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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이 없는 세대(마가복음 9장 14~29절)
저희가 이에 제자들에게 와서 보니 큰 무리가 둘렀고 서기관들이 더불어 변론하더니 온 무리가 곧 예수를 보고 심히 놀라며 달려와 문안하거늘 예수께서 물으시되 너희가 무엇을 저희와 변론하느냐. 무리 중에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벙어리 귀신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귀신이 어디서든지 저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하여 가는지라. 내가 선생의 제자들에게 내어쫓아달라 하였으나 저희가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는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그를 내게로 데려오라 하시매 이에 데리고 오니 귀신이 예수를 보고 곧 그 아이로 심히 경련을 일으키게 하는지라. 저가 땅에 엎드러져 굴며 거품을 흘리더라. 예수께서 그 아비에게 물으시되 언제부터 이렇게 되었느냐 하시니 가로되 어릴 때부터니이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예수께서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이에 일어서니라. 집에 들어가시매 제자들이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이르시되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類)가 나갈 수 없느니라 하시니라.
오늘의 본문에서도 역시 기적은 믿음과 함께 역사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기적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이 현상으로 나타나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있는 자에게, 믿음이 있는 곳에, 믿음이 있는 시간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있음을 보아왔습니다.
그래서 예컨대 가버나움의 어떤 집에 예수님께서 계셨습니다. 중풍병들린 사람을 친구들이 메고 와서 보이려고 했습니다마는 사람들로 가득차 있어서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친구들은 침상째 그 집의 지붕을 뚫고 달아내려 예수님 앞에 닿을 수 있도록 합니다. 그들의 수고를 가상하게 여기신 예수님께서 "저들의 믿음을 보시고," 그 일이 너무 아름다운 일이기에, 저들의 믿음으로 된 일이기에 긍휼히 여기시고 그 환자의 병을 고쳐주셨다는 것입니다. 또한 수로보니게 여자의 귀신들린 딸을 고쳐주신 것도 그렇습니다. 본인은 정신이 없습니다. 귀신들린 어린아이에게 무슨 정신이 있습니까? 본인의 믿음이 아니었습니다. 그 어머니가 참 귀한 믿음을 가졌던 것입니다. 여러 가지의 핍박과 어려움, 무시를 당하는 굴욕을 다 극복하고 끝까지 예수님 앞에 나아와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호소합니다. 예수님은 그 어머니의 믿음을 보시고 딸의 병을 고쳐주십니다. "네 믿음이 크도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될 것이 있습니다. 치유 받는 자의 믿음, 병고침 받는 자의 믿음입니다. 본인에게 믿음이 없다면 그를 위하여 그를 사랑하는 자가 대신기도하고, 그 기도하는 사람, 간구하는 사람에게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에도 기적은 나타났습니다. 치유 받는 편에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본문은 각도가 전혀 다릅니다. 여기서는 치유하는 자의 믿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하시는 일이야 별문제가 되겠습니다마는, 아니, 거기도 관계가 되는 줄 압니다마는 아무튼 오늘의 본문에 나타난 내용은 치유하는 자, 곧 남의 병을 고친다던가 누구를 위해서 기도한다던가 특별한 능력이 나타나길 간구한다던가 하면, 거기에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고서야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 능력이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본문의 주제는 '사역자의 믿음'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믿음이 있을 때에만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 본문의 핵심입니다.
그 믿음이 어떤 믿음이어야 합니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의 믿음이 어떠해야 합니까? 첫째,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화당장인 야이로, 그는 참으로 난처한 처지에 있었습니다. 열두 살난 딸아이가 죽어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 나아와 딸의 병을 고쳐달라고 하면서 저희 집에 오시기를 간구합니다. 예수님이 그 집을 향하여 가시는 도중에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이 마주 와 아룁니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자, 이제 예수님을 모시고 가야 합니까, 아니면 딸은 이미 죽었으니 말아야 합니까? 난처한 처지에 있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여기서 우리가 무엇을 생각해야 합니까?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기도도 하고, 애도 쓰고, 수고도 하였습니다마는, 그 다음 일은 못합니다. 이제는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합니다. 바다를 움직이시는가하면, 바람을 움직이십니다. 하늘에서 유황불을 내리시고, 사람으로 물위를 걷게 하십니다. 구름기둥도 세우시고 불기둥도 세우시는 하나님입니다. 죽은 자라도 살리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둘째,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믿음입니다. 나로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나타나서 되는 일이라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신 일,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그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할 때에 우리도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믿음이 필요합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한 일이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에서 고백합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13절)." 옛날 번역에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였습니다.
