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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갑옷을 벗으라 -마가6:1-6

by 【고동엽】 2022. 7. 3.
마음의 갑옷을 벗으라
마가6:1-6
(2000/7/9)

예수의 행적에 대한 반응: 놀람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의 반응은 대체로 일치합니다. '놀람'입니다. '놀람'이란 어떤 외부의 자극에 대한 정서적인 반응입니다. 사람은 느닷없는 충격을 받을 때 놀랍니다. 맥을 놓고 있는 데 누가 등을 탁 치면 깜짝 놀라죠? 또 누군가가 우리의 예상을 깨고 놀라운 성취를 이루었을 때 사람들은 놀랍니다. 만일 우리나라 축구 선수들이 월드컵에서 우승했다 생각해보세요. 모두가 놀라움을 금치 못할 겁니다. 그런 외적 자극에 의한 놀람 말고, 내적인 자극에서 오는 놀람도 있습니다. 먼저 자기 존재에 대한 자각에서 오는 놀람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날 갑자기 자기의 존재가 낯설어지는 것을 여러분도 한번쯤은 경험해 보셨을 것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남이 아니라 나인가?" 이런 놀람이 철학의 시작이라지요? 또 자기와는 완전히 다른 낯선 존재를 만날 때 사람들은 놀랍니다. 예수님과 만난 사람들이 놀랐다는 것은 아마도 이런 경우가 아닌가 싶어요. 거칠게나마 성경의 맥락을 따라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버나움 회당에서 첫 설교를 하셨을 때 의 반응을 마가는 이렇게 전하고 있습니다.

"뭇 사람이 그의 교훈에 놀라니 이는 그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일러라."(1:22)

여기서 말하는 '권세'는 '본질적인 것에 맞닿아 있음에서 오는 내적인 힘'을 말하는 것일 겁니다. 배워서 아는 지식이 아니라, 뭔가 본질적인 것을 꿰뚫어보고 그것을 전하기에 사람들은 예수님의 말을 통해 하늘을 경험했던 것입니다. 회당에서 귀신을 쫓아내시자 사람들은 또 수군거립니다.

"다 놀라 서로 물어 가로되 이는 어찜이뇨, 권세 있는 새 교훈이로다. 더러운 귀신들을 명한즉 순종하는도다."(1:27)

며칠 후 가버나움의 어느 집에 계실 때, 사람들이 중풍병자 한 사람을 침상 채로 예수님께 데려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께 접근할 수 없자 그들은 지붕으로 올라가, 지붕을 뜯고, 그를 달아내렸다지요? 예수님은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그를 고쳐주셨어요.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반응을 마가는 이렇게 전합니다.

"저희가 다 놀라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며 가로되 우리가 이런 일을 도무지 보지 못하였다."(2:12)

이것은 다 유대인의 땅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활동은 유대인의 경계를 넘어 이방인의 지역에까지 확장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호수 건너편 마을로 가십니다. 주님은 곤하여 주무시고 계셨어요. 그런데 큰 풍랑이 일어나서 배가 침몰할 지경인 데도 예수님은 일어나지 않으십니다. 참 부러운 잠입니다. 설핏만 해도 깨는 이들의 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그 잠은 새로운 창조를 위한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두려움에 떨던 제자들은 주님을 흔들어 깨웠어요. 살려달라는 거지요. 잠에서 깨어난 예수님은 즉시 바다에게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셨어요. 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대요. 그 광경을 본 제자들이 또 수군수군 합니다.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4:41)

예수님에 대한 놀람은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침내 이방 땅, 거라사인의 땅에 이르렀을 때 귀신들린 사람이 나와 예수님을 맞이합니다. 그가 어찌나 광포한지 사람들은 그를 쇠사슬로 묶어 무덤 사이에서 살게 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사람 취급을 안 한 거지요. 예수님은 그 사람에게서 군대 귀신을 쫓아내셨어요. 그런 일이 있자 그 지역 사람들은 예수라는 낯선 분에 대해 두려움을 느꼈어요. 그래서 자기 마을에서 떠나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이 그 마을을 떠날 때 귀신에게서 해방된 사람이 자기를 데려가 달라고 할 때 주님은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 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 하셨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행하신 큰 일을 데가볼리에 전파했습니다. 마가는 그 일을 전해들은 모든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다고 전합니다(막5:20).

예수님은 다시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 갈릴리로 돌아오셨습니다. 갈릴리로 돌아오셔서 열 두 해를 혈루증에 시달리던 여인을 고쳐주시고, 죽었던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셨습니다. 마가는 그 일을 경험한 사람들의 반응을 간결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곧 크게 놀라고 놀라거늘"(5:42)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동선을 잘 살펴보아야 해요. 갈릴리→바다→이방 땅→갈릴리로의 귀환. 예수님이 가시는 곳마다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드러났어요. 주님의 활동 반경이 점점 커지면서, 그에 따라 사람들의 놀람도 커지고 있음을 알 수 있어요. 그런데 결정적인 장애가 나타나요. 그건 예수님의 고향 마을에서 일어납니다.
고향: 새로움의 무덤
예수님은 고향에 가셨어요. 그들에게도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싶었겠지요. 내가 이 정도요, 하고 과시하려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고 자라난 고향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을 겁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되어 회당에 들어가셨습니다. 낯익은 환경, 낯익은 얼굴들을 보면서 참 반가웠겠지요?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마침내 성경 말씀을 근거로 해서 깨달음을 나누는 시간이 되었을 때, 예수님은 일어나 고향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 내용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친절한 마가는 사람들의 반응을 우리에게 전해줍니다. 한마디로 '놀람'입니다.

