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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에 찾아온 손님(누가복음 11:5-8)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내 벗이 여행 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저기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이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오늘 주신 비유 말씀의 주제는 기도하는 마음입니다. 먼저 기억할 것은 이 비유 이전에 기도에 관한 두 가지 선행된 상황이 있었다는 점입니다. 곧 11:1에 기록된 대로, 예수님께서 홀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셨다는 것과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주십사는 제자들의 요청에 따라 우리가 항상 드리고 있는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기도의 내용 다음에 오늘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를 연결지어 다시 말씀드리면 기도의 내용은 주기도문으로 하되 기도하는 그 마음은 이러한 심정으로 하라는 뜻에서 기도의 결론적 비유가 되겠습니다. 여기에는 진정으로 기도하는 사람이 지녀야할 마음과 자세가 상세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오늘 비유는 특별히 유대 사람들의 생활 풍속에 대한 자세한 이해를 필요로 합니다. 이제 본문에서 먼저 생각할 것은 손님이 밤중에 왔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 할지라도 이렇게 늦은 밤중에 왜 찾아왔을까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습니다. 이곳 이스라엘 중동 지역은 사막입니다. 사막의 낮은 대단히 뜨겁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정말 급한 일이 아니고는 낮에는 여행을 잘 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아침 일찍 해뜨기 전에 걷거나 저녁 서늘한 때에 길을 걷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서늘한 저녁 녘에 출발했다가 좀 늦어지게 되면 깊은 밤중에까지 걷게 되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오늘 본문의 이 사람도 밤중에 친구의 집을 찾아들게 된 것입니다. 더욱이 여관이 없는 당시에 있어서 이는 어쩔 수 없는 처신임과 동시에 이스라엘 사람들의 당연한 풍습이었습니다. 저들은 특별히 생활 속에서의 여러 가지 덕을 내세우고있는 중에 그 첫째가 자녀교육이며 그 다음 또 하나의 덕이 손님을 대접하는 일입니다. 이는 유대 사람들의 아름다운 전통이요 가풍이며, 누구나 지녀야할 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반드시 아는 사람만 대접하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어디서라도 하룻밤 쉬어가기를 원하면 기쁨으로 영접하는 것이 유대 사람들의 아예 체질화된 풍습입니다. 이들은 하나님을 잘 섬기는 사람은 손님 대접을 잘해야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난날 애굽에서의 쓰라린 나그네의 생활을 기억해서라도 결코 소홀히 할 수 없는 민족적 다짐입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되었음이니라"(신 10:19)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아브라함은 특별히 손님 대접을 지성으로 잘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결국 그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천사를 대접하게 되고 그 기회를 통하여 놀랍게도 아들을 낳게될 것이라는 은총의 말씀을 듣게됩니다. 또 한 사람, 그는 성경상으로 보아 이렇다할 믿음도 경건도 없는 것같습니다만 손님 한 번 잘 대접함으로 죽을 곳에서 살아난 사람이 있습니다. 그가 바로 롯이라는 사람입니다. 롯 역시 삼촌 아브라함에게서 배운 대로 손님 대접하는 아름다운 덕을 지녔기에 부지중에 천사를 대접하게되고, 그로 인해 멸망하는 소돔으로부터 생명을 구하게되지 않습니까? 아무튼 손님 대접하기를 힘쓰라는 것은 바울과 베드로, 두 사도의 편지 가운데서도 누누이 강조되는 말씀입니다. 이와 같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풍습에서 먼 길을 온 사람이 밤중이 되었지만 친구 집을 찾아들어 하룻밤 묵고 가겠다하자 이를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럴 경우에 문제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저들 주택의 문입니다. 주택이라는 것이 돌로 만든 간단한 건물에 문이라고는 창문 하나, 대문 하나로 되어있습니다. 창문은 그들 풍속에 따라 보통 예루살렘 쪽을 향하여 나게 하고, 대문은 아침에 한 번 열어두었다가 저녁이면 닫는데 저녁에는 한 번 닫으면 열지 않는 것이 저들의 풍습입니다. 이는 닫혀진 다음에는 그 안에서 사사로운 일들이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 닫혀진 이후에는 초비상의 사건이 아니면 문을 열어달라고 해서는 안되며 또 그렇게 찾아들어 문을 두드리는 것은 큰 실례로 되어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마치 성문과도 같은 것입니다. 이 때문에 만일 누가 밤에 와서 문을 두드린다면 원수가 쳐들어오거나 전쟁, 난리 등의 긴박한 상황일 때에 두드리게 되어있고 또한 열게되어 있습니다. 경우 없이 무절제한 우리들의 생활 습관에 비해 좋은 풍습이라고 생각됩니다.
