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로 돌아가기 |
본을 보였노라(요 13:12-20)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지금부터 일이 이루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이름은 일이 이룰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로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의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13장은,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바로 전날 밤,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마지막 만찬을 하시며 말씀하신 일들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상기해야 할 것은,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이 계시적 의미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공생활 3년 동안 얼마나 많은 일을 하셨겠느냐고 분량적으로 묻는다면 적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행하신 한 사건 한 사건이 계시적 의미가 있다고 할 때, 거기에는 대단히 큰 뜻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님은 말씀으로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하신 말씀만이 말씀이 아니고 행동 하나하나가 말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특별히 마지막 밤에 행해진 성만찬 예식과 말씀은 더욱더 소중한 계시적 의미가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발을 씻기신 사건은 바로 앞장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되풀이하지는 않겠습니다. 어쨌든 제자들은 질투로 인해 눈이 어두워져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여 자기들끼리는 물론 예수님의 발을 씻겨 드리는 일 조차 잊어 유월절 잔치를 부끄럽게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허리에 수건을 동이시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발을 씻기신 후의 일입니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요 13 : 12) 주어진 사건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안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바로 앞에 13 : 7에서는 "너희들이 지금은 알지 못하나 후에는 알리라"고 지금 모르고 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만, 그러나 12절의 질문에서는 그래도 알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물으시는 것입니다. 아니, 점점 더 깊은 뜻을 알기를 원하고 계신 것입니다.
사랑이란, 어떤 의미에서든지 그 뜻을 모르면 무효입니다. 물질을 주고 받았다는 물리적 현상을 사랑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만약, 그것을 사랑이라고 한다면 물질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 물질이 상징적일 때 의미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물질에 사랑을 담아서 주고, 사랑으로 받아들일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적인 유익만 가지고 사랑이라고 할 수 없고 정신적으로 유익을 줄 수 있어야 진정한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가령, 돈을 쓸 줄 모르는 어린 자식에게 무작정 많은 돈을 주어서 이 자식이 잘못되었다고 한다면, 돈을 준 그것이 과연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주었다고 결코 사랑은 아닙니다. 문제는 받는 자가 그 물질 속에 담겨진 의미를 받고 소화할 수 있어야만 비로소 사랑이 의미가 있어지는 것입니다. 사랑은 알아야 하고 깨달아야 합니다.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함께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육체적인, 물질적인, 구체적인 사건들이 상징적인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야 그 의미가 새롭게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묻고 계신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에게 행한 것을 아느냐고, 모르는 줄을 아시지만 그래도 다소라도 알기를 원하시며, 점진적으로 깊이 알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발을 씻겼다고 하는 사건 그 자체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이 사건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고, 하나님을 알고, 이웃을 알고, 나를 아는, 즉 모든 것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이 사건을 놓고 볼 때에 베드로는 얼마나 초라해졌습니까? 베드로 입장에서 본다면, 베드로 자신을 알아야 함은 물론, 제자들끼리의 관계도 다시 알아야 하며, 예수님과 베드로의 관계도 알아야 했습니다.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것을 묻고 계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사건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천 명을 먹이신 다음날 아침, 주님은 배를 타고 건너가시는데, 그 배 안에 떡이 없었습니다. 이 때에 예수께서 바리새 교인들의 누룩을 삼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은 숙덕거리며 예수님이 시장하신 줄로 잘못 알고 서로 책임을 물었습니다. 베드로는 가룟 유다에게 회계를 맡으면서 왜 진작 떡을 준비하지 않았느냐고, 또 가룟 유다는 수제자 베드로는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고 책임을 전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떡이 없음에 대해 서로 시비가 벌어졌습니다. 이것을 지켜보시던 예수님은 어이없어 하시며 오천 명을 먹이고 떡이 얼마나 남았느냐, 아직도 떡이 없음을 가지고 염려하느냐고 그들에게 주의를 환기시키십니다. 누룩이라는 말에서는 오직 떡만을 생각하는 미련한 제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직접 보았고 들었고 먹기까지 하는 경험을 했었지만 깨닫지를 못했습니다.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마찬가지로 이 본문에서도 발을 씻기신 그 의미를 물으셨지만, 제자들은 대답을 못했습니다. 깨달음이란 참으로 중요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머리로 깨달아야 할 것이 있고 가슴으로 깨달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랑은 이론적이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받아들이며, 나아가서는 실천하면서 깨닫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보고 듣고 생각하는 것만 가지고는 알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직접 사건 속에 부딪쳐서 몸이 닿아야 깨닫게 된다는 말입니다. 즉, 사랑이란 사랑을 받아서 아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에라도 사랑하고서야 사랑받은 것을 알게되는 것입니다. 오늘 제자들은 예수께서 "내가 너희들에게 행한 것을 아느냐"고 물으셨지만, 끝내 그 뜻을 몰랐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베드로서에 볼 것 같으면) 저들이 한 가지 두 가지씩 깨닫게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들도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그러나, 깨닫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은 다시 물으십니다. "오늘 네가 당한 일이 무엇인지 아느냐?" 이제 우리는 깊이 생각하고 가슴으로 벅차게 깨닫는 시간을 가져야 합니다.
