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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유3(갈라디아서 5장 13~15절)
13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 14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15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편집자의 새 번역: 만일 서로 다투어 감정을 상하게 하고 해를 끼치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기독교에서는 구원을 자유의 의미로 풀이합니다. 자유는 기독교인의 특권입니다. 이를 상징적으로 '자녀의 자유'라고 말합니다. 종과 자녀-옛 법도대로 하면 주인은 곧 왕이요 법입니다. 또한 주인의 자녀는 왕과 같은 주인의 후사이므로 그 가정의 제반사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아버지 것이자 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녀는 가정의 모든 일에서 자유롭습니다. 반면 가정의 법도에 철저하게 매여 사는 사람은 종입니다. 옛날 대가(大家)에는 종이 수백 명씩 있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 집안 돌보는 사람, 요즘으로 말하면 정원사, 요리사, 침모(針母) 할 것 없이 수백 명의 종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이들은 모두 주인이 정해주는 법에 따라 삽니다. 몇 시에 일어나라, 무슨 일을 해라, 어디를 다녀오라-주인의 명에 따라 그대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의를 제기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는 예외입니다. 그는 완전히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만일 자녀가 아버지의 말에 순종하여 일을 하더라도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지 얽매여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해도 자기일이니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일을 마친 종들이 저녁에 품삯을 받을 때에 자녀는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종은 시간을 가져 휴식을 취해야 하지만 자녀는 쉬고 싶을 때는 언제든지 쉴 수 있습니다. 어디까지나 자유를 누립니다.
일하는 것도 자유요 안하는 것도 자유입니다. 아버지의 것이면서 동시에 자기의 것이기 때문에 자녀의 특권인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똑같이 밭에서 일을 해도 종이 하는 것과 자녀가 하는 것은 전혀 다릅니다. 종은 부득이 해야 합니다. 시키는 대로 안하면 벌 받고 큰 책망을 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자녀는 그렇지 않습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됩니다. 아버지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 스스로 선택해서 일하는 것뿐입니다.
이렇게 비교하여 생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유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란 구체적으로 죄와 사망과 사단과 율법과 진노로부터의 자유를 말합니다. 먼저 우리가 예수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어서 죄의 형벌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고 그 약속을 받아 살므로 사망으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당장에 세상을 떠나게 할지라도 기쁜 마음으로 임합니다. 자기 방을 들어가듯 자연스럽게 천국의 문을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에 대한 두려움, 공포로부터 온전한 자유를 누립니다. 사단의 역사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사단이 염두에도 없습니다. 사단이 과연 있는 것이냐 할 정도로 무관심합니다. 주를 찬송하고, 성령으로 충만하고, 말씀의 능력으로 가득 차 있을 때에 어두운 권세는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합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율법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길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은 그 큰 은혜 안에 거하는 것뿐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자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고 그 사랑에 감사하며 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내가 설사 매를 맞아도 때리시는 그 아버지는 절대로 무서운 아버지가 아닙니다. 내가 어떤 징계를 당해도 그 징계로 인하여 아버지의 진노만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 진노 속에서 하나님의 가장 구체적이고 개인적인 사랑을 느끼게 됩니다. 곧 진노로부터 자유롭게 됩니다. 그러한 윤리성, 그러한 근본적 문제가 자유 안에 주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주어진 자유인가-먼저 이것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첫째,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주어진 자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공짜로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사랑, 그거 쉽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더구나 죄인을 사랑하려면 얼마나 큰 값을 치러야 합니까? 불의한 자를 사랑하여 그에게 의를 주기 위하여 대신 값을 지불해야만 합니다. 그런고로 예수께서 십자가의 값, 그 피를 댓가로 지불하고 구속(救贖)하여 우리가 자유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자유하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부자유해지셨습니다. 그가 큰 값을 지불했다-그 값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나됨을 위하여 수고해주신 분을 알아야 합니다. [편집자 삽입:The freedom is not free.] 저는 가끔 결혼 주례를 합니다마는 그때마다 두 사람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대들이 오늘 이 기쁜 결혼을 하기까지 부모님들의 수고가 참으로 컸음을 아는가"-가만히 보면 이 사실을 잊고 있는 것 같습니다. 정신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아마 좀 더 나이가 들면 알게 될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좀 더 잘해주지 않는다고, 원하는 대로 안 해준다고 불만이 있으면 있었지 고마운 마음, 감사하는 마음이 없어 보입니다. 여러분, 나의 나됨을 위해서, 내가 자유하기 위해서 엄청난 값이 지불되었음을 기억합시다.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있었습니다. 특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그 자녀로서의 자유를 얻기까지는 엄청난 십자가의 값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무자격한 가운데에 얻어진 자유임을 알아야 합니다. 공짜로 얻었습니다. 전적인 은혜로 얻은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유를 소중히 여기지 못하여 그 자유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제부터 내게 주어진 자유가 얼마나 값비싼 것이며, 내가 얼마나 무자격한 자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나는 그 큰사랑을 받을만한 자격이 없는 존재이다-이 진실과 겸손이 있어야 합니다. 갈라디아서 5장 1절에서도 공부한 바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입니다. 우리의 자유는 주어진 자유입니다. 그런고로 굳건하게 서야 합니다.
