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비는 왜 그쳤는가 렘3:1-10
서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주신 땅은 가나안 땅입니다.
다른 땅이 아닌 가나안 땅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는
그 땅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신앙교육하기에 가장 합당한 땅이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면 그 땅은 문자 그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잘못되면 괴로운 땅이 되는 것입니다.
가나안 땅에서는 특히 비가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비를 이용하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을 징계하기도 축복하기도 하셨습니다.
렘3:2 ‘네 눈을 들어 헐벗은 산을 보라 네가 행음하지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들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 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3:3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이 말씀 또한 비에 관한 분명한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3:3절의 ‘단비’는, 가을비 입니다. 이른 비입니다.
밀과 보리를 파종(播種)하게 하는 비인 것입니다.
영어성경에 showers (heavy rain) 으로 나옵니댜.
10월이 되면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이때는 물이 많이 필요해서, 큰 비가 내렸습니다.
‘늦은 비’ latter rain 는 spring rain 즉, 봄비라고 합니다.
3월말에서 4월초에 내리는 비로, 결실기에 필요한 비라고 합니다.
우리는 봄비가 이른 비, 가을비가 늦은 비라고 생각하지만, 이스라엘은 반대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른 비는 왔지만 늦은 비가 안 온다면 씨는 뿌렸는데
이삭이 나오지 않고 쭉정이만 나오는 문제가 생깁니다.
이처럼 쭉정이만 일 년 내내 자라면 추수기엔 아무것도 없게 되어
그 해 농사는 흉년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늦은 비가 안 온다는 것은 씨만 뿌리는 헛수고의 결과가 오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은 이른 비, 늦은 비는, 3:3
농사가 잘 되라고 농사의 신인 바알과 아세라를 따라갔더니
도리어 비가 안 와서 이삭이 안 맺어져 농사가 망했다는 얘기입니다.
농사가 잘 되라고 우상을 섬겼더니 농사를 망쳤습니다.
자식이 잘 되라고 우상에게 빌었더니 도리어 자식이 망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건강하게 해 달라고 우상에게 기도했더니 도리어 건강이 악화되고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우상에게 소청을 했더니 재산이 다 날아갔는데
도대체 어째서 그렇게 됐느냐는 얘기입니다.
물론 우상을 섬기는데도 부자가 되고 건강하며 자식들이 잘되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은 하나님이 버린 자식들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숭배를 하는데도 잘 된다는 것이 좋은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우상숭배를 하는데도 잘되지 않고 자기가 원한 소원과 반대의 결과가 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과 하나님의 택함이 없는 백성과는
삶의 원리가 결정적으로 다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택함 받은 이스라엘 백성의 성공 원리와
바벨론이나 앗수르나 애굽백성의 성공 원리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우상 숭배를 하면 안되는데
우상숭배를 심하게 해도 잘사는 나라가 있지 않느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나라는 하나님께서 택하신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애굽이나 앗수르나 바벨론은 우상을 섬겨도 잘되는데
그건 하나님께서 택하신 나라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의 법을 따르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잘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백성인 유다 백성들에게 이른 비는 왔는데 늦은 비, 단비는 안 왔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에 중요한 명사와 동사가 무엇인지 자세히 살펴봐야 되는데
본문 말씀을 통해 이른 비를 주신 하나님께서 왜 늦은 비는 안 주시는지 살펴보겠습니다.
◑1. 늦은 비가 그친 이유
3:3 그러므로 단비가 그쳤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본문에 보면 늦은 비가 그친 이유를 설명하는 중요한 세 가지 명사가 있습니다.
▲첫째, 행음(adultery) 때문입니다.
본문에 음란을 행했다는 행음(行淫)이란 단어가 매우 많이 나오고 있습니다.
유다는 나무가 없는 붉은 민둥산인 자산(赭山)에서 행음했습니다. *벌거벗은 산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행음을 정죄하시는데 세 가지 종류의 행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행음(physical adultery)입니다.
정상적으로 허락된 부부관계를 떠나서 음행을 행하는 것입니다.
