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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바를 행하라(4장 8절~9절)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여 무슨 덕이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너희는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본문 가운데에 '종말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미 공부한 3장 1절에도 '종말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렇게 '종말로'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 점에 착안하여 '바울이 빌립보서를 3장까지만 쓰려다가 정열이 넘쳐서 4장을 더 쓴 것이 아닌가' 하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확실히 사도 바울의 편지에는 논리를 초월하는 특색이 있습니다. 어떤 형식에 매이려 하지 않습니다. 형식보다 더 중요한 정열이 있고,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바울 서신을 대할 때마다, 논리적으로나 체계적으로 똑떨어지는 형식을 갖추려 하지 않고 언제나 넘치는 정열로 편지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의 생활 철학이 있고, 우리가 본받아야 할 교훈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 형식에 매이면 사랑이 없습니다. 율법이 횡행하는 곳에 은혜가 없게 마련입니다. 이제사도 바울의 초논리적인, 초형식적인 편지의 구조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본문에 나타난 '종말로'는 그야말로 종말을 뜻합니다. 이 말은 '마지막 권면'이라는 뜻입니다. '종말로' '토 로이폰'의 원뜻은 이제 남은 부분을 말한다는 것이지, 꼭 '끝으로'를 의미하는 것만은 아닙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부탁하고 싶은 남은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무슨 말을 하다가 "끝으로……" 하는 것은 "이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하는 말도 되지만, 지금까지 한 말을 요점만 요약해서 결론을 지으려 한다는 암시가 되기도 합니다. 동시에 앞으로 할 이야기를 강조하는 뜻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저 무심히 들으시겠지만 저는 설교 중에 '끝으로, 결론으로'라는 말을 별로 하지 않습니다. 설교학에서는 그런 말을 피하라고 합니다 .설교의 결론은 짓되 '결론으로'라는 말을 하지 않는 까닭은, 이 말을 하게 되면 '아, 이제는 끝났다'하고 김이 빠지고 긴장이 풀어지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 설교가 아니고 편지라서 그런지 "종말로……"라고 했습니다. 마치 "결론으로……"하는 말과도 같습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의 편지들을 서론, 본론, 결론으로 나눌 때 그 결론에는 공통되는 한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윤리성을 강조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지금까지는 추상적인 이야기를 해왔더라도, 혹은 서론과 본론에서는 논리적으로 어떤 교리를 말했더라도 "종말로……"라고 한 다음에는 실천 사항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것도 많고 깨달아야 할 것도 많지마는 "끝으로……" 하게 되면 그 다음이야기는 꼭 실천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의 편지 가운데 "종말로……"라고 한 후 말한 내용들은 대개가 실천 사항들임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본문 내용은 권면의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 강령이요 생활 지침입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란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윤리적이고 실제적인 부분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는 이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그의 긴 편지 가운데 다 설명해 놓았습니다. 이제는 실제 생활을 어떻게 할 것인지, 그 실천적인 면을 설명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본문에 '무엇에든지'라는 말이 여섯 번이나 나온다는 점입니다. 여섯 가지 실천 강령을 이야기하면서 매번 이 말을 붙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먼저 이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야 합니다. '무엇에든지'가 도대체 무슨 뜻입니까? 헬라어로는 '호사( σα)'라 하는데 '어떤 일을 만나든지, 어떤 일이 되어지든지, 누구를 만나든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는 말입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기독교의 윤리가 절대 윤리라는 것입니다. 기독교 윤리는 상대적인 윤리가 아닙니다. 시대가 아무리 변해도 이것은 변함이 없습니다. 대상이 아무리 바뀌어도 이 윤리 기준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기독교 윤리를 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습니다. '상대방이 친절하면 나도 친절히 하고, 상대방이 때리면 내가 그리스도인이니까 함께 때리지는 못해도 욕이라도 해줘야지, 저 사람이랑 똑같이 때리고 싸우지는 못해도 미워할 수야 있지'하는 생각을 하기 쉽습니다. '나쁜 사람에 대해서 미운 감정을 가지는 정도야 뭐 죄가 될까?' 