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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족의 비유(요한복음 13 : 1 - 1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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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족의 비유(요한복음 13 : 1 - 1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이에 대야에 물을 담아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시몬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예수께서 가라사대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본 비유는 다른 비유들과는 달리 예수님께서 직접 행동으로 보여 주신비유라는 점에서 또 다른 소중함이 있는 비유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먼저 오늘 본문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당시의 문화적인 배경을 살펴보면 당시에는 일반적으로 바닥에 끈만 이어져 있을 뿐 덮개가 없는, 요즈음 우리가 말하는 샌들(Sandal) 같은 신발을 신고 다니신 것입니다.

그런 신발로 먼지 나는 길을 걸어 다니고 더욱이 메마른 사막 길을 다니는 것이고 보면 얼마나 많은 먼지가 발에 묻겠습니까? 그런 처지에서 보면 이 신발은 발을 깨끗이 보존한다든가, 혹은 따뜻하게 보온한다는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발바닥이 거친 땅에 닫는 것만을 면하게 하려는 데에 목적이 있었던 신발인 것입니다.

아무튼 이런 신발을 신고 다니다가 천막이나 집으로 들어가게 되면 그 발이 무척 더럽고 지저분하기 때문에 반드시 발을 씻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은 어떤 경우에도 시행해야 하는 필수조건 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발을 씻게 되는 데에는 세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그 첫째는 노예가 있는 집에서는 그 노예가 씻어줍니다. 다음 두 번째는 자기 자신이 씻는 경우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서로 서로 씻어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어떻게 자기 발을 반드시 다른 사람이 씻어주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마는 이것은 생활 습관에서 오는 문화적인 차이 때문인 것으로 이해가 됩니다. 그것은 과거에는 우리가 서양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었던 현상이 이제는 어렸을 때부터 의자생활을 시켜온 우리네 아이들에게서도 나타나고 있는 현상과도 같은 것입니다. 일찍부터 의자에만 의존한 생활을 하다 보니 그냥 바닥에 앉으면 다리를 오므리지 못해 쓰러지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서양 아이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벌써 음식이나 생활습관이 우리 어른들과는 달리 모두 다 서양화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낳자마자 침대에서 살기 시작한 사람들은 몸이 좀 비대해 지거나 하면 허리를 굽히지 못해서 자기가 자기의 구두 끝을 매지 못하고 높은 데를 찾아 그 위에 발을 올려놓고야 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자기의 구두끈을 매지 못한다면 결국은발도 씻지 못한다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옛날 서로가 발을 씻긴다는 이야기가 나왔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예는 손님을 초대했을 경우, 특별히 그 손님이 아주 존귀한 손님일 경우에는 그 손님이 문간에 들어서자마자 주인이 직접 나가서 발부터 씻겨드리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풍속으로서는 최고의 존경이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상상을 해 보아도 참으로 대단한 영접이요 존경에 대한 표시라고 생각됩니다. 예의로 말하자면 엎드려 절을 하는 것보다 더 큰 최고의 예의가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메시야요,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영접했을 경우에는 당연히 주인이 나가서 발을 씻겨드려야 하는 그런 처지가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그렇게 기록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누가복음 7:36-50말씀에 보면 시몬이라는 바리새인이 예수님을 초청하고 대접을 합니다마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미루어 보면 예수님을 초청한 저의가 다른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시몬이 예수님을 초청한 것은 존경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도대체 어떤 분인가 한번 보자 하는 심사에서 자리를 마련하고 대접을 하면서 친구들을 불러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는 의도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기에 형식적으로는 의자도 드렸고 음식도 대접하며 절차를 갖춘 것 같으나 가장 중요하고 먼저 해야하는 발을 씻으시도록 하는 일은 잊었던 것입니다. 만약 주인인 자기가 못하면 그 누구라도 예수님의 발을 씻게 해야 할 것인데 그러지를 못하고 발도 씻지 않으신 그대로 음식을 드시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때에 한 여인이 향유를 가지고 와서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적시고 머리털로 발을 닦으며 거기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붓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본 시몬이 이 일을 못 마땅해 하자 예수님께서는 크고 작은 빚을 탕감 받은 두 사람의 이야기를 비유로 말씀하신 다음 여자를 돌아보시면서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며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며 시몬을 비판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조금 예외인 데가 있습니다. 지금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마가의 다락방으로 생각되는 곳에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마지막 유월절을 지내시면서 음식을 들고 계시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특별히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궁금한 것은 물도 있고 대야도 있겠는데 그처럼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왜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지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이에 대한 변명을 굳이 한다면 아마도 준비는 다 해놓고도 유월절 잔치상을 준비하느라고 바삐 돌아가다 보니 이 집주인이 그만 예수님의 발을 씻겨드리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입니다. 그런 경우라면 노예도 없는 집인지라 이제는 부득불 서로서로 발을 씻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누가복음 22:24이하와 마태복음 20:20이하에서도 나타나고있듯이 예수님의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묘한 자존심과 질투심이 자리하고있어서 진작 예수님의 발만이라도 씻겨드렸어야 했는데도 불구하고 그것마저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시기 질투가 있고 보면 언제나 마음이 흐려져서 생각하는 바도 둔해지며 일의 순서도 바뀌게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금 제자들은 내심 자리다툼을 하느라고 해야할 일의 순서를 잊고 있는 상태입니다.

