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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유월절 예화모음 13편

by 【고동엽】 2023. 3.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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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월절 어린 양
 
히 11:28; 고전 5:7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히 11:28)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믿음으로 (모세는) 유일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의 집 문설주에 바른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장자들을 죽이던 천사들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날 밤에 바로의 주권이 무너졌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애굽에서 나왔다(출 12:1-13).

우리들을 위해서도 유월절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이 길이 그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길이 골고다로 인도할 것을 주님께서 잘 아셨다. 거기서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희생당할 수밖에 없음을 주님은 알고 계셨다 (요 1:29; 벧전 2:24; 히 2:14).

제자들이 다락방에 앉았을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들을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실 어린 양 곧 아들을 창세 전부터 미리 알고 계셨다고 기록했다.

"저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세상에 있는 금을 모두 드려도 사탄과 죄의 권세 아래서 우리를 해방시키는데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흠 없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으로 드리셨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자신을 구속할 수 없을 것이다(벧전 1:18-21).

 

 

 
 
 

 

 

유월절의 세 가지 뜻
 
출애굽기 12;21∼28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을 치러 두루 다니실 때에 문 인방과 좌우 설주의 피를 보시면 그 문을 넘으시고 멸하는 자로 너희 집에 들어가서 너희를 치지 못하게 하실 것임이니라”(출12:23).

이스라엘 사람들이 모세의 이야기를 듣고 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도,모인 모든 장로들의 얼굴에도 긴장감이 감돌고 있습니다. 400여년의 애굽 생활이 이들의 세대에 마치게 되는 것이니까요. 바로 오늘밤을 지나면 말입니다.양을 잡아 그 피를 집문 바깥쪽에 바르라는 모세의 명령에는 세 가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첫째는 이 행동을 통해서 이스라엘 사람들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양을 잡고 그 피를 바르는 ‘행동 자체’에 효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모세가 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다’는 것입니다. 믿으니까 명령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이지요. 믿고 삶으로써 옮기는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어떤 분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은 그분의 인격적 권위를 인정하는 증거며 결과입니다.
두번째 의미는 이 사건을 겪는 사람들이 그들 평생 이 일을 기억하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유월절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은혜 체험의 원형’입니다. 은혜는 감사와 헌신을 통해서 우리 삶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계속적인 감사와 자신의 생활을 드리는 헌신이 없으면 은혜는 지속되지 않습니다. 은혜의 경험은 퇴색되고 나중엔 ‘옛날에 그랬었지’ 하는 정도로 추억 속에나 존재하게 됩니다. 유월절은 늘 지금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너희는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대로 너희에게 주시는 땅에 이를 때에 이 예식을 지킬 것”(25절) 이라는 말씀에 담긴 뜻이 이것입니다.


세번째로 아주 중요한 뜻이 유월절 사건에 담겨 있습니다. 유월절은 지금 애굽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며 이 사건을 체험하는 세대뿐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세대에게 대대로 전해져야 합니다. “너희와 너희 자손이 영원히 지킬 것이니 …” 나중에 후손들이 유월절이 무슨 예식이냐고 물을 때 하나님의 구원사건을 말해주라는 것입니다. 신앙 전승의 기능이 유월절 사건에 담겨 있습니다.

출애굽기의 유월절은 그리스도의 구원사건을 미리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유월절의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 유월절의 삼중 의미는 우리가 구원받은 사건에도 적용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구원의 사실을 감사와 헌신을 통해서 풍요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웃과 자손에게 그 신앙을 전해야 합니다.

 

 

 
 
 

 

 

삶의 새 출발
 
출애굽이 있기까지 인간의 시간 흐름은 단순히 '날과 달과 연한의 진행'이었다.
그러나 출애굽은 인간에게 새로운 달력을 안겨 주었다. 곧 출애굽이 있던 달은 '달의 시작' 곧 '해의 첫 달'이 된 것이다(2절). 하나님의 구속이 역사의 시간 사이클을 새롭게 바꾸어 놓았다.


