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네 발의 신을 벗어라
본문:출애굽기 3:1∼5
“하나님이 가라사대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너의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애굽기 3:5)
하나님은 떨기나무로 다가오는 모세를 부르십니다. 그래서 이제 떨기나무는 그 자체로는 더 이상 의미가 없게 되었습니다. 불붙은 떨기나무는 모세를 하나님께로 이끄는 도구였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시면서 불붙은 떨기나무는 눈에 보이는 물체를 넘어서 하나님을 가리키는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모세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리로 가까이 하지 말라” 하나님은 더 이상 다가오지 말고 그곳에 서 있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이상하게도 하나님은 모세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모세를 기다려왔다고 해도, 그래서 그의 이름을 다정히 부르셨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인간 모세와 거리가 있음을 분명히 하고자 하십니다. 그래서 모세는 떨기나무에 붙은 불을 보고 다가왔지만 그것을 결코 만져볼 수는 없었습니다. 그것이 허용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신앙의 한계는 여기에 있습니다. 신앙의 궁극은 하나님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신을 벗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말씀으로 인해서 우리는 갑자기 모세의 발을 주목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가 신을 신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벗으라고 명령하십니다. “네 발에서 신을 벗어라” 모세는 의아해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왜 갑자기 신을 벗으라고 하시는지 이유를 몰랐을 것입니다. 그런 모세에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선 곳이 거룩한 땅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모세가 서 있는 그 장소를 거룩한 곳으로 선언하십니다. 이것은 모세에게는 매우 새로운 경험입니다. ‘이 세상, 이 부패하고 억압과 착취가 가득한 곳에 하나님의 거룩한 땅이 있다니… 인간들로 차고 넘치는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임하시는 장소가 있다니… 내가 무심결에 발을 딛고 서 있는 이 곳이 거룩한 땅이라니… 그래서 신을 벗어야 하는 특별한 곳이라니…’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이 곳,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는 이 곳이 거룩한 땅이라고 선언하십니다.그리고 말씀하십니다. “이 곳에서는 신을 벗어라. 네 발에서 신을 벗고 난 다음 이야기를 계속하자”
이 일상적인 세상에서 뜻밖의 거룩함을 체험한 모세가 하나님의 말씀을 채 이해하지도 못하고 엉거주춤하며 신발을 벗는 모습이 연상됩니까? 우리는 불타는 떨기나무의 실체,즉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가득 차서 살다가 이 곳이 거룩한 땅인지 알지도 못하고 신을 벗지 않은 채 지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거룩한 땅에서 신을 신고 돌아다니고 있습니다. 어른 앞에서 신을 벗어야 하는 그 최소한의 예의도 갖추지 못하고 그렇게 어쭙잖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 거룩한 땅, 하나님이 우리를 만나주시는 이 곳에서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신을 벗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다른 일을 하기 전에 먼저 이 곳을 거룩한 땅으로 인정하라고 명령하십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 말씀을 듣는 그 곳이 바로 하나님이 계시는 거룩한 곳임을 알게 하시고,우리가 거룩한 삶을 살게 하옵소서.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종록 목사
2. 맨발로 소리를 듣는 사람
맨발로 소리를 듣는 사람이 있다. 애블린 글래니. 올해 서른 네 살인 그녀는 세계 최고의 타악기 연주자 중 하나로 손꼽힌다. 여느 음악인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녀가 12세 때 이미 청력을 잃은 청각 장애인이라는 사실이다. 당연히 사람들은 그녀가 청각을 잃는 순간 이미 음악가로서의 인생에 마지막 종이 울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글래니는 더 이상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귀를 일단 포기해야 했다. 대신 그녀는 소리의 진동과 뺨의 떨림으로 소리를 감지하는 연습을 시작했다. 그리고 무대엔 항상 맨발로 올라가 발끝에서 전해오는 진동으로 소리를 구별해냈다. 귀가 아니라 온 몸 전체가, 그 중에서도 극도로 섬세해진 발끝의 촉각 하나 하나가 그녀만의 청각기관이 되어준 셈이다. 덕분에 그녀는 미세한 대기의 변화로도 음의 높낮이를 읽어낼 수 있는 경지에 이르렀고 20여 년의 노력 끝에 세계 최고의 타악기 연주자로 꼽히게 됐다. 듣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그녀의 신체적인 결함을 극복할 수 있는 에너지가 된 것이다. 무엇을 두려워하십니까? 지금 도전하세요. 당신은 할 수 있습니다.
