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곽선희 목사 설교

보라 네 어머니라(요 19:25-27)

by 【고동엽】 2024. 3. 19.

 

목차 돌아가기

보라 네 어머니라(19:25-27)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예수께서 그 모친과 사랑하시는 제자가 곁에 섰는 것을 보시고, 그 모친께 말씀하시되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

 

계속해서 예수님의 십자가 지신 장면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앞에서, 십자가는 어떤 것이며 십자가 지실 때의 상황과 그 의미를 생각했습니다. 이 본문에서는 이렇게 어려운 순간에서도 예수님은 자신의 고통보다는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더 생각하셨다는 사실에 대해 생각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다음에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하나님이여,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모르기 때문입니다"라고 당신의 아픔보다는 당신을 아프게 한 상대방을 위한 기도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자신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래서, 나의 아픔과 고통을 생각하느라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할 겨를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는 엄청난 고통 속에서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생각하셨고, 그 중에서도 당신을 해치려고 하는 사람들을 먼저 걱정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상에서 하신 몇 가지의 말씀 중에서 자신을 위한 것은 "목마르다"고 하신 말씀뿐입니다.(이 말씀에 대해서는 다음 장에서 공부하겠습니다.) 그 외에는 예수님 자신을 해치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생각하셨고, 바로 곁에 있는 강도들을 생각하셨으며, 또한 십자가 앞에서 울고 있는 모친을 생각하셨습니다. 그래서 함께 서 있는 제자에게 어머니를 부탁하고 계신 것이 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본문에서 보면 십자가 밑에는 네 명의 여인이 서 있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모친과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19:25) 여기에서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는 어떤 사람인지 다른 복음서에서도 기록된 내용이 전혀 없어, 그 분에 대해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 외에 세 여인에 대해서는 성경 여러 곳에 나와 있고 우리도 잘 알고 있는 바입니다. 이상 세 여인에 대해서 생각하기 전에 먼저 밝혀 둘 것은 그들이 대단히 어려운 상황에서 십자가 현장까지 따라왔다는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십자가를 지는 사람에 대해 동정한다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던 많은 사람들은 다 도망가고 본문에서 밝혔듯이 사도 요한과 네 명의 여인만이 쓸쓸하게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즘 같아서는 인권과 인도주의가 많이 통하는 세상이라 동정도 비판도 가능하지만 옛날 전제국가에다가 특히 로마 정치하에서 약소국의 사형 집행에 대해서는 일체의 반론이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의 재판에서 본대로, 사형이라고 일단 결정되면 상소나 재심이란 제도 없이 바로 끌어내어 집행하는 것입니다. 이 때에 만일 누군가가 "그는 죽을 죄인이 아니다"라고 한 마디 한다면 그도 죄인과 함께 죽는 운명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것은 로마의 판결에 대하여 항의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용서 없이 처단하므로 누구도 감히 입을 열지 못했습니다. 한 마디의 동정도 꺼내지 못하는 실정이었습니다. 좋은 예로 구레네 시몬이 몇 마디의 동정을 했다가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지 않습니까? 어떤 동정과 항의 또는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지는 자를 동정하는 것은 굉장한 사랑의 고백이요, 동시에 함께 죽을 수도 있다는 각오와 헌신이 있어야만 했습니다.

