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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의한 청지기(누가복음 16:1-9)
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하고, 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일 백 석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 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 움이니라.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오늘 보게되는 이 비유를 이름하여 불의한 청지기 비유라고 합니다. 이 비유는 그 해석상 무리가 있는 난해한 비유 중의 하나라고 말합니다. 그 때문에 어떤 이들은 아예 이 비유와의 접근을 포기해버리는 사람들도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비유가 이렇게 어렵게 생각되는 것은 이 불의한 청지기가 주인의 칭찬을 받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하는 거기에 문제점이 있는 것입니다. 불의했으면 책망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점에서는 어쨌든 부도덕한 청지기에게 칭찬을 한 결과가 됩니다. 그래서 내용이 부도덕한 것을 칭찬을 하였으니 불의를 정당화하는 셈이라는 점에서 그 해석이 어렵다는 말을 하게됩니다. 그러나 다시 한 번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려운 비유도 아닙니다.
지금까지 비유를 공부해온 바와 같이 비유를 해석하는 그 원칙에 따라서 해석을 하게되면 아주 쉽게 풀이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미 잘 아는 바와 갈이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비유가 가리키는 초점은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그 비유가 지적하고 있는 초점을 분명히 알면 그 초점에 의해서 풀이할 때에 그 비유의 내용이 쉽게 해석된다는 것입니다.
본 비유의 주제는 지혜입니다. 지혜있는 자가 되라는 것이 주제입니다. 여기 시작과 끝을 잘 미루어볼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도는 특별히 지혜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고 특별히 말세에 있어서 지혜로운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지혜는 어디, 무엇으로부터라도 얻어야합니다. 이에 솔로몬은 말합니다. 잠언 6:6, 30:24 이하에 보면 개미에게로 가서 지혜를 얻고 사반, 메뚜기. 도마뱀에게서 지혜를 배우라고 하였습니다.
가장 작은 벌레나 짐승으로부터도 지혜는 배우라는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마 10 : 16)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뱀은 악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악으로부터도 지혜만은 배워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지혜를 선한 자로부터 배울 수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마는, 그 소재가 반드시 그렇지 못하다고 하면 부득이 악한 사람으로부터라도 지혜만은 배울 줄 아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따라서 지혜를 배우기 위한 소재로서는 그 무엇이든지 등장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본문의 이 불의한 청지기도 지혜를 배우게하는 데 좋은 교본이 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이유로 인해 문제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더구나 이 말씀은 16:1에 의하면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이 이야기는 아무에게나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동행하며 말씀을 배워온 상당한 수준급에 있는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아무나 듣기에는 어려운 것같지만 제자들은 소화할 수 있는 그런 말씀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이렇게 어려운 본문을 만나게될 때에 우리는 긍정적으로 보아야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정적인 입장에서 이것은 잘못되었다. 이것은 부도덕하지 않는가 하여 비관하는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신 의도가 무엇이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우리에게 유익한 좋은 것을 주시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셨을 것이라는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대할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 말씀 속에서 중요한 진리를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악합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서 지혜를 말하기에는 너무도 부족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악한 세상에 살기 때문에 악한 세계의 것을 소재로 하여 지혜를 얻는 그러한 지혜로운 자가 될 때에 어디서나 지혜로운 자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가령 우리가 선한 사람에게서만 지혜를 배우고자 한다면, 아마도 일생 동안 지혜는 배우지 못하고말 것입니다. 세상에 선한 사람이 어디 있어야지요! 하지만 악한 사람으로부터도 지혜를 얻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다면 이제는 어떠한 세계에 살아도 무궁 무진한 지혜를 깨닫고 배우며 익혀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의 이 불의한 청지기를 소재로 한 지혜의 교훈은 대단히 수준 높은,효과적인 교본이라 생각됩니다.