- 이진호 / 작가
3.맨발로 걷는 즐거움
집 근처의 맨땅을 찾아라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숲길이나 맨땅을 걷자는 이야기는 불행하게도 현실성이 별로 없다. 그러나 주위를 둘러보라. 보물을 찾듯이 세심하게 둘러보면 가까운 곳에 아직은 살아 있는 맨땅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인간 본연의 건강한 정신과 육체를 되찾아 가는 일은 바로 맨땅을 맨발로 걷는 데서부터 출발한다.
- 박동창의《맨발로 걷는 즐거움》중에서 -
* 갈수록 흙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몇 날 몇 달 몇 년 동안 흙 한번 밟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발은 사람의 몸이 흙과 만나는 최일선 통로입니다. 발이 건강해야 몸이 건강하고, 몸이 건강해야 마음도 정신도 더욱 건강해 집니다. 맨땅 걷기가 그 시작입니다.
/고도원의 아침편지
4. 예수의 더러운 발
사실, 나도 예수에 대해 떠도는 판에 박은 이미지와 표현들을 수없이 들으며 성장했다. 나는 그분에 대한 많은 이야기에 영향을 받았지만, 평소 기독교에 무관심했고, 특별한 기독교 절기에는 막연히 분위기에 휩쓸려서 감정적으로 들뜨곤 했다.
그러나 내가 예수를 직접 보고 그분에 대한 선입견의 족쇄로부터 풀려난 날, 등골이 오싹했다! 내가 그때까지 예수께 반응한 게 아니라 예수에 대해 떠도는 억측들에 반응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가 나타나신 것이다! 발은 더러웠고, 얼굴에 엷은 미소가 번지는 분, 그분이 나를 응시하는 것 같았다. 예수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고, 훨씬 더 강하게 나를 흔들어 놓으셨다. 예수는 자신을 속속들이 보이시기 위해, 모래 먼지 날리는 삶 속에서 발을 더럽히며 수고하시기 위해, 당신을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다. 당신이야말로 지금 예수를 직접 만나야 할 사람이다.
_ 돈 에버츠, 《예수의 더러운 발》 중에서
5 아름다운 발
본문: 사5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발은 우리의 몸을 지탱하며 우리의 몸을 옮겨주는 역할을 합니다. 만약 우리들에게 다리가 없다면 우리는 마음대로 움직일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루종일 꼼짝도 못하고 매일 휠체어에 앉아서 생활을 해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발은 중요합니다. 축구선수들에게 있어서 발은 생명과도 같습니다. 지단이나 피구, 호나우두 등 유명한 축구선수들의 몸값은 우리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많습니다.
사실 발은 신체 중에서 가장 낮은 자리에 있고 더러워지기 쉬운 부분입니다. 그래서 발을 업신여기고 소홀히 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자신의 발을 씻겨 주신다고 했을 때 내 발은 절대 씻기실 수 없다고 했던 것도 자신의 더러운 발을 주님께서 몸소 씻겨주시겠다고 하시니까 너무 황송해서 발 씻기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체 중 더럽고 보잘 것 없고 가장 낮은 자리에 있는 발이라고 할지라도 그 발이 좋은 일을 위하여 쓰인다면 아름다운 발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어떤 발이 귀하고 아름다운 발입니까?
"볼찌어다 아름다운 소식을 보하고 화평을 전하는 자의 발이 산 위에 있도다 유다야 네 절기를 지키고 네 서원을 갚을찌어다 악인이 진멸되었으니 그가 다시는 네 가운데로 통행하지 아니하리로다"(나훔1:15)
'나의 왼발'이란 영화가 있었습니다. 사고로 인해 불구가 된 사람이 좌절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여 남은 왼발로 글을 써서 마침내 훌륭한 작가가 된다는 내용입니다. 그 사람은 비록 남들보다 부족한 한 발만 가지고 있었으나 오히려 보통 사람들의 두 발보다 더 훌륭한 발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발은 사람에게 없어서는 안될 아주 중요한 신체입니다. 그러나 발이라고 해서 모두 다 가치있는 것은 아닙니다. 열심히 일하러 가는 노동자의 발은 가치가 있으나 남을 해치러 가는 강도의 발은 오히려 해로울 뿐입니다. 이것은 성도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들의 발도 무엇을 하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이 주신 발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치 않게 쓴다면 오히려 그 발로 인해 심판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럼 여기서는 어떤 발이 하나님 앞에서 아름답고 가치있는 발인지 살펴보겠습니다.
