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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부한 자와 가난한 자(야고보서2:5-7)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

부한 자와 가난한 자(야고보서2:5-7)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 하였도다.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지난 시간에 우리는 그리스도인의 인간관계에 대하여 그 원리를 공부했습니다.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고 살면서, 나와 나 자신과의 관계, 그리고 나와 이웃과의 관계를 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독교인이라고 할 때, 기독교인된 도리에서 이웃과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지, 이에 대하여 대단히 실제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자못 신학적인 말씀인데도 야고보는 어려운 철학적 용어를 쓰지 않고 아주 평범하게, 누구나 다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말로 소중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너무나 당연한 것 같으면서도 실제로는 그리되기가 어려운 가르침입니다. 우선 다른 사람을 외모로 취하느냐 어떠냐를 살피기 전에 나 자신에 대하여 생각해볼 것입니다. 내가 나 자신을 볼 때에 외모로 취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절대로 외모에 대하여 생각할 것 없습니다. 재물이 있고 없고, 지식이 있고 없고, 지위가 높고 낮고…… 이런 것은 문젯거리가 못됩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이 자녀가 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하여야 합니다. 이웃에 대해서도 그렇습니다. 그가 성도이면 그만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인이면 그만입니다. 그가 예수 믿는 사람이라는 것, 이것만으로 충분한 것입니다. 그 밖의 것, 이를테면 부자냐 가난뱅이냐, 유명인이냐 소시민이냐 많이 배운 사람이냐 못 배운 사람이야 따위는 전혀 생각할 것 없습니다.

내가 신앙적으로 얼마나 깨끗하게 보고 듣고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나의 신앙이 발전할 수도 있고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주변에서 흔히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첫째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함이요, 둘째가 서로 구별하지 말라 함입니다. 그리고 셋째가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라 함입니다. 우리는 재판장이 유죄다 무죄다 하고 죄수를 정죄 하듯 남을 판단하고 심판해서는 안됩니다. 내가 남을 판단하다니, 내가 하나님이라는 것입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판단은 하나님께서 하십니다. 내가 남을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보아하면 참으로 맹랑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의 행동을 두고 험담을 하는데, 사실은 당자가 그런 행동하는 것을 본 적도 없으면서 뜬소문만 가지고 열을 올립니다. 어떤 사람은 머리가 얼마나 좋던지 한술 더 떠서 남의 속마음까지 판단합니다. 그 사람이 틀림없이 이러저러한 생각을 했을 거라고, 독심술(讀心術)이라도 있는 양 넘겨짚고 나섭니다. 아서요! 그러는 법이 아닙니다. 비록 내가 내 눈으로 보았다 해도 확실치 않습니다. 보았다 해도 바로 보았기가 어렵습니다. 함부로 그렇게 남을 판단할 것이 아닙니다. 악으로 좇아난 판단입니다. 그래서 말씀함입니다. "악으로 판단하지 말라."

오늘의 본문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실제적인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람을 판단할 때에 그 사람의 지식이나 인격 같은 것은 얼른 판단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런 것은 얼마동안 겪어 보고 나서야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에 비하면 한결 쉽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바로 그 사람의 물질적인 여건입니다. 가난한 사람이냐 부한 사람이냐-이것은 쉽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는 이것이 사람을 판단하는 데 제일 조건이 되고 있습니다. 근자에 우리 나라 사람으로 중국을 내왕하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연길(延吉)이다 심양(瀋陽)이다 해서 목사님들도 많이 가보고 교인들도 많이 가봅니다. 그런데 그곳 사람들이 서울서 오신 분들보고 뭐라고 말하는지 아십니까? "목사님들이 어떻게 그처럼 배가 나오고 기름기가 줄줄 흐릅니까?" 게다가 금테안경까지 끼고 있으니까 굉장한 부자로 보이는 것입니다. 목사가 어찌 저렇게 부자인가 싶은 것입니다. 굶어 가지고야 배가 나올 리 없으니 배가 나온걸 보면 틀림없이 잘먹고 잘사는가보다, 이렇게 부터 생각합니다. 그리고 입은 옷이 또한 번드레합니다. 요새 사람들은 남이 입은 옷을 한눈에 척 보고도 '저건 삼십만 원짜리다' '저건 육십만 원짜리다' 하고 쉽게들 알아맞힙디다. 저는 한참을 들여다보아도 그것이 얼마짜린지 짐작도 못하겠는데 이렇게들 판단이 빠른 것입니다. 일단 이렇게 입을 옷을 보고 판단한 연후에야 사람을 보게 되는 모양입니다. 참으로 잘못된 현상입니다.