오늘 본문에는 청지기라는 말이 나오고 있습니다. 이 청지기란 말을 헬라원어 성경에는 '오이코노모스' 라고 기록하였는데, 이를 요즈음의 우리 말로 표현한다면 집사라고 해도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종이 아닙니다. 주인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종의 입장이 될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부림을 받는 종은 아닙니다. 종은 종이로되 종을 다스리는 종입니다. 종들을 많이 거느린 주인이 그 많은 종들을 감독하며 일을 시키는 것이 귀찮고 복잡하니까 바로 그 일을 위하여 사람을 두는 그것이 여기에서 말하는 청지기입니다. 이 청지기는 자기 재산이 아닌 주인의 재산을 자기의 재산처럼 관리를 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상당한 자율성이 있습니다. 물론 주인의 명령을 받았을 때에는 절대 순종하는 타율성에 속해야하고 또한 그래야합니다. 그러면서도 사람을 다스리며 일을 맡기고 감독하는 일에 있어서는 주인의 권위를 가지고 행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청지기의 신분이요, 청지기의 기능입니다.
이러한 청지기가 오늘 본문에 보면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좋지 않은 방법으로 이래 저래 돈을 헤프게 쓴 것같습니다. 그러자니 소문이 퍼져서 주인도 그 사실을 알게되었고 이에 주인이 이 사람을 불러 말을 하게됩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한 번 셈을 해보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동안 어떻게 일을 처리하며 살림을 살았는지 요즈음 말로 표현 증빙 서류, 영수증 등을 대조하여 회계 감사를 하자는 것입니다. 주인이 이렇게 나오자 이 청지기는 "이제는 틀렸구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되었습니다. 그 동안에 자기가 한 짓도 있고 불의한 것은 분명히 드러날 것이니 이제는 도리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청지기 생활은 여기에서 끝난 것이고, 그렇다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낼 것인가를 염려하게 됩니다. 본문을 보면 이 청지기는 참으로 맹랑한 사람입니다. 그가 하는 말인 즉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구나!" 이 사람 정말 별스러운 사람입니다. 그래도 청지기랍시고 거들먹거리며 살다가 이제 와서 땅을 파자니 힘도 없고 그렇다고 빌어 먹자니 부끄럽고 창피하니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 하고 그 지혜를 짜냅니다. 그 결과 꾸민 일이 다름 아닌 이것입니다.
그 동안에 주인에게 빚을 진 많은 사람들을 낱낱이 불러들여서는 그 빚진 정도를 얼마씩 감해주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기름 100말을 빚진 사람에게는 그 증서에 50말로 쓰게하고, 밀 100석을 갚아야할 사람에게는 80석을 쓰도록하여 이런 식으로 돌아가면서 탕감해주는 것입니다. 지금 이 청지기는 주인의 것을 가지고 자기 마음대로 상당한 부분을 탕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이 이렇게 하는 데에는 이 사람다운 계산과 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즉 이렇게 선심을 베풀었으니 내가 청지기직을 박탈 당하더라도 저들이 이 은혜를 생각하여 언젠가는 나에게 좋은 것으로 돌아올 것이 있으리라는 속셈입니다. 이는 어처구니 없는 행사이면서도 또한 대단한 결단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를 두고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대단히 비약적인 데가 있습니다.
이 청지기는 이미 불의한 짓을 한 사람입니다. 게다가 지금 하고있는 일도 보통으로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이와 같이 분명히 잘못된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 청지기가 그 일을 지혜롭게 하므로 이 주인이 오히려 칭찬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칭찬이란 이 불의한 청지기인 사람에 대한 칭찬이 아니 그 지혜만을 칭찬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로 인해 다시 복직이 되었는지 그대로 끝났는지에 관해서는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습니다만, 좌우간 불의한 청지기가 칭찬을 받았다는 내용입니다. 묘한 이야기같지만 여기에서 우리가 배워야할 것은 앞서 말씀드린 대로 지혜입니다.
그러면 이 사람이 가진 지혜는 어떠한 지혜이겠습니까? 먼저는 지난날의 잘못을 곧 시인했다는 점이 그의 지혜입니다. 자기의 잘못을 주인이 추궁하며들자 당장에 그 잘못을 시인하고 맙니다. 그 점이 참으로 훌륭합니다. 우리가 어떤 경우에 보면 본인 스스로 그 잘못을 알면서도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의 잘못이 아니라는 변명을 하려드는 약점이 있음을 보게됩니다.
