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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방하지 말라(야고보서 4:11, 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이미 말씀드린 대로 야고보서는 목회서신입니다. 목회서신이기 때문에 교회생활의 기본자세 내지 기본적인 의미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교인된 자가 현실 안에서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특별히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지-이런 문제들을 아주 간결하게 하나하나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제 1대 감독으로서 무려 30년 동안을 목회 했습니다. 예수님의 친동생이요, 예수님의 생애를 함께 경험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역사 하실 때에도 그 모든 역사에 거의 동참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육성으로 들은 사람입니다. 이제 목회를 하면서 그는 주님을 대신하여 주님께서 하시던 말씀, 주님의 의도를 교회생활에 직접 적용하면서 한가지 한가지를 훈계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의 교훈이 전부 명령조로 되어 있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이것은 야고보서의 한 특징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하지 말라, 저렇게 하라 하고 명령하는 투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3분의 1은 예수님께서 친히 하셨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가치가 높은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도 예수님께서 친히 하시던 말씀의 깊은 의도를 실생활에, 교회생활에 적용하기 위한 훈계입니다. 특별히 야고보서에서 여러 번에 걸쳐 거듭해서 다루어지고 있는 주제가 언어에 대한 것입니다. 한 절 한 절 따지자면 여러 절입니다마는 우선 그 대목으로만 보아도 지금 이 세 번째 말씀입니다. 1장에도 있고 2장에도 있으며, 오늘의 4장에도 있습니다. 말에 대해서 야고보는 이렇게 거듭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의 문맥대로 보면 하나님 앞에 나와 예배하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교회생활을 해나감에 첫째로 중요한 것이 기도(祈禱)입니다. 바로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두 번째 문제는 나 자신에 대한 문제이며, 그 다음의 문제가 바로 언어인 것입니다. 이렇다할 구제를 하라든가 사회사업을 하라든가 하고 무슨 선한 업적을 남기라는 이야기는 별로 없습니다. 그저 '말조심하라,' 이것입니다.
말이 일으키는 문제를 우리는 실제로 많이 겪고 또 봅니다. 흔히 처음으로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이 겪어야 하는 첫시험이 대체로 '말'로 인한 것입니다. 성도들 간에, 믿는 사람들 사이에 이렇게 저렇게 말이 오갑니다. "믿는 사람이 어떻게 저런 소릴 하누?" 이런 소리에 상처를 입습니다. 모처럼 교회에 나왔다가 말 한두 마디 잘못된 것 때문에 쓰러지고 마는 교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우리 교회에도 문제가 있다면 그 원인은 거의가 '말'에 있습니다. 사건 자체는 실제로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큰일도 아닙니다. 그런데 '말 한마디'가 그 별일 아닌 것을 '중요한 일'로 만들고 '큰일'로 만듭니다. 하잘것없는 일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쓸데없는 말들이 몇 번 전해지면서 엉뚱한 말로 부풀려지고, 문제 될 것 없는 일이 문제화하는 것입니다. 급기야는 많은 사람들이 상처를 입게 되고 교회에 덕을 끼치지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침묵은 금'이라고 했습니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하고 읊은 시조(時調)도 있습니다. '참된 말은 깊이 생각한 끝에 나온다. 무슨 말을 할 때면 그 말이 침묵보다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라고 하는 격언도 있습니다. 민요 가락의 우리 가요에 '갑돌이와 갑순이가…'라는 것이 있지요? 가사 내용을 보면 둘이 좋아했다고 합니다. 좋아했으면 좋아한다고 말을 했으면 좋았을 것을, 말못하고 끙끙 앓다가 그만 갑순이가 딴데로 시집을 가버렸어요. 갑돌이도 화가 나서 딴데로 장가를 들어버렸고-이래가지고 서로가 가슴을 치게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이 가사에는 우리네 사람들 특유의 뉘앙스가 있습니다.
말을 할 줄 모른다는 것입니다. 내일은 삼수갑산을 갈망정 말이나마 한번 해보고 앓을 일이지 말 한번 못해보고 제 속만 끓일 것은 없지 않습니까?
모름지기 말이란 할 줄도 알아야 되고 받아들일 줄도 알아야 됩니다.
