Ⅵ. 제 3 권 성령 하나님의 내적인 사역을 통한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를 받는 길(믿음) · 171
1. 성령 하나님의 사역 · 173
2. 믿음의 대상 · 177
3. 믿음의 정의 · 179
4. 믿음으로 중생 · 184
5. 믿음으로 칭의 · 193
6. 칭의와 성화의 관계 · 200
7. 칭의의 결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 201
8. 믿음의 실천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기도) · 204
1) 기도의 필요성 · 205
2) 기도의 올바른 자세 · 207
3)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 · 209
4) 성도들의 중보기도 · 210
5) 사적인 기도와 공기도 · 210
6) 주기도 · 211
9. 예정 · 215
1) 예정론 이해의 전제 조건 · 216
2) 정의 · 218
3) 중요성 · 219
4) 목적 · 220
5) 선택과 유기의 근거 · 222
6) 선택의 확신 · 228
7) 예정과 책임 · 230
8) 칼빈 이후의 예정론 · 230
9) 신학적 적합성 · 236
10. 종말 · 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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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령 하나님의 사역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1권에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 제 2권에서 구속주 하나님에 대해서 설명한다. 제 3권에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신 구속 사역이 어떻게 주관적으로 인간의 마음 속에 이루어지는가를 다룬다. 학자에 따라서 이것을 성령론 혹은 구원론이라고 한다. 그러나 정확한 제목은 성령의 내적인 역사를 통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이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을 다루기 전에 먼저 성령님의 역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우리 안에서 효과적으로 역사하도록 하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를 다룬다. 성령 하나님의 역사 없이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할 수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 밖에 머물고 계시고 우리가 그와 분리되어 있는 한, 그가 인류의 구원을 위해서 받으신 모든 고난과 행하신 모든 일들이 여전히 우리에게 무익하고 무가치하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아버지께로부터 받으신 것을 우리와 함께 나누시기 위하여 우리의 소유가 되시고 우리 속에 거하셔야 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우리의 ‘머리’(엡 4:15)요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롬 11:17)이 되어야 하고, 우리 또한 ‘그리스도로 옷 입어야’(갈 3:25) 한다.” <기독교 강요>, 3.1.1. 즉 성령 하나님의 역사는 신자를 그리스도와 효과적으로 연결시키는 “띠”이다. <기독교 강요>, 3.1.1(To sum up, the Holy Spirit is the bond by which Christ effectually unities us to himself). 여기서 성령을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키는 띠로서 이해한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성령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역사를 통해서 우리는 그리스도와 영적으로 연합되기 때문이다. 이 연합을 예수 그리스도와의 신비적인 연합이라고도 한다. 그리스도와의 연합 없이는 우리는 절대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의 십자가를 통해서 구원 역사를 이루셨다. 이것을 구원의 객관적 역사라고 한다. 그렇다면 어떻게 구원의 객관적인 역사를 주관적으로 확신할 수 있는가? 그것은 바로 성령님의 내적인 역할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 가운데 확실하게 되어진다.
칼빈은 성경에 기록된 성령님의 칭호를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설명한다. 이것은 칼빈의 신학이 얼마나 성경에 기초한 신학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면이다. 성경에서 성령의 칭호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를 봄으로써 성령의 역할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성경의 언어 사용을 봄으로써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는 언어 논리에 기초한 사례이다. 이러한 관찰의 결과로서 우리는 성령님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성령은 양자의 영이다. 성령은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우리를 양자로 받아 주시고, 친히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려고 값없이 베푸시는 사랑을 우리에게 증거하시며, 감히 우리의 입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하신다. 그래서 성령을 양자의 영이라고 부른다. 또한 성령은 우리 신자에게 구원을 확신시켜 주는 역할도 한다. 우리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은 인간의 경험에 의해 되는 것이 아니라 신적인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확신을 갖게 한다.
둘째, 성령은 물과 불이다. 성령은 은밀한 중에 우리의 믿음이 싹이 나게 하시고 자라게 하시며 우리의 사악한 정과 욕을 깨끗이 씻어 정결케 하시는 물인 동시에, 정과 욕을 태우셔서 우리를 사랑과 열렬한 헌신으로 불타게 하는 불도 되신다(눅 3:16).
성령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모든 은사를 끊임없이 흘러나오게 하시는 샘물이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선한 것은 성령의 은사이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이렇게 귀한 성령의 은사가 믿는 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다 똑같은 은사를 받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에게는 지혜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지식의 말씀을, 어떤 이에게는 병 고치는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능력 행함을, 어떤 이에게는 예언의 은사를, 어떤 이에게는 영들을 분별함(고전 12:8-10)을 주셨다. 그리고 어떤 이에게는 섬기는 은사를 주셨다(롬 12:6-8). 하나님이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시는 목적은 교회를 섬기기 위한 것이지, 신자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표시로서 주신 것은 아니다(고전 14:3-4).
셋째, 성령이 하시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는 믿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영접케 하시고, 우리를 중생케 하여 거듭난 새 사람으로서 살게 하신다. 이처럼 중생은 바로 성령의 역사이다.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해야 하며, 성령의 충만함을 덧입어야 한다. 성령님께서 하시는 일 중에서 가장 큰 역사는 신유나 방언이 아니라 인간을 변화시켜 새 사람 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다.
넷째, 성령은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한 생명의 말씀을 주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생생하게 기억나게 하시고, 그것의 올바른 의미를 내적 조명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다. 이렇게 성령님의 내적인 조명과 가르침을 통해서 주신 의미야말로 성경의 자연스럽고 분명한 문자적 의미이다. 이는 성령님의 내적 조명과 가르침을 통해서만 우리의 이성과 감성, 지성이 올바로 제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설교는 성령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복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대로 칼빈은 성령의 역사를 사변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성령’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봄으로써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했다. 이것이 성경적인 성령 이해이다. 칼빈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구원의 객관적인 역사가 성령의 내적인 역사를 통해서 어떻게 주관적으로 우리에게 확신과 유익을 주는지 설명하는 데 성령의 역할을 관련시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칼빈은 성령을 신자를 그리스도 예수와 하나로 연결시키는 띠로 이해한다. 즉 성령은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와 연합하게 하여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 주어지는 모든 유익과 효력을 받을 수 있게 한다. 성령의 역사는 내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주어지는 은혜를 우리가 받게 하며, 외적으로는 교회(<기독교 강요>, 제 4권)를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잘 자라게 하신다.
2. 믿음의 대상
<기독교 강요> 제 3권은 칼빈의 구원론이라고 할 수 있다. 구원론이란 하나님께서 예수를 통해 이루신 구속의 역사가 어떻게 성령의 역사를 통하여 주관적으로 믿는 자에게 역사하는가를 다룬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3권의 큰 타이틀을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방법: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어떤 혜택을 받으며 어떤 효과가 뒤따르는가?”라고 붙였다. 그래서 <기독교 강요> 제 3권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해 보면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신 혜택과 효력을 다룬다. 그리스도는 진실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유일한 보증(sole pledge of God)이다. 따라서 믿음의 대상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역사에 기초한 “은혜로 값없이 주신 약속”(freely given promise)이다. Calvin's First Catechism: A Commentary I. John Hesselink, 102.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역사에 기초해 있다.
칼빈에 의하면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은 오직 믿음이다. 믿음을 통해서 신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시기를 간절히 원하는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계시하신 분으로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다.
구약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셨기 때문에 애굽에서 비참한 노예로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모세를 통해서 애굽으로부터 해방시켰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베푼 신실하신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 뿐인가?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계명을 주셨다. 이 계명은 선택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지켜야 할 특별한 율법이었다. 만일 이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 율법의 저주를 받는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이 계명을 온전하게 지킬 수 있는 능력이 없다(롬 7:18). 이는 인간이 전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이며, 또 율법의 본래의 기능이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롬 3:20). 율법을 지키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우리 인간은 더욱더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더 나아가 온갖 죄로 인한 양심의 가책 때문에 도무지 견딜 수 없어 사도 바울처럼 죽음의 절규를 할 수밖에 없다(롬 7:24). 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사 죄 때문에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들 하나 하나까지 십자가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구원하셨다. 또 우리를 율법의 저주로부터 구원하셔서 이제는 더 이상 율법이 우리의 양심을 속박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처럼 그리스도 예수는 우리의 소중하고 사랑스러운 구주가 되신다.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인간을 구원하시기로 이미 창세 전에 작정하신 것이다(엡 1:4). 그 누가 흉내라도 내겠는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이다(요 14:6). 예수 그리스도가 믿음의 대상이라는 말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 세상 사람들은 붓다, 마호메트, 공자를 믿어도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이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볼 때 그러한 견해는 아주 틀린 견해이다. 붓다, 마호메트, 공자는 성인 중의 한 사람은 될 수 있어도 우리의 믿음의 대상은 될 수 없다. 성경에 그런 말이 기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믿음은 구원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성경에는 분명히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이 그렇게 성경에 정하신 것이다(행 4:12). 그리스도는 오직 한 분으로서 우리의 믿음의 대상이 되신다.