이 사이클은 구원 받은 백성이 자기 삶을 어떻게 꾸려가야 할 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한 해의 사이클을 맞이할 때마다, 특별히 일년을 주기로 돌아가는 농경사회를 생각할 때에 또 이를 현대적인 정황에 적용하자면 매번 일련의 주기로 돌아가는 어떤 일을 시작할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의 시작에는 무엇에서부터 해방되어 무엇으로 부르심을 받았는 지를 기억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그 출발의 원동력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구속이어야 한다.


구속은 우리의 신분과 소명을 바르게 깨닫게 해 주고, 현실 가운데서의 나의 존재 의미를 다시 확인해 주며, 이로써 세상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게 해 준다.

 

 

 
 
 

 

 

어린양
 
그러면 한 해의 첫 달에 하나님의 구속을 기억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무엇이어야 했는가. 그것은 '어린양'이었다.
어린양의 피는 집 문 좌우 설주와 인방에 발라져서 애굽사람들과 이스라엘 사람들 사이를 구별하는 표적이 되었고(13절), 어린양의 고기는 각 가족대로 이스라엘의 모든 식구들이 같은 날 함께 먹어서(3, 4, 8절) 하나님 앞에서 공동체 전체가 거룩해지는 방편이 되었다(참조, 레 6:27, '무릇 그 고기에 접촉하는 자는 거룩할 것이며...').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로 볼 때 출애굽의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제사장 나라로 구별하고 거룩한 나라로 세우는 예식이었다(출 19:6).

더욱이 고기를 먹을 때에는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오래 삶은 것이 아닌 불에 구운 고기를, 누룩으로 부풀리는 데에 시간을 들이지 않은 무교병과 요리되지 않은 쓴 나물과 함께 급히 먹어야 했는데(9, 11절) 이는 하나님의 구속이 인간의 '준비'를 통해 임하지 않고 전적인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으며 사람은 단지 그 급하게 임하는 구속을 언제라도 받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하니 하나님의 구속을 얻는다는 것 곧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얻는다는 것은 사람의 오랜 준비 끝에 되어지는 일이 아니라 지금 급하게 임하는 하나님의 초청이며 도전이다

 

 

 
 
 

 

 

유월절과 성만찬
 
이 유월절은 신약에서 주의 만찬과 비교된다(마 26:17; 막 14:12; 눅 22:7-8).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지시를 따라 유월절 지낼 장소를 마련했다. 하지만 그들의 먹을 어린양은 여전히 없었다. 주님은 살과 피를 나누는 성만찬을 통해서 친히 제자들의 유월절 먹을 것이 되어 주셨다.

이 성만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구속을 앞두고 그것을 준비하기 위해 가진 예식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준비시키어 구속을 얻게 하기 위해서 아직 이렇다할 믿음이 없는 제자들을 친히 당신의 피로 구별해 주시고 당신의 살로 거룩하게 해 주신 것이다. 그러하니 그들의 구속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성만찬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구속을 기억해야 한다. 그 구속은 우리의 인생 사이클의 새 시작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 매일의 시작이어야 한다. 우리의 매일이 유월절일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은혜가 우리를 인도해 가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묵은 누룩을 내어버리는 일이다(고전 5:7). 그것은 이제껏 나의 진실과 순전함을 감추게 하고 나 자신을 부풀리어 내보이게 했던 옛 사람의 교만이다. 또 내 안에서 뭔가 시간을 들여 준비해 보려 했던 인간적인 노력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급한 초청과 도전의 소리를 듣고, 내 껍질과 부풀림을 벗어버리고 순전하고 진실한 자로서 하나님의 구속하심을 기다리고 받아들이며 그 안에 항상 머물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유월절 예식의 의미를 묻는 자녀들에게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의미를 설명해 주었던 것처럼 성만찬의 의미를 묻는 우리들의 자녀에게 분명하고 확신 있게 '나에게 일어난 구속의 사건'을 설명해 줄 수 있어야 한다(26절).