또 한 가지 알아야할 것은 집 내부의 구조입니다. 이것저것 특별히 구분된 것도 없이 넓은 하나의 방이 있습니다. 이 방을 ⅔쯤은 흙바닥으로 그냥 두어 옛날 부엌 바닥처럼 다지어지며 신발을 신은 채로 다니게 되어있고, 나머지 ⅓은 좀 높여 한가운데를 파고 난로 같은 것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잘 때에는 이 높여진 부분에서 삥 둘러 누워서 자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좀 높은 ⅓은 신을 벗고 올라가는 곳이고 잠을 자는 곳이며 낮은 곳인 ⅔는 식당도 되고 놀이터도 되고 응접실도 되는 셈입니다. 이러한 구조이고 보니 밤이 되면 따뜻하게 해놓고 이 높은 곳에 다 올라가서 추울 때에는 꼭꼭 끼어서 자게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어쩌다 한 사람이 움직이게되면 그 질서가 깨어지고 온 집안이 다 흔들리게 됩니다. 이는 마치 우리들이 6․25 피난 생활에서 경험한 것과 비슷합니다. 작은 방에 20명이고 30명씩 끼어 앉았는지 누웠는지 그래도 잠을 자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볼일이라도 생겨 일어나게 되면 아예 전체가 다 일어났다가 그리고 똑같이 누워야 했던 경험들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형편에서 오늘 본문은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 없노라" 하는 것입니다.
빵은 있지만 이렇게 다 누워 잠자고 있으니 내가 일어나게 되면 다 깨우지 않겠는가? 그러니 빵을 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또 한 가지는 빵이 문제입니다. 자기 집에 빵이 없어서 이웃집에 빵 세 개를 얻으러 갔다는 것인데, 저들의 생활 풍습에서 빵은 매일 매일 만들어 굽습니다. 식생활에 있어서 매일 매일 끼니때마다 음식을 준비한다는 것은 좋은 음식을 먹을 수 있는 즐거움도 있지만 많은 손,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하는 번거로움과 불편이 있는데, 이 이스라엘 사람들은 우리와는 달리 빵을 먹으면서도 매일 매일 집에서 만들어 구워 먹습니다. 이 빵은 지금도 베이겔(Bagel) 이라고 하여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이 빵은 방부제를 전혀 넣지 않고 만들었기 때문에 하루밖에 보관할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하루가 지나면 썩거나 굳어져 먹을 수 없게되고 그 식별이 눈으로 보아서도 쉽게 알 수 있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실 썩지 않고 변하지 않는 빵은 좋은 빵이 아니며 사람이 먹고 무사할 수 있는 빵이 아닙니다. 그래서 아는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가게에 가서 그들 특유의 빵인 베이겔을 너도나도 좋아하며 믿고 사게됩니다. 어쨌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 날, 그 날 빵을 만들어 먹기 때문에 아무 집을 가도 빵 한 두 개씩은 남아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집에서는 어쩌다 빵을 다 먹어버렸는데 손님이 온 것입니다. 먼길을 온 손님이라 피곤하고 시장한 것은 물어볼 필요도 없겠고 이제 먹을 것을 주어야겠는데 빵이 없습니다. 그래서 이웃집에 가서 문을 두드리며 빵 세 개만 좀 빌려달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 생각에는 어쩌다가 자기 집에서는 빵을 다 먹어버렸지마는 이 집에는 반드시 빵이 있을 것으로 알고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이것을 풍속대로 연구하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저들은 반드시 빵을 한 두 개는 남겨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는 남겨둔 빵이 쉬고 썩기를 바랐다가 그것을 누룩처럼 밑떡으로 쓴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빵은 매일처럼 계속 조금씩 남겨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웬만한 집에는 한 두 개의 빵은 당연히 있는 것이니 저쪽 집에는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빵 세 개만 빌려주시오 하는 것입니다. 이는 내게 온 손님이 배고파하므로 먹을 것을 주어야겠으나 지금 내게는 줄 것이 없기에 부득불 배고픈 그를 먹이기 위해 밤중이지만 이웃집에 가서 빵을 좀 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이들의 풍습대로 생각해본다면 이것은 결코 긴박한 초비상의 상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비상이 걸렸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꼭 주고싶다는 것이지요. 바로 여기에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비유로 하여 기도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시고자 하는 말씀의 중심은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먼저 기도에 방해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대체 왜 기도하지 않는가? 하면 그 첫째가 자기 혼자 해결하겠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내 힘으로 하다가 되면 되는 것이고 안되면 그만둔다는 식의 고집이 기도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러다가 진작 죽을 지경이 되면 그 때에 가서야 "주여" 하고 나오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요 좋지 못한 태도입니다. 우리는 작은 일이든 큰 일이든 언제나 하나님과 의논하며 기도하는 자세가 몸에 배어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지를 못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다가 정 안 되는 일만 하나님께 가지고 나와 기도할 셈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 혼자서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니 그 마음 가지고 무슨 기도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두 번째로는 너무 미리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나 하나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그 크신 질서를 깨뜨릴 수 없지 않느냐는 인간의 이성적인 판단이 기도를 못하게 합니다. 예를 들어 모든 사람들이 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집 잔치만을 위하여 좋은 날씨 주십사고 기도를 해서 되겠느냐는 것입니다. 실지로 어떤 분이 이런 이야기를 해서 웃었습니다만 생각을 많이 한 그 내용을 소개합니다.