따라서 십자가 밑에까지 갔다는 그것만으로도 십자가의 고난에 어느 정도 동참한다고까지 말할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사도 요한과 네 명의 여인 외에는 모두가 도망간 것입니다. 결국 위의 다섯 사람이 예수님을 제일 사랑하고 끝까지 충성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은 말로써만 되는 것이 아닙니다. 플라토닉 러브로만 통할 수가 없단 말입니다. 그가 있는 곳에 내가 있어야 합니다. 함께 있는 것이 사랑입니다. 서로 떨어져 있으면서 사랑을 운운하는 것은 말이 안 됩니다. 예수님도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따르지 않으면서 마음만은 사랑합니다라는 이야기는 성경에서 허락지 않습니다. 확신이 있느냐 없느냐, 또는 믿습니다라고 수백번 말해도 소용이 없고, 어쨌든 주님이 계신 곳에 나도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죄인이 있는 이 세상으로 친히 오신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지는 현장에서 도망치면서 나는 주님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면 통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본문에서 본 것처럼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간 사람들만이 진정으로 예수님을 사랑한 사람들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에 나타난 여인들에 대해 보다 상세하게 공부하고자 합니다. 제일 먼저 예수님의 어머니인 마리아입니다. 그가 온 생을 다바쳐 예수님께 헌신한 사람임은 잘 아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1 : 38에서부터 그의 헌신이 시작됩니다. 천사 가브리엘이 "네가 아들을 낳으리라" 할 때에 마리아는 "저는 남자를 모릅니다"라고 당황해서 말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는 천사의 말에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라고 받아들입니다. 마리아가 아기를 잉태하게 된다는 것은 지금 약혼한 요셉과 헤어져야 한다는 의미가 있으며, 자칫하면 간음한 여인으로 누명을 쓰고 돌에 맞아 죽을 위험까지도 있는 일이었습니다. 대단한 모험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헌신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이 순간부터 시작해서 마리아의 일생은 어려운 고통이 계속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2 : 34에 보면 시므온이 그를 향하여 예언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의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시므온이 예언한 대로 정말 그의 일생은 칼이 마음을 찌르는 것과 같은 고통을 계속 당해야만 했습니다.

돌이켜 보면, 예수님은 잉태되는 순간부터 어머니인 마리아의 고통이 시작되었고 구유에 태어나신 것이나 어린 아기를 안고 피난길을 떠나는 등 숨어서 사는 고통까지 뒤따랐습니다. 경제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숨어서 사는 심리적인 고통까지도 겹쳤던 것입니다. 또한 전도 사업을 하실 때에도 갖가지 나쁜 소문들이 들려왔습니다. 바알세불신을 입었다든지, 누가 죽이려고 잡으러 다닌다든지 하는 소문들이 들릴 때마다 어머니로서 얼마나 마음을 졸였겠습니까? 그래서 마리아는 직접 예수님을 찾아갔던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누가 내 모친이며 형제냐,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모친이요 형제다"(12:46-50, 3:31-35)라고 인간적인 정을 끊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인간적인 정으로 생각할 때에는 마리아의 마음에 아픔을 준 한 부분이라고 생각됩니다.

이렇게 계속 아픔을 가지고 살았는데 드디어 십자가 밑에까지 왔습니다. 33살의 죄없는 아들, 메시야를 십자가에 못박는 현장에서 그 고통을 함께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상상력을 초월한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와 거의 20년 동안 친분을 나눈 어려운 환경의 한 친구가 있습니다. 그는 원자병으로 평생 고생하며 육체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대단히 어려운 형편에 있는데 간간이 저에게 편지나 시를 써서 보내곤 합니다.

마침 마리아에 관한 글을 보내온 것이 있어서 다듬지 않은 글이지만 옮겨보겠습니다.

"가난하게 산 무소유의 어머니"

마굿간에서 아들을 낳은 여인

아기를 안고 한밤중에 이집트로 피난간 여인

아기를 봉헌할 때 축복대신 예리한 칼 같은

고뇌와 고통을 예고받은 여인

12살에 아들을 잃고 못내 슬퍼했던 여인

가정을 떠나 진리와 정의, 기쁨과 평화의 구주가 된 아들을 자주 볼 수 없었던 고독과 망각의 여인

죄수로 끌려가면서 모욕당하고 매맞는 아들을

지켜 보아야 했던 비통의 여인

십자가상에서 하나님 하나님, 어째서 나를 버리시나이까 하며 피눈물의 기도를 바쳤던 아들 예수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듣고 눈물을 흘렸던 여인

 

