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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105쪽에 있는 글입니다.
6 불의, 불의, 불의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이 받았느니라 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그들이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로마서 1장 26~32절
지금 우리가 펴 놓은 말씀은 로마서 가운데 가장 읽기 어려운 내용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안에는 우리 마음을 기쁘게 하는 구절이 하나도 없습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입에 담기조차 곤란한 죄목이 줄줄이 이어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복잡다단한 세상을 살면서 정신적으로 몹시 시달리는 요즈음 사람들에게는 분명히 피하고 싶어 할 만한 내용임에 틀림없습니다.
에릭슨이라는 신학자는 현대인들에게 죄를 논하기 어려운 이유를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죄는 죽음과 다를 바 없이 유쾌하거나 즐거운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들이 들으면 마음에 거부감을 일으킨다. 또 많은 사람들이 '죄'의 개념조차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죄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죄의식을 잘 느끼지 않는다." 이처럼 접촉점을 제대로 찾기 어려운 사람들을 놓고 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쇠귀에 경 읽기나 다름이 없을지 모릅니다.
이 신학자의 말에는 분명히 일리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 사회는 날이 갈수록 범죄의 양상이 극악해지고 있습니다. 거의 매일 새로운 유형의 범죄가 커다란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남의 나라 이야기를 듣는 것처럼 놀라지를 않습니다. 세상을 사는 데 빼놓을 수 없는 필요악이라고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죄 이야기가 먹혀들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죄에 대한 교리를 진지하게 다루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가 있습니다. 아무리 싫어도 먼저 우리가 안고 있는 죄가 어떤 것인지 바로 파악해야만 그 다음에 우리의 참모습이 어떠한가를 이야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죄의 실체를 정확하게 알지 못하면 우리의 참실존을 알 수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씀하는 죄는 우리의 잘못된 행동이나 생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로 하여금 죄를 짓게 만드는 선천적인 본성, 즉 내적인 성질까지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근본 자아를 적나라하게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죄의 문제를 파헤쳐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패한 마음
우리가 본문을 보면서 놀라움을 금할 수 없는 사실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선한 것이 하나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는 점입니다. 인간이 이토록 악합니까? 어찌하여 선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다는 말입니까? 정말 우리가 탄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인간이 이토록 악하다면 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질문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26절 초두에 나오는 '이를 인하여' 라는 말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은 앞에 있는 내용을 전부 받는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꼭 집어서 말하면 25절 내용을 되받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좋습니다. 사람들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기 시작하면서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로 악한 존재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8절은 인간이 왜 조물주를 섬기려 하지 않았는지 한 마디로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이 말씀의 뜻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을 기피한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눈을 피해 제멋대로 살 수 있을까 하는 인간의 못된 심리를 지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람이 하나님에 대해 아는 것을 싫어하고 기피했기 때문에 자연히 더 악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말입니다. 이것보다 더 확실하게 죄의 뿌리를 진단하는 말씀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세상을 사노라면 여러 종류의 모임에 참석할 때가 있습니다. 가끔 어떤 모임에 가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로 시끌벅적 정신이 없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누군가가 하나님에 대한 말을 꺼내면 참석한 손님들의 인상이 금방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하필이면 이 자리에서 그 따위 말을 하느냐는 식으로 은근히 거부감을 표시하는 것을 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을 노골적으로 싫어한다는 것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인간은 마음에서 하나님을 추방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자리를 자기가 차지하고 올라앉았습니다. 하나님의 간섭을 받지 않고 마음껏 자유를 누리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악한 행동을 하자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셨습니까? 제 마음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셨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28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자 우리에게는 비참한 결과가 찾아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실한 마음'이 된 것입니다.
이것은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부패했다는 뜻입니다. 부패했다는 말의 원 뜻은 동전이 규격에 맞지 않아서 쓸모가 없게 된 것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거부하는 인간의 마음은 규격에 맞지 않아 아무 가치가 없는 동전 한 닢이나 다름없다는 말입니다. 마음만 부패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행동도 달라졌습니다.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못된 것만 골라서 하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결국 인간에게는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 존재할 수 없게 되어버린 것입니다.