간음하지 말라는 일곱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이러한 육체적인 행음을 구약에서도 정죄하고 신약에서도 멸망할 죄로 정죄하고 있습니다.
육체적인 행음을 하시는 분은, 늦은 비가 안 내리는 인생이 된다는 걸 기억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육체적인 행음을 하면 그 죄를 하나님께 고하고 용서받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인생 후반부가 괴롭습니다.
자녀들 때에 가서라도 반드시 벌이 임하게 된다는 걸 아셔야 됩니다.
그걸 회개하고 용서받기 전에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늦은 비를 막으신다는 사실을 아셔야 됩니다.
-정신적인 행음(mental adultery)입니다.
마5:28절에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간음은 아니라 할지라도 마음에 이미 간음한 마음의 간음입니다.
-셋째는 영적인 행음(spiritual adultery)입니다.
페인트칠해 놓은 돌이나 나무보고 신이라 하는 우상숭배가 영적인 간음입니다.
세상과 벗 되는 것도 영적인 간음입니다.
이런 우상을 섬기는 이유가 뭡니까? 자기가 원하는 욕망이 있는데, 그걸 들어달라는 거죠.
그게 없으면, 우상을 섬길 사람은 아무도 없죠.
그런데 하나님은 이런 ‘영적 행음, 간음’을 몸서리치게 싫어하시고,
그런 신자들은 반드시 벌주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질투심 때문에!
약4:4절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교회 오면 별 재미가 없고 예배드리면 졸려서 어쩔 줄을 몰라 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너무 재밌는 것이 세상과 벗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영적인 간음입니다.
행음하는 사람은 씨를 뿌려도 싹이 나질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른 비는 와도, 늦은 비가 오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3;3
젊은 시절에 잘나갔을지 몰라도 노년기에는 결국 그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행음은 대한민국의 민족적, 국가적인 죄악입니다. 그러므로 행음하지 마십시오.
▲둘째, 배역(backsliding) 때문입니다.
렘3:6, 7, 8, 11, 14, 22절 등에 배역 또는 패역이라는 단어가 나옵니다.
배역의 영어표현인 ‘backsliding'은 ‘뒤로 미끄러지다’는 뜻입니다.
처음에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거 같지만 나중에 뒤로 미끄러지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처음에는 기도도 열심히 하고 헌금도 잘하며 예배도 잘 드리더니
조금 지나니까 기도시간을 줄이고 헌금액수도 줄이며 예배도 대충 빼먹고
2~3주에 한 번 예배드리며 '목사님 내가 나와 앉아 있는 것만도 고마운 줄 아십시오'라며
앉아 있는 행위가 배역입니다.
유럽축구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우리나라 축구선수인 박지성 선수가 있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첼시가 만났습니다.
경기가 1:1로 비겨서 끝나고 페널티킥으로 승부를 결정짓는데
첼시의 다섯 번째 키커가 공을 넣으면 끝나는 상황이 됐습니다.
그런데 이 선수가 차다가 뒤로 미끄러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그가 찬 공이 그만 골대 위로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래서 4:4가 되어 페널티킥 연장전을 하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첼시를 이겼습니다.
우승상금은 100억이고 준우승 상금은 60억인데,
그렇게 한번 미끄러지는 바람에 40억이 날아가 버렸습니다. 그 외 모든 영광도 날아가버렸죠.
신앙생활도 뒤로 미끄러지고 배역하게 되면 큰 손해가 오게 됩니다.
예레미야 2:19절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패역이 너를 책할 것이라
your backsliding will rebuke you’고 기록되었습니다.
배역하게 되면 결국 자책감과 하나님의 징계가 따르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단비, 이른 비, 늦은 비가 다 그친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할 때에 뒤로 물러서지 마시고 앞으로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를 해도 작년보다 더해야 됩니다.
작년에는 새벽기도를 한 번도 안 나왔어도, 올해는 일주일에 한 번은 나와야 됩니다.
작년에는 금요철야 예배에 한 번도 안 나왔어도, 올해는 나와야 됩니다.
작년에는 성경을 안 읽었어도 올해는 성경을 읽어야 됩니다.