믿음의 대상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요, 인간이다. 그는 하나님으로서 우리 신자가 도달하려는 목적지가 되시고 또 인간으로서 신자가 걸어가는 길이 되신다. <기독교 강요>, 3.2.17. 신자의 목적지요 길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발견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길 자체이시다(요 14:6).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하나님을 찾을 수도 없고 믿을 수도 없다. 이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믿는다(벧전 1:21). 신자는 그리스도 예수를 믿고 또 그분의 말씀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속에 참 기쁨이 있다.
3. 믿음의 정의
신자는 오직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다.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인가? 칼빈은 믿음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믿음은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을 굳게 또 확실하게 아는 지식(cognitio)으로 이 지식은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주신 약속의 신실성을 근거로 삼은 것이며, 성령을 통해서 우리의 지성에 계시되고 우리의 마음에 인친 바가 된다.” <기독교 강요>, 3.2.8(“a firm and certain knowledge of God's benevolence toward us, founded upon the truth of the freely given promise in Christ, both revealed to our minds and sealed upon our hearts through the Holy Spirit./ Nunc iuta fidei definitio nobis constabit si dicamus esse divinae erga nos benevolentiae firmam certamque cognitionem, quae gratuitae in Christio promissionis veritate fundata, per Spiritum et revelatur mentibus nostris et cordibus obsignatus”). 칼빈의 정의는 쉽게 이해할 수는 없지만 믿음에 대한 많은 신학자들의 다른 어떤 정의보다도 우월하고 성경적이다. 칼빈의 정의를 통해 믿음에 대한 네 가지 중요한 요소를 배울 수 있다.
첫째, 믿음은 감정도 아니고, 의지도 아니며, 단순한 신뢰도 아니다. 칼빈에 의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erga nos) 믿음을 주셨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여기서 지식이라는 말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칼빈은 여기서 믿음이 로마 카톨릭교회의 맹신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믿음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이지 교회에 대한 존경이 아니다. <기독교 강요>, 3.2.3.
여기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사변적, 추상적, 신비적 지식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심과 자비로우심을 성령님을 통해서 우리 삶 속에 주어지는 아주 확실한 지식이다. 이 하나님의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다.
둘째, 믿음은 성경을 통해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 인간은 아담의 원죄로 말미암아 다 진노의 자식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사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십자가의 보혈의 피를 통하여 죄 사함을 주시겠다고 성경에 약속하셨다. 이처럼 하나님의 선하신 지식이란 세상 학문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 구약에서부터 신약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한번도 식언치 아니하셨고 또 선하신 뜻을 변개치도 않으셨다. 한번 약속하신 것을 끝까지 다 이루신 신실하시고 공의로우시며 인자가 많으신 우리 하나님이시다. 믿음의 두 번째 요소는 성경을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믿음은 말씀에 주어진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관한 약속이다.
셋째, 믿음은 성령을 통해 우리 지성에 계시된다. 우리는 믿음이 선하시고 인자하시며 자비로우신 하나님을 굳게 그리고 확실히 아는 지식이라고 했다. 여기서 인자하시고 자비로운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사죄의 은총을 의미한다. 그러면 우리가 이를 어떻게 확실하게 알 수 있는가? 무엇이 확실하게 해주는가? 과학적인 증거를 통해서인가? 아니면 논리적 추리를 통해서인가? 칼빈에 의하면 이 지식은 성령님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에 계시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선하심의 확실성에 대한 지식은 인간적인 탐구의 결과가 아니라 신적인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만 깨달아지는 지식이다. 성령님이 믿음의 근원이요 원인이기 때문이다. <기독교 강요>, 3.2.33.
넷째, 믿음은 성령께서 우리 지성에 계시하신 것일 뿐만 아니라 우리 마음에 확실하게 인치신 것이다.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심과 끊임없이 자비하심에 대한 확실한 지식은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에 계시하셨을 뿐만 아니라 마치 일반 공문서를 법률사무소를 통해서 공증하면 그 공문서에 법적인 효력이 발생하듯이 성령의 생명력 있는 역사하심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에 분명히 공증을 하신 것이다. 지성에 계시하신 것을 객관적인 지식이라고 한다면 마음의 공증은 내적인 확신이다. 여기서 공증이라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변호사 법률 사무소에서 공증을 받지 않은 문서는 법률적인 효력을 받을 수 없다. 아무리 말로 약속을 해도 법률적으로 공증을 받지 않는다면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 국가가 인정한 권위 때문에 공문서가 효력이 있는 것처럼 성령님이 마음에 확실히 보증하시기 때문에 분명한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확신하건대 믿음은 인간의 탐구의 결과나 해박한 철학적인 지식이 아니다. 단순히 말씀에 대한 지적인 동의도 아니다.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주신 선물로서 그분께서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계시하신 은혜를 아는 지식인데, 이 지식은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계시하신 하나님 약속의 말씀에 전적으로 기초하며 오직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지성으로 알게 하실 뿐만 아니라 각자의 마음에 확실하게 공증하신 것이다. 믿음을 통해서 우리는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 이러한 관계를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이 믿음이다. Faith is a uniquely intimate fellowship with the living Christ. Calvin's First Catechism A Commentary, I. John Hesselink, 104. 성 어거스틴은 믿음을 동의를 수반하는 숙고(to think with assent)라고 했다. 어거스틴의 믿음에 대한 정의는 당시의 회의주의자들과 논쟁에서 비롯된다. 그들은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확실한 것은 없다고 믿는다. 그래서 그들은 회의주의에 빠진다. 문제는 어떻게 회의를 극복하는가에 초점이 맞추어 있다. 그것은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거스틴에 의하면 회의주의자들의 문제는 세상에는 확실한 것이 없다는 것 즉 불확실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믿으려는 의지가 없기 때문이라고 봤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류를 범한다면 그것은 인간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말해주는 증거이며 만약 존재하지 않는다면 오류를 범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에게는 불확실성이 문제가 아니라 죄로 말미암아 동의케 하는 의지가 왜곡된 것이 문제이다.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가 왜곡된 의지를 회복시켜 선행을 하게 한다. 믿음과 이성의 관계는 믿음으로 이해에 이르는 것(credo ut itelligiam)이라고 어거스틴은 말했다.
소렌 킬케가드는 믿음과 의심의 관계를 깊이 파헤친 기독교 사상가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의심은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킬케가드는 의심이란 잘 모르기 때문에 생기는 것, 즉 지식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의식(consciousness) 혹은 관심(interest)에서 생긴다고 봤다. 지식은 무관심한 것(disinterested)에 속하며 관심이란 의식된 지식(interested knowledge)으로 본다. 관심이라는 말 자체가 “~사이에”(interesse/being between)라는 말로서 관계성 속에서 성립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수학이나 미학 형이상학 등은 모두 무관심한 지식으로서 의심이 아니라 의심의 전제 조건이다. 그래서 관심이 없으면 의심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중화(neutralized)된다. 그래서 의심은 이러한 객관적인 지식에 의해서 극복되는 것이 아니다.
의심은 실존에서 모순을 수반한 관심(doubt arises through my becoming a relation between two; as soon as it ceases, doubt is canceled)에서 출발되기 때문에 의지의 결단(act of will)이 필요하다. 이것이 믿음이다. 그래서 의심은 객관적인 지식적인 설명에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극복하는 것이다(De Omnibus Dubitandum est). 킬케가드에 의하면 기독교가 가르치는 지식은 행위를 통해서 깨달아 알아지는 지식이다.