우리네 사람들은 이게 서투릅니다. 상대방을 향하여 마음을 열고 말할 줄을 알아야 하며, 상대방의 말이 이런 말이건 저런 말이건 좋게 받아들일 줄 아는 자세가 필요한데, 이게 안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입을 열 때는 겁부터 먹습니다. '내가 이런 말 했다가 망신이라도 당하는 건 아닐까? 상대가 날 싫어하게 되지는 않을까?' 따위로 걱정이 앞섭니다. 그러다보니 할말은 끝내 못하고 말거나 흐지부지 사라져버립니다. 언어를 제대로 구사할 줄 모르는 것입니다. '회의(會議)'라는 것도 보면 회의를 해서 결과가 좋아지는 것을 별로 보지 못했습니다. 회의가 아니라 싸움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대화나 토론하는 훈련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탓입니다. 입을 열면 다정스러운 말이 나오고, 은혜스러운 말, 덕스러운 말이 나온다면 상대방의 마음을 얼마나 평안하게 해주겠습니까? 상대방에게 얼마나 위로가 되겠습니까? 사람이라는 것이 별다른 존재가 아닙니다. 말 한마디로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오가는 말에서 정(情)이 나고 분(忿)이 납니다. 말은 마음의 창문입니다. 말을 통해서 마음이 전달됩니다. 사랑은 굴뚝같아도 말이 사납다면 어찌되겠습니까? 내 아이가 예쁘다고 "문둥아"하고 부릅니다. 우리네 사람들에게는 말을 좋게 하는 훈련이 이처럼 잘못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더욱이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믿는 사람으로서의 언어가 따로 있습니다. 말이 씨앗이 됩니다. 말이 곧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함부로 말할 것이 아닙니다. '망했다' '죽겠다'-이런 말을 함부로 하면 그 말대로 망하고 죽습니다. 신앙적으로 말해야 하고 상대방에게 덕을 끼치는 말을 해야 합니다. 말에서 비롯되는 결과를 생각하고, 골라서 말을 해야 합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면 어떤 결과가 올 것인가, 하나님의 교회에 덕이 될 말일까, 저 사람에게는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이며 나 자신은 어떻게 될 것인가-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말입니다.
성경은 "혀는 곧 불이요(3:6)"라고 말씀합니다. 불씨 하나로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는 것이 불입니다. 이러한 결과를 두고 "나는 성냥불 하나 그어댔을 뿐이다. 그렇게 큰불은 일으키지 않았다"고 변명할 것입니까? 말은 분명히 '한마디'를 했을 뿐입니다. 이 '한마디'의 말이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가서 엄청난 결과를 만드는 것입니다.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하는 것입니까? 모름지기 우리 성도들은 성도로서의 공동체생활을 함에 참으로 말을 조심해야 합니다. 혀를 잘 단속하여야 합니다.
요사이는 우리가 대가족 체제 안에서 살지 못하는 추세여서 더욱 더 말을 잘 배우지 못하고 사는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어른들을 중심으로 해서 가족들이 층층이 모여 살았으므로 말을 조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사이는 핵가족이다 뭐다 하고 주로 둘밖에 살지 않고 보니 말도 함부로 해 버릇합니다. 다듬어지지 못한 말들이 난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야고보는 오늘의 본문에서 특별히 공동체에 끼치는 언어의 영향이 얼마나 큰가를 강조해서 깨우치고 있습니다.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11절)"라고 말씀합니다. 강하게 못박아 교훈 함입니다. 공동체를 파괴하는 가장 무서운 것이 '잘못된 말'이라는 것입니다. '말'로 해서 교회가 무너집니다. 특히 11절 한 절 안에 '형제'라고 하는 말이 세 번이나 나옵니다. 말하는 자도 형제요, 말을 듣는 자도 형제입니다.
"비방하지 말라"고 합니다. '비방'은 헬라말로 '카타랄레오'라고 합니다. 여기서 '카타'는 영어로 'against,' 곧 반대, 대립, 적대의 관계를 나타내는 전치사이며, '랄레오'는 '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곧 '카타랄레오'는 악의로 말하고 반대해서 말하고 무시해서 말하는 것을 뜻합니다. 상대를 이기기 위해서, 넘어뜨리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나는 높이고 남은 낮추자는 것이 목적입니다. 나는 얻고 남은 잃게 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남의 것을 빼앗는 것입니다. 'back biting'입니다. 뒤에서 무는 것입니다. 앞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뒤에서 하는 말입니다.