6월 말에 우리교회에서 성경퀴즈대회를 엽니다. 그 퀴즈대회에 참석하시고
대회를 준비하시며 결심하고 성경을 읽으십시오.
그리고 작년보다 헌금도 더 드려야 자기 삶이 축복됩니다.
이처럼 신앙생활이 뒤로 미끄러지지 마시고 앞으로 나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 거짓(pretense) 때문입니다.
여기서 거짓은 ‘거짓말하다’는 ‘lie’가 아니라 ‘~인 체하다’는 ‘pretend’와
‘그렇게 믿게 만들다’는 ‘make believe’ 의 거짓입니다.
3:10절에 ‘이 모든 일이 있어도 그 패역한 자매 유다가 진심으로 내게 돌아오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할뿐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회개를 하긴 해도 진심으로 안하고 피상적으로 회개하는 척만 pretend 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렘3장의 배경은, 요시야왕이 종교개혁을 했습니다. 성전에서 율법책이 발견되었거든요.
그리고 앞서 므낫세-아몬 왕은, 아주 악하고 우상숭배로 찌들린 왕이었죠.
그래서 그 후임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추진한 것입니다.
유다 왕들의 순서가 므낫세, 아몬, 요시야,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로 내려오는데
시드기야왕 때 유다가 멸망했습니다. 요시야 왕이 종교개혁을 하고 성전을 수리했는데
도대체 왜 시드기야왕 때 멸망했는지, 저는 성경을 읽을 때 의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본문 예레미야 3장에서 답을 발견했습니다.
요시야왕은 진실 되게 회개를 했어도, 그 백성들은 회개가 진실 되지 못했습니다.
진심으로 하지 아니하고 “거짓”으로 피상적으로 회개하는 척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지지 않았습니다.
렘4:3절에 ‘나 여호와가 유다와 예루살렘 사람에게 이같이 이르노라
너희 묵은 땅을 갈고 가시덤불 속에 파종하지 말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씨를 뿌리려면 소의 뒷부분에 쟁기를 달아서 땅을 갈고 거기에 뿌려야 됩니다.
돈을 받고 씨를 뿌리면서, 주인이 안 본다고, 가시덤불에 슬슬 뿌리고 일했으니,
나중에 임금을 달라면, 엉터리로 가짜로 거짓으로 피상적으로 일하는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직장생활을 해도 이처럼 거짓으로 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사장님이 볼 때만 살짝 잘 하다가 사장님이 가면 엉망으로 일을 하면 안 됩니다.
사장도 그 자리에 올라갈 때는, 벌써 사람을 많이 겪었기 때문에
고용인의 행동을 보고 진심으로 하는지 가짜로 하는지를 분별합니다.
당시 유다 백성들은 회개를 해도 피상적으로 거짓된 회개를 했습니다.
그건 가시덤불 속에 가짜로 씨를 뿌리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씨를 뿌려봐야 열매를 못 맺는 걸 뻔히 알면서 씨를 뿌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회개만 피상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기도도 피상적으로 거짓되게 했습니다.
렘3:4~5절에 ‘네가 이제부터는 내게 부르짖기를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는 나의 소시의 애호자시오니 노를 한 없이 계속하시겠으며
끝까지 두시겠나이까 하지 않겠느냐
보라 네가 이같이 말하여도 악을 행하여 네 욕심을 이루었느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유다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시는 아버지이신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또 가서 나쁜 짓을 하려고 합니다.’라는 식으로 기도드린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악이용하여
거짓된 기도를 하며 악행을 계속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수십 년간 하나님을 무시하다가 가뭄이 닥쳐오자
비로소 옛날의 행복했던 시절에 사용했던 다정한 말로 여호와께 호소합니다.
여기서 예레미야는 '애호자(보호자)'란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4
이 말의 원어 '알루프'는 흔히 '친구'라고 번역되며
때로는 '길들여진 짐승', '황소', '남편', '가장'등의 다양한 의미로도 쓰였습니다.