하고 생각하기 쉽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기독교의 윤리 강령은 우리들의 생각에 비하여 매우 파격적입니다. 무엇에든지 대상이 어떻게 변하든지, 상대방이 나에게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다는 뜻입니다. 무엇에든지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철학입니다. 그러므로 세월이 변했다고, 상대방이 워낙 못된 놈이라 할 수 없었다고, 형편이 이렇기 때문이라고, 워낙 눌렸고 워낙 빼앗겼고 워낙 어려움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정당화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윤리의 특징입니다. 절대 윤리입니다. 어떤 형평에서든지 대상에 따라 좌우되지 않는 절대 윤리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윤리의 동기는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십자가에 있습니다. 십자가의 사랑, 거기에 바로 기독교 윤리의 뿌리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로서 받은 그 큰사랑을 생각하고 이에 보답코자 사는 그 마음 안에 이제 그 대상이라는 것은 누구든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롬 12:20)"하시는 말씀도 이해되는 것입니다. 원수니까 내버려두자는 것이라니요 내 편에서 해야 할 일은 변함없이 다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상황 윤리는 기독교에서 통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무엇에든지,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면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어린양을 이리 가운데로 보냄과 같도다(눅 10:3)." 이 말씀이 무슨 듯입니까? '너희는 양이요 끝까지 양이어야 한다, 양으로 살다가 양으로 죽으라'는 것입니다. 요즘은 양으로 시작해서 고양이로, 여우로, 사자로 변한다고 합니다. 무엇을 두고 하는 이야기인지 아시겠습니까? 연애할 때에는 순한 양이지만 결혼하면 금방 고양이가 되고, 또 더 살다 보면 여우가 되고 사자가 된다는 이야기올시다. 틀림없이 이것은 잘못된 사상입니다. 대상과 상황에 따라서 내가 변질된다거나 둔갑되어서는 안 됩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변하든지 그리스도인의 윤리는 절대로 변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여……" 라고 그리스도인이 지녀야 할 절대적인 여섯 가지 윤리 조항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여섯 가지를 차례로 살펴봅시다.
첫째, 어떤 경우에라도 그리스도인은 참되어야 합니다. 참되다(true)는 것은 헬라어로 '알레데'입니다. 언제나 참되지 않아도 괜찮을 이유가 없고, 거짓될 수 있는 구실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런 일에는 진실하지 않아도 된다, 저런 일에는 거짓돼도 괜찮다'는 생각은 어림없다는 말씀입니다. 해도 괜찮은 거짓말이 세 가지 있다고 합니다. 처녀가시집 안 간다는 것, 장사꾼이 밑지고 판다는 것, 노인이 빨리 죽고 싶다는 것 - 이상 세 가지입니다. 그러나 이것도 역시 거짓말은 거짓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나쁜 의도에서가 아닌 소위 '하얀 거짓말'을 할 때가 있습니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경우입니다. 아이들한테 약을 먹이려고 하면 써서 안 먹겠다고 달아납니다. 그러면 대개의 어머니는 "얘야, 약은 쓰지 않고 달단다"하고 거짓말을 하는데, 어린아이는 정말 단것인 줄 알고 입을 딱 벌립니다. 그러나 약을 넘길 때 보니 쓰거든요? 아이가 야단을 하면 어머니는 '너 병 나으라고 할 수 없이 그랬다'며 변명하겠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또 그런 거짓말을 할 때 아이가 한두 번은 더 속아 주겠지만, 이제 그 여파를 한번 봅시다. 이번에 먹는 약은 정말단 것입니다. 그러나 아이가 이 약을 먹겠습니까? 어제의 거짓말이 오늘은 불신감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어떤 거짓말이 해가 없고, 어떤 거짓말이 유익하다는 것입니까? 그리스도인은 범사에 참되고 진실해야 합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무엇에든지 경건해야 합니다. 경건(honorable)은 헬라어로 '셈나'입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 사는 모습으로 살아야 합니다. 사람을 대하든지, 말을 하든지, 생각을 하든지, 하나님이 보고 하나님이 감찰하신다는 경건한 마음과 하나님의 심판을 항상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셋째, 그리스도인은 무엇에든지 옳아야 합니다. 옳은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불의의 길을 가서는 안 됩니다. 옳게 살아가야 합니다. 옳다는 것은 헬라어로 '디카이아', 영어로 just입니다.
넷째, 그리스도인은 모든 일에 정결해야 합니다. 정결(pure)은 헬라어로 '하그나'입니다. 지혜는 뱀같이, 순결하기는 비둘기같이 하라고 예수님 친히 말씀하십니다(마 10:16). 어떤 세계에 살아도 정결해야합니다. 탐욕으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증오로 인해서 더러워지고, 특별히 제일 더러워지기 쉬운 것이 시기와 질투로 인해서입니다. 시기, 질투를 완전히 빼 버릴 수 있어야 마음의 정결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윤리 덕목 여섯 가지 중 나머지 두 가지는 의미가 좀더 적극적입니다. 다섯째 항목에 가서는 '무엇에든지 사랑하며'라고 말하지 않고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할 만하다 해서 영어로는 이것을 'lovable' 이라 하고, 또어떤 성서학자들은 '매력적(attractive)' 이라고 번역합니다. 헬라어로는 '프로스필레'입니다. 일리 있는 번역입니다.
