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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특권(요 1:10~13)

by 【고동엽】 2024. 3.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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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특권(1:1013)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데 있어서 시도한 방법이 우리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논리적으로 표현하면 귀납적 방법을 쓰지 않고 연역적 방법을 썼다는 점입니다. 다시 말하면, 예수가 하나님 되심을 설명할 때 그 분이 병을 고치시고 예언하고 소원을 들어주시며 십자가에 돌아가셨으니 하나님이라고, 즉 어떤 사건을 열거해서 그것을 근거로 하나님임을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이다, 그는 말씀이다"라고 전제해 놓고, 그러므로 그 분은 우리에게 이렇게 하셨고 그 사건은 어떤 의미가 있으며 우리를 긍휼히 여기심은 이런 의미가 있다고 풀어나가는 것입니다. 요한의 이러한 논리적인 시도를 알아야만 요한복음을 공부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11절부터 "태초에 말씀이 계셨다. 예수는 창조주다. 예수는 빛이시다"라고 먼저 전제하고, 그리고 예수의 생애를 설명하는 식으로 문맥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말씀되시는 예수님과 우리 그리고 이 세상과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관계라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내가 나를 아는 것도 우리 모두의 관계성 속에서 알아야지, 나 하나를 홀로 떼어놓고 생각하면 바로 알지 못합니다. 가령 피아노에 비유하면, 피아노 속에는 많은 철사 줄이 있습니다. 이 줄이 피아노와는 상관없이 분리되어 있으면 어디까지나 철사 줄이지 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철사 줄이 피아노 속에 조율이 되어 피아노의 한 부품이 되면 피아노와의 관계에서 이 줄은 피아노 줄이 되며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됩니다. 그래서, 피아노 속에 있는 많은 철사줄 가운데 어느 한 줄이라도 늘어나거나 끊어지게 되면 피아노는 제구실을 못하게 되므로 한 줄 한 줄이 다 귀하고 중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도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에서만 내가 나 됨의 바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가정 단위로 볼 때에도 내가 한 가정의 일원으로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형제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알게 되어야지 나 혼자만을 놓고 나를 알겠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제일 못난 사람은 "나 죽으면 그만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찌해서 나 혼자입니까? 가령, 자매가 있는 가정에서 언니가 "나만 죽으면 그만이다"라는 생각으로 자살을 했다고 가정하면, 동생의 장래(결혼 등)는 언니의 자살 사건으로 큰 방해 요인이 됩니다. 나 하나를 이해함에 있어서도 전체의 관계 속에서 의미를 찾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실도 그리스도와 나와의 관계에서 나 자신을 아는 일입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예수를 믿거나 안 믿거나 별 차이가 없으리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지만, 진리를 아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믿음이란 생명의 문제와 직결됨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그리스도와 나는 어떠한 관계인가를 찾아보겠습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10). 첫째로 예수와 우리와의 관계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입니다.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므로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독립된 목적이 될 수 없고 어디까지나 하나님만 목적입니다. , 인간은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된 자로 생각을 할 때에만 인간은 인간으로서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인간이 창조주를 부정한다든지 창조주가 되고자 하는 소위 초인간을 원하고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면, (극소수의 사람들이 노력하고 있다) 불행한 일입니다. 정신적 차원에서 이야기를 하면 그런 사람은 자살 행위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 어머니, 형제를 다 부정하고 집을 나서는 것과 같습니다. 집을 나가면 고아가 되거나 죽는 것처럼 우리는 피조물로서 오로지 하나님만을 영화롭게 하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는 존재임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둘째로 "그가 세상에 계셨다"라는 말씀은 가까이 계신 하나님을 뜻하고 있습니다. 가까이 계시는 하나님과의 관계는 어느 사건의 입장에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오셨다고 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으며, 어떤 양상으로 오셨는가에 대해서는 다음 장으로 미루고 여기서는 우리와 언제나 가까이 계시는 주님에 대해 생각하겠습니다. 예수님의 메시지 첫마디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4:17)는 말씀입니다. "가까왔다"라는 단어에서 우리는 10년 남았다 혹은 20년 남았다라고 시간적으로 생각을 합니다만, 여기서는 시간적 의미가 아니라 공간적인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로 지금 손이 닿는 곳에 하나님의 나라가 와 있다는 뜻입니다. (The kingdom of heaven is at hand.) 결론을 말씀드리면,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나라임을 설명하는 것으로 예수님을 영접하면 바로 그 곳이 하나님의 나라임을 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기다리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와 계셔서 항상 가까이 계시고 내 숨소리 보다 더 가까이 계시어 우리의 모든 것에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또한 거슬러 올라가 9절에 보면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라고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종합해 보면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시고 가까이 오시며 개별적으로 함께 하시는 분입니다.