다음으로는 이 자유를 어떻게 지켜가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자유는 얻는 것으로 그만이 아닙니다. 자유는 지키기가 더 어렵습니다. 우리는 8․15 광복 때에 자유를 얻은 기쁨을 맛보았습니다마는, 그 자유를 지키기가 더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돈도 그렇습니다. 돈을 벌기보다 번 돈을 지키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또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더 어렵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가 가지고 있던 돈을 잘못 날린 다음에 후회를 합니다. '그럴 줄 알았으면 헌금이나 할 것을…' '좋은 일 하는 데 쓸 것을…' 그렇습니다. 진작 그럴 것이지 다 지난 다음에 그런 소리합니다. 한심한 사람들입니다. 무엇이든 그렇습니다. 얻은 것을 지키기가 더 힘듭니다. 자유도 자유로울 때 지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소중한 자유를 빼앗기고 맙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자유를 지키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한편 자유는 하나의 기회입니다.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자유롭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방향으로 기울어지면 악한 일을 하게도 됩니다. 자유, 얼마나 중요합니까? 자유롭기에 좋은 일을 할 수 있고, 또 모든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경제 조건도 자유할 수 있는 기회를 줍니다. 돈 없으면 부자유합니다. 내가 얼마의 돈을 가졌고, 이 돈을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다-자유입니다. 좋은 일을 할 수 있고 나쁜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건강도 자유할 수 있는 기회가 됩니다. 건강해야 무엇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나쁜 일을 하려고 해도 건강해야 되지 않습니까? 이렇듯 경제적인 자유, 정치적인 자유, 지식의 자유, 양심의 자유 등 많은 종류의 자유가 있습니다마는 이 소중한 자유는 우리에게 주어진 큰 기회가 됩니다.
사도 바울은 기본적으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말하면서 그 윤리성을 대조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가 말하는 자유를 윤리의 토대에서 생각해보면 행함으로 얻어지는 자유가 아니라 이미 이루어진 것에 근거한 자유임을 알게 됩니다. 이미 얻어진 것입니다. 내가 자유를 얻기 위하여 싸워나가는 것이 아닙니다. 간혹 사람들은 자유를 얻기 위해서 평생을 싸우며 보내는 경우가 있습니다. 한 번도 자유를 누려본 적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잘못되었습니다. 우리는 이미 자유를 얻었기에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이미 얻은 자유를 깨닫고 스스로 누릴 줄 알아야 합니다. 싸워서 얻을 수 있는 자유가 아닙니다.
또한 율법에서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적인 의미에서 자유를 생각해야 합니다. 율법 몇 조항을 지켰다고 자만해서는 안 됩니다. '살인하지 않았다' '거짓증거 하지 않았다' '간음하지 않았다'-이것으로 만족하여 내가 자유할 수 있지 않습니다. 성경 전체가 말하는 근본적이요 본래적인 의미를 생각해야 됩니다. 성경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율법의 근본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구속의 의미, 그 근본적인 의미에서 율법을 생각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킨다 하더라도 구원받기 위한 조건으로 지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구원받았음으로 지키는 것입니다. 내가 구원받기 위해서, 자유하기 위해서 지금도 투쟁하는 것이 아닙니다. 가만히 보십시오. 자유를 위해서 투쟁한다는 사람들 언제 자유 하는 것 보았습니까? 점점 더 무서운 부자유 속의 노예가 되는 것을 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미 구원받았고 이미 자유를 얻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구원의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율법의 행함은 결코 형벌이 무서워서가 아닙니다. 징계가 무서워서 율법을 키는 것이 아닙니다. 아버지의 법을 자녀가 자유롭게 지키는 것과 같이 지켜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좀더 중요하고 실제적인 말씀을 합니다. 자유를 가리켜 성령이라고 합니다. 성령은 곧 자유의 영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느니라'라는 유명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영-그리스도의 마음, 사랑의 마음, 아가페의 마음이 있는 곳에 자유함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나 사랑하면 자유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미워하면 스스로 감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내 마음만 답답해집니다. 내가 미워하는 사람을 만나면 꺼림칙하여 피하게 됩니다.