자기 아들이 대학 시험을 앞두고 있어서 꼭 합격되게 해달라고 기도를 계속하고 있는데 마음 한편에 좀 이상한 생각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내 아들이 합격되면 어느 아이 하나는 떨어질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내 아들 합격되게 해주세요 하는 것은 한 아이 떨어지게 해주세요 하는 기도가 되는 셈이니 마음이 이상하고 복잡하더라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 저런 생각 다하면 마음이 복잡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맙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그와 같습니다. 배가 좀 고프다기로서니 빵 하나 주기 위해서 밤중에 문을 열어 온 가족이 일어나 앉았다 다시 눕고 해야하는데 그렇게까지 할 필요야 있겠는가? 피차에 질서를 깨뜨리지 말자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이 부족한 인간의 이 시시한 소원까지 들어주시겠는가? 하는 생각이 든단 말입니다. 바로 이러한 생각이 기도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게다가 또 어떤 이는 구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다 아신다고 그러셨는데 아시면 주실터이니 따로 기도할 필요가 없지 않느냐고 합니다. 그럴 때면 저는 성경을 한 번만 보고 그러지 말고 성경 한 장을 넘겨서 또 보라고 합니다. 거기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하였습니다. 이제 그 둘을 합쳐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구하기 전에 아시면서도 구하기 전에는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이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또한 세 번째로는 기도에 체면을 생각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도할 만한 사람인가? 기도해서 응답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이 아닌가? 등등 그렇게 생각한다면 누군들, 무슨 체면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나와 입이라도 벙긋하겠습니까? 그저 죄인인 줄 알면서도 체면 없이 나와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를 보고 어떤 저명 인사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체면도 없다는 내용의 글을 쓴 것을 보았습니다. 죄 짓고 회계하고, 죄짓고 회개하고, 그렇게 몇 십 년 동안을 하고 그리고 또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잘못했다고 하는 것도 한 두 번이지 같은 죄를 가지고 몇 번이나 회개할 것이냐? 어쩌면 그렇게도 체면이 없는 사람들인가! 하는 핀잔의 반문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체면 같은 것은 없습니다. 체면 가지고 있으면 교회에 나올 수가 없습니다. 체면 있는 사람은 기도하지 못합니다. 나 같은 죄인이 무슨 낮으로 감히 하나님 앞에 손을 내밀겠습니까! 자기를 낮추는 것으로 착각케 하는 체면의 생각이 기도하지 못하게 방해합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런 저런 체면을 무릅쓰고 우직하게 기도해서 성공한 대표적 인물인 야곱을 잘 압니다. 그는 누가 자기를 죄인이라고 하든, 거짓말쟁이 사기꾼이라고 하든, 아무 것도 상관치 않고 좌우간 복을 받아야겠다는 한 가지 마음에서 천사와의 씨름도 불사한 것입니다. 얍복 강변에서 천사와 씨름하는 야곱의 모습이란 참으로 우직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대단한 끈기가 있음을 보게됩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그러한 기도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본문을 통하여 생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친구를 위하여 밤중에 빵을 얻으러 가면 그 집안에서 하는 대답이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소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니, 그래도 가겠느냐는 생각의 가능성을 미리 말씀하십니다. 좀더 연장하여 깊이 생각하면 당신에게 온 당신의 친구인데 배가 고프든 말든 나와는 무슨 상관이며, 그리고 밑떡이라도 남겨놓을 것이지 그렇게 모조리 먹어 치우며 살림살이를 하느냐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말을 듣게 될까봐 가서 문 두드리고 싶지 않은 것입니다. 결국 빵 얻으러 가지 않으면 그만 아니냐는 생각입니다. 뿐만 아니라 나 좋은 일 하겠다고 다른 사람 괴롭힌다면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더욱 중요한 이야기가 있는데, "한 끼 굶는다고 죽느냐?" 하는 생각입니다. 이미 밤중이고 불과 몇 시간 후면 어차피 아침 빵을 만들어 먹게 될터인데 그것을 못 참아 그러냐는 말을 들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체면, 저런 생각 다 해보니 그까짓 빵 얻으러 가지 않으면 될 것 아니냐는 생각이 앞서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 못하게 하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이 사람은 단순한 마음으로 구합니다.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구합니다. 