셋째로는 우리와 함께 하시고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우리가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안다"라는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가령, 내가 상당히 소중한 물건을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어디에 두었는지 모른다면 가진 물건이지만 무효입니다. 어디 있는지 알고서야 나의 소유가 될 수 있고 그 물건의 효능이 나타나지, 모른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계시지만 계신 것을 모르면 계시지 않는 것으로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알아야 하고 또한 의식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기계를 가졌다고 하더라도 기계를 만질 줄 모르면, 그 기계는 소용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가 항상 우리와 함께 계시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의식하지 못한다면 그리스도와 우리는 아무 관계가 없습니다. , 모른다는 문제는 존재와 관계되는 일입니다. 히브리말로 "안다"라는 말의 뜻을 보면, 내가 보았다든지 머리 속에 기억하고 있는 사실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간혹 우리들은 뜻은 잘 모르면서 성경 구절을 외우는 경우가 있는데 소용이 없습니다. 알아야만 능력이 나타나고 생활 속에서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특징 중의 하나가 안다고 하는 문제를 믿음의 근거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6:68-69에 보면 베드로가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신 줄 믿고 알았삽나이다"라고 고백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믿음이 전제되어야 지식이 성립됩니다. 아인슈타인의 유명한 말 가운데 "현대 과학의 근거는 믿음"이란 말이 있습니다. , 아무리 연구를 해서 발표하더라도 의심하는 자에게는 소용이 없으며 원점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필자는 특별히 로케트를 타고 달나라나 우주 여행을 시도하는 사람들을 보면 믿음이 대단한 사람들이라 생각합니다. 수만 명이 모여서 그것 하나를 만들어 카운트다운 하면, "" 하고 굉장한 속력으로 올라가는데, 수많은 부속품 중 하나가 잘못되면 어찌되겠습니까? 목숨을 내놓은 믿음입니다. 사실, 우리 가까이 있는 자동차를 놓고 볼 때도 믿음 없이는 조금도 달릴 수가 없습니다. 사람이 만든 기계 제품이므로 실수란 언제나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이란 정말 있어야 무엇이든지 알게 됩니다. 관심 없이 본 것은 보았어도 잘못 보게 되고 일부분만 보게 됩니다. 눈이 있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만 바로 보게 되고 바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간혹 지나친 욕심에 사로잡혀 보게 되면 주관성에 매여서 상대방의 말이 들려지지도 않고 상대방의 얼굴조차도 바로 보이질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고 오셨고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 임하였지만, 믿음이 없고 사랑이 없이는 모른다는 것입니다. 죄와 욕심으로 가득차 있으면 예수님을 모른다는 말입니다.

믿음이란 무엇입니까? 본문에서는 믿음을 두 가지로 정의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1:12)를 말하고, 또 하나는 아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있습니다. 안다는 것은 영생을 뜻하며 요한복음의 주제 중에 하나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분명히 알고 넘어가야 할 문제는 믿음이란 주관적 확신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믿음과 확신을 혼돈하고 있습니다. 확신은 약속 없이 내 마음대로 생각하는 것이지만, 믿음이란 객관적 약속이 있고 그것에 대한 긍정입니다. 두 가지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브라함은 하나님께로부터 "내년에 네 아내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는 말씀을 먼저 듣고 그 말씀을 그는 믿었습니다. 말씀이 있은 다음에 믿은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약속의 말씀이 있기 전에 내 아내가 아들을 낳을 줄 믿습니다라고 자기 마음에 그렇게 되리라고 믿는 믿음은 확신일 뿐 믿음은 아니란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이 있은 다음 그것을 받아들이는 마음이 믿음입니다. , 믿음은 객관적 진리에 대한 내 편에서의 영접하는 마음이요 수락하는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찾아 헤매는 것이거나 의지의 결단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지만, 믿음은 약속을 받아들이는 수용성입니다. 성경에 보면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언니의 질투에도 개의치 않고 잘 들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받아들이는 마음이 좋아야 함은 대단히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마음, 그것이 곧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필자가 어느 여자 대학에 가서 배우자 선택에 대한 강의를 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한 학생이 질문하기를 "만약에 학장님(그 당시 필자는 대학에 있었다)께서 지금 총각으로 다시 결혼을 하신다고 하면 어떤 여자를 선택하시겠습니까?"라고 재미있는 질문을 했습니다.