모든 것이 믿음 안에서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능력 주시면 불가능한 것이 없습니다.
셋째,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나는 허물도 많고 부족하기 짝이 없습니다마는 하나님은 나와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높은데 계십니다마는 또한 낮고 천한 나와도 함께 계십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를 주관하십니다마는 아주 적은 나와도 함께 계십니다. 나를 구속하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믿음, 나와 동행하신다는 믿음입니다. 여호수아가 그 믿음으로 가나안을 정복합니다. 아브라함이 그 믿음으로 고향을 떠납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다.' 야곱이 그 믿음을 가지고 낯선 길을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계심을 믿기에 그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넷째, 이제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실 때에 그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사건이 있고 나타나는 능력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나의 의도로, 나의 경건으로, 나의 도덕적 정결함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라는 믿음입니다.
사도행전 3장 12절에 보면 베드로의 유명한 고백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사람을 성전 미문에서 일으킨 다음,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를 경의에 찬 눈으로 바라봅니다. '야, 굉장하다. 베드로 참 위대하구나'----우러르고 추앙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베드로가 참믿음에서 우러난 한마디 말을 합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들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이 얼마나 깨끗한 말입니까? 얼마나 진실한 말입니까? '우리를 쳐다보지 말라.
예수의 이름으로 이사람이 나았으니 예수님을 쳐다볼 것이지 왜 나를 쳐다보느냐? 나의 의도 아니고 나의 경건도 아니다'라는 것입니다. 내 개인의 경건이 훌륭해서 기적이 나타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깨끗한 겸손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믿음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종종 기적을 나타내던가 무슨 일을 하게 되면 내가 한 줄로 착각을 합니다. 잘못입니다. '어찌하여 나를 쳐다보느냐? 예수를 쳐다 보라.' 내가 예수의 이름으로 이 사람을 걷게 했으니 예수님이 고치신 것이지 내가 고친 게 아니다-중요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구원받지 못한 심령들이 하나님 앞에 가서 심판 받을 때에, 이미 천국 문이 닫힌 다음에 이렇게 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주여, 문을 열어주옵소서. 우리가 주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쫓고 우리가 주의 능력으로 이적을 행했습니다. 우리는 주를 길거리에서 가르쳤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좋은 일을 하였으니, 문을 열어달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에서는 모른다고 할 것이라 하십니다. 제 생각에는 정말로 그럴 것 같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일을 하였습니다. 귀신도 내쫓았습니다. 능력도 행하였습니다. 어쩌면 많은 사람을 전도하여 구원받게 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천국 문은 열리지 않습니다. 죄송하지만 저보고 예수님 대신 문 밖에서 떠드는 사람들에게 한마디하라면 이렇게 말하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고친 것은 내가 고친 것이지 네가 고친 것이 아니다. 어찌 네가 고친 것처럼 떠드느냐?' 예수님의 이름을 불러서 병이 나았다면 그건 예수님께서 고치신 것이지 내가 고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의 의도가 아니요 나의 경건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이 점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기적이 나타난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나의 의도나 나의 경건에 의한 것이 아니다 라고 하는 겸손한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다섯째,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신다고 하는 믿음입니다. 나를 사용하셔서, 나를 통하여 하나님은 역사하고 계십니다. 나는 하나의 그릇으로, 하나의 도구로, 하나님의 능력의 도구로만 쓰임 받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사역자의 믿음입니다.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행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교만할 것도 자랑할 것도 없습니다.
