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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로마서 10장11-13 / 구원에 부요하신 하나님

by 【고동엽】 2022. 11. 14.
■2022년1월31일(월)■


(로마서 10장)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3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묵상/롬 10:11-13)


◆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사도바울은 '부끄러움을 당하다'라는 단어를 어떤 것을 기대했을 때 거기에 못 미치는 것에 주로 사용했다(고후 9:4).   마치 단단한 바위인 줄 알고 짚었는데 진흙 펄이거나, 든든한 동아줄인 줄 알고 매달렸는데, 썩은 밧줄에 불과할 때, 부끄러움이란 단어를 사용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멸시받는 자리를 기꺼이 취하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으며, 부활하셨다.  그리고 자기를 믿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고,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범사에 감사하는 마음을 주셨다.


예수님을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 예수님을 믿은 결과는 기대 이상이다. 나는 믿을수록 더욱 이것을 느낀다.


◆ 부요하신 주님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주님은 구원에 인색한 분이 아니라 '부요'하신 분이시다.


나는 청년 시절에 구원의 확신이 사라진 적이 있었다.
소위 신령한 목사라는 사람이 우리나라 신자의 99% 이상이 가짜라는 주장에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80%라고만 해도 견뎠을 텐데…. 실은 이런 주장하는 분들이 위험한 사람들이다. 자기만이 옳다는 결론이 되기 때문이다.


구원의 확신이 사라진 신앙생활은 그야말로 비참했다. 찬송가에는 기쁨이 없었고, 기도는 허공을 치는 것 같았다. 회개도 해보고, 울부짖기도 해보았지만, 여전히 우울했다. 온갖 신앙 서적을 읽어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영적 우울증이 몇 달씩 지속되었다.


어느 날 우연한 기회에 로마서 10장을 암송하기 시작했다. 1절, 2절……. 입으로 시인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약속의 말씀 9절, 10절까지 외웠다. 여전히 내 심령은 감동이 없었다. 그런데 12절을 외울 때 내 영혼에 빛이 비쳤다.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마음 속에 '부요'라는 단어가 크게 와 닿았다. 
그러면서 주님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나는 구원에 인색한 자가 아니다"


깊은 감동이 밀려왔다.
주변 환경이 소리 지를 수 없는 상황이라 침묵했지만, 내 마음속에 감사와 찬양이 솟구쳤다.


그리고 바로 그 뒷 구절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 라는 말씀이 '부요'라는 말씀과 그렇게 잘 어울리는 말씀인 줄을 그때야 비로소 깨달았다.


당시에 "예수님 찬양, 예수님 찬양"이라는 가스펠 송이 천만 성도들의 대표곡이었는데, 그 노래의 3절이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로다"였다. 흥이 겨워서 열심히 부르곤 했지만, 별 의미를 생각지 않고 불렀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깨달으니 이것이 얼마나 놀라운 약속인지를 느끼게 되고 감격하며 부를 수 있었다.


그 이후로 나는 단 한 번도 나의 구원을 의심해본 적이 없다.
우리나라 신자의 99.999%가 가짜라고 누가 주장해도 더는 내 구원을 흔들 수 없다.


종교인들은 주님을 구원에 인색한 분으로 만들었다.
구원 조건에 십일조를 붙이고, 봉사를 붙이고, 각종 종교적 의무를 갖다 붙였다.
어떤 자들은 깊은 깨달음이 없으면 구원받지 못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선포한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정말 구원받기를 원하는가?
주님의 이름을 불러라.
다만 진심이어야 한다.
구원을 요청하는 자에게 주님은 구원에 부요하시다.


◆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좌 우에 강도들이 함께 매달렸다.
두 강도는 전 인류를 향해 교훈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설정이다.


십자가에 한쪽 강도는 예수님을 비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네가 그리스도가 아니냐 너와 우리를 구원하라"


그런데 한쪽 강도는 그 강도를 이렇게 꾸짖었다.
" 네가 동일한 정죄를 받고서도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에 상당한 보응을 받는 것이니 이에 당연하거니와 이 사람이 행한 것은 옳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그리고는 예수님께 호소했다.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 "


평생 강도질을 일삼던 사람이 이제 와서 갑자기 뭘 어쩌자는 것인가?
감히 구원을 기대하다니, 너무 염치없지 않은가?
예수님께서 여기에 응답하실 필요가 있을까?


그런데 예수님은 그에게 기대 이상의 응답을 하셨다.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39-43)


여기서 '진실로'로 번역된 원래 단어는  '아멘'이다.
예수께서 헬라어로 대답하셨는지, 아람어로 대답하셨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본래 어순에 의하면 예수님은 강도의 요청에 제일 먼저 하신 말씀이  '아멘!'이다.


강도는 염치가 없어서 감히 구원해달라는 말은 못하고, 단지 '기억해 주십시오'라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반응을 보라!
"아멘! 네가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기대 이상의 응답이다.
이것이 '부요'다.
주님께서 자기를 부르는 자에게 이렇게 부요하시다!


십자가 상의  두 강도는 온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메시지다.


우리에게 어느 계열에 설 것인가를 요구하신다.
어리석게도 세상의 편에 서서 빈정대다가 죽을 것인가,
아니면 가난한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불러서 구원을 받을 것인가?


지동설을 주장했던  코페르니쿠스는 마지막에 자기 비문에 이런 글을 써줄 것을 요청했다고 한다.


"주님, 베드로에 베푸신 은혜도, 바울에게 베푸신 은혜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오직, 강도에게 베푸셨던 그 은혜, 그 은혜를 구합니다. "


구원에 부요하신 하나님!
저를 구원해주심을 감사합니다.
영원히 주님의 부요하심과 은혜를 찬양하겠습니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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