1. 복음을 전하는 발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발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열심히 일하며 살아가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가장 원하시는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천하에 가장 귀중한 것이 사람의 목숨(마16:26)인데 복음은 육신의 목숨보다 더욱 소중한 영혼의 생명을 구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복음을 전하는 자의 발이 '아름답다'(롬10:15)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발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바쁘게 움직이고 있습니다. 거리를 뛰어다니고 전철 안에서조차 부지런히 움직이는 그 발들은 자신의 세상적인 이익이나 출세를 위해서는 남이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움직이지만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무관심하거나 귀찮아 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이런 발들을 결코 사랑하시지 않으실 것입니다. 이런 발들이 지금 당장은 나에게 유익을 주는 것 같으나 결국 하나님 앞에서 심판과 책망을 받게 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발은 어떤 발입니까? 어렵고 귀찮더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오더라도 먼저 복음을 전하는 발이 되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일을 위해 대신 발이 되어 주실 것입니다.
2. 봉사하는 발입니다.
발은 신체 중에서 가장 많이 움직이고 일을 하지만 자신은 가장 더럽고 냄새나며 겉으로 잘 드러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발이 없다면 사람은 활동하지 못하고 일하는 데 굉장히 불편을 느낄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의 몸된 교회에도 하나님의 일과 교회의 성장을 위해 움직이고 일하는 발과 같은 사람이 필요합니다.(고전12:12) 그런데 성도들 중에 어떤 이들은 말로만 교회의 일에 대해 염려하고 간섭하면서도 직접 나서서 발로 뛰고 봉사하는 일에는 뒤로 빠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의 발은 결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발이 아닙니다. 성도 여러분! 진정으로 아름다운 발은 남 앞에 나서서 듣기 좋은 말로 칭찬이나 받으려는 발이 아니라 묵묵히 남들이 싫어하는 어렵고 힘든 일을 맡아 기쁘게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고 봉사하는 발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그 발을 보시고 축복하실 것입니다.
3. 사랑을 베푸는 발입니다.
교회 안에서 어떤 성도들은 사람들 사이에 돌아다니면서 잘못된 소문을 퍼뜨리는 비방과 이간질을 해서 성도들 사이에 다툼을 일으키게 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일에는 재빠르나 어렵고 고통에 빠진 성도들을 돌아보는 데는 나서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발은 결코 아름다운 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발을 주신 것은 서로를 돌아보게 하기 위함(고전12:25)입니다. 그런데도 형제를 돌보지 않는다면 그 발은 무가치한 발인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발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자신의 이익만을 찾아다니지는 않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돌이켜 주위에 가난으로 고생하는 형제를 돌보기 위해 가십시오.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웃을 위로하러 가십시오. 믿음이 연약하여 방황하는 형제들에게 찾아가 믿음의 권고를 주는 여러분의 발이 되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발이 되시고 여러분에게 더 큰 사랑을 베풀어 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몸에 발이 없다면 얼마나 불편할 것입니까? 그러나 실상 없느니만 못한 발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악을 행하고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것에만 재빠른 발(잠6:18, 사59:7)은 오히려 스스로를 죽음으로 이끄는 발(잠5:5)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발은 어떤 발입니까? 하나님께서 축복으로 주신 발이 오히려 멸망으로 향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아름다운 발이 되도록 노력하십시오. 복음을 전하며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사랑으로 형제를 돌보기에 애쓰는 발이 되십시오. 그리할 때 여러분의 발은 하나님의 축복의 창고로 달려가는 발이 될 것입니다.
* 기도: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님, 복음 전하는 발, 봉사하는 발, 사랑을 베푸는 발, 화평을 전하는 아름다운 발이 되기를 원합니다. 제가 섬길 수 있는 일은 찾으려 하지 않고 섬김 받고 공급 받기만을 바라지는 않았는지 돌아봅니다. 교회의 동역자들을 사랑으로 후원하게 하소서. 나의 기도를 들으시사 다음과 같은 욕망에서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칭찬을 받으려는 욕망에서, 높임을 받으려는 욕망에서, 찬양을 받으려는 욕망에서, 다른 이보다 우선권을 가지려는 욕망에서 나를 구원해 주시옵소서. 주님 안에서 한 몸으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을 사랑으로 섬기기 원합니다. 하나님의 시선을 의식하며, 언제나 겸비한 자세로 살아가게 하소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 모범을 보이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자양고등학교 교사)
6. 발과 섬기는 생활
본문: 요한복음13:12-17
영국의 윌리엄 부스의 구세군이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을 때, 세계 도처의 남녀들이 구세군에 입대하기 시작했습니다. 한때는 주교가 되려고 꿈꾸었던 한 남자가 구세군에 입대하기 위해서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국에서 영국으로 건너갔습니다. 그의 이름은 사무엘 브렝글이었습니다. 그러나 부스 사령관은 처음에 그의 입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부스는 그에게 “당신은 너무나 오랫동안 보스로 군림해 왔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브렝글에게 겸손을 가르치기 위해서 다른 훈련병들의 군화를 닦는 일을 시켰습니다. 이에 실망한 브렝글은 “내가 기껏 군화나 닦기 위해서 대서양을 건너왔단 말인가?”라고 중얼거렀습니다.