여섯째. 믿음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믿음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혹 칭찬을 받을 때나 영광을 받는 순간에도 이 확실한 믿음은 변동이 없어야 합니다. 모세가 여기서 실수를 합니다. 사십 년 동안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능력을 행사하며 살아왔습니다 마는 어느 한순간에 실수를 합니다. 민수기 20장 10절에 보면 "패역한 너희여 들으라.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안될 말씀입니다. 언제 모세가 물을 냈습니까? 40년 동안에 많은 기적을 행하였습니다마는 모세가 한 것은 없습니다. 모세는 다만 심부름을 한 것이요, 하나님이 물을 내셨고 모세는 반석을 쳤을 뿐입니다. 그것도 치라고 하실 때에 친 것입니다. 모세가 물을 내게 한 것은 아닙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겸손을 지켜가기 위하여 끝까지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 없이는 이 믿음이 지속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자세히 보십시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이미 마가복음 6장 7절로 13절에서 이적을 행한 경험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둘씩 파송하셨을 때에 예수님의 능력을 받아 가지고 나가서 이적을 행했습니다. 귀신을 내쫓기도 하고 병자를 고치기도 했습니다. 저들의 생각에도 참으로 희한합니다. 그들은 돌아와 서로들 자랑합니다. '예수님, 내가 귀신에게 명하니 나갑디다. 병자들에게 한마디 하니까 병자가 일어납디다. 아, 그거 참 희한합디다.' 서로서로 병자를 고쳤다느니, 문둥병 자를 깨끗하게 했다느니, 귀신을 내쫓았다느니 하며 앞다투어 한마디씩 자랑을 합니다. 이때에 예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귀신이 네게 순종했다고 하여 기뻐하지도 말며, 이적을 행했다고 기뻐하지도 말라. 다만 너희 이름이 하늘나라 생명책에 기록된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라.' 하나님의 일을 심부름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큰 역사에 내가 얼마간의 보탬이 되었다는 그 사실이 중요한 것입니다. 병 낫게 한 능력 자체도 내 것이 아니요, 병 나은 그 사람이 다시 병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 사람이 그 병 나은 것으로 인하여 좋은 사람이 될 것인지, 그것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너희가 하나님의 능력에 붙들리어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일했다는 것 자체로만 기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대단히 중요한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나아가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내쫓은 일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것입니까? 세 가지를 들 수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 가라하셨습니다. 가서 귀신을 내 쫓으라, 복음을 전파하라고 말씀하셨기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아무 때나 되는 게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였습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 저들을 보내셨고 쓰셨습니다. 주님의 능력이 이 제자들을 통하여 나타난 것입니다. 등뒤에 주님의 조종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의 능력이 저들을 통해 나타난 것입니다. 뒤에서, 영적으로 주님이 하신 것이요. 제자들은 단지 나가서 심부름만 한 것입니다. 쓰임 받은 것입니다. 셋째, 제자들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나가라 하시니 나갔습니다, 자신이 없었습니다마는 '귀신아, 나가라'라는 말을 하라고 하니 그대로 했을 뿐입니다. 자신이 있어서 한 것이 아닙니다. 병자를 두고 누가 감히 '일어나라'라는 말을 할 수 있습니까? 말도 안 되는 일입니다. 망신당하기 알맞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명령하신 대로 순종합니다. 주님이 보냈고, 주님이 쓰셨고, 저들이 순종했고-그래서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깊이 생각할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은 분명히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하나님의 사역을 이룬 경험이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능력 행하는 자가 된 것은 아닙니다. 