다음 15절에 보면,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고 본을 보였노라."(요 13:15) 본보기로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지금 열 두 제자들은 질투로 팽팽히 맞서서 서로 먼저 발을 씻겨 주지 못하고, 씻김을 받은 후에야 씻기겠다고 눈치보다가 결국 씻기 않고 잔치에 임했습니다. 이런 순간에 누군가가 먼저 씻기는 일을 시작하는, 즉 주도권을 잡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가령, 우리 모두가 먼저 사랑 받고 사랑하겠다든지, 용서받고 용서하겠다고 기다린다면, 사랑 받거나 용서받을 자가 누구입니까? 어떤 사람은 교회 문에 들어서면서, "이 교회에는 사람이 없구나"하고 불평을 합니다. 교회에서 사랑하는 자가 누구이며 사랑 받는 자가 누구입니까? 도대체 주는 자가 없는 친절을 누가 받을 수 있습니까? 받을 생각만 하지 말고 먼저 주는 자의 입장에 서자는 것입니다. 내가 먼저 사랑하면 해결되는 것입니다. 옛날 황은진 목사님의 설교 중에 "친절한 교회를 찾아서 방랑의 길을 떠난 한국 교인들"이라는 설교가 생각납니다. 보따리를 싸들고 이 교회 저 교회를 기웃거려 보십시오. 누가 나를 사랑하며 알아주겠습니까? 그러나, 방향을 돌려 내가 먼저 사랑해 보십시오. 어디서나 먼저 본을 보이면 여기저기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만약, 미움받았다고 미워하고 사랑 받았다고 사랑한다면 그는 인격자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은 존재(being)가 아니라, 다만 되어진 바(becoming)로서 벌레와 같은 환경의 동물일 뿐 아무 의미가 없는 삶입니다. 미움받았다고 미워하고, 도둑맞았다고 도둑질하며, 나쁜 말 들었다고 욕하는 식으로 악순환하면 어디서 언제 끝이 나겠습니까? 누군가가 미움받고도 사랑하고 악을 선으로 대하는 주도적인 본보기가 있어야 새로운 질서가 시작되지 않겠습니까?
오늘 열 두 제자들 그대로 두면, 시기와 질투가 점점 심화되어 서로 악수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이 분위기를 깨뜨려 본을 보여야 합니다. 누군가가 사랑의 지도자가 되어서 시작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한번 본보기가 되어 보십시오. 화목의 본, 사랑의 본이 되어 보십시오. 대체적으로 앞장서기는 힘들어도 뒤따라가기는 좋아합니다. 즉, 닮기를 좋아한단 말입니다. 그러므로, 어디나 본이 필요합니다. 본을 따라 사는 것이 가장 쉬운 길이요, 편한 길입니다.
