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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베풉니다〈고린도전서 13장 4~7절〉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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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베풉니다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가 당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는 결코 정치나 경제, 과학 기술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들이 아닙니다. 더러는 사회를 개혁하여 구조적으로 해결해보겠다며 애씁니다마는 그렇게 해서 해결될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이러한 집단주의가 보다 큰 문제를 안겨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문제의 근본은 인간 문제에 있습니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인간성의 문제입니다. 인간을 바로잡지 못하고 인간성을 회복하지 못하는 한 문제는 지속될 뿐만 아니라 더욱 가속화하고 복잡해질 것입니다.

인간을 치유하고 인간성을 회복시키는 데에는 오직 사랑의 묘약 말고 달리 처방이 없습니다. 곧 사랑의 문제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깊이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조금 아는 것을 가지고 사랑에 대하여 다 아는 것처럼 행동하지 마십시오. 잘못된 지식은 무식한 것만 못하기 때문입니다.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상태라면 새롭게 깨달을 여유와 길이 있습니다만 한번 그릇된 지식은 그 잘못된 사고(思考)의 영역과 빗나간 궤도를 고치는 데 많은 어려움과 엄청난 힘이 들게 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너무 흔하게 사랑을 운위합니다. 그렇게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사랑의 개념과 성서가 말씀하고 있는 사랑의 개념 사이에는 엄청난 의미 상의 차이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흔히 말하는 그러한 사랑으로 성서적인 사랑을 이해하려고 할 것이 못됩니다. 자신이 이미 경험한 어떠한 경우의 사랑을 놓고 사랑이 어떤 것이라며 함부로 운위하지 말 것입니 다. 우리는 일단 사랑에 대하여 백지 상태가 되어야 하고 거기서부터 다시 사랑의 개념을 성서적으로 이해하고 정립해나가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이 없음으로 나약해지고 사랑을 잃으면 포악해집니다. 그리고 사랑이 떠났다고 절망들 하면서 사랑을 말합니다마는 성서적 진리로 말하는 그 사랑의 의미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자인 것처럼, 뿐만 아니라 아예 사랑에 대하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자인 것처럼 철저히 성서로 돌아가 사랑을 이해하여야 할 것입니다. 즉 사랑의 뜻이 중생하여야 합니다. 사랑 그 자체가 먼저 성서적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 세상에서 가장 근본적이고도 시급한 걱정거리는 사랑의 타락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인간을 비인간 화시켰으며, 오늘날과 같이 무서운 세대가 되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미국에 있었던 지난주간, 시간 나는 틈틈이 방송에 귀기울였습니다. 그럴 때마다 에이즈(AIDS)에 걸린 사람은 비밀을 보장할 터이니 속히 ○○전화번호로 연락하라는 방송이 나오는 것입니다. 의사의 말 에 따르면 그 통계숫자가 엄청나게 많다고 합니다.

그런데도 차마 부끄러워 발표를 못하고 있고, 너무 공포에 떨 것을 염려하여 조심스레 비밀로 치료해나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에이즈는 한번 걸렸다 하면 속수무책인 병입니다.

이 세대는 참으로 알 수 없는 무서운 병을 앓고 있습니다. 에이즈만이 아닙니다. 인간성 자체가 무서운 고질병을 앓고 있습니다. 이를 치료할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랑으로 다시금 돌아가는 길입니다. 이 사랑은 일반적 의미의 사랑이 아니라 십자가로 계시하신 그 사랑의 뜻을 다시 깨닫는 데서부터 출발하여야 한다는 것을 성서는 말씀하고 있습니다.

앞장에서 우리는 사랑은 오래 참는다는 것에 대하여 생각해보았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사랑은 온유한 것임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온유'의 헬라 원문인 '크레스토스' 역시, 적절한 우리말을 찾기가 어렵습니다. 이 말은 단순한 심리적 상태의 온유만이 아니라 남에게 베푸는 온유를 뜻합니다. 그래서 어떤 번역에는 '카인드(kind)'라 하여 친절로도 표현합니다.

이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온유'라고 표현하고 있는데, 우리는 이 둘을 합친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거듭 강조합니다마는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온유'는 단순히 사고적인 온유라기보다 '행동적 온유'를 의미합니다. 이는 악한 세대에 대하여 끝까지 참는 인내가 있어야 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적극적으로 친절을 베푸는 행동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베푼다'는 것이 되겠습니다. 사랑은 은혜를 베푸는 것이요 온유를 베푸는 것입니다.

인내가 귀한 것이지만 인내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우리는 참는 데에는 꽤 이골이 나 있는 것 같습니다. 어려운 시집살이를 견디느라 '귀머거리 3년이요 벙어리 3년이라'라는 속담까지 있습니다. 참고 또 참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참다가 한번 터지게 되면 걷잡지를 못한다는 데 있습니다.

