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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1강 이스라엘에 대한 긍휼(5:14-15)

by 【고동엽】 2022. 4. 16.

제31강 이스라엘에 대한 긍휼(5:14-15)

 

5:14-15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오늘 본문 속에서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생명의 길과 멸망의 길을 제시하면서 생명의 길을 택할 것을 권면해주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 본문을 살펴보면 그 문체상의 특이성이 몇 가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한 세 가지 정도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는 명령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둘째는 조건과 결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셋째는 선과 악이라는 말이 되풀이 되는데 그 순서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X형 구조(chiastic structure)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우선 명령하는 말들을 찾아봅니다. 어떤 말이 있겠습니까?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선을 구하라는 것이 명령입니다. 히브리어 성경에 보면 구하라 하는 명령형 동사가 제일 앞에 위치해 있습니다. 히브리어 성경대로 직역하면 이렇게 됩니다. "구하라 선을, 그리고 악이 아니리라. 이는 너희가 살기 위함이라." 그러니까 우리말 성경에는 "악을 구하지 말지니라"가 명령어로 되어 있지만,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것이 명령어로 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15절에 보면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라고 했습니다. "악을 미워하라"는 것도 역시 명령입니다. 그리고 "선을 사랑하라"는 명령형이 등장합니다. 마지막에는 "성문에서 공의를 세우라"고 했습니다. 역시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말에서는 다섯 개, 히브리어 원어 성경에는 네 개의 명령하는 말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에는 단순한 권면보다는 훨씬 더 어조가 강한 명령이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해도 좋고 안해도 좋은 것이 아니고,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렇게 해야 된다는 절대성을 띠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 보세요.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 이 말씀을 바꾸어 생각하면 무슨 뜻이 되겠습니까? 선을 구하지 않고, 악을 구하면 어떻게 된다는 말씀이겠습니까? 뭐밖에 안 남겠습니까? 사망, 죽음, 멸망 등과 같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외견상으로 보면 선을 구하라고 이스라엘에 권하고 있지만, 사실은 저들에게 아주 위협적인 말로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죽기 싫거든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는 식으로 아모스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문체상의 두번째의 특징은 14절이나 15절 모두가 조건과 결과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4절을 조건과 결과로 나누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여기까지가 조건입니다. 그렇게 하면 그 결과 어떻게 된다는 것입니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이것이 바로 결과입니다. 15절도 역시 조건과 결과로 나누어 보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여기까지가 조건입니다. 그리고 그 다음 부분은 결과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마지막 세번째 특징이 선과 악의 순서가 X형 구조로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14절을 보면 선과 악이 어떤 순서로 되어 있습니까? 선이 먼저 나오고, 그 뒤에 악이 나옵니다. 그러나 15절에는 순서가 뒤바뀌어 있습니다. 악이 먼저 나오고, 선이 뒤에 나옵니다. 아모스 5장에서는 이런 X형 구조가 특히 많이 등장하고 있음을 우리가 살펴보았습니다. 5:1∼17의 전체가 다 X형 구조로 되어 있었고, 4절과 5절에 보면 지명이 역시 X형 구조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8절에 보면 어둠과 아침이 역시 X형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와 같이 X형 구조는 히브리인들이 글을 쓸 때 즐겨 사용하는 표현 기법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런 세 가지 문체상의 특이점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4절을 봅니다.
(5:14)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캄캄한 밤 하늘에도 반짝이는 별이 있는 것처럼 완전히 절망 가운데 빠진 이스라엘에게 한 가닥의 소망을 안겨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고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 무엇입니까? 선을 추구하고 악을 버리는 것입니다. 5:4의 말씀을 읽어봅니다.
(암5:4)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이르시기를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또 6절 말씀도 읽어봅니다.
(암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여호와를 찾는 것은 어떻게 찾는 것입니까? 이 말이 구체적인 의미가 14절에 있습니다. 그것은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15절에 보면 좀더 강한 표현을 썼습니다. 선을 사랑하며, 악을 미워하라고 했습니다.
한번 정리를 해봅니다. 심판을 피할 수 있는 길은 무엇입니까?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무엇입니까? 4∼6절을 보면 여호와 하나님을 찾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수직적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이 말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느냐? 14절에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을 사랑하고,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즉, 이웃과의 수평적인 관계가 올바로 놓여 있어야 함을 의미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과 수직적인 관계가 바로 놓여야 하고, 그 다음에 이웃과의 바른 관계가 정립될 때 살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말하는 악이란 구체적으로 어떠한 것이겠습니까? 아모스 5장만 해도 비교적 상세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5절을 한번 읽어봅니다.