여러분, 돈 생각 없이 사람 만날 수는 없는 것인가요? 부하냐 가난하냐를 개의치 않고 인간관계를 맺을 수는 없는 것입니까? 딸을 시집보낸다, 아들 장가보낸다 할 때도 돈 문제는 떼어놓고 할 수 없는 것입니까? 저는 누구를 중매한다거나 소개할 때에 돈 얘기부터 꺼내고드는 걸 보면 질색입니다. 이렇게 되면 중매고 소개고 입맛이 싹 가십니다. 제게 이런 성향이 너무나 강하기 때문에 가끔 스스로를 돌아보고 생각에 빠질 때가 있습니다. 내가 너무 신앙적이어서인가, 아니면 옛날에 가난하게 살아서 부자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는 탓인가, 스스로 물어보곤 합니다.

그런데 여러분, 우리는 그 누가 부자라고 해서 덮어놓고 정죄하려 들어서도 안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인간관계에서 돈 문제는 빼고 생각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 이것만이면 족합니다. 가난하면 어떻고 부자면 어떻습니까? 부하고 가난하고는 시간 문제입니다.

그러나 성도라고 하는 명분은 영원한 것입니다. 어떤 것이 큰 문제이고 어떤 것이 작은 문제인지, 이것을 분명히 하고 살아갈 것입니다. 큰 것은 작게 여기고 작은 것을 크게 여기는 것이 세태이기에 한심한 것입니다. 문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바른 인간관계가 되려면 먼저 바른 가치관이 서야 합니다.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누가복음 722절에서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가서 보고 들은 것을 요한에게 고하되, 소경이 보며 앉은뱅이가 걸으며 문둥이가 깨끗함을 받으며 귀머거리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셨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620절에서는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 하셨습니다. 하나님 나라가 가난한 자의 것이라 하셨습니다. 가난과 부유가 복음과 어떻게 관계되어 있는지,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아야 하겠습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도 어렵다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한 관원이 주님께 여쭈었습니다. '주여, 내가 어찌하면 구원을 얻겠습니까?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까요?' 주님은 대답하십니다. '율법을 지켜라.' '어렸을 때부터 다 지켰습니다.' 관원은 실로 건방진 소리를 합니다. 돈푼이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렇게 말하는 사람 없습니다. 적어도 예수님 앞에 와서 '내가 율법을 다 지켰습니다'하는 건방진 소리는 부한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소립니다. 가난한 사람은 그런 소리 못합니다. 물질이 부하다보니 마음도 부해서 그런 소리를 합니다. '그렇다면 좋다'하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오히려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너 가진 것 다 팔아서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젊은 율법사는 이 말씀을 듣고는 근심하며 집으로 돌아갑니다. 영생과 재산, 어느 쪽입니까? 그까짓 재산이 문제입니까? "좋습니다, 예수님. 그까짓 재산쯤이 대수겠습니까? 다 팔아서 영생 얻는다면야 당장에 팔아치우고 예수님 따르겠습니다"-젊은이가 선뜻 이런 반응을 보였다면 예수님께서 뭐라고 하셨을까요? 상상하기 어렵지 않습니다. '그거 당장 팔아치울 필요는 없다. 복음사업에 써야 할 텐데 팔아 없애긴 왜 없애느냐? 이런 대답을 하셨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관원은 영생보다도 재산을 택했습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관원을 보고 하신 말씀입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떻게 어려운지,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18:24-25)" -'보아라, 차라리 가난했더라면 홀가분하게 천국에 들것을, 거칠 것 이 많아놓으니 저다지도 힘들어하는구나'라고 하심이 아니겠습니까? 부자에게는 결정적인 약점이 몇 가지 있습니다. 참으로 조심할 일입니다. 우선 부자는 자기를 구별하기 좋아합니다. 다른 사람, 특히 가난한 사람과 어울리거나 같이 앉는 것이 싫습니다.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 곁에는 앉으려 하지 않습니다. 자기 입은 것과 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그 다음부터는 그 옷을 입지 않습니다.

