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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의 가정 1. 최고의 자녀 사랑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I. 들어가는 말
우리가 죽은 후에도 자녀에게 존경받고 사랑받기를 원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심리적으로 인간에게 자녀는 자기 존재의 연속이다. 그래서 공부를 못했던 부모가 어떻게 하든지 자식을 공부시키려고 하고, 못생긴 부모가 자녀에게 성형 수술이라도 시키려고 하고, 가난한 부모가 자녀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주어 편안한 삶을 살게 하고 싶은 것은 어떤 면에서 부모의 자기 사랑의 발로이다.
지혜자는 우리에게 ‘마땅히 행할 것을 아이에게 가르치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내 자식에게 많은 재산을 물려줄까하고 고민한다. 이 아이가 다른 사람들에게 지배받지 않고 도리어 지배하며 살게 하려면, 이 정도는 교육시켜야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는 마땅히 아이에게 무엇을 가르칠까하는 그 기준을 문제 삼고 있다. 우리가 이 기준을 바로 정립하고 있을 때, 자녀도 바르게 교육할 수 있다.
II. 빗나간 자녀사랑
사실 오늘날 빗나간 자식 사랑이 문제이다. 위로는 부모를 공경하여 드리고, 아래로는 자식을 자애롭지만 엄격하게 가르쳐야 아이들이 올바로 자랄 수 있다. 우리는 대개 올리 사랑은 없고 내리 사랑만 하는데, 이 사랑은 공정하지 않고 빗나간 자식 사랑이다.
60, 70년대에는 아이들이 참 많이 태어났다. 제가 자라던 때에는 자식이 한 다스가 되는 집도 많았어요. 그런데 요즈음은 아이들을 한 둘만 낳아서 애지중지하며 키운다. 그러다보니, 부모가 한번만 잘못해도 부모를 죽이는 천인공노할 범죄가 일어나기도 한다. 먼저 우리가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는 모습을 보여주면, 자식도 또한 이것을 보고 교훈을 얻는다. 부모가 자식에게 잘 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는 듯하지만, 자녀에게 불행의 씨앗을 심어 주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 사랑은 어느 정도 눈이 멀게 하는 경향이 있다. 사람이 일단 누군가를 사랑하면 눈이 먼다. 그래서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가장 공정할 수 없다. 그 까닭은 우리가 진한 자기 사랑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자녀를 사랑하는 필연성보다는 현실성에 먼저 눈을 빼앗긴다.
요사이 중국에서는 한국과 비슷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 중국의 식당에서 일하는 종업원이 기껏해야 800원 정도를 급여를 받는데, 이를 우리나라 돈으로 따지면 고작 10만 원정도이다. 그런데 아이를 한 달에 70만 원정도 하는 영어 학원 보내는 것이 유행이란다. 그 아이는 부모에게 분에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있는데, 이러한 사랑은 이 아이가 사람다운 사람이 되는 것보다, 이 시대의 치열한 경쟁 관계에서 승리의 깃발을 나부끼는 것에만 관심을 기울인 것이다. 이렇게 자란 아이는 불행하게 될 소지가 많다. 로또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불로소득을 얻은 로또 당첨자들이 대개 불행해졌는데, 이는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이다. 돈을 버는 과정에서 인생의 바닥부터 차곡차곡 함께 일하는 사람들과 관계 맺는 법, 실수에서 다시 일어나는 법 등등을 배워야 번 돈을 제대로 쓸 수 있을 만치, 성숙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그러진 사랑은 자녀에게 해롭다. 아이들은 정신적인 면보다 물질적인 면에서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채워주는 것은 기형적인 사랑 방식이다. 이처럼 원하는 것은 모두 다 해주면, 아이에게 좋을 것 같아도, 절대로 그렇지 못하다. 부모의 희생을 보이지 않게 해주어야지, 자녀가 원하는 대로 모조리 다 주면 자녀를 망치기 십상이다.