생각하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그 사실만으로도 얼마나 영광스러운 일입니까? 내가 열 두 제자 중에 들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저들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것이 바로 누가 더 예수님의 보좌에 가까이 앉느냐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것을 추리해 보면 열두 제자들이 각각 이 가운데 누구가 첫째이고 누가 둘째이며 그리고 세째, 넷째 혹은 꼴찌는 누구인가 하면서 그 서열에 신경을 많이 쓴 것 같습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대하면서 예수님의 열 두 제자들의 이름이 복음서에서는 다른 순서로 기록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두고 생각하는 이들은 아마도 그것은 사도행전으로 넘어오면서 제자들의 열심에 따라서 기록하다 보니 바뀌어진 것이 아니냐하는 추측들을 하기도 합니다.

아무튼 제자들은 그 서열을 두고 서로서로 신경을 쓴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더욱 고민스러운 사람은 첫째와 둘째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알아야 할 것은 공부하는 학생들을 두고 보아도 벌써 10등을 넘어가면 10등이나 12등이나 거기가 거기라는 생각으로 별 신경을 쓰지 않습니다. 그러나 제일 신경을 많이 쓰는 학생은 1, 2, 3등을 하는 학생들입니다. 이 학생들은 그 석차 때문에 잘못하면 평생 원수가 되기 쉽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격상으로도 병리적인 이상 심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제 능력 껏 하면 될 것이지 굳이 1등을 하라, 몇 등을 하라며 재촉할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제자들 중에서 이와 같은 신경을 제일 많이 썼던 사람이 다름 아닌 야고보와 요한이었습니다. 형제간인 저들로서는 무엇인가 잡힐듯 잡힐듯 하면서도 잘 되지를 않는 터입니다. 이들에 대한 추리를 해볼 때 아무리 보아도 예수님의 수제자가 베드로임에는 틀림이 없고보면 예수님의 우편에는 분명 베드로가 앉게 될 터이고 그렇다면 좌편에는 누가 앉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생깁니다. 아시다시피 예수님께서는 야고보와 요한을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변화산을 오르실 때에도 베드로와 함께 이 두 형제를 특별히 함께 데리고 가실 만큼 이들을 가까이에 두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과의 관계를 두고 요한은 생각하기를 내가 동생이긴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나를 더 사랑하시니 그 좌편 자리는 내가 앉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가하면 야고보는 거기에도 서열이 있는 것이다. 아무래도 형이 형인 것이지 하면서 그 일로 인해 다툼이 일어나자 그 중재를 위해 나선 이가 바로 저들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0:20 이하에 보면 걱정하지 말라 둘 다 출세시켜 주마하면서 예수님을 찾아가는 어머니의 모습을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향하여 "나의 두 아들을 주의 나라에서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게 명하소서"하는 부탁을 합니다. 이 어머니의 말 중에는 그 내용으로 보아 빠진 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에 대한 주를 단다면 "베드로는 저 만큼 두시고요"하는 말이 됩니다. 그러니까 베드로야 어떻게든 빼어놓고 내 아들 둘을 하나를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해 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24절에 보면 이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나머지 열 제자가 그 두 형제에 대하여 분하게 여겼다는 것입니다. 저들이 무엇인데 그 자리를 흥정하고 있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지금 십자가를 바로 목전에 둔 예수님으로서는 이 마지막 1주간이 매우 소중한 기간이며 제자들로서 예수님의 말씀에만 귀를 기울여야할 귀중한 한 순간 한 순간임에도 이렇게들 시기 질투하느라고 아무 것도 들리는 것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날인 성찬식을 하려는 이 시간까지도 그런 생각을 하느라 다른 것은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것입니다. 추측컨대 저들은 네가 먼저 내 발을 씻겨라 그러면 내가 네 발을 씻겨주마 하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그러자니 먼저 발을 씻길 사람은 아무도 없는 가운데 결국은 예수님의 발도 씻기지 못하고 식사를 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식사는 보통식사가 아닌 유월절 잔치입니다. 게다가 좀더 심각하게 생각하면 잠시 후에는 성만찬 예식이 베풀어질 것인데다가 이 밤은 예수님에게는 마지막 밤입니다. 이런 엄숙한 시간에 질투와 교만과 자리다툼에 연연해하는 마음들을 그대로 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이에 예수님께서는 저들의 그 같은 마음을 바로 잡기 위하여, 다시 말하면 마음을 씻기시기 위하여 먼저 저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어떤 교파에서는 예수님께서 성찬식을 행하신 목요일에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세족례를 전통적으로 해온다고 합니다. 그런가 하면 변형이 된 것도 있어서 깨끗이 씻어 온 다음에 거기에 물 한 방울씩을 떨어드리는 세족례인데, 어쨌든 예수님께서 하신 그 일을 연상하며 마음에 새기게 하는 예식으로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 오늘 본문에서 생각해야 될 비유의 중요한 의미는 이것이 마지막 밤이라는 데에 있습니다. 이 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유언과도 같은 귀한 말씀을 하고자 하는 때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성만찬이나 주시고자 하시는 말씀에 앞서 제자들의 발을 먼저 씻겨야 할 필요성을 느끼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발을 씻기신 다음 요한복음 1312절이하에서 시작하여 17장까지 무려 다섯장에 이르는 긴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마지막 소중한 말씀을 듣기 전에 먼저 마음부터 씻어야만 그 말씀을 통한역사를 이룰 수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우리가 생각해야될 몇 가지 상징적 의미가 있습니다.