그때 환상 중에 거칠고 무식한 어부들의 더러운 발을 씻기려고 엎드리고 있는 예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예수님! 그들의 발을 씻기셨군요. 그렇다면 이제 나는 저들의 구두를 닦겠습니다”라고 속삭였습니다. 그후 브렝글은 즐겁고, 사랑스러운 마음으로 더러운 군화를 닦았으며 청지기의 사명을 깨닫게 됐고 충성스럽게 섬김의 도를 실천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는 후에 미국 구세군 최초의 감독관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하고 온유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두 가지 모범이 있습니다. 하나는 성만찬이요. 다른 하나는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몸에 있는 여러 지체 중에서 무엇보다도 발을 씻기신 것은 깊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예수님은 발의 말없는 그 섬김과 섬김의 중요성을 알았기 때문에 발을 씻어 줌으로써 복을 주고자 하신 것입니다.
발은 인간의 지체 중 가장 낮은 데 있으면서 일생 동안 온 몸을 받들어 줍니다. 발은 온 몸을 지탱하는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지체들과는 달리 평생토록 자신의 모습을 밖으로 내놓고 자랑하지 않습니다. 언제나 냄새나는 신발 속에 얼굴을 감추고 있습니다.
생색 한번 낼 줄도 모르고 심지어 무좀이나 습진 그리고 동상 같은 것에 걸려 자신이 썩을 지라도 위를 쳐다보면서 "왜 너희들은 따뜻한 곳에 있고 나는 차가운 곳에 두어 상하게 하느냐"고 불평 한 마디 하지 않는 것이 바로 발입니다. 발은 언제나 궂은 일, 험한 일을 앞장서서 합니다. 다른 지체들은 다 들어가기 싫어할 때 혼자 더러운 것을 서슴지 않고 밟고 들어가면서 다른 지체들에게는 "너희들은 더러움을 묻히지 말고 높은 곳에서 깨끗하게 되라"고 말합니다.
이 발바닥 같은 마음이 곧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발처럼 낮은 곳에 오셔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다 담당하셨습니다. 그러면서 "너희들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다오, 높아져다오" 하시고는 자신은 역사 속에서 짓밟히는 발의 삶을 사셨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은 사랑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으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을 것입니다. "발아 발아, 나는 높은 곳에 있는 눈이나 코나 얼굴이나 어깨나 머리보다 네가 더 소중하단다. 낮은 곳에서 말없이 봉사만 하는 네가 좋구나. 발아 네가 내 마음 알겠지. 내가 사실은 발이 되었단다. 인류의 무거운 짐 나 홀로 지고 모든 사람들을 다 높이고 살리고 위해서 너처럼 낮아졌단다. 나는 밟히지만 내가 밟힘을 통해서 모든 지체가 산단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십자가의 피로 씻으셨던 것입니다. 참다운 섬김은 자기가 죽을 때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죽이지 않고는 다른 사람을 섬길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는 섬김의 일생이었고 그 마지막 십자가 상의 죽음은 섬김의 절정이었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가복음10:45).
기독교 역사상 모든 안수는 주로 머리에 이뤄졌습니다. 이는 구약의 전통을 따른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머리에 안수하신 일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발을 씻기심으로 발에 안수하셨습니다. 이는 목회자의 권위가 머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발에 있음을, 권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섬김에 있음을 깨우쳐주기 위함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이 섬김의 정신입니다.
체면과 권위를 중시하는 유교문화에 물들어 한국교회 목회자들이나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정신인 이 섬김의 정신을 잃어 가고 있습니다. 사람 앞에 낮추는 자는 하나님께서 높이십니다. 참된 권위는 섬김에서 나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발바닥 인생을 사셨을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이 발바닥 같이 섬기는 마음을 가지고 살 것을 요청하십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요한복음13:14)
/한태완 목사(하나교회, 자양고등학교 교사)
7. 서로 발을 씻기라
분문: 요13:12- 17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임을 당하시기 전에 사랑하는 제자들과 함께 한 다락방에 모여 최후의 만찬을 하십니다. 이것은 어떤 만찬보다 뜻 깊고 의미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식사를 마치신 후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서 기도하시고 체포되어서 곧 십자가를 지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 만찬이 마지막 식사입니다.