돈푼 깨나 있는 어떤 사람이 모처럼 좋은 옷은 하나 해 입었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보니까 가난하게 사는 친구 하나가 그 옷과 똑같은 옷을 입었어요. 그래서 그 다음부터는 그 옷을 입지 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실제로 들은 이야기입니다. 이런 마음이 부자의 마음입니다. 자기 것과 똑같은 것을 입은 사람이 있으면 ", 너도 입었냐? 나도 입었다. , 기분 좋구나!" 이렇게 되었으면 얼마나 살맛 나겠습니까? 제가 늘 말씀드립니다마는 평등함에서 행복을 찾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히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런데 부가 그렇다는 말입니다. 부자들의 그런 성정 때문에 비싼 물건일수록 잘 팔린다는 고약한 풍조가 생겨납니다. 별것 아닌데도 값만 비싸면 잘 팔리는 것입니다. 특별하고 싶은 부자의 본능 탓입니다. 별나고 싶어서 안달하는 것이 부자의 마음입니다. 내가 가진 것과 같은 것을 가난한 사람이 가졌으면 이걸 견디지 못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더 좋은 것, 더 비싼 것, 더 큰 것을 손에 넣고자 합니다. 그 바람에 욕심 많은 장사꾼들이 얼쑤하고 돈을 벌게 됩니다. 똑같은 물건인데도 한쪽에는 정가 5만 원이라고 붙여놓고 다른 한쪽에는 정가 10만 원이라 붙여놓았다면 굳이 10만 원 쪽을 사간다고 합니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부하고자 하는 사람의 심리인 것입니다.

특별한 외양(外樣), 특별한 자리, 특별한 무엇을 추구하는 이러한 심리가 죄가 된다고, 오늘의 본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남들과 같아서는 불편해서 못 견디는 이러한 성정이야말로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것은 자신의 남보다 낫다는 그 형편을 복으로 착각하는 것입니다. '나는 너희보다 더 복을 받고 있다'-이런 심리입니다.

한술 더 떠서 스스로 의로운 사람이라고까지 여기고 삽니다.

여러분, 부하고 넉넉하고 사업이 잘 돌아갈 때, 그때에 '나는 죄인입니다'하고 고백하며 밤을 새워서라도 기도해보신 적 있습니까? 부자는 이렇게 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부자는 사업에 실패하고 몸에 병들고 해서 실의에 빠지면 그때 가서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하고 무릎을 꿇습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부자는 이처럼 도덕적 감각이 둔합니다. 유명한 격언이 있지 않습니까? 배고픈 자의 코가 예민하다는. 여러분, 과연 그렇지 않습니까? 배고플 때에는 얼마나 코가 예민해집니까? 이 근처에 '삼원가든'이라고 하는 음식점이 있습니다. 배고플 때에 이 음식점 곁을 지나 가보면 거기서 나오는 불고기 냄새가 기막히게 유난스럽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가난한 사람들은 도덕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부정에, 악에, 비리에, 사치에 얼마나 민감한 반응을 보입니까? 이에 반하여 부자들은 어떻습니까? '세상이란 그렇고 그런 거지 뭐'-이렇게 둔합니다. 둔해지고 말았습니다. 도덕적 판단 의식이 마비된 것입니다. 그러니 회개할 마음도 없습니다. 오히려 당찮게도 자신의 주제를 복으로 여깁니다. 이것이야말로 부가 인간에게 파놓은 함정인 것입니다. 부한 자는 다 가진 것처럼 착각합니다. 진실하기 어렵고 겸손하기 어렵습니다.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 어렵습니다.

돈이 많으면서도 겸손한 사람이 드물기는 해도 있기는 있습니다. 그런 가하면 돈은 없으면서도, 아무 것도 가진 것은 없으면서도 턱없이 교만한 사람 또한 있습니다. 그러니 문제는 무엇입니까? 마음가짐의 문제입니다. 재물이 많으면서도 생각이나 뜻은 가난한 사람, 이런 사람이 복 있는 사람입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통계적으로 보아도 가난한 사람들이 예수 믿기 쉽습니다. 여러분은 십일조를 바치십니까? 이 십일조 바치는 것을 보아도 그렇습니다. 천 원 벌어 백 원 바치기 쉽습니다. 만 원 벌어 천원 바치기 어렵지 않습니다. 십만 원 벌어 만 원 바치기까지도 쉬운 편입니다. 그런데 일억쯤 벌게 되면 브레이크가 걸립니다. 천만 원 바치기가 어렵거든요. 황차 10억 벌어 일억 바치는 사람은 만나보기 힘듭니다. 그쯤 벌게 되면 딴 생각이 납니다.