뒤에서 남을 헐뜯습니다. 당사자가 없는 데서 그를 헐뜯는 말, 고약한 말입니다. 무릇 칭찬은 당사자가 없는 데서 하는 것이 덕(德)입니다. 나쁜 말은 당사자가 없는 데서는 하지 않는 게 덕입니다. 결구 나쁜 소리는 입밖에 내지를 않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나쁜 소리는 듣지도 말고 하지도 말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합니다.
칼로만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닙니다. 말로써 사람을 죽입니다. 말 한 마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을 죽이는지 모릅니다. 암환자들의 대부분이 알고 보면 얼마 전에 남에게서 충격적인 소리, 남에게서 비방하는 화살을 맞은 적이 있더라고 어느 의사가 털어놓았다는 이야기를 지난 시간에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몇 년 전이건 몇 달 전이건 누군가로부터 심한 비방의 화살을 맞았는데, 그 화살을 뽑아내지 못한 채 못 자고 못 먹고 괴로워하기를 일주일 내내, 또는 열흘 스무 날-그것이 결국 가슴에 멍을 만들고, 그렇게 멍든 가슴이 아프고 아프다가 필경은 육신에까지 불치의 병을 초래함으로 죽음에 이르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총을 쏴서 죽이는 것만이 살인이겠습니까? back biting-소리나 질렀나요, 어디? 조용하게 말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것처럼 무서운 죄가 없습니다. 결정적인 살인 행위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리고, 판단하지 말라고 합니다. '판단하다'-헬라말로 '크리논', 영어로 'judging'입니다. 재판장이 되어 심판을 하는 것입니다. 단죄(斷罪)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결정적인 말을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네는 흔히 '이렇다' '저렇다'하는 식으로 딱 잘라서 단정해버리는 어법을 잘 씁니다. 그러나 영어만 보아도 표현을 그렇게 하는 법은 없습니다.
"I am sure."라고 말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는 "as far as I know(내 생각으로는, 내가 아는 바로는)"라고 입을 열거나 "I guess"라고 겸손한 맛을 풍기는 것이 보통입니다. "나는 ~ 라고 생각한다" "내 의견으로는 ~이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남을 함부로 판단하여 '착하다' '못됐다'라든가 '그 사람 틀렸어'라든가 하고 단정해버리는 '재판장'이 되어서는 못씁니다. 어떤 사람은 "그 사람 천당 갔을까요, 지옥 갔을까요?"하고 맹랑하게 못박아 질문을 합니다.
'예스' '노우'로 대답하라는 것입니다. 그거야 D.L.무디의 말대로 예수님 앞에 있는 생명책을 들여다본 일이 있어야 알지, 누가 감히 그 대답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예수 믿으면 구원받습니다"라는 것밖에는 없습니다. 당사자가 예수를 얼마나 잘 믿었는지, 속으로 믿었는지 안 믿었는지, 그 중심이 어떠한지,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판단하지 말라" 함입니다. 사람을 두고 선하다 악하다, 좋은 사람이다 나쁜 사람이다 하고 판정 내리듯 말하는 것은 공동체를 파괴하는 적입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는 '형제'라는 말을 강조합니다. '너희가 형제를 비방하고 형제를 판단한다. 안될 일이다'-여기서 형제라 함은 '교인'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교인들 사이의 관계를 형제라 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이 자리에는 형제 자매들이 모여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한 아버지로 섬기는 관계임으로 해서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아들이 먼저 예수를 믿고 아버지가 나중에 믿기 시작했습니다. 가정예배를 볼 때면 늘 아들이 예배를 인도합니다. 기도할 때면 이 아들이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라고 합니다. 한 번은 아버지가 불쑥 나섭니다. "얘, 너만 기도할 거냐? 나도 예수 믿으니까 오늘은 나도 기도 좀 하자꾸나." 아들은 적이 흐뭇했습니다.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그러시지요. 오늘은 아버지가 기도하시지요." 아버지는 "으흠"하고 기도를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소립니까? "하나님 형님이시여…" 아버지는 이렇게 말문을 여는 것입니다. "아버지!" 아들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아버지를 쳐다봅니다. "하나님 형님이라니,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십니까?" "왜, 내 말이 틀렸냐? 넌 족보도 모르느냐"하고 아버지는 위엄을 차립니다. "네게 아버지면 내게는 형님뻘이 아니냐?"