루터는 믿음을 마음의 신뢰(trust/fiducia)로 봤다. 그는 십계명의 첫째 계명을 주석하면서 믿음이 무엇인지를 잘 말해 준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그를 신뢰해야 한다는 것 이외에 다른 것을 이것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부터 가장 위대한 지혜가 나옵니다. 다른 것을 두려워하고 또 믿는 사람은 다른 그것을 신으로 삼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하나님보다 군주를 더 두려워하면 군주가 여러분들의 신입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하나님보다 여러분들의 아내 또는 돈을 더 믿는다면, 이것들이 여러분들의 신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손안에 붙들려 있지 않고 마음 속에 있습니다. 만일 여러분들이 하나님을 경외하고 또 그를 신뢰한다면, 하나님 이외 다른 사람들을 두려워하거나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첫째 계명은 여러분의 마음의 두 부분,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 그를 신뢰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루터選集>, 설교자 루터, Vol. 10(컨콜디아사, 1987), 473). 간단히 말해서 믿음은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계시하신 사죄의 은혜를 아는 지식이다.
4. 믿음으로 중생
믿음으로 우리는 중생에 이른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믿음을 주시고 그 믿음으로 중생케 하신다. 신자는 중생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게 된다. 진정 거듭남이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비참하게 일그러지고 거의 말살되었던 하나님의 거룩한 형상이 우리 안에 다시 회복됨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칼빈에 의하면 회개의 목적이다. 그래서 그는 중생과 회개를 밀접하게 연결시킨다. <기독교 강요>, 3.3.9. 회개는 단 한번만 하면 되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일생 동안 매일 실천해야 할 신자의 생활이다.
중생은 진실된 회개이다. 그리고 회개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결과이다. 사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즉 믿음은 성령의 역사이다. 믿게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회개케 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다. 열쇠는 하나님이 쥐고 계신다. 회개에는 죄를 깨닫게 함과 하나님의 심판을 알게 하는 면이 있다. 전자는 후자와 연결되어 있다. 후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죄 사함을 통해서 은혜와 구원을 깨닫게 될 때 오는, 즉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면이기 때문이다. 두 측면은 서로 구별되지만 결코 분리할 수 없는 회개의 양면을 말한다. 먼저 말씀을 통해서 죄를 알게 하고 깨닫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죄를 고백하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령님의 역사를 통해서 우리로 하여금 회개하게 하시고 거듭나게 함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역사이다.
중생의 중요한 국면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일그러지고 거의 말살된 하나님의 형상을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형상이란 다시 회복해야 할 “의와 진리의 거룩함”을 말한다. 듣기만 해도 감동적인 하나님의 의와 거룩함을 닮은 새로운 사람이 되는 것이 중생이다. 이와 같은 생활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것은 절대로 인간의 의지로 되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전적인 역사를 통해서 가능하다. 이를 위해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야 한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적극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좇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이런 생활은 수도원에서 산다고 되는 것이 아니고 매일 매일 생각을 새롭게 하는 생활을 통해서 가능하다고 했다(롬 12:2). 즉 신자는 매일 말씀을 공부하고 그 말씀이 지시하는 대로 살고자 회개하고 기도하는 거룩한 삶을 일생 살아야 하는 것이다.
중생으로 말미암아 죄의 결박에서는 해방되었으나 육의 정욕으로부터 완전하게 해방된 것은 아니다. 아직도 죄를 촉발시키는 “불씨”가 여전히 남아 있어 끊임없이 정욕의 불길이 인간으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부추긴다. 우리 인간은 육을 입고 있는 동안에는 어쩔 수 없이 육욕에 매여 있기 때문에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신자들 속의 죄는 지배력을 상실했으나 신자는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죄의 소욕(sinful desire)을 성령으로 죽이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했다(롬 8:13). 잘 아시겠지만 육신의 소욕은 우리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는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나치게 제어하려고 하면 금욕주의에 빠지게 되고 또 그대로 놔두면 육신적인 사람이 된다. 그래서 성령이 우리 자신을 제어해 주시는 것이다. 절제(self-control)는 인간의 고행, 수양, 무감각한 생활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열매이다(갈 5:22-23). 이것은 신자가 신앙생활에서 깊이 알아야 할 중요한 진리이다.
루터가 말한 대로 신자는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다. 이 말은 신자는 절반은 의인이고 절반은 죄인이라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보혈의 피로 말미암아 의인이 된 신자의 두 가지 측면을 말하는 것이다. 신자는 한편으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로 말미암아 의인이라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죄의 불씨가 여전히 우리 가운데 있는 죄인이다. 즉 성령 충만함을 통해 죄의 소욕을 죽이는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의인이 되었지만, 우리 속에는 여전히 죄를 촉발시키는 불씨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의인으로 계속 살기 위해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충만하게 역사하시도록 믿음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성령님이 우리를 온전히 지배하시도록 성령님과 함께 사는 삶을 살아야 한다. 즉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회개는 추상적인 말이 아니다. 회개는 하나님께로의 전향이다. 전향은 하나님을 순수하게 그리고 진실하게 두려워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또한 회개는 옛 사람과 육의 죽임과, 성령의 살림으로 구성된다. <기독교 강요>, 3.3.5(It is the true turning of our life to God, a turning that arises from a pure and earnest fear of Him; and it consists in the mortification of our flesh and of the old man, and in the vivification of the spirit). 회개는 히브리어로는 בושׁ요 헬라어로는 μετανοια이다. 전자는 귀환 혹은 전향을 의미하며 후자는 마음의 변화 혹은 의도의 변화를 의미한다. 전자는 죄를 깨달음이며 후자는 용서를 통한 거룩한 소욕이다. 회개는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찢는 것이다(욜 2:13). 뿐만 아니라 죄의 고백과 동시에 죄 때문에 하나님의 두려운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을 피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라고 칼빈은 말했다. <기독교 강요>, 3.3.18. 이 말은 회개의 깊은 의미를 이해하는 데 아주 중요한 말이다. 회개는 구체적으로 죄를 고백하는 것인 동시에 전심으로 그 죄의 용서를 비는 것이다. 그래서 회개는 상한 심정으로 해야 되는 것이다. 또 구체적인 회개의 열매가 있어야 한다. 확실한 방향전환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회개의 열매는 첫째, 자기를 부정(self-deny)하는 생활이고 둘째,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며 셋째, 내세를 명상하는 생활이다. 자기 부정―자기 부인―은 내적이고 자기 십자가는 외적이다.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은 거듭난 신자의 신앙생활의 핵심이다. 이런 생활을 통해서 신자는 성화되어 간다. 여기서 회개의 열매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아보자.
첫째, 신자는 자기 부정을 통해 성화되어 간다. 자기 부정(self-deny)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 한편으로는 하나님과의 관계요 다른 한편으로는 이웃과의 관계이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각해 보자. 우리는 하나님께 헌신하기 위해서 자기를 부정해야 한다. 자기 부인을 통해서 신자는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게 된다. 주님의 것이기 때문에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아야 하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롬 14:7-8). 결국 우리는 자신을 부인함으로 주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우리를 부인하지 못할 때 결국 우리는 주님을 부인하게 된다. 베드로를 보자. 그는 주님을 위해서 죽겠다고 세 번이나 장담했던 사람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생명이 위협을 받자 그는 계집 종 앞에서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지 아니했던가? 자기를 부인하지 못할 때 결국 주님을 부인한다는 진리를 가르쳐 주지 않았는가! 자기 부인은 어렵지만 참으로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자기를 부인할 수 있는가?
자기 부정이란 말하기는 쉬어도 생활로 옮기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인간은 누구나 자기 중심(self-centered or selfish)적이기 때문이다. 자기 부정이란 어떤 목적이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래서 우리 주님은 주와 복음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면 산다고 하셨다(막 8:35). 그렇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보혈의 대가를 지불하고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셨다. 이제 신자가 1만 가지의 죄악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살 때 자기 부정은 가능하다. 개혁주의 신학자는 아니지만 그리스도의 깊은 사랑을 몸소 실천한 알버트 슈바이처는 박사 학위를 4개나 가졌던 탁월한 재능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기 부인이라는 말의 의미를 확실히는 깨닫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그러나 모든 명예를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아프리카로 가기로 하나님 앞에서 결단했을 때 비로소 자기 부정의 의미를 깨달은 것 같았다고 고백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성경에서 말하는 자기 부인이 추상적인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자기를 부정할 때 깨달아지는 진리임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가 된다. 따라서 자기 부정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진정한 신자라고 할 수 없으며 동시에 회개의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한 신자라고 단언할 수 있다.