점점 죄어들어 결국에는 아집(我執)이라고 하는 감옥을 만들고 그 안에 갇히고 맙니다. 여러분, 사랑하는 것보다 좋은 게 없습니다. 모든 사람 모든 것을 사랑하면 마음대로 자유할 수 있습니다. 가만히 되새겨 보십시다. 원수까지 사랑하고 나면 마음이 편안하지 않습니까? 누군가를 미워하고 있으면 '저 사람도 나를 미워하겠지' 싶어 마음이 떨떠름합니다.
참 괴롭습니다. 원수 갚는 일처럼 무상한 것은 없습니다. 내가 원수를 갚았으니 이제 그 사람이 내게 원수 갚을 차례입니다. 그러나 원수를 사랑하고 나면 이제 나를 미워할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느니라"-성령의 법안에만 진정한 자유가 있다고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13절에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중요한 말씀입니다. 육체가 헬라어로는 '사르크스'이고 영어로는 '플레시(flesh)'입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육체적 본능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신령한 것에 반대되는 모든 것, 세상으로 기울어지는 마음, 그리스도를 떠나는 마음, 하나님의 법과 반대되는 모든 것을 육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꼭 육신적인 본능에서 나오는 욕망이 아니라, 사도 바울이 지칭하는 것은 비 그리스도적이요, 비 영적인 모든 것입니다.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라-죄 짓는 기회로 삼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자유로 보다 귀하고 아름다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지 못된 일을 하는데 쓰지 말라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얻은 이 자유로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이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으면 노예가 됩니다. 가출하는 아이들을 가만히 보십시오. 가출해서는 깡패 소굴, 악의 소굴로 직행하여 거기에 매이고 맙니다. 심지어 감옥으로 가게 되는 아이들도 있습니다. 집에서 나가는 것이 자유인 것 같지만 집을 나가면 또다른 감옥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진공상태란 없습니다. 완충지대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유하는 동안에는 이 자유가 어느 쪽으로든 기울어져야 합니다. 마치 언덕 위에 놓여 있는 수레와 같아서 위에서 끌지 않으면 밑으로 굴러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가령 젊은이가 몇푼의 돈을 쥐고 밖으로 나갔다고 합시다. 좋은 일을 할 것 같습니까? 문이 어디를 향해 열려 있습니까? 바로 죄악의 소굴입니다. 한번 들어가면 다시는 헤어날 수 없는 종이 됩니다. 죄악의 노예가 됩니다. 참으로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 고귀한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죄악으로 기울어지지 말라고 강조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 이 자유를 지킬 수 있겠습니까? 사도 바울은 이에 대해 소중한 말씀을 합니다. 스스로 자유를 버리라, 스스로 사랑의 노예가 되라고 합니다. 사랑은 스스로 선택하는 굴레입니다. 오늘도 결혼 주례를 했습니다마는 저는 또 말했습니다. "한 여자만을 평생 사랑하라" "한 여자를 사랑해서 자유할 수 있는 사람만이 결혼할 자격이 있다"-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어떻게 평생을 살 수 있겠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은 결혼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또한 여자에게도 "한 남자만을 평생 섬기라"하고 말합니다. 이를 부자유하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결혼은 사랑의 무덤이 됩니다. 가정이 무덤이 되면 큰일입니다마는 그런 경우가 드물지 않습니다.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직행해야 합니다. 하루에 세 번씩 전화해서 사랑한다고 말해야 합니다. 넥타이는 반드시 아내가 사준 것을 매야 합니다. 손수건조차 아내가 모르는 것을 가지고 있으면 난리가 벌어집니다. "웬 여자가 주었느냐" "언제 생긴 것이냐"해서 시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제 친구 가운데도 자기 아내가 사준 넥타이만을 매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 힘들게 삽니다. 매여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매인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결혼할 자격이 없습니다.
