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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안과 찬양(롬16:21~27)

by 【고동엽】 2024. 3. 19.

 

로마서 강해로 돌아가기 목차로 돌아가기

 

문안과 찬양(롬16:21~27)

 

지난 시간에 우리는 로마서 16장에서 사도 바울이 로마에 있는 사람들의 이름을 꼽으면서 문안하는 것을 살펴보았습니다. 바울이 24명이나 되는 많은 사람의 이름을 부르면서 아무개에게 문안하라, 그는 이런 사람이다, 그에게 문안하라…… 이렇게 문안도 하고, 소개도 하고, 또 어떤 때에는 그 사람에 대해서 설명하기도 하는 내용이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편지를 쓰고 있는 곳인 고린도 지방 사람들의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먼저는 편지를 받게 되는, 그 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문안했어요. 이제는 편지를 쓰고 있는, 바울이 있는 이 지역 사람들의 이름을 들어서 문안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맨먼저 바울은 디모데의 이름을 듭니다. 본문에 보는 바와 같이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21)……" 이렇게 이름을 대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이 하나 있어요. , 사도 바울의 주변에는 많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지금 고린도교회 교인이 한두사람입니까? 굉장히 많아요. 하지만 그가 로마교회를 향해서 문안하는 데에 거명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입니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문안을 해야겠다는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의견도 있어요. 또 어떤 의미에서는 '이 분들이 나를 돕고 있습니다. 이 분들이 나의 협력자입니다'-그런 뜻으로 문안하고 있는 것입니다.

간단하게, 몇 말씀밖에 안하고 있지만 '이 분들이 다 도와주기에 내가 일을 하고 있고, 이 분들 덕분에 내가 오늘도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하는 의미로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바울을 돕고 있는 사람, 바울의 주변에서 바울에게 협력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인가를 여기서 보게 되겠습니다.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바울 혼자서 일하는 게 아닙니다. 특별히 에베레스트 산이나 다른 높은 산을 정복했다 할 때, 우리는 한 사람 내지 두 사람만이 깃발을 들고 정상에 올라가서 서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올라가기 위해서는 그 밑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모릅니다. 특별히 베이스 캠프까지는 수많은 사람들이 올라갑니다. 심지어는 당나귀까지 짐을 등에 지고 올라갑니다. 그렇게 많은 협력자가 수고하고, 맨 마지막에 정상에 오를 때에는 한두 사람이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산을 정복하는 사람, 그 혼자서 하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목회도 그렇고, 선교도 그렇습니다. 많은 협력자가 있어야 합니다. 기도로 도와요. 또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바와 같이 full time으로, 전적으로 사도 바울을 돕는 사람이 있어요. 바울을 물질로 돕는 사람도 있고, 혹은 여러 면으로 그를 위로하는 사람도 있고, 심부름하는 사람도 있고, 본문에서 보듯이 대필(代筆)하는 사람도 있어요. 바울이 눈이 나쁘기 때문에 대신 옆에서 글을 써주는 copyist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볼 때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협력이 필요한지 모릅니다. 오늘날 목회자라고 하는 것도 그렇습니다.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수많은 사람이 돕고 협력해서 하나의 작품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일하는 사람으로서는 그를 돕고 있는 모든 사람을 절대로 잊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에요. 바울 역시 이들에 대한 고마운 마음이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소개하는 것입니다.