아마 예레미야는 대단한 주의를 기울여 이 단어를 선택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말속에는 여호와의 자비를 악용한 이스라엘이 마치 응석과 고집만 늘어난 아이처럼
제멋대로 가증스러운 길로 나아갔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유다 백성들에게 늦은 비를 거두신 이유는
이렇게 행음, 배역, 거짓의 세 가지 단어 때문입니다.
창녀의 특징은 수치를 모르는 것인데 하나님께서는 이런 유다 백성을 향하여
‘창녀의 낯을 가져 수치를 알지 못하는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3
그리고 ‘땅을 더럽힌 백성이라’고 말씀하십니다. 3:1
땅이 더러워졌기 때문에, 거기다가 단비를 내려 봐야 단비도 더러워집니다.
그러므로 비를 내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유다백성들은 행음하고 배역하고 거짓됐습니다.
◑2. 늦은 비가 내려서 맞으려면
그런데 유다백성뿐만 아니라 우리 중에도
누가 이 세 가지 죄악에서 자유스러울 수 있는 사람이 있겠습니까?
누가 이 세 가지 죄악으로부터 ‘나는 깨끗한 존재다.
하나님이시여 나에게는 늦은 비를 줘야 될 거 아닙니까?’하고 강하게 주장할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간음한 여인보고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하니
돌을 내려놓고 다 도망간 사람들처럼 우리도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늦은 비가 없어도 이혼 당해도 그리고 저주에 저주를 받아도 마땅하고
유구무언인 존재들이 유다백성들이요, 우리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롭지 않으시다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신다면, 우리는 늦은 비를 맞을 자격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소망 없고 자격 없는 백성들이, 늦은 비를 맞아 이삭이 나고 열매 맺으며
하나님의 축복을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본문에는 두 가지 중요한 명령어가 나오고 있습니다.
▲첫째, 자복하라(acknowledge)는 것입니다.
3:13절에 ‘너는 오직 네 죄를 자복하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고
네 길로 달려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이방 신에게 절하고 내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였음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고 기록되었습니다.
자복하라는 것은 영어로 ‘acknowledge’로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너에게 죄가 있다. 네가 행음했다. 네가 배역했다. 네가 거짓됐다.”고 하시면
핑계를 댑니다.
“하나님, 내 입장이 되어보십시오. 하나님께서도 내 입장이 되면 아마 그랬을 겁니다.
하나님 내가 이런 이유로 그랬습니다. 저런 이유로 그랬습니다.”라고 핑계대지 말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랬냐?”고 하시면 “예” 혹은 “아니오”로만 대답해야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핑계대지 말고 죄를 자복해야 됩니다.
▲둘째, 돌아오라(return)는 것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가운데 가장 유명한 동사가 이 돌아오라는 뜻의 ‘슈브’입니다.
예레미야서에만 ‘슈브’가 125번 사용되었습니다.
바람난 아내가 자복하고 돌아오면 남편되신 하나님께서 받아주시겠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 이혼 당해도 당연한 여자라 할지라도 자복하고 돌아오면 받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아내가 이 남자 저 남자와 행음하다 “여보, 내가 바람피웠소. 나를 받아주겠소?”하면
받아주시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받아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이 그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한 번 사랑하시면 그 사랑이 변함이 없으십니다.
사랑의 대상이 잘하거나 잘못하거나 그 사랑이 변함이 없으십니다.
렘31:3절에 ‘나 여호와가 옛적에 이스라엘에게 나타나 이르기를 내가 무궁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는 고로(I have loved you with an everlasting love)
인자함으로 너를 인도하였다 하였노라’고 기록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없는 사랑(everlasting love)이지만
인간의 사랑은 변덕스러운 사랑(capricious love)입니다.
인간의 사랑은 뜨거웠다 차가웠다 사랑했다 바람났다 미워했다하며 변덕스럽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잘못하고 죄지으며 배역하고 행음하며 거짓되어도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다는 것입니다.