사랑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랑 받는 것은 더욱 중요합니다. 직장에서도 사랑 받고, 가정에서도 사랑 받고, 교회에서도 사랑 받는 사람이 되라 사랑의 대상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입니까? 얼마나 어렵고 귀한 말씀입니까? 잠언 31장을 보면 훌륭하고 지혜로운 아내가 있을 때에 남편이 칭찬하고 자녀들이 사례한다고 합니다. 아내가 남편한테서 칭찬을 받지 못한다면 거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또 어머니가 자녀를 위해 얼마나 수고합니까? 새벽부터 밤까지 자나깨나 정성을 들이지만 자녀들로부터 사례를 받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 받지 못하는 데에는 원인이 나한테 있습니다. 반드시 사랑 받게 되어 있습니다. 짝사랑은 없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알 때에 우리는 다 양보하고 다 사랑하는 사랑의 순교자가 욉니다. 그런데 우리가 사랑 받지 못한다면 이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아닙니까? 특히 교회는 사랑을 받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은 모두 섬기러 나오는 것이지, 섬김을 받으러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죄송한 말씀이지만 교회에서 월급 받는 사람은 교역자 몇 사람 뿐이요, 여러분은 다돈 내면서 믿는 사람들입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다 희생하고, 다 수고합니다. 그렇게 바치고, 수고하고, 땀 흘리고, 정성들이고 나서도 사랑을 받지 못한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말에 잘못이 있었다든지, 아니면 내 사랑에 뭔가 비뚤어진 점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사랑하는 것으로 끝내서는 안 됩니다. 그 사랑이 병든 것인지 잘못 된 것인지를 점검해야 합니다. 이것은 피드백(feedback)되어지는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부모가 되었습니까? 자녀들로부터 극진한 효도를 받아야 비로소 진짜 부모입니다.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아야 진정 바로 된 아내입니다. 또한 바로 된 자녀라면 부모의 사랑을 많이 받아야 합니다. 사랑의 순환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랑 받는 존재가 되라는 것은 차원 높은 말이요 일방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상호간에 감동 있는 사랑, 응답 있는 사랑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섯째, "칭찬할 만하며"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헬라어로 '유페마', 영어로 well-spoken입니다. 칭찬도 받아야 합니다. 수고하고도 칭찬 받지 못한다면 거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칭찬 받지 못하는 까닭이 혹 내가 칭찬하지 못했기 때문은 아닙니까? 혹시 내 칭찬이 가짜는 아니었습니까? 나는 나쁜 말을 하고 저쪽에서는 칭찬해 주기를 바란 것은 아닙니까?
이상의 여섯 가지가 바로 그리스도인의 윤리입니다. 참되고, 의롭고, 경건하고, 정결하고, 사랑받을 만하고, 칭찬을 받을 만하게 무엇에든지, 어디에든지 그러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참된 그리스도인의 생활 모습입니다.
본문 8절 하반절에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덕(virtue)은 '아레테', 기림(praise)은 '에파이노스'입니다. 이것은 어떠한 덕스러움을 생각할 때에, 혹은 어떤 찬양할 만한 일을 생각할 때에 하나의 기준을 생각해 보라는 말씀입니다.
9절에서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합니다. '배운다'는 말은 엄격히 분석해 본다면 합리적으로, 논리적으로, 이성이라는 기능에 의해 알아지는 것입니다. 또 '받는다'는 것은 가슴으로 받는 것이요 사랑이라는 감정을 통해서 마음 문을 열고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머리로 받는 것이 아니라 무작정 좋아서 받는 것입니다. 생각으로는 사랑하겠다고 하면서도 마음이 움직이지 않으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배울 때에나 바울의 교훈을 배우는 데 있어서도 생각으로 배우고 가슴으로 사랑하여, 마음 문을 열고 전적으로 수용해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듣는다'는 것은 의지적인 것입니다. 귀를 기울여 듣습니다. 처음부터 순종하는 마음으로 들어야 들려집니다. 내 주의와 생각을 그 쪽으로 기울여야 듣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드린다고 앉아 있지만, 가만히 보면 눈 뜨고 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무슨 말을 들으려면 '저 쪽 생각이 옳다'는 믿음과 존경을 가지고 대할 때에라야 들을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다'는 것은 체험적인 것을 말합니다.
