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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4

by 【고동엽】 2022. 4. 21.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4
하나님 의를 실행하는 그리스도인 2
루터의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셨다는 이신칭의 교리가 그리스도인 믿음 생활에 2 가지 어려움을 줍니다.
1. 바울의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셨다는 칭의는(로마3:28)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을 선택하셔서 하나님나라 백성 삼았으니 이제 생명 자유 평화로 살면서 그 구원을 이루어 가라는 의도 입니다.
그러나 루터는 이것을 완전 구원으로 파악했습니다. 지금도 대부분 개신교 목사들은 칭의가 완전구원이라고 설교합니다.
사회 기득 세력인 신앙 엘리트들은 믿음으로 현재 복받고 잘 살고 있고 사후도 보장된다고 하니 나쁠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성직자도 좋고 신도들도 좋다가 그 길이 무난하게 망하는 길인지는 모르고 있습니다.
 
2. 루터는 칭의를 설명하는 과정에서 믿음을 행위와 대립되는 것으로 파악했습니다.
바울은 이제는 법 이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법을 쫓지 말고(이 세대를 쫓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로마3:21 1:17 12:2) 바울 설명은 믿음이 행위와 대립 개념이 아닙니다.
유대교를 비롯한 세계 모든 종교는 인간 가치체계인 법의 완성이 구원이지만 인간 이로움을 위해 세운 가치체계가 오히려 인간을 억압하는 경우가 있으니 법 중심으로 살지 말고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루터는 당시 가톨릭이 행위로 구원받는다면서 면죄부를 판매하는 등 악행을 저지르므로 이러한 행위에 반대하는 것으로 믿음을 제시했습니다. 루터는 이러한 설명을 위해 바울이 강조한 믿음을 이용했습니다.
바울이 믿음을 법과 대립으로 파악한 것을 루터는 믿음을 행위와 대립으로 사용했습니다.
 
 
이러한 결과로 오늘날 그리스도인은 믿음을 행위와 별개로 생각합니다. 믿음이 교회 출석만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압니다.
그래서 예수그리스도 사역과 가르침에 대한 규명이 소홀했습니다. 그리스도인 행위에 대한 연구가 소홀하여 성서 가르침을 따르지 않고 이념 신앙과 도덕주의 산앙이 됐습니다.
이번 대선과 코로나 방역에서 드러났듯이 한국 주류 교회가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며 정부를 공격한 것은 성서에서 믿음을 찾지 않고 믿음을 이념화했기 때문 입니다.
 
 
또한 교회는 세대 가치를 쫓아 번영 업적 성과 성공을 지향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믿음을 행위와는 별개로 인식하여 믿음이 가치화한 결과입니다.
이념 도덕은 바울이 말하는 법입니다. 오늘날 한국 기독교가 믿음이 법과 어떻게 다른지 깨닫지 못합니다.
한국 교회성당은 이념과 도덕을 믿음이라고 우기고 있는 현실입니다.
한국 교회성당은 법 즉 이념과 도덕을 믿음으로 극복하라는 바울 가르침을 1 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예수 계시에서 행위를 찾지 않고 법을 쫓아 즉 이 세대를 쫓아 자의恣意 판단에 의해 올바른 행위를 찾습니다.
한국 교회성당에 기독교도 모르고 믿음도 모르는 성직자가 설교를 하니 이노릇을 어찌합니까?
 
교회를 물화(物化 reification)하다
교회는 사람이 모여 조직된 인간 현실입니다. 교회 모든 행위와 그로인한 문제가 발생하면 구성원들간 이해와 협의를 통해서 해결해 가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사람들 모임으로서 살아있는 유기체가 아니라 물화(物化 reification)되었습니다.
쉽게 말해 교회를 사람들 관계로 파악하지 않고 하나의 사물처럼 다룬다는 뜻 입니다.
그래서 교회 구성원 간에 문제가 발생하면 그 구성원 간 협의를 통해 해결하지 않고 성직자 권력으로 해결합니다. 여타 사회 다른 단체보다 분쟁 해결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이유입니다.
교회가 자기 업적 자랑 자리가 되거나 하나님 뜻이라며 성직자와 몇몇 이해 관계인의 부와 명예 그리고 권력 행사장이 되었습니다.(1)
 
 
교회가 하나님 의를 실행한다면서 교육 의료 언론 봉사 및 수익 사업합니다.
이제 이러한 사업들은 사회에 감동을 주지 못하고 악을 발생합니다.
청년들이 교회를 떠나고 교회가 게토화(고립)되었습니다.
 