또 자기 부정은 이웃을 사랑하는 데서 보여진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많은 은사(benefits we obtain from the Lord)를 주셨다. 어떤 사람에게는 재물을, 어떤 사람에게는 재능을 주셨다. 우리에게 주신 모든 은사(benefits)는 자신만을 위해서 주신 것이 아니라 이웃의 유익을 위해서 섬기라고 주셨다. 교회에서는 교회의 공동 이익을 위해서 은사를 쓰라고 주셨다. 그러나 남을 위해서 자기의 것을 사용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는 인간이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 부인이 필요하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 자기를 부인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웃 사랑에서 “사랑”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것이 필요하다.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사랑은 자기 유익(self-seeking)을 구치 아니한다(고전 13:5). 남을 도우면서 자기 이익을 챙기는 자는 진정 이웃을 사랑하는 자가 아니라 양의 탈을 쓴 이리와 같은 자이다. 자기 이익은 이웃을 사랑하는 결과로서 오는 것이다. 그리고 이웃을 위한 올바른 은사 사용은 “사랑의 척도”(the rule of love)에 의해서 측정된다. <기독교 강요>, 3.7.5., 벧전 4:10.
둘째, 신자는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통해서 성화되어 간다. 자기 십자가는 자기 부정의 일부이다. 여기서 자기 십자가라는 말은 주님의 십자가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지는 각자의 십자가를 말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함으로 신자는 그리스도와 사귐을 갖고(빌 3:10), 고난의 의미를 배우며(롬 5:3-4), 고난 가운데서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욥 42:5-6). 이런 생활을 통하여 신자는 우리 삶의 모범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인격을 닮아간다. <기독교 강요>, 3.6.3. 여기에 신자의 행복이 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 마음(본성)대로 사는 것이 행복이라고 말하지만 신자에게는 주님을 따라가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이 행복이다. <기독교 강요>, 3.6.20.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통해서 우리는 인내와 복종을 배우며 위로를 받는다.
셋째, 성화된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마지막으로 내세에 대한 명상이 필요하다. 내세의 명상을 통하여 우리는 세상 것에 대한 지나친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지나친 집착은 씨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가시나무 속에 뿌려진 씨처럼 자라기는 하지만 결국 가시나무에 질식당하여 열매를 맺지 못하는 것과 같다. 따라서 우리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내세에 대한 명상이 필요하다. “하늘이 우리의 고국이라면 땅은 타국일 뿐이지 않겠는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곧 생명으로 들어가는 것이라면 육신은 감옥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 최상의 행복이라면,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곧 불행이 아니겠는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는 우리는 주와 따로 거한다.” <기독교 강요>, 3.9.4. 고후 5:6 참조. 따라서 우리는 살아도 주를 위해서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서 죽어야 한다. 우리는 주의 것이기 때문이다(롬 14:7-8). 그렇다고 해서 현세를 무시하고 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는 세상 것을 하나님이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용하는 원칙 가운데 사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여러 가지 선물들을 창조하신 목적은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이지 우리의 멸망을 위해서가 아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정하신 그 목적에 따라서 하나님의 선물을 사용한다면, 그러한 사용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이 목적을 열심히 추구하는 삶은 가장 바른 길을 걷게 될 것이다.” <기독교 강요>, 3.10.2. 칼빈은 이러한 원칙이 주 원칙(the main principle)이라고 했다. 분배에 있어서도 사랑이 결합되지 않은 분배는 올바르지 못하다고 했다(3.10.5).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생활방식(various kinds of living) 을 소명(callings)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주께서 정하신 생활방식이 소명이다. 그래서 각 사람은 각자 받은 소명대로 사는 것이 분수에 맞는 것이다. 좋은 행실의 시작과 기초는 주님의 부르심에 있다(Lord's calling is in everything the beginning and foundation of well-doing/<기독교 강요>, 3.10.6). 하나님이 주신 것들은 무절제하게 사용하거나 탐욕스럽게 부를 추구할 것이 아니라 소명에 따라 사용해야 한다.
소명은 좋은 행실의 시작이요 기초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그 다양한 생활방식에 따라 의무를 지정하셨다. 여기서 주께서 정하신 다양한 생활방식을 소명이라고 한다. <기독교 강요>, 3.7.6. 그래서 소명에 따른 생활방식이 의무로 주어진다. 무엇을 하던 그것이 주님이 소명으로 주신 것이라고 한다면 직업에 귀천이 없이 기쁨으로 감당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사회에서 인정받는 직업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소명에 합당한 삶을 사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주님께서 주신 소명대로 살았는가를 보신다.
회개는 구원의 원인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회개의 원인이다. <기독교 강요>, 3.4.3. 이 말은 아주 중요하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회개케 한다. 우리가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회개할 수 없다. 탕자처럼 자신의 죄를 생각할 때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러나 죽을 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돌아오기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아버지를 생각할 때 돌아갈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어떤 죄를 지었을지라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생각할 때 회개할 수 있다. 요엘 선지는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아주 감동적으로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하셨나니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요엘 2:13).
믿음으로 우리는 중생한다. 중생은 아담의 죄로 거의 말살되었던 하나님의 형상이 다시 회복되며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이제는 감격스럽게도 하나님의 공의와 거룩함을 닮아 가는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이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매일 성령의 도움으로 회개하는 생활을 해야한다. 회개의 생활은 삶의 현장에서 보여주어야 하는 삶이다. 주님을 위해서 일생 동안 자기를 부정해야 하는 삶이다.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이다. 내세를 명상하며 하나님이 주신 은사를 하나님이 주신 목적대로 사용하는 삶이다.
5. 믿음으로 칭의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 8장에 달하는 많은 분량을 통해서 칭의 교리를 설명한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칼빈이 얼마나 칭의 교리를 중요시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아닌가? 칭의 신학자라 불리는 루터는 칭의 교리를 성경의 핵심교리로 생각했는데, 무려 1000페이지에 달하는 갈라디아서 주석을 쓰면서 칭의 교리를 세밀하게 설명했다. 루터에 의하면 칭의 교리는 기독교의 모든 교리의 핵심이 되는 교리이며 만약 이 교리가 무너지면 기독교가 무너지는 것으로 봤다. 그래서 갈라디아서 주석을 루터의 조직신학이라고 부르는 학자도 있다. 칼빈 역시 칭의 교리를 중요시한 것은 사실이지만 구원론의 전부로는 보지 않고 구원 과정의 일부로 봤다.
칼빈은 칭의의 정의, 의인됨의 확신, 의인됨에 있어서 유의할 사항, 의인의 시작과 계속적인 과정, 행위에 의한 칭의 교리에 대한 고찰과 비판 등으로 칭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면 칭의란 무엇인가?
칭의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며, 은혜를 베풀어 주시는 것이라고 한다. 또 칭의는 죄를 용서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강요>, 3.11.2. 이 정의에 의하면 칭의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와 죄 용서이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하사 죄인을 의롭다 선언하시고 그 죄를 용서하신다. 이것을 ‘법정적인 칭의’라고 한다. 여기서 ‘의의 전가’란 그리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옷을 입는다(clad with Christ's righteousness)는 말이다.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덧입은 사람이란 행위로 인한 의와는 상관없이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의 의를 붙잡아 그 의를 덧입고,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가 아니라 의로운 사람으로 나타날 때에는 믿음에 의하여 의롭다 함을 얻는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칭의를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를 의인으로 받아 주시는 것이라고 간단히 설명한다. 또 칭의를 죄의 용서와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라고 말한다.” <기독교 강요>, 3.11.2(Justified by faith is he who, excluded from the righteousness of works, grasps the righteousness of Christ through faith, and clothed in it, appears in God's sight not as a sinner but as a righteous man. Therefore, we explain justification simply as the acceptance with which God receives us into his favor as righteous men. And we say that it consists in the remission of sins and the imputation of Christ's righteousness). 다시 말하면 칭의란 “즉 그리스도와 교제를 하게 된 죄인이 은혜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고, 동시에 그리스도의 피로 깨끗하게 되어 죄의 용서를 받으며 그리스도의 의를 자기의 의같이 입고 하늘 심판대 앞에 자신 있게 서는 것이다.” <기독교 강요>, 3.17.8(But we define justification as follows: the sinner, received into communion with Christ, is reconciled to God by his grace, while, cleansed by Christ's blood, he obtains forgiveness of sins, and clothed with Christ's righteousness as if it were his own, he stands confident before the heavenly judgment seat). 여기서 믿음으로 얻은 의란 우리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의로서 전가에 의해서 우리 것이 된다. 그래서 우리가 만약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해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소유하지 않는다면 실제로 우리는 의롭지 않다. 필립 홀트롭, <기독교 강요 연구핸드북>, 242. 우리는 성령님의 역사를 통하여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옷 입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함을 받는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놀라운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입었다고 말했다. 이같이 우리 죄인이 의인이 된 것은 자의로 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속으로 된 것이다(롬 3:24). 그리스도만이 구세주가 되신다. 로마 시대에는 노예가 된 자를 해방시킬 때 해방시키는 사람이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나서 노예를 해방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돈을 대가로 지불한 것이 아니라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시키는 대가로 하나님의 독생자가 멸시의 십자가를 지고 죽게 하셨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화목제물로 삼으셨다(롬 3:25). 그리스도는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우리를 의롭게 하시고 화목제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셨다. 여기서 화목제물이란 죄 때문에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막힌 담을 완전히 헐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제물이 되신 것을 의미한다.
