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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것과 받을 것(야고보서 1 : 19-21)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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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릴 것과 받을 것(야고보서 1 : 19-21)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야고보서 강해가 오늘로서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지금까지 공부해온 바로도 알 수 있듯이 야고보서는 언제 읽어보아도 우리에게 구체적인 것을 가르쳐줍니다. 추상적인 논리나 이론에 준하지 않고 실제적으로 말씀합니다. 실생활에 옮길 수 있는 내용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야고보서의 특징은 히브리적이요 계율적입니다.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명령형으로 말씀합니다. 마치 목자가 양을 이끌듯이, 어른이 아이를 가르치듯이 간절한 마음을 담아 타이르듯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목소리라 하겠습니다.

이제 오늘의 본문에서는 다시 '버릴 것' '받을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먼저 19절에서는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말하기는 더디하며……" 라고 ''에 대하여 언급합니다. ''에 대해서는 앞으로 3장에 가서 더욱 자상하게 가르칠 것입니다만는 오늘의 본문에서 그 일단(一端)을 언급하는 것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총론적인 말씀이라 하겠습니다. 우리는 사도 야고보가 교회에 대한, 그리고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교훈으로 먼저 '' 을 이슈로 드러냈다는 사실에 깊이 착안해야 하겠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 이야말로 교회에 문제를 일으키는 장본(張本)의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성도의 교제'라는 말을 씁니다. 교제란 인격과 인격의 만남입니다. 서로가 얼굴과 얼굴로 대하는 것이요, 서로가 보고 싶어하는 것이요, 말을 주고받는 것입니다. 나아가 서로 가진 것을 주고 받고, 생활을 함께하는 것입니다. 성도의 교제를 헬라말로 '코이노니아'라고 합니다. "Fellowship of the Saints'입니다. 보는 것이요 만나는 것이요 말하는 것입니다. '우정' '참여' '공유' '친교'등의 개념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낯으로 어떻게 대할 것인가, '' 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한 문제가 됩니다.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또 그렇게 하고자 애를 쓰면서도, 말 한번 잘못하거나, 어쩌다 잘못된 말 한번 들으면 그만 신앙생활 전부가 그릇되는 일이 흔히 있습니다. 심각하고도 우스운 이야기 하나가 기억납니다. 어느 처음 믿는 사람이 우리 교회에 등록을 했습니다. 권사님이랑 집사님 몇 분이 반가운 마음으로 그 집을 찾아갔습니다. 처음 나오시는 분이니 반가울 수밖에 없습니다. 모두들 마음이 뜨거웠지요. 사랑스럽고 귀하고, 무엇 이건 도와드리고 싶고 위로하고 싶고…… 모두들 그런 마음으로 가득 찼었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 마음을 따라가 주지 않았습니다.

말들을 할 줄 몰랐어요. 찾아가서는 한다는 소리가 "고향이 어디죠?" "나이는 얼마나 되었수?" "자녀는?" "아이들이 어느 학교에 다니지요?" "재수(再修)했나요" "삼수(三修)했나요?" "시집간 딸은 몇이나 되나요?" "결혼은 몇 번이나 했나요?" "시집간 딸은 가서 아이를 낳았수?" "못 낳았수?" "이혼 했나요?"…… 어쩌고저쩌고 이러쿵저러쿵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듭니다. "형사취조 받는 것 같았습니다."--그 새 교인은 나중에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한 차례만 치르는 일입니까? 목사님 왔다가고, 전도사님 왔다가고, 권사님 왔다가고, 집사님 왔다가고, 누구 왔다가고 또 누구 왔다가고…… 올 때마다 취조를 하는 것입니다. 질색을 해서 도망갈 노릇입니다. 여러분, 말로 해서 교인 잃어버리는 수가 참 많습니다. 심각한 문제입니다. 희극이라 할지 비극이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교제도 눈치껏 해야 합니다. 궁금한 것도 눈치껏 물어야 됩니다. 대답하는 사람이 대답하면서 기분이 좋도록 해야됩니다. 그런 제목을 골라서 물을 것이요 그렇게 될만한 내용을 물어야 합니다. 상대방에서 상처일 법한 이야기를 들고 나온다든가 마음을 아프게 하는 화제를 꺼내면 못 씁니다. 아이 하나 보이니까 "재 몇 학년이에요?" 이런 건 왜 물어봅니까? "걔가 지금 재수를 하고 있는데……" 하기 싫은 대답을 해야 하는지도 모를 일 아닙니까?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한 것 같습니다. 이혼한 집 찾아가서 "왜 이혼했죠?"-이런 것은 왜 물어봅니까? 알아서 어쩌겠다는 것입니까? 아무쪼록 '' 공부 좀 할 것입니다. 아니, 마음을 고쳐먹어야 되겠습니다. 마음이 제대로 되어 있어야만 쓸 말이 나옵니다. 그래야만 성도의 교제가 바로 됩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무심히 넘어가다가는 남의 영혼들을 반타작도 못합니다. 좋은 말이 얼마나 많습니까? 은혜스러운 말, 덕스러운 말, 위로되는 말, 힘을 주는 말, 용서하는 말, 화해시키는 말이 얼마든지 많습니다. 무슨 말을 하다가도 남이 좀 잘 산다든가 잘 된다든가 하면 못 보아주는 성정(性情)이 있어요. 그런 사람의 입에서는 부덕한 소리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이간 붙이는 소리나 나오고, 시기 질투의 냄새만 짙게 풍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분란을 일으키고, 교회를 파괴하고, 마침내는 하나님께 욕을 돌리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말로 인하여 하나님의 뜻을 훼방하는 일이 참으로 많은 세상입니다. 사도 야고보 역시 이런 문제를 심각하게 걱정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말조심하라'-이것이 그가 가르치는 주의사항 제1조입니다. 본문말씀을 보면 말하기를 더디하라고 했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하며……"