첫째로, 아마도 바울이 일생에 있어서 가장 소중했던 사람은 디모데였을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은 다음부터 바울을 위해서 한평생을 돕습니다. 얼마나 도왔든 간에, 전설에는 로마에 있는 사도 바울의 무덤이 밑에 디모데의 무덤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디모데는 한평생 바울을 위해서 살았습니다. 협력자로, 조력자로, behind men으로, 그렇게 살았다는 말이에요. 무릇 이러한 분이 참 필요합니다. 디모데에 관해서는 성경에 나타난 것만으로도 우리가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는 바울의 오른팔과 같은 사람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후계자이기도 합니다. 또 바울은 분명히 디모데를 아들이라고 부릅니다. 디모데후서에서 '내 아들, 참아들'이라고 말씀합니다. 또 오늘의 본문에서는 동역자라고 말씀합니다.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보다 동역자라고 격상시켜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로마에 소개할 때에는 '디모데는 나의 동역자요'-이렇게 말씀해요. '내 아들이요'라고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디모데를 향해서는 '내 아들이다'-이렇게 말씀하지만 로마교회에 소개할 때에는 '나의 동역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중요한 의미를 가집니다. 많은 학자들이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만일에 디모데가 없었다면 바울은 어떻게 되었을까?-그렇다면 그의 사역은 절반도 이루지 못했을 거라는 것이에요. 또 무산될 일도 많았을 것이다, 디모데가 있어서 바울이었다, 라고들 말합니다.

특별히 바울이 디모데를 제일 강하게 소개한 대목이 빌립보서 219절로 22절입니다. 한번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디모데는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서 수고를 했습니다. 어떤 방법으로 수고했느냐 하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대로 뜻을 같이했습니다. 항상 뜻이 같았다는 얘기예요. 참 귀한 일이지요. 대개는 뜻이 달라서 문제가 됩니다. 하나님의 일을 같이 한다고 하면서도 뜻이 달라요. 그러니까 충돌이 되고, 마음을 상하게 되고, 어떤 때에는 설득하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고 힘이 들어요. 그런데 디모데는 안그래요. 사도 바울과 늘 뜻이 같았어요. 또 바울은 저를 '진실히 생각할 사람'이라고 했어요. 진실히 생각한다-그 뜻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렇습니다. 저가 생각하는 것이나 내가 생각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에요. 저가 보는 것이나 내가 보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에요. 바울은 그만큼 디모데를 믿었어요. 디모데와 자기는 단연코 하나라고 동일시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참 좋은 협력자입니까? 그 사람이 생각하는 것은 내 생각이요, 그 사람이 말하는 것은 내 말이에요. 이 얼마나 좋은 일입니까?

얼마전에 저는 아주 즐거운 시간을 가져보았습니다. 제가 가르친 제자이자, 같이 협력해서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는 분이 있어요. 이 분이 누구에게 자기 소개를 하게 되었는데 이렇게 말하더라는 것이에요. "저는 목사님이 하라시면 하고, 하지 말라시면 안할 것입니다. 그저 곽 목사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설령 그것이 도둑질이라고 해도 저는 따라가서 망을 볼 것입니다." 도둑질을 한다고 해도 따라가서 망을 볼 것이라고요? 왜요? 그것이 좋은 일인 줄 아니까, 틀림없어 좋은 일이 라고 믿으니까요. 이 얼마나 좋습니까? 그 말을 듣고 제 마음이 어찌나 시원했는지 몰라요. 설명을 할 필요가 없잖아요? 적어도 믿는 사람이라면 설명이 필요 없어요. 간다면 가는가보다, 있으면 있는가 보다, 그러면 되는 것이에요. 무슨 일인지 설명해달라고, 납득이 될 때까지 설명해달라고 한다면 그것, 골치 아픈 사람이에요. 그래가지고 어떻게 일을 하겠어요?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없음이라"-바울은 확실하게 믿어요. 모든 사람이 다 자기일을 구하지만 디모데만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일만을 구하고 있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바울이 얼마나 흐뭇하면 이렇게 말하겠습니까? 자식에 아비에게 효도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를 위해서 일하고, 순종하고, 심부름하고, 수고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사도 바울은 오늘의 본문인 로마로 보내는 편지 가운데 '나의 동역자 디모데가 문안한다'-이렇게 안부를 전하는 것입니다.