능력 행하는 특별한 라이센스를 받은 것도, 면허증을 받은 것도 아닙니다. 능력을 행하는 자, 능력자가 된 것이 아니요 다만 고용되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에 고용된 것뿐입니다. 미국의 캐서린 쿨만이라는 분은 많은 능력을 행하고 병을 고치는 분입니다. 그분에 관한 책도 많이 나와 있다고 합니다마는 저는 읽어보지 못했습니다. 한번은 텔레비전에서 이적 행하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병자들을 앞에 세워놓고 하나씩, 하나씩 안수하면서 고치는 장면을 보았는데, 많이 낫습디다. 평생 귀한 일을 많이 했습니다. 그는 능력을 행하는 특별한 은사를 받은 분이었습니다. 그런데 본인은 병들었을 때, 병원에서 수술을 받았습니다. 수술을 받고 치료받다가 얼마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수술 받은 게 잘한 일이냐, 잘못한 일이냐? 말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결론은 간단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쓰임 받은 것일 뿐, 캐서린 쿨만이라고 하는 사람이 능력의 사람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점을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능력 행하는 특별한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누구를 통해서든지 능력을 행하실 수 있습니다. 마치 내가 능력 행하는, 특별히 지명된 자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착각입니다. 다만 고용되고 있을 뿐입니다. 또한 한번 능력을 행했다고 해서 계속적으로 능력을 행할 수 있다고도 생각하면 안됩니다. 내가 오랫동안 능력을 행해왔다고 해서 이제는 나 스스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내가 내 마음대로 능력을 행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능력을 내가 소유한 것처럼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바로 이 점에서 실수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제자들이 큰 실수를 합니다. 예수님과 세 제자는 지금 변화산에 올라가 있고, 아홉 제자가 산밑에 있었습니다. 아마도 예수님께서 변화산에서 기도하고 계실 때에 이 사람들은 산밑에서 잠이나 쿨쿨 자고 잡담이나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침이 밝아올 때에 예수님께서 내려오십니다.
산밑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이 계시지 않은 그때에 제자들이 으쓱해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고 높이 존경하는 예수님, 그 예수님의 제자라고 '어깨에 힘을' 준 것입니다. 그때 마침 귀신들린 어린아이를 데리고 온 아버지가 있었습니다. '선생님들, 이 어린아이가 지금 벙어리귀신 들렸는데 좀 고쳐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놈은 귀신에 붙들리어 발작을 하면 불 속에도 들어가고 물 속에도 들어가고 제 몸을 찔러서 피도 냅니다. 아주 불쌍한 아이이니 좀 고쳐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아버지가 제자들에게 간청합니다.
"이제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실 때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고칠 수 있을 것입니다. 잠깐만 기다리시오." 이랬으면 얼마나 좋았을 것입니까? 그런데 이들은 건방지게 며칠전에 해본 경험으로 이리 데려오라 합니다. 며칠전의 경험으로 자신만만하게 이리 데려오라고, 문제없다고 나섭니다. 안드레가 그랬는지 빌립이 그랬는지, 하여튼 누가 먼저 나섰는지는 모르지만 아마도 '예수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놈의 귀신이 안나갑니다. 그러니까 안드레가 나섭니다.
'가만있어봐, 나사렛이라는 말이 빠져서 그런가보다. 나사렛 이름으로 명하노니 나가라.' 역시 안나갑니다. 주문(呪文)이 잘못됐나 하여 별소리를 다 해봅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다 해보았습니다마는 누구도 못 고쳤습니다. 참으로 망신스러운 일입니다. 사람들이 웅성웅성 변론을 합니다.
'이 사람들이 능력이 있냐 없냐' '예수가 누구냐?' 이렇게 되고 보니 귀신들린 어린아이의 아버지는 실망을 합니다. '아이고, 마지막으로 하나 기대어봤더니 이마저 안 되는구나, 이제 우리 아이는 버렸구나.' 낙담이 됩니다.