그것은 참지 않은 것만 못합니다. 참아온 것이 아니라 버티어온 것이요 벼르며 지내온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다시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사랑은 참는 것만이 아니라 온유합니다. 그러기에 친절하며, 자기에게 지워진 바의 어려움을 다 소화하면서 오히려 자기를 미워하는 자를 향해 온유를 베푸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사랑임을 오늘의 본문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몸을 두고 보아도 살아 있는 동안에는 부드럽고, 같은 사람이라도 어린아이일수록 더욱 부드럽습니다. 그러나 나이 들어 늙어 가면 거칠고 딱딱해졌다가 마지막 호흡이 끊어지고 나면 아주 뻣뻣하게 굳습니다. 마찬가지로 정신면에서도 살아 있는 정신을 소유한 사람의 인간성은 부드럽고 따뜻합니다. 그러나 이미 죽어버린 사람, 심장이 멎고 한편으로 썩어가고 있는 그러한 인간성이란, 완전히 굳어진 것이어서 전혀 여유를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 주신 본문 말씀은 심리학적으로나 교육학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일찌기 예수님께서는 당신 자신에 대하여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11:29)"라고 하셨습니다. 그 누구도 예수님의 얼굴 모습이 어떠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온유하고 겸손한 분이었다는 사 실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에 대한 인상이요, 또한 친히 말씀하신 당신의 모습입니다.

부부가 다 대학교수인 어느 가정이 오랫동안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신분상으로나 지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상당한 사람들이어서 남들의 부러움을 사는 가정이요, '잉꼬부부'로 불리는 가정이었습니다. 그러나 본인들 사이에는 편치 않은 문제가 언제나 깔려 있었습니다.

서로 팽팽하게 맞서 있었던 것입니다. 농담으로 주고받는 말에도 "누가 더 크냐?"하고 신경 을 곤두세우고 보니 부드러움이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오랜 세월을 그렇게 지내다가 마침내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어느 사이에 자신들도 모르는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하루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 중에 남편이 아내에게 말합니다. "여보 내가 잘못했소. 미안하오." 결혼 후 처음으로 이 한마디를 한 것입니다. 그 아내는 결혼생활 20년에 처음으로 그런 소리를 듣게 되자 너무도 고마워서 사흘을 울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랑은 온유합니다. 그런데 "미안합니다"라는 그 말 한마디를 못하고 사는 사람이라면 사랑을 아는 자입니까 모르는 자이겠습니까? 그 많은 사랑의 선물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그 많은 사랑의 행위가 무슨 의미를 가지겠느냐는 것입니다. 사랑은 먼저 자기 자신에게 온유합니다. 사랑의 생리가 그러하고 사랑의 형태가 그러합니다. 그 때문에 동물도 사랑을 하면 유순해지고 사랑 앞에 고요해지며 목소리가 부드러워지는 것을 봅니다.

진정 사랑을 안다는 것은 스스로 낮아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랑하는 자 앞에서 자기가 낮아지지 않는 사람은 그 어떤 말로 사랑을 이야기하더라도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진정한 사랑, 곧 성서가 말씀하는 바의 사랑은 온유이기 때문입니다. 이 사랑은 스스로 낮아져 어느 사이에 자기가 소멸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닙니다. 자기 사랑에 몰두되어 있으면서 계속 사랑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온유와 친절을 드러내게 됩니다. 이것이 사랑 본래의 색깔입니다.

친절을 나타내지 못하는 사랑은 욕정에 불과한 것입니다. 욕정은 사랑 이 아닙니다. 사랑은 온유하고 친절하며 겸손하여 그 음성까지도 부드럽게 나타납니다. 이는 동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사랑할 때의 울음소리는 아주 부드럽고 은근합니다.

제가 시골에서 자랄 때에 집안에서 놓아먹이는 닭의 세계를 보았는데, 한가지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수탉 한 마리가 암탉에서 병아리까지 많은 가족을 거느리고 다니다가 쓸만한 먹을 것이 있으면 이 수탉이 그 먹이를 입에 넣었다가 토했다가 하면서 연신 다른 닭들을 불러모읍니다. 암탉이 병아리들을 챙겨 먹일 때에도 그렇습니다. 이럴 때의 모습이나 소리가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개나 고양이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어쩌다가 사람이 그들의 새끼를 다치게라도 하면 새끼들을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으로 옮겨갑니다. 이때에 그 옮기는 방법이 이색적입니다. 업고 가는 것도 아니고 안고 가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어미가 새끼의 목덜미를 물고는 끌고 갑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몹시 가엾어 보입니다마는 그렇게 물려 끌려가는 새끼들은 좋다고 따라갈 뿐 아무 소리도 내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이빨로 문 것 같지만 실은 이빨이 아닌 잇몸으로 물고 있는 것이라고 합니다. 거기에도 온유함이 있고 부드러움이 있기에 목덜미를 물리고 끌려가면서도 반항하지 않는 것입니다. 주고받는 사랑이 거기에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이와 같이 사랑은 온유하며 상대를 향한 보호의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던 습관과 생각이 바뀌어, 이제는 상대의 몸과 인격과 명예를 보호하는 의식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그 강했던 자기 욕망은 무너지고 남을 위하고 보호하고자 하는 마음에 정성이 기울어지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령이 충만한 초대교회의 역사를 생각해봅니다. 성령이 충만해진 교회와 교인들은 먼저 주님의 재림을 가까이 느끼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여기 현존해 계심을 순간순간 의식하면서 곧 재림하실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의 것으로 생각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다는 것입니다(4:22). 나의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것이란 말입니다. 모두 함께 써야 할 재물이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또한 그렇게 혼자서는 살수도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제것을 제것이라고 하는 자가 없더라----성령이 충만해질 때 마침내 그 인색한 이기주의가 다 무너졌습니다.