정말로 마리아의 고통은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어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두번째는 예수님의 이모입니다. 마가복음 15 : 40에서는 이모의 이름이 살로메로 나와 있습니다. 아마도 마리아의 동생인 것 같습니다. 마태복음 20 : 20에서는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라고 나오는데, 즉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입니다. 그러고 보면, 제자 중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과 이종사촌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이라고 하면 마태복음 20 : 20 이하에서 그들의 어머니가 이 아들들을 데리고 예수님께 나아와 자리를 부탁했던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의 나라가 임하게 되면 아들 하나는 좌편에, 하나는 우편에 앉게 해달라는 청원입니다. 그러고 보면, 이모가 조카에게 부탁을 한 셈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이모인 살로메에게 "당신이 구하는 것을 아느냐?"고 물으십니다. 이것은 일종의 책망이요 충고이며 거절이기도 합니다. 그리고서 야고보와 요한에게는 "내가 마시려는 잔을 너희들도 마시겠느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들이 "마실 수 있겠나이다"라고 대답하자 "너희가 과연 내 잔을 마시려니와 내 좌우편에 앉는 것은 나의 줄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누구를 위하여 예비하셨든지 그들이 얻을 것이니라"(20 : 23)고 말씀하시며 이어서 "인자는 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다"고 의미 깊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문맥으로 보아 살로메의 요청은 분명히 거절당했고 오히려 책망조로 나무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십자가를 놓고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는 어려운 시간인데, 이모라는 사람은 전혀 상황 판단도 없이 출세를 위해 아들들을 부탁하고 있으니 얼마나 거리가 있습니까? 물론, 거절당한 살로메로서는 여잔 섭섭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모의 부탁인데 그렇게 냉정할 수 있느냐고 마음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그는 예수님 십자가 앞까지 함께 왔습니다. 그는 조카로서가 아니라 메시야로서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의 거절을 귀하게도 그대로 수용한 것같습니다.

우리들도 잘못된 소원이면 거절당하는 것이 마땅하고, 거절을 응답으로 받을 줄 아는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 병들었습니까? 하나님께 고쳐 달라고 기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을 줄로 믿습니다"라고 기도하는 것은 좀 문제가 있습니다. 또한 더 어려운 것은 "낫지 않으면 믿지 않겠습니다"라고 거의 협박조로 하는 기도입니다. 고쳐 주시면 고쳐 주시는 대로 좋고, 고쳐 주시지 않으면 그런대로 또 다른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줄을 알고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허락, 거절, 무응답, 침묵 등 하나님의 응답의 종류를 분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말없는 침묵도 말씀으로 받고, 거절을 응답으로 받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살로메는 인간적으로 보면 조카로부터 보기 좋게 거절을 당했습니다. 아주 중대한 청원을 했다가 망신을 당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주님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절대적인 신앙이요 무조건적인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십자가의 마지막 증인이 되었고 두 아들을 하나님께 바친 귀한 어머니가 된 것입니다. 그의 두 아들 중 야고보는 제자 중에서 제일 먼저 순교한 순교자가 되었고, 요한은 가장 오래까지 살아남아서 예수님의 산 증인으로, 전도하는 사도가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그의 아들들이 정치적인 우정승, 좌정승이 된 것은 아닙니다만 신앙적인 차원에서 살로메의 소원이 이루어졌다고 봅니다. 어쨌든 이 여인이 지금 예수님 앞에 서 있습니다.