'결혼은 자유다' '가정은 무한한 자유다'-이렇게 느끼며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는 것이 즐겁습니다. 가정은 심신을 풀고 쉴 수 있는 '내 세상'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또 무슨 바가지를 긁으려나' '오늘은 또 무슨 난리가 날까' 이런 생각이 들면 가정이 마치 도살장 같습니다. 불안한 마음으로 감옥에 들어가듯이 엉금엉금 기어들어 오게 됩니다. 그리고 아침에 출근하면서 '이제 탈출이다' 싶어 도망가듯이 나가고 맙니다. 여러분, 만일 이런 가정이라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큰 일 날 가정이 아닙니까?
모름지기 가정이란 사랑 안에서는 천국이지만 사랑이 없게 되면 십자가입니다. 결혼 생활이 얼마나 힘이 들면 십자가라는 말을 하겠습니까? 결혼한다고 해서 누구나 행복한 것만은 아닙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자유성, 그 자유의 신비를 아는 사람만이 자유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에게 매이는 것이 진정한 자유요,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한 자유가 됩니다. 사랑의 노예가 되어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큰 자유입니다. 여기에서 무한한 자유를 맛봅니다. 요즘 여성들은 여성해방이니 인권옹호니 하여 가정만을 위해서 수고하는 것을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부엌에서 일하는 것, 시장바구니 들고 다니는 것, 집안 청소하는 것을 하찮게 생각합니다. '내가 겨우 이까짓 일을 하려고 태어낫는가'하고 원망을 합니다. 그 일이 하기 싫었으면 결혼을 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하는 일마다 즐겁고 기뻐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다면 애초에 문제가 있었던 결혼입니다. 사랑 이외에 다른 선택이 없다-이처럼 결정적인 운명을 사는 사람만이 진정한 자유인입니다. 나에게는 자유가 없습니다. 사랑 이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랑할 권리 밖에 없습니다. 미워할 권리도 남을 비판할 권리도 없습니다. 여러분, 다른 일은 못해도 사랑에 대해서만은 온전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의 빚을 다 갚지는 못할지라도 혹이라도 우리 마음 가운데에 어두운 그림자가 있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고독과 방종과 허무로부터의 자유-결혼을 이렇게 정의하기도 합니다. 결혼하지 않으면 고독의 노예가 됩니다. 결혼하지 않으면 방종의 노예가 되고 허무의 노예가 됩니다. 대개 결혼하지 않고 독신으로 살아온 사람은 쉰 살이 넘으면 허무에 빠지게 된다고 합니다. '내가 왜 살아왔나' '나에게 남은 게 무엇인가'-모두 헛된 일 같습니다. 맥아더 장군의 기도문 가운데 '내게 이런 아들을 주시옵소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기도문의 끝부분을 보면 내 아들이 이러이러하게 훌륭한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소원한 다음, '그리하여 나로 하여금 이 세상을 헛되이 살지 아니하였다 하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끝을 맺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세월이 지나 늙어지고 나면 남는 것은 자녀들밖에 없습니다.
자녀들에게서 인생의 의미를 찾게 됩니다. 자녀들마저 없으면 인생이 허무합니다. 무엇을 하면서 살아왔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허무에 빠지는 것입니다. 허무가 바로 함정입니다. 사랑의 종이 되어 그 사랑에 미쳐버리는 것만큼 큰 자유가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미쳤다는 것이 남 보기에는 딱해도 본인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사랑에 미친 것이 그렇습니다. 눈이 하얗게 쌓인 추운 겨울날 길을 가다보면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데이트에 열심인 연인들을 볼 수 있습니다. 나무 밑에 서서는 소곤소곤 이야기를 주고 받습니다. '춥지도 않은가'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한창 좋은 때로구나'하는 느낌도 듭니다. 사랑에 미친다는 것,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미쳐 있을 때에 부자유하다는 사람이 있습니까? 사랑으로 하여 지게 되는 짐을 누가 무겁다고 합니까?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수고하는 것을 짐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짐이라고 생각하면 이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이 식은 것입니다. 철저하게 사랑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섬김을 기쁨으로 삼고 희생을 영광으로 삼는 경지, 거기까지 이르렀을 때에야 자유한 것입니다.
사도 바울을 봅시다. 그는 예수를 위하여 충성을 다합니다. 살아도 그만이요 죽어도 그만입니다.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빌1:21)"-사나 죽으나 상관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하신다-그는 사랑의 강권에 이끌리어 미친듯 살았습니다. 평온히 그 고통을 당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마지막에는 기쁨으로 순교합니다. 온전히 미친 상태 아닙니까? 그러나 그는 아무나 누릴 수 없는 무한한 자유를 누렸습니다. 바로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자유는 사랑과 희생 그리고 전적인 헌신 속에서 이루어지고 그 속에서 누리는 것입니다. 얻는 자유보다 주는 자유, 베푸는 자유를 즐깁니다. 그리고 나서 자유를 지킵니다. 자유를 보호합니다.
