사람 저 사람이 한 마디씩 하며 말렸을 것입니다. 어쩌면 붙들기도 하면서 말렸겠지요. 그러나 이 여인이 막무가내로 뿌리치며 발악을 하고 나오자 할 수 없이 예수님께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다. "아무렴 예수님의 말씀이야 듣지 않겠습니까? 무엇이라고 한마디하면서 이 여자를 좀 돌려보내십시오"하는 이야기입니다. 제자들로 말하자면 사람들을 예수님께로 인도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예수님께로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을 오히려 못 가게 만들고 있단 말입니다. 이것이 시험입니다. 그 때문에 먼저 믿은 사람이 나중 믿는 사람의 시험거리가 될 때가 많은 것입니다. 처음 교회에 나올 때에는 직선적으로 하나님과 성경 말씀만을 생각하며 그 앞에 자신을 내어놓고 겸손히 나오다가 이제 1, 2, 3년 하는 세월과 더불어 제법 믿음의 생활을 한답시고 교회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면 그 때엔 다른 사람을 향해 "10년 믿어도 저 모양이구먼!" 혹은 "20년을 믿고도 저럴 바에야 뭐"하는 식으로 생각하기가 쉬워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믿은 사람 중에서도 잘 믿는 사람들을 보아야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보며, 그들과 계속 사귀게 되면 어느 사이에 점점 믿음이 떨어지게 됨은 물론 크게 잘못된 믿음의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 전도를 제일 잘하느냐 하는 것을 분석해 보면 오래 믿은 사람보다는 처음 예수 믿고 신앙 생활한 지 일 년 반이 못 되는 사람들이 가장 열심히 잘한다는 것이 통계적으로 나온 결론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 믿은 지 오래된 사람들의 신앙이란 이럭저럭 식어지고 타성화 되기가 쉬운 것입니다. 왜냐 하면, 이제는 하나님과 그 말씀이 아닌 사람을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보기 시작했어요!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 제자들의 모습이 어떠합니까? 먼 곳에 있는 사람까지라도 예수님께로 인도해 와야겠는데 오히려 가까이 오는 사람을 못 오게 막았으니 이것이 이 사람에게는 어려운 시험입니다. 그러나 이 시험은 반드시 넘어서야 합니다. 여러분! 만약 이 여인이 제자들이 완강하게 말린다고 하여 "정말 괄세가 심하구만. 안 가면 그만 아닌가" 하고서는 돌아가 버렸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 어려운 시험을 극복하였습니다. 내가 만나러 온 것은 예수이지 당신들이 아니란 말이요! 그리고 뿌리치고 기어이 예수님께로 나아갔더란 말입니다.

이제 세 번째 시험은 선택받은 자가 아닌 이방 여자라는 사실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모처럼 한 마디 하시는 말씀이 "나는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 외에는 다른 데로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노라"고 하시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 여인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낙심적인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이는 바꾸어 말하면 나는 이스라엘 집에 보냄을 받은 것이지 너 같은 이방 여자를 위하여 보냄을 받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참으로 냉정한 말씀입니다. 다른 이야기라면 몰라도 이 말씀 앞에서는 아마도 누구나 다 쉽게 낙심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나안 여인은 이 어려움까지도 넘어선 것입니다. 그는 분명 선택받은 백성이 아닌, 선민권 외에 있는 이방 여자입니다. 따라서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선택된 무리 중의 한 사람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아무래도 복을 받을 수 없는 자라며 스스로 자기를 제외시키는 마음이 있을 수가 있는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에서 하나의 시험으로 대두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도 보면 누구든 잘 믿어서 복도 받고, 은혜도 받고 하것만 나는 항상 이 모양인 것을 보면 아무래도 나는 구제불능인가 보다며 자기를 은혜의 영역 밖으로 내어놓고 스스로 실망하는 수가 있는데 이것이야말로 위험한 생각입니다. 나는 소외된 인간이다! 나는 버려진 인간이다! 그러므로 나는 구원받을 수 없는 자라고 하는 이러한 생각을 극복해야만 합니다.