III. 자녀를 위한 최고의 선물: 가르침
부모는 누구나 자녀들이 잘되기를 바라는데, 그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돈이나 명예가 아니다. 그것은 아이의 것이 아니라 다 부모의 것일 뿐이다. 자녀에게 물려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은 가르침이다. 인생에 대한 지혜를 아이에게 가르쳐야 한다. 한 사람이 돈이 많아서 가정부와 기사를 두고 호화주택에서 사는데, 다른 한 사람은 구멍가게나 하고 산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두 사람 사이에 어마어마하게 차이가 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삶의 본질이 아니라 삶의 양태에 불과하다. 그것에 의해 인생의 행복이 좌우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행복은 눈에 보이는 것을 많이 누리는 것에 의해서가 아니라 인생을 사는 지혜에 의해서 결정된다.
여러분, 이 세상 풍조가 돈이면 모두 되는 것 같지만, 돈에 의해 움직이지 않는 사람들도 많아요. 왜냐하면 그들은 인간의 참된 행복이 뭔지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 위한 돈이 오히려 지혜로운 삶을 가로 막기도 한다. 지혜로운 삶을 방해하는 것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욕정에 굴복되는 삶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된 영상에 미혹된 삶이다. 이것들은 전부 인간을 현혹시키는 것이다. 자매들이 돈 많은 집에 시집가서 불행해 지는 경우가 많다. 형제들이 믿음이 좋고 못 생긴 자매랑 결혼해서 갈등 없이 살기 보다는, 믿음이 좀 부족해도 예쁜 자매랑 결혼해서 조금 갈등을 겪고 사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것도 잠깐이다. 살아 봐라. 결혼해서 1, 2년 지나면, 얼굴이 무슨 상관이랴! 눈에 보이는 거짓된 영상들에 의해 속는 것이 없을 수는 없지만, 이것을 최대한 벗겨내고 밝은 눈을 가지고 욕정에 굴복되지 않는 삶을 살아야 한다. 우리 자녀가 그렇게 자라게 하기 위해서는 참된 무엇인가 분별할 수 있는 지혜를 자녀에게 물려주어야 한다.
A. 진리를 알도록
무엇보다도 먼저 우리는 말로 아이들을 잘 가르쳐야 한다. 예수님도 제자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저 공중에 새를 보아라. 들에 핀 백합을 보아라. 하나님께서 다 먹이시고 입히신다. 그러니 너희들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말라!” 차근차근 가르치지 않았는가? 자녀가 태어나서 성장하는 동안, 성경의 진리들을 가르쳐야 한다. 이것을 교회에 떠넘겨서는 안된다. 자녀를 가르치는 일차적인 책임은 가정에 있다. 단지 음식으로 아이를 잘 먹이기만 하면, 그것은 양육이 아니라 사육이다.
여러분, 할머니, 할아버지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훈계하는 소리를 진지하게 들어보신 적 있나요? "네네 알겠어요. 식사나 하세요."라고 건성으로 대답한 적 있지요? 아이가 어렸을 때는 부모의 가르침을 찰떡같이 받아들이지만, 머리가 크면 부모의 말에 시큰 둥한 반응을 보인다. 만일 아이가 어릴 적부터 부모에게 잘 가르침 받지 않으면, 언젠가 갑자기 아이를 가르치려 들어도 아무 소용없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아이들에게 진리를 가르쳐야 한다. 그런데 지혜는 이 진리를 가르치는 데서 나온다.
그런데 부모가 진리가 무엇이며,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고민을 해봤어야지! 그런 부모가 아닌 다음에는 아이는 아무런 희망이 없다. 기적을 바랄 수밖에… 나중에 자녀가 훌륭한 목회자나, 신앙의 선배를 만나 부모에게 가르침 받지 못한 인생의 이치를 깨닫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그러니까 태초에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실 때, 첫 사람은 흙으로 빚으시고 그 다음 사람부터는 사람을 통해서 태어나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세상 만물에게 주시지 않은 귀한 특권을 주셨는데, 이는 우리에게 영혼을 주시고 특히 영혼 안에 지성을 주셔서 진리를 사유하게 하신 것이다.
부모가 어떻게 돈을 벌까만 궁리하면, 자녀에게 가르칠 것이 없다. 농부인 아버지에게 아이가 “이 씨는 무슨 씨에요?”라고 물으면 잘 답해 줄 수 있어도, “저 물고기 이름이 뭐에요?”라고 물으면 대답해 주기 어렵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다. ‘꼬삐아 비벤디 모두스 비벤디: 풍부한 가르침은 그의 삶의 방식에서 나옵니다.’ 부모가 늘 진리를 관상하고 있어야 가르칠 것이 풍성하다. 이를 테면, 아이가 엄마에게 “엄마, 이 꽃은 왜 어제와 틀려? 오늘은 시들었어?”라고 물으면, “얘야, 이 세상 많은 사람들의 부귀영화가 보기에는 영원할 것 같아도 이 꽃처럼 때가 되면 시드는 것이란다. 그런데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어. 그게 바로 진리란다.”라고 답해줄 수 있도록 말이다.
