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의 신앙! (창 16:1-6)
지금까지 다섯 주에 걸쳐서 아브라하의 신앙에 대해서 말씀 드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브라하에 대한 말씀을 들으시고, 실수를 잘하는 우리하고는 거리가 먼 이야기다 하고 생각한 분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와 거리가 먼 성자 같은 사람의 이야기를 하게 되면 공감이 적은 법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마지막으로 그도 인간이었다는 점을 말씀 드리려고 합니다. 여기서 인간이라는 점을 강조하는 것은 그도 우리처럼 실수하고, 약점이 많고, 흠이 많은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을 "실패의 신앙"이라고 붙였습니다. 아브라함도 여러 번 실수를 했습니다. 실수를 해도 아주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합니다.
첫 번째 실수는 창세기 12장에 나와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믿고 고향을 떠나서 가나안 땅에 도착했습니다. 와서 보니 그곳은 사람이 살 만한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내용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었습니다. 그래서 12:10에 보면 "애굽으로 내려갔다"고 했습니다. 배가 고파서 도저히 가나안에서는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습니다. 애굽에만 가면 만사가 다 잘될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의심 없이 애굽으로 갑니다.
그런데 막상 애굽에 도착하고 보니까 걱정거리가 생겼습니다. 12:11-13을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창12: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창12: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창12:13)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
아브라함의 부인 사래는 아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고 합니다. 65세까지 아이를 낳지 못했으니까 그럴 만도 할 것입니다. 거기다 애굽 사람들은 피부 색깔이 검습니다. 그 속에 백옥같이 흰 사래가 나타났으니 얼마나 돋보였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이것이 겁이 났던 것입니다. 분명히 자기를 죽이고, 사래를 빼앗아 갈 것으로 알았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그답지 않게 술수를 씁니다. 우리 둘사이를 남매로 위장하자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여기서 실수를 합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용렬한 남자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고, 비겹한 사람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빋음으로 살아온 사람입니다. 거기다 결단력도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사람이 이렇게까지 비겁하게 될 수가 없습니다.
사람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면 전혀 평소의 그답지 않은 본심이 나온다고 합니다. 평소에는 용감한 체하고, 신사인 체하고, 침착한 체해도 위기에 직면해 보면 그 본심을 안다고 합니다.
어떤 집에 밤에 도둑이 들어왔습니다.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립니다. 도둑이 들어온 것이 분명합니다. 그때 누가 나가야 하겠습니까? 남편이 용기 있게 나가야 합니다. 그런데 이 남편이 아내에게 나가 보라고 합니다. 얼마나 용렬한 남편입니까? 그래서 아내가 용기 있게 방망이 하나를 들고 나가 보니까 고양이가 마루에 앉아 있더라고 합니다. 그래서 긴장을 풀고 쓴웃음을 지으며 방에 들어와 보니까 남편이 이불을 쓰고 숨어 있더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분명 지금까지 살펴본 바로는 신사 같고, 진실한 신앙인이고, 결단력도 있는 사람이고, 아주 듬직한 남편이었ㅅ브니다. 이것이 겉으로 나타난 아브라함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 보면 아브라함은 마음속에, 죽을까 봐서 자기 아내를 아내라고 떳떳이 밝히지도 못하는 비겁함도 있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들 앞에서 사래를 누이동생이라고 소개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모두 이 같은 이중적인 마음이 들어 있습니다. 겉에서 볼 때는 점잖은 것같이 보이고, 신사같이 보이고, 용기 있게 보이고, 양심적인 것같이 보입니다. 그래서 선을 말하고, 의를 말하고, 진실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좀더 깊이 속으로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이렇게 야비한 마음과 비겁한 마음과 이중적인 마음이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믿음의 조상이라고 부르는 아브라함도 바로 그런 약점을 지닌 사람입니다. 아주 용렬한 사람입니다. 이중 인격자입니다. 아브라함이 얼마나 이중 인격자인가 보십시오.
사람들 앞에서 아내를 누이라고 소개했습니다. 15절을 보면 사람들이 사래를 보고 너무나 아름다워서 놀랍니다. 그래서 칭찬을 했는데 칭찬이 바로왕에게까지 들렸습니다. 사래는 결국 우려했던 대로 왕궁으로 불려 갔습니다. 부인을 왕궁으로 보내 놓고 아브라함은 어떤 심정이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정말 용기 있는 신사였다면 좀 늦기는 했지만 그때에 사실을 말했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를 빌고 아내를 욕되게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그런데 창 12장 16절을 보면 이런 말이 나옵니다. "(창12:16)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 아브라함이 아내를 뺏기고 나서 이것들을 주니까 받았다는 말입니다. 어떻게 그것을 받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같았으면 죽으면 죽었지 그것을 받았겠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것을 받습니다. 성자 같았던 아브라함이 실수를 했는데,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실수를 한 것이 아니고, 이렇게 어이가 없을 만큼 허무하게 실수를 합니다.