"나의 친척 누기오와"-이 누기오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도행전 131절 나옵니다. 그는 안디옥교회 일꾼의 하나입니다. 그 다음에 "야손"이라는 이름이 나오는데, 이 야손의 이야기는 참 아름다운 이야기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175절에서 9절로 보면 저는 본디 데살로니가에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바울이 데살로니가에 갔을 때에 핍박을 받게 됩니다. 바울을 죽이겠다고 막 쫓아다니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이 때에 야손이 숨겨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야손의 집에 가서 바울을 찾았지만 끝내 찾지 못했어요. 화난 군중들은 야손을 끌어다가 매질을 하고 고생을 시킵니다. 그러니까 저는 바울 대신 수난을 당한 사람이에요. 그리고 뒤늦게 몰래 사도 바울을 다른 곳으로 보내드립니다. 참으로 바울을 대신해서 고난을 받은 사람이에요.

야손 역시 사도 바울에게는 소중한 협력자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손이 문안한다'라고 말씀했어요. "소시바더"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저가 베뢰아사람이라고 사도행전 204절에 나와 있습니다마는, 더 자세히는 알 수가 없습니다.

또 더디오는 대서하는 사람입니다. 바울은 눈이 좋지 않아서 말로 전하고, 그 옆에서 대신 써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621절에 보면 "나 바울은 친필로 너희에게 문안하노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아주 못보는 것은 아니에요. 요새같이 돋보기 안경이라도 하나만 있으면 no problem 문제가 없었을 테지만 아무튼 잘 보이지 않았어요. 큰 글자는 보이는데 작은 글자는 보이지 않는 것이에요. 좀 어렵지만 친필로 문안할 수는 있었어요. 그러나 많은 글을 정확하게 쓸 때에는 불편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대필을 시켰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다음에 23절에서 바울은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라고 말씀합니다. 식주인(食主人) 가이오-아주 재미있는 이름이에요. 가이오란 사람은 고린도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린도전서 114절에 보면 바울이 단 두 사람한테만 세례를 주었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가이오입니다. 이 사람의 특징은 두 가지예요. 하나는 부자입니다.

사회적 지위도 높았던 것 같아요. 그리고 봉사자입니다. 그래서는 가는 손님, 오는 손님을 다 자기집에서 대접합니다. 정성껏 대접을 합니다. 뿐만아니라 자기집을 열어서 교회로 삼았습니다. 그러니까 요샛말로 하면 지교회를 만들었어요. 자기집을 열어서 가정교회로 만들어가지고 많은 사람들을 모이게 했습니다.

지금도 중국에 가보면 가정에서 한 300명 모이는 교회가 있어요.

그러니까 마당에서 모여요. 겨울에는 문을 다 열어놓고 방안에서 모이고요. 이렇게 가득가득 모여요. 그런 곳을 처소라고 해요. 중국정부가 자유를 허락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교회를 제한합니다. 베이징 같이 인구가 천만이나 되는 큰 도시에도 교회를 둘밖에 허락하지 않았어요.

그 교회는 옛날에 선교사들이 벽돌로 지은 집이에요. 그러니까 나머지 교인들은 어떻게 하겠어요? 자연히 교인들이 거의 가정에서 예배를 드립니다. 양 목사님이라고 하는 중국인 목사님을 보니까 하루에 일곱 가정을 방문해요. 아침부터 시작해서 한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고, 또 한 교회에 가소 예배드리고…… 하루종일 이렇게 일곱 지교회를 돌아본다고 합니다. 그만큼 가정예배가, house church가 중요합니다. 이렇게 가이오는 open house, 자기집을 열어서 교회로 만드는 그런 사람입니다.

그것만이 아니라 그는 식주인이에요. 사도 바울이 고린도에 있을 때에 내내 이 집에서 얻어먹었던 것이에요. 이 얼마나 멋이 있는 이야기입니까? 이 마을에 들어오고 이 집에 왔으면 으레 이 집에서 대접을 해요. '나의 식주인'--나에게 밥을 먹여주는 사람이라는 말이에요. 경제적인 부담을 다 안고 있어요. 바울은 이제 먹는 것은 걱정 안해도 됩니다. 처음에 그가 고린도에 갔을 때에는 여러분이 아시는 바와 같이, 먹어야 하니까 손수 천막치는 일을 해가면서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까?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아요. 가이오가 있어서 문제가 없어요. 먹는 걱정은 없어요. 경제 걱정은 안하고도 전도할 수가 있었어요. 이런 사람 하나만 있어도 되는 것이에요.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저는 이런 장로님을 보았습니다. 그 교회 목사님한테는 자녀가 일곱이나 있었어요. 자녀가 많은 편이지요. 그런데 그 목사님은 자녀교육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아요. 바로 그 장로님이 맡고 있으니까요.