예수님은 본을 보이시되, 본문에 보면 주(註)를 달았습니다.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 13 : 14-15) 받지 못하고 주는 주도적 사랑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주고도 받지 못하는 자가 있어야 공짜로 받는 자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래야 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주었다고 되돌려 받는 것이 아니라, 받은 자가 또 다른 사람에게 주고 그는 또 다른 사람에게 주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면, 나는 사과나무를 심었고, 다음 사람은 그 사과를 따먹고, 나는 또 다른 사람이 심은 사과를 먹는단 말입니다. 내가 심었다고 반드시 내가 먹어야 한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 말씀은 내가 너희들의 발을 씻긴 것은 너희들이 다시 내 발을 씻으라는 뜻이 아니고 너희들이 발을 서로서로 씻기라는 뜻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예수께서 우리를 용서하셨으니 우리가 예수님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하라는 깊은 뜻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본입니다. 우리는 내가 사랑을 베풀었으면 즉각적으로 그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되돌려 받기를 원합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을 베푼 것으로 만족하고 되돌려 받을 생각을 하지 말아야 본이 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의미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다음 17절에 보면,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요 13:17)고 중요한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대개 모르고 행하기 때문에, 중간에 문제가 생기면 낙심하게 됩니다. 그러나, 알고 행하면 낙심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본래 배신도 있고, 거짓도 있고, 선한 일에도 나쁜 소리를 듣는 것을 충분히 알고 출발하면 무슨 문제입니까? 아무 생각 없이 덜컥 출발을 하고 보니 어려움이 있는 것입니다. 가령, 젊은 사람들이 처음으로 사랑에 빠져 그 기분으로 모든 것이 그렇게 좋은 줄만 알고 결혼했다가 얼마 후에야 아닌 것을 알고 후회하는 것과 같습니다.
미리 생각하지 못했다는 것, 즉 미리 지식을 갖지 못했다는 것이 후회의 이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히 말씀하기를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예수께서 본을 보이신 이 사건에서 무엇을 알아야 합니까?
첫째, 스승으로서 제자의 발을 씻겼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주인이 종의 발을 씻겼다는 사실을 알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봉사입니다.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자가 낮추어서 종을 섬겼습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인지 모릅니다. 제자가 스승의 발을 씻기고, 종이 주인의 발을 씻겼다는 것은 봉사가 아닙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이치와 논리를 따져서 사랑을 논해서는 안 됩니다. 사랑은 때로 논리를 무시하고 초월합니다. 아랫사람, 윗사람 가리는 일반적인 질서가 아닌 또 다른 질서가 존재한단 말입니다. 종이 주인의 발을 씻기는 것은 율법이요, 주인이 종의 발을 씻기는 것은 은혜입니다. 섬겨야 할 자가 마땅히 섬기는 것을 공로라고 하거나 선행이라고 결코 말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섬김이란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태복음 20 : 28에 보면,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섬기기 위해서 오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섬김의 뜻은,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자가 낮추어서 섬긴다는 말입니다. 아직도 내가 크냐, 네가 크냐고 따지겠습니까? 당연히 섬기기만 하면 됩니다. 윗 자리, 아래 자리 없이 섬기자는 것입니다.
언젠가 본이 되게 섬기는 좋은 분을 만난 기억이 있습니다. 그는 뉴욕의 한 은행장인데, 교회에서는 회계도 아닌 회계보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사회에서는 큰 은행장이었지만, 주일이면 오후 3시까지 돈을 맞추고 계산하는 것을 보고 대단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실, 교회란 바로 이런 곳입니다. 아래 자리, 윗 자리 없이 서로 봉사하고 섬기는 곳입니다.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자가 허리를 굽혀서 종의 발을 씻기는 것이 섬김의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히 제자의 발을 닦으시며 너희도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전문적 권위보다 더 높은 권위는 희생적 권위입니다. 어머니가 훌륭하다는 것은 바로 이 희생의 권위 때문입니다. 희생의 권위를 인정하기 전에는 어떤 말을 해도 가슴이 열려지지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참 섬김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발 씻음을 받았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들을 씻겼으니 너희들도 서로 씻어 주라", 즉 내가 씻김을 받았기 때문에 받았다는 마음으로 다른 사람을 씻어 주라는 것입니다. 흔히 받고서도 받지 않았다고 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많이 받았고, 너무나 많은 신세를 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은혜가 넘칩니다. 내가 준 것은 없고 받은 것만 많다는 그 마음이 바로 사랑입니다. 반대로 나는 한 번도 섬김을 받은 일이 없고 섬기기만 하고 주었다고만 생각하는 사람은 불평만 하게 되어 피곤하기만 합니다. 다윗처럼 항상 받은 자의 마음으로, 어찌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다 보답할까 하고 받은 마음으로 꽉 차 있다면 참으로 행복한 자입니다. 결국, 겸손한 사람은 무자격한 자기에게 너무 많은 것을 주셨다고 가슴벅차 하며 살아가고, 교만한 사람은 받은 것이 없다며 계속해서 투정하고 피곤하게 살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모든 사람에게 자신은 "빚진 자"라고까지 말하고 있습니다.