내일 죽을 것을 아는 사람은 오늘 말하는 것도, 사람을 만나는 것도 다릅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하는 제자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실 때 언제나 진실했고 순수했으며 따뜻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뜻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죽으실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제자들의 의문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식사를 마치시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중에 특별한 두 가지 일을 행하셨습니다.
첫째가 성만찬입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것은 나의 살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또 잔에 포도주를 주시며 “이것은 나의 피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항상 이것들을 먹고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라”며 십자가에서의 죽음을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무슨 의미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둘째가 식사 중에 일어나셔서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다가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것입니다. 물론 도중에 베드로는 약간 반항했지만,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발까지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벗어 두었던 겉옷을 입으시고 다시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12절 말씀이 그 내용입니다.
“저희 발을 씻기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앉아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
예수님의 질문은 왜 스스로 이런 행동을 했겠느냐는 것입니다. 제자들은 너무 황당했습니다. 과연 제자들의 생각은 어떠했을까요? 우리는 두 가지를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하나, 제자들이 무척 당황했을 것입니다. 만약 자신보다 윗사람이 무릎 꿇고 빌면 당사자는 많이 당황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아버지가 무릎을 꿇으면 아들은 무척 당황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로 충격을 받고 매우 당황했을 것입니다.
또 하나는 죄책감과 죄송함이 들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자들이 관심을 보인 것은 ‘누가 더 높으냐’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도토리 키 재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누가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 그분의 오른팔이 되느냐는 문제로 자기들끼리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좋은 뜻이나 동기로 일을 하고 있어도 그 내면에서는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며 경쟁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됩니다. 세상 사람들이 일하는 방법은 모두 이런 식입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개인적인 욕심들로 가득합니다. ‘너를 짓밟고 이겨야 내가 진급을 하지, 여기서 절대 밀릴 수는 없어’. 그래서 우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으며, 포장되고 과장된 언행으로 일관합니다.
교활한 사람은 상대방의 이기심, 질투심, 명예심을 이용해 일을 부립니다. 겉으로 보면 상대방을 위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이용하는 셈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사랑, 섬김, 동역, 비전을 갖고 진실하게 일하는 사람을 만나기란 쉽지 않습니다. 사심 없이 서로 섬기고 높이며 격려하는 동역자를 발견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겸손한 메시아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다시 자리에 앉으시고 왜 너희들의 발을 씻겼겠느냐고 물으십니다. 발을 씻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씻는 일입니다. 허리를 굽히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존심을 꺾는 일입니다. 13, 14절 말씀을 봅니다.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또는 주라 하니 너희 말이 옳도다 내가 그러하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으니라.”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는 항상 자신을 낮추고 상대방을 섬기라는 뜻으로 친히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내면에 경쟁심을 갖지 말고 자존심을 내세우지 말며, 이런 것들로 인해 자신이 지배당하지 않게 하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주님이셨고 스승이셨습니다. 생각해 보면, 예수님 같은 주님과 스승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인류 역사상 예수님 같은 분은 결단코 없습니다. 그분은 온 인류의 메시아이시고 구원자이시며,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고 지고지순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런 위대하신 분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에 “내가 주와 선생이 되어서 너희들의 발을 씻겨주었다. 그러니 너희들도 서로 발을 씻겨주는 것이 마땅하지 않느냐”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 인간을 짐승, 벌레, 티끌, 먼지, 쓰레기와 같은 존재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런 낮고 천한 인간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서 섬겨주셨는데, 동급의 인간들끼리 서로 섬기고 발을 씻어주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여기서 몇 가지 중요한 영적 교훈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높은 자일수록 더욱 낮아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겸손이란 힘이 있는 자가 그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겸손은 단순히 낮아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진 자가 포기하는 것, 능력 있는 자가 져주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길 수 있지만 져주고, 갈 수 있지만 가지 않고, 갈 수 없지만 가는 것이 겸손입니다.
오만은 힘 있는 자가 그 힘을 사용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진 자가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만큼 가졌으면 충분할 텐데 더 많이 가지려고 빼앗고 훔치는 것입니다. 능력 있고 권력 있는 자가 횡포를 부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만한 자들을 가끔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눈빛부터 다르고 말투마저 다릅니다. 남을 무시하고 지배하려 들며 일방적으로 명령하고 미안해하는 구석이 전혀 없습니다. 오만한 자는 목소리나 걷는 것에도 티가 납니다. 우리는 오만한 사람들을 보면 토하고 싶어집니다.