그런데 17절을 보면 더 이상한 모습이 또 나옵니다. 꿈에 하나님이 바로에게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사래는 아브라함의 아내니 돌려 보내주라고 하십니다. 바로가 겁이 나서 아무 소리 못하고 사래와 아브라함을 내보냅니다. 그런데 그때 아브라함은 바로가 준 재물과 짐승떼를 모두 챙겨가지고 애굽을 떠납니다. 얼마나 추한 남자입니까? 이것이 감추어진 아브라함의 또 다른 모습입니다. 아브라함은 절대로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들과 어떤 면에서는 똑같이 용렬하고, 무능하고, 겁이 많은 그런 사람입니다.
이보다 더 이어없는 실수가 16장에 나옵니다.
아브라함은 지금까지 몇 단계의 어려운 고비를 겪어 왔습니다. 그 첫 번째 고비는 고향을 떠나는 고비였습니다. 그때 아브라함은 과감하게 끊고, 단절하고, 떠남으로써 그 어려운 고비를 잘 넘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아브라함은 아주 매서운 사람입니다. 신앙인에게는 이런 모습이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은 따뜻할 때는 몹시 따뜻해야 하고, 인정도 있어야 하고, 아량도 있어야 하지만 냉정해야 할 때는 매섭게 끊고, 매듭짓고, 일어나는 독한 모습도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해야 신앙을 유지할 수가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잘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고비인 인내의 고비도 잘 넘었습니다. 인내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육신적인 인내입니다. 춥고, 덥고, 배고프고, 아픈 것을 참는 것이 육신의 인내입니다. 사람이 배고픈 것을 참지 못하면 도둑질을 하게 되고,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이 신앙 생활을 잘하려고 하면 이것을 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인내를 잘했습니다.
또 인내에는 정신적인 인내도 있습니다. 사람이 배고픈 것은 어느 정도 잘 참을 수가 있습니다. 추운 것도, 더운 것도 참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분하고, 억울하고, 모욕을 당했을 때는 참기가 힘듭니다. 이것은 보통 수양으로는 참아 내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도 충돌하기도 하고, 분을 내기도 하고, 큰 소리도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것도 잘 해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 인내가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의 인내입니다. 아브라함이 육신의 인내도 잘 해냈고, 정신적인 인내도 잘 해냈는데 이 신앙의 인내에서 그만 참지를 못하고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본문이 바로 그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고향을 떠나라. 그러면 네 자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이때는 아브라함의 나이 75세 때입니다. 아브라함이 기대를 가지고 고향을 떠나서 고생을 감수하며 여기까지 왔습니다.
그리고 10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지금은 아브라함이 나이 85세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늘의 별처럼 많이 자손을 주신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지금쯤 해마다, 연년생으로, 그것도 쌍둥이로 낳아도 시원치 않을 판인데, 나이는 먹어 가는데, 시간도 없는데, 아내는 이미 단산이 되어 버렸는데 하늘의 별은 고사하고 아들 하나도 낳지를 못했습니다. 얼마나 조바심이 되고, 초조하고, 다급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은 여기서 더 이상 참지를 못하고 첩을 얻습니다. 그래서 그 몸을 통해서 편법으로 아들 하나를 얻습니다. 그 아들이 이스마엘입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이 실패를 합니다. 지금까지는 다 잘해냈는데 아브라함이 여기 와서 그만 실수를 한 것입니다.
그로고 나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이 문제로 인해서 심각한 갈등을 겪습니까?
첫 번째 갈등은 가정의 불화입니다. 여러분도 다 아시는 문제 아닙니까? 이때 본처와 후처 사이에 얼마나 심각하게 갈등이 일어났겠습니까? 이것은 못 말립니다. 그 중간에서 아브라함이 얼마나 피를 말리는 곤란을 겪었겠습니까? 그러다가 끝내는 아브라함이 견디지 못하고 후처를 아이와 함께 집에서 쫓아냅니다. 그러니 그 고통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사람들이 살아가다가 고통을 당하는 경우를 보게 되는데 대개는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편법을 써서 그렇습니다. 길이 아닌 길을 가면 고뇌가 따르는 법입니다. 아브라함의 고뇌도 그래서 온 것입니다.