그래서 부모된 자들은 성경책, 경건서적을 항시 손에 붙잡고 있어야 한다. 거기서 감동을 받고, 기쁨을 얻고, 눈물을 흘리며 아이들을 말로 훈육하는 부모에게 아이들은 감동은 받는다. 그래서 어머니의 무릎이 최고의 학교이다. 어머니에 무릎에 앉아서, “엄마, 저거 하나님이 만드셨지, 나도, 엄마도 하나님이 만드셨지. 그렇지?”라고 종알댄다. 이것 하라고 우리를 부모되게 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모두 삯꾼 부모이다.
B. 모본을 보도록
아이가 어릴 때, 부모는 자녀에게 세계이다. 부모가 전부이다. 제 아들이 여섯 살이었을 때, 한동안 가정예배 드릴 때마다 눈물을 주셨는데, 하루는 아이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머리는 바닥에 박고 엉덩이는 공중에 쳐들고 우는 소리를 내며 기도하는데, 꼭 제 모습을 보는 것 같았어요. 옛날에 박윤선 목사님이 주석을 쓰시다가, 모를 때마다 작은 방으로 들어가서 “주님, 몰라서 왔습니다.”라고 기도하셨는데, 어느 날 어이가 작은 방에 들어가 “주님, 몰라서 왔습니다.”하며 목사님을 따라 하더란다.
오늘 낮에 TV에 출현했었다. 함께 출현한 장로님이 <자기 깨어짐> 책이 쉽다고 하시면서, 자기도 교회에서 교인들을 그 책으로 가르친다고 말했다. ‘주님을 깊이 만나십시오. 기도를 하더라도 깊이 하십시오. 은혜를 좀 받아도 깊이 받으십시오.’라고 따라한다고 했다. 책만 읽어도 저렇게 저자를 본받는데, 날마다 같이 사는 아이들은 오죽하겠는가? 하나님께서 첫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그 다음 사람부터는 사람에게서 태어나게 하신 것은, 눈을 뜨자마자 인류의 찬란한 영광이 아니라 아빠, 엄마를 보고 배우라고 하신 것이다. 아이의 최고, 최대, 최상의 축복은 진짜 인간다운 부모 슬하에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우리는 참 사람다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하고 진지하게 고민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의 영광 가운데 어찌하면 그 창조 목적을 따라 살 수 있을지를 숙고해야 한다.
오늘 아침, 마당에서 다음 주일 설교를 준비하면서 많이 울었는데, 다시 태어나면 ‘뭐가 소원일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림같이 예쁜 자매를 만나서 결혼할까? 그렇게 좋아하는 공부를 더 할까?’ 마음이 동하긴 하지만 정답은 아니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내가 정말 본받고 싶은 부모님, 나를 지극히 사랑해주는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고 싶다. 부모님이 참 신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 가슴에 새겨진 인간에게 대한 잘못된 상들을 지우는데,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던가? 결국은 신앙으로 승리했지만, 승리하기까지 얼마나 뼈아픈 과정이었던가? 그러면서 그럴 리는 없지만, ‘만일 다시 태어난다면, 제가 정말 우리 부모처럼 되는 것 이외에는 소망이 없는 그런 부모를 만나서, 주님 사랑의 그늘에서 산다면 얼마나 행복할까?’하는 생각을 했다. 그것을 나에게도 적용시켜 보았다. 세월이 지나, 내가 그렇게 가졌으면 바라던 부모가 될 자신이 없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혀가 아니라 우리의 가르침대로 살면 얼마나 행복해질 수 있는지에 대한 본을 보여주는 것이다.