(암5:5) 벧엘을 찾지 말며 길갈로 들어가지 말며 브엘세바로도 나아가지 말라 길갈은 정녕 사로잡히겠고 벧엘은 허무하게 될 것임이라 하셨나니
벧엘로 가서, 또 길갈로 가서, 그리고 브엘세바로 가서 형식적이고 외식적인 제사를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서 가증스럽게 여기시는 악이라고 설명을 했습니다. 7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암5:7)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
이스라엘 백성들은 공법을 인진으로 변하며 정의를 땅에 던졌습니다. 또 10절 말씀을 보십시다.
(암5:10)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또 11절 말씀을 보십시다.
(암5:11)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12절에 하반부에도 보면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은 죄악들입니다. 그래서 12절의 말씀같이 "너희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고 외쳤던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죄악이 참으로 중함을 다시 한번 우리가 느낄 수 있는 줄 압니다.
결론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살기 위해서는 그들의 잘못되고 악한 행위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아무리 저들이 제물을 많이 드리고 종교 행위에 열중한다 하더라도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도 말씀하셨지요. "나더러 주여 주여 한 자가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갈 수가 있느니라." 잘못된 행위 자체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행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죽지 않고 살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을 계속 봅니다. "너희는 살기 위하여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지어다." 그 다음에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의 말과 같이 너희와 함께 하시리라." 이 말씀을 보아서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겠습니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해도 너무했습니다. 하나님이 지금 이스라엘의 대적이 되셔서 이스라엘을 치시려고 하시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반대로 하나님은 지금 자기들과 함께 하셔서 자신들을 돌보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왜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 하신다고 생각을 했겠습니까? 그렇게 생각할 만한 이유는 물론 있었습니다. 아모스 당시 북방 이스라엘의 왕이 누구였습니까? 바로 여로보암 2세였습니다. 그 당시에 북방 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군사적으로 아주 막강할 때였습니다. 영토도 얼마나 넓었는지 모릅니다. 왕하14:25 말씀을 한번 찾아보십시다.
(왕하14:25)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종 가드헤벨 아밋대의 아들 선지자 요나로 하신 말씀과 같이 여로보암이 이스라엘 지경을 회복하되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바다까지 하였으니
여로보암 2세 때 영토는 솔로몬 당시의 통일 왕국의 영토와 동일한 것이었습니다.
(왕상8:65) 그때에 솔로몬이 칠 일 칠 일 합 십사 일을 우리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절기로 지켰는데 하맛 어귀에서부터 애굽 하수까지의 온 이스라엘의 큰 회중이 모여 저와 함께 하였더니
또 암6:14을 읽어봅니다. 하나님께서 하맛 어귀에서부터 아라바 시내까지 이스라엘 영토를 치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상당히 국토가 넓었던 것을 이 말씀을 통해서도 알 수 있습니다. 또 암6:1∼2을 읽어봅니다.
(암6:1∼2) 화 있을진저 시온에서 안일한 자와 사마리아 산에서 마음이 든든한 자 곧 열국 중 우승하여 유명하므로 이스라엘 족속이 따르는 자들이여 너희는 갈레에 건너가고 거기서 대 하맛으로 가고 또 블레셋 사람의 가드로 내려가 보라 그곳들이 이 나라들보다 나으냐 그 토지가 너희 토지보다 넓으냐
군사적으로도 든든했습니다. 두려울 것이 하나도 없는 나라였습니다. 또 경제적으로 얼마나 풍요로웠습니까? 몇 군데를 찾아서 한번 읽어봅니다.
(암3:12)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목자가 사자 입에서 양의 두 다리나 귀 조각을 건져냄과 같이 사마리아에서 침상 모퉁이에나 걸상에 비단 방석에 앉은 이스라엘 자손이 건져냄을 입으리라
(암4:4∼5)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암5:11) 너희가 가난한 자를 밟고 저에게서 밀의 부당한 세를 취하였은즉 너희가 비록 다듬은 돌로 집을 건축하였으나 거기 거하지 못할 것이요 아름다운 포도원을 심었으나 그 포도주를 마시지 못하리라
(암6:4) 상아 상에 누우며 침상에서 기지개 켜며 양떼에서 어린 양과 우리에서 송아지를 취하여 먹고
(암6:6) 대접으로 포도주를 마시며 귀한 기름을 몸에 바르면서 요셉의 환난을 인하여는 근심치 아니하는 자로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치적으로 강성했고, 경제적으로도 아주 부강한 상태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히 제사드리는 자신들이야말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암4:4∼5)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광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의 기뻐하는 바니라 이는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따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축복해주신 연고라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아모스는 이스라엘의 이러한 기만적이고, 잘못된 생각을 여지없이 깨뜨려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이 말하는 대로 그들과 함께 하시기 위해서 우선 무엇이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입니까? 선을 구하고 악을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에 추구해왔던 악한 행위들을 버리고, 이제는 선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행위가 바뀌어 악을 버리고 선을 추구하지 않는 한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아니할 뿐더러 그들의 나라와 개인의 생명까지도 살아남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15절로 넘어갑니다.