여러분, 우리가 노소남녀(老少男女) 불문하고 하나님 앞에 서로 형제요 자매인 것은 우리들끼리 정해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맺어주신 관계인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는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우리는 서로 형제 자매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것입니다.
제자의 별명이 '형제'입니다. 다같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형제 자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서로를 소중히 여겨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4장 15절에서 기독교 윤리의 요절이라 할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食物)로 망케 하지 말라"---형제를 볼 때에 우리는 예수님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신 것처럼 저 사람을 위해서도 죽으셨다고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그 사람을 대하여보십시오. 그 값어치는 엄청난 것입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는 한, 남을 비방할 수 없을 것이요, 남을 판단치 못할 것입니다. 내가 저를 비방함으로 저가 상처를 입었다면 예수님의 십자가 죽으심이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저 사람이 과연 어떻게 구원받은 사람인데 말입니까? 지난 주일에도 어떤 분이 세 신자 한 분을 데려와 제게 인사를 시키면서 말합니다. "제 형님인데요, 결심한 바가 있어 이제 교회에 나오기로 하셨습니다." 차므로 고마웠습니다. 한 사람이 결신(決信)을 하고 처음으로 교회에 나온다는 것-이것은 굉장하고도 놀라운 사건입니다. 내 마음에 감동을 일으키시는 성령이 그사람의 마음에도 감동을 주시고 계심이 아닙니까? 성령의 역사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한 성령 안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형제인 것입니다. 삼위일체 성부․성자․성령의 한 은혜 안에서 우리는 서로가 내 몸 같은 형제인 것입니다. 어찌 형제를 비방할 수 있겠습니까?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하신 말씀이 무슨 가르침이겠습니까? 내가 누구로부터 비방 받는 것은 괴롭습니다. 싫은 것입니다.
내가 이렇다면 남도 그러할 것임을 알고 그를 대함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내가 싫어하는 것은 남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내가 싫어하는 것을 남에게 하지 않는 것이 '내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자라고 오늘의 말씀은 엄히 결론을 맺고 있습니다. 율법의 골자가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입니다. 형제가 내 몸인 것입니다. 내 몸이 형제를 비방한다면 내가 내 몸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 안에는 '비방'이 없습니다. 사랑은 허다한 허물을 덮습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내가 누구를 두고 사랑을 할 때에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이 좋게만 보이지 않습니까? 미운 점도 곱게만 보이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어쩌다 사랑이 식으면, 내 마음에서 사랑이 떠나고 나면, 그때부터는 상대의 모든 것이 밉게만 보입니다. 곱게 보이던 것도 밉게만 보입니다. 그렇게도 예쁘던 것이 추해 보입니다. 사랑할 때에는 상대의 실수도 이른바 '애교'로 보입니다. 분명히 잘못하는 것인데도 잘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식으면 그 모든 것을 비방하게 됩니다. 이웃을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의 법을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가르침입니다.
또한, 남을 비방하고 판단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되기 때문에 안 된다고 본문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입법자도 하나님이요, 재판장도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그런데 내가 누구를 판단하는 것입니까? 하나님 말고는 그 누구도 남을 판단할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은 누누이 말씀합니다. '원수 갚는 것은 네가 할 일이 아니다. 그 사람이 악한지 선한지 판단하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심은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니 너는 손대지 마라. 내 손에 피를 묻히지 말라. 원수가 목마르거든 마시우고 배고프거든 먹이라……' 그렇습니다. 나 역시 하나님께 판단 받는 자입니다. 내가 남을 비방할 때에 하나님께서 나를 판단하십니다. 심판하십니다. 긍휼히 여기지 않는 사람은 긍휼 없는 심판을 받는다는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남을 사랑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십니다. 내가 남을 용서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용서하십니다. 내가 긍휼을 베풀면 하나님께서 나에게 긍휼을 베푸십니다. 내가 남을 너그럽게 대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너그럽게 대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늘상 경험하는 일입니다. 내가 남을 대하여 너그럽게 너그럽게 하다보면 그것이 다 나에게 돌아오지 않습니까? 내가 남을 비방해놓으면 머지않아 나에게로 비방이 돌아옵니다.