"이 사람이 어디서 이런 것을 얻었느뇨, 이 사람의 받은 지혜와 그 손으로 이루어지는 이런 권능이 어찌됨이뇨?"(6:2)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어요. '이 사람'이라는 호칭입니다. 이것은 한 자락 깔고 하는 표현이에요. 우리는 '이 사람'이라는 말에서 눈을 아래로 내려깔고 바라보는 거만한 시선을 느낄 수 있어요.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분명 놀랍고 심원해요. 하지만 그는 자기들이 잘 아는 사람이잖아요. 인정하기 싫은 거예요. 그들도 주님이 행하신 권능에 놀랐어요. 하지만 그 일조차 다른 누구의 손도 아닌 '그 손'으로 이루어진 일이기에 마땅치 않은 거예요. '그 손'은 어떤 손인가요? 목수의 투박한 손이에요. 굳은살이 박히고, 망치에 찧어 손톱에 멍이 들고, 나무에 찔려 곳곳에 생채기가 난 거칠기 이를 데 없는 손이에요. 손처럼 표정이 풍부한 몸의 지체가 없어요.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알려면 그 사람의 손을 보면 돼요. 하지만 우리는 손의 언어를 왜곡할 때가 많아요. 노동으로 단련된 거친 손을 볼 때와 마디 없는 고운 손을 볼 때 자세가 달라요. 여러분, 예수님의 손은 분명히 투박했을 거예요. 투박한 손 때문에 예수님은 지금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해요.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있지 아니하냐?"(6:3)

에이브러햄 링컨은 구두 만드는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명문 가문의 사람들은 당황했고, 화가 났습니다. 상원에서 취임 연설을 하는 날 그가 단상에 서자 한 사람이 일어나 말했습니다.
"미스터 링컨, 어쩌다 당신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긴 했지만, 예전에 당신의 아버지와 함께 우리 식구들의 구두를 만들어 주기 위해 우리 집을 드나들곤 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주기 바라오. 또 여기에는 당신의 아버지가 만든 구두를 신고 있는 상원의원들이 많이 있소. 그러니 당신의 출신을 잊지 마시오."
링컨에게 모욕을 주려는 것이었겠죠? 하지만 링컨은 그것을 모욕으로 접수하지 않았습니다. 열등감에 시달리는 소인배만이 그런 말에 상처를 입게 됩니다. 오히려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상원에서 첫 연설을 하기 직전에 나에게 나의 아버지를 생각하게 해주어서 감사합니다. 나의 아버지는 매우 멋지고, 창조적인 예술가였습니다. 아버지보다 더 아름다운 구두를 만들 줄 아는 사람은 세상에 없습니다. 내가 앞으로 어떤 정치를 하든, 내 아버지만큼 위대한 사람이 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잘 압니다. 나는 결코 나의 아버지를 능가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당신들 귀족 여러분에게 한 가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만일 나의 아버지가 만들어 드린 구두가 여러분의 발에 잘 맞지 않거든, 나도 아버지에게서 배운 기술이 조금 있으니 나에게 말씀하십시오. 나는 훌륭한 제화공은 아니지만, 최소한 여러분의 구두는 수선해 드릴 수 있습니다. 연락만 주십시오. 그러면 언제라도 여러분의 집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전능자의 무능
사람들은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어요. 그는 자기들의 가구를 만들어주고, 부숴진 문짝을 고쳐주는 솜씨 좋은 목수로 머물러야 했던 거예요. 그들은 예수님을 배척했어요(They would not accept him: Darum wollten sie nichts von ihm wissen)." 이 말은 그들이 예수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는 말이고, 그에게 아무 것도 배울 생각이 없었다는 말입니다. 마음이 꼭꼭 닫힌 겁니다. 여기서 마가는 상당히 중요한 말을 하고 있어요.

"거기서는 아무 권능도 행하실 수 없어 다만 소수의 병인에게 안수하여 고치실 뿐이었다"(5)

병든 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쫓으시고, 풍랑을 잠잠케 하시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도 할 수 없는 일이 있었던 겁니다. 닫혀진 사람들의 마음 문을 여는 것은 못하셨어요. 마음에 빗장을 지르고 있는 사람은 하나님도 어쩌실 수 없습니다. 그 사람을 '안다' 하는 못난 자부심, 서열을 뒤바꿀 수 없다는 폐쇄성이 결국은 구원의 기회를 잃게 만들고 있습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다가 두려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오늘의 교회가 예수님의 고향 마을 구실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예수님에 대해서라면 다 알고 있다는 생각에서, 예수님을 제한하고 있지는 않은가? 주님은 분명히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당신의 구원의 일을 계속하고 계신 데, 교회에서만큼은 당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시는 것 아닌가?

우리는 거듭거듭 예수님을 향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합니다. 그 낯선 존재 앞에 겸허히 서서 변화받기를 두려워하지 않을 때 비로소 우리는 삶이 새로워짐을 맛볼 수 있습니다. 잠언의 지혜자는 말합니다.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잠3:6)


   
등 록 날 짜 1970년 01월 01일 09시 33분 2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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