다음 세번째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이 여인은 신분이 낮고 일곱 귀신 들렸던 사람입니다.(16:9, 8:2-3) 누가복음 8:2-3을 옮겨 보면, "또한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와 또 헤롯의 청지기 구사의 아내 요안나와 또 수산나와 다른 여러 여자가 함께 하여 자기들의 소유로 저희를 섬기더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여인들이 예수님과 그 제자들에게 소요되는 비용들을 충당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때부터 여전도회(?)가 큰 일을 했습니다. 우리 나라에 맨 처음 선교사로 왔던 언더우드도 필라델피아에 있는 장로회 여전도회에서 파송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전설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그는 빼어난 가버나움의 미인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로마가 가버나움을 점령하면서, 로마의 대장이 술 좌석에서 제일 예쁜 여자를 데려오라고 명령했습니다. 만약 예쁜 여자를 바치지 않으면 온 마을의 유부녀가 수난을 당하게 될 입장이었습니다. 랍비들과 제사장 등, 많은 사람들이 모여 의논하다가 결국은 막달라 마리아가 대표로 희생을 하게 됩니다. 이 마을을 위하고 다른 여자들이 무사하게 하기 위해서 큰 마음을 먹고 희생물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혁명가, 소위 게릴라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여 화살을 쏘아서 로마 대장을 죽여버렸습니다. 온 마을은 쑥밭이 되었고 이 일을 잘 협상하기 위해서는 정치적인 흥정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대장을 죽인 자가 혁명군이 아니라 막달라 마리아의 정부라고 누명을 씌워 정부까지 내어주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을이 망하고 여러 사람이 다치게 되니, 할 수 없이 이중 삼중의 희생을 치르게 된 것입니다. 이 억울함을 달랠 길이 없어 고통 하다가 결국 미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정치적인 문제이니 개인적으로 아무리 억울하고 분해도 터뜨릴 수가 없어, 낮에는 숨어 있다가 밤이면 울고 다녀서 일곱 귀신 들린 여자로 통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여인이 예수님을 따르되 끝까지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더러운 여자로 낙인찍혔고 일곱 귀신 들린 여자로서 사람 대우를 받지 못하다가 예수님으로부터 깨끗이 고침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누가복음 7: 36이하에 보면 그는 바리새인 집에 오신 예수님께 나아와 눈물로 주님의 발을 적시어 자기 머리털로 씻고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정성을 쏟았습니다. 이 행위는 굉장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이 때 바리새인이 생각하기를 예수가 만일 선지자이면, 자기를 만지는 이 여자가 누구이며 어떠한 죄인인 줄 알 것인데, 아마도 선지자가 아닌가 보다고 의심을 했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이런 순간에 예수님은 비유를 들어서 마리아 편을 드십니다. "500데나리온 빚진 사람과 50데나리온 빚진 사람이 있는데 둘 다 갚을 능력이 없어서 탕감을 해주었다. 그러면, 둘 중에 누가 더 저를 사랑하겠느냐." 바리새인 시몬이 대답하기를 "많이 탕감 받은 사람입니다"라고 서슴없이 말하자, 주님께서는 "네 판단이 옳다" 하시고 마리아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기를 "많이 탕감 받은 사람은 많이 사랑하느니라, 저의 죄가 많기 때문에 더 사랑하느니라"고 마리아 편을 들어 설명하셨습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 순간에 아마도 마리아는 그의 일생을 주님께 바치기로 결심했는지도 모릅니다. 대신해서 십자가를 지지는 못할망정, 십자가 밑에까지 따라갔고 예수님이 장사되자 시체나마 보려고 무덤까지 갔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제일 먼저 만나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예수님을 최고로 사랑한 여인이 막달라 마리아라고 말해도 잘못이 없을 것 같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그녀가 예수님으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사람입니다. 많은 것을 탕감 받고 많은 사랑을 받았기에 많이 사랑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막달라 마리아가 지금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의 어머니와 그 이모, 그리고 글로바의 아내와 함께 울고 서 있습니다. 물론 그 옆에는 사도 요한도 있었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어머니를 향하여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또 제자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어머니라 하신대 그 때부터 그 제자가 자기 집에 모시니라"(19:26-27), 즉 어머니를 요한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요한은 이 부탁대로 마리아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봉양하느라고 그는 초대교회의 핍박을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리아가 세상을 떠난 다음부터 비로소 전도 여행을 시작했고 거의 100세 가까이 되도록 사도로서 큰 역사를 이루었으며, 잘 아는 바로 요한복음, 요한계시록, 요한 1, 2, 3서 등 귀중한 편지 복음을 남겨 놓은 것입니다. 열 두 사도 가운데 가장 오래 살아서 산 증인이 된 것입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예수님을 따르되 끝까지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감상적이거나 단순한 입의 고백이 아니라, 함께 있어야 하므로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 내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이 확증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모든 위험, 고난을 받으면서 사랑하여야 끝까지 따르는 자가 됩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