곧 무엇으로 인해 내가 구별될 수 있었고 무엇으로 인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었는지 곧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와 살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유월절은 어제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의 체험이며 또 미래를 준비하는 시작이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출애굽기 13;1∼10
“이스라엘 자손 중에 사람이나 짐승이나 무론하고 초태생은 다 거룩히 구별하여 내게 돌리라 이는 내 것이니라 하시니라”(출13:2).

내 소유가 아닌 것을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을 도둑질 강도짓 절도 사기 횡령 등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왜냐고요? 하나님이 시작하셨고 하나님이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그분이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 말입니다.
유월절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 사실을 기억하게 하는 절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유월절 식사 장면을 볼까요. 식탁에 가족이 둘러앉습니다. 어제는 어머니가 집안의 누룩을 모두 갖다 버렸습니다. 누룩을 넣지 않은 떡(무교병)을 먹으면서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이야기합니다.

“얘들아,우리 조상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했는데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거기에서 탈출하게 되었단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계속해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가르칠 것입니다.


무녀리 곧 처음 난 것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이 애굽 땅에 있는 모든 무녀리를 죽음의 재앙으로 치실 때에 하나님의 은혜로 이스라엘의 무녀리들은 살아남았기 때문입니다. 처음 난 것은 모든 것의 대표입니다. 그래서 처음 난 것이 하나님 것이라는 얘기는 더 나아가서 모든 것이 그분의 것이라는 말입니다.


십일조 헌금은 바로 그런 뜻을 담고 있습니다. 열 가운데 하나만 주님의 것이고 나머지 아홉은 내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 모든 재물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면서 그 표시로 그 중 가장 귀하게 구별한 하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 하나엔 나머지가 모두 걸려있습니다. 재물만이 아니라 우리의 건강과 자녀, 아니 우리 생명 자체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고백을 드리는 겁니다.



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면서 주일을 거룩하게 구별한 날로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주일은 한 주일의 첫 날입니다. 모든 시간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첫 날은 시간의 십일조라고 할 수 있지요. 처음 시간을 하나님께 드리면서 나머지 모든 시간과 날이 하나님의 것임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유월절에 무교병을 먹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무교

절은 보리걷이를 시작할 때와 맞아떨어집니다. 전에 쓰던 누룩을 다 치워버리고 새로 추수한 곡물로 떡을 만들어 먹으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또 먹을거리를 시작한다고 고백합니다. 유월절과 바로 이어지는 7일동안의 무교절은 해방과 구원의 절기입니다. 핵심적인 원리는 ‘새로운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런 분입니다. 창조를 통하여 그 분은 존재를 열었습니다. 예수의 구원으로 새로운 시간을 열었습니다.

 

 

 
 
 

 

 

8월의 묵상
 
8월하면 8·15 광복절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와 유대인은 닮은 데가 많다. 그것은 두 나라가 모두 압제받은 역사의 경험 때문일 것이다. 우리에게 광복절이 있다면 유대인들에게는 유월절이 있다.
유대인들은 유월절날 식탁에 몇 가지 상징적인 음식을 놓는다. 하나는 쓴나물이다.

과거의 쓴 역사를 되새기도록 하기 위함일 것이다. 둘째는 마초(Matzoh)라는 빵이다.
 효소를 넣지 않은 무교병이다. 셋째는 삶은 달걀이다. 유월절날 식탁에 삶은 달걀을 내놓는 이유를 어느 랍비는 이렇게 설명했다.


 “모든 식물은 말랑말랑하고 연하다가도 열을 가하면 굳어진다.
유대인들도 열을 받으면 더 강해지고 굳어진다. 그것이 유월절날 삶은 달걀을 먹는 이유다”
평소 해이해졌다가도 고난에 처하면 강해지는 민족이 유대인들이다.

 넷째는 아라자라는 음료를 마신다. 우리는 끝내 승리한다는 축배인 것이다. 8월만 되면 우리는 민족을 생각하게 된다.