예수님의 리더십과 영적 권위는 겸손함에서 오는 것입니다. 낮아질 대로 낮아져 진정 겸손한 사람을 보면 감동이 옵니다. 그런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마구간으로 오셨고 죄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피하고 싫어하는 세리와 창녀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분은 여우도 머리 둘 곳이 있지만,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수건을 두르신 하나님
둘째 영적 교훈은 솔선수범입니다. 구약 성경에 아브라함과 롯에 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들은 삼촌과 조카 관계이지만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생깁니다. 그것은 땅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양떼를 치면서 서로 싸우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런 성격의 싸움은 어느 누구도 말리지 못합니다. 이해가 얽힌 당사자들끼리 아무리 회합을 해도 해결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두머리끼리 만나 합의해야 문제 해결이 가능한 것입니다.
당시에 아브라함은 롯을 찾아가 서로 다투지 말자고 제안합니다. 그리고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네가 좌하면 내가 우하겠다’며 선택권을 양보한 후 각자 갈 길을 정하고 서로 헤어집니다. 분쟁이 있을 때 먼저 화해를 청하는 자가 ‘형님’이 됩니다. 나이가 많거나 학식이 높아야 형님이 되는 게 아닙니다. 먼저 문제 해결을 위해 순리로 일을 풀어나가는 자가 형님이요, 애국자입니다. 모두 죄인들인데 누가 더 잘나고 더 못난 것은 없습니다.
지금 우리나라가 어렵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나라의 정치, 경제, 교육 분야를 올바로 세울 수 있을까요?
해답은 아주 간단합니다. 답을 몰라서 지금까지 마냥 지내온 것이 아닙니다. 모두 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알면서도 일을 하지 않는 것이 문제입니다. 겁이 나서 못하고 이해관계가 맞물려서 못합니다. 그래서 자꾸 화려한 말로 때웁니다.
예수님께서 식사 중에 말없이 일어나 허리에 수건을 두르시고 물을 떠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감동을 주는 일입니다. 남이 하니까 나도 하고 남이 말하니까 나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진정한 감동이 솔선수범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예수님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모든 문제들을 갑작스레 한꺼번에 해결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배우고 알며 느끼는 대로 조금씩 바꿔나갈 때 감동이 있게 됩니다.
온누리교회 성도는 가정에서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들기를 바랍니다. 직장에서 기쁨과 감사의 도가니에 빠져들기를 바랍니다. 진정한 영적 권위와 리더십은 모든 일에 솔선수범하는 데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영적 교훈은 예수님께서 내리신 결론적인 대안입니다. 즉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입니다. 누가 먼저 발을 씻고 씻겨주느냐는 문제가 아닙니다. 진정한 대안은 서로 발을 씻어주는 데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에 대한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어떤 배고픈 사람들에게 푸짐하게 음식을 차려 한 상 주었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긴 숟가락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지옥에 가봤더니 긴 숟가락으로 서로 먼저 먹으려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긴 숟가락으로 음식을 집어 입으로 가져가면 흘리고 또 흘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화가 나서 비난하고 비판하며 큰 소리를 질렀습니다. 이번에 그들이 천국에 가봤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긴 숟가락으로 서로에게 음식을 먹여주고 있었습니다. 아주 평온한 가운데 행복한 분위기였습니다.
서로 발을 씻어준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그 하나는 진정한 승리를 말합니다. 진정한 승리란 ‘윈-윈 게임(win-win game)’을 가리킵니다. 한 사람이라도 죽거나 다친다면 그것은 진정한 승리가 아닙니다. 동시에 모두 승리해야 합니다.
부부 사이도 윈-윈 게임입니다. 내가 행복해야 행복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해야 내가 행복한 것입니다. 아내가 행복할 때 남편도 행복합니다. 아이들이 행복할 때 부모도 행복할 수 있습니다. 나의 동역자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한 것입니다.
서로 발을 씻기라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말씀은 그런 의미입니다. 누가 누구에게 일방적으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 교황청에서 신도들의 발을 씻어주는 것은 종교적인 의식에 불과합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것은 서로 물고, 뜯고, 치고받는 험악한 세상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이끄는 예수님의 대안입니다.