무능한 제자들로 예수님께 까지 누를 끼치게 되었습니다. 제자 잘못 두면 선생이 망신당하게 마련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식 잘못 두면 부모가 망신당하게 됩니다. '그 예수라고 하는 사람이 능력을 많이 행한다고 하더니 시원치 않구만'-이렇게까지 올라가는 것입니다. 모르기는 해도 십중팔구 그랬을 것입니다. '제자는 못했지만 예수님은 할 수 있을는지도 몰라' '제자 보면 스승을 알지. 예수 선생도 못할 거야.' 이런저런 이야기로 지금 와글와글하고 있습니다. 이런 소란 속에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습니다. '왜들 떠드느냐?' 그때에 어린아이의 아버지가 불쑥 나타나 자초지종을 이야기합니다. '이 어린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못 고쳤습니다. 당신의 제자들이 못 고쳤습니다.' 그 다음 말이 아주 가슴 아픈 소립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이미 의심이 스며들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모든 의사에게 속았습니다. 모든 우상에게 속았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속았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에게까지 실망을 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이라고 백퍼센트 믿을 수 있겠습니까? 반신반의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불쌍히 여기고 도와주시지 바랍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책망하시듯 말씀하십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자, 보십시다. '할 수 있거든'이라는 이 의심을 예수님은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인간으로 볼 때에 습관적이고 타당한 의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속기만 하고 실망을 해왔는데 이제 와서 예수님만을 예외로 믿을 수 있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사람의 의심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책망하십니다. 그때에 어린아이의 아버지가 말합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두려워하며 말합니다. 이 말을 깊이 생각해보십시다. 이 사람은 이미 무엇을 할 수 있거든 도와달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순간에는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라고 합니다. 이것이 말이 되지 않습니다. 합리적으로 말하려면 이렇게 해야 되었을 것입니다.
믿고 싶습니다. 나의 부족한 믿음을 도와주소서.' 그러나 이 사람은 지금 경황이 없습니다. 제정신일 수가 없는 시간입니다. 분명히 실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였는데 예수님은 그 실망을 책망하고 계십니다. 어린아이의 아버지에게는 지금 어린아이를 꼭 고쳐야 하겠다는 간절한 사랑이 있습니다. 당황한 중에 '믿습니다. 주여,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세요'라고 말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어린아이를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고쳐주십니다. 귀신을 내쫓는 장면은 우리가 이미 많이 보았기에 다시 설명을 붙이지는 않겠습니다.
문제는 어디에 있습니까? 제자들이 문제입니다. 집에 들어가시자 제자들이 조용히 묻습니다. 저들은 망신만 당했는데, 예수님이 고치시는걸 보니 참 이상하단 말입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지 예수님께 여쭈어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찌하여 능히 그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였나이까?" 제가 조금 주(註)를 달아보겠습니다. 이 제자들이 하는 말은 한 마디로 '며칠 전에는 되었는데 오늘은 왜 안되었습니까?'하고 묻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에게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믿음이 어느 정도라고 생각하십니까? 어느 정도의 믿음을 유지하고 있는 것입니까? 깊이 반성해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이 없으면서 믿음이 있거니 착각하는 것처럼 잘못된 것도 없습니다. 제가 학교에서 몇십 년 동안 가르치면서 보아온 것입니다. 1학년 입학했을 때에는 다 공부 잘하는 것 같습니다. 전부들 단정히 넥타이 맨 것을 보면 당장에라도 훌륭한 목사가 된 것 같습니다. 공부할 때를 보아도 다 잘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학기가 지나고 학기말시험을 보고 나면 코가 절반쯤 빠집니다. 두 학기 들어가서 어려운 시험 한번 치르고 나면 "목사님 이거 안되겠는데요" 합니다. 비로소 겸손해지기 시작합니다. 여러분, 시험보기 전에야 다 공부 잘하는 것 같습니다만 어려운 시험을 치르고 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내가 실력이 있는 줄 알았는데 오늘 보니 형편없는 것입니다. 믿음도 그렇습니다. 내게 믿음이 있는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믿음이 없습니다. 어느 사이에 믿음이 빠져나가 있더라는 말입니다. 이 점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아직도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마음대로 착각하지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능력이 없으면 믿음 없는 것입니다. 귀신도 말을 안 듣는데 되겠습니까? 귀신이 못 알아봅니다.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능력이 없는 것은 바로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개탄의 말씀을 하십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여." 바로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믿음이 없는 세대 속에서 그만 믿음 없는 것이 체질화 되어버렸습니다. 믿음 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오늘도, 믿음이 있다고 자칭하는데 행하고 행동하는 것을 보면 한푼 어치의 믿음도 없는 것을 봅니다. 교양도 있는 것 같은데 실은 없습니다. 인격이 있는 것 같은데 실은 인격이 한푼 어치도 없습니다. 상식 이하입니다.