 

 

 
 
 

 

 

유월절과 무교병
 
제57회 광복절을 맞이했다. 1910년 대한제국 융희 4년 8월29일 내각 총리대신 이완용과 일본통감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한·일합병조약에 조인함으로써 36년간 우리나라는 일본의 식민지로 인권을 유린당하며 온갖 수탈을 당했다.


또 일본은 동아시아를 평정한다는 미명하에 대동아전쟁을 일으켜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을 전쟁터로 강압적으로 끌고가 총알받이로 만들었고 젊은 여인들을 군위안부로 보내는 등 말할 수 없는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그러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1945년 8월15일 일본이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게 된 것이다.

우선 해방이라는 말과 광복이라는 말의 의미를 살펴보자. 해방은 압박받거나 얽매였던 상태에서 풀려나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광복이란 광명세계로 복귀한다는 뜻으로 빼앗긴 주권을 다시 회복함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나라는 일본이 항복함으로써 해방이 되었고 주권을 다시 회복하여 광명세계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8·15 광복절은 민족적 큰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이스라엘 민족은 애굽에서 430년동안 온갖 고초를 당하며 살아왔고 그 고통이 극에 달했을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시고 그로 하여금 애굽의 바로 앞에서 10가지 재앙을 일으키게 해 해방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이 유월절은 우리나라의 광복절과 같은 큰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유월절과 우리나라의 광복절은 큰 차이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애굽에서 종살이하면서 먹던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딱딱한 무교병과 쓴 나물을 먹으며 흠없는 어린 양이나 송아지를 제물로 드리며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다. 광복절을 공휴일로 정해 이 날을 빈 공간으로,쉬는 날로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해방 초기에는 이에 대한 어떤 이벤트성 기획을 세울 만한 정황이 없었고 또 경제개발 등 현안 사업에 끌리다보니 엄두를 낼 수 없었던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성서에서 말하는 유월절과 우리의 광복절을 비교해서 바른 자세의 광복정신을 가져야 할 것이다. 우리 국민은 잊어버리는 데 남다른 점이 있다. 오늘의 참을 수 없는 수모와 고통도 며칠이 지나면 까맣게 잊어버린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도 역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월절을 잊지 않도록 유월절에 대한 규례를 제정해주셨던 것이다.

우리는 성서가 말하는 유월절 행사에서 광복절의 절기행사를 배웠으면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 저녁에는 구운 양고기와 쓴나물,무교병을 먹고 포도주 4잔을 순서에 따라서 1잔씩 마시며 손을 씻었다고 한다. 이때 첫 잔의 포도주를 마신 후에는 출애굽 때의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했고 이 이야기를 듣고 찬양을 했다. 또 두번째 잔을 마시면서 빵을 자르고 세번째 잔을 마신 뒤 찬양하면서 네번째 잔을 마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광복절을 그냥 공휴일로 제정하여 일반 공휴일과 같은 것으로 취급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날 우리는 과거 일본의 압제하에서 가난과 가족의 이별 및 사별,인권 유린을 당했던 일들을 상기하고 다시는 이같은 일이 없도록 이날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무교병을 먹듯 옛날 일제하에서 먹던 초근목피를 먹어 보며 역사의 주재이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드리며 주님께 나라의 장래를 의지하는 광복의 절기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 한가지 모든 인류에게 큰 유월절 광복의 절기가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월절 어린 양으로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보혈을 흘리심으로써 이 피의 증거를 가진 사람마다 애굽에서 양의 피가 문설주에 발라진 집에 재앙이 넘어갔던 것처럼 구원의 은혜가 임하게 된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이스라엘의 유월절과 예수님의 보혈은 자유와 해방과 광복을 여는 중요한 절기며 증거인 것이다.

 

 

 
 
 

 

 

주의 만찬
 
이 예식이 제정된 때는 주님께서 배반당하시는 밤이자 죽음을 당하시기 전날 밤이었다.
그 때는 후에 최후의 만찬으로 알려진 자리를 갖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제자들과 함께 모인 매우 감동 깊은 순간이었다. 세계 모든 지역의 수많은 사람들은 이 장면이 그림으로 표현되자 즉시로 그것을 알아보았다.


