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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로마서 10장1-4 /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는 자들

by 【고동엽】 2022. 11. 14.
■2022년1월27일(목)■
 
(로마서 10장)
 
1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묵상/롬 10:1-4)


◆ 무지한 열정


(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어떤 일에 열심이 있다는 말은 온 정성을 다하여 집중하는 마음이다.  열심을 가진 자들은 주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곤 한다. 그러나 역사를 보면 무지한 열심은 대부분 유익보다는 해악을 끼쳤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알기 전에 바로 그러한 사람이었다. 그는 시간과 물질을 투자해서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했다. 그리고 그 명목은 오직 '하나님을 위하여'였다.


많은 사람이 무지한 것은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아니다.
소방관이 소방수칙을 모르고, 가스업자가 가스통 다루는 법을 모르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이 복음을 모르고 사는 것은 분명히 잘못이다. 더구나 그런 자가 강단에 서면 이것은 재앙이다. 


우리가 복음을 힘써 알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하나님의 의와 자기 의


(3)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한국에서 명성을 얻은 신학박사 K 교수가 있다.
그는 신자들의 세속화된 삶의 원인이 '믿음으로 의롭게 됨'이란 교리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율법을 가볍게 여기고, 방자해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아주 교묘한 주장을 했다. 사람이 예수를 믿으면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미래에 의롭다는 약속을 받은 것이다. 조건이 있는데, 계속 올바로 살 때, 비로소 완전히 의로워진다.


이런 논리는 매우 합리적으로 들리고, 사람들의 입맛에 꼭 들어맞는다.
그러나 깊이 들어가 보면, 결국 '자기 의'로 구원받는다는 이야기를 애써 어렵게 말한 것이다.


그는 '믿음'과 '하나님의 의'를 모른다.
'하나님의 의'를 감히 자기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만일 그 박사 이론대로 살면 겉만 번지르르한 바리새인의 삶까지는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꾸며낸 겸손과 봉사, 그리고 제법 종교적인 삶을 구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안의 고집과 자만과 음란한 마음은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미래에 하나님의 의를 얻는 것이 아니다.
지금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의'를 얻은 자다.
그 박사는 우리 안에 있는 구원의 기쁨과 감격을 모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서 의를 행하는 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있기에 의를 행하는 자다.


의인이 되기 위해 의를 행하는 자가 아니라,
의인이기에 의를 행하는 자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지 않는 자들은 아무래도 그 신학박사 이론이 더 구미가 당길 것이다. 당장 초라한 내 삶이 그 박사의 이론이 맞음을 증명하는 듯하다.


아무렴, 인간의 노력이 중요하지.
저 산을 옮겨야 하는데, 한 삽이라도 떠서 옮기는 것이 실제적이지.
믿음이야 사도신경 외우고, 교리문답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겠어?
이젠 믿음은 충분하고, 행위가 필요할 때야.
믿음만 강조하니, 사람들이 이렇게 세속화되고 타락한 것이야...
구구절절이 모두 옳아 보인다.
오, 이런 것이 미혹이다.


과연 그럴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을 내 노력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면, 사도 바울이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로다'(롬 7:24)라는 한탄을 했을까?


솔직히 말해서, 복음을 모르는 신학박사의 이론은 유치하다.
새로운 것처럼 떠들어대지만, 이미 수많은 철학자나 종교인들이 이미 말한 것을 색깔만 바꾸어서 내놓은 것이다.  그럴싸하지만, 장님의 무지개 이론이요, 귀머거리의 베토벤 강의다.


사이비 교주만 미혹하는 것이 아니다.
멀쩡한 정통 교단의 신학박사도, 목사도, 얼마든지 미혹의 영으로 활동한다.


미혹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의 의'보다  '자기 의'를 붙잡게 하는 것.
십자가보다 자기 자신을 더 의지하게 하는 것.
믿음이 아닌 행위로 산을 옮길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




◆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


(4)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이 말씀은 이제 성도는 율법에 의해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며, 율법적인 방식으로 살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식으로 살아야 함을 선언한다.


도대체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는데, 왜 자꾸 율법을 들먹이는가?
초등학교 졸업한 학생이 중학교 들어가서도 매일 초등학교 학급 근처에서 얼쩡거리면 어떡하는가?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것을 보다 구체적으로 말했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다(갈 3:23).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와 같다. (갈 3:24)
믿음이 온 후로는 우리가 더는 초등교사 곧 율법 아래에 있지 않다(갈 3:25)


우리는 율법이 아닌, 새로운 방식, 곧 믿음의 방식으로 사는 자들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라고 고백했다. 그런데 그 앞 구절이 매우 의미심장하다.
그 앞 구절은 "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9)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의미는 '자기 의'에 대한 죽음이다.  더는 내 알량한 의를 의지해서 살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란, 하나님의 의로 사는 것이다.


이것을 인간의 노력으로 구현하자고?
말도 안 된다.
오직 믿음으로만 이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
이게 도대체 무엇인지 모르는 자는 주님 앞에 나아가서 이렇게 고백해보라.
주 예수님, 예수님은 저의 주님이십니다.
나는 이 고백만큼 강력한 고백을 체험해본 적이 없다. 수천, 수만의 마귀가 덤벼들어도 이 고백을 하는 사람을 손가락 하나 다치게 할 수 없다. 진실한 그 고백 속에서 믿음이 내가 할 일을 알게할 것이다.


지금 이 세대는,  열심히 삽질해서 산을 옮기자고 주장하는 자들 앞에서 믿음으로 산을 옮기는 시범을 보여야 할 때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거기에서 솟아나는 거룩함과 사랑과 희생과 봉사를 해야 할 때다.


주 예수님,
예수님은 저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을 믿는 믿음이 얼마나 강력한 능력인지를 알게 해 주십시오.

출처 : https://cafe.daum.net/soongsari/WDob/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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