또한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주었다고 합니다(2454, 35). 능력에 따라 분배한 것이 아니라 무엇이 필요한지, 그 필요에 따라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저들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는 생으로 생의 의미가 바뀌어진 것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이 충만한 교회요 사랑이 있는 교회이며 온유한 사람들이 모인 교회였습니다.

온유는 온유케 하는 역사를 나타내게 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산상보훈에서 친히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5:5)"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결코 강포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닙니다. 우선 보기에는 힘이 있고 강한 자가 그 가진 바의 힘과 포학성으로 이길 것 같지만 성서는 그렇게 말씀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말씀은 온유한 자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그가 복을 받고, 그가 승리하며, 그가 왕권을 차지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온유한 자에게 최종 승리가 있는 것입니다.

잠언 151절 말씀에 보면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한다고 하였습니다. 아무리 포악한 말을 하더라도 대답하는 자가 부드럽게 대하면 그 노가 쉬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누구 음성이 더 크냐며 서로 싸우고 있으니 그 다툼, 그 문제가 언제 끝이 나겠습니까? 분명한 것은 온유한 자가 이긴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자동차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자동차는 그 구조를 알고 보면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거의가 단단한 쇳덩이로 만들어졌습니다. 이처럼 강한 쇠와 쇠가 맞물려 있으면서도 무사히 잘 돌아가게 되는 것은 쇠와 쇠 사이에 윤활유라고 하는 부드러운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자동차에 이 윤활유라는 것이 빠지게 되면 단 1분도 못 가서 자동차는 망가지고 맙니다.

여러분! 온유한 사랑은 이 거친 세대에 없어서는 안될 윤활유 구실을 합니다. 지금 서로 맞부딪쳐서 깨어지기 일보 직전에 이르렀는데 이를 방지할 사랑의 온유함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 온유함, 이 윤활유가 없이는 불원간에 폭발하고 말 것입니다. 사랑은 사람을 온유하게 만듭니다.

언젠가 미국의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어버이날을 앞두고 소위 문제아라고 말하는 십대 청소년들과 인터뷰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아이들은 솔직하여 기탄 없이 말을 하는데 하나같이 "나는 내 어머니를 미워합니다." "나를 버리고 도망간 아버지를 저주합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아는 예나 오늘이나 이처럼 부모를 미워합니다. 부모는 자식을 그처럼 사랑한다고 했건만 왜 이모양이 되었습니까? 사랑에 온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많은 수고와 교훈이 있었고, 때에 따라서는 넘치는 선물을 주면서 나름대로는 사랑한다고 했으나 이제와서 보니 완전히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결코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그 결과로 자식이 부모를 미워하는 세대에 이르렀으며 곳곳에 테러와 강포가 난무하는 어두운 그림자만이 드리워졌습니다. 이래도 할말이 있겠습니까? 진실한 사랑이 없었고 사랑을 못받았기에, 그보다는 사랑을 배운 바가 없으므로 이제는 폭력만 남았습니다. 증오에서 증오로 이어지는 현대는 이와 같이 파국 직전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하고 친절합니다. 이러한 사랑은 부드러운 마음을 생산하여 마치 따스한 햇볕에 얼음이 녹듯이, 완악하고 굳은 마음도 녹게 합니다. 친절은 행동이요, 온유는 생산적입니다. 우리는 사랑에 대하여 깊이 반성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이 거친 세대의 인간을 과연 무엇으로 치유할 수 있겠습니까? 참사랑, 오직 진정한 사랑만이 치유의 근원이 됨을 알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1절로 3절에 기록된 말씀을 보면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이 세대는 참으로 거칠고도 사납습니다. 그 대응책을 어디에서 찾겠습니까? 한낱 개 한마리 보고도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면서 "나는 너를 미워한다"라고 말하면 좋아라고 꼬리를 치지만 "나는 너를 사랑한다"라고 하면서도 고함을 지르면 대어들면서 문다고 합니다.

이때에 "너 왜 내가 사랑한다고 했는데 무느냐?"라고 나무랄 수가 있겠습니까? 이 때의 문제는 사랑이 아닙니다. 문제는 목소리가 높았느냐 낮았느냐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랑을 논리로 설명할 것입니까? 돈으로 계산할 것입니까? 사랑의 진실은 온유함에 있습니다. 온유한 음성으로라면 미워한들 어떻고, 죽인다 한들 무슨 걱정입니까? 사랑한다는 말은 목소리가 크다고 전해지는 것도 아니요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랑에는 오직 온유함과 겸손이 있을 뿐 복잡한 논리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랑은 단순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참된 온유와 겸손에 있습니다.

다시 한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일 것입니다.

사랑은 온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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