초기 신자들은 그 모습이 그들의 기억에 뚜렷이 새겨졌으므로 로마 지하동굴 벽에 그것을 새겨 놓았다.
 유대인의 유월절 밤에 주 예수님은 전혀 새로운 의식을 소개하셨다.


 그분은 떡을 취하여 축사한 후 그것을 떼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며, "받아 먹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고 말씀하셨다(마 26:26-28). 다른 두 복음서 기자들도 동일한 말씀을 기록해 넣었다(막 14:22-25; 눅 22:14-20).


 

 

 
 
 

 

 

만찬의 이름들
 
그것은 주님께서 친히 소집하셨고, 친히 가장 중요한 손님이 되신 까닭에 주의 만찬으로 불리운다(고전 11:20). "주의 식탁"(고전 10:21)이란 표현은 보다 넓은 의미를 지니며, 만찬뿐만 아니라 그분의 사람들을 위한 그분의 모든 준비를 포함한다.


그것은 또한 우리가 그 예식에 참여할 때 그리스도와 및 성도들과 나눔, 혹은 사귐을 갖게 되는 까닭에 교제라고도 불리우며(고전 10:16), 일반적인 식사방법을 단순히 나타내 주는 까닭에 떡을 떼는 예식이라고도 불리우며(행 2:42; 20:7; 고전 10:16), 주님의 분부의 표현을 근거로 주님을 기념하는 예식이라고도 불리운다.


또 어떤 사람들은 주님께서 떡과 잔에 대해 축사하신 관계로 "사례"(thanksgiving)를 뜻하는 "성찬"(eucharist)이란 표현을 사용해 왔는데(마 26:26) 이것은 성경의 실례가 아니다.

어떤 교회들은 "성례"(sacrament)란 표현을 만찬에 적용시키는데 이 말은 군대(sacramentum)에 입대할 때 로마 병사들이 하는 충성의 맹세로부터 나온 말로서 후대 사람들에 의해 그 뜻이 상당히 왜곡되어 왔다.

그 교회들은 성례를 하나님께서 그분의 은혜를 수여하시는 의식("은혜의 수단")으로, 그리고 참예자들에게 어떤 초자연적인 능력을 주는 의식으로 간주한다.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이 죄사함과 관계가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러한 가르침이 일절 없다. 성례적인 의미를 강조하는 사람들과 대조되는 부류는 그것을, 상징물을 통해 영적인 실체를 반영하는 기념예식으로 간주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유대인의 짐승제사는 결코 죄를 제거해 주지 못했으며, 다만 십자가에서 흘리신 주 예수님의 피를 예표해 주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오직 그분의 피만이 죄를 제거할 수 있다(히 9:12-14).

 

 

 
 
 

 

 

만찬의 역사적인 배경
 
주의 만찬은 유대인의 유월절 밤에 제정되었다. 그 때로부터 1500년 전 하나님의 손이 이스라엘을 애굽의 속박에서 해방시켰다. 그분의 명령을 따라 그들은 애굽 전역에 임할 심판을 면할 보호책으로서 흠없는 어린 양을 죽여 그 피를 그들의 집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출 12장). 그들의 영구적인 규례로서 제정된 그 절기의 세부 사항은 한결같이 깊은 의미를 지녔다.

그것은 세상 죄를 짊어짐으로써 우리를 하나님의 심판에서 보호할 그 위대한 제물을 가리켰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자신의 어린 양을 준비하고 계셨다(창 22:8; 사 53:7). 예수님은 세례요한에 의해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으로서 크게 환영을 받았다(요 1:29). 그분의 영광스런 칭호 중 하나는 어린 양이다(계 5:6). 그분은 유월절 절기의 성취셨다."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옛 절기는 다가올 보다 큰 성취의 그림자에 불과했다(골 2:17; 히 10:1).