마지막 네번째 시험은 개와 같은 취급을 당하는 참으로 견디기 힘든 모욕적인 시간입니다. 25-26절 말씀에 보면 "여자가 와서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주여 저를 도우소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여기에서 말씀하신 자녀는 이스라엘사람이요, 개는 이방인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렇게 개 취급을 당했단 말입니다.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어려운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실은 유대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을 가리켜 개 같다고 하는 것은 일반적인 개념으로 지금도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유대사람들의 교만한 마음에서 나온 이방인에 대한 별명입니다. 저들의 이와 같은 교만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여전히 대단한 것만은 틀림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나라에 가든지 유대 사람들이 많은 욕을 먹기도 하고 핍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핍박을 받는 데에는 당연한 이유가 있는 것이지요. 자기가 교만하다보니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쓴 글 중에 보면 온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대해서는 다 원수라는 표현을 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는 저들이 어디를 가나 핍박을 받게 됨으로 하는 말인데 그것은 사실 저들이 유별나기 때문이요, 한편으로는 그 교만함에 이유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아무튼 당시의 유대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을 향하여 개라고 부르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제 다른 사람도 아닌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부르셨다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면 그 누가 개라고 하든 상관치 않고 다 극복할 수가 있겠어요. 그러나 예수님이 입에서 그 말이 나왔으니 이것은 끝난 일이 아니냐는 말입니다. 여러분! 그렇지 않습니까? 가령 나에게 좋지 못한 일이 있었다고 할 때에 이를 아는 많은 사람들이 나를 나쁘다고 하겠지요. 어쩌면 그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고 그런 대로 좋습니다. 그러나 내가 존경하는 분, 믿고 사랑하는 사람까지 나를 나쁘게 취급하고 나오게 되면 그 때엔 살수가 없어요. 내가 마지막으로 기대했던 그 분마저 저들과 똑같이 평가하면서 나를 쓸모 없는 인간으로 몰아붙이는 처지가 되었으니 어떻게 더 살수가 있겠느냔 말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의 이 여인은 모름지기 개와 같은 여자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 왔기에 자기 자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님까지 이렇게 개라고 하시는 것은 참으로 극복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면 왜 유대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을 가리켜 개라고 부르는가 할 때에 여기에는 몇 가지의 이유가 있습니다. 성격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는 개에 대한 개념을 몇 가지의 특징으로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 첫째가 만나거나 모일 때마다 싸운다는 것입니다. 우리말에도 "개처럼 싸운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어쨌든 화목함이 없이 서로 헐뜯으며 싸우는 이방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보며 개라고 한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유는 음란하기 때문입니다. 이 음란이라는 것은 비단 개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마는 그 행위가 눈에 보이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유대 사람으로서 이방 사람들을 볼 때에 제일 추하고 더러운 것 둘이 있는데 그 하나는 우상을 섬기는 행위이고 다른 하나는 이성 관계입니다. 특별히 이방사람들은 종교 의식 자체로서 공공연히 간음이 행해졌기 때문에 그 추함이 말이 아니었으며 더욱이 이성 관계에 있어서도 근친상간이 예사로이 일어나고 있어서 가까운 친척은 물론 심지어는 아버지와 딸 사이에도 이러한 일들이 흔하게 일어나고 있으니 저것이 개이지 어디 사람이냐는 것이며 철저한 율법 속에 살아가고 있는 유대 사람의 눈으로 볼 때에는 그야말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제 세 번째 이유는 토했던 것을 다시 먹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회개하고 다시 죄짓고, 또 회개하고 또 짓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계속 후회하고 뉘우치면서 똑같은 죄를 계속 짓는 것이지요. 