목사님의 자녀는 바로 내 책임입니다, 이제 자녀 걱정, 교육 걱정일랑 하지 마시고 목회하십시오-이렇게 개인적으로 일곱 자녀의 장학금을 전부 대는 것이에요. 심지어는 유학까지 다 시켜주었어요. 전적으로 담당하는 것이지요. 그저 가족걱정은 하지 말고 목회만 열심히 해주셨으며 좋겠습니다-참 얼마나 좋은 분이에요? 본문은 가이오 같은 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어쨌든 가이오는 식주인입니다. 바울로서는 경제적으로 도움을 받는 참 소중한 분이에요. 그래서 오늘의 본문에서 '가이오가 문안한다'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23)"-이 사람들에 대해서는 더이상 알 길이 없습니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하나의 이름을 들어 문안을 합니다.

이제 25절로 끝절까지 보면, 바울은 결론을 맺는 이 시간에 '나의 복음'에 대해서 다시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에 대한 재확인을 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로마서 1장으로 다시 한번 돌아가 보십시오. 그러면 로마서의 전 맥락을 바울이 이 두 곳에서 연결해주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1)"-복음을 위하여 택하심을 입었어요. 그리고 "이 복음은……" 하고 이제 복음에 대해서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그 다음에 5절 하반절에 보면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케 하나니"라고 말씀합니다.

바로 이런 말씀을 그대로 로마서 끝에 가서 받습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25)"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26)"-나의 복음, 이 복음을 믿어 순종케-이것이 로마서입니다. 이것이 로마서를 기록한 목적입니다. 그런고로 처음에 이것을 말씀하고 다시 끝에 가서 반복해서 확실하게 마무리하는 것입니다.

이 복음, 나의 복음-대단히 소중한 말씀입니다. '이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동시에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는 나의 복음, my Gospel, 내가 전하는 복음이에요. 그만큼 그는 복음을 확실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이것은 내가 계시로 받은 것이에요. 내가 전해주는 것이 아니예요. 이것은 내가 계시로 받은 것이에요. 내가 전하는, 내 생명을 거는 복음이에요. 그런고로 절대 양보할 수 없어요.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복음-이것이 바울의 복음이었습니다. 우리가 믿음 생활하는 데 있어서도 각자 '나의 복음'이 있습니다. 좀더 현대적인 말을 빌리자면 '나의 신학'이 있습니다. 내가 믿는 신앙의 내용이 있습니다. 이것은 양보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내 운명을 겁니다. 목숨을 바칩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좀더 지내보아야 알겠고, 좀더 공부해보아야 알겠고, 좀더 믿어보아야 알겠고……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또 누구에게 들은 이야기도 아닙니다. 들었든 말았든 상관이 없습니다. 이제 내가 믿는 믿음은 확실합니다.

나의 복음-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것입니까?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두 가지 큰 요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나의 나됨은 온전히 은혜로 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복음을 전하게 된 것도 은혜요, 복음을 위해 한평생 사는 것도 은혜입니다.

이 복음 자체가 은혜입니다. 그런고로 이 복음을 위해서 내가 있고 복음이 있어서 내가 있는 것이에요, 내 복음이 없다면 나는 없어요-이것이 바울입니다. 복음은 전적으로 은혜입니다.

둘째로, 내가 하는 일은, 복음은 절대적입니다. 동시에 내가 하는 일, 그 사역은 하나님의 크신 경륜 가운데 있는 것이라는 거예요. 이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의 크신 경륜 가운데 내가 있어요. 수많은 톱니바퀴가 돌아가는데 그 톱니바퀴의 하나가 나라는 것이에요. 하나님의 크신 구원의 경륜 가운데 내가 있다-바로 그것을 아는 사람은 절대로 흔들리지 않습니다. 나 하나에 의해서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 아니예요.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 안에 내가 있는 것이지요.