그저 단순한 마음으로 기도하는 것입니다. 먼길을 걸어와 피곤하고 몹시도 배고파하는 친구에게 무엇이라도 빨리 먹여야겠다는 강한 일념뿐입니다. 친구를 위한 생각 외에 이웃집에서야 뭐라고 하든 적어도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비상이 걸린 것입니다. 여기에서 기억할 것은 친구의 배고픔이 비상 조건으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얻기 위해서라면 비상을 걸지만, 남에게 주기 위해서 비상을 걸어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자신의 일을 위해서는 빚을 내서라도 해결을 하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기 위해서 돈을 꾸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여기 이 사람은 자기 친구의 배고픔을 헤아려 이것을 초비상으로 생각하고 모든 체면을 불구한 채 자기 이웃에게 가서 간청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기도할 때에 잊지 말아야할 두 가지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과 단순한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어린 자녀가 사랑하는 아버지께 구하는 것과 똑같은 마음입니다. 창세기 18:23 이하에 보면 아브라함이 조카 롯을 위해서 하나님께 간청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간청이 어쩌면 그렇게 단순하면서도 구체적이고 간절한지 마치 어린아이와도 같은 아브라함의 표정을 읽게됩니다. 남을 위해서 기도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나 기도 중에 가장 위대한 기도는 남을 위해 드리는 기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 자신을 위한 기도는 정욕에 빠지기 쉽고 욕심에 기울어지기 쉽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때에 철야도 금식도 하며 기도합니다. 물론 내 가정, 내 자신에게 비상이 걸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을 통하여 주님이 원하시는 기도는 밤에 찾아올 수밖에 없는 친구, 그 아무개를 위하여 간청하는 바로 그 기도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의 강조점이 여기에 있습니다.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그 간절함 때문에, 그 강한 요청 때문에 주게된다는 말씀입니다. 받을 자격이 없다하더라도 좋고, 질서가 깨어지며 체면이 짓밟히는 무슨 소리를 다 듣는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오직 간절히 구하는 뜨거운 마음, 그 간절함으로 인해 일어나서 빵을 줄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겠느냐? 생선을 달라 하면 뱀을 주겠느냐, 빵을 달라 하면 돌을 주겠느냐, '하물며' 너희 하나님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겠는냐?"는 것입니다.
또 누가복음 18:1 이하에 보면 악한 재판관과 과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비록 악한 재판관이었지만 계속 찾아가 이야기할 때에 결국 들어주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물며" 하나님 아버지께서 왜 안들어주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계속되는 말씀을 보면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하여 주시지 않을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단순한 마음,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전하고자 하는 내용의 주제입니다. 이제 기도하다가 쉽게 낙심할 것이 아닙니다.
어거스틴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때로 우리 기도에 대하여 더디 주실 때가 있다. 더디기는 하지만 거절하시지는 않는다. 오랫동안 기도하면 더 큰 은사를 주신다. 빨리 주실 때에는 우리가 그 가치를 잘 모른다. 은사와 그 응답의 큰 가치를 알게 하기 위하여 은사주시는 것을 잠시 늦추는 때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많이 기도하고 애쓴 후에 얻어야 소중한 줄 알게되지, 한 마디로 "주세요" 해서 즉각적으로 주어지게 된다면 그 값어치를 모르게 마련입니다. 그래서는 고마운 줄도 모르고 바로 쓸 줄도 모르게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마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서도 때때로 늦게 응답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끝까지 낙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천국은 침노하는 자가 빼앗는다고 하였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상당한 노력과 수고가 필요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하게됩니다. 오로지 단순한 마음과 사랑, 그리고 믿음과 겸손으로 끝까지 인내하며 기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기도하는 마음이요, 이 마음으로 기도해서 항상 새로운 응답을 들을 수 있어야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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