그동안 기독교는 믿음을 행위와 별개로 인식하여 루터를 따라 믿음을 이념화 관념화 심령화 내면화 했습니다. 이념화 했다는 말이 한국 주류 교회가 공산화를 막는다며 그것을 믿음이라고 여긴다는 말 입니다.
믿음 내면화에 대한 1 가지 예를 들자면,
신약성서 그리스어 '에이레네'는 히브리어 샬롬과 같은 평화 입니다. 이 용어를 우리 삶보다는 깊은 의미가 있음을 나타내기 위하여(좋게 말해서) 에이레네를 몇 곳을 제외하곤 평화라 번역하지 않고 화평 평안 평강 등으로 번역했습니다.
성서가 그리스도인 삶과는 상관 없고 영혼에만 관계하는 것처럼 번역했습니다.
 
 
모든 사유는 행위를 목표로 합니다.(2))
믿음은 관념론에 비판 자세를 취합니다.(3) 이념 관념 도덕이 믿음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말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대를 쫓지 않고 하늘 계시를 따라 삽니다.(로마12:2)
믿음의 최대 과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떻게 사는가 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인간 스스로 이룬 가치체계인 법으로 통칭되는 문화 종교 이념 사상 교육 법률 도덕 등에 매여 사는 것이 아니라 예수께서 계시하는 하나님 의를 따라 삽니다.
그렇게 하나님 의를 세상에 전합니다.
바울 위대성은 예수께서 초월을 현실로 가져와 그리스도인을 초월에 참여하게 하신 분으로 인식한 최초 사람입니다.
바울은 우리가 예수그리스도와 함께 영원에 참여한다고 말합니다.
오늘에 내일이 담겨 있을 때 오늘 우리는 내일을 삽니다.
 
(에베소서 2장)
6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이사야 선지자는 바빌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으로 귀환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향해 하나님 의를 실행하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방법이 기상천외 합니다.
 
(이사야 42장)
1 내가 붙드는 나의 종, 내 마음에 기뻐하는 자 곧 내가 택한 사람을 보라 내가 나의 영을 그에게 주었은즉 그가 이방에 정의를 베풀리라
2 그는 외치지 아니하며 목소리를 높이지 아니하며 그 소리를 거리에 들리게 하지 아니하며
19 맹인이 누구냐 내 종이 아니냐 누가 내가 보내는 내 사자 같이 못 듣는 자겠느냐 누가 내게 충성된 자 같이 맹인이겠느냐 누가 여호와의 종 같이 맹인이겠느냐
20 네가 많은 것을 볼지라도 유의하지 아니하며 귀가 열려 있을지라도 듣지 아니하는도다
 
하나님 의를 실행하는 하나님 종이 보지 못하는 맹인이고 듣지 못하는 귀머거리 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의를 알리는데,
그는 외치지 않으며 목소리 높이지 않습니다.
그의 소리가 거리에 들리지 않게 합니다.
 
또 놀라운 것은 하나님 의를 전하기 위해 말하는 사람의 혀를 선생의 혀가 아니라 제자의 혀를 준다고 합니다.(이사야50:4)(4)
지독한 역설 입니다.
 
하나님이 하나님 의를 알리는 사람에게 무엇을 요구하는 것일까?
하나님 의를 실행하는 현실에 인간 의가 발현되는 현실을 엄중하게 경고하는 예언 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 의를 알린다면서 하나님 의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의 즉 인간 의를 전하기 때문 입니다. 오늘날 예언자 이사야 경고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알린다며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 대단한 성과를 내는 병원 학교 봉사단체 언론사를 만들며 배제하고 불화하며 싸우고 지랄하고 있습니다.(이보다 더 심한 표현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하나님 의를 전해야 하는 우리 사회 현실은 어떨까요?
 