그 첫째는 1절에 기록되어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하시는 말씀입니다. 발을 씻긴다는 것은 곧 사랑의 표시입니다. 사랑은 겸손히 발을 씻기는 마음으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너무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다. 요즈음은 사랑이 아닌 것을 사랑이라고 내세움으로 문제가 많은데 내가 굽히지 않았거든 사랑을 운운하지 마십시다. 사랑이란 그렇게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겸손을 낳고 그 겸손을 통해서만 사랑이 가능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사랑이라고 말을 했거든 끝까지 사랑합시다. 사도 요한은 발을 씻기는 이 장면을 두고 이것이 사랑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 두 번째는 이 장면은 비하의 교리를 단점으로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빌립보서 2:6이하에 보면 예수님을 가리켜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졌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성육신의 교리를 말하는 것으로 하나님이 사람이 되셨을 뿐만 아니라 낮추고 낮추어 마치 종과 같이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이 진리를 뒤늦게 깨달은 베드로는 베드로전서5:5에서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헬라 원문에 가깝도록 번역한 영어 본문을 보면 단순히 허리를 동인다는 그런말이 아니라 겸손의 앞치마를 입으라는 말이 됩니다. 발을 씻기기 위해서는 겸손의 앞치마를 입어야 합니다.

이제 세 번째는 "본을 보였노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좀 더 나아가 15절 말씀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지금 예수님께서는 어떤 본을 보여 주고 계시는 것이겠습니까? 그것도 희생의 본이요 사랑의 본이요 겸손의 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특별히 두 가지 생각해야 될 점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지금 이 제자들이 발 씻김을 받으면서도 어떤 의미에서 이렇게 발을 씻기우고 있는 것인지 전혀 그 의미를 모르고 있다는 점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님께서는 엄청난 사랑을 베풀고 계시는 것인데 그 사랑의 의미를 모르고 있단 말입니다. 한마다로 말하면 철이 없다는 것입니다. 가끔 우리가 봉사를 하게 될 때에도 보면 봉사라고는 하지만 그 의도만은 상대방이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습니다. 굳이 보답을 하거나 감사하다는 말은 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이쪽의 의도는 알아주어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그 뜻마저 통하지가 않아서 이런 일은 할 필요가 없는 것인데 하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뜻이 전달되지 않고 마음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참으로 괴로운 일입니다.