남북 관계도 윈윈 게임이어야 합니다. 남한이 살기 위해 북한을 죽여서는 안 됩니다. 북한이 살기 위해 남한을 죽여서도 안 됩니다. 남북한이 동시에 잘 살아야 행복한 것입니다. 국내 정치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불법 대선 자금으로 정국이 어수선합니다. 각 당은 서로 자기 당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발뺌하다가 속속들이 덜미를 잡히고 있습니다. 그러다간 모두 죽게 됩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간단한 말씀 안에 예수님께서 주신 복과 승리의 비결이 있습니다. 남을 살리면서 내가 살아야 합니다. 남을 망하게 하고 사지로 몰아가면서 내가 잘될 것을 바라면 안 됩니다. 남의 회사를 죽이면서 내 회사가 성공할 것을 바라면 안 됩니다. 다른 회사가 살아야 내 회사도 살고 동시에 두 회사가 함께 발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모범입니다. 서로 발을 씻겨주면 피차 상처를 치유할 수 있습니다. 상대를 죽이고 나만 살아난다면 양자 간에 소리 없는 전쟁은 영원히 계속될 것입니다. 서로 발을 씻어준다는 의미의 다른 하나는 서로 필요를 채워 주는 것을 말합니다. 너는 너, 나는 나의 필요만 채우는 게 아니라 피차 서로 필요한 부분을 채워주는 것입니다. 이번에 온누리교회 대학부 250명이 청담교회에 가는 것이 서로 발을 씻겨주는 모델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 발을 씻어주라는 마지막 의미는 서로 신뢰를 쌓는 것을 말합니다. 모든 문제는 서로 믿지 못하는 데서 발생합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인격을 믿을 때 축복된 사회를 보장받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주신 방법입니다. 아내는 남편의 발을, 남편은 아내의 발을 씻어주고 사장은 부하의 발을, 부하는 사장의 발을 씻겨주며 서로 존경하고 신뢰하며 필요를 채워주는 관계여야 합니다. 이는 단순히 성경의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삶의 현장에 이 말씀을 그대로 적용한다면,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런 기적들이 우리의 가정, 직장, 사회에서 풍성하게 이뤄지기를 축원합니다.
너희도 이와 같이 행하라
15절 말씀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드디어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친히 본을 보이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범을 보인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모델이 있을 때 그대로 복사하면 수많은 복제품을 양산할 수 있는 이점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나름대로 새로운 무엇을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그대로 닮아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본, 모양, 모델대로 따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새로운 뭔가를 하려면 어려움이 따르지만, 본을 보고 그대로 따라하면 쉽기만 합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처럼 쉬운 것이 없는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보이신 모범대로 따라하면 됩니다.
출애굽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성막을 지을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리고 그에 관해 모든 사랑을 자세히 일러주십니다. 치수는 물론이고 디자인까지 지시하십니다. 모세는 하나님께서 일러주신 그대로 일을 수행합니다. 자신의 취향, 생각, 의지대로 하지 않습니다. 다자인도 멋대로 바꾸지 않습니다.
건축 설계사가 설계를 했는데 시공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임의로 바꿔버리면 안 됩니다. 설계도면 그대로 시공해야 합니다. 철근이나 시멘트의 양을 조금이라도 빼면 안 됩니다.
본을 보고 따라가는 것을 가리켜 순종이라고 합니다. 순종이라는 것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에 본을 보이신 예수님께서 사신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항상 따라 한다는 것은 재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기가 막히는 것은 그대로 따라 했더니 죽은 자가 살아나고 삼십, 육십, 일백 배의 열매가 맺히는 기적이 일어나더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름다움이 있는 것입니다. 16, 17절 말씀을 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종이 상전보다 크지 못하고 보냄을 받은 자가 보낸 자보다 크지 못하니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인생에서 복은 돈, 성공, 건강, 명예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17절 말씀과 같은 것이 진정한 복입니다. 우리가 서로 발을 씻어주는 것이 민족을 구원하는 대안입니다. 그럴 때 남북한이 통일되고 사회와 가정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서로 발을 씻기는 자가 되게 하옵소서. 상대를 짓밟고 내가 성공하며 누군가를 망하게 하고 내가 성공의 자리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발을 씻겨줌으로써 하나님의 승리를 경험하는 성도님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하용조 목사
8. 왼쪽 발, 오른쪽 발
하루는 어떤 사람이 시퍼런 톱을 가지고 씩씩거리면서, 자신의 왼쪽 발을 잘라내려고 시도하고 있었다. 옆에 있던 사람이 깜짝 놀라서 물었다.
"아니, 여보시오! 대체 지금 당신 무엇을 하고 있는 겁니까?"
그 사람은 시큰둥하게 내뱉었다.