누구든지 화목제물 되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나님은 우리를 죄가 없다고 선언하신다. 그래서 칭의는 선언적인 하나님의 행위이지 결단코 인간의 행위가 아니다. 선언적이라는 말은 법정적인 용어로 δικαιοω(롬 3:28)라는 말로서 신약에 39번 사용되며 그 중에 25번이 바울이 사용한다. 법학자에 의하면 추정과 간주라는 말이 있는데 추정이라는 말은 사실이 밝혀지면 사건을 다시 재심할 수 있지만 간주를 하게되면 새로운 사실이 발견되더라도 재심할 수 없다. 간주했기 때문이다. 선언해버렸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죄인을 의롭다고 선언한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대해서 아무도 의문을 제기 할 수 없다. 하나님이 그리스도 때문에 우리 죄를 용서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에게 주어지는 성령을 통한 믿음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하나로 연합되며 그리스도의 의가 우리에게 전가(imputation)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는다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자로 선언되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은 당신 자신도 의로우시며 그리스도를 믿는 자도 모두 의롭게 하신다(롬 3:26).
하나님 앞에서 그 누구도 의로운 자가 없다. 다 죄인이기 때문이다. 또 누구도 율법을 온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그렇다면 우리의 희망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자비에 우리의 몸을 맡겨 버리는 것이다. 우리의 희망은 오직 우리의 중보자 되시고 의이신 그리스도밖에 없다.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을 부르러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우연히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가운데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다. 우리는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한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우리가 의인됨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살 때만이 우리는 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다. 비록 불안한 세상에서 살지만 마음 가운데 잔잔히 흐르는 참 평화를 누리고, 여전히 이 세상에 살지만 이 세상에 얽매이지 않으며, 율법을 지키지만 율법에 얽매이지 않은 의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제 의롭게 된 자는 끊임없이 하나님께만 영광과 찬송을 드려야 한다. 왜냐하면 의로우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기 때문이다. 양심을 후벼파는 어떤 죄도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사하여진다. 바로 이 때문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의롭게 하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 안에서만이 우리는 참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생활은 하면 할수록 우리가 더욱 의로운 자가 됨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대로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생활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우며 행위에 의해서 의인이 되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로마 교황주의자들은 칭의 교리를 한없이 왜곡하고 있다. 그들은 칭의에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주는 그리스도 의의 전가가 아니라 인간이 성화를 추구하는 것을 도와주는 성령이라고 해석하며 그리스도의 죽음이 우리의 마음 속에 사랑을 주입하여 의롭게 된다고 가르친다. 그들은 칭의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면서도 이렇게 그 곳에 인간의 공덕을 덧붙임으로써 칭의 교리를 비성경적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선한 일은 칭의의 결과이지 선행되는 조건은 아니다. 또한 갈라디아서의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을 주석하면서 교황주의자들은 말하기를 우리는 믿음으로만 의롭게 되며 믿음은 사랑을 통하여 역사하므로 의는 최종적으로 사랑에 의존한다고 했다. <기독교 강요>, 3.11.20. 이런 논리를 따르면 칭의란 하나님의 은혜에 인간의 공덕을 포함시키는 위험한 결과가 된다. 이는 교황주의자들이 성경에 입각한 믿음과 사랑의 논리를 혼동하는 데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갈라디아서의 사랑이란 인간의 사랑(에로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아가페적 사랑을 의미한다.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서에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을 말할 때의 이 말의 의미는 칭의 교리를 말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의 믿음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으로 표현된 믿음을 의미한다. 그래서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고 할 때, 로마 교황주의자들처럼 “믿음”은 인간의 사랑을 자극하여 선을 행하게 하는 그러한 믿음이 아니다. 칼빈이 이미 말한 것처럼 의를 얻게 하는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하나님의 귀한 선물이다(엡 2:8). 교황주의자들의 갈라디아서 5:6의 주석은 칭의와 성화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데서 오는 하나의 오류라고 볼 수 있다.
확신하건대, 칭의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고,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그리스도와 연합시킴으로 죄를 용서하시고 의롭다고 선언하신 것이다. 선한 행동은 칭의의 결과이지 조건은 될 수 없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의를 우리에게 전가시키고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죄 용서함을 받고 마음에 평안을 가득히 누리며 주님이 원하시는 선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칭의에 대한 사도 바울의 견해와 야고보의 견해가 상충된다고 하지만 실제로 칼빈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기독교 강요>, 3.17.12). 야고보서 2:14-26에서 야고보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도 바울의 견해와 반대되는가?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전가에 의해서 의롭게 되지만 야고보는 사도 바울과 다른 의미에서 의를 사용한다. 야고보에 의하면 의롭게 되었다는 것은 선한 행위를 통해서 표현되어지는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선행은 의롭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하는 열매이다. 칼빈은 말하기를 “요약하면, 그는 신자들을 향해서 우리가 어떻게 의롭다함을 얻는가 하는 문제를 논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 선행의 열매가 있는 의를 요구한다. 그리고 바울이 우리가 행위의 도움이 없이도 의롭다함을 얻는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이 야고보는 선행을 하지 않은 사람들이 의롭다고 인정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 의도를 생각하면 우리는 모든 곤란에서 해방된다. 우리의 반대자들은 야고보가 칭의의 방법을 설명하는 줄로 생각하는데 그들의 가장 중요한 망상이다. 이와는 반대로, 야고보는 믿음을 가진 체하면 믿음을 구실로 삼아서 선행을 경멸하는 자들의 사악한 확신을 분쇄하려 할 뿐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어떤 방법으로 야고보의 말을 왜곡하든 간에, 야고보의 말은 두 가지 개념을 표현할 뿐이다. 즉 내용 없이 겉으로만 나타나는 믿음은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며, 신자는 이런 외형으로 만족하지 않고 선행으로서 자기의 의를 공표한다는 것이다(<기독교 강요>, 3.17.12).”
야고보는 신앙생활에서 믿음과 행위는 서로 함께 일한다(faith and his actions are working together)고 강조한다(약 2:22). 여기서 중요한 말은 함께 일한다는 말이다. 신앙생활에서 신앙과 행위는 서로 같이 일해야 산 믿음이 된다. 하나님은 믿음으로 우리를 받아 주시지만 선행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신다. 칭의에 의해서 죄 사함을 받았지만 죄의 힘(the power of sin)은 남아 있다. 비록 우리가 죄 때문에 쓰러지지만 언제나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승리한다.
6. 칭의와 성화의 관계
칭의와 성화는 구별되지만 분리할 수는 없다. 칭의도 하나님의 은혜요 성화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것을 이중은혜(Duplex Gratia)라고 한다. <기독교 강요>, 3.11.1. 칭의에 의해서 심판주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어떻게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칭의는 단회적이며 인간의 어떤 행위도 포함되지 않지만 성화는 점진적이며 인간의 행위가 포함된다. 의롭다 하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성화하게 하신다. 우리는 한편으로는 믿음으로 칭의를 얻고 다른 한편으로는 성화를 이룬다. 따라서 구원은 죄의 용서인 동시에 새로워짐이다. 전자는 하나님의 자비로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후자는 능력(성령)으로 임하는 하나님의 은혜이다. 최덕성 편저, <개혁주의 신학의 활력>(본문과 현장사이, 1999), 197. 하나님은 우리를 믿음으로 의롭다고 하시지만 선행을 행함으로 천성을 향한 거룩한 나그네로 살게 하신다.