그리스의 철학자 제노(Zeno)는 말했습니다. "사람은 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다." 많이 듣고 적게 말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입이라는 것이 어디 말만 합니까? 먹기도 합니다. 그러니 입은 한 개가 아니라 다시 반개가 됩니다. 우리 동양에서도 고래로 입이 무거운 것(말이 적은 것)을 덕으로 알아왔고, 서양에는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다"라는 하는 격언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그실 말없는 사람과 사귀는 일이란 얼마나 어렵습니까? 그러나 입만 열었다 하면 재미없게 되니까 차라리 벙어리가 되는 게 낫다, 차라리 입을 닫아버리자 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소리가 나오겠습니까? 사람이 어울려 살아가는 데에 좋은 말을 주고받는다는 것처럼 기분 좋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행복이라는 것도 말에 달려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좋은 말이란 해서 기쁘고 들어서 기쁩니다. 좋은 말로써 좋은 교제가 이루어집니다.

침묵이 미덕일 수는 없습니다. 워낙 말이 부도덕하고 잘못된 방향으로만 나가고 보니 말 안 하는 것이 차라리 낫겠다는 것이지, 사람이란 말을 못하면 죽을 맛이 됩니다. 말을 듣지 못해도 죽을 맛이 됩니다. 그러므로 말은 하고 살되, 모름지기 입을 잘 다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유대 랍비의 글에 '지혜의 울타리는 침묵이다'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말을 삼간다는 뜻입니다. 또한 잠언 1019절에서는 말씀합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말을 많이 하다보면 실수를 하게 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입술을 잘 다스려서 말을 컨트롤하는 사람이야말로 지혜로운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잠언 1728절을 보면 놀랍고도 재미있는 말씀이 있습니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기우고, 그 입술을 닫히면 슬기로운 자로 여기우느니라"- 바보 멍청이라도 입을 딱 다물고 있으면 반은 성자(聖者)가 되는 법입니다. 입 다물고 있으면 덕 있는 사람이요 입 다물고 있으면 군자(君子)가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미련한 사람을 보면 꼭 스스로가 '나는 바보요, 하고 선전합니다. 입 다물고 있었으면 절반은 성자가 되었을 것을 그만 입을 여는 바람에 그 미련함이 노출되고 마는 것입니다.

여러분, 복잡하게 생각할 것 하나도 없습니다. 지혜로우려고 기를 쓸것도 없고 성자가 못되어서 가슴을 칠 것도 없습니다. 입 한번 다물고 있으면 됩니다. 그러면 절반 성자입니다. '입이 방정' 이라는 우리의 속담이 있습니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하고 읊은 우리네 시조(時調)도 있습니다. 말이 얼마나 화근이었으면 그렇게 탄식했겠습니까? 모름지기 입을 조심할 것입니다. 입을 잘 다스릴 것입니다. 말문을 철통같이 지킬 것입니다. 이스라엘사람들에게 전승되고 있는 교훈 중에 사람을 네 유형으로 규정지은 것이 있습니다. '급히 듣고 급히 잊어버리는 사람은 실수가 많다. 더디 듣고 더디 잊어버리는 사람은 지혜가 없다. 빨리 듣고 천천히 잊어버리는 사람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더디 듣고 빨리 잊어버리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좋은 교훈이 아닙니까? 오늘의 본문말씀은 한마디로 교훈하고 있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많이 듣고 빨리 듣되, 그래서 정보는 많이 얻되, 말하는 것은 새겨서 천천히 하라, 바로 대답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됩니다. 귀에서 입으로 직행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귀로 들어온 것은 뱃속 깊숙이 까지 들어가 새김질된 다음에 천천히 입으로 나와야 하는 것입니다.