모든 경건한 유대인들은 유월절 절기를 충실하게 지켰다(마 26:17). 그것은 그들의 구속을 기념하는 절기였다. 이 거룩한 규례의 밤에 예수님은 떡과 잔의 기념 규례를 제정하셨다. 그 이후로 그 예식은 신자들의 마음 속에 그들의 구원을 위해 내어준 몸과 흘려진 피를 기억나게 했다. 그것은 유월절이 유대인들에게 그러했듯이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심히 거룩한 예식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유월절의 대치였다. 이스라엘은 많은 의식들을 준수했으나 그리스도인의 교회는 오직 이 한가지 기념적인 규례만이 주어졌을 뿐이다.


주 예수님은 신자들에게 규례로서 주어진 예식을 사도 바울에게 직접 분부하셨다.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고전 11:23-25). 주의 만찬은 신자들의 예배의 정규적인 부분이 되었다(행 2:42,46). 초대 교회는 그 규례를 그들의 집회의 중심으로서 매주마다 지켜 행했다(행 20:7). 그것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에 준수되었다. 소위 초대 교회 "교부들" 혹은 지도자들은 그 예식이 주일, 혹은 일요일마다 지켜졌다고 기록했다("순교자 저스틴", "열두 사도의 교훈집").


 

 

 
 
 

 

 

만찬의 기념
 
1. 누가 참석할 수 있는가?
분명 유월절이 유대인들만을 위한 것이었을진대(출 12:43) 주의 만찬은 그리스도인들만을 위한 것이다. 주님께서 처음 그 예식을 제정하신 것은 "그분의 백성"을 위해서였다.



그분께서 부활하신 후 그분을 기념하여 떡을 떼기 시작한 사람들은 제자들이었다. 어떤 신자들은 만찬에 참예할 때 그들의 영적인 상태를 돌아보지 않은 관계로 하나님의 징계에 대한 경고를 받았다(고전 11:18-31).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복음, 혹은 인격을 해치는 교리를 주장하는 사람들(요이 9-10절; 갈 5:12-13)은 물론, 판단받지 않은 악 가운데 계속 머물고 있는 사람들(고전 5:12-13)도 마찬가지로 출교시켜야 했다. 반면에 적극적으로 말해서,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고백하고 그러한 믿음과 일치된 삶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만찬에 영접되어야 한다.

2. 어떤 절차가 요구되는가?
우리는 주님께서 이 기념예식을 제정하신 장면에서 이에 대한 중요한 지침을 보게 된다. 주의 만찬은 정교한 예식보다는 단순성으로 특징지워진 것으로 보인다.



 그분은 어떤 정해진 규율이나 절차를 명시하지 않으셨다. 그 다락방은 훌륭하게 장식된 예배처소가 아니라 식사와 교제를 위한 긴 식탁만이 준비된 조촐한 방이었다. 그분이 홀로 예식을 주관하셨다. 준비물은 식탁에서 늘상 볼 수 있는 두 가지 사물인 떡과 잔뿐이었다. 비록 그 당시에 누룩 없는 떡이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측되긴 하지만 아무 특별한 종류의 떡도 요구되지 않았다.


 떡의 종류보다는 오히려 예식에 참예하는 자가 도덕적으로 깨끗할 것(누룩없는 상태)이 강조되었다(고전 5:6-8). 잔에는 "포도나무 열매"가 담겨 있었다(막 14:25; 마 26:29). 포도 열매가 어느 정도 발효되거나 어느 정도 물에 섞여져야 하는지는 끊임없이 논란이 되고 있으나 성경은 아무 구체적인 언급이 없다. 중요한 것은 떡과 잔이 주 예수님의 몸과 피를 상징한다는 것을 바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상징물의 재료가 아닌 주님께 마음이 집중되어야 한다


모든 제자들이 떡을 떼고 잔을 나누었다. 고린도전서 14장 26-34절은 떡을 떼러 모인 신자들의 모임에 관한 고린도전서 11장 내용의 연속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여러 형제들에 의한 참여가 암시돼 있으며, 혼란이 아닌 질서가 강조되었다. 그리고 교제의 식사가 종종 만찬과 관련되었다.