그럴 때에 개와 같다는 말을 하게 되는데 어쨌든 그러한 점에서 유대 사람들이 이방 사람들을 개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예수님마저도 "이스라엘 사람에게 가야 하는 축복을 빼앗아서 개 같은 너에게 주는 것은 마땅치 않다"고 하시는 참으로 냉정하고도 절망적인 말씀을 하셨습니다마는 그러나 이 여인은 이 시험을 아주 쉽게 넘어섭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은 자신이 개가 아니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옳습니다. 당연히 개지요! 개처럼 더럽습니다! 그렇지만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는 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에는 세 종류의 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첫째가 주인 없이 마구 돌아다니는 들개로서 사납고 그 숫자가 많아 길을 나설 때에는 반드시 이 들개를 쫓을 수 있는 몽둥이를 지니고 다녀야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잘 길들여 양 떼를 지키는 개입니다. 우리가 "세퍼드(shepherd)" "세퍼드"하는데 이 세퍼드라는 말은 영어로 목자라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양을 지키는 개가 바로 세퍼드입니다. 이제 마지막 세 번째 애완용 개입니다. 이 애완용 개란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람들과 같이 지내며 한 방에서 먹고 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절대로 이 애완용 개를 키우지 않습니다. 사실상 목장에서 키우는 것마저도 그렇게 좋은 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 애완용 개는 이방 사람들의 개입니다. 이렇게 애완용으로 방안에서 키우는 개는 주인의 상 옆에 앉아 있으면서 무엇이고 하나 먹을 것을 던져 주기를 바라며 기다리게 됩니다. 그래서 어느 날 마틴 루터(Martin Luther)가 식사를 하면서 자기 옆에 있는 애완용 개가 침을 삼키면서 자기의 손끝을 따라 열심히 눈을 움직이며 손이 상에 닿으면 상으로 입으로 가면 입으로 향하는 것을 보고는 감동이 되어서 개에게 고기 조각을 하나 던져 준 다음 자기의 무릎을 탁 치면서 하는 말이 "이 개가 고기 조각을 쳐다보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을 쳐다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역시 루터다운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말하고 있는 이 개는 헬라 원어로는 '쿠나리아'라는 것으로 이것은 큰 개가 아닌 작은 개이며 애완용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개는 개이지만은 주인의 사랑을 받는 개요, 주인이 먹여 주어야 먹는 개입니다. 결코 들개가 아니라 주인의 사랑을 꼭 받아야 하는 개라는 것입니다. 나는 개와 같은 사람이지마는 그래도 주인의 사랑을 받아서, 그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겠다는 말입니다. 지금 이 여인은 자신을 개로 낮추었을 뿐만 아니라 자기가 받고자 하는 은혜를 부스러기로 생각한 것입니다. 주님! 부스러기 은혜라도 제발 좀 주십시오! 이 몸은 큰 것을 받을 자격도 없거니와 결코 큰 것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위대한 역사, 굉장한 사건은 다 다른 사람들에게 주시고 이 개 같은 저에게는 그저 작은 부스러기라도 좋사오니 그것을 주세요! 바로 이러한 겸손과 그 믿음을 예수님께서는 크게 보시어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여인의 마음가짐은 아주 낮고 적은 것이었어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위대한 믿음이라며 칭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비유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진실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겸손하게 낮추어서, 스스로를 개와 같은 존재로 생각해 버리고 나면 그 이후에는 시험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제는 제자들이 무엇이라고 하든, 이스라엘이 어떻든 간에 이렇게까지 자기를 낮출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시험이 닥치더라도 다 이길 수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할 때에도 그렇게 허영된 소원보다는 아주 작은 소원, 나는 본래 부족하여 큰일을 바라지도 않습니다.

그저 다 먹고 남은 부스러기라도 좀 주십시오 하는 겸손한 소원을 아뢸 수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참으로 개와 같은 인간입니다! 그러나 개도 주인이 던져주는 부스러기를 먹고살지 않습니까? 이 개와 같은 저에게 부스러기 은혜를 주세요 하는 바로 거기에 "네 믿음이 위대하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고 하시는 주님의 크신 축복이 임하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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