어떤 부부가 결혼을 하자마자 마주앉아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앞날을 살아 가다보면 늘 오늘같이 좋은 때만 있는 것은 아닐 것이오. 서로가 티격태격 다툴 때도 있을 게요. 그러므로 우리는 앞으로 무슨 말을 듣건 무슨 일이 있건 간에 그 즉시로 왈가왈부하지 말고 적어도 24시간은 넘긴 다음에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아무리 기분 나쁜 일이 있어도 24시간은 꾹 눌러두었다가 이야기하기로 합시다." 이 부부는 이 약속대로 살아온 덕에 평생동안 싸움 한번 없이 지낼 수 있었다고 합니다. 당장에는 아무리 펄펄 끓는 일이더라도 하루를 넘기다보니 이해가 되고 사그라지더라는 것입니다. 그 당장에는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일인 것처럼 중대했던 문제가 24시간만 지나고 보아도 어이없도록 별것이 아니더라는 것입니다. 하루가 지난 다음에 가보아도 역시 꼭 해야되겠다 싶은 얘기라면 그 때가서 서로가 터놓자-지혜로운 부부라고 생각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의사 소통)에 관한 연구에 '31 원칙' 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모양입니다. 세 마디 듣고 한 마디 말하고, 3분 듣고 1분말하고, 세 가지를 듣고 한 가지를 말하는 것이 대화의 비결이라는 것입니다. 그럴듯한 이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사람들을 보면 남의 얘기 듣기보다 제 얘기하고 싶어 안달하기 일쑤입니다. 누가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 "가만있어봐"하고 그 이야기를 가로막고 나서서 "내 말 들어봐"하고 덤비기를 잘합니다. 남의 말을 다 듣기도 전에 대답을 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잠언에도 말씀합니다. 많이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더디 말하여야 합니다. 이렇게 되려면 적어도 세 가지의 요건이 갖추어져 있어야 합니다. 첫째, 말하는 자를 존중해야 합니다. 둘째, 말하는 자를 신뢰해야 합니다. 셋째, 말하는 자에 대하여 인내를 해야 합니다. 당장에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당장에 말하려고 할 것이 아닙니다.

저는 30년이 넘도록 대학에서 강의를 해오고 있습니다마는, 첫 강의 시간이면 학생들에게 잊지 않고 일러주는 '주의 사항'이 있습니다. 이 강의는 나의 강의니 이 강의를 듣는 학생들은 내가 하는 방법대로 따라와 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강의가 끝날 때까지 질문은 하지 말 것이다.

말에는 논리가 있는 법이니 논리 전개를 중턱에서 꺾고 들어 질문하는 것은 받지 않는다, 질문이 있거든 가능하면 오늘 강의를 듣고 돌아가 한 주일쯤 생각해본 다음에 와서 질문하라, 그런 질문은 기꺼이 받을 것이다-이렇게 일러주고 강의를 시작합니다. 참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다 듣고 난 연후에 생각하여야 합니다. 설교도 그렇습니다. 다 듣고 난 다음에 생각하면 좋겠습니다마는, 중간 중간에 드는 예화가 마음에 좀 안 맞는다고 그 즉시 '어흠' 하고 돌아앉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은 거기서부터는 설교를 못 듣습니다. 끝나고 마는 것이지요. 다 듣고 나야만 왜 그 예화를 드셨는지, 왜 그 말씀을 하셨는지 비로소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제 머리가 얼마나 좋다고 설교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다 판단해버립니까? 잘못된 태도입니다. 다 듣고 나서, 하루를 더 생각하고 나서 차근차근 물어도 늦지 않습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는 것은 더디 하라-그래서 하는 말씀입니다.