주일 지키는 것도 그렇습니다. 이를테면 하루하루 규정 액수 채우기에 급급한 택시 기사님들, 오늘도 보면 차를 세워놓고 예배드리고 나갑니다. 두 시간 벌이를 손해보는데도 말입니다. 그런데도 주일을 지킵니다. 언뜻 생각하면 부한 자들이 주일을 더 잘 지킬 것 같은데 현실은 그렇지가 않은 것을 봅니다. 사교다 골프다 여행이다 해서 주일 제대로 지키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봉사하는 것도 힘들어요. 기도도 헌금도 다 힘듭니다. 무릇 부한 자들, 이런 함정을 극복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오늘의 본문은 아주 실제적으로 말씀합니다.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5)" 라고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에 대해서 가난한 사람을 말씀함입니다. 지위나 신분이나 물질이 다 세상 것입니다 마는, 본문에서는 우선적으로 물질의 가난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인격까지 가난한 것은 아닙니다. 흔히 물질이 없을 때에 인격도 비굴해지기 쉽고 스스로도 낮게 여기는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세 가지를 말씀합니다. 아주 뜻깊은 말씀이므로 잘 소화하여야 합니다. 오해를 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를 택하시고, 둘째,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셋째, 사랑하시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결과적으로 가난한 자가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난한 가운데서 당신의 사람을 택하십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이 가난한 중에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마음이 가난할 때, 건강할 때보다 병들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그 선택을 체험하기도 합니다. 부할 때가 아니요 건강할 때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을 어느 때에 느끼십니까? 하나님의 주도적이고 주권적인 구원을 어느 때에 느끼십니까?

우리는 흔히 건강하고 부하고 사업이 형통할 때에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을 선택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고, 교회에 나오는 것으로 생각합니다마는, 그것이 아닙니다. 내가 가난하고 실패했을 때, 두 손 다 들게 되면 사정이 달라집니다. 나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나를 강권적으로 부르셨다,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셨다, 하나님 앞에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부인이 이야기입니다. 직접 만나서 들었는데, 그 아들이 방탕한 생활을 일삼아 무던히도 부모의 속을 썩이는 모양입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참 신앙이 좋은 분들인데 아들은 신앙하고는 담을 쌓고 삽니다. 아주 못되었습니다. 언젠가는 타이르는 어머니를 죽이겠다고 칼부림까지 했다고 합니다. 이런 처지에 있는 그 어머니가 저를 찾아와 울면서 말합니다. "목사님, 저는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 아들놈의 다리를 꺾어주세요. 목숨만은 부지하게 해주시고 병이 들든가 교통사고라도 당하여 이 어머니를 찾게 해주시고 하나님을 찾게 해주세요." 아주 구체적으로 기도를 한다고 합니다만, 왜 그럴 것 같습니까? 건강하고 형통하니까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이 어느 때에 있습니까? 가난한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어느 때에 느낄 수 있습니까? 가난한 중에 느낄 수 있습니다. "가난한 자를 택하사"-가난한 중에 택하사, 구체적으로 말하면 병든 중에, 실패한 중에 택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중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이니시어티브(initiative)를 가지시고 우리를 먼저 부르신 것입니다. 내 의사나 뜻을 묻지 않으시고 주도적으로 나를 붙드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선택이 바로 가난한 가운데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부요하게 하십니다. 여러분, 어느 때에 믿음이 부요해집디까? 남의 이야기는 하지 말고 나 자신을 생각해보십니다. 어느 때에 믿음이 부요했습니까? 틀림없이 가난할 때였습니다. 본문말씀을 뒤집어서 생각하면 이 말씀입니다. 가난을 통하여 믿음을 부여하게 하시고, 믿음을 주시기 위하여 가난하게 만드신 것입니다. 믿음을 주시려고 나를 고통 속에 넣으셨던 것입니다. 지난주일 낮 예배 때에 새벽기도회이야기를 했더니 월요일 새벽기도회에 많은 사람들이 나왔습니다. 내내 그랬으면 좋으려니 했는데, 웬걸 화요일 새벽은 다릅디다. 하루 나오고 그만둔 사람이 많은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새벽에 늘상 나와서 기도하는 분들은 알고 보면 다 어려움을 겪은 사람들입니다. 그만한 믿음을 얻기 위해서 그들은 남다른 어려움을 겪었던 것입니다. 가난과 질병과 실패, 남모르는 사연이 있습니다. 물질적으로는 부할는지 몰라도 가정에 어려움이 있든가 자녀에게 문제가 있든가, 남다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가난으로 표현되는 고통이 있습니다. 그 속에서 비로소 믿음을 얻은 것입니다. 그만큼의 믿음도 거저 얻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선물입니다마는, 그 선물을 받는 과정은 하나님의 지혜 안에 있는 고통임을 알아야 되겠습니다. 고통 가운데에서 얻어지는 것입니다. 시련 속에서 믿음을 얻습니다. 본문은 이것을 신학적으로 말씀합니다. 가난 속에서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고,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신다고.