7. 칭의의 결과로서의 그리스도인의 자유
사람들은 투쟁을 통해서 자유를 쟁취한다. 그러나 신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 자유를 얻는다. 인간에게 자유라는 개념만큼이나 중요한 개념이 또 있을까? 인간이란 어떤 존재냐고 묻는다면 자유를 가진 존재라고 말해도 틀림없을 것이다. 빅터 프랭클은 그의 유명한 저서 <죽음의 수용소에서> 나치 요원들(SS)이 수용소 사람들의 생명을 살리고 죽이는 권한은 가졌지만 그들이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자유는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감동적으로 묘사했다.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볼 때 자유란 인간이 인간됨을 결정지을 수 있는 근본적인 요소 중의 하나이지만, 인간 스스로 갖는 것이라기보다는 칭의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이것이 칼빈의 놀라운 견해이다.
자유에는 세 부분이 있다. 첫째는 율법의 저주로부터의 자유요, 둘째는 율법의 강요로부터의 자유―율법에 자발적으로 순종할 수 있는 자유(자발적인 양심의 자유)―이요, 셋째는 무해 무익한 것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자.
첫째, 신자는 율법의 저주로부터 해방되었다. 하나님은 애굽의 노예로 고통 가운데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을 당신의 권능의 손으로 출애굽 시킨 후에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 십계명을 주셨다. 이것은 그들을 얽어매기 위해서가 아니라 거룩한 백성으로 살게끔 하기 위해서였다. 이스라엘 백성은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가 되기 때문에 율법을 지켜야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죄악된 인간은 율법을 완벽하게 지킬 수 없다. 그리하여 죄로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을 살리고자 했던 율법이 오히려 인간을 죽이는 결과가 되었다(롬 7:10). 그렇다고 해서 율법이 악한 것은 아니다. 율법은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법이기 때문이다. 십계명은 우리를 의롭게는 할 수 없을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의의 규범으로 영원히 우리의 마음에 새겨지게 되었다.
사도 바울에 의하면 신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이제 율법의 저주에서 참 자유를 얻게 되었다. 율법은 더 이상 우리의 양심을 속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항상 무엇을 해야 한다고 우리에게 끊임없이 강요한다. 이것이 율법의 특성이며 법의 성격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다”(갈 3:13). 이로 인해 우리는 율법의 속박에서 해방을 얻었다. 행위로써 의롭게 된다는 매임에서 과감히 벗어나게 되었다. 이것이 율법의 저주와 속박으로부터의 자유이다.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을 두렵고 떨게 했다. <기독교 강요> 2.7.14.15.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에 율법을 지키지 못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의 요구를 만족시키셨다(롬 8:3-4). 따라서 이제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두렵고 떨리게 하는 것이 아니며, 우리 또한 기쁨 가운데 율법에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기독교 강요>, 2.11.19. 구약은 두려움과 떨림으로 우리의 양심을 속박했지만 복음은 기쁨으로 양심의 자유를 갖게 한다.
둘째, 신자는 율법의 강요(the constraint of the law)로부터 해방되었다. 법은 마땅히 지켜야 하는 것이지 지켜도 좋고 안 지켜도 좋은 것이 아니다. 즉 법은 강제성을 띠고 있는 것이다. 율법의 “강요”라는 말 역시 자발적이 아닌 강제적인 율법의 요구를 의미한다. 따라서 율법의 끈질긴 강요로부터 해방이라는 말은 이제 신자는 율법을 강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순종함을 의미한다.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심으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자발적으로 완성하도록 하신다(롬 5:9, 롬 13:8). 그래서 우리 주님께서 십계명을 둘로 요약하셨다. 십계명은 “하지 말라”는 부정형으로 되어 있지만 주님이 주신 새 계명은 긍정형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하면,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하라”는 말로 되어 있다. “하나님을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긍정 명령으로 되었다. 사랑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은 인간을 가장 인간답게 만드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자발적으로 율법을 완성해 간다.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지혜요 능력이다. 진정 자유는 순종하는 자유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유이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자가 참 자유인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참 자유인으로서 하나님께 순종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다. <칼빈성경주석>, Vol. 20. 벧전 2:16.
셋째, 우리는 무해 무익한 것들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종교적인 의무나 외부 사물에 대해서 자유를 갖는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대로 사는 것은 아니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또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자유를 사용해야 한다(고전 10:31). 그렇다. 인간은 무한정 자유로운 존재는 아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고전 10:23). 가령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야 하느냐 먹지 말아야 하느냐 하는 문제에서,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이 연약한 자가 먹어서 양심에 가책이 되거나 넘어지게 된다면 먹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연약한 자의 믿음을 세우기 위하여 자유를 제한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남을 자유케 하기 위해서 나의 자유를 제한시키는 자가 진정 자유한 자이다.
인간은 자유를 갖고 살아야 한다. 자유가 없는 사람을 노예라고 부른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자유케 하셨으니 이제 그 자유를 죄짓는 데 쓰지 말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써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자유이다.
8. 믿음의 실천과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길(기도)
칼빈의 <기독교 강요> 최종판은 80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 부분이 제 4권의 성만찬에 관한 것이고, 두 번째에 해당하는 부분이 바로 기도에 관한 장이다. 분량이 많다고 해서 가장 중요하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는 없지만, 차지하는 분량이 많은 만큼 중요하다고 인정할 수는 있을 것이다. 또한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3권 20장에서 기도에 대해서 말하기를 기도는 “믿음의 최상의 실천이며, 우리는 이것을 통해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다. 신자가 실천해야 할 것 중에서 최상의 것이 기도이다. 은혜를 받는 축복된 길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소원을 표출하는 믿음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항상 해야 할 일이며, 우리의 소원을 아뢰는 것도 항상 우리에게 필요한 일이다. 이는 우리가 하나님의 도움이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도를 호흡에 비유하기도 한다. 숨을 쉬지 않고 살 수 없는 것처럼 기도하지 않고는 단 하루도 살 수 없는 것이다.
기도에 관한 부분은 제 3권(20장)에서 52절에 달하는 많은 분량으로 설명하고 있다. 52절은 제 8항으로 나누어져 있다. 제 1항은 기도의 필요성(1-3), 제 2항은 어떻게 기도할 것인가와 그 결과(4-16), 제 3항은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17-20), 제 4항은 성도들의 중보기도(21-27), 제 5항은 사적인 기도, 제 6항은 교회의 보편적인 기도, 제 7항은 주기도문(34-49), 제 8항은 기도할 때 인내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이제 이에 대해 하나하나 자세히 알아보자.
1) 기도의 필요성
기도는 왜 필요한가? 대답은 어렵지 않다. 우리 신자는 죽을 죄인이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부족한 우리 인간에게 행복을 주시고, 궁핍한 자에게 부를 주신다. 하나님은 모든 좋은 것의 주인이 되시고, 그것을 우리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이 약속하신 것을 내 것으로 얻을 수 있는가? 우리는 그것을 기도로 얻을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기도해야 할 이유이다. 한편 기도의 필요성은 인간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해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에 기도할 수 있다. 이것이 기도의 객관적인 근거이다. 주관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주시고자 하는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과 인도하심이 없이는 단 하루도,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다. 즉 이런 주관적인 측면에서는 기도의 필요성은 우리 인간에게 있다. 하나님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기 때문이다.
기도를 호흡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이 호흡하지 않으면 살 수 없듯이 기도하지 않고는 신자의 생활을 유지해 나가기가 심히도 어렵다는 말이다. 이처럼 기도는 해도 좋고 안 해도 좋은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권면하지 않았던가(살전 5:16)!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신자의 열정, 정직, 감사, 묵상, 기쁨, 확신은 모두 기도를 통해서 온다.
칼빈은 신자가 기도해야 할 이유를 여섯 가지로 친절하게 열거하고 있다. 첫째, 하나님을 항상 찾고 사랑하며 섬기겠다는 소원과 열정을 불일 듯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둘째, 하나님께 우리의 소원을 말하고 알려드리기 위해서이다. 셋째, 기도를 하면 모든 좋은 것이 우리에게 온다는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넷째, 기도함으로 하나님이 응답하신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섯째, 기도로 구한 것을 받음으로 더욱더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기 위해서이다. 마지막으로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선하신 섭리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기도의 올바른 자세
① 경외하는 심정으로
기도를 인간에게 하는 어리석은 자는 없을 것이다. 기도는 위엄이 있으시고 장엄하시며 공의로우시고 자비로우신 아버지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래서 기도 드리는 자세가 굉장히 중요하다. 자세는 인간의 단순한 스타일이 아니라 그 사람의 인격의 표현이다. 기독교적인 면에서 말한다면 기도의 자세는 그 사람의 신앙의 표현이다. 마음내키는 대로 함부로 기도해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성령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인간은 자기 뜻대로 기도하기가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롬 8:26)고 말씀하고 있다. 이 말씀은 성령이 직접 탄식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 속에 확신과 소원을 일으키셔서 하나님의 뜻대로 기도하도록 도우신다는 말이다.