또한, 성내는 말은 하지 말아야 합니다. 말함에 감정적이어서는 안됩니다. 곧 말이 감정에 따라 좌우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적어도 지성과 사랑에 투영시킨 말이어야 합니다. 생각은 많고 말은 해야 하고, 그래서 자칫 격한 감정에 휘말리어 생각 없는 말이 튀어나오기 쉽습니다마는, 감정주도적인 언어는 절대로 용납될 수 없습니다. 이것은 성도의 자세가 아닙니다. 모름지기 급하게 말하지 말 것입니다. 급한 감정에 휘말린 격노의 말은 입 밖에 내지 말 것입니다. 말이 화()를 부르고, 화가 말을 부르기도 합니다. 말을 함에 언제나 냉정한 지성으로 생각하고 할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이 말이 과연 사랑으로 하는 말인가? 하나님의 뜻에 맞는가? 반드시 생각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여는 것입니다. '말은 더디 하라.'

20절에서 본문은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라고 말씀합니다. 성내는 것을 심리학적으로 연구해보면 몇 가지의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 다 듣지 아니하는 데서 성내게 됩니다. 끝까지 듣고 충분히 이해하면 성낼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끝까지 들으려 하지 않기에 늘상 문제가 끊이지 않는 것입니다. 옛날 어느 국민학교 교실에서의 일입니다.

선생님이 교단 위에 서서 보니 한 아이의 얼굴이 벌겋습니다. 감기에 걸렸나 싶어 가까이 다가가 보니 웬걸, 술 냄새가 확 끼칩니다. 이 선생님, 순간적으로 생각합니다. '이 녀석이 아버지가 술 받아 오랬더니 심부름도중 슬쩍 한 모금 마셨나보구나. 아니면 아버지가 마시고 남긴 술을 몰래 마셨든지.' 이렇게 생각하고 무조건 아이를 책망합니다. "이놈아 어쩌자고 아침부터 술을 마시고 학교에 오느냐? 어린놈이 어른들이 마시는 술을 마시다니 이 무슨 짓이란 말이냐?" 아이가 훌쩍훌쩍 웁니다.

"선생님,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선생님은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아니기는 무엇이 아니야. 나도 어려서 보아 다 아느니라." 아이는 그제야 제 집 사정을 솔직히 털어놓습니다. "선생님, 저희 집은 너무 가난하여 밥을 지어먹지 못하고 양조장에서 술 막지를 얻어다 죽을 쑤어 먹습니다. 그래서 술 냄새가 나는 것입니다." 선생님은 끝내 아이를 붙들고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내가 잘못했구나! 내가 이런 실수를 하다니!"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사정을 끝까지 들으면 이해하지 못할 것이 없습니다. 누구나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이해할 여지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판부터 하려들기에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자연히 화를 내게 됩니다. 충분한 이해가 없었기 때문에 성내는 것입니다. 먼저 상대편에 서서 생각해보십시다. 과연 화를 낼만한 것인가? 화를 내도 되는가? 남편이 아내를, 아내가 남편을, 부모가 자녀를 생각해보십시다. 우리는 자녀에게 너무 쉽게 화를 내곤 합니다. 내가 낳은 자식이라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을 것처럼 이것 해라 저것 해라하고 함부로 대하려듭니다. 그래서 남에게는 좋은 사람인데 자녀들에게는 나쁜 부모인 사람이 더러 있습니다. 자녀가 공부를 잘못한다고 화를 냅니다. 자녀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기막힌 일입니다. 누구는 잘하고 싶지 않아서 못하는 것입니까? 해도 안되니 못할 수밖에요. 학교에 가면 선생님이 구박하지 친구들에게 망신당하지, 게다가 집에 오면 부모가 나가 죽으라고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기막힌 사정입니다. 이와 같이, 화를 내서는 안 되는 상황이 있는 것입니다.