저는 수용성이 제일 좋은 여자와 결혼하겠다고 대답했습니다. 수용성이란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자세로서 곧 그 사람의 인격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잠언에 있는 말씀처럼 남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대답을 하는 사람은 인격이 반밖에 안 되는 사람입니다. 필자가 늘 존경하는 한경직 목사님은 무슨 말씀을 드려도 "그럼, 맞아요. 그렇습니다. 그렇구 말구요" 라고 항상 특수한 제스츄어를 하시면서 어떤 말이든 우선 받아들이시는 분입니다. 또한 목사님의 의견과 정반대 되는 말을 했을 때는 어떻게 하시는가 하고 관찰해 보았더니 ", 일리가 있군요"라고 역시 여유 있게 받아들이셨습니다. 인격이 출중하게 높고 속이 차 있으면 어떤 말이든 우선 받아들일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갈등이 있고 콤플렉스가 있는 사람은 무슨 말만 해도 무시당하는 것 같아 여유가 없고 자연히 각박해집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라는 말은 받아들인다는 수용성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영접하지 아니하는 자가 있습니다. 빛에 그늘이 있는 것처럼 성령 훼방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는 자기 고집과 전 이해와 자기 의를 포기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자로서 이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믿음은 영접이고 영접함으로 믿는 바를 알게 됩니다. , 그리스도가 누구인가를 알게 됩니다. 믿는 눈으로 보면 예수님의 기적이 무엇인지 알 수 있고, 영접하는 마음으로 보면 예수님의 병 고치심이 무엇을 의미하는 가를 알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병을 고쳤을 때에 ", 굉장하다. 놀랍다"라고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속에 구원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 됨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믿어야 표적을 알게 되고 표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진리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가령, 선물을 받았을 때 그 선물의 진실을 믿으면 그가 나를 위하여 주었고 나를 사랑함에 감사하여 선물이 선물되지만, 만일에 믿지 않는 마음이 있으면 이것을 주고 또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하고 선물 받는 것이 괴로운 일이 되고 맙니다. 믿음이 없으면 고마운 선물은 하나도 없습니다. 선물이란 믿는 마음과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어야만 선물이 선물되고, 선물을 통해서 상대방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믿는 자에게는 특권이 있습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2). 특권이란 믿는 자에게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즉 양자 됨을 의미합니다. 본래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는 형편이지만, 이제 믿음으로써 양자 되는 것입니다. 양자 된다고 하는 말은 상속권을 의미하며 또한 자유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죄의 노예였고 악마의 노예였으며 세상의 노예였는데, 이제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 모든 것에서 자유 하게 된 것입니다. 자녀와 종(slave)은 아주 다릅니다. 종은 의무적으로 일하고 아들은 특권으로 일합니다. 농장에서 아들과 종이 함께 일하지만, 하나는 내가 아들이기에 아버지의 농장에서 일하는 즐거움이 있는데, 또 하나는 억지로 어찌하다가 끌려와서 할 수 없이 일하는 것이므로 같은 장소에서 같은 일을 하여도 마음 자세가 다르고 결과도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이기에 자유함이 있고 예수를 믿으므로 자유하게 됨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자녀하고 해서 반드시 행복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고통이 함께 있을 수도 있습니다. ,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징계와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녀보다 종이기에 육신적으로 더 행복하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만, 자녀이기에 당하는 괴로움과 종으로서 행복한 것은 차원이 틀린 행복과 불행입니다. 예를 들면, 남자들 가운데 백만원의 월급 생활보다는 오십만원의 수입이라도 좋으니 자기 사업을 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내가 창의적으로 무엇인가 해 보겠다는 생각은 남이 하는 스케줄에 그냥 따르는 것과는 전혀 다른 일입니다. 나의 세계에서 내가 일한다는 것은 자녀 적인 신분에서 하는 일입니다. 여기서 생기는 고통은 자녀에게 속하는 것이고 곧 특권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된 형제관, 자녀된 세계관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믿으면 믿는 순간 우리의 모든 생활의 의미는 달라집니다. 나에게 주어진 모든 여건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주어진 것으로 저주나 죄의 결과가 아닌 사랑이라고 소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 됨의 세계관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 됨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1:13)라고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유대 사람들의 의식에 대한 반박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랑하고 특권을 가졌음에 교만하여 심지어는 이스라엘인은 아무리 가난하여도 모두가 귀족이고, 이스라엘 사람 중에는 지옥 갈 사람은 하나도 없다라고 말하는 랍비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지만, 성경에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자녀 됨은 민족관이나 전승이나 우연적인 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영접하고 믿는 자들에 한해서 개인적으로 이루어짐을 밝히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육정으로 나지 않았다는 말의 뜻은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 수양에 의해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실지로 내 아들이 그가 내 아들이 된다는 것은 그가 어떤 의지나 교양을 갖추었기 때문에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벌써 그 이전에 아들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먼저 아들 되어서 아들로 키워나가는 것이지 내 아들답기 때문에 아들이라고 부르는 것은 아닙니다. 어느 부모가 자격시험을 보아 자녀로 선택합니까? 먼저 태어난 다음에 아들다운 사람으로 키워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자아의식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도 혈통이나 인간 의지 수양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로 난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있는 것입니다. 믿으면, 권세도 지식도 하나님의 자녀 됨의 자아의식도 주십니다. 신비로운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3-4에 보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고 택하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오직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인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으면 이럴 것이다, 저렇게 될 것이다라고 미리 추측할 것 없이, 믿으면 그 순간 상상밖의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공도 사랑이요 실패도 사랑이며, 건강도 사랑이요 질병도 사랑이라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자녀된 입장에서 이해하게 됩니다. 정말, 믿음은 신비로운 것으로써, 여기에는 놀라운 능력이 나타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온통 사랑의 관계로 바꾸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특권입니다. 그 이름을 영접하고 믿는 자에게 이런 특권이 주어짐을 알고 이 특권을 누리는 생활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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