바울은 부패한 마음을 가진 인간이 무엇이나 제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자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합당치 못한 일을 많이 행하였는가를 사례를 들어 가면서 고발하고 있습니다. 그 범죄 내용을 하나하나 열거하고 있는 것이 바로 2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마치 죄라는 상품을 진열해 놓은 쇼윈도같이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죄목들이 세상에 있는 죄를 전부 망라한 것으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당시 로마 사회를 풍미했던 죄악상 가운데서 큰 줄기만 뽑아 놓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르면 본문의 내용은 당시 로마제국에 만연했던 죄악의 양상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합니다. 역사가 베르길리우스는 당시 사회상을 놓고 "옳고 그른 것이 혼돈된 사회였다. 유래 없는 사치 시대로서 사람들이 어떤 물건을 놓고 그것이 무엇인가 묻는 것이 아니라 얼마냐고 묻는 시대였다"고 말했습니다. 무엇이나 돈으로 가치가 결정되었다는 말입니다. 심지어 사람까지도 돈으로 평가되었습니다.
따라서 값이 비싸면 내용에 상관없이 무엇이나 좋은 것으로 보았기 때문에 자연히 건전한 가치관이 몰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오늘날 과소비가 성행하는 우리 사회도 로마 시대와 비슷한 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이처럼 정신이 비뚤어진 사회 속에서 살던 로마 사람들은 평범한 것에는 곧 권태를 느꼈다고 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새로운 쾌락을 추구하지 않으면 못 견뎠습니다. 즐길 수 있는 일이라면 선악을 가릴 것 없이 서슴지 않고 저질렀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로마 사람만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20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 역시 별 차이가 없습니다. 로마 사람의 죄악상은 바로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본문의 말씀을 왜 우리에게 주셨겠습니까?
성범죄(性犯罪)
이제 우리는 말씀의 내용으로 돌아가서 구체적으로 인간이 저지른 죄악들을 하나하나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먼저 26, 2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26, 27절).
이것은 동성애를 지칭합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남으로 인해서 빠진 가장 심각한 죄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성적 타락입니다. 그중에서 가장 더러운 것이 동성애였습니다. 이 죄는 이미 24절에서 잠깐 언급되었습니다.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였으니."
성범죄는 어느 시대나 그 사회의 타락상이 어느 정도인가를 읽을 수 있는 샘플이 되었습니다. 만일 동성애가 유행하고 사람들이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용납하는 사회가 되면 그것은 치유가 불가능한 말기 현상으로 보아도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는 소돔과 고모라가 가장 좋은 사례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에게 허락하신 성은 고귀한 목적과 엄격한 질서를 가진 축복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남녀가 성관계를 가질 수 있도록 허락된 길은 결혼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떠난 인간은 결혼이라는 틀 속에서 만족하기를 거부했습니다. 결혼이라는 자연 질서를 벗어버리고 금지된 쾌락을 즐기려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그들이 나중에는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문란한 성행위를 즐기는 동물이 되어버린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예를 들자면 무책임한 동거, 간통, 강간, 혼음, 변태 성행위, 동성애 등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정도(正道)를 벗어났기 때문에 이처럼 추악한 죄 속으로 끌려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로마에서는 동성애가 귀족은 물론 노예들의 세계까지 구석구석에 유행병처럼 번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로마 초기의 황제 15명을 조사하여 보았더니 그 중에 14명이 동성애자였다는 충격적인 연구 자료가 나와 있습니다. '황제' 하면 마음에 드는 처첩들을 수두룩하게 거느릴 수 있는 처지가 아닙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비정상적인 성행위를 즐겼다는 것은 당시 로마 사회가 동성애같은 자연스럽지 못한 성관계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있었다는 점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짐승과 교합하는 일까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정도였다고 합니다. 