어떤 모임에서도 보게되면 분명 저 분이 잘못했고, 잘못했다는 사과 한 마디만 하면 모든 문제가 깨끗이 처리되겠는데 그 한 마디를 안함으로 전체의 분위기를 흐려놓거나 사과를 하더라도 아주 구질 구질하게 합니다. 잘못했으면 잘못한 것이지 거기에 다시 꼬리를 붙여 변명을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여기 이 사람은 그런 것이 없습니다. 주인이 불러 "네게 대한 이러한 소문이 어떻게 된 것이냐? 더는 청지기 직을 계속하지 못할 것이다" 하는 주인 앞에서 이 사람은 깨끗이 자신의 잘못을 시인합니다. 그리고 그 직책에 대해서 미련을 갖지 않습니다. 구차한 변명도, 앞으로는 그런 일이 없을터이니 한 번만 용서해달라는 애원도 하지 않습니다. 일이 이미 틀린 것을 알았습니다.
어쩌면 그 동안 양심적으로는 내가 이래서는 안되지 안되지 하면서 일을 해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덜컹 하고 일이 이렇게 터지고보니 올 것이 왔고 이제는 끝났다는 것으로 모든 것을 깨끗이 시인하며 그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잘못된 사실을 사실대로 시인한다는 것, 한마디의 변명도 없이 시인한다는 이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사과를 하려거든 깨끗이 하세요! 어떤 사람들은 사과하러 갔다가 다시 한바탕 싸우고 오는 경우까지 있습니다. 사과는 해놓고, 사실은 뭐 그 어쩌고 하다가 다시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잘못한 것은 잘못한 것입니다. 잘못한 것을 이야기하는 동안에는 잘한 이야기는 하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백 마디의 할 말이 있더라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과하는 시간에는 사과 하나로 끝나야합니다. 이 사람도 말을 하자면 할 말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잠깐 실수는 했습니다만 그 동안에 내가 열심히 잘한 것도 많지않습니까? 그 공로를 참작하시어 이것쯤은 한 번 봐주실 수 있지 않겠습니까? 내가 청지기하는 동안에 당신은 이만한 부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떼어먹기로 들면 이 정도만 해먹었겠습니까? 등등 얼마든지 할 말이 많건만 더는 말이 없습니다. 이 점이 참으로 훌륭한 것입니다. "당신 잘못했오" 할 때에 "예, 잘못했습니다" 하고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누구 때문이라고 하지도 않고, 무엇 때문에 혹은 부득이한 일로 인해서 이러한 일이 생기게 되었다며 자기 변명을 늘어놓지도 않았습니다. 그 점이 바로 이 사람의 지혜입니다.
흔히들 죄를 짓게되면 보통 사중죄를 짓게됩니다. 처음에는 죄를 짓고 그리고 죄를 반복합니다. 그러다가 죄가 탄로나면 변명하게 되고, 마지막에는 그 죄를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킵니다. 이것은 일찍이 아담 때부터 있어온 역사가 깊고 족보가 있는 뿌리 깊은 죄입니다. 그러나 여기 이 사람은 그런 구지레한 것 없이 아주 깨끗한 점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하는 말이 "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라는 것입니다. 이 "알았도다"라는 말은 '에그노온' 이라는 헬라어로 부정 과거형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아주 순간적인 결정입니다. 나타난 결과는 당연지사로 돌려버리고, 바로 그 순간에 할 일도 알았다며 결정적으로 말해버립니다. 그 점이 지혜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주인의 판정을 인정했고, 주인의 옳음을 인정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을 받아들였습니다.