(5:15)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며." 여기에 보면 서로 반대가 되는 단어를 사용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악의 반대는 선입니다. 미워함의 반대는 사랑함입니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미워한다"는 말이 5장에 보면 이미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어디에 사용되었습니까? 10절 말씀을 한번 읽어봅시다.
(암5:10) 무리가 성문에서 책망하는 자를 미워하며 정직히 말하는 자를 싫어하는도다
그러니까 문제가 무엇이겠습니까? 악을 미워하라고 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악을 미워하지 않고 오히려 선을 미워하고 악을 사랑했습니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입니다. 14절에는 선과 악 가운데서 선이 먼저 나오고 악이 뒤에 나왔습니다. 이번에는 순서가 바뀌었지요? 이런 것을 X형 구조라고 부른다고 했습니다. "너희는 악을 미워하고." 지금까지 즐기던 죄악들을 이제는 미워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그런 짓을 반복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가지고는 부족합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보다 더 적극적인 권면이 다음에 등장합니다. 무엇입니까? 선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악을 미워하는 정도로 그치지 말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좀더 적극성을 가지고 선을 사랑하는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기본적인 진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것입니다. 소극적인 면에 머물지 말고, 보다 적극적으로 선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전에 삭개오가 예수님을 영접하고 난 뒤에 어떻게 했습니까? "이제는 악을 멀리하고 더 이상 남에게 해를 끼치는 일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 정도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수입의 절반을 뚝 떼어서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나머지를 가지고 제가 그동안 토색한 자들에게 4배를 갚아서 완전히 배상을 하겠나이다." 또 시편 1장에서도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여기까지는 소극적인 권면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적극적인 권면이 뒤따라 나왔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어떻게 하라고 했습니까? 가만히 참고 있으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했습니다. 왼편까지 돌려 대라고 했습니다. 적극적으로 선을 베풀라는 말씀입니다. 적극적인 단계까지 나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랑해야 할, 또 그들이 행해야 될 선이란 구체적으로 무엇이겠습니까? "선을 사랑하며." 뒤에 구체적으로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해주었습니다. "성문에서 공의를 세울지어다." 7절에 보니까 정의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땅에 던지어졌다고 했습니다. 던져진 공의를 다시 세우라는 것입니다. 현재 상태에서 완전히 뒤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이미 공부했습니다만, 그 당시 이스라엘 중에서 만연하던 가장 큰 죄악은 재판을 공의롭게 행하지 않아서 힘없고 연약한 자들이 억울함을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성문이라고 하는 것은 법정, 또는 재판정을 뜻하는 말입니다. 재판이 제대로 올바르게 행해지지 않던 폐단을 다 시정하고 이제는 공의를 바로 세워나가라는 말입니다.
제가 물어보겠습니다. 성문에서 공의가 바로 세워지기 위해서, 다시 말해서 법정에서 선악간에 바른 판단이 내려지기 위해서 먼저 사람들이 어떤 마음의 자세를 가져야만 하겠습니까? 본문에 있는 말로 한번 대답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렇습니다.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하는 마음자세가 먼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선악간에 바른 판단이 내려질 수가 없습니다. 그 결과 성문에서 공의가 제대로 세워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이 세 가지, 다시 말해서 첫째로 악을 미워하고, 둘째로 선을 사랑하며, 셋째로 성문에서 공의를 세우라는 권면은 서로간에 깊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우선, "악을 미워하고"라는 것이 가장 기본입니다. 여기서 출발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선을 사랑하며"라고 했습니다. 보다 적극적인 권면이 따라옵니다. 이렇게 해서 나타나게 된 구체적인 결과가 무엇입니까? 성문에서 공의가 세워지는 것입니다.
그 다음을 봅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혹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기시리라." 여기에 보니까 "혹시"라는 말을 썼습니다. "혹시"라고 하는 말이 주는 뉘앙스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도 있고, 또 그렇게 하지 않으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셔서 저들을 구원하실 수도 있고, 또 그대로 심판하실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절대적인 주권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는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여기서 "혹시"라는 단어가 말하는 의도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변덕스러움을 의미하는 말입니까? 기분에 따라서 하나님이 그럴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뜻입니까? 아닙니다. 여기서 이 단어가 쓰인 의도는, 결과가 어떻게 되든지 간에 그것에 구애받지 말고 너희는 해야 할 바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공의를 행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관계치 말고 너희는 너희 할 바를 다 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입니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는 어디에서 인용한 말씀입니까? 단3:13∼18의 말씀을 찾아보겠습니다.