인간이 어느 정도까지 더러워질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기막힌 단면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본문에서 여자끼리의 동성애가 먼저 언급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놓고 여자들이 동성애에 더 깊이 빠졌기 때문이라고 해석한다면 곤란합니다. 물론 왜 여자를 먼저 언급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이 있지만 제가 보기에는 여자 쪽의 죄질이 남자쪽보다 가볍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내용을 잘 보세요. 여자들에 대해서는 '순리를 바꾸어 역리로 썼다"는 말로 끝나는 데 비해, 남자들에 대해서는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일 듯하다'는 노골적인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것은 남자의 죄질이 여자보다 더 무거웠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동성애는 로마 사회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날 선진국 사회를 둘러보세요. 동성애가 얼마나 심각한 사회 문제로 등장하는지 다음에 나오는 몇 가지 사례가 증명을 하고 있습니다. 1989년도 샌프란시스코에서는 동성애자들이 부부로 호적 신고를 하면 결혼증명서와 유사한 증명서를 발급해 주어 정상적인 부부들과 똑같은 혜택을 누릴 수 있게 했습니다. 이것은 동성애를 법적으로 인정한 것입니다. 그리고 1988년에 캐나다의 연합교회는 동성애자들도 목사 안수를 받을 수 있도록 총회에서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더욱 기막힌 사실은 동성애자들의 생활 방식을 하나님이 주신 은사로 고려할 수 있다는 보고서가 제출된 것입니다. 선진국에서는 이제 교회마저도 동성애자들을 정상인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추세로 몰려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왜 동성애가 무서운 죄가 됩니까?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성끼리 짝을 지워 결혼생활을 하게 하셨습니다. 결코 동성을 짝지워 결혼생활 하도록 하시지는 않았습니다. 따라서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질서를 제멋대로 뒤집어 놓은 것입니다.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썼다"는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동성애는 하나님 보시기에 굉장히 괘씸한 행동입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을 향해 '당신은 남자 여자 짝지워서 결혼생활 하게 했지만 나는 당신보다 더 능력이 있어. 난 남자를 여자로 만들 수 있고 여자를 남자로 만들 수도 있지.'라고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방자한 행동입니다. 얼마나 가증스럽고 추악한 죄입니까? 사람들이 이런 추악한 죄에 빠지게 되자 응분의 결과가 찾아왔습니다.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27절).
죗값을 생전에 단단히 치렀다는 의미입니다. 건전한 사회에서는 오랜 기간 동안 동성애자들이 올바른 인격 대우를 받지 못했습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 말씀 드린 것처럼 일부에서는 그들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대개는 따돌림을 당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받고 있는 '상당한 보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있습니다. 금세기 들어 에이즈라는 무서운 질병이 생겼습니다. 이 병은 동성애자들에게 내린 천형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상당한 보응'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에이즈에 대한 최근 미국 사회의 자료를 소개합니다. 미국에서 십대가 성병을 옮기는 속도는 13초에 1명 꼴이라고 합니다. 워싱턴 D.C.의 한 고등학교에서 무작위로 조사한 결과 100명 중 1명이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대학생인 경우는 500명 당 1명 꼴로, 그것도 도심지에 있는 대학에서는 300명 당 1명 꼴로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되어 있다는 통계가 나왔습니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무서운 상황에 놓여 있는지 모릅니다. 결국 우리는 무의식 중에 동성애자들을 너그럽게 보아 준 셈이 되었고 그 결과 값비싼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에 직접 연루된 자들은 피할 수 없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신음하게 된 것입니다.