두 번째 갈등은 하나님과의 교통이 당절되는 아픔입니다. 아브라함이 86세에 이스마엘을 낳고 나서 99세 되기까지 13년 동안이나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지 않으십니다. 이때가 아브라함이 견디기 가장 어려웠던 영적 암흑기입니다. 하나님만을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아브라함이 실수를 하는 바람에 13년 동안이나 관계가 단절되고 말았습니다. 참 기가 막힐 일입니다. 친하던 친구하고 교통이 끊어져도 괴로운 일인데 하나님 중임으로 살아왔던 아브라함이 하나님과 교통이 단절되고 나서 받았던 그 고뇌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세 번째 갈등은 자손간의 불화입니다. 정상이 아닌 방법으로 이스마엘을 낳아 놓고 나서 오늘까지 적자 이삭의 자손들인 이스라엘 족속과 서자 이스마엘의 자손들인 아랍 족속간의 반목과 갈들이 얼마나 심합니까?
그렇게 완벽했던 아브라함이 이런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이것은 모두에게 불행입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자신을 위해서, 자손들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완벽한 사람이 없는 법입니다. 아브라함까지도 이런 어이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어찌 아브라함뿐이겠습니까?
모세도 실수를 했습니다. 모세는 속에서 일어나는 분을 참지 못해서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십계명 돌비를 그만 홧김에 내던져서 박살을 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이것이 보통 실수입니까? 어쩌자고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을 집어 던져서 박살을 냅니까?
노아도 실수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그토록 칭찬하셨던 노아입니다. 그런데 그 노아가 홍수 후에 그만 방심해서 술에 취해 벌거벗고 추태를 부리다가 그 모습을 아들이 보고 웃었다고 해서 지독하게 저주를 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이 땅에 생겨난 것이 아닙니까?
이삭도 실수를 했습니다. 이삭은 아브라함이 저지른 실수와 똑같은 실수를 저지릅니다. 그도 아버지처럼 먹을 것을 찾아 아내와 함께 그랄 이라는 곳에 내려갔다가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그러고 나서 아브라함처럼 똑같은 봉변을 당하고 나옵니다. 부전 자전입니다.
또 다윗을 보십시오. 얼마나 용감하고, 경력이 화려하고, 믿음이 좋고, 신실한 신앙의 사람입니까?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이 역대 인물 가운데서 가장 흠모하는 사람이 다윗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의 실수쯤은 감추어 주셔야 좋은데, 그래야 완전한 인간으로 길이 남을텐데, 오히려 인간의 역사에서처럼 더 과장하고, 부각시켜서, 위인이 되게 하여야 하는데, 하나님은 다윗의 실수를 있는 그대로 성경에 모두 기록하게 해서 우리들에게 있는 그대로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여러분, 다윗이 저지른 "우리아의 사건"을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성경에서 앞 뒤 다 빼고 우리아의 사건만을 떼어서 한번 생각해보면 이것은 분명 주간지에나 나올 법한 삼류 소설이고, 또 다윗은 천하의 악한 사람입니다. 천벌을 받을 사람입니다. 도저히 구제받을 수 없고, 용서받을 수 없는 그런 악한 사람입니다.
세상에 어디 성한 사람이 있습니까? 어디 완전한 사람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위인된 사람들은 우리들보다 더 큰 실수를 했고, 흠이 더 많은 사람들입닏.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 후에 신앙의 위인들이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님 편에서 베풀어 주신 사랑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의 구속사적인 은총 때문입니다. 다윗, 모세, 노아 등 모두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들이고, 흠이 있고, 실수를 한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들을 버리지 않으십니다. 그러고는 다시 씻으시고 용서하셔서 사용하십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은 그들에게 다시 재기할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니의 구속사적인 은총이라고 합니다. 사람들 같았으면 벌써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시 용서하시고, 씻으시고, 싸매셔서 회복시키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다시 사용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또 사람 편에서는 그 은총을 고맙게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큰 은총을 베푸셨어도 인간 편에서 그 은총을 거절하면 그만입니다. 내가 망하겠다고 우기면 하나님도 별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한결같이 눈물로 회개하고, 뉘우치며, 하나님의 은총을 기쁨으로 받아서 더 겸손해지고, 더 기도하는 사람들이 된 것입니다.
여러분, 어떻습니까? 다윗, 아브라함, 모세, 노아도 별 사람 아닙니다. 우리들과 똑같이 실수하고, 분노하고, 욕망에 사로잡히고, 비겁하기도 합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나중에 모두가 위인들이 다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런 실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을 버리지 않으시고 여전히 함께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을 뼈져리게 느끼고 그 사랑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 같은 은총을 체험한 그들은 한결같이 겸손해졌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그러고 나서 찬란하게 빛나는 신앙의 우인들이 되어서 우리들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이 우리들에게 주시는 실패의 신앙이 주는 교훈이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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