(단3:13∼18) 느부갓네살 왕이 노하고 분하여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를 끌어 오라 명하매 드디어 그 사람들을 왕의 앞으로 끌어온지라 느부갓네살이 그들에게 물어 가로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야 너희가 내 신을 섬기지 아니하며 내가 세운 금 신상에게 절하지 아니하니 짐짓 그리하였느냐 이제라도 너희가 예비하였다가 언제든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듣거든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리어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어떤 신이겠느냐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만일 그럴 것이면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극렬히 타는 풀무 가운데서 능히 건져 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의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왕명을 거역할 경우 뜨거운 풀무불에 들어가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하나님께서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라도 자기들을 구원해 주시라고 확고히 믿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놀라운 믿음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비록 구원해주지 아니하실지라도 불의와는 타협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을 저버리고 이방 신상 앞에서 절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느부갓네살 임금보다 하나님이 더 높으시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았던 것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아모스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외치는 말씀의 의도는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하나님께 맡겨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시든지 그것에 구애받지 말고 너희는 공의를 세워나가라. 악을 미워하고 선을 사랑해라. 너희의 책임을 다해라. 그러면 혹시 하나님께서 요셉의 남은 자를 긍휼히 여겨주실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여기서 또 한 가지 깨닫게 되는 것은 구원이 누구의 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까? 내가 잘나서, 내가 의로워서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구원은 인간 편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 편에 달려 있습니다. 이것을 "혹시"라는 말로서 분명히 해주고 있습니다. 절대 주권이 하나님에게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다시 한번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본문에서 또 한 가지 명심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겨주시는 대상이 누구입니까? 요셉의 남은 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셉이라고 하는 말은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말이라고 했습니다. 요셉의 두 아들 에브라임과 므낫세가 북방 이스라엘 왕국의 중심이 되는 지파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구약 성경에 보면 때때로 북방 이스라엘을 가리켜 "요셉의 집"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암5:6) 너희는 여호와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 염려컨대 저가 불 같이 요셉의 집에 내리사 멸하시리니 벧엘에서 그 불들을 끌 자가 없을까 하노라
여기서 말하는 요셉의 집도 북방 이스라엘의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의 남은 자"라는 말은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남은 자"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는 것이 아니고, 그 가운데 일부 남은 자가 하나님의 긍휼을 입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남은 자가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대적이 쳐들어와서 살육당하고 그 가운데 요행스럽게 살아남은 자를 말하겠습니까? 그런 것은 별 의미가 없습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남은 자의 사상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를 왕상19:18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왕상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 칠천 인을 남기리니 다 무릎을 바알에게 꿇지 아니하고 다 그 입을 바알에게 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남은 자라고 하는 것은 악과 불의에 무릎을 꿇지 않고 하나님의 공의를 세워 나가는 자, 하나님을 찾는 자를 의미합니다. 이러한 남은 자들은 아모스의 메시지를 듣고서 자신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나님을 온전히 섬기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아모스는 여기서 자신의 메시지를 듣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온전히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공의를 행함으로써 진노 중에서라도 긍휼을 입게 되는 남은 자의 반열에 설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토대로 해서 두 가지 정도의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첫째는, 우리의 믿음은 산 믿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죽은 믿음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찾는다고 했지만 저들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을 행하지 못했습니다. 공의를 세워나가지 못했습니다. 사실 우리 인간에게는 언제나 자기의 방법대로 하나님을 공경하려는 악한 근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말씀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치 않으면서 아무리 믿는다 해도 그것은 산 믿음이 아닙니다. 죽은 믿음입니다. 약2:26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또 예수님도 마7:21에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마7:21)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약 1:22에 보면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이 있습니다.
(약1: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도를 행하는 자가 되라고 했습니다. 말씀을 듣고 행치 않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신앙이 살아 있는 신앙이 되어서 그것이 실제적인 행위로 나타날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둘째는,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이 우리에게 있어야겠습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서 늘 인도하시는 대로 순종하며 따르겠다는 신앙입니다. 비록 고난을 받아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요, 그것이 긍극적으로 내게 유익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아는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흔히 원리와 현실 속에 갈등하다가 결국은 현실과 타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손해를 볼 것 같아서, 육신적인 일에 손해가 될 것 같아서 원리를 저버리고 현실과 비진리에 타협해 버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비록 육신적인 일에 손해가 있고 고통이 따른다 할지라도 그리 아니하실지라도의 신앙을 가지고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주께서 모든 것을 기억하시고 이기게 하실 뿐 아니라 우리에게 큰 상급을 주신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글쓴이 : 송수천목사설교카페입니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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