그 안에 내가 살아가고 있는 것이에요. 나 중심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적이고, 하나님의 경륜이 계시기에 내가 있는 것이에요. 그 믿음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런고로 이것은 실패할 수도 없고, 또 실패를 생각할 필요도 없어요.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이니까 하나님께서 끝내실 거예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 역사하시고 계시니까 여기에 좌절이란 있을 수 없는 것이에요. 바로 이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바울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오늘도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가만히 보면, 사실 내가 한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오묘한 경륜 가운데 내가 있는 것이에요. 이것을 깨닫기 시작하면 나는 점점 작아지고, 하나님의 경륜은 점점 크게 느껴집니다. 그리고 그 속에 흡수되고 있는 나 자신을 발전하게 됩니다. 여기서 진정으로 용기의 사람, 지혜의 사람, 충만함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25, 26)"-이 말씀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자기가 전하고 있는 복음은 영세(永世) 전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이 말이 중요해요. 감취었던 것인데 지금 신비롭게 계시되었다, 나타났다는 것이에요.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 나타났다, 감취었던 말씀인데 이렇게 나타났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오늘에 나타난 이 사건이 우연한 것이 아니에요. 우발적인 것이 아니예요. 본래 있었던 것이에요. 창세전부터 준비되고 있었던 일이 오늘에 와서 여기 나타났어요. 바로 그것을 전하는 데에 있어서 my function, 내 역할이, 내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는 것이에요. 이 얼마나 중요한 일입니까? 바울은 이렇게 자기를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한다는 말입니다. '이 복음이 창세전부터 있었다'-이 말씀은 무슨 말씀입니까? 내가 전하는 복음은 창작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있었던 것이에요. 내가 만들어낸 복음이 아니예요. 이것은 우주적인 것이고, 선지가로부터 전해지고, 창조적으로 전해지고, 예표로 전해지고, 말씀으로 전해졌던 것이에요. 이것이 오늘 와서 나타나는 것이에요. 결코 내 사상이나 내가 발견한 진리가 아니라는 것이에요. 그것이 바울의 마음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은 우연이 아니예요. 오랜 역사 속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그래서 이제 더욱 더 큰 은혜로 내 앞에 다가오게 됩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깨닫고 있어요. 그래서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은 영세 전부터 감추었다가 이제 나타난 바 되었다, 거기에 내가 할 일이 있다, 그것은 만방에게, 특별히 이방사람에게 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하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 내용입니다. 아주 신비로운 것이에요. 바울은 오묘한 하나님의 뜻이 여기에 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역사적인 귀한 의미를 말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26)"-그 대상은 모든 민족이에요. 이스라엘 민족만이 아니예요. 모든 민족-이 말은 헬라어로 '에드네'라고 하는데, 여기에는 좀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인종이라는 말도 되고, 조금 더 나아가서는 모든 문화권이라는 말입니다. 모든 언어권이라는 뜻입니다. 사실 가장 무서운 장벽이 nationalism입니다. 민족주의예요. 민족주의보다 더 무서운 것은 '문화권' 입니다. 같은 민족이라고 하면서도 문화가 달라요. 지금 우리가 뛰어넘기 어려운 것이 무엇입니까? 지방색 아닙니까? 같은 말을 하고 살면서도 선거 때에만 보면 지방색이라는 것이 확 드러나버려요. 보통 때에는 안그런 것 같은데 말이에요. 참 어려운 문제잖아요?