공부 못하는 아이야말로 오죽이나 답답하겠습니까? To be or not to be! -사느냐 죽느냐 하고 있는 아이에게 화를 내면 그 아이더러 죽으라는 소리가 아니고 무엇입니까? 가출 안 할 수가 없지요. 부모 된 사람,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깊은 이해가 없기에, 듣는 마음이 없기에 화를 내는 것입니다. 충분히 알아듣고 이해하면 다 같은 마음이요, 하등 화낼 일이 없습니다. 너나할것없이 실수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둘째, 듣고 깊이 생각하지 않아서 화를 내게 됩니다. 생각하면 좀더 깊은 차원에서 이해할 일이 참 많습니다. 화를 내는 것은 아닙니다마는, 얼마전 북한의 여성 대표들이 우리 나라를 다녀갔습니다. 얼마나 귀한 손님입니까? 그런데 그들이 돌아간 다음, '술을 얼마나 마셨다' 하고 신문에 냈습니다. 손님을 청하여 대접을 했으면 술을 마셨든 말았든 문제삼을 것이 아닙니다. '잘 다녀갔다' 하면 될 일을 '얼마만큼의 술을 마셨다하고 떠들어대니, 이 얼마나 유치하고 기분 나쁜 일입니까? 그들의 입장에서 서보십시오. 보는 것도 많고 충격 받은 것도 많습니다. 북한에서 들어온 바와 다르니 놀랄 일뿐입니다. 여러 가지 생각이 많으니 자연 잠이 쉬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한잔 마시고 잔 것을 그렇게 떠벌려도 되는 것입니까? 손님대접이 이 정도입니다. 다시 한번 돌이켜 생각할 일입니다. 생각이 부족한 소치입니다. 옅은 생각에서 기인한 일입니다. 단순히 흥미 거리로 보고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깊은 생각이 없어서 생기는 문제입니다.

화를 내는 것도 그렇습니다. 나 자신의 일로 생각해보십시오. 화낼 일이 없습니다. 다음으로 내가 할 일인가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는 때로 하나님의 심판대 위에 서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앉아서 사람을 심판하려듭니다. 여기서 화가 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대변하려듭니다. 참으로 잘못된 생각입니다.

셋째, 그 말이 낳게 될 결과에 대하여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아서 화를 내는 것입니다. 여러분, 화내서 좋은 일이 있습니까? 한 가지도 없습니다. 지금까지 화내서 돌아온 결과가 어떻습니까? 오히려 상대편으로부터 한마디 듣습니다. 자녀들에게 이래저래 화를 내보십시오. 뭐라는 줄 아십니까? 누가 낳아 놓으랬느냐고 대듭니다. 자녀들 입장에서도 할말이 많아요. 당신들도 살기 어려운 세상에 왜 나까지 낳아서 이 고생을 시키느냐는 것입니다. 화는 또 다른 화를 부릅니다. 이렇듯 백해무익한 것을 알면서도 화를 내니 얼마나 미련하니까? 결과를 생각한다면 절대로 화를 내지 못할 것입니다.