진정으로 회개한 사람은 나 자신을 심판할지언정 남은 비판하지 못합니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내 눈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 남의 눈에 티 있음을 탓하겠느냐고 주님께서도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얼마나 중요했으면 '눈에 들보'라는 과장된 표현까지 쓰셨겠습니까?
며칠전 제가 학생들 시험친 것을 채점했었습니다. 잘쓴 답안도 있지만 못쓴 것도 참 많았습니다. 글씨도 엉망인 것이 많아서 채점을 할 때마다 여간 힘드는 것이 아닙니다. 때마다 한 300명분의 답안지를 채점해야 하지만 힘이 들어도 언제나 제가 직접 채점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A를 줄까 B를 줄까, 아니면 C냐 D냐 E냐 F냐? 평점을 할 때마다 느끼는 것이 있어요. A나 B를 주는 것까지는 그리 괴로운 것을 모르지만 C를 주어야 할 때는 조금 괴로워지고, D나 E나 F를 주어야 할 때는 심히 괴로워집니다. 시험지를 몇 번이고 다시 보곤 합니다. 채점도 하나의 심판이라고 본다면 '내가 이거, 종잇장 하나를 놓고 남을 심판하는 것인가?' 이런 느낌을 받기 때문입니다. 내가 C 이하만 매기면 그 사람은 대학원을 못 가게 되거든요. D, E, F로 나가는 날에는 그 사람, 아예 진학조차 못하게 됩니다. 남의 앞길을 막는 일이 되고 마는 것이지요. 스트레이트 A를 하면 그 사람은 앞길이 만장같이 열리는 셈이 되고, 공부를 열심히 하는 사람에게 B를 하나 매겨놓으면 이 점수는 그 사람의 일생에 영향을 미치는 수가 있습니다. 이래저래 채점 때에는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어떻게 한담?' 하릴없이 시험에 들게 되더군요. '내가 이거,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있는 거나 아닌지?' 온갖 회의가 들면서 나중에는 '내가 잘 가르쳤으면 답안지가 이 꼴이 아니었을 게다'하는 생각까지 듭니다. 이렇게 냉가슴으로 혼자서 앓다가는 '에잇, 낙제점은 주지 말자. 답안지에 이름만 씌어 있으면 낙제점은 주지 말자.' 이렇게 되고 맙니다. 그실 제가 낙제점은 여간해서 주지 않습니다. 여러분, 남을 판단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않고야 어떻게 남을 판단하겠습니까? 그러나 내가 결코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앉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감히 내가 어떻게 '너는 악하다' '너는 선하다' '너는 천당갈 사람이다' '너는 지옥갈 사람이다'하고 정죄할 것입니까? 조심 또 조심할 것입니다.
무서운 것은, 진실대로 바로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십니다. 그 중심을, 그 속을 내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서대문 형무소에 사형수가 하나 있었습니다. 하수인 둘을 데리고 사람을 몇 죽인 범죄자였습니다. 재판도 받았고 신문지상에도 여러 번 기사가 오르내렸습니다. 이제 재판이 끝나고 사형집행 당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 사람을 좀 회개시켜 구원해보겠다고 목사님들이 들어가 보고, 승려들도 들락거려보았습니다 마는 손톱도 안 들어갔습니다. 문 앞에서부터 나오는 대로 욕을 퍼부어 대며 악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전도할 엄두를 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래서 '아, 마지막 가는 사람을 구원하지 못하고 마는가'하고 안타까워하는 가운데「새문안교회」의 여집사님 한 분이 그 사람에게 긴 편지 한 장을 써보냈다는 소식이 들렸습니다. 퍽 기도를 많이 하고 썼던 탓인지, 이 편지를 그 사형수가 찢어서 버리지를 않고 잃어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알기에는 당신이 결코 나쁜 사름은 아닙니다'-편지에게 여집사님은 이렇게 그 사람의 중심을 인정해주었던 것입니다. '저도 궁금한 바가 있어서 당신이 재판 받는 현장에 가보았었습니다. 그때 당신은 뭐라고 말했습니까? 당신은 두 하수인의 구원을 호소했습니다. "이 두 사람은 죄가 없소. 내가 강제로 끌고 다닌 것입니다. 내가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 사람들은 내 협박에 못 이겨 따라다녔을 뿐이므로 죄가 없습니다. 이 둘은 놓아주십시오. 이 둘은 석방해주십시오. 이 두 사람은 피해자입니다." 이렇게 말하지 않았습니까? 이것만 보아도 당신은 중심이 착한 사람입니다. ……' 그 여집사님은 이런 내용으로 편지를 썼고, 그 사형수의 훌륭한 점을 극구 칭찬하면서 '예수 믿으세요'했던 것입니다. 이 편지 한장으로 말미암아 사형수는 감동을 했고 마침내 예수를 영접했으며 세례까지 받았습니다. 그 다음, 형장에 나갈 때까지, 그리고 형장에 서서까지 많은 사람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당신들도 예수 믿으세요."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순간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생각해보십시다. 그는 살인강도입니다.