제가 아는 여전도사님 한분은 신학교를 졸업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가기 싫어하는 힘든 곳으로 보내달라는 기도를 한 결과 3백여명의 저능아들이 모여있는 부산의 한 복지시설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한 3년이 지난 어느 날 이 전도사님이 그 일을 못하겠다며 이제는 교회 일을 했으면 하고 올라온 것입니다. 그래서 그 이유를 물었더니 거기 일은 아무리 하여도 하나마나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기도를 하니 듣기를 합니까? 그렇게 봉사를 해주니 언제 사람 구실을 합니까? 기도하고 아멘 소리도 못 따라하는 저 사람들을 위해 일생을 바쳐야 할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면서 더 이상 힘이 들어서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서는 교회 일을 맡아서 한 2년을 하더니 아무래도 마음이 괴로와서 다시 그 아이들에게로 가야겠다면서 부산으로 내려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무엇이든 봉사를 할 때에는 내 마음, 내 수고가 반드시 저쪽에 전달되었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못할 때에는 더는 일할 마음이 없어지기가 쉽습니다. 오늘 여기, 이렇게 예수님께서 발을 씻기실 때에 이 뜻이 얼마나 귀한 것인가를 이 멍청한 제자들이 모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봉사는 이렇게 하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당장에 뜻을 알아주기를 바라거나 고맙다는 인사를 기대할 것도 없이 할 바를 하면서 기다릴 것이란 말입니다. 흔히 자녀들에게 너희들을 키울 때에 수고했으니 효도하라고들 합니다마는 천천히 두고 기다리십시오. 지금은 알아주든 말든 그저 그대로 섬기며 봉사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오늘 여기 본을 보였노라는 말씀의 의미입니다.

다음 또 하나는 가롯 유다의 발까지도 씻기셨다고 하는 사실로 이는 더욱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명한 설교가이자 주석가인 크리소스톰(Chrysostom)에 의하면 예수님께서는 가롯 유다의 발을 제일 먼저 씻기신 것으로 이야기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크리소스톰의 말을 믿고 싶습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의 발부터 씻기지 않으시고 베드로부터 씻겨나갔다면 맨 마지막 가롯 유다의 발은 씻기지 못 하셨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팔 자가 바로 가롯 유다인 것을 아시고도 원망하거나 실망함이 없이 똑 같은 마음으로 가롯 유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하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한 가지 생각하고 넘어갈 것은 예수님께서 가롯 유다의 발을 씻기셨으나 그 마음을 씻기시지는 못하셨다고 하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봉사를 한다고 해서 반드시 영적인 열매까지도 거두리라는 생각은 하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단지 봉사는 봉사로 끝난 것이지 거기에 절대적인 효과가 있다고 생각할 것은 아닙니다.

그렇지 않으면 봉사가 오히려 원수로 이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저 누가 알아 주고 안 알아 주고에 관계없이 내 할 일만 다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것은 가롯 유다다 혹은 이것은 베드로다 하고 생각을 하게 되면 봉사는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봉사란 가롯유다의 발도 씻기는 것입니다. 열매가 있든 없든, 마음에 감동을 받든 안 받든, 발을 씻긴다는 그 자체가 중요한 것입니다.

가롯 유다는 예수님으로부터 발 씻김을 받았으나 마음을 씻지는 않았기에 그대로 문을 차고 나가버렸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이런 일 때문에 낙심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봉사란 그렇게 끝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다만 하나님 앞에서 내가 할일 다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낙심하지 말고 끝까지 봉사할 것입니다.