부패한 마음의 죄악상
그 다음으로 나오는 죄가 무엇인지 본문을 보시기 바랍니다. "가득한 자요"라는 말에 붙어 나오는 죄가 처음에 4가지 나옵니다. 또 이어서 5가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가득하다'는 말은 죄짓는 데에 마음을 온통 빼앗겨버렸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온전히 드려야 할 마음을 죄에 전부 빼앗겨버렸기 때문에 사람들이 하나님 무서운 줄도 모르고 온갖 더럽고 악한 짓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불의
그러면 이 중에서 제일 먼저 나오는 '모든 불의'에 대해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모든 불의란 광범위한 악을 포괄하고 있는 성경적인 용어입니다. 1장 18절을 보면 불의라는 단어가 두 군데에 걸쳐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모든 불의란 본문에 열거되지 않은 다른 죄까지도 포함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추악과 악의
다음에 '추악'과 '악의'가 나옵니다. 추악은 악을 범하는 행동을, 악의는 그 밑에 깔려 있는 성품을 말합니다. 어떤 사람은 이것을 거꾸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둘을 가지고 무리하게 구별하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둘 다 인간이 본성적으로나 행동 면에서나 철저히 악하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전서 5장 8절에 "괴악하고 악독한 누룩"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괴악과 악독'은 원문에서 '추악과 악의'와 똑같은 단어입니다. 누룩이 아주 못쓰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기 위해 괴악과 악독이라는 의미가 비슷한 두 단어를 사용하여 이중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추악과 악의도 인간의 행동이 철저하게 악하다는 것을 이중으로 강조하는 말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탐욕
다음으로 '탐욕'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탐욕은 더 많이 가지고자 하는 터무니없는 욕망을 말합니다. 이것은 철저한 자기 위주의 소유욕입니다. 아무리 가져도 만족하지 못하는 욕심입니다. 요즈음 세태를 보면 정말 놀랄 일이 너무 많지 않습니까? 모 대학의 무용학과 교수들은 정말 대단합니다. 그들의 남편들도 대학 교수라고 하더군요. 부부 교수가 될 정도면 우리 나라에서는 귀족 계급(?)입니다. 그리고 특히 예능 계통의 교수라면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여지가 많습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지만 자녀에게 예능계 공부를 시키려면 작은 집 한 채는 날려야 할 정도로 엄청난 돈이 듭니다. 시간당 피아노 교습비가 10만 원, 입시 전 반짝 30분 레슨에 100만 원이라는 사례비가 아무 거부감 없이 통용되는 세상입니다. 그런데 과외 소득으로도 양이 차지 않아서 거액의 뇌물을 받고 성적을 조작하여 부정 입학을 시킨 것은 그야말로 탐욕의 극치를 보는 것 같습니다. 이것은 가진 자의 횡포요, 기득권 층의 끝없는 욕망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시기, 살인, 분쟁
두 번째 그룹에 해당하는 '가득한 자'의 5가지 죄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시기', '살인', '분쟁'이 나옵니다. 이것들은 서로 관련성이 있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남을 시기하면 분쟁하게 되고, 서로 싸우다 보면 미워하게 되고, 미워하다 보면 살인까지 저지르는 경우가 허다하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사기'는 우리가 잘 아는 고약한 죄입니다. '사기'의 어원은 고기를 낚기 위해 낚시에 다는 미끼를 가리키는데, 아주 간교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기치는 사람은 머리가 보통 좋아서는 안 됩니다. 예를 들어서 청와대 비서관을 사칭하면서 몇 십억 원을 끌어 모은 사람은 지능지수가 보통이 아닐 것입니다. 미끼를 달아서 눈을 멀거니 뜨고도 속아 넘어가도록 하는 사람이니 얼마나 머리가 좋겠습니까? 그리고 '악독'은 의도적으로 행하는 나쁜 짓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사기'와 '악독'은 같은 고리에 달려 있는 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수군수군하는 자, 비방하는 자
그 다음에 '수군수군하는 자', '비방하는 자'가 나옵니다. 이것 역시 둘 다 비슷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엄격히 말하면 수군수군하는 것은 당사자가 없는 자리에서 서로 주고받는 말이고, 비방하는 것은 당사자가 있는 자리에서 하는 말로 볼 수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너하고 나하고만 알자는 식으로 소근대는 것은 수군수군이고, 아예 그 사람 면전에서 욕하는 것은 비방이라고 풀이를 합니다. 아무튼 둘 다 상대방을 괴롭히는 말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
그 다음으로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가 나옵니다. 이것은 두 가지 해석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로 해석될 수도 있고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라는 뜻도 됩니다. 그러면 어느 쪽이 더 타당하냐고 할 때 후자로 해석하는 편이 더 바람직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죄목 전부가 인간이 하나님을 향해 저지르는 나쁜 행동을 나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는 큰 죄인입니다.