3. 주의 몸을 어떻게 분변하는가?(고전 11:29)
우리는 상징물의 중요성을 인식해야 하는데 그것은 그 상징물들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신 주 예수님의 사역을 증거해 주기 때문이다(히 9:26).우리는 우리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한다(고전 11:28-32).어떤 이들은 그릇되게도 만찬을, 예수님께서 자신의 몸을 먹고 자신의 피를 마시는 것에 대해서 하신 말씀과 연관시키고 있다(요 6:53).



 그러나 그 말씀은 만찬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구원을 힘입기 위한 신자의 합당한 자세에 대한 것이다."이것은 내 몸이니"라는 말씀은 "나는 문이니"라는 말씀과 상통한다. 두 경우 모두 여러 경우에 나타나는 비유적인 진술에 속한다. 이 상징물들과 관련하여 야기되는, 기적적인 변형을 시사하는 몇몇 그릇된 가르침들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1) 화체설(化體說)
이 견해는 상징물들이 "그리스도의 몸과 영혼 및 신성"자체로 변화된다는 이론이다. 이 "그리스도의 실질적인 임재"는 참예자들이 그분의 실제 몸을 먹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이론에 의하면 갈보리의 희생이 매 예식 때마다 반복되고 산 자와 죽은 자들을 위해 드려진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10-18절은 결코 다시 드려질 수 없는, 죄를 위한 단 한번뿐인 되풀이되지 않는 제사가 있음을 강조함으로써 이 이론을 거부한다. 주님의 제사는 완성되었고 완전하다.

2) 공재설(共在說)
이 견해는, 떡과 잔은 변하지 않지만 그러나,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그리스도의 몸의 실체가 임재하여 참예자들에게 수여된다는 이론이다. 성경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일절 없다.

3) 영적 임재설.
이 견해는 "그리스도께서 마치 뼈와 골수에 스며들듯이 우리 안에 자신의 생명을 전사시키시기 때문에" 참예자들은 만찬시에 그리스도를 취하게 된다는 이론이다(칼빈). 이 이론 역시 아무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

4. 우리는 떡을 뗌으로써 무엇을 성취하는가?
만일 우리가 이 규례를 단순히 실행한다면 우리는 주님의 유언을 실천함은 물론 우리가 그분을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주게 된다. 이것은 결코 규정주의가 되는 것이 아니다. 또한 우리는 사도들의 모본에 일치하게 된다. 신자들의 무리로서 우리는 함께 우리의 방법이 아닌 주님의 방법대로 그분을 기념한다.



우리는 그분께서 복음을 통해서 생명과 불멸성을 가져오셨고 우리가 그 안에 포함되었다는 사실로 인해 기뻐한다. 우리는 떡과 잔에 참예할 때 믿는 무리의 일원으로서 개인적으로, 인격적으로 참예한다. 한 떡 속에 우리의 연합이 표현되어 있다(고전 10:17). 잔은 교제, 혹은 공동의 사귐을 말해 준다(고전 10:16). 그분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에 우리는 그분께서 이루신 모든 것 안에서 그분과 한 몸이다.


우리는 죄와 의에 대하여 그분의 태도를 공유한다. 우리는 떡을 떼고 잔을 마실 때마다 자주 주님의 죽으심을 선포한다(고전 11:26). 이 예식은 그 자체가 구원의 메세지이다. 그 이행 기한은 "그분이 오실 때까지"라고 표현되어 있다. 따라서 매 예식은 주님의 재림을 앞 둔 마지막 예식이 될 가능성이 있다.


* 만찬을 위한 준비
구약성경을 살펴볼 때, 유월절을 지키는데는 여러가지 준비가 요구되었다. 아무도 기분내키는대로 임의로 참예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신약의 성도들에게도 다음과 같은 주의깊은 준비가 요구되었다.