② 회개하는 마음으로
회개는 왜 해야 하는가? 만약 우리에게 회개할 것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다. 회개란 절대자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늘 잘못을 저지르므로 하나님을 의지해야 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다. 인간은 너무나도 연약하다. 그래서 늘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우리의 죄를 낱낱이 고백하고 사죄의 은총을 덧입기를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기도할 때 진실한 마음, 회개하는 심정으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③ 겸손한 마음으로
겸손하다는 말은 교만하다는 말과 반대되는 말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으로 하나님이 제일 싫어하시는 것이다. 교만이란 자기가 최고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다. 이에 비해 겸손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최고시요 주님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칼빈에 있어서 겸손이란 단순히 인간 앞에서 겸손(humilitas)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겸손(docilitas)을 말한다. 말씀을 순종하고자 하는 겸손이다. 기도는 이런 겸손한 마음으로 주님께 낮아져 용서를 비는 것이다. 인간은 죄인이기 때문에 용서 없이 어떻게 하나님께서 좋은 것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겠는가?
④ 소망과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실 것을 소망하고 확실성을 갖고 기도해야 한다. “소망해야 한다”는 말은 기도를 당장 들어주시지 않는다 해도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기도하라는 말이다. 또 “확신한다”는 말은 우리의 경험에서라기보다는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 기초하여 확신을 갖고 기도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약속은 변치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것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
3) 유일한 중보자 그리스도
그리스도 예수가 유일한 중보자라는 말은 구원론적인 입장에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기도할 때 우리의 기도를 하나님께 상달케 하시는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삼위일체적으로 말한다면 성부 하나님은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해 주시는 분이고, 성자 하나님은 중보자이시며, 성령 하나님은 기도를 활성화시키시는 분이다.
우리 신자는 기도할 때 왜 그리스도 이름으로 기도하는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보이지만 왜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할 수 없는가? 그것은 성부 하나님께서 오직 성자 하나님을 우리의 대언자요 중보자로 삼으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죄악된 인간 사이에 중보자는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딤전 2:5). “너희가 무엇이든지 아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24).
4) 성도들의 중보기도
칼빈은 그리스도 예수 한 분만이 중보자가 되시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람도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중보적인 기도를 드릴 수 없다고 했다. 그렇게 하는 것은 성경을 잘 모른 소치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빼앗는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중보기도란 신자가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라든지, 목사가 교인을 위해서 하는 기도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의미에서의 “중보”라는 말과 다른 사람을 대신해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중보기도” 한다는 말은 단어는 같지만 그 의미는 하늘과 땅처럼 큰 차이를 가지고 있다. 우리는 중보기도를 할지라도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대신하는 위치에서 중보기도 하는 것은 아니다.
5) 사적인 기도와 공기도
우리 신자는 사적으로 하나님께 열심히 그리고 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기도는 항상 하는 것이지만 특별히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도에는 주님의 용서를 비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이는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사와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기도도 중요하다. 교회에서 공기도를 할 때 경외하는 마음과 회개하는 심정으로 겸손하게 하나님께 용서를 빌고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한다.
6) 주기도
칼빈의 의하면 주기도는 “기도의 표준”이다. <기독교 강요>, 3.20.48. 주기도에는 우리 신자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할 것과 기도할 수 있는 내용이 다 포함되어 있다. 이 주기도는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를 대신해서 죽으신 구속주 우리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표적인 기도이다. 여기서 “가르치다”라는 말이 중요하다. 우리 주님을 선생으로 말한다면 최고의 선생이시며 지혜로 말한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지혜이시다. 사랑으로 말하자면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주신 분이요, 능력으로 말하자면 천지를 지으신 분이다. 주기도는 이러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이기 때문에 그 가치와 내용, 깊이에 있어서 어떤 기도보다 더 중요하다.
“기도의 표준”이라는 말을 원어로 살펴보면 기도를 위한 규칙(orandi regula/rule for prayer)이라는 말이다. 터툴리안은 주기도를 “합법적인 기도”(legitimam orationem/lawful prayer)라고 했다. <기독교 강요>, 3.20.48. 이 점에서 보면 주기도란 우리 신자가 무엇을 어떻게 기도해야 할 것인가를 가르쳐 주는 기도의 원리라는 말이 더 정확하다고 생각한다.
칼빈은 주기도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눈다. 첫째 부분은 하나님의 완전성을 의미하며 둘째 부분은 인간의 무력성을 의미한다. 전자는 우리 신자가 나아가야 할 목표를 의미한다면 후자는 우리의 무기력에 대한 대책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전자와 후자는 조화를 이룬다. 주기도는 여섯 가지 기원(祈願)으로 되어 있다. 첫째 부분에 세 개의 기원과 둘째 부분에 세 개의 기원으로 되어 있다.
첫째 기원은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이다. 이 기도는 인간의 연약성과 수치와 관련되어 있다. 우리 인간은 원래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대로 지으시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도록 창조하셨다. 이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목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연약하고 죄악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영광을 욕되게 하는 때가 더욱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연약한 우리를 도와주셔서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도록 도와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성화된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도록 기도해야 한다.
둘째 기원은 “나라이 임하옵시며”(마 6:10)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통치가 우리 신자들의 생활을 온전히 지배하도록 하는 기도로서, 이는 i)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통치에 항거하는 인간의 정욕을 강력한 성령의 힘으로 바로 잡아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고, ii) 우리의 모든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살도록 기도하는 것이며, iii)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라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생활을 감당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도하는 것은 이러한 생활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점점 확장되기 때문이다.
셋째 기원은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10)이다. 이 기도는 하나님이 전 우주를 통치하신다는 것을 깊이 깨달아 알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또 이렇게 하기 위해서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도록 성령님께서 우리의 정과 욕을 다스려 주시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새로운 심령을 창조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넷째 기원은 주기도의 둘째 부분의 시작이다. 신자 자신에 대한 기도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마 6:11)이다. 이 기도는 우리의 육신에 필요한 것들뿐만 아니라 영적인 양식까지도 의미한다. 이 기도에서 “오늘”이라는 말과 “일용할 양식”이라는 말은 우리의 욕망에 대한 무제한적인 충족을 의미하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때 그때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하나님께서 하나씩 공급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섭리 가운데 즐겁게 살아가도록 하는 기도이다.
다섯째 기원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마 6:12)이다. 여기서 죄는 “빚”이라고 말한다. 그 이유는 죄 값을 갚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빚을 갚을 능력이 전혀 없는 존재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다 갚아주셨다. 우리 죄를 모두 용서해 주셨다. 이것은 참으로 하나님이 값없이 베푸시는 자비이다. 이 점에서 볼 때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라는 말은 우리가 남의 죄를 용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은 아니다. 다만 우리 주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도 주님의 용서의 사랑을 덧입어서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너그럽게 용서할 뿐만 아니라 남의 시기·질투마저도 용서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셔서 매일 매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성화된 삶을 살도록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다.
여섯째 기원은 “우리를 시험에 들지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마 6:13)이다. 이 기도 속에는 우리가 순례자의 길에서 사탄과 싸워야 하며, 또 여러 가지 어려움에 봉착하게 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즉 이 기도는 이러한 싸움과 어려움 속에서 성령의 도움을 입어서 승리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 살면서 시험을 피해서 살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아무도 없다. 하나님은 시험하시는 분이 아니다. 시험의 근원은 바로 우리의 정욕에 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다스려 주셔서 시험을 물리칠 수 있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가 시험을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악하고 강한 마귀 사탄과의 싸움에서 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악마의 궤교와 꼬임에서 우리를 구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이다. 끝에 “아멘”이 첨가된 것은 하나님께 구한 것을 반드시 들어주실 것을 믿기 때문에 아멘을 하는 것이다.
주기도는 우리 신자로 하여금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아야 함을 가르쳐 준다. 처음 세 가지 기원은 특히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고, 두 번째 세 기원은 신자 자신을 위해서 배정된 기도이다. 그러나 전체적으로는 모두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다.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의 보호하심과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누리면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기도의 필연성은 하나님의 명령이요 들어주시겠다는 하나님의 틀림없는 약속에 있다. 그래서 기도할 수 있는 것이다. 기도는 신자가 실천해야 할 최상의 것이며 겸손한 마음으로 말씀에 기초하여 믿음으로 기도해야 한다. 주기도는 우리 신자가 무엇을 어떻게 구해야 하는가를 가르쳐 주는 기도의 규칙이고, 원리이며, 논리이다.