넷째, 논리 부족으로 화를 내게 됩니다. 화를 내는 것은 말의 잘못된 표현입니다. 말하는 방법이 잘못되어서 그렇습니다. 논리적으로 이치에 차근차근 설명해 들어가서 마침내 감정을 사로잡아야 하건마는, 그럴 줄을 몰라서 화부터 내는 것입니다. 격분한 감정에서는 논리가 나올 수 없습니다. 격분한 말은 하나 마나 입니다. 단지 내 화를 발산한 것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그런데, 이미 말은 내 입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으로 말씀합니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모름지기 그리스도인은 다음의 몇 가지를 늘 염두에 두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 화내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지만 덕을 이루지 못하는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분노와 하나님의 진노는 다릅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언제나 공의로운 것이지만 사람의 분노는 늘 그렇지가 않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공의를 대변하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됩니다. 나의 의, 나의 생각이 하나님의 뜻과 같이 완전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화를 내면서 고집할만한 내 의지, 내 의견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는 것은 모두 상대적인 것이요 불완전하기 때문에 내게 화내며 말할만한 당위성이 없습니다. 이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둘째, 화냄의 뿌리가 악으로부터 올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다운 방법을 가져야 합니다. 곧 겸손과 온유입니다. 화를 내면서 사랑이 분노로 바꾸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기 때문에 말한다고는 하지만, 큰 소리를 낼 때에는 이미 사랑이 아니요 분노입니다. 벌써 증오로 바뀌고 있다는 말입니다. 흔히 의분(義憤)이라고 말합니다만 그것도 분(忿)입니다. 분은 사랑이 아닙니다. 증오요 시기요 질투입니다. 그러므로 분은 잘못된 것입니다. 모세가 화를 냄으로 큰 실수를 합니다.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말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본문 21절에서 결론지어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버리고"-'내어버리다'는 헬라말로 '아포데메노이'입니다. 영어로 'Strip off'-'옷을 다 벗어버린다'는 뜻의 물리적인 표현입니다. 더러운 옷을 벗어버리듯이 한다는 말입니다. '더럽다'-'뒤파리안' '흙탕물이 묻은' 더러운 옷을 훌렁 벗어버리라는 의미가 됩니다. 이 말의 어원은 '귀지를 파버리다'라는 것입니다. 귀에 귀지가 가득차 있어서 말이 들리지 않으니 파버리라-한마디로 해묵은 것, 오염된 것, 습관화한 것, 성품화한 것, 고질화한 것, 타성화한 것, 이것들은 깨끗이 벗어 버리라, 그리고서야 바른 귀를 가질 수 있고 바로 들음으로써 바른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43절에서도 말씀합니다.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 묵은 땅-고질화한 것, 잘못인 줄도 모르는, 아예 체질화하여버린 것입니다. 이것을 갈아버리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더러운 것을 내어 버리라, 악을 내어 버리라, 그리고서야 바른 귀를 가질 수 있습니다. 밝히 들어야 바른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심긴 도'-아주 오묘한 말씀입니다. '심기다' 라는 말은 헬라말로 '엠퓌톤'이요, '''로고스,' 곧 말씀을 의미합니다. '엠퓌톤 로곤''뿌려진 말씀'이라는 의미의 식물학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일찍이 예수님께서 비유하신 말씀을 반영하고 있는 줄로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시기를 '천국은 씨뿌리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더러는 가시덤불에, 더러는 바위 위에, 더러는 옥토에 뿌려졌습니다. 시가 뿌려졌다면 이제 그 밭이 씨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하면 새가 먹어버릴 것이요, 습기가 없으므로 말라죽을 것이요, 가시가 함께 자라서 기운을 막을 것입니다. 모름지기 내 마음 밭이 옥토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내 마음에 뿌려진 말씀을 깊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귀한 말씀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하나님 말씀을 전하면서 보면 눈뜨고 조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보기에는 듣고 있습니다. 몽롱한 가운데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한마디 한마디를 깊이 새겨듣고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말씀이 마음에 심기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의 씨앗이 심기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마음에 심기워진 다음에는 어떻게 됩니까? 온유한 마음으로 깊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싹이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그렇게 되려면 우선은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말씀 듣는 것이 먼저입니다. 바로 들을 때에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되고,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인격이 될 때에 이웃의 말도 바로 들을 수 있고, 나아가 덕스러운 말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말조심한다고 말조심이 되는 것이 아니요, 또 말을 안 한다고 해서 능사도 아닙니다. 내 영혼이, 내 영적인 존재가 중생하게 될 때에 바로 듣고 바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여러분, 내 감정을 내가 제어할 수 있습니까? 중생한 사람만이 자기 감정을 다스릴 수 있습니다. '영혼을 구원할 바 말씀'-참 중요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곧 생명의 문제와 직결됩니다. 이 말씀을 받으면 살고 받지 못하면 죽습니다. "영혼을 구원할 바 이 소중한 말씀을 온유한 마음으로 받으라." 기왕 공부하기로 했으니 좀더 깊이 들어가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온유하다'-헬라말로 '프라우테이스'인 이 말은 성경에 많이 나오는 말입니다. 이 온유는 감정적 요소가 아닌 지성적 요소입니다. 말로 옮겨 설명하기가 어렵습니다마는, 우리가 쉬 생각하기에 감정적으로 겸손하게 하는 것을 온유인 줄로 아는데 그실 온유는 지적인 것입니다. 곧 지성적 온유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정적으로 비굴해진다든가 자기를 낮춘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요 깊은 생각을 하고서 받아들이는 유순함, 유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마음에 심긴 도, 마음에 심겨진 말씀을 잘 받아야 합니다.

그럴 때에 말씀이 나를 다스리게 되고 내 입을, 내 귀를, 내 생명을 그 말씀이 지배하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말씀에 사로잡힌 인격이 될 것입니다. 그때는 입을 열어도 됩니다. 이제는 덕을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니 말입니다. 더러운 말을 입 밖에 내지 말라고 합니다만 그것이 내 마음대로 될 수 있는 것입니까? 성내는 것이 의를 이루지 못한다고 했습니다만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까? 비결은 오직 하나입니다. 내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한 마음을 받아야 됩니다. 온유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에, 그 말씀이 나를 지배하게 될 때에, 비로소 이것이 가능해집니다.

말하는 것을 더디 하라, 듣기는 속히 하라, 온유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으라-그리하면 이제 듣는 것, 말하는 것, 행하는 것 모두가 거룩하고 아름답고 은혜스러운 생활로 화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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