그러니 언어나 다르다면 더 말할 것도 없지요. 일본사람, 한국사람, 중국사람…… 전부가 다 달라요. 언어가 얼마나 많은가 하면 1996년 현재 언어의 수가 총 6721개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언어권이 다르면 복음이 전해지지 않습니다. 방송으로 아무리 널리 말한다고 해도 한국말로 방송하는 것은 한국사람밖에는 못 들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온 지구상에 방송이 꽉 차 있다고 하더라도 소용이 없어요. 바로 지난 주간에도 제가 미국에서 자동차를 타고 가면서 라디오로 들으니까 한국인 뉴스가 나옵니다. 한국에서의 저녁 10시가 미국에서는 아침 11시예요. 그래 11시에 들으니까 바로 여기 뉴스가 나오는 것이에요. 소리도 굉장히 깨끗해요. 그러나 외국사람은 안들어요. 안듣는 게 아니라 못들어요. 통역 없이는 못듣는 것이에요. 그렇잖아요? 들려진다고 듣는 것이 아니예요. 언어권이 같아야만 하는 것이에요. 우리끼리는 같은 문화권에 사니까 잘 모르는데, 여행해보세요. 말이 안통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데요. 저쪽이 내 말 모르고, 내가 저쪽 말 모르면 꽉 막히는 거예요. 언어의 장벽이라는 것이 참 무서운 것이에요. 그게 민족의 장벽이기도 하고, 선입견이기도 해요. 거기에 모든 감정이 다 포함되어 있어요. 참 힘듭니다.

, 이 세상에는 지금 이렇듯 6721개의 언어가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이 몇 나라말로 번역이 되었느냐?-다 번역되지 못하고 쪽으로 번역되어 있든, 전체적으로 번역되어 있든 간에 성경은 2065개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뿐이에요. 그러니까 줄잡아서 아직도 3분의 2가 복음을 못들었다는 이야기에요. 문화권으로 보면 3분의 2 언어권이, 문화권이 복음을 전혀 들을 수 없는 거예요. 우리 교회에서 파송한 안교성 목사님, 그 분은 몽골에 가 계시는데, 참 어학에 능해서 간 지 얼마 안되었는데도 신약성경을 다 번역했어요. 지금 몽골말로 구약을 번역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언어를 번역하기 전에는 아예 복음의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오늘의 성경에 "모든 민족으로"라는 말씀은 '모든 언어권에게'라는 말이에요. 그러니까 온 지구상에 복음을 믿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어야 해요. 복음이 설명되지 않는 언어권이 없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모든 언어권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그러니까 통역을 해야지요. 번역을 해야지요. 선교사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전해서 믿게 하고, 믿어서 순종하게 하는 것입니다. 믿기만 하는 게 아니예요. 믿어서 순종하도록-이것은 제자 훈련을 말하는 것입니다. 믿음대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예요. 믿음을 지식으로만 받는 게 아니라 생명으로 받고, 그의 믿음으로, 그의 교리로, 그의 생명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모든 민족으로 하여금 믿어 순종케 하기 위해서 내가 있고, 내가 수고하고있다는 말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중요한 신앙이 또하나 있습니다. 이것은 복음 자체가 능력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내가 전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니예요. 물론 복음이 있어야지요. 복음 전하는 자가 있어야지요. 성령이 감화해야지요. 그런데 여기에 하나 더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냐, 바로 복음 자체가 생명력을 지니고 있어요. 내가 전하기만 하면 역사는이루어지는 것이에요. 이는 마치 종자와 같아요. 나는 뿌리기만 하는데 종자 자체에 생명력이 있는 것이에요. 그래서 싹이 나는 것이에요. 내가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에요. 자라게 하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그와 같이 오늘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26,27)"라고 말씀합니다. 이 복음으로 견고케 하신다, 그런데 그 복음 자체가 능력이 있고 나는 복음을 전하는 일만 하는 것이다 함입니다. 여기에 그의 신앙이 있고 그의 겸손히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전한다고 해서 다 되는 것이 아니예요. 성령이 역사 해야지요. 복음자체의 생명력이 역사할 때에 구원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오묘하고 귀중한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마지막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27)"-이렇게 끝내고 있습니다.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이를 믿고, 그에게 순종하고, 그 다음에 견고케 해서 믿음을 완성케 한다는 것이지요. 바로 그의 복음 자체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믿고 한평생 그렇게 헌신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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