9. 예정
예정론 교리는 성 어거스틴을 제외하고는 초대교부들과 중세에는 그리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았는데, 종교개혁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예정론에 대한 교리가 중요하게 거론되기 시작하였다. Loraine Boettner, The Reformed doctrine of Predestination, 367. 칼빈주의 학자들에 의하면 칼빈이 예정 교리의 중요성을 가르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만이 칼빈 신학의 전체는 아니라고 한다. 프랑시스 원델, <칼빈의 신학 서론>, 299.
1536년 초판 <기독교 강요>에는 아직 예정론이 독립적으로 취급되지 않고 단지 사도신경 제 2부에 관한 설명을 할 때와 교회의 정의에 관한 설명을 할 때만 예정에 관해 언급을 했다. 1537년에 불어로 저술한 “교리문답”에서는 먼저 율법에 대한 설명을 한 후 구속에 관한 사항들을 다루기 앞서 간단히 예정을 다룬다. “하나님 말씀의 씨앗은 오직 주님께서 영원한 선택을 통하여 자신의 자녀이며 천국의 후사가 되리라고 예정하신 자들에게만 뿌리를 내리고 성장하여 결실을 맺는다. 하나님의 동일한 권고에 의해 세상이 형성되기 이전에 버림받은 모든 자들에게는 뚜렷하고 분명한 진리의 설교가 죽음의 악취로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의 말에 의하면 설교(하나님의 말씀 선포)가 동일하게 모든 사람에게 아름다운 결실을 맺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오직 선택한 자들에게만 결실을 맺는 것이다. 불행하게도 선택되지 않은 자들에게는 오직 죽음의 열매만 낳게 된다는 것이다.
1539년판 <기독교 강요>와 1554년판 <기독교 강요>에서도 예정론이 보다 발전되기는 했어도 (구원의 역사 다음으로 취급) 하나의 장(chapter) 속에서 섭리에 관한 설명과 함께 취급된다. 그러나 1559년 최종판 <기독교 강요>에서는 예정론의 배열을 수정하여 섭리에 관한 논의를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논한 끝 부분에 두고 성화와 의인에 관한 전개 다음에 예정론을 배열했다. 최종판 <기독교 강요>에서는 무려 4장에 걸쳐서 예정론을 다루고 있다. 그렇다면 예정이란 무엇인가?
1) 예정론 이해의 전제 조건
칼빈의 예정론을 다루면서 한편으로는 선택을 유기보다 더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환언하면 칼빈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선택을 다루기 위해서 유기가 필요한 것이지 유기를 위해서 선택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의 자비의 표현이요 유기는 하나님의 공의의 표현이다. 그렇다고 해서 유기에는 하나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에베소서에서 사도 바울은 선택을 하나님의 신령한 축복이라고 했다(엡 1:3). 예정은 선하시고 의로우신 하나님의 작정으로 선한 일을 하라고 예정하신 것이지 나쁜 일을 하라고 예정하신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칼빈의 예정론은 이론이나 사변이 아니라 성경의 교리라는 것이다. 칼빈은 위트레트(utrecht) 부감독(副監督)인 알버투스 피기우스(Albertus Pighius)와 베네딕트 수도원의 수도승인 게오르기우스(Georigius of Sicily)의 조건적 예정론에 대한 반박 논문인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에서 예정론의 창시자는 어거스틴도 아니고 자신도 아니며 오직 성경이라고 했다. 칼빈은 계속해서 말하기를 성경이 예정에 대해서 말하도록 하지 않았다면 자신은 예정론에 대해서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존 칼빈, <칼빈의 예정론>, 한국칼빈주의연구원 편역( 기독교문화협회, 1988), 83(각주 9), 86. 성경이 예정론의 창시자라는 말은 아주 중요하다. 우리가 자동차가 고장이 났을 때 정비소에 가서 고치게 된다. 그러나 정비소에서도 고치지 못할 때 그들이 하는 말이 “만든 데로 가지고 가시오”라고 말한다. 이 말이 시사하는 의미가 무엇인가? 결국 자동차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자동차를 설계하고 만든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정론의 창시자가 성경이라고 한다면 성경이 제시하는 대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깊이 이해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칼빈은 “인간의 이성을 하나님의 말씀 아래 두는 겸손이 참 지혜이며, 이 겸손이야말로 인간의 지혜를 규율하는 원리”라고 했다. <칼빈의 예정론>, 86. 그렇다. 하나님의 예정의 비밀을 가장 깊이 이해하는 것은 설명이 아니라 말씀하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예정론을 인간의 사변으로 이해하려는 것은 피상적인 이해로서 사람을 번뇌케 하고 양심에 고통을 당하게 하며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수용하는 것이 예정을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비결이다. 이렇게 이해한 사람은 성경에 나오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처럼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는 것처럼 행복하고 환희에 찬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
2) 정의
칼빈은 예정이란 “영원한 선택: 하나님께서는 이 선택에 의해 어떤 사람은 구원에, 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처하도록 예정하셨다”라고 정의했다. <기독교 강요>, 3.21. 어떤 사람은 구원에 어떤 사람은 멸망에 예정되었기 때문에 이것을 칼빈의 이중예정론(double predestination)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예정은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언어는 예지가 아니라 예정이라는 단어이다. 하나님은 과거 현재 미래를 항상 현재로 이해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 인간의 미래의 조건을 미리 예견하시고 예정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예지라는 말은 모든 일이 하나님 앞에서는 항상 있다. 과거 현재 미래가 항상 현재로 이해하신다. 모든 것을 현재 우리가 기억하고 판단하고 이해하는 것처럼 이해하고 계신다는 것이 하나님의 예지이다. (<기독교 강요> 3.21.5.) 예정은 영원한 하나님의 선택 혹은 작정이다. 즉 하나님께서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을 예견했기 때문에 예정한 것은 아니다. 그와 상관없이 창세 전에 이미 예정하신 것이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상태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어떤 사람에게는 영생이 예정되었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저주가 예정되었다는 말이다. 여기에는 어떤 인간의 공로도 낄 틈이 없다. 왜냐하면 인간이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 의해서 정해져 버렸기 때문이다.
3) 중요성
칼빈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예정론의 유익과 중요성, 목적을 아주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예정론은 그들이 잘못 생각하는 것처럼, 아무 유익도 없이 마음을 권태롭게 하는 교묘한 사변이 아니다. 오히려 이 교리는 경건한 사람들의 필요에 아주 적합하고 확실한 교리인 것이다. 왜냐하면 이 교리는 우리의 믿음을 건전하게 세워 주고, 우리로 하여금 겸손케 하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지극히 선하심에 대한 우리의 경외심을 고양시키고, 이 선하심을 찬양하도록 우리를 일깨우기 때문이다. 사실상 우리의 믿음을 견고히 세우는 데 있어서, 이 선택 교리에 대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만큼 더 적절한 것은 없다. 성령께서는 영원하시고 변함없으신 하나님의 선의(good will)에 기초하고 있고, 세상의 모든 풍파와 사탄의 모든 공격, 그리고 육신의 연약함으로 말미암아 취소되지 않을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선택을 우리의 심령 속에 확실히 증거하여 준다. 왜냐하면 우리가 선택된 이유를 하나님의 품안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에, 참으로 우리의 구원은 우리에게 보장되어진 것이다. <칼빈의 예정론>, 77-78.
칼빈에 의하면, 첫째, 예정론은 우리 마음을 고뇌케 하는 사변이 아니다. 둘째, 예정론은 경건한 사람에게 필요한 교리이다. 셋째, 예정론은 우리의 믿음을 건전하게 세워 준다. 넷째, 신자로 하여금 겸손케 해 준다. 다섯째, 선하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해 준다. 여섯째, 구원의 절대적 확실성을 가질 수 있게 한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선택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에서도 예정론은 우리 인간의 구원의 역사가 하나님의 값없이 베푸는 자비의 원천에서 흘러나옴을 말해 준다고 했다. 이는 하나님께서 무차별적으로 구원의 소망을 주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어떤 사람에게는 유기를 주시는데 이런 대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자비의 은혜를 알게 하시기 때문이다. <기독교 강요>, 3.21.1.
출처 : 개혁 신학 연구소
글쓴이 : 고경태 목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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