3:11절로 12절에도 변함없는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배역한 이스라엘은 패역한 유다보다
오히려 의로움이 나타났나니 너는 가서 북을 향하여 이 말을 선포하여 이르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배역한 이스라엘아 돌아오라
나의 노한 얼굴을 너희에게로 향하지 아니하리라
나는 긍휼이 있는 자라 노를 한 없이 품지 아니하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영원무궁한 사랑으로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3. 택한 자에게 주시는 은혜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께 있는 게 아니라 인간에게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올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복음을 들어도 깨닫지 못합니다.
예수 믿으면 죄 사함 받고 영생을 얻으며 구원받는다 해도 깨닫지 못합니다.
귀로는 들어도 영혼으로 못 깨닫습니다.
그런데 하나님 사랑의 극치는 여기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순종할 수 없는 죄인들 가운데 선택된 자들에게
순종할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electing grace)입니다.
하나님께서 ‘자복하고 내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시지만
인간은 자복하고 돌아올 능력이 없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택하심의 은혜로 그들 가운데 자복하고 돌아올 능력을 주시는 것입니다.
3:14~15절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배역한 자식들아 돌아오라 나는 너희 남편임이니라
내가 너희를 성읍에서 하나와 족속 중에서 둘을 택하여 시온으로 데려오겠고
내가 또 내 마음에 합하는 목자를 너희에게 주리니 그들이 지식과 명철로 너희를 양육하리라’
하나님께서 ‘돌아오라’ 하시고, 곧장 ‘내가 데려오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인간에게는 돌아올 능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읍에서 한 명(one in a town) 그리고 족속 중에서 두 명을 택하여서
시온 즉,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택하심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자복하고 회개할 능력을 주어 시온으로 돌아온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는 지식과 명철이 있는 목자들을 세워 그들을 양육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육적인 이스라엘에게 미친 게 아닙니다.
육적인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받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 택함을 받은 소수인 남은자 즉, 영적인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영원무궁한 사랑이 미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영적인 이스라엘이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는 스스로 돌아올 능력이 없는 죄인들 가운데
하나님께서 택하셔서 돌아올 능력을 주시고 회개하고 예수 믿게 하여
구원받게 하고 목자들을 통하여 양육 받게 하는 곳입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이 우리 자유의지의 공로라고 말하지 마십시오.
사람에게는 그런 자유의지가 없습니다.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된 존재요 영적으로 죽은 존재입니다.
요6:44절 전반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전적타락, 영적인 면의 전적 무능교리가
가장 건전한 신학, 건전한 신앙의 출발점이 되는 것입니다.
막스 루카도(Max Lucado)라는 유명한 미국 사람이 리더십에 관한 글을 종종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에게 구원을 가능하게 만들어 주셨다(God made salvation possible).
하나님께서 99%는 이뤄놓으셨다. 그런데 인간이 1% 자기 자유의지를 가지고
자복하고 회개하여 믿어야 구원받는다. 인간이 할 일이 1%는 있다. 그것이 인간의 책임이다.’
라는 식으로 얘기하는데 그건 그 사람의 얘기입니다.
그 사람이 인기가 있는 저자인줄은 몰라도 절대적으로(simply) 성경은 아닙니다.
다시 말해 그것은 진리의 말씀, 성경말씀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는 100% 죄인이요 100% 하나님께 돌아올 능력이 없는 것이요
100% 하나님의 택하신 은혜로 예수 믿고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사람은 한 성읍에서 한 명이요 족속 중에서 두 명으로
다수가 아니라 소수라는 것입니다. 3:14
지금도 온 세상에서 예수 믿고 구원받은 사람은 다수가 아니라 소수입니다.
우리가 그 소수에 들어갔다는 것을 감사하고 평생 그 은혜를 갚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주제별 설교 > 회개설교 100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이키지 않으면 쓸모없게 된다 렘13:1~14절 (0) | 2024.12.29 |
---|---|
누가 주의 백성에게 고통을 주는가? 렘6:1~30 (0) | 2024.12.29 |
여호와를 버림과 경외함이 없는 것이 고통인 줄 알라 렘2:1~19 (0) | 2024.12.29 |
처음 사랑을 회복하라 계2:1-5, 골3:13 (0) | 2024.12.29 |
금하지 아니하였더라 삼상3:13 (0) | 2024.12.29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