1. 자기 점검.
주의 만찬을 위한 참된 준비는 자기 점검으로부터 시작된다(고전 11:28-32). 이것은 참예자를 제외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준비시키기 위한 것이다. 우리는 먼저 주님과 자신과의 관계를 살피고 모든 기억나는 죄를 자백해야 한다.



그런 다음 다른 사람들(특히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관계를 돌아보아야 한다. 예식에 참예하기 전에 먼저 다른 신자들과의 불편한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노력해야 한다(마 5:23-24). 성경은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지 않도록 자신을 돌아보는 문제를 소홀히 하지 말것을 경계하고 있다. 고린도 교회에서는 이 부분을 경히 여김으로 말미암아 육체적인 질병과 죽음이 초래되었다.

2. 묵상.
만일 우리가 예식에 참예하러 오기 전에 여가활동을 즐겼거나 주님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주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우리의 준비는 실패하고 만 것이다.

우리는 주님을 기억하기 위해 우리 마음을 준비시키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읽거나, 신령한 노래를 부르거나, 신자들이나 가족과 함께 주 예수님에 관해 교제를 나누는 시간을 갖는 것이 필요하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주님께 미리 준비된 것을 드리게 된다. 다윗은 말하기를 "값 없이는 내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리지 아니하리라"(삼상 24:24)고 하였다. 이같이 미리 우리 자신을 준비할 때 주의 만찬 예식은 생동감 없는 진부한 분위기를 벗어나게 된다.

* 결론
예배는 신자의 최고의 의무이자 특권이다(요 4:23; 눅 10:41-42). 우리는 제사장으로서 영적인 제사를 드린다(벧전2:5). 그분께서 분부하신대로 정규적으로 주님을 기념하는 일은 여가활동이나 가족모임이나 그밖의 다른 임무들보다 우선시되어야 한다.



제사장이라는 중요한 직분을 가진 자로서 우리는 성도의 무리 가운데서 우리의 입술의 열매인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릴 특권을 지니고 있다(히 4:17-18). 우리는 또한 하나님께 하나의 예배 행위로서 물질을 드려야 하며(빌 4:17-18), 끝으로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서 그분께 드려야 한다(롬 12:1-2). 예수님은 "나를 기념하라!"고 말씀하셨다.

 

 

 
 
 

 

 

유월절 어린 양
 
히 11:28; 고전 5:7

"믿음으로 유월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 한 것이며"(히 11:28)

"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어 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

"믿음으로 (모세는) 유일절과 피 뿌리는 예를 정하였으니 이는 장자를 멸하는 자로 저희를 건드리지 않게 하려한 것이며". 이스라엘 백성의 집 문설주에 바른 유월절 어린 양의 피가 장자들을 죽이던 천사들을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았다.



그날 밤에 바로의 주권이 무너졌다.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애굽에서 나왔다(출 12:1-13).

우리들을 위해서도 유월절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이 길이 그분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 길이 골고다로 인도할 것을 주님께서 잘 아셨다.

거기서 세상의 모든 죄를 위한 유월절 어린 양으로서 희생당할 수밖에 없음을 주님은 알고 계셨다 (요 1:29; 벧전 2:24; 히 2:14).

제자들이 다락방에 앉았을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받으라 이것이 내 몸이니라"고 말씀하셨다. "또 잔을 가지사 사례하시고 저희에게 주시며 가라사대 너희가 다 이것을 마시라 이것은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7-28).


사도 베드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들의 죄를 위해서 죽으시고 우리들을 영광 가운데로 인도하실 어린 양 곧 아들을 창세 전부터 미리 알고 계셨다고 기록했다.



 "저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세상에 있는 금을 모두 드려도 사탄과 죄의 권세 아래서 우리를 해방시키는데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흠 없는 어린 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대속으로 드리셨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우리는 자신을 구속할 수 없을 것이다(벧전 1: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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