참된 회개는 내가 잘못한 것에서 오는 주인의 심판을 수락하는 것에 있습니다. 회개는 한다고 하면서도 내가 지은 죄의 대가로 주어지는 심판을 받아 수락하지 않겠다면 그것은 회개가 아닙니다. 내가 지은 죄의 대가가 10배의 벌로 내려진다 하더라도 당연히 받을 자세로, 심판과 주인의 판단을 수락하는 이 마음이 회개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사람은 깨끗한 사람이었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다음 두 번째로, 이 사람의 지혜는 마지막, 곧 한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을 것이며, 그 결과 내 직분은 없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건강도, 지위도, 재물도 다 한계가 있습니다. 없어지기도 하고 빼앗기기도 하며, 때로는 옮겨가기도 합니다. 내가 가진 이 재산, 이 지위가 항상 내 손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빼앗기고 옮겨가며 한계가 있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는 종말을 아는 지혜가 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주인이 인정한 종말에 대하여 아무런 연기 신청 없이 그대로 깨끗하게 받아들입니다. 역시 그 점이 훌륭하고 지혜로운 처사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 사람의 지혜는 남은 시간, 남은 권한을 잘 선용할 생각을 합니다. 언제든지 중요한 것은 남은 시간, 남은 기회입니다. 어떤 사람이 병으로 인해 6개월밖에 살 수가 없다는 사형 선고를 받게되었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제는 몸과 마음이 풀어져서 살 용기가 없어지고 당장에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가운데 방황하며 괴로워하고 있는 어느 날 조그만 어린아이 하나가 바로 앞에 앉아서 인형을 팔고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 못한 답답한 심정을 이 아이를 붙들고 말을 해봅니다. "얘야, 나는 앞으로 6개월밖에 못산다는구나." 그랬더니 이 철없는 아이가 하는 말이 "그러면 6개월은 살잖아요" 하는 것입니다. 그 때에 이 사람이 정신을 차립니다. "맞아! 6개월은 있지"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6개월밖에 못사는 것이 아니라 6개월은 산다는 말입니다. 정신차려서 그 6개월 동안에 어느 때보다 더 훌륭한 일을 하게됩니다.
저에게 대단한 경험이 되었던 일이었기 때문에 자주 말씀드리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한번은 미국의 로스 앤젤레스 파사디나에서 피아노 독주회에 참석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연주자는 왼손 하나만으로 장장 한 시간 반 동안 땀을 물 쏟듯 하며 연주를 하는 것입니다. 작품은 특별히 그분을 위해서 편곡을 한 것인데 그 팜플렛(pamphlet)에 이 연주자의 철학을 소개하기를, 다른 사람은 한 손이 없다고 생각하는데 이 사람은 한 손이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한 손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한 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한 손으로 그는 피아노를 쳐댑니다.
우리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없어진 것 중에 남은 것, 끊어진 중에서도 있는 것, 모르는 중에 아는 것, 할 수 없는 것 중에서도 가능한 것, 그것을 소중히 여길 줄 알아야합니다. 흔히들 보면 할 수 있는 일은 시시해서 안하고, 할 수 없는 것은 못해서 못합니다. 그러다보니 아무 것도 못하고마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는 것은 기다립니다.
그리고 할 수 있는 것은 극대화시켜 나갑니다.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람은 자기가 가진 것을 제일 소중한 것으로 아는 사람이요, 그 사람이 부자입니다. 가지고 가졌으면서도 못가진 것만 생각하며 불만스러워하는 사람, 그 얼마나 불행한 사람인지 모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아합왕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특별히 열왕기상 21장에 나타난 아합왕에 대한 기록은 그가 얼마나 멍청한 왕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 내용을 보면 왕의 궁전 옆에 나봇이라는 사람의 포도원이 하나 있는데 이 아합왕이 그 포도원을 갖고싶어 합니다. 그래서 나봇에게 팔거나 더 좋은 것과 바꾸자고 했더니, 조상 때부터 내려오는 유업이기에 그렇게 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러자 이 아합왕은 속이 상해 하면서 음식도 먹지 않고 아예 머리를 돌려 들어눕고맙니다. 왕 치고는 이만하면 정말 멍청한 왕이 아닙니까? 이것을 알게된 그 부인 이세벨은 내가 얻어 드리지요 하고서는 결국은 나봇을 죽이고 그 포도원을 빼앗아 남편 아합왕이 가지게합니다. 언제나 이 이세벨은 악의 산실입니다마는, 가만히 보면 아합왕은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그 대신 아주 못난 멍청한 사람입니다.
그 하는 일이 꼭 이러한 바보짓만 하고앉았는 것입니다. 그래 왕이 얼마나 못났으면 남의 포도원을 빼앗아 나물 밭을 삼겠다며 투정을 부린다는 말입니까? 그리고 못가질 것은 안가지면 되는 것이지, 무엇 때문에 그것을 기어이 가지려고 하느냐는 말입니다. 가진 것만도 너무 많아 그것도 다 못먹고 죽을텐데 말입니다.