세째로, 그 속에 가룟 유다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실 때에 가룟 유다가 걸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다 깨끗지는 아니하니라, 너희 중에 하나는 마귀다", 즉 마귀에 씌였다는 것을 아시면서 비장한 마음으로 그들 모두의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것이 봉사입니다. 봉사할 때에 베드로 가리고, 야고보 가리고, 가룟 유다 가려서는 안 됩니다. 선한자의 발이나 악한 자의 발을 가리시지 않고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그러면, 가룟 유다의 발까지 씻길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낙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흔히 나의 사랑을 알아 줄 만한 사람만 사랑하고, 되로 주고 말로 받을 사랑만을 골라서 계산적으로 하다 보면, 여기에는 낙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의 발까지 예수께서 씻기셨다는 사실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습니다. 대상에 대해서나, 보답에 대해서 전혀 관심 없이, 섬기는 자의 자세로 봉사하면, 즉 처음부터 그렇게 시작하면 절대로 낙심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다음, 예수님께서는 가룟 유다에 대해 성경적인 해석을 가지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다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나의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요 13 : 18) 성경적으로 해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려오시다 저들에게 체포당하실 때도(요 18 : 11)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않겠느냐?" 고 말씀하셨고, 또한 마태복음 26장에서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잡으러 온 무리에게 칼을 빼어 귀를 치자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 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 26 : 53-54)고 예언의 말씀을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성서적 해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하는 봉사, 선교가 성경의 어느 말씀에 의해 하고 있느냐가 분명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일하는 도중 무슨 일이 있어도 낙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에서도 보면, 베드로가 가룟 유다 사건을 설명하는 가운데 "저는 제 갈 곳으로 가니라"고, 즉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성경 안에서 해답을 얻고 있습니다. 또한, 잠언 16 : 4에 보면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고 악한 자에 대해서도 적당하게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배신 속에서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신비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가룟 유다의 사건 속에 있는 신비로운 뜻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를 불쌍히 여겨 "나지 않았으면 좋을 뻔했다, 하필이면 너냐?"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 말씀에서 사건을 풀이하고 이 모순 속에서도 하나님의 큰 뜻이 이루어질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조금도 낙심하지 않고 오히려 배반자를 불쌍히 여기시며 발을 씻기신 것입니다. 이렇게 알고 행하면 복이 있습니다.
여러분, 이제 섬겨야 합니다. 당연히 섬김을 받아야 할 예수님도 제자들을 섬겼습니다. 나는 너무나 받은 것이 많기에 말없이 다만 섬길 뿐입니다. 나아가서는 악인과 모순을 극복하는 초월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성경적으로 해석을 얻고, 모순을 넘어서는 믿음을 가져야 선행을 이룰 수 있습니다.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 자료 18,185편 ◑ > K자료 1,91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스로 삼가라 (사도행전 15:22~35) (0) | 2024.03.19 |
---|---|
보혜사의 약속(요 14:12-17) (0) | 2024.03.19 |
새 교리에 대한 관심(사도행전 17:16~21) (0) | 2024.03.19 |
스스로 버리노라(요한복음 10장 11절~18절) (0) | 2024.03.19 |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로마서 8장 26절~30절) (0) | 2024.03.1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