또한 사랑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가난 속에 함께 할 뿐더러, 우리도 그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이상하게도 참사랑의 커뮤니케이션은 부한 데에 있지 않습니다. 저는 무시로 생각해봅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누구일까? 한 여자의 남편으로 치자면 단연 엘리자베스 여왕의 남편일 것 같습니다. 그는 아내에게 줄 선물이 없는 사람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는 선물이 참 좋습니다. 주는 것도 받는 것도 다 기쁜 일입니다.

제 가정 이야기라 좀 죄송스럽습니다마는, 우스갯소리로 들어주십시오. 가만히 보니까 여자들은 결혼기념일을 아주 소중히 여깁디다. 남자들은 잊고 지나치기 일쑤인데 여자들은 손꼽아 기다립니다. 생각해보면 결혼식도 사실 여자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남자들은 제 결혼식날인데도 아침에 출근했다가 시간에 맞추어서 식장에 오는 사람도 있습디다마는, 여자들은 한 달 전부터 마사지하랴 뭐하랴 바쁩니다. 전적으로 여자를 위한 결혼식이더라구요. 그건 그렇고, 제가 결혼한 지 꼭 십 년만에 신학대학에서 강사료를 받아가지고 집으로 돌아가는데, 불현듯 오늘이 '무슨 날'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해서 날짜를 꼽아보니 결혼한 지 십 년째가 되는 날입니다. 인천에서 목회할 때인데, 참 어렵게 지내던 때였습니다. 비만 오면 방 천정에서 빗물이 줄줄 새서 그릇을 받쳐놓아야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여자들은 결혼한 날을 소중히 여긴다는데 선물을 하나 사자'하고 4천 원짜리 핸드백을 하나 사가지고 들어갔습니다.

뭐든 들고 들어가는 일이 워낙에 없어놔서 아내는 눈이 휘둥그래집디다. "오늘이 당신과 내가 결혼한 날이 아니요?" 그래서 선물을 준다고 했더니 얼마나 좋아하는지 말로 못합니다. 몇 며칠을 두고두고 좋아합니다. 고작 4천 원이면 될 일을 예전에는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었나 싶습디다. 지금은 아마도 4만 원짜리로도 안되겠지요? 누구나 한번쯤은 경험해본 일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는 그 작은 선물이 그렇게 고마울 수 없습니다. 눈물이 나올 정도로 고맙습니다. 가난하면 이렇듯 아름다운 사랑의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는데, 돈 많은 사람들은 참 불쌍합니다. 줄 것도 없고 받을 것도 없습니다. 주어도 고맙지가 않고 주려고 해도 줄 것이 마땅치 않습니다. 부잣집에 선물을 하려면 참으로 곤란하지 않습니까? 무엇을 주어도 고마워할 것 같지 않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십시다.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을 부요하게 하시고, 그리고 사랑하시는 자로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약속하신 유업을 받게 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가난한 자에게 주시는 축복입니다. 이어 6절에서는 하나님께서도 이렇게 하시는데, 너희는 어찌하여 부한 자만 영접하고 가난한 자를 무시하느냐고 말씀합니다.

부한 자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부한 자가 자칫 잘못될 수 있는 것은 왜 입니까? 앞서도 말씀한 바 있습니다마는, 다시 한번 정리해보십시다. 본문에 보면 세 가지가 나옵니다. 압제하고 고소하고 훼방하고-부한 자가 잘못되기 쉬운 부분입니다.

첫째가, 압제(oppression) 입니다. 남을 무시하고 괄시합니다. 횡포를 휘두르고 착취합니다. 가진 권력으로 압제합니다. 조금 부하다고 가난한자가 이야기하는 것을 무시하려듭니다. 잘못입니다.