여러분! 중요한 것은 무엇을 가졌느냐 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가능한 것이 무엇이냐? 그것만 알고, 그것을 제일로 아는 것입니다. 내게 주신 은사가 제일이요, 내게 주신 분깃이 최고인 줄 아는 그 사람이 제일 부자이며, 제일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제 지혜롭게 생각할 것은 할 수 없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있는 것과 없는 것, 남은 시간과 남은 그것을 어떻게 선용하는가의 문제입니다.
그 다음에 이 사람은 과거를 후회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지나간 잘못이 이제와서 운다고 해결될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과거를 후회하는 것은 또 하나의 남용입니다. 왜냐하면 이는 미래를 과거로 인해 소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미래에 대한 환상, 허황한 소리도 또한 더 많은 남용이 됩니다. 이것은 새로운 남용의 시작으로 다시 한 번 망조에 드는 길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명심할 것은 현재 가진 바의 가능성을 수습하여 그것을 통하여 오늘 내가 무엇을 할까를 결정하며, 그로 인해 하나님의 큰 역사가 이루어지도록 힘쓸 것입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에 "네 보던 일을 셈하라"는 주인의 말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셈할 수 있는 시간, 셈할 수 있는 기회가 남아있습니다. 이 사람은 이것을 기회로 삼아 그 기간을 잘 이용함으로써 미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내가 하는 조그마한 이 일, 이 짧은 시간을 잘 활용하여 영원한 생을 위해 준비하는 그러한 지혜를 가지라는 말씀인 줄 압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예수님께서 주신 결론의 말씀이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는 것입니다. 이 "불의"라는 말을 헬라 원어로는 '아디키아스' 라고 하는데 이는 불의하다, 불합당하다, 혹은 부정,악함, 나쁜 짓 등의 뜻을 가지고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나타난 이 비유 자체가 바로 이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 이 사람이 남의 재산을 가지고 증서를 위조해가면서까지 빚을 탕감해주고 벌어들인 이러한 돈이 바로 불의한 돈이요, 불의한 재물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그 불의한 재물을 가지고 선한 일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지혜로운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어차피 없어질 것을 가지고 당분간이라도 내 손에 있을 때에, 나 죽기 전에 선한 일을 하라는 그 말입니다. 이 사람은 그것으로 친구를 사귀었습니다. 선행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미래를 준비하였습니다. 생각해보면 돈을 가져서 미래를 준비한 것이 아니라 선심을 베풀어 미래를 준비했습니다. 그 점이 이 사람의 지혜로움입니다.
우리는 흔히 돈을 벌어야 저축을 한다고 생각을 합니다만 사실 진실한 저축은 선행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구제하는 것은 하나님께 꾸이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은행에 저축하는 것입니다. 성서적 근거에서 분명히 말씀드리면 내가 선한 일을 많이 해두면 내 자식이 절대로 굶지 않습니다. "의인의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다"(시 37:25)하였습니다. 또한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시 37:26)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자식에게 정말 안전하게 좋은 것으로 주려고하거든 선행을 하여야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안전한 하나님의 은행에 저축했다가 자식에게 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은 남의 재산이요, 불의한 재물이라 하더라도 선행을 하여 미래를 준비하려 합니다. 그 점이 착하고 선한 일이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악한 시대를 삽니다. 게다가 제한된 시간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돌이켜보면 과거에 잘못한 후회가 많습니다. 그러나 지난 일을 후회하는 데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문제는 오늘이요, 지금에 있습니다. 그리고 미래가 있을 뿐입니다. 오늘, 아니 미래를 위해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그 지혜가 필요한 것으로 압니다. 이 불의한 청지기처럼 얼마 남지 않은 이 짧은 기회를 잘 수습하여 무엇인가 선행을 이루어 나감으로써 미래를 준비하는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여기 이 사람은 불의한 자, 불의한 청지기로서 지혜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선한 청지기로서 누구보다 지혜로운 자가 되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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