한 사람도 아니고 여러 사람을 죽였습니다. 이런 그를 두고 "나쁜 놈!" "죽일 놈!"하고 매도해버리고 말 것입니까? 여집사님은 그의 중심에 하나의 의로움이 있음을 읽어냈습니다. 알아주었습니다. 그럴 때에 그 사람은 마침내 깨어지고 감동했던 것입니다. 한 영혼이 그래서 구원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남을 판단하는 것은 사단의 수작입니다. 형제를 비방하고 판단해서 상처를 주면 모처럼 예수 믿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을 망치는 것이요, 이는 하나님께 큰 손해를 입히는 것이 됩니다. 그리스도께 손실을 입힘입니다. 교회에 부덕(不德)이 됩니다. 득을 보는 것은 마귀 사단일 뿐입니다. 마귀가 춤을 춥니다. '자알 논다. 내가 중간에서 이간질했더니 저희끼리 잘들 싸우는구나'하고 마귀가 회심의 미소를 지을 일입니다. 마귀는 이간 붙이는 자요 참소자입니다. 하리노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마귀의 시험에 든 자가 남을 헐뜯고 남을 정죄 하는 시험에 듭니다. 교회를 무너뜨리고 많은 성도의 마음을 황폐케 합니다. 남의 신앙에 상처를 입힌다면 이보다 더한 마귀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 사람 구원 얻기가 얼마나 힘든데 모처럼 교회에 나온 사람을 낙심시킨단 말입니까? 얼마나 엄청난 죄를 짓는 것입니까? 이는 마귀를 돕는 일이기 때문에 안 된다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칩니다.
모략 중상은 성경 전체에 걸쳐 누누이 죄로 인정하고 있습니다. "너는 네 백성 중으로 돌아다니며 사람을 논단하지 말며 네 이웃을 대적하여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하지 말라(레 19:16)" "앉아서 네 형제를 공박하며 네 어미의 아들을 비방하는도다(시 50:20)" "또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중상함과 수군수군하는 것과 거만함과 어지러운 것이 있을까 두려워하고 (고후 12:20)"-그밖에도 로마서 1장 등, 우리는 성경의 구석구석에서 가르침을 받고 있습니다. 구약과 신약의 중간 시대에 씌어진「미드라슈」라고 하는 책에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모략 중상은 큰 죄라 일컫는 우상숭배, 간음, 살육보다도 더 무서운 죄다." "악한 마음을 품으면 그 해독의 절반은 이미 자기가 마시는 셈이 된다"라고 철인 세네카가 말한 바도 있습니다. 악한 말을 하는 동안에는 이미 자기가 먼저 악한 사람이 되어버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피차 비방하지 말라, 피차 심판하지 말라, 오히려 피차 존경하라, 피차 사랑하라, 피차 봉사하라, 피차 순종하라-이것이 성경의 교훈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신앙적 언어를 가져야 합니다.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전체에 덕을 끼칠 말이 어떤 것인지를 깊이 생각해가면서 '말'을 올바로 구사할 것입니다.
사랑 안에서 말하고, 사랑 안에서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교회생활의 기본정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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