그리고 네 번째 의미로는 죄를 씻는다는 상징적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발씻기를 거절하는 베드로를 향하여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는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에서 발 한번 씻고 안 씻는 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되는 것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내 피로 네 마음을 씻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뜻의 말씀이라고 생각합니다. 요한 11:7말씀에 보면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바로 오늘 이 비유가 그것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만 씻으면 온몸이 깨끗하다고 말씀하십니다. 본문을 보면 베드로의 발을 씻기실 차례가 오자"내 발은 절대로 씻기지 못하십니다"하고 베드로가 거절을 하게 됩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다"고 하시자 이번에는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겨 주십시오 하고 나오는 것입니다. 이때의 베드로를 보면 다 큰 사람이 참으로 정신없는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아무튼 이때에 예수님께서는 "이미 목욕한 자는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 역시 단순히 발 씻고 목욕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가 가정에서 손발만 씻어도 온 몸이 깨끗함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마는 여기 이 말씀은 그런 뜻의 말씀만은 아닌 줄 압니다. 이미 중생은 했으며 옛날에 지은 죄는 그때에 다 회개를 한 터인지라 그것을 다시 들추어낼 필요는 없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미 용서받은 것은 깨끗이 지워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억하지 않으시는 것을 내가 자꾸만 기억해서 딴 소리 할 것이 아닙니다. 이미 주님께서 용서하신 죄에 대해서는 그 용서하심에 감사할 뿐 우리가 다시 들추어 괴로워하면서 새롭게 회개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이미 목욕한 자라는 말은 이미 회개하고 죄 씻음을 받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발 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은 그때 그때 더러워지는 부분, 즉 말하자면 손이 더러워졌으면 손을 씻어야 하고 입이 더러워졌으면 입을 씻어야 하는 것처럼 매일 매일, 시간 시간, 사건 사건마다에서 짓는 죄를 하나님 앞에 그때 그때 자복하고 용서받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언젠가 한번 대단히 경건한 청교도적인 한 가정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 가정에서는 아침에 학교에 갈 때 국민학교 학생인 자녀들을 다 앉혀 놓고 약 2분 동안 기도를 하고 보내는가하면 오후에 돌아오자마자 앉혀 놓고는 오늘 누구하고 싸우지 않았는가? 거짓말은 한 것이 없는가? 혹은 누구를 미워하지는 않았는가 하면서 어머니가 하나 하나 묻습니다. 그러면 이 아이는 숨김없이 다 이야기를 합니다. 이렇게 아이의 이야기를 다 듣고난 어머니는 기도하자 하고서는 하나님께 용서의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가정은 매일 매일 그렇게 생활을 하는 참으로 청교도적인 가정이었습니다. 이미 목욕한 자! 이미 죄씻음 받은 자는 매일매일 더러워진 부분을 깨끗하게 씻고 또 씻고, 그리고 용서받고 또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회개는 계속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14절 말씀에 보면 이제 예수님께서는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되어 너희 발을 씻겼느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 역시 발을 씻겨주려는 마음으로 사랑해야 할 것이란 말입니다. 그런 마음이 없고서는 그 누구도 사랑을 말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대하면서 특별히 생각나는 일이 하나 있습니다. 2년 전여름 어느 신학대학생들의 집회에 참석했다가 겪은 일입니다. 학교의 분위기가 데모로 인해 한창 어수선할 때이라 교수라고 해도 학생들 앞에서 제대로 말을 못할 때입니다. 아무튼 가서보니 젊은 교수님들이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예배를 드린 다음에 세족례를 하겠다는 것인데 문제는 교수님이 아홉이니 물통 아홉개를 갔다놓고 학생들이 교수님에게 발을 씻겨 달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지금 이 교수님들이 이 일을 어쩌면 좋으냐며 고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있다가 걱정하지 마십시오 하고서는 예배드리기 전에 임원들을 모아놓고 이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성경에는 발을 씻겨주라고 하였지 발을 씻겨 달라고 한 것은 아니지 않는가? 교수님들이 자진해서 물통을 가져다가 놓고 내가 너희들을 씻기겠다고 하면 모르겠다. 그런데 너희들이 물통을 갔다 놓고 당신 내 발을 씻기시오 하는 것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아무리 생각해도 성경을 그렇게 해석하는 법은 없다"라고 하였더니 이 학생들이 잘못되었습니다하고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간이 되어서는 교수님들을 제외한 채 저희들끼리 둘씩 마주앉아 발을 씻기면서 그 예식을 진행해 나가고 있었습니다.

여러분! 내가 먼저 저의 발을 씻길지언정 다른 사람을 향해서 내 발을 씻겨 달라고 할 생각은 하지 마십시오. 그게 바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나는 나의 일만 하면 될 뿐 다른 사람의 일에는 관심 할 바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어느 순간이라도 남의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누가 봉사를 많이 하든 적게 하든 내가 간섭할 바가 아닙니다. 비록 내 아내, 내 남편의 이야기라 하더라도 그것은 남의 이야기 일뿐 나는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서도 내가 씻겨줄 생각을 하십시오. 내가 먼저 가롯 유다의 발까지라도 씻길 수가 있다면 이제는 절대로 낙심함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끝까지 씻길 수가 있을 것이며 그로 인해 주님의 귀한 역사를 이루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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