 
오늘날 한국 능력주의 성과 사회는 능력자가 자기보다 못한 사람을 깔보게 되어 젊은이들에게 앞날 자신들의 모습이 초라해 보이게 만듭니다. 우리나라가 젊은이 자살율이 OECD 국가 중 1 위인 이유 입니다. 이런 사회는 엘리트도 중산층도 파멸 합니다.(대니얼 마코비츠 엘리트 세습) 엘리트도 중산층도 최고를 유지하기위해 자기착취 자기 피로로 망 합니다.(한병도) 기독교는 이러한 사회가 되지 않도록 무능력자인 약자도 인간존엄을 지키며 살 수 있는 세상이 되도록 하나님 의와 사랑을 전하는 사람이어야 하는데,(포도원 품꾼 비유 잃은 양 비유 등) 오히려 기독교가 성과 번영 성공 명예 권력을 챙취하려 열을 내고 있습니다. 포로기 이사야가 한국에 온다면 아마도 그는 기절해 자빠지고 말 것입니다. 기독교에 전하라는 하나님 의는 없고 자기 의 즉 인간 의만 가득하기 때문 입니다.
 
칼 바르트는 교회에 선한 일을 하는 곳에 마땅히 해야할 일에 개혁하는 곳에 악이 창궐한다고 말합니다.(칼 바르트 로마서) 예수께서는 악인에게 하나님을 알리기위한 사역을 하신 게 아니라 깊은 신앙인에게 하나님 열심으로 믿는 사람들에게 그들과는 다른 길을 제시한 것 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제자의 혀를 주셨으니 하나님 알린다고 제발 나대지 말고 일 벌이지 말고 먼저 배우고 그 배운대로 살라는 것이지요.
 
오늘날은 하나님 의를 실행하는 방법이 초기 교회와 같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세계에 예수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에레미아 선지자는 새언약이 이루어지면 세계가 모두 하나님을 안다고 합니다.
 
(예레미야 31장)
34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알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악행을 사하고 다시는 그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나라 확장이라는 말은 성서에 없는 나쁜 말 입니다.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이 확장하지 인간이 확장할 수 없습니다.
유대인 사상가 발터 벤야민은 하나님나라는 길가 작은 돌멩이 하나 옆으로 치우는 것으로 오는데 그것이 그렇게 어려워 인간이 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합니다.
하나님나라 확장한다면서 마치 하나님께서 돈이 없어서 일 못하시는 것처럼 교회 성당이 돈 모으느라 혈안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무슨 전도나 사업으로 하나님 의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 자신 삶으로 하나님 의를 실행합니다. 믿음은 사랑으로 역사役事합니다.(갈5:6) 그리스도인 믿음은 사랑을 하나님과 이웃에게 시위示威demonstration
합니다.
하나님 의를 실행하는 그리스도인 믿음은 그냥 사랑하며 사는 겁니다.
 
1. 피터 버거 토마스 루크만 실재의 사회적 구성 문학과 지성사 2014, 140 - 141p
2. 앙리 베르그송 도덕과 종교의 두 원천 박종원 아카넷 2015, 179, 216p
3. 폴 틸리히 프로테스탄트 시대 이정순 대한기독교서회 2011, 134p
4. 이사야50:4 인데요 우리 성서 번역자들이 이게 좀 말이 안된다 싶어서 '학자의 혀'라고 살짝 비틀었습니다. 공동번역은 아예 한 술 더 떠서 말솜씨를 익혀 주셨다고 합니다. 이 말이 히브리어 '림무드'인데 다른 두 곳(8:16, 54:13 교훈을 받는 자)은 림무드를 제자로 번역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은 개별 단어에 고집하지 말고 문맥과 저자의 사상을 고려해 번역하라고 합니다. 제자 혀로 번역은 이사야가 42:2에서 선택받은 종은 거리에서 소리치지 말며 거리에 소리가 들려서는 안 된다하고 19 절에서 그 종은 맹인이고 귀머거리라고 한 것에 주목한 번역 입니다. 비천한 자기를 부르셨다고 주장하다가 갑자기 자기가 빼어난 사람이라고 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그래서 KJV은 the matured라 하지 않고 the learned로 번역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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