이렇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이제는 행하라고 합니다. 사도 바울에게서 배운 것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를 배웠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교리를 배웠고, 그리스도인의 생활 철학, 생활 모습을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배운 바도 행하고, 받은 바도 행하고, 들은 바도, 본 바도 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얼마나 오묘하고 귀한 말씀입니까? 행한 것만큼 은혜가 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기는 많이 배우는데, 행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걱정거리가 많고 머리가 복잡합니다. 어떤 분이 몇 년간「베델성서」를 비롯하여 꽤 많은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그러고도 하는 말이 "목사님, 뭐 도 없나요? 또 배워야겠는데요?" 합니다. 여러분, 그만하십시오. 이제는 행하여야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머리로 많이 배워도 실제로 얻는 것은 내가 행하는 만큼뿐입니다. 행한 만큼 배웁니다. 사랑하라고 배웠으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래야 사랑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고배웠으면 내 마음이 비록 사랑하고 싶지 않더라도 배운대로 한번 해봅시다. 그리하면 '아, 이것이구나!
이것이 원수를 사랑하라는 뜻이구나!'하고 알게 됩니다. 겸손하라, 용서하라, 인내하라…… 배운 것이 이렇게 많지만 배운 다음에 실천하고 실천한 다음에 다시 성경을 읽어야 그 뜻을 제대로 알 수 있습니다. 밤낮 배우기만 하면 생각만 많고 말만 많고 행하는 것은 한가지도 없습니다. 머리만 복잡해지고 아무 것도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마음에 평안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행하여야합니다.
누군가가 무디(D.L.Moody)에게 물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잘 깨달아지지 않고 의심이 생기면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기도하시오"라고 대답할 터인데 무디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의심이 생기고 깨달아지지 않으면 뛰쳐나가 전도하라. 성경책을 놔두고 나가서 전도하고, 지나가는 손수레라도 밀어 주라. 무슨 일이든지 찾아서 봉사하고 전도하라. 그리고 돌아와서 성경을 읽으면 해석이 잘될 것이다." 참으로 귀중한 교훈입니다. 행하지 않고 읽기 때문에 이해가 안 됩니다. 내가 깨달은 것은 즉석에서 실천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에 평강의 하나님의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얻으리니……(마 11:28,29)" 이것이 무슨 말씀입니까? 내게 배우라,나를 따르라, 나를 따르면 짐이 가벼워진다고 하십니다. 그런데 우리는배우기만 하고 따르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짐이 가벼워지지 않습니다.
그 평강의 능력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실천을 해야 합니다. 배우는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받기만 하고 "아 기쁘다"고 펄펄 뛰어봐야 그것은 곧 사라질 신기루에 불과합니다. 듣고 본 바를 행하여야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행한 만큼만 평강을 얻습니다. 행하지 못한 부분은 번민으로 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차라리 몰랐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한 인물을 봅시다. 어떤 젊은 관원이 예수님께 와서"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습니까?"하고 묻습니다. 그는 어려서부터 율법을 다 지켰다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을 나눠 주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눅18:22)." 그러나 그 관원은 부자이기 때문에 근심하며 돌아갑니다. 그 사람은 아마 끝끝내 그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말씀은 들었는데 실천할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럴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평강을 얻지 못했습니다. 성 안토니(St. Antony)는 바로 이 부분을 읽다가 '이 관원은 슬픔으로 근심하며 돌아갔으나 나는 주님의 말씀대로 하리라'고 많은 유산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자기는 산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는 나중에 훌륭한 수도사가 되어 평생토록 귀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이것이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던 성 안토니의 생애입니다. 저 젊은 관원은 배우고 듣고 깨달았으나 실천하지 않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성 안토니는 실천을 했던 것입니다.
앞 장에서는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지키신다는 말씀을 공부했습니다. 그 조건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한 단계 더 높은 말씀입니다. 듣고 배우고 본 바를 행할 때에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고 합니다. 이것은 동역동사(同役同事)하겠다는 말씀이요, 평강의 하나님이 우리 생활 속에 같이 계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형통하고 이제 그 능력이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생활을 지켜 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얼마나 귀한 말씀입니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기도합시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평강이 우리 마음에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말씀을 통해서 배우고 듣고 본 바를 행합시다. 그리하면 평강의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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