둘째가, 고소입니다. 법정으로 끌고 간다는 것은 합법화하고 정당화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법도 가난한 자의 편이 아니라 부한 자의 편에 섭니다. 부한 자는 자신들의 행동을 법적으로 정당화시킵니다. 그러므로 가난한 자는 자신에게 주어진 권리조차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부한 자는 자신에게 주어지는 권리를 다 누리고, 더 나아가 자신의 행동을 백번 정당화합니다. 부한 자의 횡포입니다.

셋째가, 훼방입니다. 일반적으로 훼방한다는 말은 불평한다는 것이요 쉽게 남을 평가한다는 것입니다. 남에게 대하여 쉽게 시비를 벌입니다. 남을 무시하여 쉽게 훼방한다는 것입니다. 부의 힘으로 나를 높이고 나만 못한 사람을 압제하고 업신여기고, 금력으로 권력으로 법의 보호를 받아가면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해갑니다. 전적으로 긍휼 없는 생활을 합니다. 남을 불쌍히 여길 줄을 모릅니다. 이것이 부한 자가 빠지는 함정이요 부한 자에게 있는 시험입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바 그것입니다.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옛날 교회의 경우를 생각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 교회가 있습니다. 여러 신분의 사람들이 다 모였습니다. 노예도 나왔고 창녀도 나왔습니다. 가난한 자도 부한 자도 나왔습니다. 갖가지 신분의 사람들이 나와서 앉아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교회에서 전혀 다른 신분을 가집니다. 노예와 주인이라면 땅과 하늘입니다 마는 교회에서는 노예도 주인도 다 같은 성도입니다. 한 형제가 됩니다. "성도여"-얼마나 아름다운 이름입니까? 기가 막힐 정도입니다. 더욱이 주인이 종을 보고 "형제여" 합니다. 하늘에 오를 만큼 기쁜 일인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이렇듯 아름다운 이름, 거룩한 이름을 쓰면서도 아직 중생하지 못하여 돈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려드는 부자들을 봅니다.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곧 교인이면 다 교인이냐는 식으로 나온다는 것입니다. "너는 전에 노예가 아니었느냐?" 낯을 붉히게 만듭니다.

서울에 그런 교회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라고 이름을 대지 않겠습니다 마는, 우리 나라 초대교회 시절에 세워진 교회로 꽤 부흥이 된 교회입니다. 그 교회에 백정이 나옵니다. 예수를 잘 믿습니다. 열심으로 믿고 봉사하여 장로 투표에서 당당히 뽑혀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양반은 떨어지고 백정이 장로가 된 것입니다. 양반들이 기분 나빠졌습니다. 작당하고 그 교회를 떠나 다른 교회를 세웠습니다. 이른바 양반교회를 세운 것이지요. 서울에 그런 교회가 둘이 있는데, 지금까지도 부흥이 안됩니다.

천민교회는 하루가 다르게 부흥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비록 천한 백정일지라도 오늘 예수 믿으면 성도가 아닙니까? 장로 투표에서 당선되었으면 "장로님"하고 부르는 것이 당연한데, 백정보고 "장로님"이라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누가 이따위 소리를 하겠습니까? 부자들이 돈푼이나 있다고 하는 소리입니다.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이 어디 이런 말 하는 것 보았습니까? 그래서 하는 말씀입니다. 모름지기 우리 성도들은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도 말고 훼방 받지도 않아야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반드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가졌다고 스스로 교만하지 말 것이요, 없다고 비굴하게 굴지 말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정죄하지 말 것이요, 부한 자에게 아첨하지 말 것입니다. 부 자체는 절대로 죄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부를 무조건 정죄할 것도 아닙니다. 가난한 자라고 덮어놓고 의인으로 부를 것도 아닙니다. 가난이 의는 아닙니다. 가난하고도 스스로 의인인 양 할 것도 아닙니다.

결론지어 말하면 이렇습니다. '부하고 가난하고는 묻지 말라, 건강하고 병들고는 묻지 말라.' 중요하지 않습니다. 주변적인 것이요 지극히 작은 것일 뿐입니다. 이런 것은 작게 여기고, 성도의 명분과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믿음, 그것만을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과 은혜와 사랑과 성도의 명분을, 십자가의 은혜만을 크게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그 밖의 모든 것은 작게 생각하라, 물질에 대하여 너무 연연하지 말라, 나 자신을 대할 때나 다른 사람을 평가할 때에 물질은 뚝 떼어놓고 생각하라-세상적인 부나 가난을 지극히 작은 것으로 생각하는 세계관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그래야 성도된 바른 이웃관계가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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