"보면 모르시오! 나는 지금 내 왼쪽 발을 잘라내고 있소이다."
이유를 묻는 상대편에게 그는 또 이렇게 답변했다.
"아 글쎄, 이 왼쪽 발이 그렇게 주의를 주었는데도 오늘 또 오른쪽 발을 밟지 않았겠소! 오른쪽 발이 그만 화가 나서 내게 말했지요. 저 못된 왼쪽 발을 좀 잘라 달라고요. 그런데 우리는 전부 오른쪽 발하고 친하거든요. 그래서 이 버르장머리 없는 왼쪽 발을 내가 지금 잘라내려고 그러는 겁니다."
미쳐도 단단히 미친 사람이다. 이 사람은 왼쪽 발도 자기 몸의 일부라는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때때로 우리가 무의식중에 혀를 씹을 때가 있다. 이때 그 어느 누구라도 이빨이 좀 실수했다고 해서 그것을 빼어 내버리려는 사람은 없다. 자신의 혀이기에 아픈 것을 참아야 한다. 그 아픔을 전체가 다 함께 괴로워하면서 혀가 입은 상처를 치료해 준다. 그리고 앞으로는 혀를 씹지 말라고 이빨에게 다짐할 뿐이다. 우리 몸 중에 필요하지 않은 것은 없다. 발은 다리를, 목은 머리를 지탱해 준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다.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쉽게 등을 돌리거나 무시해서는 안 된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이루고 있는 지체들이다. 믿는 이들끼리, "나는 나고, 너는 너다"와 같은 말이 성립될 수는 없다 싫든 좋든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몸이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믿는 이들끼리 더욱 협력하며, 서로 존경하며, 섬기는 일에 힘쓰는 아름다움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찌니라"(갈6:10)
9.오른발 교회
형제교회라는 교단이 있습니다. 이 교회에서는 성찬식 대신 세족식을 합니다. 세족식은 예수님이 제자의 발을 씻겨주신 것처럼 성직자가 성도의 발을 씻어주는 예식입니다.
어느 형제교회 교단의 세족식에서 목사님이 습관적으로 교인의 왼발을 먼저 씻었습니다. 서로 마주앉아 있기 때문에 목사님이 오른쪽을 잡으면 교인의 왼발이었던 것입니다. 세족식이 끝난 다음 그 교회의 선임 집사님이 용기를 내어 목사님께 말했습니다.
"목사님, 왜 왼발을 먼저 씻습니까? 오른발을 먼저 씻으면 좋지 않겠습니까?" 성경에도 없는 사실을 가지고 목사님께 따지는 것을 목사님은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사님은 ‘다음 세족식 때는 설마 오른발을 먼저 씻어주겠지’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음 세족식에도 목사님은 왼발을 먼저 씻었습니다. 화가 난 집사님은 교인을 선동하여 교회를 박차고 나갔습니다. 그들은 새로 교회를 세우고 교회 이름을 ‘오른발 교회’라고 했습니다. 이 교회는 지금도 미국에 있습니다. 서로를 배려하지 않는 닫힌 마음은 작은 차이를 큰 분쟁으로 만듭니다. 그래서 성경은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 2:3)라고 권합니다.
10. 아름다운 부부
과실치사라고 밖에 말 할 수 없는 큰 죄로 정씨는 사형을 받고 독방 수인 생활을 하는 중 예수를 영접했다. 예수 믿느냐는 재판관 질문에 “네”라고 대답했기에 사형수에서 무기수로,무기수에서 장기수로 복역하며 우리 교회 오 집사와 8년 동안 사귀다 옥중결혼했다. 복역 17년 만에 특별사면 받아 출옥,자유를 찾았고 부부 집사로 임명받아 이삭장애인선교회를 자비량으로 운영하며 장애인을 섬기고 있다. 여자 집사는 초등학교 4년 중퇴에 두 다리를 쓰지 못하는 지체장애인이다. 남자 집사는 비록 사형수였으나 유학까지 다녀온 대학 종합병원 치과과정까지 지낸 의사였다. 17년을 기다리며 사랑해준 장애인 아내를 위해 남은 생애를 다 바치겠다고 생활비와 가정생활,의식주생활에 아내의 손발이 되어 섬기며 모든 성도들 보기에 가장 모범적으로 남편 역할을 한다. 요즘 이 부부의 아름다운 삶을 보려고 많은 사람이 교회를 찾는다. 사랑은 감동이다. 사랑은 희생이다. 사랑은 섬김이다.
/고훈 목사(안산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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