말로 하는 가르침은 가르칠 마음만 먹으면 가르칠 수 있지만, 몸으로 하는 가르침은 가르칠 마음을 먹을 때나, 안 먹을 때나 항상 가르치는 것이기에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아이가 안 닮았으면 하는 것마다 그대로 본받곤 한다. 그러므로 아이들 앞에서 말과 행동이 일치하도록 애를 써야 한다. 그 비결은 부모가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다.
C. 사랑을 받도록
‘아이들을 깊이 사랑하라.’ 그것보다 소중한 것은 없다. 아이가 충분히 사랑 받도록 해야 한다. 아이가 어릴 때 많이 사랑해주고 쓰다듬어 보듬어 주어야 한다. 자기 때문에 부모가 행복해 하는 것만큼 아이가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는 것은 없다.
제가 아는 한 교수님이 공부한다고 혼자지내고, 유학 간다고 혼자 지내셨다. 아이가 언제나 부모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시기가 있다. 그 시기 동안 사랑을 받지 못한 아이는 골 깊은 원망을 품게 된다. 그래서 이 교수님이 공부도 할 만큼 했으니, 아이들과 함께 대화도 하고 싶고 여행도 하고 싶은데, 이제는 아이들이 자기를 슬슬 피하더란다. 부모님들은 기억하세요. 아이가 어릴 때, 뿌린 사랑을 불과 7, 8년 사이에 거두게 되요. 어릴 적에 많이 사랑해주세요.
아이에게 많은 것을 기대하는 것은 좋은데, 실망하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에요. 몇 년 전에 이것에 대해 하나님이 깊이 깨닫게 하셨다. 아들이 어릴 때, 얼굴도 예쁘고 시험 보면 100점을 자주 받아와서 천재인지 알았는데, 점점 자라가면서 실망이 늘어갔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깨우쳐 주셨다. ‘나도 네 아비고, 너도 네 아이에게 아비 되는 것에 대해 비슷한 점이 있느냐?’ 한 번도 하나님께서는 ‘난 너에게 실망했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이, 마치 나를 산에 심은 나무를 가꾸듯이 때로는 하나님이 마음에 기쁘시지 않아도, 내가 해보겠다고 하면 놔두고 펑펑 울며 돌아오면, ‘괜찮다 다시 해 보거라.’하며 용기를 주고 믿어 주셨다. ‘난 왜 이리 나의 틀을 아이에게 우겨넣으려고 했을까?’ 아이를 세 번을 때렸는데, 두 번이 정리 정돈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게 정말 그렇게 중요했을까? 공부도, 청소도 중요한 것이 아니다. 이건 사랑이 아니다. ‘어쩌면 이 아이가 받은 상처는 내가 우리 아버지께 받은 상처보다 깊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요한 것은 관계다. 네가 공부를 잘해서 정리정돈을 잘해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냥 너는 너니까 사랑하는 것이다.
IV. 결론과 적용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녀를 맡겨 주셨어요. 우리가 좋은 신앙을 가졌다면, 그 신앙을 자녀에게 물려주어서, 우리가 못 다 섬긴 하나님을 섬기게 해야 하지 않나요?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죽을 때, 어마어마한 물질적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이 우리처럼 하나님을 경외하고 이웃을 섬기며 살게 만들 수 있는 영적 유산을 물려주는 것이다.
아이의 일생에 네 번에 중요한 만남이 있다. 좋은 부모, 좋은 목회자, 좋은 배우자, 좋은 스승. 이에 의해 아이의 일생이 결정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아이들을 많이 사랑하고 산에 심은 나무처럼 보살피세요. 오늘 저녁 집에 들어가서, 아이를 꼭 껴안아 주세요. 엄마, 아빠의 사랑은 하나님 사랑의 그림자이다. 우리가 미끄러진 후에 하나님께 돌아가면 늘 거기 계신 하나님처럼, 우리의 아이가 진리를 알고, 모본을 따르고, 사랑을 받아 아름드리 거목이 되도록 해 주세요.
나중에 우리가 늙어서 효도 받으려면, 마음에서 우러나온 효도를 받아야 기쁘지 않나요? 사랑은 메아리 같은 것이에요. 아이를 깊이 사랑하세요. 아이가 어떤 약점이 있어도, ‘너를 향한 내 사랑을 막을 수 없다. 괜찮아, 내가 너를 사랑하니까. 사랑한다, 내 아들아!’ 바로 그 속에서 아이들이 구김살 없이 행복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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