자기를 과시하는 자
'능욕하는 자', '교만한 자', '자랑하는 자'는 서로 비슷한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자기를 과시하고 뻐기는 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능욕이라는 말은 뻐긴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자랑한다는 말은 방랑자, 혹은 방랑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옛날에 돌팔이 의사나 약장수들이 이 동네 저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거짓 선전을 일삼는 예가 허다했습니다. 돌팔이 의사는 자기만이 불치병을 고친다고 큰소리쳤고 돌팔이 약장수는 자기 약이라야 병이 낫는다고 허풍을 쳤습니다. 이와 같이 자기가 남보다 우월하다는 착각 속에서 사는 자들에게 해당되는 죄목입니다.
악을 도모하는 자
'악을 도모하는 자'는 한 가지 악으로 만족하지 못하여 또 다른 악을 궁리해서 저지르는 아주 질이 나쁜 사람을 가리킵니다. '부모를 거역하는 자'는 우리가 잘 알다시피 배은망덕의 표본이라 할 수 있는 자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매한 자
그리고 '우매한 자'는 하나님을 멸시하는 미련한 사람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을 멸시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나쁜 짓을 함부로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해 우매하다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배약자'는 약속을 해 놓고는 쉽게 깨뜨리는 사람을 말합니다.
무정한 자
'무정한 자'와 '무자비한 자'는 둘 다 비슷한 의미입니다. 한마디로 본능적인 인간의 정마저도 외면하는 사람을 가리킵니다.
로마 시대에는 갓난아기를 내다버리는 악습이 있었습니다. 부인이 아기를 낳으면 그 아기를 남편이 누워 있는 발치에 갖다 놓습니다. 아버지가 그 아기를 보고 마음에 들면 일어나 아기를 안는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아기는 어머니가 키웁니다.
그런데 만약 아기가 마음에 안 들어 아버지가 돌아누우면 그 아기는 버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로마 시대에는 하루에 30~40명이나 되는 많은 신생아들이 광장 같은 곳에 내버려졌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무자비하고 비정한 일입니까?
여러분, 네 살바기 고아 소녀를 데려다 감금하고 동물처럼 사육해서 돈벌이를 시킨 서커스 단장 이야기가 신문에 보도되면서 우리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습니까?
키가 자라지 못하게 하루에 두 끼만 먹이고 잠도 몇 시간 재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간이 할 짓입니까? 또 열 살짜리 오빠가 같이 놀아 주지 않는다고 안달하는 누이동생을 칼로 찔러 죽이고 그것을 위장하기 위해서 집에다 불을 지르고 허위신고를 한 사건은 정말 숨이 막힐 지경입니다.
이밖에도 요즘 세상이 얼마나 무자비한가를 단적으로 말해 주는 사건이 많습니다. 순박해야 할 시골 청년이 잠자는 모녀를 덮쳤다가 반항을 하자 어머니를 살해한 뒤 시체를 곁에다 두고 그 딸을 성폭행한 사건은 입을 열어 말하기도 싫은 이야기입니다. 한마디로 인간성의 상실입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정도의 사회상입니다. 바로 이런 것을 두고 무자비한 자요, 무정한 자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악을 즐기는 인간성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32절).
자기가 행하는 일이 하나님 앞에 죽어 마땅한 죄라는 것을 인간이 본능적으로 안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사형'은 로마서에서만 22번이나 나오는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18번은 모두 죄와 관련되어 있는 것을 봅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이 어떻게 자기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모를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롬 2:15).