어쩌면 이렇게까지 비참하고 처절한 인간이 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므로 깊이 생각해야 됩니다. 이제 예수님 앞에 나아와 묻습니다. '얼마 전에는 내게 능력이 있었고 믿음도 있었는데 왜 오늘은 이렇게 된 것입니까?'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기도 없이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 것입니다. 계속적으로 기도하지 않으면 믿음을 지속할 수 없습니다. 믿음 있다고 큰소리를 치고 기도는 하지 않는다면 안될 말입니다. 믿음은 내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능력은 내 것이 아닙니다.
나를 통하여 역사 하시는 것입니다. 내겐 믿음이 없습니다. 믿음은 기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기도의 줄이 하나님과 닿아 있어야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 생각해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을 놓고 가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무 데서나 기도하면 되지, 꼭 교회에 나와야 되나? 집에서 기도해도 되는 거지.' '꼭 엎드려서 기도해야 되나, 앉아서 기도하면 되지. 누워서 기도해도 되지. 자면서 기도하면 어때?' 다 쓸데없는 소립니다. 이스라엘사람들은 안식일을 지키는 것에는 아주 엄격했습니다. 안식일에는 반드시 집을 떠나야 되었습니다. 내 집에 앉아 지키는 것은 안식일이 아닙니다. 절대로 허락지 않았습니다. 어떤 경우에든 회당이 없으면 하다못해 강가나 산기슭으로라도 나가야 했습니다. 혹은 남의 집에라도 갔습니다. 열 집이 모이면 회당인 것입니다. 열 집만 모이면 예배를 드렸습니다. 집안에 있으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닙니다. 만일에 아무도 없으면 혼자서라도 자리를 옮겨야 됩니다. 여기에는 대단히 중요한 심리학적 의미가 있습니다. 제자리에 앉아서 눈만 감으면 기도라고 생각하지 마십시다. 잠자리에 있다가 몽롱한 가운데, 아직도 꿈에서 깨어나지도 않은 가운데 일어나 앉아서 기도한 것으로 기도했다고 자처하지 말 것입니다. 몇 시간을 엎드려 있다 해도 그것은 기도가 아닙니다.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일어나 세수하고 옷 입고, 바른 자세를 취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기도가 아닙니다. 분명히 하십시다. 스스로 속이지 마십시다. 그래서 성전이 중요한 것입니다. 잠자리에서 기도해보았으면 알 것입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고 깼다가 졸다가 합니다. 어이 기도가 되겠습니까? 술 취한 사람처럼 몽롱하여 이 소리 저 소리 하는 것이 무슨 기도입니까? 단 한마디를 해도 기도답게 해야 합니다. 우리 교인들이 새벽기도 나오는데, 가만히 보니까 요 며칠 사이에 가장 많이 나오는 것 같습니다. 나와서도 따져보면 기도를 5분밖에 안 합니다. 시간적으로 5분밖에 안됩니다 마는 그 5분 아니 1분을 해도 그 기도가 훌륭한 기도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야 됩니다. 예수님께서 자리가 없어서 변화 산까지 가신 줄 아십니까? 장소가 모자라서 겟세마네 동산까지 가신 것입니까? 왜 한적한 곳을 찾으셨습니까? 아무 데서나 눈감으면 기도일 터인데, 그것이 아닙니다. 장소와 시간을 분명히 해서 기도해야 됩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느니라." 왜 시험에 빠졌습니까? 기도 안 했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왜 예수를 모른다고 했습니까? 기도 안 했기 때문입니다. '기도 없이는 믿음이 없고 믿음 없이는 능력이 없느니라.' 어제 있던 믿음이라도 오늘은 없고, 어제 행한 능력이 있고, 엄청난 업적이 있더라도 오늘은 아닙니다. 기도하지 아니한 오늘은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루터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내가 아침에 두 시간을 기도하지 아니하면 그날은 마귀에게 지는 날이다.' 기도하지 아니한 그날은 마귀가 이긴다고 합니다. 얼마나 절실한 경험에서 나온 고백입니까? 죄가 있다면 가장 큰 죄요 무서운 죄가 기도 안한 죄입니다.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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