자유를 지키는 길은 사랑을 위하여 자유를 버리는 데에 있습니다. 자유를 스스로 버릴 줄 아는 자만이 자유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이야말로 율법으로부터 완전히 자유할 수 있는 길이라고 결론 맺고 있습니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같이 하라 하신 말씀에 이루었나니(14절)." 율법의 근본이 무엇입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사랑이 율법의 근본입니다. 사랑했으면 율법은 이미 완성된 것입니다. '도둑질을 하지 말라'-도둑질해서 받는 벌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사람이 소중하기에, 그를 사랑하기에 도둑질하지 않는 것입니다.
'거짓증거 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하는 것도 상대방의 인격을 소중히 여기기 때문에 지키는 것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사랑 안에서 완성해 나갈 수 있습니다. 율법은 사랑 하나로 완전히 지킬 수가 있더라, 그런고로 율법의 모든 속박으로부터 자유하는 길은 사랑 그것이더라고 말씀합니다.
15절에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편집자의 새 번역: 만일 서로 다투어 감정을 상하게 하고 해를 끼치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서로 물고 먹으면, 즉 사랑이 없으면 멸망뿐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사랑이 빠져나가면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물고 뜯는 것입니다. 세상은 싸움터가 됩니다. 시장에서는 오늘도 많은 싸움이 있었을 것입니다. 손님 한 사람이 가게로 들어서면 장사하는 사람은 먼저 그 사람의 관상부터 본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물건을 사러 왔나, 보러 왔나?' '살 것이면 많이 깎을 사람인가, 아닌가'를 알아차리고 값을 불러 흥정을 시작합니다. 파는 쪽에서는 가능한 한 이익을 많이 보려 하고, 사는 쪽에서는 깎고 깎아서 싸게 사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이 신경전이 싸움입니다. 모든 행동에 사랑이 있는가-가만히 생각해보십시다. 사랑이 없다면 마르크스의 이론이 맞을 법합니다. 약육강식(弱肉强食)의 현장이요 힘있는 자가 승자요, 적자생존의 무서운 싸움터입니다. 큰 고기가 중간 고기를 먹고 중간 고기가 작은 고기를 먹고, 서로 싸웁니다. 무섭게 싸웁니다. 동물은 제 새끼를 어렸을 때는 사랑합니다. 고슴도치도 제 새끼를 사랑하고 개도 제 새끼를 사랑합니다. 호랑이도 제 새끼는 사랑합니다. 그러나 새끼가 자라나면 미워합니다. 사랑해주다가 이제는 서로 으르렁거리면서 싸우고 내쫓아버립니다. 약간 동물기가 있는 사람이 그렇습니다. 제 자식을 어렸을 때는 귀히 여기고 사랑합니다. 그러나 조금 크면 아버지와 아들이 싸웁니다. 만나기만 하면 싸웁니다. 주로 식사 때에 만나게 되므로 밥 먹으면서 싸웁니다. 또 어머니와 딸이 싸웁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싸웁니다. 꼴이 말 아닙니다. 그래서 본문에서는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두렵다고 말씀합니다. 다 망하고 맙니다.
마르크스는 동물세계를 보면서 그대로 인간사회를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산당 이론을 공부할 때, 처음으로 가르치는 것이 진화론입니다. 그 다음이 사회발전상이고 그 다음이 볼셰비키 혁명입니다. 옛날에 저도 공부한 경험이 있습니다마는 항상 그 순서대로 가르칩니다. 사람은 동물이다-인간사회에서 되어지는 일들이 동물세계와 똑같다는 말입니다.
정말 꼭 그런 것 같습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 사랑이 없으면 다 망합니다. 물고 찢으면서 망해갑니다. 결국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어서 세상을 살아갑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서 세상이 세상 되는 것이지 사랑이 쏙 빠졌다고 생각해보십시오. 이미 다 끝났다고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런고로 사랑은 모든 율법을 완성하고 높은 곳에 있어서 우리의 자유를 지켜줍니다. 너희는 그리스도인의 자유, 그 소중한 것을 끝까지 지켜나가도록 하라-이렇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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