즉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이라도 그 마음속에 있는 양심으로 인하여 자기의 죄를 알 수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모른다고 해서 죄의 값이 사망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을 몰라도 양심적으로 그 정도는 알고 있다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입니다. 따라서 악을 행하는 자들은 죄인 줄 알면서도 태연하게 악을 저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32절).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기 혼자 죄를 범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을 죄의 소굴로 끌어들여서 함께 악을 행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그들이 죄를 짓는 모습을 보고 즐기며 박수갈채를 보냅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기들의 행위가 옳다고 강변합니다. 사회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인간은 원래 나약한 존재인데 뭘 그러느냐, 세상이 다 그런데 별수가 있느냐는 식으로 스스로를 달랩니다. 큰 목적을 위해서라면 작은 잘못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식의 공리주의적 사고방식으로 자기를 합리화하려고 합니다. 정말 추악한 사람들의 일면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인간의 근본 성향, 생각, 행동이 얼마나 악한가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검토해 보았습니다. 이것은 로마 시대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앞에 벌거벗겨 놓으면 다를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잘난 척, 아무리 의로운 척 가장을 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인간은 근본적으로 추악한 존재입니다.
물론 위에서 열거한 죄 중에는 우리와 무관한 것들도 있습니다. 이를테면 동성애 같은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21가지 죄목 중에서 우리에게 저촉되는 죄목을 찾으라고 한다면 몇 가지나 꼽을 수 있을까요? 사람따라 다르겠지만 대략 다섯 가지 안팎일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나오는 죄목 전부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처럼 매도한다면 몹시 못마땅한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동기, 기회, 명분만 주어진다면 본문에 나오는 악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설혹 한 가지 죄를 범했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형에 해당하는 죄인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법은 세상의 법과 다릅니다.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수군수군한 것이 마음에 걸려 세상 법관을 찾아 벌을 받겠다고 자청한다면 그를 정신병원으로 보낼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법은 어떻습니까? 수군수군해도 사형에 해당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수군수군하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수군수군하는 말 뒤에 감추어져 있는 악한 마음을 보시기 때문입니다. 왜 수군수군하느냐? 그 뿌리를 캐고 들어가 보면 분명히 그곳에 흉악한 죄가 웅크리고 있는 것입니다.
절망 속에서 누리는 세 가지 은혜
제가 한 가지 질문을 던지겠습니다. 우리가 본문에 기록된 대로 선한 데가 한 곳도 없는 죄악투성이라고 한다면 이 모습 그대로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습니까? 아마 천국문을 열어 준다고 해도 들어갈 자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공사장에서 험하게 일하고 있는 막노동자를 불러 세워 놓고 "내가 당신을 예배에 초청하고 싶습니다. 꼭 오십시오" 하면 그 사람이 교회에 들어오려고 하겠습니까? 몰골이 그 자리에 어울리지 않으니 나중에 깨끗한 차림새로 가겠노라고 변명할 것입니다. 악한 죄를 그대로 가지고 구원받을 수 있는 길은 없습니다. 우리의 추악한 모습 그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더러운 모습을 감춘다고 들어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깨끗한 모습으로 완전히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를 완전히 새것으로 바꾸어 놓을 수 있는 구원자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을 볼 때 겉모양을 가지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 앞에서 드러난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 누구라도 마음에 예수님을 모시지 않으면 망할 사람이요, 영원히 진노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인 것입니다.
저는 본문을 읽으면서 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마치 마귀가 저를 향해 손가락질하면서 26절 이하에 나오는 죄를 한 가지씩 지적해 가며 하나님께 고소하는 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 처절한 절망 앞에서도 세 가지 은혜를 놓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싫어하는 부패한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 마음으로 바꾸어 주신 은혜입니다. 둘째, 예수를 믿자마자 모든 죄를 무조건 용서해 주신 은혜입니다. 셋째, 예수 믿은 후에도 여전히 악함이 남아 있지만 성령의 감화로 악을 범하지 못하게 막아 주시는 은혜입니다. 할렐루야!
인간의 마음은 언덕 위에 있는 수레에 비유할 수 있습니다. 언덕 위에 놓여 있는 수레를 상상해 보세요. 손으로 붙잡고 있지 않으면 그것은 굴러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예수 믿고 새사람이 되었지만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있지 않으면 죄악된 세상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본문에 나오는 죄악들을 얼마든지 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의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있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당신은 이 은혜의 손에 붙잡혀 있는 사람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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